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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8화 (18/120)
  • 18화. 꼬리가 길면 밟힌다

    르니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벨데메르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아침저녁으로 몰래 오가는 길이 이렇게 즐거워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벨데메르에게 남편이 되어 달라고 처음 소원을 빌었을 때만 해도 세상이 끝나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그때 소원을 빌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르니예는 남들이 말하는 그 달콤하고 서로 눈만 봐도 화르륵 불타오르는 ‘신혼’을 즐기고 있었다.

    비록 이 행복이 시한부라고 해도 말이다.

    “아, 향기 좋다.”

    르니예의 기분은 담장을 따라 피어 있는 장미 꽃잎처럼 분홍색이었다.

    “르니예 님, 오셨습니까.”

    “응. 벨데메르는 주방에? 아니면 위층에?”

    르니예가 그렇게 물었을 때 벨데메르는 이 층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르니예는 벨데메르가 내려오고 있는 계단을 쪼르르 올라갔다.

    “내가 내려가는 중이었으니, 올라올 필요 없었을 텐데.”

    “조금이라도 얼른 벨데메르를 보고 싶어서요.”

    그 대답을 듣는 샤피로의 속이 메스껍든지 말든지 르니예와 벨데메르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그 두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

    샤피로는 생각했다.

    작작 좀 했으면, 이라고.

    그러나 샤피로는 충실한 종으로 그런 감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덕분에 르니예는 벨데메르와 인사라고 하기에 약간 짙은 입맞춤을 즐겼다.

    그래, 어차피 사라질 행복이라면 마음껏 즐기자.

    에드윈과 이혼하면 벨데메르와도 끝이다. 그러면 르니예에게 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 결혼을 또 할 생각도 없으니, 이런 신혼 생활은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왜 그렇게 웃지?”

    “좋아서요.”

    벨데메르가 르니예를 따라 미소 지으며 르니예의 작은 코끝을 톡 건드렸다. 르니예는 그대로 벨데메르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서 내려가야 저녁을 먹지.”

    “네, 얼른 내려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단 중간에서 부둥켜안고 있었다. 샤피로는 귀가 밝은 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좋은 청력을 원망했다.

    저런 대화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쩌겠나, 이미 들은 것을.

    “예, 음식이 식기 전에 내려오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샤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식사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밖에서 낯선 인기척이 나기 전까지는.

    “주인님, 밖에 누군가 온 것 같습니다.”

    르니예가 들어오고 나서 빗장을 걸어 잠갔는데 인기척이 난다. 누군가 담을 넘어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샤피로의 눈매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문으로 다가가, 순식간에 활짝 열어젖혔다.

    “……아.”

    그러자 안을 염탐하듯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얼빠진 얼굴로 샤피로를 마주했다.

    “누구십니까.”

    행색을 보아하니 도둑은 아닌 듯싶어 샤피로는 예를 갖추고 물어보았다. 그사이 벨데메르와 르니예는 계단을 내려왔다.

    “그게, 이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따라서 왔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온 사람을 찾으시려면 정식으로 문을 두드리시고 들어오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미안합니다. 제 부인이 이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아서요.”

    “부인이요?”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등 뒤로 감추었다. 그러나 르니예는 누가 들어왔는지 궁금해 그의 등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리고 마주쳤다.

    “예, 제 부인이…….”

    “……!”

    “저기 있군요.”

    자신을 뒤따라온 에드윈과.

    “그러니까 당신 부인이 저 뒤에 있는 저분이란 말씀이시군요.”

    말문이 막힌 채 얼음처럼 굳어 있는 르니예 대신 샤피로가 상황 정리에 나섰다.

    “에드윈 라포어라고 합니다.”

    “에드윈?”

    벨데메르가 미간을 구기며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저를 아십니까?”

    “르니예 님과 상단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인 에드윈은 알고 있습니다만.”

    “상단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에드윈이 집 안으로 한 발 더 들어왔다.

    “게다가 부인께서는 상단에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오자, 실내의 밝은 빛에 그의 옷차림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옷이.”

    “비슷하군요.”

    벨데메르와 에드윈은 서로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셔츠부터 바지, 신발에 이르기까지 거의 같은 옷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다.

    “옷은 항상 제 부인이 사다 주고는 했습니다.”

    “그게, 르니예란 말이군.”

