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
1화.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여기, 버려진 신전,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 앞에 간절하게 두 손을 모아 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르니예 라포어 되시겠다.
“제 남편이 죽어서도 저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
르니예가 이런 소원을 비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르니예의 남편인 에드윈 라포어는 순전히 돈 때문에 르니예와 결혼했다.
그는 가세가 기울어진 귀족의 후계자였고, 르니예는 영지에서 가장 부유한 상단주의 딸이었지만 평민이었다.
‘르니예, 너도 이제 귀족이 되는 게야. 이 아비는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르니예의 아버지인 콜론은 일찍이 아내를 여읜 상실감을 돈 모으는 것으로 채웠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고, 막대한 부를 모았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것은 바로 신분, 귀족의 신분이었다.
‘네, 아버지. 저도 좋아요.’
하지만 르니예가 원한 것은 라포어 부인이라는 칭호가 아니라 에드윈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끝내 에드윈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콜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콜론의 모습을 르니예에게도 투영했고 르니예를 밀어냈다.
그렇게 결혼하고 삼 년.
이제야 에드윈이 르니예에게 마음을 여나 싶은 순간, 프리야가 나타났다. 아버지의 빚 대신 상단에 노예로 팔려 온 프리야.
프리야는 단숨에 에드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르니예가 삼 년을 노력해도 못 한 바로 그 일을.
에드윈은 프리야와의 사이를 부인했다. 르니예는 믿고 싶었다.
‘프리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어떻게든 너를 지켜 줄 테니.’
‘작은 주인님…….’
‘내 마음은 너의 것이다. 그건 죽어서도 변하지 않아.’
그러나 르니예는 듣고야 말았다. 프리야에게 하는 에드윈의 고백을.
르니예는 프리야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했다. 해서 프리야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쫓아내려 했다.
해서 비싼 귀걸이를 프리야의 침대 밑에 숨기던 르니예는 그곳에서 작은 가죽 꾸러미를 찾았다.
거기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의 위치가 적힌 종이와, 그 조각상을 깨울 수 있는 새빨간 보석이 들어 있었다.
“소원을 빌어서 에드윈의 마음을 얻은 건가?”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한 르니예는 소원을 빌러 그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소원을 빌었다.
“제 남편이 죽어서도 저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
“네 소원은 이뤄졌다. 돌아가라.”
조각상의 말을 들은 르니예는 신이 나,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갑게 식은 에드윈의 시체였다.
“에드윈! 어떡해, 다 나 때문이야.”
그때였다. 에드윈의 시체를 붙잡고 울던 르니예의 눈물이 그의 볼 위에 떨어지자, 기적처럼 에드윈이 눈을 떴다.
그러나 그는 살아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죽어 있었다. 에드윈은 죽은 상태로, 그저 깨어났다.
“부인, 어째서 내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 겁니까?”
그는 매일매일 르니예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매일매일 조금씩 부패했다. 내장에 구더기가 끓고 입술이나 눈꺼풀 같은 얇은 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나는 이렇게 죽어서도 부인만을 사랑하는데, 이런 나를 외면하지 마세요, 부인.”
“미안해요, 에드윈. 하지만, 나는 도저히…….”
르니예는 썩어가는 에드윈에게 입을 맞추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그래서 르니예는 에드윈을 관에 넣고 땅에 묻어 버렸다. 그런데 땅속에 묻힌 에드윈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밤마다 울어댔다.
그 울음소리 때문에 영지 사람들은 누구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참다 못한 영주가 에드윈의 무덤을 파헤치기에 이르렀다.
“그대가 그리 된 건, 마법사의 농간인가?”
“아닙니다.”
“그럼 왜 그리 슬피 우는가?”
영주의 물음에 에드윈은 대답했다.
“저는 제 부인을 사랑하여 동침을 요구하였으나, 부인이 저를 거부하였기에 우는 것입니다.”
“자네의 그 한을 풀어 주면 더 이상 울지 않겠군.”
잠을 못 자 예민해진 영주는 르니예와 에드윈을 한방에 가두라 지시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아무도 열어 주지 말라 명령했다.
“에, 에드윈.”
졸지에 에드윈과 한방에 갇힌 르니예는 뒷걸음질을 치며 문고리를 돌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랑합니다, 부인.”
썩어 문드러진 혀와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입술로 에드윈은 잘도 사랑을 고백했다.
“이러지 말고 그만…….”
