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8화 (8/120)
  • 8화. 실험의 결과

    “실험이라면…….”

    키스를 하면 마법을 쓸 수 있는지 실험을 한다는 거잖아?

    르니예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벨데메르는 마법사니까 마법을 못 쓰면 많이 불편하죠?”

    “그렇다.”

    르니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와야겠지? 그래도 내 소원을 이뤄 준다고 맹세의 키스까지 한 사람이잖아.

    기분 나쁘다고 손끝이 닿는 것도 싫어하던 벨데메르였다. 오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르니예는 기꺼이 실험을 돕기로 했다.

    절대 벨데메르와 입을 또 맞추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그러면 한 번만…….”

    르니예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럼…….”

    벨데메르는 그 큼직한 손으로 르니예의 볼을 감쌌다. 다른 이의 살이 닿는 것은 언제나 불쾌한 일이었으나, 르니예는 달랐다.

    손바닥으로 착 감기는 말랑말랑한 볼의 감촉은 이대로 멈춰 있어도 좋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그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르니예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벨데메르는 천천히 다가가 입을 맞췄다.

    아까처럼 촉촉했고, 여전히 부드러웠다.

    맹세의 키스를 하기 전, 영 내키지 않아 굳게 결심해야 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좋았다.

    “……으응.”

    누구 애를 태워 죽일 생각인지 닫힌 채 열리지 않는 입술을 혀로 핥자 르니예의 입에서 새된 숨이 흘러나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벨데메르의 혀가 르니예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의 혀는 고른 치열을 핥고 여린 입 안을 샅샅이 훑었다.

    탐색이라도 하는 듯 르니예의 입 안을 휘젓고 다니던 혀가 르니예의 혀를 낚아챘다.

    혀뿌리를 간질이다가 제 쪽으로 강하게 빨아 당긴다. 르니예는 감고 있는 눈앞이 어지러웠다.

    “……흐으.”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집요하게 붙여 오는 입술에 르니예가 고개를 틀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 잠깐도 허락지 않겠다는 듯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허리를 강하게 휘어 감아 바짝 당겼다.

    “으, 읍!”

    결국 르니예가 벨데메르의 어깨를 두드려 자신의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이라는 걸 알리고서야 키스는 끝이 났다.

    낯부끄러운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에 르니예는 얼굴을 붉혔다. 지나치게 깊은 입맞춤이었다.

    손도 잡기 싫다던 사람과 하기에는 더더욱.

    “저기, 벨데메르, 이제 놔주세요.”

    “아.”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허리를 잡은 손을 풀어 주었다. 그때까지 그는 르니예를 안고서 가쁜 호흡을 뱉는 입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바짝 붙어 있던 온기가 떨어지는 느낌이 아쉬웠다. 원래대로라면 싫어야 하는데, 소름이 끼쳐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원래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이었던가.

    저를 함부로 만졌다가 손목이 잘린 사람이 듣는다면 아주 억울할 이야기였다.

    “벨데메르?”

    “……왜 그러지?”

    벨데메르는 저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눈과 시선을 맞췄다.

    또 하고 싶은 건가?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시선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실험 안 해요? 마법 쓸 수 있는지 해 봐야죠.”

    다행히 벨데메르가 달려들기 전 르니예가 그를 부른 목적을 밝혔다.

    “아.”

    벨데메르는 벌써 몇 번째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흩어지는 정신을 애써 모았다.

    마법을 쓸 수 있는지 봐야지.

    그건 까먹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벨데메르는 반쯤 열린 창문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보통은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창문은 닫히기 마련이었다.

    “…….”

    그러나 주문을 읊어도 창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안 되는군.”

    키스로 되는 게 아니었던가?

    벨데메르의 손이 허공에서 방향을 잃고 축 처졌다.

    왜 안 되는 걸까? 아까와 같은 조건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르니예의 뇌리에 불현듯 스치는 것이 있었다.

    “벨데메르, 그, 있잖아요.”

    르니예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건 절대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서론이 길었다.

    “아까랑 지금이랑 실험 조건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 다르지?”

    “아까 마법을 썼을 때는 키스를 한 다음이 아니라 키스를 하는 도중이었잖아요.”

    르니예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벨데메르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해 보면 어때요? 이번에는 저 촛불을 켜는 걸로.”

    르니예가 꺼져 있는 촛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불을 만드는 것이 가장 초급 마법이라고 어디서 주워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럼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붙었다. 망설임이라고 사라진 벨데메르는 거침없이 입술을 붙여 왔다.

    정열적인 입맞춤은 르니예의 뒷목이 꺾일 정도라 벨데메르가 그 목 뒤를 받쳐 주어야만 했다.

    “마, 으, 마법, 을, 흐으.”

    르니예는 고개를 비틀어 틈도 없이 붙여 오는 입술을 간신히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마저도 벨데메르에게 삼켜져 버렸지만.

    벨데메르는 여전히 입술을 붙인 상태에서 촛불을 향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허공에 진을 그리는 듯한 움직임 끝에, 아주 작고 푸른 빛이 일렁이더니 이내 불이 붙었다.

    “으음! 음!”

    불붙은 초를 본 르니예가 흥분해 벨데메르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그제야 입술을 떼고 돌아본 곳에는, 제가 마법으로 켠 촛불이 선명히 일렁이고 있었다.

    “역시 하는 도중에 해야 하나 봐요.”

    주어와 목적어가 빠진 문장도 벨데메르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마법을 쓰려면 하는 수 없군.”

