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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21화 (21/120)

21화. 착하게 살자

납치다.

이건 납치가 분명했다. 수도 없는 많은 경험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어디 보자.”

르니예는 납치가 맞는지 사실 확인차 마부석 쪽 벽을 두드렸다.

똑똑똑-

아무런 대답이 없다.

쾅쾅쾅-

역시나 대답이 없다. 이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으니, 역시 납치가 맞다. 마부가 바뀐 것 같지는 않았는데, 저쪽에 넘어간 건가?

“오랜만이네, 이것도.”

부잣집 딸, 그것도 귀족이 아닌 평민. 납치의 대상이 되기 딱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르니예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납치를 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무서웠다.

“자, 심호흡하는 거야.”

다만 그 경험으로 배운 것이 있다면, 당황해 봐야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르니예는 침착하게 커튼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어두웠고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조심스레 열자 나무 냄새가 훅 끼쳤다.

심하게 덜컹거리는 마차하며, 이 냄새하며, 외진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할 수 있다, 르니예.”

문은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보아하니 마차 문을 자물쇠로 잠근 듯했다. 르니예는 머리핀을 뺐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머리 장식이지만, 빈집털이범 손에 들어가면 문을 따는 훌륭한 열쇠였다. 혹은 빈집털이범 경력이 있는 이를 숙부로 둔 르니예의 손이라든가.

“카밀 숙부, 오늘도 잘 써먹네요, 이 기술.”

르니예는 이를 앙다물며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뺐다. 르니예는 거칠게 덜컹거리는 마차에 아슬하게 매달려 자물쇠를 따기 시작했다.

“윽.”

순간 심하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르니예는 겨드랑이를 세게 부딪쳤다. 간신히 비명을 삼키며 르니예는 자물쇠를 땄다.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후우.”

거친 땅 위를 달리느라 마차 바퀴 소리가 크게 난 덕에,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묻혔다. 르니예는 반쯤 내밀었던 상반신을 다시 마차 안으로 물렸다.

“하나.”

르니예는 숨을 고르고,

“둘.”

자세를 잡았다.

“셋!”

그리고 문을 박찬 다음, 그대로 몸을 던졌다.

“아윽!”

마차 밖으로 떨어진 르니예는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뒤에 뭐야?”

“마차 문이 열렸는데?”

거친 땅도,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도 문이 덜렁이는 것을 숨겨 주지 못했다.

“마차 문이 열렸다고? 그럼 그 여자가 도망쳤다는 거잖아!”

욕설이 섞인 고함이 들린 동시에 마차가 멈춰 섰다.

“어디야? 어디로 갔어?”

“저기, 저기 있다.”

긁히고 부딪쳐 아픈 것보다 도망치는 것이 먼저였다. 르니예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일어나 더 깊은 숲 속으로 도망쳤다.

“하아, 하아.”

주변을 둘러보던 르니예는 바위가 불쑥 튀어나와 있는 그 아래로 얼른 몸을 숨겼다.

“여기 어디로 갔는데.”

“잘 찾아봐.”

목소리로 보아 사람은 셋. 그중 한 명은 르니예의 마부가 맞았다. 르니예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서 숨을 죽이고, 귀는 열었다.

“놓치면 우리 다 죽는 거야. 알아들어?”

남자들은 계속해서 르니예의 주변을 맴돌았다. 르니예는 그들이 가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납치를 당했을 때는, 에드윈이 구해 주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 수도로 올라가는 길에 르니예를 발견하고 도와준 것이었다.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을 상대하고는,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하고 손 내밀었다. 그 투박하고 커다란 손에 르니예는 완전히 반해 버렸다.

‘저는 레이디가 아닌데요.’

‘그렇습니까. 제 눈에는 레이디처럼 보여서요.’

에드윈은 르니예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고, 이름도 알려 주지 않은 채 가 버렸다. 그리고 사 년 뒤, 르니예는 정략결혼 상대로 에드윈을 만났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운명이 아닐 수 없다고. 하지만 악연이었던 모양이다.

“저거, 그 여자 신발 아니야?”

“맞네. 저쪽으로 도망쳤나 봐.”

남자들이 신발 쪽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벗겨진 신발 덕에 살았다. 르니예는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으.”

팔뚝에서 피가 흘렀다. 르니예는 치마 밑단을 쭉 찢어서 팔뚝에 둘둘 감았다. 오늘 에드윈은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벨데메르도 마찬가지겠지. 남편이 둘이나 있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상관없다.

“일어나 볼까.”

르니예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일어섰다. 왼쪽 발목이 뻐근하게 아팠지만, 걷는 데는 문제 없었다.

그러면 된 것이다.

“갈 수 있어. 갈 수 있어.”

지금 르니예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르니예 본인뿐이었다. 에드윈도, 벨데메르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뿐.

르니예는 스스로에게 의지해서 정처 없이 걸었다.

도대체 숲의 끝은 어디일까?

“저기, 저기요.”

“헉!”

르니예는 갑자기 들린 남자 목소리에 놀랐다. 납치범인가?

