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화 (3/120)
  • 3화. 유령이 나오는 집에서, 신혼을

    “흠.”

    되어야 했다. 창문이 열리고 바람이 불어 먼지를 한데 모으고, 벽난로에 불이 붙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벨데메르는 주문을 외우지 않고도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지 오래였다. 그러나 소리 내어 주문을 읊어도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이 또한 저주의 영향인가.”

    단전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력이 느껴지는데, 그 힘을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미약하게 불어온 바람이 벨데메르의 머리칼을 스치고 방문을 향해 나아갔다.

    “흐으, 흐으윽…….”

    방문 바깥에서 아주 작지만 선명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벨데메르는 무엇에 홀린 듯 방문을 열고 나가 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르니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상단으로 돌아왔다.

    “딱 십 분만 자면 소원이 없겠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마님!”

    “아이, 깜짝이야.”

    르니예의 방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에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어젯밤에 어디를 가…….”

    에니는 제 주인의 몰골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르니예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원피스는 위통만 남아 있고, 그 아래로는 속치마가 보였다. 치맛단 끝자락에는 낙엽이며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고,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머리칼은 흐트러져 있었다.

    에니는 피곤에 찌든 제 주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싸우셨어요?”

    얼굴에 상처는 없지만 거하게 한 판 붙은 자의 형상이었다. 옷 꼴을 보니 최소한 3 대 1이다. 물론, 르니예가 1이고 상대편이 3이다.

    “아니야. 싸운 거 아니야. 내가 나이가 몇인데 싸움을 해.”

    르니예는 위통만 남은 원피스를 벗어 던졌다.

    “사정이 좀 있었어. 넌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버지가 나 어제 안 들어온 거 아셔?”

    에니는 르니예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면서 말했다.

    “아시죠. 무려 외박을 하셨는데.”

    에니는 어제를 떠올렸다. 한숨이 절로 났다.

    “거기다가 프리야가 갑자기 사라져서 행방불명 되고, 그걸 안 작은 주인님께서 작은 마님을 의심하는데, 작은 마님은 집에 안 계시고!”

    르니예가 잠시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지 에니는 속사포로 쏟아냈다.

    “그래서 나 어디에 있다고 했어?”

    “곧 마님 기일이라 거기 가셨다고 했어요.”

    르니예의 어머니 유골을 묻은 수목장이 근처에 있었다. 르니예는 어머니를 보러 갈 때마다 근처 여인숙에서 머물고 오곤 했다.

    “다행히 혼자 나가는 프리야를 본 사람이 있어서 오해는 풀렸지만요.”

    에니는 내친김에 르니예를 화장대 앞에 앉히고서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 내렸다.

    “진짜로 어디 갔다가 오신 거예요? 프리야랑 관련 있는 건 아니죠?”

    에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바를 르니예도 잘 알았다. 프리야를 건드렸다가 에드윈과의 사이가 더 어그러질까 근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이제 걱정도 아니라는 것을 에니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르니예가 그것보다 더 큰 걱정거리를 가져왔기 때문에.

    르니예 혼자 힘으로는 두 집 살림을 들키지 않고 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르니예가 없을 때 변명을 늘어놔 주고, 르니예에게 긴급 사항을 전해 줘야 했다.

    그 일에 에니는 적격이었다. 그들은 하녀와 아가씨 사이였지만 자매처럼 자랐고, 친구처럼 지냈다. 에니를 믿지 못한다면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리야하고 관련이 있는데,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취하셨어요?”

    “에니,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사실 내가 프리야 물건을 하나 훔쳤어.”

    르니예에게는 한 달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르니예가 시간을 되돌아왔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이었다.

    “프리야 물건 중에 훔칠 만한 게 있었어요?”

    “원래는 뭘 훔치러 들어간 게 아니었는데…….”

