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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5화 (15/120)
  • 15화. 헷갈리기 시작했다

    르니예는 체했다. 에드윈과 식사 자리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의심스러울까 깨작거리면서도 뭘 좀 먹었다.

    거기에 벨데메르가 듬뿍 담아 준 스튜를 한 그릇 다 비우느라 르니예의 위장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미 음식물이 턱 끝까지 올라와 있는데, 뭘 더 준다는 이야기에 순간 헛구역질이 나며 먹은 것을 다 게울 뻔했다.

    “……르니예?”

    벨데메르는 자신이 해 준 음식을 먹고 르니예가 헛구역질을 하자 충격받았다. 그는 샤피로가 사 온 식재료를 고르고 골라 깨끗하게 세척한 다음 사용했다.

    상한 것도 없고 맛도 괜찮았는데. 아닌가? 르니예의 입맛에 맞추기엔 한참 부족했던 건가?

    설마 그럴 리 없지. 내가 한 요리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 벨데메르가 손수 한 음식인데.

    “저기, 벨데메르, 그게요.”

    르니예는 물을 꿀꺽 삼켰다. 배가 꽉 차서 물도 두 모금은 못 마실 지경이었다.

    “내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가? 맛이 없는데 맛있는 척을 했던 건가?”

    벨데메르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서늘한 눈동자에 설명을 요구하는 시퍼런 빛이 일렁였다.

    “아니에요, 정말 맛있어요.”

    “그런데 왜 헛구역질을 하지?”

    “급하게 먹어서 그래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있다가 너무 허겁지겁 먹었더니…….”

    이런 핑계, 통할까? 르니예는 소화가 안 돼 허옇게 질린 얼굴로 벨데메르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나? 왜지? 상단주가 식사도 제공하지 않고 부려 먹는 건가?”

    거짓말을 간파할 줄 알았는데, 벨데메르가 한 말은 의외였다. 그가 한 말은 어떻게 보면 약간, 뭐랄까, 르니예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토마토 스튜를 해 놓고 기다린다고 해서 많이 먹으려고 그런 건데…….”

    “그래도 온종일 굶으며 일하면 안 되지. 토마토 스튜는 내일도 해 줄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는 굶고 와서 급하게 먹지 않도록 해.”

    르니예가 배가 부르다고 느끼기 전에 삼키려고 했던 것이, 벨데메르의 눈에는 급히 먹는 것처럼 보였다.

    토마토 스튜를 좋아하기에 일부러 아침에 메뉴를 말해 줬더니, 그게 또 악영향을 끼쳤다. 많이 먹겠다고 종일 굶으며 일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르니예의 행동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좋은 남편이 되는 길은 꽤나 어렵군.”

    샤피로가 사 온 소화제를 먹고 르니예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저녁 두 번 먹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후.”

    배가 아직도 부르네. 르니예는 더부룩한 한숨을 내쉬며 잠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배를 둥글게 쓸었다.

    “그건 왜 하는 거지?”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벨데메르가 침대로 오다가 르니예의 행동을 보고 물었다.

    “이러면 소화가 더 잘돼요. 벨데메르는 체해 본 적 없어요?”

    “그랬던 기억은 없군.”

    벨데메르는 언제나처럼 침대 끝에 가서 누웠다.

    “내가, 해 줄까?”

    “네?”

    “그거 말이야, 내가 해 주겠다고 말했다.”

    배를 쓰다듬는 거 말인가? 르니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양옆으로 흔들렸다.

    “그대 손보다 내 손이 크니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정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괜찮다.”

    “아니에요. 그런데 벨데메르는 남의 살 만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어요?”

    입을 몇 번이나 맞춘 후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입을 맞추는 것 말고 맨살을 만진 적은 거의 없었다.

    포옹을 해도 항상 옷 위로 했고, 손은 아직 잡아 보지 못했다.

    손도 안 잡고 입부터 맞췄다니 이상하기는 하네.

    “그대는 괜찮아. 이상하게 하나도 불쾌하지 않아.”

    벨데메르의 손이 르니예의 배에 닿았다. 커다란 손은 르니예의 배를 거의 다 덮을 정도였다.

    보기와 다르게 제법 거친 손이 르니예의 배 위에서 원을 그렸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이상하게 간질간질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간지러우면서도 나른한 감각을 무시하려 르니예는 벨데메르와의 대화에 집중하려 했다.

    “소원 때문일까요?”

    “글쎄, 이유는 모르겠군.”

    이유는 몰라도 르니예의 살이 부드럽다는 것은 알겠다. 손바닥으로 부들부들한 살이 착 감겼다.

    다른 사람의 살도 다 이리 부드러운가? 적어도 벨데메르 본인의 배는 딱딱한 편이었다.

    “그대와 닿는 것은 전혀 불쾌하지 않아. 오히려…….”

    기분이 좋을 정도지.

    제 손바닥으로 감겨 오는 그 살결의 감촉은 묘하게 중독적이었다. 따뜻하고 말랑하고. 세상 어디에 그런 촉감을 가진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잠이 들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 옆에서 르니예를 쓰다듬다가 잠이 들었다.

    “……?”

    벨데메르는 묘하게 개운한 기분에 눈을 떴다. 그는 제 품에서 잠이 든 르니예를 쳐다보다가, 깨달았다.

    “르니예, 일어나. 아무래도 늦은 것 같다.”

    “으응, 예?”

    르니예는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다가 역시나 깨달았다.

