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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9화 (19/120)
  • 19화. 점점 멀어지는 이혼

    “아이, 뭐야. 그냥 바람피우는 거였어?”

    프리야는 뒷문을 나설 즈음해서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엔 바딜인 줄 알았는데, 에드윈인 것을 확인하고서는 조금 놀랐다.

    남의 뒤 같은 건 밟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쨌든 그를 피해 숨었다. 다행히 제 뒤가 밟히는 줄도 모르고 신나서 가는 르니예 덕에 에드윈이 저를 찾지는 않았다.

    그렇게 르니예의 뒤를 밟는 에드윈의 뒤를 밟아 프리야가 도착한 곳은 유령 들린 집이었다.

    콜론의 골칫거리로 유명한 그 집.

    프리야는 르니예가 그곳에 소원을 이뤄 주는 조각상이나, 아니면 그에 관련된 무엇을 숨겨 놓았으리라 기대했다.

    “남자를 숨겨 놨다니.”

    그런데 겨우 남자라니! 프리야의 기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흥미롭기는 했다. 원래 남의 치정이 가장 재미있는 법 아니겠나.

    그것도 에드윈만 바라보는 줄 알았던 르니예가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 그리고 그걸 에드윈에게 들키다니!

    “의외네. 바보인 줄 알았더니, 남자도 숨겨 놓을 줄 알고.”

    * * *

    벨데메르에게 쫓겨난 르니예는 에드윈을 찾아갔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벨데메르의 존재는 이미 드러났다.

    에드윈이 그저 바람이라고만 여기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얘기 좀 해요, 에드윈.”

    에드윈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르니예를 맞이했다. 부인의 외도를 목격한 것 같지 않게 차분한 태도에 르니예는 또 입이 썼다.

    “자, 이제 내가 이혼하려는 이유를 알았으니 얼른 이혼해 주면 안 될까요? 이혼을 한다고 해도, 에밀리의 결혼에는 최선을 다할게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습니다, 부인.”

    에드윈은 아주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르니예가 바람을 피울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르니예가 한결같이 저만 바라보고 있을 거라 내심 믿고 있었던가.

    늘 이혼을 바랐다. 팔려 온 입장에서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니 르니예가 먼저 이혼하자고 해 주기를.

    “에밀리가 결혼할 때까지 제 부인으로 있어 주셔야겠습니다.”

    “약혼 때까지만이라고 했잖아요.”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딱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그리 속 시원하지도 않았다.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아니더라도 웃음 정도는 나야 할 텐데 말이다.

    아, 웃음이 나긴 났다. 헛웃음이. 어떻게 사람 마음이 그리 쉽게 바뀌지?

    “그 남자 이름이 뭡니까?”

    “그걸 에드윈이 알아서 뭐 하게요. 그러지 말고 우리 좋게 끝냅시다.”

    “누군지는 알고 만나는 겁니까?”

    나 누구랑 이야기하니. 벽이랑 대화하니.

    르니예는 대답 대신 들리는 질문에 한숨을 쉬었다.

    “귀족인 것 같은데, 낯이 익기도 합니다.”

    광장에서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보아서 그럴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조각상부터 치웠어야 했는데.

    “뭐 하는 사람입니까?”

    에드윈의 눈동자가 의심으로 날카로워졌다. 남자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낯도 익었다.

    그런 미남이 영지 내에 있었다면, 아무리 소문에 어두운 에드윈이라도 몰랐을 리 없을 테니, 영지 사람은 아니란 뜻이다.

    그럼 수도에서 본 사람이란 뜻인데, 수도에서 내려온 의문의 남자가 르니예를 유혹했다?

    “그냥, 뭐,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러는 사람이에요.”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이었다가 잠시 사람이 되어 남편 노릇을 하고 있는 대마법사라고 할 수 없으니, 르니예는 대충 둘러댔다.

    그게 에드윈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줄도 모르고.

    “딱히 하는 일은 없고. 아까 듣자 하니 부인께서 상단에 고용되어 일하는 줄 알고 있던데 맞습니까?”

    “네, 그랬어요. 언제까지 캐물을 거예요? 그렇게 질문 많이 할 거면, 내 질문도 하나쯤은 대답해 주는 게 어때요?”

    르니예가 답답해하든 말든 에드윈은 생각에 빠졌다. 르니예가 콜론 상단에서 일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접근했다면?

    그러니까 그 남자가 2왕자의 심복 중 하나이고, 르니예를 이용해 불법 무기와 자금을 수도로 올려보내고 있다면……!

    “이혼은 안 됩니다.”

    “대체 왜요?”

    르니예는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삼 년 동안 그렇게 냉대를 하더니, 이제 와 이혼은 안 된다고?

    위자료를 넉넉히 준다고 해도 싫대, 여동생 결혼에 지장 가지 않게 한다고 해도 싫대,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다.

    “그럼 오늘부터 이혼하는 날까지 나랑 한방에서 자요.”

