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화 (4/120)
  • 4화. 그의 사역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샤피로가 금방 덧붙여 말했다.

    “당연히 유령도 아닙니다.”

    “그건 알겠고, 그래서 뭔데?”

    사람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고, 하지만 말도 하고 시중도 들고, 심지어는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기도 하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예전에도 르니예 님 같은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샤피로가 먼 데를 바라보며 회상하듯 말했다.

    “주인님의 얼굴을 보겠다고 찾아온 인간들이 왕국 하나 세울 만큼 몰려들었었죠.”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고, 문 앞에서 벨데메르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노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 그런 날이 그리워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연서는 매일같이 산처럼 쌓였습니다.”

    연서에 묻혀 중요한 편지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벨데메르는 사역마를 만들기로 했다.

    “제 주인께서는 사역마 하나를 만들어도 평범하게 만들지를 못하시는 분입니다.”

    단순히 편지 분류 작업을 위해 만든 사역마였는데 만들다 보니 너무 잘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 ‘너무 잘 만든 작품’이 바로 샤피로였다. 그러니까 그는 정말로 말하는 인형이었던 것이다.

    “사역마가 뭔지는 아시겠죠?”

    “본 적도 있어요.”

    물론 샤피로처럼 만듦새가 좋은 건 아니었다. 대체로 벌레 모양이거나 새 혹은 쥐 같은 작은 짐승의 모양이었고 자세히 보면 종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티가 나는 것들이긴 했지만.

    “그러면 벨데메르는 마법사인 거예요?”

    “그렇다.”

    마법사치고 몸이 너무 좋은데.

    기사 중에서도 골격이 큰 에드윈의 몸에 맞춰 제작한 셔츠를 입혔는데도 헐렁하지 않고 잘 맞았다.

    “르니예 님께서는 아주 위대한 마법사를 남편으로 두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샤피로는 실망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해서 좀 특별한 분인 줄 알았는데……. 어쨌든 르니예 님께서 농간을 부리신 건 아닌 듯합니다.”

    “농간이라뇨?”

    사역마 따위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농간을 부렸다는 누명까지 썼단 말인가?

    르니예는 샤피로를 흘겨보며 물었다.

    “주인님께서 마법을 쓰지 못하시는 이유가 르니예 님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샤피로는 벨데메르의 셔츠 깃을 정리해 주고는 한발 물러섰다.

    “마법과 유령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잠깐만.”

    르니예는 샤피로가 한 말을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마법을 못 쓰신다고요?”

    “그렇게 되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면, 나한테 해코지를 하지 못하겠지?

    르니예는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쉴 뻔했다.

    그러나 저를 쳐다보는 사역마의 새파랗게 불타는 눈동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으로 해코지를 하지는 못해도, 사역마를 시켜서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잠깐만.”

    “또 뭐지?”

    “유령이 아니라 마법이라고요?”

    아까 본 그 허여멀건 게 유령이 아니라고?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르니예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스쳤다.

    “분명히 봤는데, 유령.”

    “환영이겠지.”

    “그러면 이 집에 누군가 숨어서 마법을 쓴다는 뜻이에요?”

    르니예의 질문에 벨데메르는 한숨을 쉬었고, 샤피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밖에서 지켜보다가……?”

    벨데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겠지만, 르니예는 자신의 아내였으므로 벨데메르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 보기로 했다.

    “이 집 자체에 마법을 걸어 둔 것이다. 곳곳에 마석으로 진을 그려 놨더군.”

    “지하실에 가니 실험실도 있었습니다.”

    르니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하실은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유령이 나온다고 하여 사람을 몇 번이나 보내 유령을 잡으려 했었다. 그때 지하실에도 내려가 보았지만, 실험실 같은 건 없었다.

    “투명화 진 때문이다. 지워 놓았으니 내려가면 이제 보일 것이다.”

    르니예는 그대로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단숨에 지하실로 내려간 르니예는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의심해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진짜 실험실이잖아.”

    마법 약물을 만들 수 있는 장치가 떡하니 지하실 중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곳곳에 레시피와 아무렇게나 한 메모가 널려 있었고, 한구석에는 몸을 쉴 수 있는 간이침대도 있었다.

    르니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떤 놈이야, 무단 점거를 한 게.”

    르니예가 지하실에 내려간 사이, 벨데메르와 샤피로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째서 벨데메르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었는가.

    조각상에 갇혀 있을 때에도, 소원을 들어주고자 하면 잘만 사용하던 마법이었는데.

    “주인님.”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샤피로가 입을 열었다.

    “의심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뭐지?”

    “소원이 이뤄지지 않은 건 아닐까요?”

    벨데메르는 자신을 조각상에 봉인한 저주를 깨기 위해서 아흔아홉 개의 소원을 들어줘야 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동안 그는 신의 권능에 맞먹는 힘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그는 다시 조각상 안에 들어가 죽음과 같은 잠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 르니예의 소원을 들어주고 나서도 벨데메르는 여전히 사람의 모습으로 깨어 있었다.

    “주인님께서 다시 봉인되지 않으신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벨데메르가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자 팔목에 문신처럼 새겨진 ‘L’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번 소원이 몇 번째였지, 샤피로?”

