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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6화 (16/120)
  • 16화. 똑같은 바지 두 벌

    “똑같은 바지를 두 벌 사 오신 겁니까, 르니예 님?”

    샤피로의 양손에 들린 바지를 본 르니예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똑같은 것으로 두 개 달라고 했더니 셔츠는 셔츠끼리, 바지는 바지끼리 포장을 한 것이었다.

    그걸 확인하지 않고 프리야에게 줘 버렸으니, 저쪽은 셔츠만 두 벌이란 뜻이 아닌가!

    “그게.”

    르니예는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벨데메르와 샤피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의문스럽겠지, 당연히.

    그냥 바지 두 벌이 아니라 똑같은 바지로 두 벌이니까.

    “그게, 그러니까, 바지를 하나 사면, 하나 더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응, 그렇더라고. 주는 데 거절하기 뭐해서 그냥 들고 왔어요.”

    르니예는 벨데메르와 샤피로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르니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보다 내일 에드윈을 마주쳤을 땐 뭐라고 둘러대지?

    벨데메르에게 둘러댄 핑계로는 속지 않을 텐데.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두 개 샀다고 할까?

    “그럼 자리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그래, 에드윈.”

    “……에드윈?”

    르니예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름에 벨데메르와 샤피로의 시선이 쏟아졌다. 르니예는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닫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에드윈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에드윈이라고 말해 버리다니!

    “에드윈이 누구지?”

    아무리 들어도 남자 이름이라 벨데메르가 의문을 표했다.

    “흐음, 이름을 실수로 부를 정도면 아주 친한 사이겠군요. 이름을 매우 자주 부르는, 특별한 사이 말입니다.”

    샤피로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에드윈이 누구지, 르니예?”

    “친한 동료예요. 같이 일하다 보니 이름이 입에 붙어서 그만……. 그리고 생김새가 샤피로랑 비슷해서 헷갈렸어요.”

    여기서 정말 다행인 점은, 벨데메르가 아닌 샤피로를 보고 에드윈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벨데메르를 보고 에드윈이라 불렀다면 수습할 수 없는 사고였겠지.

    “이상하군요, 르니예 님.”

    “뭐, 뭐가?”

    저 쓸데없이 예리한 사역마. 그때 본때를 보여 줬어야 했는데.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르니예는 저를 바짝 조여 오는 샤피로의 추리에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저와 비슷하게 생긴 인간이 있을 리 없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존재한단 말입니까?”

    “……응?”

    “저는 주인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그런 저와 비슷한 인간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군요.”

    보통 자신을 만든 주인의 성격을 사역마가 닮고 그러나? 자아도취에 빠진 것이 굉장히 비슷해 보이는데.

    “아니, 그 머리 모양이랑 옷차림 같은 게 비슷하다는 뜻이었어.”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렇겠지. 누가 만든 작품인데.”

    르니예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하하 웃었다. 다행히 오늘도 넘어갔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도 해서 이제는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디에 써 놓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두 집 살림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다니. 르니예는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 * *

    “르니예, 아침이다. 어서 일어나. 오늘도 늦을 계획은 아니지?”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입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일상이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벨데메르가 입을 맞춰 주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하늘이 흐리군. 비가 올지도 모르겠어.”

    르니예는 창밖을 보고 있는 벨데메르 옆에 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이라고는 높다란 담장과 그 너머로 살짝 보이는 거리가 다였다.

    “벨데메르는 오늘 뭐 할 거예요?”

    “책도 읽고, 연구도 하겠지.”

    르니예는 단 한 번도 벨데메르가 집 안에서 무얼 하고 지내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그가 집 안에서 잘 나오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여기서요?”

    “아니, 서재에서.”

    서재나 여기나 보이는 장면이 비슷할 것이다. 벨데메르는 언제나 이런 삭막한 창밖을 경치라고 보면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되어 달라고 소원을 빌어서 데려와 놓고 방치를 하다니.

    그렇다고 해서 벨데메르를 데리고 광장이며 시장을 나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저를 아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창밖을 조금 꾸며 줄 수는 있지 않을까? 화사하게 꽃을 심어 볼까?

    “벨데메르는 무슨 꽃을 좋아해요?”

    “무슨 꽃을 좋아하냐고?”

    잘생긴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꽃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군.”

    벨데메르는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 보았다. 꽃이라니.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벨데메르에게 꽃이란 어떤 효용이 있는지가 중요할 뿐, 좋고 싫음으로 판별할 것이 아니었다.

    “르니예, 그대는 무슨 꽃을 좋아하지?”

    “장미요.”

    “그럼 나도 장미를 좋아하는 것으로 하지.”

    벨데메르의 무성의한 대답에 르니예가 재차 물었다.

    “에이, 정말 좋아하는 꽃이 없어요?”

    “난 그대가 좋아하는 것이 좋아. 그러니 그대가 좋아하는 꽃도 분명 좋아할 거야.”

