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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7화 (7/120)
  • 7화. 맹세의 키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신랑과 신부는 맹세의 키스를 하십시오.”

    신관의 말에 르니예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손도 안 잡는, 아니 못 잡는 사이에 키스라니.

    르니예는 신관을 향해 그 절차는 생략하자는 눈빛을 보냈다.

    “어서 맹세의 키스를……?”

    신관은 르니예가 눈으로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맹세의 키스를 해야 이게 결혼했다는 증명이 되는 건데…….”

    르니예가 면사포 안에서 작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돈 받고 가짜 주례를 서면서 이 정도 임기응변도 못 한단 말인가.

    르니예는 신관을 향해 계속해서 무언의 메시지를 쏘아 보냈다.

    “그러면 맹세의 키스는 한 거로 치고.”

    “잠깐.”

    다행히 신관이 눈치를 채고 맹세의 키스를 넘기려고 할 때였다. 이제 돌아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벨데메르가 돌연 신관의 말을 잘랐다.

    “맹세의 키스를, 하겠다.”

    벨데메르의 발언에 샤피로와 르니예는 놀라서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손잡는 것도 싫다는 사람이 키스를 하겠다니.

    “꼭 하지 않아도 돼요, 벨데메르.”

    그러다가 키스하고 기절하면 어떡하지?

    아무리 이게 가짜 결혼식이라고 해도 맹세의 키스를 하고 난 뒤 기절하는 신랑을 보고 싶진 않단 말이다.

    “소원은 이뤄져야 한다.”

    결혼식을 제대로 치러내지 못하면 소원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채로 있을지도 모르니. 소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웬만하면 빨리 이뤄지면 더 좋고.

    소원 하나를 가지고 질질 끄는 것은 봉인이 되어 있는 시간만 늘릴 뿐이다.

    “그저 가벼운 입맞춤일 뿐이야.”

    르니예에게 하는지 본인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면사포를 살짝 걷었다.

    통통한 입술이 당황한 채 꾹 맞물려 있었다.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어깨를 살짝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입술에 촉촉한 것이 닿자 벨데메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은 그의 첫 입맞춤이었다.

    한데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억지로 하는 입맞춤치고, 입술에 닿는 감촉이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르니예의 떨림이 맞붙은 입술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통통한 입술에 뭘 발랐는지 약간 단맛도 나는 듯해서 벨데메르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그 입술 틈새를 살짝 핥았다. 그러자 르니예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리고 지켜보는 이들의 동공도 흠칫흠칫 떨렸다.

    “…….”

    ‘네 주인 좀 어떻게 해 봐, 하는 짓이 완전 변태 아니니?’라고 에니가 눈을 부라리며 샤피로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

    주인님? 주인님 어째서 그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으시는 겁니까?

    샤피로는 그들의 입맞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큰 충격에 빠졌다.

    “크흠.”

    아주 불이 붙었군, 붙었어.

    좀처럼 끝나지 않는 맹세의 키스에 신관이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장 당황스러운 건 역시 르니예였다. 르니예는 마치 입술을 열어 달라고 재촉하는 듯한 그의 혀에 입을 열어 줄 뻔했다.

    그런 그들의 입맞춤을 방해하려는 듯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이 순식간에 소나기처럼 변했다.

    “……우으, 음!”

    빗줄기에 르니예가 벨데메르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게, 벨데메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르니예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이 성가신 빗방울을 처리하려 반대쪽 손을 휘저었다.

    그다음 순간, 아담한 결혼식장 위로 얇고 투명한 막이 생긴 듯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고 튕겨 나갔다.

    “주인님.”

    샤피로의 눈동자는 놀라 튀어나올 기세였다.

    “지금 마법을 쓰신 겁니까?”

    “이, 이거 마법이에요?”

    에니와 신관은 어리둥절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법은 흔했다. 하지만 이런 마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힘이 돌아오셨어, 주인님의 힘이 돌아오셨다고!”

    샤피로가 하늘을 쳐다보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누군가는 미친 듯이 웃고, 누군가는 어리둥절하며, 누군가는 키스에 빠져 있는 광기 어린 결혼식이었다.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

    “물론이죠.”

    신관은 금화가 짤랑이는 주머니를 확인하고는 안주머니 속으로 깊게 찔러 넣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입이 무겁지 않으면 이 일 오래 못 하니까. 그럼 저는 이만.”

    그는 후드를 눌러쓰며 어느새 비가 잦아든 밖으로 향했다. 두둑한 수입을 챙긴 그의 걸음걸이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이제 다 끝난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신관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르니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깨너머로 듣자 하니, 소원이 이뤄지면 벨데메르는 다시 조각상에 봉인된다고 했다.

    결혼식까지 했으니 벨데메르는 다시 조각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

    “202호실 손님이시죠?”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다 만난 여인숙 직원이 르니예에게 알은척을 해 왔다.

    “네, 맞는데요.”

    “손님이 찾아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 손님이요?”

    찾아올 손님이 없는데.

    르니예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손님에게로 갔다.

    “저를 보자고 하셨어요?”

    “맞습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혹시나 에니가 아는 사람일까 하여 에니를 쳐다보자, 에니도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투박한 손바닥을 쓱쓱 비비며 르니예를 아래위로 훑었다.

    “누구시죠?”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가씨. 내가 뭘 알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남자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집에 돈이 많아도 그렇지, 남편을 또 들이다니 너무한 거 아뇨?”

    남자의 말에 르니예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는다고 찾은 것인데. 역시 더 먼 곳으로 갔어야 했나?

