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3화 (13/120)
  • 13화. 그것은 훼방인가, 시중인가

    “잠자리는 편안하신가요, 르니예 님?”

    “……응, 너무 편안하다, 정말.”

    너무 편안해서 화가 나려고 하네.

    르니예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벨데메르가 소원 때문에 다정하게 군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차피 빈 소원이니 르니예는 그동안만이라도 즐겨 보려고 했다.

    어찌 되었건 즐기는 자는 못 이긴다고 하지 않던가?

    “이야기를 나누실 거면 촛불은 켜 두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나누셨습니까?”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였니? 그렇다면 그거참 큰 오해인데.

    “대화를 하고 주무실 거면 차를 내올까요? 아니면 숙면을 위해 와인은 어떠십니까?”

    “아니, 괜찮아.”

    “커튼은 닫을까요? 열어 두는 게 좋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평소처럼 반만 열어 둘까요?”

    “…….”

    샤피로는 그 이후로도 하나부터 열까지를 다 참견하며 한참 동안 나가지 않았다.

    일부러 저러는 걸까? 이건 마치,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못된 시어머니 같잖아? 아들 부부가 좋은 시간 보내는 게 못마땅해 훼방을 놓는 것 같은데?

    * * *

    벨데메르는 밤을 새웠다. 그는 샤피로가 반쯤 열어 둔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것을 보고 일어섰다. 그런 다음 창밖을 보고 거리에 하나둘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서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르니예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벨데메르는 조심스럽게 르니예의 곁으로 움직였다.

    그러곤 나직한 목소리로 르니예를 불렀다.

    “르니예.”

    잠결에도 제 이름을 알아들었는지 르니예의 눈꺼풀이 달싹였다. 그는 볼에 달라붙어 있는 르니예의 머리칼을 떼어 주며, 손끝으로 부드럽게 르니예의 뺨을 쓸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벨데메르는 지금까지 제 피부밖에 만진 적이 없기에 다른 사람의 살이 이토록 부드러운 줄 알지 못했다.

    르니예가 아닌 다른 여자의 살도 이리 부드러울까?

    약간 호기심이 생겼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호기심을 굳이 풀고 싶은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살을 만져야 한다는 불쾌감이 더욱 컸다.

    “아침이다.”

    “으응…….”

    어젯밤, 샤피로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느라 늦게 잠든 르니예는 잘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날 시간이야.”

    그렇게 말하며 벨데메르는 잠결에 웅얼거리는 르니예의 입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르니예.”

    르니예가 영 일어나지 못하자 벨데메르는 다시 한번 르니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하고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에, 닫혀 있던 르니예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벨데메르?”

    르니예는 잠결에 꿈을 꾸었나 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좁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벨데메르의 비현실적인 얼굴이었다.

    그의 등 뒤로 아침 햇살이 후광처럼 비췄다. 하늘에서 무슨무슨 종류의 신이 내려와 제 옆에 누워 있는 것만 같아서, 르니예는 잠에서 깼는지 아직도 꿈속인지 헷갈렸다.

    “그래.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그의 목소리가 이리 생생한 것을 보니 현실인가 보다. 르니예는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저를 쳐다보는 얼굴을 쳐다보느라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어서 일어나야지.”

    속삭이던 벨데메르가 또다시 르니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가 할 행동을 예측한 르니예는 입술로 떨어질 촉촉한 감촉을 기대하며 다시금 눈을 감…….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

    “그리고 르니예 님.”

    르니예는 비로소 다짐했다. 저 사역마에게 인간의 매너와 예의, 그리고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주기로.

    “르, 아가씨, 아니 작은 마님.”

    에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호칭이 하도 많아서 헷갈리네요.”

    “편한 대로 불러. 체이스는 왔어?”

    “네,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르니예는 출근한다는 명목으로 상단에 오자마자 체이스를 불렀다.

    “일찍 왔네.”

    “누구 명령이시라고요, 고용주님.”

    낮과 밤이 바뀌어 있는 체이스는 지금 한창 잘 시간이었다. 막 깊은 잠에 빠지려던 순간 상단에서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꿀 같은 단잠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 여인숙 비용을 누가 대주는지 잘 생각하고 비꼬는 게 좋을 거야, 체이스.”

    그러나 오늘 르니예는 그의 비아냥거림을 참아 줄 마음의 여유가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사역마가 마음에 안 들어.”

    “사역마? 네가 만든 사역마?”

    “아니, 내가 사역마를 어떻게 만들어! 벨데메르의 사역마 말이야. 너도 봤지? 그 집에서 벨데메르 시중드는 남자.”

    체이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게 사역마야?”

    “그래. 놀랐지?”

    “완전 사람 같던데.”

