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4화 (14/120)
  • 14화. 시종이라 시중을 들었을 뿐

    주인님의 임시 부인은 미친 게 분명하다. 샤피로는 사역마를 잡는 진을 빗자루로 싹싹 지웠다.

    물론 샤피로가 작동을 멈추면 벨데메르가 다시 살려 주겠지만, 그래도 섬뜩한 건 섬뜩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인님은 지금 마법을 못 쓰시잖아?”

    그렇다면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르니예가 원할 때까지 샤피로는 그저 인형인 채로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질적인 마력을 느끼고 거기서 멈춰 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심장 떨어질 뻔했네. 샤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난 심장이 없지, 참.”

    어쨌든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는 것은 관용구이니 심장이 없는 사역마라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짓이 꼭 악마 같군.”

    샤피로는 이제 사라진 르니예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하겠나.

    “진짜 악마 아니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르니예가 진짜 악마라면……. 벨데메르가 악마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는 거라면……!

    “주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샤피로는 르니예의 눈을 피해, 오븐 앞에 서 있는 벨데메르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샤피로?”

    “주인님, 르니예 님이 실은 악마나 뭐 그런 게 아닐,”

    “와,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요, 벨데메르.”

    샤피로는 흠칫했다. 듣고 온 걸까? 저 멀리에서부터 내 목소리를? 역시 인간이 아닌 거야. 인간의 청력이 그렇게 좋을 리 없으니.

    “거의 다 됐으니 조금만 기다리겠어?”

    “그러면 전 그동안 테이블 세팅을 할게요. 샤피로, 나랑 같이할 거지?”

    샤피로의 눈이 마주친 르니예의 입매가 양옆으로 쭉 찢어졌다. 그 사악한 미소에 샤피로는 몸을 떨었다.

    “벨데메르한테 내 흉이라도 본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르니예 님.”

    르니예의 손에서 날카로운 포크가 반짝였다. 내가 저를 악마라고 부른 걸 알면, 저것으로 나를 찍으려나? 아프지는 않겠지만, 금은 갈 텐데.

    다행히 르니예는 포크를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제 표정이 어때서 그러십니까.”

    “내 욕 하다가 걸린 표정인데.”

    르니예의 손에 이번엔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샤피로는 삐거덕거리며 르니예의 눈을 피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면 아니지 왜 말을 더듬고 그래, 샤피로.”

    르니예가 눈에서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샤피로 옆으로 다가왔다. 접시 옆에 나이프를 놓고는, 위로라도 하듯 그의 팔뚝을 은근히 문질렀다.

    “저,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르니예 님.”

    아까는 죽이려고 했다가, 지금은 다정하게 구는 게 더 무서웠다. 악마가 분명해. 악마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글쎄, 샤피로가 하루 종일 벨데메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바람에 내가 신혼 생활을 즐기지 못해서?”

    “하지만 저는 주인님의 시종입니다. 주인님의 시중을 드는 것이 제 할 일이란 말입니다.”

    샤피로는 서러웠다. 시종이라 시중을 든 것인데, 왜 시중을 들었냐고 하면 대체 어쩌란 말이냐.

    샤피로가 울상을 짓자 르니예는 조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전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벨데메르한테 집착하지 말고 네 삶을 살아, 어?”

    르니예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샤피로는 멍하니 르니예가 한 말을 곱씹었다.

    “내 삶……? 사역마한테도 삶이 있나?”

    * * *

    “르니예, 일어날 시간이다.”

    쪽-

    아침이면 어김없이 벨데메르의 키스 세례가 이어졌다. 르니예는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가벼운 입맞춤을 받으며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대가 좋아하는 토마토 스튜를 준비해 놓고 있을 테니 일찍 들어오도록.”

    “그럴게요.”

    벨데메르의 배웅을 받으며 나선 출근길, 르니예는 남들 눈에 띌까 걸음을 빨리했다. 상단 정문이 아니라 뒷문을 통해 몰래 들어온 르니예는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입고 온 로브를 벗고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방에서 나왔다.

    “작은 마님.”

    “악, 깜짝이야!”

    “왜 그렇게 놀라세요? 꼭 죄지은 사람처럼.”

    에니의 말에 르니예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죄를 짓고 있긴 하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당당하게 다니세요."

    르니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에 별일 없었지?”

    “밤에는 없었고요.”

    밤이 아닌 때에는 별일이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오늘부터 작은 주인님이 장부를 보신다는데요.”

    “에드윈은 장부 볼 줄도 모를 텐데.”

    “부단주께 배우실 거래요.”

    “카밀 숙부한테 직접?”

    장부를 본다니. 저번에 상단 운영을 배우고 싶다던 말이 진심이었던 거야?

    “어디서?”

    “작은 주인님 서재요.”

    르니예는 에드윈의 서재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밀리가 혼인할 때까지만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를 봐놓고 어째서 상단 일에 개입하는 걸까?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상단 일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혼을 약속한 때에 장부를 보겠다고 하다니. 확실히 수상했다.

    “에드윈.”

    서재의 문은 열려 있었다. 르니예는 예의상 노크를 하고서 에드윈을 불렀다. 예전 장부까지 다 훑어보는 중인지 책상이며 바닥에 장부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부인,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카밀 숙부는요?”

    “상단에 일이 있어 잠시 나갔습니다.”