    “오십 개째였습니다.”

    “네 말이 맞았군.”

    르니예의 소원이 이뤄졌다면 그의 팔에는 ‘Ll’ 즉, 51개라는 글자가 떠야 옳았다.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어.”

    미스터리에 실마리가 잡히는 듯싶었다.

    “하지만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조각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

    “소원이 이뤄지는 중인 건 아닐까요, 주인님?”

    소원이 이뤄지는 중이라. 일리가 있었다. 다른 소원과 다르게 르니예의 소원은 추상적이었다.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신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벨데메르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소원을 들어주며 온갖 기상천외한 소원을 들었지만, 그렇게 황당한 소원은 처음이었다.

    벨데메르는 처음으로 그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소원은 반드시 이뤄져야 했다.

    “남편이란 무엇인가.”

    벨데메르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었다. 남편이 되어 준다고 했는데, 도대체 ‘남편’이란 무엇인가.

    “여자 관점에서 자신과 혼인을 한 남자를 남편이라고 부르죠.”

    샤피로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무릎을 탁 쳤다.

    “혼인을 안 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혼인도 안 하고 남편이 되어 주겠다고만 했으면, 그건 그냥 예비 남편이지 남편이 아니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서약을 하지 않아 인정되지 않은 게 아니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정말로 실험실이 있었어요.”

    르니예는 씩씩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방 안에서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멈칫했다.

    “왜 저를 그렇게 보시는지…….”

    르니예가 샤피로와 벨데메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식을 올려야겠다.”

    “식이요? 무슨 식?”

    “당연히 결혼식이 아니겠나.”

    르니예는 순간 말문이 막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결혼식을 하자고? 벨데메르를 숨겨 놓고 있는 것만도 벅찬데, 결혼식?

    “왜 그런 표정이지?”

    벨데메르의 서늘한 시선이 와 닿자 르니예는 흠칫 어깨를 웅크렸다.

    “정식으로 네 남편이 되어 주겠다고 하는데 왜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지?”

    “너, 너무 갑작스러워 그랬죠.”

    르니예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럼 당장 내일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죠.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안 돼!”

    르니예가 빽 소리를 질렀다. 샤피로가 짜증 난 얼굴을 팍 찌푸렸다.

    “왜 안 됩니까, 르니예 님?”

    그의 목소리에 의심이 뚝뚝 묻어나는 것은, 르니예의 기분 탓일까.

    “그건.”

    르니예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머리를 쥐어짰다.

    “결혼식은 신부가 주인공인데, 적어도 웨딩드레스는 입고 들어가야 하잖아요. 당장 내일이면 뭐, 이거 입고 결혼하나?”

    르니예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가리키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 울분은 어떻게든 결혼식을 미뤄 비밀리에 치르고픈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부케도 원하는 꽃을 사려면 예약해야 하는데.”

    르니예는 잠깐 숨을 들이쉬고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만약에 결혼식을 하면 바닷가에서 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게 제 로망이거든요.”

    그런 로망? 없다. 다만, 인적이 드문 바닷가가 문득 떠올라 그냥 지껄여 보았다.

    “바닷가로 가지 않더라도 결혼식장도 준비해야 하고, 증인이 될 하객도 구해야 하고, 주례를 서 줄 신관도 섭외해야 돼요.”

    결혼식의 절차가 복잡한 게 이리 다행일 줄이야.

    “하다못해 최소한 새 원피스에 꽃다발은 들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벨데메르, 당신도 턱시도 비슷한 거라도 입어야죠.”

    르니예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그건 그렇군.”

    이것은 르니예의 소원이었다. 소원을 빈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괜히 서둘러 밀어붙였다가 소원이 이뤄지지 않은 채로 유지되면 곤란할 테니 말이다.

    마법을 쓰지 못하지만, 조각상 밖으로 나와 있는 이 시간도 나쁘지 않았으니, 마음에 드는 결혼식을 준비할 여유를 주는 것도 괜찮겠지.

    “네 뜻대로 따르지.”

    “고마워요.”

    끌어 올린 입꼬리가 달달 떨렸다. 방 밖으로 나온 르니예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내가 결혼식까지 두 번 할 팔자인가?”

    그사이 에니는 르니예의 부탁으로 사라진 프리야를 찾아, 그녀가 가족과 함께 살던 마을로 향했다.

    에니가 듣기로, 프리야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 둘을 데리고 살았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상단에 도박 빚을 잔뜩 져 그 빚을 대신해 프리야가 거의 노예 계약을 맺고서 상단에 하녀로 들어왔다.

    그래서 혹시나 제 동생을 보러 집에 들르지 않았을까 해 찾아왔더니, 프리야가 살았던 집은 텅 빈 상태였다.

    에니는 그 마을에 오래 살았을 법한 촌장에게 찾아가 물었다.

    “촌장님, 저기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집 말이에요. 거기 살던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저 집? 저 집에는 가족이 안 살았어. 늙은 영감 혼자서 살았는데, 재작년에 죽었지.”

    “그다음에는요?”

    촌장은 에니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다음? 그다음은 없어. 저 집은 그때부터 쭉 비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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