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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9화 (9/120)
  • 9화. 마법의 조건

    “아직도, 자는 건가?”

    “금방 일어나실걸요.”

    어젯밤 벨데메르 몰래 나갔다 오는 바람에 늦게 잠든 르니예는 아직도 자는 중이었다.

    “들어가 보세요.”

    어차피 결혼한 사이니까 괜찮겠지. 한쪽은 중혼이라고 해도 말이야.

    에니가 문을 살짝 열어 주자 벨데메르는 못 이기는 척 르니예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네 주인은 이 아침부터 우리 아, 르니예가 보고 싶으셨나 보다.”

    에니는 몸을 빙글 돌려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지던 곳을 쳐다보았다.

    “아침이라니? 지금은 오전입니다. 곧 오후가 되겠군요.”

    샤피로는 제 회중시계를 들어서 에니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쪽 인간들은 남들과 조금 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상식이 없단 소리였다.

    “그런 인간에게 우리 주인님을…….”

    샤피로는 결혼식을 생각하면 아주 통탄스러웠다. 아무리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샤피로의 눈엔 벨데메르가 너무나도 아까웠다.

    “웃기네. 돈 한 푼 없어서 르니예에게 붙어사는 주제에 말이야.”

    집도 르니예가 해 줘, 옷도 해 줘, 결혼식을 하는데도 벨데메르는 한 푼 보태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벨데메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결혼식 날부터 죽상을 하고 있던 에드윈보다야 벨데메르 쪽이 훨씬 나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돈 한 푼 없이 르니예에게 빌붙어 산다고 했는데.”

    하지만 저 시종이란 놈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종일관 르니예를 가자미눈 뜨고 쳐다보는 것이, 마치 르니예에게 자기 아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고약한 시어머니 같았다.

    “주인님처럼 위대하신 분을 남편으로 모시려면 당연한 일입니다.”

    “위대?”

    에니가 비웃듯 말하자 샤피로가 발끈했다.

    “두고 보시죠. 곧 모든 사람이 주인님을 찬양할 테니.”

    * * *

    “으음.”

    르니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벨데메르는 침대 옆에 앉아서 가만히 그걸 쳐다보았다.

    누가 자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누가 죽어서 누워 있는 건 본 적 있어도 자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자는 걸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 적어도 죽은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짹짹짹짹짹-

    창문 바로 앞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울었다. 조용히 감상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은 벨데메르는 버릇처럼 마법을 썼다.

    “……안 되는 건가.”

    역시 입을 맞춰야만 하는 건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절대 르니예와 입을 맞추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벨데메르?”

    “일어났나?”

    벨데메르가 그 작고 통통한 입술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이는데, 르니예의 눈이 뜨였다. 벨데메르는 당황함을 감추며 다시 허리를 폈다.

    “여긴 어쩐 일로.”

    자다 일어난 르니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물.”

    “물?”

    물을 달라고 한 건 아니었다. 물을 마셔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한다는 걸 밖으로 내뱉은 거였다.

    “자, 물 여기……!”

    “그거 지금 마, 마법으로 한 거 아니에요?”

    당황하지 않은 척했지만 당황했던 벨데메르는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서 다시 마법을 써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됐다.

    “입을 맞추지 않아도 되나 봐요.”

    르니예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컵을 신기한 듯 잡았다.

    “조금 전에는 안 됐는데.”

    의문이었다. 어제부터 마법은 됐다 안 되기를 반복했다. 도대체 어떤 건 되고, 어떤 건 안 되는 거지?

    “이상하군.”

    벨데메르는 내친김에 테이블을 옆으로 치워 보려 했다. 마력은 느껴졌지만 마법으로 발현되지는 않았다.

    벨데메르는 지금까지 발현이 되었던 것과 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비를 막는 것, 꽃을 피우는 것, 물컵을 가져오는 것은 됐고, 나머지는 되지 않았다.

    그것들 사이에 차이점은 딱 하나뿐이었다.

