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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7화 (17/120)
  • 17화. 에드윈의 사정

    “……앗, 죄송해요.”

    정신을 차린 르니예가 후다닥 떨어졌다. 미쳤지, 미쳤어.

    충동적으로 벨데메르에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어둑어둑 흐린 날에도 활짝 핀 장미가 너무 예뻐서, 습기에 녹진하게 섞여든 장미 향이 정신을 어지럽혀서, 저를 위해 뭐든 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벨데메르가 너무 멋있어서.

    르니예는 순간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을 삼키고야 말았다.

    아마 그 마법 같은 순간을 겪었다면 성녀님이었더라도 그에게 키스했으리라.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르니예는 자신이 큰 사고를 쳤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건,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르니예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정말.”

    벨데메르는 그런 르니예의 턱을 들어 올려 저를 보게 했다. 풀이 잔뜩 죽은 눈동자가 꼭 비 맞은 강아지같이 귀여웠다.

    강아지가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그냥 르니예가 귀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대로 르니예의 허리를 감으며, 꽃잎을 으깨 놓은 듯 붉은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르니예는 이번에 놀란 토끼 같은 얼굴을 했다. 토끼를 보고 귀엽다고 느껴 본 적 없으니, 이번에도 르니예가 귀여운 것이리라.

    “미안해할 것 없다.”

    “벨데메르…….”

    “난 그대의 남편이야. 남편에게 입을 맞추는 데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 안 그래?”

    벨데메르는 이 소원을 이뤄 주는 게 예상외로 즐거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르니예의 발그레한 볼을 보며 했다.

    * * *

    “셔츠만 두 개라.”

    프리야는 르니예가 준 옷 상자를 에드윈에게 주기 전에, 혼자서 뜯어 보았다. 거기에 똑같은 셔츠가 두 벌 들어 있었다.

    이상했다. 왜 똑같은 셔츠를 두 벌이나 샀지?

    “뭘 봐?”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없는데?”

    에니는 별 시답잖은 소리에 저를 부른 것이 불쾌하다는 듯 자리를 떴다. 프리야는 에드윈에게 옷 선물을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에니나 르니예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가 될 것이다. 그걸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바쁜 일이 있거나, 아니면 에드윈이 선물을 받든 말든 상관이 없거나.

    그런데 프리야는 어쩐지 두 개의 이유가 다 맞는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바쁘기도 바쁘고 상관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프리야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 ‘소원’과 연관이 있는지 아닌지였다.

    “프리야.”

    생각에 빠져 있던 프리야는 제 어깨를 살짝 흔들며 저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깜짝이야! 바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미안.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무슨 일인데?”

    “도련님께서 오늘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셔.”

    결혼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도련님이야. 프리야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바딜은 르니예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걸 공공연히 티를 냈다.

    아무리 에드윈이 자기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고, 르니예가 마음에 안 든다지만 둘이 결혼한 지 삼 년이었다. 저걸 봐주는 르니예가 성격이 좋은 거지.

    뭐야,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갈궜어?

    프리야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팍 썼다.

    “도련님이랑 저녁 먹기 싫어서 그래?”

    “아니, 아니야.”

    바딜이 프리야가 인상 쓴 것을 보고 묻자, 프리야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에드윈을 좋아하는 척해야 한다.

    “저녁을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서 그랬어.”

    “왜?”

    “하루 종일 속이 좀 안 좋네. 저녁 먹었다가는 더 체할 것 같아. 네가 말 좀 잘 해 줘. 그래 줄 수 있지?”

    “물론이지. 걱정하지 마. 약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가져다줄까?”

    프리야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더 이상 방해 안 하고 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준다면 그거야말로 고마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르니예 뒤를 한번 밟아 볼까 싶기 때문이다.

    “흐음.”

    에드윈은 며칠째 장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상단주인 콜론과 부단주인 카밀 둘 다 꼼꼼하기로 따지면 영지 내에서 한 손에 꼽힐 만한 인물들이었다.

    덕분에 장부는 꼼꼼했고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수상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수상한 일이 없으면 좋은 거지.”

    에드윈은 찝찝한 마음을 접어두며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장부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르니예 때문이리라.

    르니예는 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걸까? 그녀가 말한 이유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혹시 ‘그 일’에 콜론이나 카밀이 아닌 르니예가 연관된 것은 아닐까?

    에드윈은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약 세 달 전, 셰론 후작이 펠레포네 영지로 에드윈을 찾아왔다. 그는 에드윈이 기사였을 때, 그가 속한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셰론 후작이 펠레포네 영지를 찾은 표면적 이유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에드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곧 왕국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네, 에드윈.’

