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세금은 제때 내자
최대한 빨리 이혼할 방법이 있다.
에밀리의 결혼 때문에 이혼을 망설인다고 했지? 그렇다면 에밀리를 빨리 결혼시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이제 갓 스물.
막 스무 살짜리가 무슨 결혼이란 말인가? 남자는 제대로 된 놈인가?
르니예는 언니의 마음으로, 에밀리에게 사람을 붙였다. 좋은 사람이면 결혼시키겠지만, 나쁜 놈이라면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릴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든 에드윈이 더는 에밀리 결혼 핑계를 대고 이혼을 늦추진 못할 것이다.
“제 얼굴 더 보기 싫은 거, 이해해요.”
르니예는 풀이 죽은 채로 일어섰다.
“그래도 약은 꼭 먹어요.”
르니예는 대답 없는 벨데메르를 잠시 쳐다보다가 문을 닫고 나섰다. 샤피로의 날 선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나가는데, 담장 옆 시들어가는 장미꽃이 보였다.
“언제 물 줬더라?”
기운 없이 축 처진 이파리가 꼭 자기 꼴이었다. 르니예는 양동이로 물을 떠다가 장미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
낑낑거리며 양동이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르니예를, 벨데메르가 창가에서 지켜보았다.
시든 잎을 떼고, 채 못다 핀 꽃송이를 잘라내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정성스럽다니. 가식적이고, 위선적이지.
“그런가?”
벨데메르가 눈썹을 찌푸렸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가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벨데메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상이 아닌 건 확실했다.
“하, 내가 아프긴 한가 보군.”
* * *
르니예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상단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상단 정문이 보일 즈음한 거리부터 소란스러움이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
그리고 소란의 중심에는 포승줄에 묶인 채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콜론이 있었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르니예는 콜론에게 다가가 그를 잡아가지 못하게 잡고 늘어졌다.
“저리 비키시오.”
병사 하나가 르니예를 거칠게 밀쳤다. 르니예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자 콜론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르니예! 괜찮으냐? 응? 괜찮아?”
“더 방해하면 공무 집행 방해로 함께 체포하겠습니다.”
“그래. 따라오지 마라, 르니예. 별일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마라.”
르니예는 주섬주섬 바닥에서 일어나 수송 마차에 태워지는 콜론을 바라만 보았다. 죄인처럼 잡혀가는데 별일 아니라니.
“아버지!”
마차는 이내 출발했다. 마차를 따라가 봐야 소용없는 일, 르니예는 에니의 부축을 받으며 상단으로 들어왔다.
“카밀 숙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아버지를 잡아가는 거죠?”
카밀을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정리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탈세 혐의다.”
“탈세 혐의요?”
르니예는 설마 하며 물었다.
“탈세했어요?”
카밀은 대답이 없었다. 르니예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읽었다.
“얼마나? 금액이 커요?”
“우리가 영주에게 그동안 바친 돈이 얼마인데, 영주께서 이러실 수는 없다.”
르니예의 질문에 카밀은 딴소리로 대꾸했다. 금액이 많은가 보다.
“뭘 더 원하시는 건가요?”
“글쎄, 모르겠구나. 영주를 만나 뵈어야지. 라포어 경이랑 같이 가서 만나 보렴, 르니예. 그럼 말이 더 잘 통할 거다.”
* * *
상단이 이 사달이 나기 전, 에드윈의 서재로 프리야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딜에게 시켰는데.”
“제가 중간에 가로챘어요. 작은 주인님 서재에 계실 때 특히 멋있잖아요.”
프리야가 싱긋 웃으며 책상 위로 찻잔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저한테 물어보실 것도 있죠?”
“뭘 말이지?”
모른 척하기는. 프리야는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다.
“저 미행하셨잖아요.”
에드윈이 먼저 말을 꺼낼 줄 알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가도 에드윈은 프리야를 찾지 않았다.
“그래, 궁금하군. 왜 부인의 뒤를 밟았지?”
“작은 마님이 아침에 뒷문으로 몰래 들어오시는 걸, 몇 번이나 봤어요.”
에드윈의 의심을 받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의외로 집요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 한번 의심을 시작하면 프리야가 가진 비밀을 탈탈 털어 버릴 테니.
“저번에 작은 주인님 옷이라고 선물을 사 오셨더라고요. 그런데 상자를 열어 보니 같은 셔츠만 두 벌이었어요.”
여기까지는 진짜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다시 오시더니 옷을 잘못 사 왔다면서 도로 가져가시더라고요. 다른 쪽에 바지 두 개가 들어 있지 않았다면 그걸 어떻게 아셨겠어요?”