    “내가 알고 있는 걸 아가씨 남편도 아나?”

    “얼마.”

    “뭐?”

    “얼마를 원하냐고.”

    르니예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이런 놈들이 원하는 거야 뻔했다. 돈푼이나 쥐려고 협박을 하러 왔겠지.

    “이거면 돼?”

    르니예는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서 남자에게로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금화를 잡은 남자는 금화를 손가락에 끼우고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겨우 하나? 됐어, 이런 거 받으려고 온 거 아냐.”

    남자는 르니예 쪽으로 다시 금화를 던졌다.

    “적어도 50골드는 줘야지.”

    “하, 참.”

    그 터무니없는 금액에 르니예와 에니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 돈이면 집을 두 채 사고도 남았다.

    “아니면 나는 아가씨 남편한테 가야지 뭐.”

    “……좋아.”

    르니예는 남자가 내민 금화를 다시 그의 쪽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이건 계약금.”

    “잔금은?”

    “오늘 자정, 부둣가로 나와.”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며 금화를 주머니에 쏙 챙겼다.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졌고, 르니예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돈을 준비해야겠다, 에니.”

    * * *

    촉촉했지.

    벨데메르는 여전히 입술에 그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르니예의 입술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제 입술에 뭉개지는 그 통통한 입술은 금방이라도 안을 허락할 듯하다가도 이내 꾹 닫혔다.

    혀끝으로 와 닿는 감촉은 감질나 애가 끓었다.

    입을 맞추는 느낌이 이런 것이었던가.

    벨데메르는 촉촉하게 감겨드는 입술에서 떨어지기 위해 꽤 애를 써야 했다.

    “……님?”

    “뭐라고 했나, 샤피로?”

    벨데메르는 아까부터 넋이 나가 있었다. 샤피로는 영 정신을 못 차리는 제 주인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다.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주인님.”

    “그래, 확실히 이상해.”

    눈을 감으면 반쯤 들어 올려진 베일 아래의 르니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그래진 갈색 눈동자와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어째서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을까요?”

    맹세의 키스까지 끝냈는데도, 여전히 르니예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벨데메르의 팔뚝에 있는 숫자도 그대로였고 무엇보다 벨데메르는 조각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마법은 또 어떻게 된 거고요.”

    르니예와 입을 맞추면서 벨데메르는 분명히 마법을 썼다. 그러나 방으로 돌아왔을 땐 그 힘이 다시 사라진 뒤였다.

    “마법이라.”

    마법에 걸린 것 같기는 했다. 르니예의 입술에서 떨어질 때 나던 촉- 소리가 아직도 귀에 어른거리는 걸 보면.

    “주인님,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벨데메르가 조각상에 잠들어 있는 동안, 샤피로는 인간이 쓴 책을 탐독했다. 꽤 많은 이야기에서는 마법에 걸린 주인공이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받고 깨어나곤 했다.

    “르니예 님과 키스를 해야만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 * *

    “여기가 맞는 거야?”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나로 꽉 묶은 프리야는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이 복잡한 길을 잘도 찾았네.”

    프리야는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잃어버린 지도는 르니예의 서랍장 안에 고이 숨겨져 있었다.

    처음에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으로 가는 지도와 그의 잠을 깨우는 열쇠가 사라졌을 때 다른 사람을 의심했다.

    “저건가?”

    프리야는 어렴풋이 보이는 신전의 형상을 따라 걸었다. 에드윈에게 집착하던 르니예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을 때, 감이 딱 왔다.

    쟤가 가져갔구나, 내 보물을.

    해서 르니예가 여행을 간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방을 뒤졌더니, 예상대로 르니예의 방에 있었다.

    “욕심도 많지. 돈도 많으면서 무슨 소원을 또 빈다고 여길 왔어.”

    듣는 사람도 없는데 비아냥거리며 걷던 프리야는 어느새 신전 앞에 도착했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조각상은 신전의 지하에 잠들어 있다고 했다.

    계단 하나하나 내려갈수록 프리야의 입매가 길쭉하니 늘어졌다.

    드디어 소원을 이룰 때가 온 것이다.

    “……이게 무슨”

    프리야의 황망한 목소리가 텅 빈 지하실을 울렸다.

    “아무것도 없잖아!”

    * * *

    소원은 이뤄졌을까? 벨데메르는 조각상으로 돌아가는 걸까? 그 며칠 새에 정이라도 들었는지 벨데메르가 다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서운했다.

    “자나?”

    “아니요, 들어오세요.”

    르니예가 딱 벨데메르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방으로 찾아왔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건가요?”

    “아니. 소원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예?”

    역시 에드윈의 존재 때문이다. 에드윈이 남편으로 있으니, 벨데메르는 따지고 보면 르니예의 정부나 마찬가지였다.

    에드윈과 이혼을 하게 되면, 벨데메르가 자연히 남편이 될 것이고 그러면 그는 조각상으로 돌아가 다음 소원을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르니예는 두 남편을 모두 잃을 것이다. 하지만 중혼으로 고소당해 감옥에서 10년 썩는 것보다야, 외로운 편이 훨씬 낫지.

    “그리고 마법도 다시 쓰지 못하게 됐다.”

    “아까는 쓸 수 있었잖아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르니예는 머리가 복잡해 눈썹을 찌푸렸다.

    “아까는 되고 지금은 안 되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르니예는 벨데메르가 마법을 썼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비가 내렸고 그들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설마…….”

    “그래, 입맞춤 때문인 것 같군. 해서 다시 실험해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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