    영지를 둘러보고 드디어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때, 셰론 후작은 에드윈을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최근 전하의 건강이 악화되시고서부터 2왕자 저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

    ‘심상치 않다는 말씀은 2왕자 저하께서 왕위를 노리신단 뜻입니까?’

    후작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왕자 저하의 개인 사병뿐 아니라, 노르딕 백작의 사병 숫자도 급격히 늘어났어.’

    노르딕 백작은 2왕자의 외조부였다. 첫 번째 왕비는 1왕자를 낳고 얼마 안 가 죽었다. 그리고 들인 두 번째 왕비가 노르딕 백작의 딸이자 2왕자의 어머니였다.

    ‘노르딕 백작이 다른 귀족을 포섭하려는 정황도 있네.’

    ‘큰일이군요.’

    ‘자네는 1왕자 저하께 충성을 맹세했지.’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1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어머니의 병세 때문에 기사직을 내려놓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1왕자에게 한 충성 맹세는 여전히 유효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할 텐가?’

    ‘물론입니다, 단장.’

    셰론 후작이 그제야 웃어 보였다.

    ‘누군가 2왕자 저하께 은밀히 무기를 보내고 있는 듯하네.’

    왕국의 수도 안으로 허가받지 않은 무기는 반입할 수 없었다.

    그런데 허가 목록과 2왕자가 최근 소유하게 된 무기의 숫자가 맞질 않았다. 당연히 후자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누군가 몰래 무기를 반입하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래서 추적해본 결과 펠레포네 영지에서부터 흘러온 것이었어.’

    펠레포네 영지는 바다와 근접해 있어 무역이 활발했다. 펠레포네 영지에 본점을 주고 있는 상단도 여럿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큰 상단이라고 하면 당연히, 콜론의 상단이었다.

    ‘콜론 상단을 의심하시는 거로군요.’

    ‘미안하지만 그렇네.’

    에드윈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단장?’

    ‘자금이나 무기가 수도로 흘러간 정황이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겠나? 증거가 있으면 2왕자께서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잡을 수 있으니.’

    더불어 셰론 후작은 약속했다.

    ‘만에 하나 상단주가 2왕자의 계획에 동참했더라도 그들은 살려 주지.’

    반란에 가담한 증거가 나와도 르니예와 콜론을 살려 준다는 뜻이었다. 에드윈은 1왕자에 대한 충정과 르니예에 대한 마지막 의리로 그 일을 수락했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제 아내가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것은 진심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 * *

    ‘작은 주인님은 매일 밤 어딜 그렇게 나가시는 거예요?’

    하필 그즈음 들어온 프리야와 친밀한 사이가 된 것이 변수라면 변수였다. 그러나 프리야는 그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이지 방해가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방해가 되는 존재가 있다면, 내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혼을 논하는 르니예였다.

    “설마 르니예가 2왕자와?”

    콜론도 아니고, 카밀도 아니고, 르니예가 2왕자와 결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르니예가 하루아침에 돌변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매일 밤 몰래 상단의 창고며, 무역선을 조사하며, 장부를 보기 위해 콜론의 비위도 맞췄다. 그런데 뜬금없이 르니예가 이혼을 외치며 그것을 수포로 만들고 있었다.

    “도련님, 들어가겠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내 바딜이 들어왔다.

    “도련님, 프리야가 아직도 속이 안 좋아서 오늘 저녁도 못 먹겠다고 합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프리야가 저녁 약속을 거절했다. 속이 안 좋다는 말은 둘러댄 변명인 게 분명했다.

    “내가 가 봐야겠어.”

    르니예의 이혼 선언 때문에 신경을 써 주지 못했더니 서운했던 건가.

    에드윈은 바딜에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뒤 프리야의 방으로 향했다.

    “프리……?”

    프리야의 방으로 향하던 에드윈은 프리야를 발견하고 부르려 했다. 그러나 어디론가 황급히 가는 프리야를 보고서 멈칫했다.

    종종걸음을 치는 모양이 급한 일이 있어서라기보다 누군가를 황급히 뒤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어디를 가는 거지?”

    에드윈은 발소리를 죽이며 프리야를 뒤따랐다. 프리야는 아주 잽싼 몸놀림으로 뒷문을 통과했다. 에드윈이 프리야를 따라 나갔을 때는 이미 프리야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대신, 그 자리를 시꺼먼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걷고 있었다. 에드윈은 어쩐지 그 뒷모습이 익숙했다.

    “설마.”

    미행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지만, 그 여자 뒤를 쫓아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여자는 경보하듯 빠르게 골목을 이리저리 빙빙 돌더니 담장이 높은 집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유령이 든 집이라는 소문이 붙은 주택이었다. 그 앞에 선 여자가 후드를 벗고서 머리를 정리했다.

    에드윈은 그 여자가 왜 그리 낯익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르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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