    프리야는 눈엣가시였다. 석 달 전 갑자기 나타난 그 애는 순식간에 에드윈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르니예가 삼 년을 노력해도 가지지 못한 것을 단숨에 손에 넣은 것이다. 질투 나고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프리야에게 온갖 험한 일을 시키고, 괜한 트집을 잡아, 혼을 내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어 봐도 그 속이 풀리지 않았다.

    프리야만 사라지면, 그러면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놓고 내쫓았다가는 에드윈이 난리를 칠 게 뻔했다.

    그래서 르니예는 프리야가 스스로 떠나게 만들려고 했다. 비열한 방법이지만, 제 보석을 훔친 범인으로 몰아서.

    “근데 침대 밑에 이런 게 있는 거야.”

    르니예는 가방에 넣어갔던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처음에는 몰래 훔쳐 모아 둔 돈이겠거니 했는데, 그 안에는 뜻밖의 것이 들어 있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 이거 그냥 옛날이야기잖아요.”

    에니가 가죽 주머니 안에 든 수첩을 훑으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지. 근데 거기 지도도 있고, 또 조각상을 깨울 수 있는 열쇠도 들어 있었어.”

    물방울 모양의 새빨간 보석이 그 열쇠였다. 루비도 아닌 것이, 신비로운 붉은 빛을 내는데 그것을 조각상의 입술에 물려 주면 조각상이 깨어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밑져야 본전이잖아? 그래서 소원을 빌러 갔어.”

    “그럼 그 옛날이야기가 진짜인 거예요?”

    “응. 진짜더라고. 그래서 내가 소원을 빌었지. 빌었는데…….”

    처음에 잘못된 소원을 빌었다가 에드윈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눈을 떠 보니 다시 소원을 빌던 순간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생략했다.

    “빌었는데요?”

    “내가 실수로 잘못된 소원을 빌었어.”

    실수로 잘못된 소원을 빌 수가 있나?

    에니는 르니예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조각상한테 내 남편이 되어 달라고 해 버렸어.”

    “그건 소원이 아니라 청혼 아니에요?”

    “……그러네?”

    생각해 보니 그랬다. 하지만 중요한 건, 벨데메르는 그걸 소원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조각상이 사람으로 변하더니, 남편이 되었어.”

    에니의 얼굴에 무수한 물음표가 떴다. 그러니까 소원인지 청혼인지를 했더니, 조각상이 사람이 되어서 남편이 되었다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이야?

    역시 작은 마님께서 술을 드신 걸까?

    “그래. 남편이 또 생겨 버렸어.”

    르니예는 이해하겠냐는 표정으로 에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하지만.”

    말을 더듬던 에니는 정신을 차리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되면 중혼인데, 왕국법에서 중혼은 불법이잖아요.”

    “나도 알아.”

    “걸리면 10년 수감.”

    르니예는 울상을 지었다. 자칫 실수했다가 감옥에서 10년을 지내게 생겼다. 아니, 얌전히 감옥에 들어갈 수 있으면 다행이지.

    르니예가 중혼을 한 사실을 벨데메르가 안다면, 아마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사지가 찢긴다는 고통을 겪게 되지 않을까?

    “방법이 없지는 않아. 에드윈하고 이혼하면 돼.”

    둘 중 하나에게 이별을 고해야 한다면, 에드윈과 헤어지는 편이 나았다. 에드윈은 르니예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테니까.

    “이혼하는 동안만 들키지 않으면 돼.”

    르니예가 먼저 이혼하자고 하면 에드윈은 한 이틀 정도 고민하는 척을 하고 수락할 것이다.

    이혼을 하고 나면 벨데메르의 정체가 들켜도 중혼으로 처벌받지 않으니 문제없다.

    “그래서 지금 그 새 남편분은 어디에 계시는데요?”

    “그 유령 들린 집에 데려다 놨어. 난 에드윈 옷 좀 챙기려고 잠깐 온 거야.”

    “작은 주인님 옷은 왜요?”

    “내 새 남편이 지금 헐벗고 있거든.”