    “뭐든 보고 싶은 마법이 있나?”

    르니예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

    “지금요?”

    “그래, 지금.”

    갑작스러운 질문에 르니예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손에 든 물컵을 들어 올렸다.

    “이걸 제자리에 돌려놓는 거?”

    “그래, 그러지.”

    르니예의 손에서 물컵이 스르륵 빠져나가더니 테이블로 향했다. 벨데메르는 손가락 끝에서 형태가 없는 마력이 형체가 있는 것으로 변환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무래도 너를 위해서만 마법을 쓸 수 있는 모양이군.”

    * * *

    “어제는 어딜 다녀온 거야, 프리야.”

    “집.”

    “집에 다녀왔다고?”

    그 늦은 시간에 집을 다녀온다고? 프리야는 해가 질 무렵 나가서 새벽녘에 들어왔다.

    “그래, 집.”

    프리야의 대답에도 성의라고는 없었다.

    “좋은 소식을 들었으니 아버지한테 알려 드려야지.”

    바딜은 의심스러운 듯 보였지만 더 따지고 들진 않았다. 바딜은 에드윈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걸 갚으려 라포어 가문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는 에드윈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할 때도 곁을 지켰다. 에드윈이 르니예와 프리야 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곁을 지켰다.

    그 역시 프리야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래야지. 말씀드렸더니 어때, 좋아하셔?”

    “그렇지, 뭐.”

    그래서 바딜은 프리야가 수상한 짓을 한다고 에드윈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프리야를 아끼는 에드윈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프리야의 비밀을 저만 알고 있다는 게 좋았다.

    에드윈 앞에서는 꼭꼭 숨기는 본모습을 제게만 보여 줄 때는 뿌듯하기까지 했다.

    프리야가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에드윈이 아니라 자신인 것만 같아서.

    “그럼 난 작은 마님 방을 청소해야 해서, 가 볼게.”

    프리야는 바딜을 지나쳐 르니예의 방으로 향했다. 귀찮은 놈. 아주 가끔 유용하긴 했지만 대체로 프리야를 귀찮게 굴었다.

    “넌 소원을 빌었을까, 못 빌었을까.”

    프리야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르니예가 버려진 신전으로 가는 지도와 조각상을 깨우는 작은 보석을 넣어 놓은 상자였다.

    프리야는 만일에 대비해 그 작고 새빨간 보석을 가품으로 바꿔 놓았다. 그리고 원래 들어 있던 것은 자신이 챙겼다.

    “대놓고 물어보고 싶네.”

    신전 안에 조각상은 없었다. 르니예가 소원을 빌어서 조각상이 사라진 걸까. 아니면 르니예도 갔다가 허탕을 친 걸까.

    지금까지 정황으로 미뤄 보면 르니예도 소원을 이루지 못한 듯했다. 르니예가 소원을 빌었다면 에드윈에 관련된 것을 빌었을 텐데.

    “사랑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이런 걸 빈 건 아니겠지?”

    * * *

    “이혼을 서둘러야겠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는데도 들켰다. 그러니 같은 마을에 살면서 두 집 살림을 하면 어떻겠는가.

    “작은 주인님이야 그렇다 쳐도 상단주께서 허락을 하실까요?”

    “당연히 안 하시겠지.”

    르니예와 에드윈의 결혼식 날, 신랑 신부보다 콜론의 얼굴이 더 피어 있었다. 비록 본인은 돈만 많은 평민이었지만, 자기 딸은 돈도 많은 귀족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시게요?”

    “아버지 몰래.”

    그러니 르니예가 이혼을 한다고 하면 아마 곡기를 끊으면서라도 반대할 게 분명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일단 이혼을 한 다음에 말하면 어쩌겠나. 충격은 받아도 천천히 받아들이시겠지.

    하지만 먼저 충격을 받은 쪽은 르니예였다.

    “에드윈이 뭘 해요?”

