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좋은 남편의 조건
콜론 상단에는 금고가 여럿 있다. 그중 가장 귀한 물건이 들어 있는 금고는 콜론과 르니예만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된 것이다.
바로 에드윈. 아버지가 멀어지는 사위의 마음을 잡기 위해 큰 결심을 한 듯한데.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인 것 같은데, 아버지.”
르니예는 옷 속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열면 사진이 나올 것같이 생긴 목걸이였지만, 사실 그 안에는 열쇠가 들어 있었다.
금고의 안에는 콜론이 평생을 걸고 모은 목숨처럼 아끼는 보물들이 있었다. 밖에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 재가 되어도, 이 금고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비었네.”
금고에 있는 보석함 하나가 비어 있었다. 하필이면 그 자리는 딱, 벨데메르를 깨운 보석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여길 들어와서 이걸 훔쳤단 말이지.”
프리야가 상단으로 들어오려고 한 목적이 바로 그 새빨간 보석이었다는 것에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프리야는 아버지의 금고에 그 보석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애초에 이 금고의 존재는 어떻게 알았지? 게다 금고의 열쇠가 에드윈에게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 에드윈도 한패인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만일 에드윈이 먼저 보석에 대해 알아내고서 프리야를 끌어들인 거라면?
한 가지 의문이 풀렸다 싶더니, 그 뒤로 다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작은 마님.”
금고에서 나오자마자 에니가 기다렸다는 듯 르니예를 찾았다.
“누가 찾아왔습니다.”
“누가?”
“모르겠어요. 조사한 걸 보고하러 왔다고 하면 알 거라는데요?”
체이스다. 르니예는 그 집에서 유령 소동을 벌인 것을 모르는 척해 주는 대신 그에게 간단한 일을 하나 시켰다.
체이스는 발목까지 오는 시꺼먼 로브를 입고, 눈까지 가리는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 르니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단에 경계가 삼엄하군.”
체이스가 낡은 책 한 권을 품속에서 쓱 꺼내 르니예에게 건넸다.
“원래 외부인이 오면 다들 쳐다보고 그러나?”
“아니.”
상단은 말 그대로 장사를 하는 곳이다. 장사를 하는 곳에 외부인이야 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체이스를 흘긋거리는 이유는,
“그렇게 수상해 보이는 옷을 입고 오면 당연한 거 아냐?”
체이스의 옷차림에 있었다.
“앞으로는 그러고 오지 마.”
“앞으로? 그럼 나한테 또 뭘 시킬 거란 뜻이야?”
“그럼 겨우 한 번으로 넘어갈 줄 알았어?”
르니예는 체이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내용이 이게 다야?”
“그래.”
체이스가 들고 온 책에서 벨데메르가 언급된 부분은 세 줄로도 요약할 수 있었다.
벨데메르라는 위대한 마법사가 살았다. 그는 자신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금지된 주술을 행했다. 그러고는 영영 사라졌다.
“금지된 주술이 뭘까? 짐작 가는 거 있어?”
“글쎄.”
체이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마법을 배울 때 제일 처음으로 배우는 규칙도 금기이긴 한데.”
“그게 뭔데?”
“죽은 사람을 살리지 말 것.”
*
아직 신의 목소리가 남아 있던 때.
벨데메르는 자신의 한계를 넓혀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의 관심은 오로지 마법뿐이었다. 땅 위에 더 이상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자 그는 성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입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벨데메르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신이 인간에게 남겨 둔 금기를 넘어설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이.
그 금기를 넘어선 다음은 무엇인가?
금기가 신과 인간의 영역을 나누는 선이라면, 그것을 넘어선 순간 인간은 신이 되는가?
벨데메르는 그 생각에 너무 깊이 사로잡혔다. 하여 제 어린 딸을 살려 달라 온 부모를 그의 성안으로 들이고 말았다.
‘주인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들을 보아라, 가엽지 않으냐?’
죽은 딸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고 우는 부모를 쳐다보는 벨데메르의 눈동자에는 연민이 아닌 호기심이 가득했다.
‘가여운 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합리화했다.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실은 금기를 깰 좋은 핑계가 생겼을 뿐이었다.
벨데메르는 죽은 아이를 눕히고서 금지된 주문을 읊었다.
‘……명하노니, 눈을 떠라.’
기진맥진할 정도로 마력을 쏟아부었지만, 아이는 미동조차 없었다. 안 되는 것인가. 벨데메르가 포기하고 돌아서려던 그때 아이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정신이, 정신이 드느냐?’
‘그래, 정신이 드는구나.’
아이의 어깨를 흔들던 벨데메르의 손이 흠칫하며 떨어졌다.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금기를 깼구나.’
그것은 벨데메르 본인의 목소리였으며, 신의 음성이었다. 아이의 풀린 동공에 이채가 서렸다.
‘……제가 성공한 겁니까?’
‘지금 그게 궁금한 것이냐?’
아이가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방금 금기를 깼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금기를 깨지 않았다면 신이 직접 아이의 몸에 강림할 일도 없지 않은가. 벨데메르는 신의 노여움을 보지 못했다.
‘그래, 성공했고 넌 금기를 깼지.’
‘아이의 부모가 너무 가여워 그랬을 뿐입니다.’