“괜찮아요?”

목소리가 달랐다.

“저 언니 팔을 다쳤나 봐.”

그의 뒤에 숨어 있던 여자아이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르니예는 그제야 안심했다.

“도와주세요, 길을 잃었어요.”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

에니는 상단 정문 앞에서 르니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얘기가 길어져도 그렇지, 너무 늦으시잖아.”

에니는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영주 성으로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마차의 행방을 물었다.

“정말 마차가 나갔나요?”

“그렇다니까요. 분명 봤어요. 앞뒤로 붉은색 차양 달린 마차 아닙니까?”

“맞아요.”

마차는 아까 나갔다는 건데, 그럼 대체 르니예는 어디에 있지?

광장 주변을 한 바퀴 돈 에니는 혹시나 중간에 엇갈렸을까 하여 다시 상단으로 향했다.

“작은 마님 돌아오셨어요?”

“아니, 아직 안 오셨는데.”

없다. 상단에도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벨데메르의 집일까?

에니는 바로 상단을 뛰어나가 벨데메르의 집 문을 부술 듯 두드렸다.

“늦은 시간에 예의도 없군.”

샤피로가 문을 열어 주자 에니는 강한 힘으로 그를 밀치고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떠밀린 샤피로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에니를 따라 들어왔다.

“대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작은 마, 아니, 그, 르니예 여기 왔어?”

“아니요, 오시지 않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건 가출 아니면 납치인데, 이 나이에 가출할 리는 없으니 납치라는 거다.

“진짜 안 왔어? 정말로?”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습니까?”

“젠장!”

에니는 주먹을 불끈 쥐며 욕을 읊조렸다. 얼른 사람을 풀어야 한다. 에니가 다시 다급하게 집을 나서려는 순간, 계단에서 벨데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밤에 소란을 일으키며 르니예를 찾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르니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영주 성에 가셨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에니의 얼굴이 근심으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납치를 당하신 것 같아요. 사람을 풀어서 찾아야겠어요.”

에니는 말을 하다 말고 나가 버렸다. 벨데메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르니예가 납치를 당해? 감히 누가 이 벨데메르의 아내를 납치한단 말인가.

“주인님,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몸도 안 좋으신데 쉬고 계십시오.”

“그 정도는 아니다, 샤피로.”

벨데메르는 샤피로에게 나갈 채비를 시키며, 르니예를 찾으러 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소원이 이뤄지지 않은 채 르니예가 죽으면 곤란해지니까 찾는 것뿐이다.”

샤피로가 그 이유를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르니예는 낯선 부녀를 따라 그들의 산속 오두막으로 향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에서 약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여보, 나예요.”

남자가 문에 대고 속삭이자 이내 문이 열렸다. 여자아이보다 작은 남자아이가 열린 문으로 쏜살같이 뛰어나와 제 아비에게 안겼다.

“아빠!”

그러더니 이번엔 르니예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저 누나는 누구야?”

“저 누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야.”

남자가 르니예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추하지만 일단 들어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르니예는 네 사람이 함께 살기에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르니예의 상처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어쩌다 이렇게 다치셨어요? 예쁜 얼굴에 흉지겠네. 어머, 신발도 잃어버렸어요?”

친절한 부부였다. 그들은 없는 살림에 르니예에게 음식까지 내어 주려고 했다.

“아뇨, 괜찮아요. 실은 납치를 당했다가 도망쳤거든요. 마을로 내려가는 길만 가르쳐 주세요.”

르니예는 그들이 건네는 물만 받아마셨다.

“좀 돌아가기는 하지만, 마을까지 들키지 않고 가는 길을 압니다.”

남자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도 실은 도망쳐 와 사는 처지라서.”

부부가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콜론 상단에 빚을 좀 졌거든요. 이자가 너무 많이 불어나서 갚지 못하고 이렇게 숨어 삽니다.”

숲 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니 세간살이가 넉넉지 않은 것이다. 르니예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방금 받아 마신 물이 체할 것 같았다.

“정말 신발 없어도 되겠어요?”

“네,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기어코 신발까지 주려는 그들을 만류하며 르니예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 길로 쭉 가면 됩니다. 아니지, 내가 그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마을 입구만 가도 저 찾는 사람들이 나와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르니예는 그들과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고마울수록 마음은 불편했다. 심성 고운 이들이 이리 힘들게 사는 것이 다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에드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부인께서는 늘 외면하고 산다’고 했던 그 말이.

콜론의 방식을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 그래, 아버지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넘겼다.

그러나 과연 앞으로도 그렇게 넘길 수 있을까?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잊힐까?

“그럴 리가 있냐.”

르니예는 절뚝거리면서 혼잣말을 했다.

“어쩌면, 이래서 나를 다시 살려 주신 걸지도 모르지.”

죽기 직전에 착하게 산다고 빌었으니까, 착하게 살라고 기회를 주신 걸지도.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되살려 주지는 않으셨을 거 아냐?

“뭐야, 나 진짜로 착하게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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