    전혀 아쉽지 않다는 말투로 벨데메르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번엔 좀 더 상급 마법을 써 보고 싶은데.”

    “어떤 게 상급 마법인데요?”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비를 맞은 부케가 테이블 위에서 시들어 가고 있었다.

    “저 꽃을 다시 싱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건 상급이라기보다 중급에 가까웠지만, 이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것 중엔 가장 높았다.

    “그런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궁금한가?”

    “네, 궁금해요.”

    그렇게 말한 르니예가 땅을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꽃도 버리기 아깝고, 그 마법도 좀 궁금하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르니예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 전에 벨데메르가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리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에니가 르니예에게 돈이 마련되었다고 이야기하러 문을 열었을 땐,

    “아, 죄송해요. 하던 거 마저 하세요.”

    테이블 위 올려진 부케는 꽃송이가 만개하다 못해 뿌리가 날 지경이었다.

    “실험은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샤피로는 벨데메르가 들어오는 소리에 책을 덮었다. 그가 실험하겠다며 뛰쳐나갔을 때 처음으로 폈던 것이 지금은 반 이상 넘어가 있었다.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

    입을 맞출 때마다 마법이 성공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번은 성공했다. 샤피로는 하도 비벼대서 빨갛게 부어오른 제 주인의 입술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다시 해 보셔야겠네요?”

    “그렇겠지.”

    벨데메르는 내내 르니예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쥐었다 펴며 말했다.

    “마법을 쓰지 못하니 아주 불편하군.”

    샤피로는 그런 주인의 모습을 보며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중얼거렸다.

    “그러시겠죠.”

    아무렴.

    * * *

    “냉찜질이라도 하고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그 정도 아니거든?”

    “그 정도 같은데.”

    에니는 르니예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벌써 팅팅 부을 조짐이 보였다.

    “입술 따가워서 물도 못 드시는 거 아니에요?”

    “하나도 안 따가, 아!”

    르니예는 혀로 입술을 핥다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따갑네.”

    “보습제를 드릴게요. 듬뿍 바르고 주무시면 좀 나을걸요. 이러려고 가져온 건 아닌데.”

    에니가 소리 죽여 킥킥 웃었다. 르니예는 시뻘게지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저 실험일 뿐이었다. 어쩐지 그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서, 르니예는 책임감이 들었다.

    아주 조금 좋기는 했다. 그의 키스 실력이 하면 할수록 늘어서 나중에는 아주 능숙해졌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눈을 뜨면 보이는 벨데메르의 얼굴은 환상 그 자체여서 아주 은밀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방이 아주 후끈하던데.”

    “그만 놀려, 에니.”

    르니예가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여기서 더 놀림 받았다가는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준비는 다 됐어?”

    “네.”

    에니는 커다란 짐가방을 슬쩍 들어 올렸다. 멀리서 건들거리는 인영이 보였다.

    “저기 오는군.”

    남자는 돈을 벌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바닷가에서 그런 행운을 만나다니.

    “이런 걸 운이라고 하는 거지.”

    스텐은 콜론 상단에서 노역꾼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스텐에게는 다행히, 르니예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때가 하필이면 르니예와 에드윈이 결혼을 하던 시기였다.

    평민과 귀족의 결혼이라 워낙 말이 많았고 스텐은 르니예를 보면서 생각했었다.

    예쁘긴 하지만 절세미인은 아니군. 역시 돈으로 남자를 사 오는 거였나, 하고.

    그래서 바닷가 야외 결혼식장에서 르니예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돈은 거기에 있나 보지?’

    그는 인사 따위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인사를 하기엔 에니가 메고 있는 가방이 워낙 잘 보이는 탓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아가씨가 가진 돈에 비하면 그건 새 발의 피도 안 되잖아?”

    “그건 그렇지.”

    르니예가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지. 당신 아니었으면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는데.”

    이래서 부자들이 더하다는 말이 나온 거라니까. 스텐은 혀를 내둘렀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네.

    “남편 둘 데리고 사는 대가라고 생각해.”

    “그럴게.”

    르니예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에니가 가방을 어깨에서 내리자 스텐이 히죽히죽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감사히 잘…….”

    그가 바닥에 놓인 가방을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가방을 가져가는 손이 있었다.

    “뭐야?”

    스텐은 허리를 숙인 채 고개만 들었다. 웬 우락부락한 노인이 그의 것이었어야 할 가방을 열어 보고 있었다.

    “금액은 대충 맞아 보입니다.”

    “넉넉하게 넣었어요, 선장님.”

    르니예가 노인을 보며 말했다.

    “뭐냐니까?”

    스텐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서 노인이 들고 있는 가방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때, 노인의 뒤에서 네다섯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

    “뭐, 뭐야!”

    그들은 스텐의 양팔을 단단히 잡았다.

    “내가 당신 일자리를 좀 알아봤어. 아까운 인생, 남 협박이나 하면서 살아서야 쓰겠어?”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맞다. 르니예는 콜론의 딸이다. 그리고 콜론은 제 딸을 그리 나약하게 가르치지 않았다.

    “무역선이야.”

    무역선은 언제나 일손이 부족하다. 스텐을 데려가 일꾼으로 쓰는 조건으로 선장에게 금화 25닢을 건넸다.

    스텐이 요구한 돈의 딱 반이었다.

    “너, 이 나쁜, 돌아오면 두고 보라고, 어?”

    스텐은 끌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새벽에 출발하는 무역선을 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땐, 모든 게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결혼 두 번 하니까 이런 수준 낮은 협박도 받아 보고, 새롭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