    “상단 운영을 배우겠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아버지는 뭐라고 했는데?”

    콜론은 당연한 것을 뭘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된다고 했어요?”

    “그래.”

    르니예는 기가 차 무릎에 힘이 쭉 빠졌다.

    상단으로 돌아오자마자 들은 소식이 에드윈이 장부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상단 운영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에드윈이!

    “된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갑자기 그러는 거 이상하지도 않아요?”

    “글쎄. 네가 이혼하자고 하니까 갑자기 정신이 들었나 보지.”

    콜론이 날카로운 눈으로 르니예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아셨대, 그건.”

    “벽에도 귀가 있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콜론은 르니예가 협박성으로 이혼 이야기를 꺼낸 줄로 추측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석 달 전에 그 열쇠를 줬다.”

    르니예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그 열쇠를 에드윈에게 주셨다고요?”

    상단 안에는 금고가 여러 개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꼭꼭 숨겨져 있는 금고의 열쇠는 콜론과 르니예만 가지고 있었다.

    콜론은 지금 그걸 에드윈에게 줬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걸 나랑 상의도 없이 줬다고요? 아버지, 진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짜증이 확 올라왔다. 잔뜩 신경질을 내며 방으로 들어가는 르니예를 보며 콜론이 고개를 저었다. 잔뜩 신경질을 내고 나가는 르니예의 뒤로 문이 부서질 듯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콜론은 혀를 끌끌 찼다.

    “저거, 저 성질머리, 누구 닮아서 저래?”

    “거참, 이혼하기 어렵네.”

    이혼하자고 하면 당장 하자고 할 줄 알았더니. 에드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갑자기 상단 운영에 관심을 보이는 건 또 뭐고?

    “나한테 미련이라도 남은 건가?”

    그럴 리가 있어? 미련이 남았다면 내가 아니라 우리 집 재산에 남았겠지.

    “이혼을 자꾸 미루는 게 혹시 위자료를 많이 받고 싶어서 그런 건가?”

    르니예는 한숨을 푹 쉬며 서랍장 앞으로 갔다.

    서랍 옆에 보이지 않게 붙여둔 실이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서랍을 열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훔쳐 간 걸 알았나 보지?”

    르니예는 서랍을 열어서 상자를 확인했다. 일부러 대충 숨겨 놓았다. 프리야가 찾으러 오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가져가지는 않았네. 일단 확인만 해 본 건가.”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깨우는 열쇠라는 그 새빨간 보석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건 가짜다. 실제 보석은 벨데메르가 가져가 버려서 보석상에 의뢰해 똑같이 생긴 가품을 만들어 넣어둔 것이었다. 프리야가 속기를 바라면서.

    “가짜인 걸 알았나? 어째서 확인만 하고 가져가지는 않았지?”

    보석을 만지작거리던 르니예는 뒤통수를 때리듯 스치는 생각에 눈썹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금고 열쇠를 에드윈에게 준 것도 석 달 전, 프리야가 우리 상단에 들어온 것도 석 달 전?”

    * * *

    “주인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소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소원에 대해 생각하는 중간중간 르니예의 입술이 자꾸 떠올라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큰 생각의 줄기는 르니예가 빈 소원에 관한 것이었다.

    “소원이 이뤄지는 중이라 르니예를 위해서만 마법을 쓸 수 있는 듯해.”

    “참 성가신 소원입니다.”

    소원을 언제까지 이뤄 줘야 한다, 이런 조항은 없었지만 하나의 소원에 계속 매여 있는 것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마력이야 그렇다 쳐도 소원은 왜 이뤄지지 않는 걸까요?”

    샤피로는 의문이었다. 그들은 식을 올렸다. 그렇다는 건 부부가 되었다는 뜻이고,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아내가,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남편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보통 소원은 액면가 그대로 행해지면 이뤄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번은 예외였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샤피로.”

    “그게 뭡니까, 주인님.”

    “소원을 들어주면서 좋은 남편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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