    르니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르니예의 한결같은 취향 때문이었다. 에드윈은 빳빳한 흰 셔츠와 짙은 남색이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아니, 실은 그런 스타일의 남성복이 르니예의 취향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벨데메르에게도, 에드윈에게도, 그런 스타일의 옷을 사다 주게 된 것이다. 이 둘이 마주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아니지, 그럴 일이 없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르니예는 울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기절을 하고 싶었다.

    그러고서 영영 깨어나지 않는다면 더 좋고.

    “결혼한 지 얼마나 됐지?”

    “이제 삼 년인가요, 부인?”

    르니예는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갈피를 잡지 못한 눈동자가 지진 난 듯 떨리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부인이라, 하.”

    벨데메르는 기가 찬 듯 웃었다. 그에 비해 에드윈은 차분했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초대를 받지 않고 왔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부인, 남은 이야기는 집에서 합시다.”

    에드윈은 벨데메르에게 가볍게 눈웃음을 하고는 그대로 뒤돌아 나가 버렸다. 르니예는 저도 모르게 에드윈을 따라나섰다.

    “에드윈, 잠깐만요. 내 말 좀 들어 봐요.”

    “바람을 피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부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에드윈이 르니예를 돌아보았다.

    “에드윈도 프리야랑 바람피웠잖아요.”

    “몇 번이나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프리야에게 선물하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부인?”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에드윈이 준 게 분명해 보이는 선물을 봤다. 그래, 선물을 사 주지 않았다 치더라도 바람피운 건 맞지 않나.

    “이제 그만 인정해요, 에드윈. 바람피운 거 맞잖아요.”

    “지금 여기서 사실 여부를 따지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에드윈은 아직 열려 있는 문을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

    “부인께서 수습하셔야 할 일도 있는 것 같고.”

    그러자마자 샤피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주인님!”

    벨데메르가 뒷목을 잡고 쓰러진 것이다. 르니예는 울상을 지으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벨데메르!”

    “저리 비키세요. 지금 주인님께서 누구 때문에 쓰러지셨는데!”

    샤피로가 르니예를 향해서 으르렁거렸다.

    “주인님께서 깨어나시면 각오해야 하실 겁니다, 르니예 님.”

    르니예는 죽을 맛이었다. 벨데메르에게 소원을 빌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던 게 무색했다.

    소원을 빌지 않았으면 어떻긴 어떻겠나, 당연히 골치 아픈 일도 생기지 않고 편안했겠지.

    르니예는 진심으로, 좀 울고 싶었다.

    세컨드라니, 내가 세컨드라니!

    벨데메르는 이처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었다.

    어떻게 결혼을 했으면서 안 했다고 속일 수가 있나. 아니, 그보다 자신을 정부로 숨겨두고 즐기려고 했던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그 남자와 똑같은 옷을 입혀 놓았다.

    그 남자의 대용품으로 쓸 생각이었나? 어떻게 나를, 감히 나를!

    그 생각을 하자 목 뒤가 또다시 뻐근했다.

    “이름은 르니예가 맞는 겁니까?”

    “응.”

    르니예는 벨데메르 앞에 죄인처럼 앉아서 샤피로의 취조를 받아야 했다.

    “그 상단에 다니는 것은 맞고요?”

    “사실, 그 상단이 우리 아버지 상단이야.”

    샤피로는 어이가 없고 할 말이 없어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저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아라 어째라 했던 것이 두 집 살림을 들키지 않으려는 수작이었군요.”

    “그건 아니야.”

    아주 약간 그런 이유가 없지는 않았지만.

    “정말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속이려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속이려고 했다고 하겠나.

    “이혼하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벨데메르.”

    “잠깐, 그럼 결혼식은 뭐였지?”

    “그건, 그러니까, 제 두 번째 결혼식이었죠.”

    벨데메르는 한숨을 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오, 어떤 좋은 소식일까요, 르니예 님? 정말 기대되는군요.”

    샤피로가 옆에서 얄밉게 이죽거렸다. 그러나 르니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이혼을 하면, 소원이 이뤄지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남편이 아니라 정부라서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군.”

    정부라니.

    벨데메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 중 오늘의 일이 가장 황당하고 충격적이었다. 속은 것도 모자라 정부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니.

    “……어쨌든 이혼할 테고 그러면 소원이 이뤄질 테니까, 벨데메르도 더는 남편 노릇 하지 않아도 돼요.”

    르니예는 시무룩 풀이 죽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대꾸했다.

    “지금은 그대를 보고 싶지 않군, 르니예. 이만 그대의 조강지처에게 가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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