    이럴 수는 없겠지. 에드윈에게는 프리야가 있으니까. 프리야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는데 나랑 같은 침대를 쓰겠어?

    “원하신다면.”

    “네?”

    르니예는 알지 못했다. 에드윈에게 프리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는 것을.

    “어, 그건 안 되는데…….”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한 제안이었다. 갑자기 수락을 할 줄이야.

    “정 그렇게 나와 이혼하고 싶다면, 소송을 거십시오.”

    르니예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냥 이혼 신청을 해도 귀족인 에드윈이 동의하지 않으면 재판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벨데메르라는 약점까지 생겼으니, 상황이 더 불리해졌다.

    “에드윈, 정말 이럴 거예요?”

    “그럴 겁니다, 에밀리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콜론 상단과 2왕자가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조사를 끝낼 때까지는 이혼해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좀 멀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부인. 아무리 정부라고 해도 신분이 확실한 남자를 만나지 그러십니까.”

    르니예는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그러는 에드윈이나 프리야를 똑바로 보라고. 하지만 아쉬운 쪽이 참는 법.

    르니예는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시무룩 풀이 죽어 나왔다.

    “작은 마님, 괜찮으세요?”

    에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르니예는 기운 없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영지에서 제일 용한 의원이 누구지?”

    “왜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 나 말고.”

    르니예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벨데메르가 뒷목을 잡고 쓰러져서 못 일어나고 있어.”

    벨데메르는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좋은 남편이 되겠다며 했던 짓들이 떠오르자 뒷덜미가 뻐근했다.

    난생처음으로 요리도 해 보고, 다른 사람과 침대도 공유하고, 입도 맞추고…….

    첫 입맞춤을 사기당해 빼앗기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샤피로.”

    “예, 주인님.”

    “그 책들, 전부 불태워라.”

    샤피로는 좋은 남편과 행복한 결혼 생활에 관련된 책을 전부 가져다 아래층 커다란 벽난로에 넣었다.

    “샤피로.”

    그때 르니예가 약을 한 다발 들고서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뻔뻔하시군요, 르니예 님. 여기를 또 오시다니.”

    “약을 가져왔어.”

    죄인이 된 르니예는 어색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오셨으니 주인님께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응, 그래, 고마워.”

    샤피로는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다시 앙칼져 있었다. 르니예는 입 안 살을 깍 깨물었다.

    “제가 알기로 왕국법에서 중혼은 불법이라죠.”

    무슨 사역마가 법도 알아? 르니예는 흠칫 놀랐다.

    “결혼식까지 했으니 엄연한 사기 결혼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걸리면 징역이 10년이라던데.”

    “……그래서 신고할 거야?”

    “르니예 님께서 이혼을 서두르지 않고 미적거리시면 그렇게 할 겁니다.”

    샤피로는 아량을 베푼다는 듯 말했다.

    “주인님께 가장 중요한 건 남은 소원을 빨리 처리하고 봉인을 푸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봐드리는 겁니다.”

    샤피로가 벨데메르의 방문을 열어 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운이 좋으시네요. 제 마음 같았으면 벌써 르니예 님은 감옥에 계실 텐데.”

    저거 분명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아쉬운 쪽은 르니예이기 때문에, 르니예는 못 들은 척 벨데메르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벨데메르,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있겠나?”

    르니예는 쭈뼛거리며 벨데메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말 미안해요, 벨데메르.”

    “뭐 하나만 묻지.”

    벨데메르가 드디어 고개를 돌려 르니예를 쳐다보았다.

    “정략결혼이었나?”

    물어보고서 벨데메르는 바로 후회했다. 정략결혼이면,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정략결혼이라서 남편과는 그저 이름만 부부인 사이이고 저에게 진심으로 반해 그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면, 뭐가 달라지나?

    그 질문으로 그저 스스로가 더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네. 아버지가 저를 귀족으로 만들고 싶어 했어요.”

    르니예는 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벨데메르에게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라포어 가문에 빚이 많았거든요. 그 빚을 갚아 주는 대신 저랑 결혼하는 조건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그대는 귀족이 됐군.”

    “네.”

    사이가 안 좋은 건 맞는군. 이름뿐인 부부인 것도 맞고.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이야기를 들으며 구질구질했던 기분이 아주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그럼 나 때문에 이혼을 하는 건가?”

    “벨데메르 덕분에 이혼하는 거죠.”

    벨데메르가 첫 번째로 빈 소원을 개떡, 아니 이상하게 들어주는 바람에. 그리고 두 번째 소원에서 그가 너무 다정하게 군 덕분에.

    에드윈과 이혼을 결심하는 데 벨데메르는 큰 역할을 했다. 벨데메르가 다정하게 대해 줄 때마다 르니예는 자꾸만 깨달았다.

    에드윈이 얼마나 저를 차갑게 대했는지, 르니예가 얼마나 본인을 낮추고 있었는지.

    그리고 진정 깨달았다. 르니예는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최대한 빨리 이혼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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