    잘됐다. 르니예는 서재 문을 닫고 들어섰다. 서재에 앉아 장부를 보고 있는 에드윈은, 솔직히 멋졌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유 중에, 저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얼굴은 큰 비율을 차지했다.

    “할 말이 있어요, 에드윈.”

    르니예는 장부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장부에 관심을 가지는 건지, 그 저의가 궁금했다. 그것도 이혼을 하려는 마당에!

    “나 역시 부인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군요. 오늘 저녁 어떻습니까?”

    그러나 르니예는 에드윈의 뜬금없는 식사 제안에 물어보려던 것을 까먹고 말았다.

    “네? 저녁을 같이 먹자고요?”

    “그렇습니다.”

    르니예는 휘둥그레진 눈을 깜빡였다. 그가 먼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 적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오늘 저녁은 선약이 있었다. 르니예는 거절하려고 했다.

    “혹시 오늘도 바쁩니까? 요즘 자주 밖에 나가는 것 같던데.”

    에드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니, 르니예가 느끼기에만 그랬을 수도 있었다. 저도 모르게 제 발이 저렸던 르니예는 거절을 하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요, 이따 저녁에 봐요.”

    르니예는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저녁 시간을 앞당겼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은 겁니까, 부인?”

    르니예가 음식을 깨작거리자 에드윈이 물었다.

    “입맛이 없어서…….”

    “배가 고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맞다. 속으로 아차 싶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하다 보면 느는 것. 르니예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배고파서 쿠키를 좀 집어 먹었더니 배가 또 안 고프네요. 그보다 우리 할 말이 있지 않나요?”

    갑자기 상단 일을 하겠다고 나서질 않나, 저녁을 먹자고 하질 않나. 이혼을 하자고 하니 제게 미련이라도 생긴 건지, 르니예는 헷갈렸다.

    “장부는 왜 보는 거예요?”

    “장부 이야기부터 하죠.”

    르니예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관심 없다가 갑자기 관심이라도 생겼어요? 그냥 심심해서 보는 건 아닐 테니까.”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다. 저에게 미련이 남아서, 같은 이유 말고.

    “영주께서 상단 문제로 한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그 전에 문제 될 것이 없나 살펴보는 중입니다.”

    빌어먹을 영주. 상단의 주인은 아버지였지만, 그는 늘 귀족인 에드윈을 불렀다. 영주는 평민과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평민이 주는 돈은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으면서, 상의할 일이 있으면 꼭 에드윈을 불렀다.

    “하지만 전에 영주께 갈 때는 장부 같은 거 보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제대로 된 답변을 드릴 수 없어 곤욕스러웠습니다. 하여 이번에는 정확한 답변을 드리고자 미리 보는 것뿐입니다.”

    르니예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에드윈스러운 답변이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다. 그러나 더 캐묻기에 르니예는 시간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 벨데메르가 떠오르면서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졌다.

    “그럼 에드윈이 나한테 할 말은 뭐예요?”

    “왜 갑자기 이혼을 하자고 한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부인이 말한 이유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르니예는 또 헷갈렸다. 에드윈이 꼭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굴어서. 그런데 미련이 남은 사람의 목소리치고는 너무 무미건조했다.

    “그것도 옷을 선물한 다음 날 이혼하자고 한 게 솔직히 이해되질 않습니다.”

    내가 옷을 선물했었나? 르니예는 기억을 더듬었다. 오로지 르니예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간이 너무 혼란스러워 그전에 옷을 선물한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다, 다른 이유요?”

    설마 에드윈이 눈치챈 걸까? 두 집 살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들킨 거야, 나?

    “그,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지친 건데.”

    르니예는 에드윈의 눈을 피하며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삼 년이나 했으면 지칠 때도 됐잖아요. 갑작스러웠다면 미안하지만 다른 이유는 절대, 절대 없어요.”

    들켰다고 해도 잡아떼야 한다. 절대 인정해서는 안 돼.

    혼인으로 라포어 부인이 되었다고 해도 르니예는 평민 출신이었다. 평민과 귀족의 결혼은 동등할 수가 없었다.

    귀족이 정부 하나 두는 것쯤은 이혼 사유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평민이 귀족과 결혼해서 바람을 피운다?

    재판을 할 것도 없이 유책 배우자가 될 것이다.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요.”

    르니예는 이 대화가 불편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화가 불편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또 다른 남편이 다른 집에서 저녁을 차려놓고 르니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급히 상단을 나선 르니예는 거의 뛰어서 벨데메르의 집에 도착했다.

    “하아, 벨데메르, 나 왔어요.”

    “토마토 스튜가 기대되어 뛰어왔군.”

    “네? 아, 하하, 엄청 맛있는 냄새 나네요.”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접시에 가득 스튜를 담아 주었다.

    “이건 아까 낮에 구운 빵이다. 한번 먹어 보겠나?”

    “쫄깃하고 맛있어요.”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 이거 그대 혼자 다 먹어도 좋아.”

    벨데메르가 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르니예 앞에 가져다 놓았다. 르니예는 빵을 크게 뜯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배부르다.

    배가 터질 것 같다.

    하지만 기대에 찬 눈빛으로 르니예가 먹는 것을 보고 있는 벨데메르가 실망할까 르니예는 꾸역꾸역 접시를 비웠다.

    “양이 부족했나? 더 가져다주지.”

    “아니에요, 벨데메르. 지금도 충분히 배불, 우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