    “어떡해, 늦었다.”

    에니가 기다릴 텐데. 왜 안 오나 발을 동동 구르며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본격적인 출근 시간이라 뒷문이고 정문이고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면 외박하고 들어온 것이 금방 탄로 날지도 모른다.

    르니예는 벌떡 일어나서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그리고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샤피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안 깨워 줬어?”

    “두 분의 아침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아니, 그건…….”

    할 말은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르니예는 고개를 저으면서 뛰쳐나갔다.

    “언제는 방해하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는 안 깨워 줬다고 뭐라고 해?”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기나긴 사역마 인생에서, 시중들기 저리 어려운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물론 벨데메르 말고 다른 사람의 시중은 들어 본 적 없지만.

    “안 되겠어.”

    르니예는 상단 정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사람이 너무 많다.

    자연스럽게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뭘 사서 들어가야겠다.”

    아침 일찍 물건을 사러 나온 척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제 어떤 물건이냐 그게 중요한데.

    르니예는 상점이 늘어선 거리를 쭉 둘러보다가 항상 에드윈의 옷을 사는 옷 상점을 발견했다.

    지난 삼 년간 르니예는 항상 에드윈의 옷을 선물하고는 했다. 신상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사 주고픈 마음에 상점이 열기 전부터 나와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니 옷을 사서 들어가면 다들 그러려니 할 것이다.

    “그 바보짓이 도움 될 때도 있네.”

    돈 때문에 결혼한 남편이 뭐가 좋다고 매일같이 옷을 사다 바쳤는지. 그래도 덕분에 의심받지 않을 알리바이는 하나 만들었다.

    “오늘 신상 나오는 날인 줄은 어떻게 알고, 기가 막히게 오셨어요, 라포어 부인.”

    상점 주인이 르니예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신상이 나온 줄은 몰랐는데 잘됐네요. 그걸로 주세요.”

    “직접 보지도 않으시고요?”

    “안 봐도 멋있을 텐데요, 뭘. 워낙에 물건 고르는 눈이 높으시니까.”

    르니예의 칭찬에 상점 주인이 높은 소리로 호호 웃으며 점원을 불렀다.

    “셔츠랑 바지가 세트인데 어떻게 할까요, 라포어 부인?”

    “세트로 사야죠.”

    르니예는 옷이 포장되기를 기다리며 숨을 고르다가, 다급히 덧붙였다.

    “아, 같은 걸로 두 세트 주세요. 사이즈도 같은 걸로요. 에드윈이 요즘 험한 데를 많이 다녀서.”

    르니예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며 어색하게 웃었다. 옷을 에드윈만 사 줄 수 있나. 벨데메르도 사 줘야지. 어차피 마침 둘이 사이즈도 똑같으니 잘되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르니예는 옷이 든 상자 두 개를 손에 들고 자연스럽게 상단으로 들어왔다.

    “작은 마님, 일찍 어디 나갔다 오시나 봐요.”

    “어? 어어.”

    하필이면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이 프리야라니. 르니예는 일부러 옷 상자가 잘 보이도록 들었다.

    “옷이에요? 제가 하나 들어드릴게요.”

    프리야가 아침 햇살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작은 주인님 옷인가 봐요.”

    “응? 으응, 신상이 나왔다고 해서.”

    “작은 마님께서는 여전히 작은 주인님을 사랑하고 계시는군요.”

    프리야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우리 이혼할 거야. 옷은 예약해 둔 거라서 어쩔 수 없이 갔다 온 거고.”

    “네.”

    그 짧은 대답에서 불신의 향기가 물씬 났다. 프리야는 도대체 뭘까?

    에드윈과 세기의 사랑을 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르니예가 에드윈과 이혼하는 것이 영 마뜩잖은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건 네가 가져다주도록 해.”

    마음 같아서는 프리야와 다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르니예가 프리야의 물건을 훔친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프리야도 상단의 것을 훔친 게 아닌가.

    그러고 나서 프리야의 정체와 목적, 에드윈과의 사이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러나 르니예에게는 아주 큰 약점이 있었다.

    바로 벨데메르.

    자기를 괴롭히던 못된 주인이 실은 중혼이라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면?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바로 신고하겠지.

    “작은 마님께서 선물한 거라고 꼭 얘기할게요.”

    “그래, 너 편한 대로 해.”

    아침부터 너무 피곤했다. 르니예는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방으로 직행했다. 분명 푹 잤는데도 침대에 풀썩 쓰러짐과 동시에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작은 마님, 일어나세요.”

    르니예는 저를 흔들어 깨우는 에니의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저쪽 집에 가실 시간이에요.”

    “벌써?”

    르니예는 아침에 산 옷 상자를 집어 들었다.

    “오늘 밤도 잘 부탁해, 에니.”

    “오늘처럼 늦게만 들어오지 마세요. 저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미안, 내일은 꼭 일찍 들어올게.”

    르니예는 미안한 마음을 잔뜩 담은 표정을 짓고서 상단을 빠져나왔다. 일상처럼 빙빙 돌아 벨데메르가 있는 집으로 들었다.

    “오늘은 일찍 왔군, 르니예. 그런데 그건 뭐지?”

    “벨데메르 옷이에요.”

    “내 선물인가? 고맙게 받지.”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르니예와 벨데메르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옷 상자를 받아 든 샤피로는 상자를 열었다.

    “르니예 님.”

    샤피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르니예를 쳐다보았다.

    “똑같은 바지만 두 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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