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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22화 (22/120)
  • 22화. 그가 사라진 자리에

    마을은 소란스러웠다. 에드윈 역시 르니예를 찾기 위해 나왔다. 마차까지 없어졌으니 일단 마차로 갈 수 있는 곳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에드윈은 영주 성 앞에서부터, 마차로 갈 수 있는 외진 곳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추리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여기서 또 보는군요, 에드윈 라포어 경.”

    바로 벨데메르였다. 물론 인사는 샤피로가 했다.

    “…….”

    “…….”

    그들은 서로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들은 여전히 아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맞춰 입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제 부인을 찾으러 나오신 겁니까?”

    에드윈은 ‘제 부인’이라는 말을 일부러 강조했다. 하고 나니 유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나.

    벨데메르가 수상하긴 했지만 그건 몰래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굳이 각을 세울 필요는 정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를 보면 이상하게 경쟁심이 생겼다.

    “많이 괜찮아지셨나 보군요. 저번에 쓰러지시는 걸 본 것 같은데.”

    “괜찮다. 걱정은 고맙게 받지. 하지만 지금은 르니예 걱정을 하는 게 맞을 듯싶군.”

    “제가 금방 찾을 겁니다.”

    이번에도 에드윈은 쓸데없이 ‘제가’라는 말을 강조했다.

    “제 부인이니 말입니다.”

    벨데메르가 서늘한 눈으로 에드윈을 쳐다보았다.

    정부 따위는 빠져라, 이런 뜻인가?

    “하긴 자기 아내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기사라면, 검을 놔야지.”

    벨데메르와 에드윈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샤피로가 그들을 말리려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우리 모두 르니예 님을 찾으러 왔으니, 르니예 님 먼저 찾는 게 어떠십니까.”

    그들 앞에는 양 갈래의 길이 놓여 있었다.

    “주인님,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각자 나눠서 찾아보자는 뜻이었다.

    “난 오른쪽으로 가지.”

    “그쪽으로는 길이 없어 가 봤자 헛수고일 겁니다.”

    지리를 잘 모르는 것을 보니, 역시 영지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다. 에드윈은 이 사태가 수습되면 그의 뒤부터 빨리 캐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쎄 모르는 일이지.”

    약간 거만한 편이군. 르니예가 왜 내게 정부가 되어 달라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아.

    벨데메르는 에드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에드윈은 그것이 영 불쾌했다.

    “그럼 라포어 경께서는 왼쪽 길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샤피로가 이 무의미한 신경전을 마치기 위해 손뼉을 짝 쳤다.

    “그럼 다음에 또 뵐 일이 있다면 뵙죠, 라포어 경.”

    르니예 님이 이 광경을 보시면 아주 즐거워하겠군. 샤피로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휙 날리며 돌아섰다.

    “이건 르니예가 어떻게 되면 소원에 큰 차질이 생겨서 하는 일이다.”

    벨데메르는 숲 속으로 들어가며 샤피로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들은 말이었다.

    “예, 주인님.”

    샤피로는 벨데메르에게 왜 르니예를 찾느냐고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당연히 찾아야 하니까. 벨데메르의 말처럼 르니예가 죽으면 소원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벨데메르가 알려 주지 않아도 샤피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걸 벨데메르도 잘 알 텐데 그럼에도 계속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르니예 님이 굉장히 걱정되시나 봅니다.”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걱정하는 마음을 애써 숨기려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 르니예를 걱정했지?”

    정곡을 찔린 벨데메르가 미간을 팍 구겼다. 샤피로는 아까부터 계속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는 대신 말을 돌렸다.

    “주인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라포어 경의 말이 맞는 듯싶습니다.”

    벨데메르가 향한 곳은 외진 숲길이었다. 나무가 빽빽해서 마차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

    “나도 안다, 샤피로.”

    “그럼 양보해 주신 겁니까?”

    “아니. 발품 팔아서 언제 르니예를 찾겠느냐.”

    벨데메르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멈춰 섰다.

    “마법을 쓰실 겁니까?”

    “그래. 르니예를 위한 것이니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

    벨데메르는 제 안에 흐르는 마력에 정신을 집중했다. 르니예가 원하면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 르니예는 자신을 찾길 원할 수도 있으니 잘만 하면…….

    “르니예 님?”

    “뭐?”

    “르니예 님!”

    샤피로의 외침에 벨데메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샤피로?”

    저 멀리서 르니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벨데메르!”

    르니예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열심히 달려왔다. 벨데메르는 마법을 쓰려던 것을 멈추고 르니예에게로 향했다.

    “혹시 나를 찾으러 나온 거예요?”

    남자가 가르쳐 준 길이 외지긴 외졌다. 당연히 아무도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웬걸,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벨데메르와 샤피로가 서 있었다.