    책에서 읽은 대사였다. 벨데메르는 훑어 읽은 문구도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자신의 비상한 머리에 감탄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르니예는 좀 감동했다.

    그 감동을 르니예는 고스란히 금액으로 표출했다. 상단으로 돌아가자마자 르니예는 고급 종의 장미 나무를 종류별로 몇 그루씩 사들였다.

    그렇게 다시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는 수레 두 대를 끌어야 할 만큼 많은 묘목이 쌓였다.

    “이게 다 뭡니까, 르니예 님?”

    르니예는 저녁 시간보다 이르게 벨데메르의 집으로 향했다. 장미 나무가 가득 담긴 두 대의 수레를 끌고서.

    물론 나머지 한 대는 르니예의 든든한 지원군인 에니가 끌었다.

    “여기 담장이 너무 삭막한 것 같아서 꽃을 좀 심으려고.”

    다행히 날은 온종일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다 꽃봉오리가 달린 걸로 사 왔으니까 심어 두면 금방 필 거야.”

    그러면 적어도 벨데메르를 활짝 만개한 장미를 보며 책을 읽을 수 있겠지.

    르니예는 들떠서 수레에 가져온 삽을 들었다.

    “샤피로, 뭐 해?”

    “저도 하는 겁니까?"

    “당연한 걸 물어.”

    대답은 르니예가 아니라 에니에게서 나왔다. 에니는 샤피로 쪽으로 삽을 하나 던졌다.

    “아, 친구분도 오셨군요.”

    “일찍도 알아주네.”

    에니와 샤피로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시종이 돼서 주인마님이 정원 일을 하시는데 보고만 있으려고 했단 말이야?”

    에니는 기가 찼다. 콜론의 상단에 하인으로 들어왔다면, 그는 하루에도 열 번씩 에니에게 혼이 났을 것이다.

    “흥, 제게 제 인생을 살라고 하신 분은 르니예 님이십니다.”

    샤피로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는 사역마로, 시종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한데 벨데메르와 떨어져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라니? 도대체 어디까지가 주체적인 것이고 어디까지가 의존적인 것인가?

    “방해하지 말고 제 인생을 살라고 하시고는, 제게 또 일을 시키시다뇨.”

    그 고민을 던져 준 르니예는 이랬다저랬다 하며 샤피로를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벨데메르 님이 만드셨다기에 대단한 시종인 줄 알았더니 아니잖아?”

    에니가 샤피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을 하면서 자기 인생도 못 산다니. 한 번에 두 가지 일도 못 하는 하인을 무엇 하러 끼고 다니신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혼잣말은 아니었다. 샤피로는 발끈했다.

    “친구분께서는 삽질이나 잘하며 그런 말씀을 하시죠. 말하면서 삽질 하나도 제대로 못하시는 분의 충고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삽으로 판 자리에 장미 묘목을 심은 것을 자랑스레 보여 주며 에니가 말했다.

    “무슨 소리. 그쪽이 한 그루 심을 때 나 두 그루 심었는데.”

    “그렇게 대충 심으면 저는 세 그루도 심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유치한 대화를 듣고 있던 르니예는 이런 생각을 했다.

    쟤들도 그냥 심어 버릴까.

    * * *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내린다. 장미 나무를 심고 나서 일주일이 넘게 비가 내렸다. 흐렸다가,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또 비가 왔다.

    “…….”

    나무에 달린 꽃봉오리는 햇빛 한 점 없는 날씨에 피어 보지도 못하고 다 져 버렸다. 르니예는 봉오리째 떨어진 꽃을 주우며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열심히 심은 보람도 없다.

    “르니예.”

    벨데메르가 시무룩해하는 르니예의 뒤에 섰다.

    “내년에 다시 필 것이다.”

    “알아요. 그냥, 벨데메르가 창밖을 내다봤을 때 벽 말고 다른 게 더 있었으면 했어요.”

    벨데메르는 창밖을 잘 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 벽뿐이라고 해도,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를 위하는 르니예의 마음이 예뻤다.

    하긴, 남편이 되어 달라는 소원을 빌 정도로 자신을 좋아했으니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것이겠지만.

    “이제 다 소용없네요.”

    “왜 소용이 없지?”

    르니예는 물음표가 담긴 눈동자로 벨데메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대가 한마디만 하면 시든 꽃도 되살려 낼 수 있는 남편을 두고.”

    “아!”

    “장미꽃이 보고 싶나, 르니예?”

    르니예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벨데메르의 손끝이 살짝 빛나는 듯하더니, 어느새 떨어진 꽃봉오리 자리마다 새로운 봉오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곧 물방울이 터지듯 톡톡 꽃송이가 터졌다. 붉고 흰 장미의 물결이 담장을 따라 파도처럼 퍼졌다.

    황홀경에 빠진 르니예의 시선이 만개하는 장미를 따라가다가 다시금 벨데메르에게로 향했다.

    “그대가 원하면 내가 다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르니예는 벨데메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를 끌어당겨 입 맞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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