    르니예는 유령 나오는 집에서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을 벨데메르를 위해, 서둘러 옷을 챙겨 돌아왔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밖은 이제 낮이었으나 창문이 꽉꽉 닫힌 집 안은 밤이나 다름없이 어두웠다.

    르니예는 조심스레 한 발을 디뎠다. 아까 벨데메르와 왔을 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집 안은 으스스했다.

    기름칠을 안 한 마루는 삐거덕거리고, 몇 년을 갈지 않은 커튼은 좀이 먹어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끼익- 끽-

    “……?”

    르니예는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샹들리에가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저 스스로.

    “뭐지?”

    르니예는 멍하니 샹들리에를 쳐다봤다.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가운데 무언가가 뒤로 쓱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르니예는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목덜미에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뭐야.”

    르니예는 목덜미를 쓸면서 혼자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진짜 유령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르니예는 흔들리는 샹들리에 따위는 무시하고 벨데메르가 있는 방으로 올라가려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그때였다.

    무언가 휙- 지나갔다.

    르니예의 밤갈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래, 이번에는 확실히 무언가 지나갔다. 르니예는 발을 돌려서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으로 향했다.

    유령이 진짜 있을까 싶었지만,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도 있는데 유령이라고 없을까, 싶기도 했다.

    만약에 유령이 있다면 르니예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그럼 벨데메르를 다른 집으로 옮겨야 하니까.

    르니예는 박력 있게 지하실 문을 열었고 그 순간 르니예는 희끄무레한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

    온몸의 근육이 굳고 동공이 확장되고 얼굴이 허옇게 질린 다음에야, 르니예는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

    “꺄아아아악!”

    르니예는 지하실 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쯧.”

    그때 르니예의 뒤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넌 뭐야?”

    르니예는 날을 바짝 세우고서 물었다.

    “유령이냐?”

    유령이라고 하기에는 형체가 너무 완벽한데. 혀를 찬 남자는 광이 나는 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딱 봐도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유령이라고 차려입지 못한다는 건 편견 아닐까?

    르니예는 일단 주먹을 꽉 쥐고 싸울 자세를 취했다.

    “뭐냐니까, 너? 사람이야, 유령이야?”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에 한심하다는 기운이 어렸다.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과 달리 남자는 정중한 태도로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갖췄다.

    “사람도, 유령도 아닙니다. 저는 위대한 벨데메르 님의 충실한 종, 샤피로라고 합니다.”

    샤피로는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르니예를 쳐다보았다.

    “주인님이 기다리십니다, 르니예 님.”

    “벨데메르, 옷을 가지고 왔어요.”

    르니예가 챙겨 온 옷 꾸러미는 이미 샤피로의 손에 있었다. 샤피로가 옷 꾸러미를 풀어 보는 동안, 르니예는 방을 쓱 둘러보았다.

    방은 어느새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샤피로인가 뭔가 하는 남자가 한 건가?

    “정확한 치수를 몰라서 눈대중으로 가져왔는데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에드윈의 옷 중에서 가장 새것으로 골라왔다. 샤피로는 익숙하게 옷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예의상 고개를 돌리고 있는 르니예의 등 뒤로 샤피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대중은 정확하시군요.”

    그의 말이, 다른 건 다 별로지만 눈대중 하나는 쓸만하다고 들린다면 기분 탓일까.

    “내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치수를 재느라 그랬던 건가.”

    “그럴 리가 있나요, 주인님. 그냥 쳐다본 거겠죠.”

    그냥 쳐다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르니예는 미간을 팍 구겼다.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았어요.”

    르니예가 팔짱을 끼고서 옷을 거의 다 입은 벨데메르와 샤피로를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벨데메르, 사람 손 닿는 걸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만 만지지 말라는 뜻이었나.

    옷을 입혀 주는 샤피로의 손끝이 벨데메르의 살을 스치는 걸 보면서 르니예가 물었다.

    그러자 샤피로가 저 멍청이를 어쩌지 하는 얼굴로 르니예를 쳐다보았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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