벨데메르는 성공했다는 희열을 누르며 미리 준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소원이라고 매달리는 통에 거절할 수가…….’
‘그래? 그랬단 말이지?’
아이가 이죽거리며 웃었다.
‘네가 그리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할 줄은 미처 몰랐구나.’
아이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소원 몇 개 더 들어주는 건 네게 벌도 아닐 테지.’
결국 벌을 내린다는 뜻이었다. 겨우 소원 몇 개,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꺼이.’
하여 벨데메르는 선뜻 그 벌을 받겠다고 했다. 벌을 받은 다음에 신에게 맞설 방법을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벨데메르는 그 자리에서 조각상에 봉인되었다. 그러나 그 벌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죽은 아이를 깨울 때 쓴 그의 피가 봉인을 푸는 열쇠가 되었다. 그가 들어줘야 하는 소원은 아흔아홉 개.
그 열쇠를 들고 온 이가 비는 소원은 반드시 이뤄 줘야 했다. 처음엔 소원을 비는 규칙 같은 것은 없었다. 열쇠를 들고 오면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내 문제점이 드러났다.
‘부자가, 아니지, 그냥 부자라고 하면 얼마나 부자가 될지 모르는 일이지. 그냥 마을에서 제일 부자가 되는 정도는 안 되는데.’
어떤 이는 소원을 비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조각상 앞에서 일주일을 고민하며 벨데메르를 짜증 나게 만든 사람도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니, 활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잠깐만요, 아무래도 창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놈도 있었다. 소원을 들어주려고 하면 잠깐만요, 를 외쳐가면서 소원을 바꾸며 벨데메르의 성질을 긁었다.
‘소원 여러 개는 안 되나요? 소원 열 개를 더 들어주세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자연히 규칙이 늘었다.
그리고 최근에 규칙이 하나 추가되었다.
* * *
“남편이 되어 달라는 소원은 더 이상 안 된다.”
“물론입니다, 주인님. 그러면 애인은 어떻게 할까요?”
“애인?”
벨데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추상적이야.”
어서 소원을 들어주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르니예의 소원에서 막혀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되어 달라는 소원은 전부 금지다.”
아버지가 되어 달라, 스승이 되어 달라, 이런 소원은 추상적이어서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진작 알았다면 막아 놨을 것을. 하지만 누가 그런 소원을 빌 거라 짐작이나 했겠는가.
“구해 오란 것은 어떻게 됐지, 샤피로?”
“다 구했습니다.”
샤피로는 노끈으로 묶은 책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주인님께서 이런 책까지 읽으셔야 한다니.”
샤피로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말을 지키려 하는 것뿐이다.”
벨데메르는 테이블 앞으로 와 앉으며 자신의 종을 위로했다.
“종류가 다양하군.”
그는 테이블에 올려진 책의 제목을 먼저 살펴보았다.
[부인은 남편 하기 나름], [사랑받는 남편의 비밀], [나는 사랑받고 산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등등…….
벨데메르는 맨 위에 있는 책부터 집어 들었다. 좋은 남편이 되어 주겠다고 했는데, 도무지 좋은 남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부인을 존중하라.”
벨데메르는 종이에 책 내용을 적어가며 진지하게 ‘좋은 남편’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 이건 너무 당연하군.”
간혹 너무 당연한 내용이 적힌 책도 있었다. 벨데메르의 발치에는 그가 읽은 책이 한 권 두 권 쌓이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내용에 질릴 무렵, 벨데메르의 시선을 사로잡는 구절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벼운 키스로 잠을 깨운다?”
벨데메르는 저도 모르게 또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르니예의 촉촉한 입술이 다시금 떠올랐다.
“좋은 방법이군.”
벨데메르는 종이에 쓰고 강조의 표시를 해 넣었다. 르니예와 또 입을 맞추고 싶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는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이 매우 타당했기 때문이다. 아침을 즐겁게 시작해야 하루가 즐거우니 아침에 부인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일리 있는 주장인가.
* * *
“금지된 주술이 뭔지 더 자세하게 알아봐.”
르니예는 책을 다시 체이스에게 건넸다.
“너무 오래된 내용이라 쉽지가 않다니까.”
르니예가 은화가 든 주머니를 책 위에 올려 주었다.
“쉽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지.”
체이스는 얼른 주머니를 챙겨 넣었다.
“아, 그리고 광장에 한번 가 봐.”
“광장에? 왜?”
“자세히 보지는 못했는데 아무래도…….”
체이스가 목소리를 더 낮춰 르니예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에이, 설마.”
“혹시 모르니 가서 확인해 봐.”
르니예는 설마설마하며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은 영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영지의 어느 곳을 가든 광장은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광장은 항상 인파로 북적였다. 하지만 축제도 아니고 공문이 붙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저게 뭐지?”
“누가 가져다 놓은 걸까요?”
“이름 없는 예술가가 유명세를 얻으려고 한 짓이겠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르니예는 발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인파를 헤치고 들어갔다.
“……!”
그리고 르니예는 그곳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거기에 있으면 안 되는 물건이 거기에 있었다.
“저, 저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광장의 한가운데, 분명 산산조각 났던 벨데메르의 조각상이 온전한 모습으로 떡하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