이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프리야는 에드윈의 의심을 누그러트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프리야는 눈꼬리를 툭 내리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너무 의심이 가서…….”
“그래서 미행했나? 미행해서 어쩌려고 그랬지?”
“어쩌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확인만 해 보려고 했어요. 저는 그냥, 작은 주인님한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프리야의 눈가로 거짓 눈물이 고였다. 프리야는 자연스럽게 에드윈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너는 도움이 돼.”
에드윈은 프리야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도련님!”
에드윈이 프리야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는데, 바딜이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도련님, 상단으로 영주께서 병사들을 보내셨습니다. 밖이 지금 난장판이에요.”
예상치 못한 일에 에드윈은 황급히 상단으로 나갔다.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와중, 콜론이 두 병사에게 끌려 나왔다.
“도대체 뭡니까?”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영장을 에드윈에게 넘겨줬다.
“탈세 혐의요.”
영장에 적힌 탈세 금액이 어마어마했다. 카밀에게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드윈은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다시 서재로 들어왔다.
“장부에서는 못 봤는데.”
대체 어떻게 탈세를 한 거지?
그가 고민하는 중, 짧고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르니예가 들어왔다.
“에드윈, 혹시 당신이 신고했어요?”
탈세 혐의라는 말을 듣자마자 에드윈이 장부를 보던 것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에드윈은 서재에 가득 쌓인 장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당장 증명해 보일 수도 있어요. 이 장부에서는 탈세한 혐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에드윈에게 준 것은 이중장부였나 보다. 그렇지, 아버지가 에드윈에게 진짜 장부를 줄 리가 없지.
“그럼 지금 나랑 같이 영주께 가 줄 수 있어요? 아버지의 선처를 빌러 가려고요.”
“영장을 보니, 탈세 금액이 꽤 크더군요.”
“낼 수 있어요. 낸다고 말씀드리면 돼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르니예와 달리, 에드윈은 의자에서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탈세한 금액을 내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에 값을 치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죠.”
르니예는 순간 얼이 빠졌다. 선처를 빌어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콜론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그런 뜻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감옥에 가도 괜찮다는 거예요?”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그게 죗값이라는 겁니다.”
르니예는 기가 찼다. 단전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열로 눈앞이 하얗게 터지는 것만 같았다. 에드윈이 강직한 편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했다.
아무리 콜론과 신념이며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해도, 가족으로 산 지가 삼 년이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말이, 죗값을 치러야 해?
“탈세한 돈으로 호의호식한 게 누구였죠, 에드윈?”
“그게 나란 말입니까?”
“그럼 아니에요?”
르니예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에밀리가 다니는 아카데미 학비, 생활비, 어머님 약값이며 라포어 저택에 들어가는 돈까지, 전부 거기서 나온 건데.”
“그 대가로 부인께서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잊지 않았어요. 그 대가로 에드윈 또한 우리 가족이 되었다는 건 잊은 모양이네요?”
르니예는 화가 났다. 그녀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가 싫었으면 애초에 결혼을 왜 했어요? 용병이라도 하면서 돈을 벌지.”
“그건 어머니께서.”
“어머니 핑계는 그만 대고 좀 솔직해져 봐요. 용병으로 일하는 거 비밀로 하고 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냥 자존심 상해서 하기 싫었던 거면서.”
르니예는 입 안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받을 건 뒤로 다 받아 놓고 앞으로는 깨끗한 척, 청렴한 척.”
울분이 서린 갈색 눈동자가 에드윈을 원망하며 쳐다보았다.
“비겁하잖아요, 에드윈.”
르니예는 더 이상 에드윈을 설득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에드윈이 가지 않는다면 혼자라도 갈 것이다.
르니예는 그길로 바로 영주 성으로 들어갔다.
“영주님, 탈세한 금액을 전부 지급하겠습니다. 그에 대한 이자도 낼게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네. 어떻게 매번 자네 아버지만 선처해 주나?”
언제 선처해 준 적이 있던가? 뇌물에 대한 대가로 눈을 감아 준 것뿐이면서.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시게.”
빌고 또 빈 것에 비해서 결과는 좋지 못했다. 영주는 매우 단호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버지를 길게 잡아두지는 않을 거라는 그 뉘앙스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르니예는 마차에 올라탔다. 아버지 생각을 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탈세를 왜 해서.”
르니예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서야, 르니예는 깨달았다.
“……여기는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
마차가 아주 외딴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 이거 그건데.”
르니예는 느낌과 경험으로 알아맞혔다.
“납친데,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