    “그럼 여기에 괜히 있겠습니까?”

    샤피로의 비아냥거리는 말투마저도 반가웠다.

    “고마워요, 벨데메르.”

    르니예는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저 때문에 충격을 받아 앓아누웠는데도 찾으러 나오다니.

    이건 좀 감동이었다.

    “소원 때문이었다.”

    벨데메르는 혹여나 르니예가 오해라도 할까 대꾸했다. 르니예는 그 차가운 목소리에도 활짝 웃었다.

    “알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에드윈 라포어 경.”

    샤피로가 에드윈을 찾아왔다. 르니예를 찾았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르니예는 상단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곧 상단에서 그에게 연락이 갈 터였다. 그러나 샤피로는 꼭 얼굴을 보고 알려 주고 싶었다.

    “르니예 님을 찾았습니다.”

    찾았다기보다 만났다고 하는 편이 정확했지만, 뭐 어떤가.

    “그 길에서?”

    “예,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제 주인님께서는 틀리는 법이 없으시지요.”

    “그렇군.”

    은근히 신경을 긁는 말투에 에드윈은 눈썹이 살짝 각도를 달리했다.

    “그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온 겁니까?”

    “예. 라포어 경께서 헛수고를 하고 계실까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샤피로는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수많은 헛수고를 하고 계시지만.”

    수많은 헛수고라는 말은 르니예와 이혼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 이혼하게 될 거라는, 그런 뜻이었다.

    “헛수고?”

    에드윈은 샤피로가 한 말을 되물었다. 수많은 헛수고를 하고 있다고 했지. 그게 무슨 뜻일까.

    2왕자에 대한 조사가 헛수고라는 그런 뜻인가?

    “그보다 옷을 새로 사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내 옷은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좋은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제 주인님과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면 비교당하는 쪽은 언제나 라포어 경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럼 전 이만.”

    샤피로는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에드윈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몸을 틀었다.

    “그보다 시종도 똑같이 기분 나쁜 녀석으로 데리고 다니는군.”

    “마부가 한패였어.”

    “근데 그놈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봐요.”

    “그렇지? 어떻게 영주 성에서 나를 납치할 생각을 했을까?”

    한숨 자고 일어난 르니예는 에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뒷문으로 향했다.

    에드윈에게 벨데메르를 들키고 나서도 어쩐지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 면회도 가야 하는데.”

    르니예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할 일이 많아, 내가.”

    “그거 말고 또 무슨 할 일 있으세요?”

    “응.”

    르니예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요?”

    “착한 일.”

    “……?”

    에니는 걱정했다. 르니예가 어젯밤 머리를 다친 것 같은데 어느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나.

    * * *

    “주인님, 주인님.”

    “시끄럽구나, 샤피로.”

    어제의 여파인가, 벨데메르는 밤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벨데메르!”

    아무리 불러도 샤피로가 나오지 않아 알아서 문을 따고 들어온 르니예는 얼굴이 허옇게 질린 벨데메르를 보고 놀랐다.

    “벨데메르, 왜 이렇게 손이 차요?”

    벨데메르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어제부터 점점 체온이 내려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고, 장작을 많이 때도 벨데메르의 체온은 식어가기만 했다.

    “의원을 불러올게요.”

    “의원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벨데메르가 르니예를 저지했다.

    “이 느낌은…….”

    “벨데메르!”

    “주인님!”

    말을 하다 만 벨데메르의 고개가 옆으로 툭 꺾였다. 그러나 다행히 벨데메르의 숨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다 나 때문이야.”

    “알긴 아시는군요.”

    그의 침대 옆에 나란히 앉아서, 르니예는 샤피로를 노려보았다. 벨데메르의 몸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의 몸속에 생명의 불길이 꺼져가는 것만 같았다.

    르니예는 자신 때문에 벨데메르가 죽게 된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밖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깜빡 잠이 든 르니예는 침대 위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벨데메르? 괜찮아요?”

    벨데메르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벨데메르?”

    그에게 르니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벨데메르는 무엇에 홀린 듯 방 밖으로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샤피로!”

    르니예는 뜨거운 물을 끓이러 간 샤피로를 소리쳐 불렀다.

    “주인님,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 우리 소리가 안 들리는 것 같아.”

    안광이 번뜩이던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벨데메르는 어딘가로 이끌려 갔다. 샤피로와 르니예는 그가 다칠까, 그의 뒤를 따랐다.

    “설마 조각상 쪽으로 가는 건가?”

    벨데메르가 향하는 곳은 광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조각상으로 다가갔다. 벨데메르가 조각상에 손을 뻗자, 앞을 볼 수 없는 돌풍이 불어쳤다.

    “윽.”

    르니예가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벨데메르는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도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상과 그의 피로 만들었다는 블러디 사파이어만이 달빛에 반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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