    “나도 놀랐다.”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에도 놀랐지. 노크를 하긴 하는데 대답도 듣기 전에 들어오고, 벨데메르가 하는 일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참견하고, 그의 옆에 딱 붙어 다닌다.

    가장 큰 문제는, 샤피로의 시중에 익숙한 벨데메르는 그게 문제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역마가 왜?”

    “왜긴 왜야, 내 신혼 생활을 방해하니까 그렇지.”

    체이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신혼 생활? 벨데메레르랑 결혼했어? 아니, 그런데 그쪽 이미 남편이 있지 않나?”

    “그러니까 내 말은, 신혼이 되어도 지금처럼 방해할 것 같다는 거지.”

    그래, 확실히 거짓말이 늘고 있었다. 체이스야 지금은 호의적이지만, 그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괜히 비밀을 털어놓아 약점 잡힐 필요는 없다.

    “결혼할 거야? 둘이?”

    이미 했다. 그러나 르니예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짓도 에드윈과 이혼할 때까지, 잠깐이다.

    그러고 나면 벨데메르도 조각상으로 돌아갈 테니까. 게다가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 소원을 빈 줄로만 안다.

    그런 상황에서 르니예가 벨데메르를 조금이라도 껄끄러워하거나 피한다면?

    그가 바보 멍청이라고 해도 결국 눈치를 채고 말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바보 멍청이가 아니고 말이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가짜라고 해도 그런 결혼 생활을 누려 보고 싶었다. 르니예가 에드윈과 식장에서 손잡고 나올 때 꿈을 꾸었던 그런 생활을.

    “어쨌든 너는 마법사니까 사역마를 없애는 방법을 알 거 아니냐.”

    “뭐, 알긴 알지. 근데 워낙 높은 마력이 함축되어 있어서 완전히 없애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완전히 없앨 필요는 없어.”

    그냥 겁만 좀 주려고 하는 거니까.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주인님?”

    “아니, 샤피로. 네 손을 빌릴 수는 없다.”

    벨데메르는 아침 계획이 성공해 한껏 고무된 상태로 저녁을 차리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에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깨웠고, 르니예의 반응도 좋았다. 이대로라면 좋은 남편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주인님께서는 지금도 충분히 좋은 남편이십니다.”

    “소원이 이뤄지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부족해.”

    샤피로는 주방에서 돌아 나와 한숨지었다.

    “하필이면 저런 욕심 많은 인간에게 걸리셔서.”

    욕심 많은 인간은 수도 없이 보았다. 하지만 르니예처럼 욕심 많은 인간은 처음이었다.

    벨데메르의 존재 자체만으로 완벽한 남편인데, 거기서 뭘 더 원한다니.

    샤피로는 그 욕심의 끝을 정말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벨데메르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퇴근한 르니예는 잠깐 와 얼굴을 비치고 내내 정원에 나가 있었다.

    요리하는 걸 돕기 싫어서 그런 거겠지.

    샤피로는 쯧쯧 혀를 찼다.

    “저건 뭐지? 방금 청소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샤피로는 벽과 벽 사이 구석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우러 다가갔다. 그런데 다가가는 순간, 미약하지만 이질적인 마력이 느껴졌다.

    그는 빗자루를 가져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쓰레기를 툭 쳤다. 그러자 그 밑에서 작은 종이 하나가 팔랑 뒤집혔다.

    “저건 마법진인데? 누가 감히 이런 짓을…….”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르니예 하나뿐이었으니.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진이라도 사 온 건가?

    샤피로는 종이를 자세히 보지 않고 르니예가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르니예는 장작을 쌓는 벽 옆으로 낙엽을 쓸어 모으고 있었다.

    “르니예 님, 어째서 마법진을 집 안까지 가져오신 겁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신 겁니까?”

    마법사가 있는 집에, 다른 사람의 마력이 담긴 물건을 몰래 가져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예의를 떠나서 공격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뭐라고, 샤피로?”

    빗자루가 바닥을 쓰는 소리가 그리 요란한 것도 아닌데 르니예는 잘 들리지 않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리 가까이 와서 말해 봐.”

    나이도 젊은데 벌써 귀까지 어두워졌나?

    샤피로는 르니예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아까와 같은 이질적인 마력을 느끼고 흠칫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도 마력이 느껴지는데…….”

    그는 발끝을 세워 낙엽 더미를 옆으로 치웠다. 바람으로 낙엽이 날아가고, 진의 일부분이 나타났다.

    커다란 진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지만 샤피로는 그게 어떤 진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건 사역마에게 마력을 빼앗는 진인데, 이걸 왜…….”

    샤피로가 놀란 눈으로 르니예를 쳐다보자 르니예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아쉽네, 한 발만 더 왔으면 되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