그만 안식에 들라는 말을 르니예는 차마 하지 못했다. 그를 볼 때마다 두렵고 미안했다. 죄책감에 잠을 못 이루는 날도 많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소원을 빌었을 텐데. 아니, 그냥 소원을 빌러 가지도 않았을 텐데.
이제 와 하기에는 너무 늦은 후회였다.
“부인이 내 사랑을 거부하는 이유는 나는 죽어 있고, 부인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드윈은 잔뜩 겁을 먹은 르니예에게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왔다.
“한번 죽은 것은 살아날 수 없지만, 산 것은 죽을 수가 있지요.”
그것은 저를 죽이겠다는 말이 아닌가. 르니예는 에드윈을 보며 애원했다.
“제발, 에드윈.”
“두려워하지 마세요, 부인.”
에드윈이 르니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뼈가 허옇게 드러난 손가락에서 구더기가 한 마리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게 될 겁니다.”
“싫어, 저리, 큭.”
르니예가 피하기도 전에 에드윈이 빠른 속도로 르니예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르니예의 가느다란 목을 쥔 손아귀에 죽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힘이 실렸다.
“컥, 윽.”
르니예는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눈앞은 흐려지고, 숨은 가빠지고, 근육이 수축했다.
르니예의 눈에서 후회의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에드윈과 프리야가 둘이 살림을 차리든, 가게를 차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놔둘걸.
조금 더 현명한 소원을 빌걸.
아, 착하게 살걸.
하지만 이 후회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곧 죽을 텐데.
흐릿하게 보이는 에드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르니예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었다.
* * *
“……인가?”
여긴 어디지? 천국인가? 아니, 이렇게 추운 거로 봐서 여기는 지옥이다.
르니예는 두 팔로 몸통을 감쌌다.
“응?”
뭘 감싸?
르니예는 손바닥으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천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어?”
까맣던 시야에 하나둘 사물의 형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끝을 모르고 높은 천장, 금이 간 벽에 자란 이끼, 바닥을 굴러다니는 먼지 더미…….
“여기는 거기잖아.”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이 있는 바로 그 버려진 신전의 지하실과 똑같았다. 아니, 똑같은 게 아니라 바로 거기였다.
르니예의 눈앞에 신을 본떠 만들었다는 남자의 나신 형상을 한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소원을 빌던 날처럼 모래시계가 앞에 나와 있고, 르니예는 그날 입었던 옷을 똑같이 입고 있었으며 조각상은,
“소원을 빌지 않을 셈인가?”
르니예를 재촉하고 있었다.
“소, 소원이요?”
이거 뭐지? 불길한 바람이 목 뒤를 스쳤다. 눈앞에 모래시계가 있다는 건, 누군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 신전에는 저 혼자뿐이니, 그 말인즉 소원을 비는 사람은 르니예란 뜻이었다.
“어, 그러니까, 제 소원은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르니예는 일단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천천히, 느긋하게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소원을 비는 데에는 규칙이 몇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규칙 하나, 소원은 모래시계가 한 번 도는 안에 소원을 빌어야 한다.
규칙 둘, 소원의 개수는 딱 한 개이다.
규칙 셋, 소원은 빌기 시작하면 번복하거나 취소할 수 없다.
이 규칙 중 한 가지라도 어긴다면 그 사람은 즉시 사지가 뜯기는 고통과 함께 조각상이 된다고, 프리야가 가지고 있던 수첩에 적혀 있었다.
지금 모래시계는 이미 뒤집혀 있었으니 르니예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부자가,”
“‘제 남편이’까지 말했다.”
르니예의 말허리를 끊고 나온 조각상의 목소리가 신전 바닥에 낮게 깔렸다.
“그게 무슨, 설마 제가 소원을 비는 중이었나요?”
르니예의 두 눈썹이 붙을 듯 미간이 좁아졌다.
‘제 남편이’까지 말했다고? 그러니까 ‘제 남편이 죽어서도 저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라고 소원을 빌던 중, 하필이면 ‘제 남편이’까지 말한 순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세상에.”
망할. 하고 많은 시간 중에 하필이면 왜!
“소원을 빌지 않을 셈인가?”
조각상이 재차 재촉했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마냥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소원을 빌어야 한다.
제 남편이 죽어서도 저를 사랑하게 해 달라는 멍청한 소원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제 남편이…….”
제 남편이 저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이건 원래 소원과 너무 비슷하다. 그렇다면 제 남편이 행복하게 해 주세요, 는 어떨까.
“그건 아냐.”
르니예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이 행복해지는 방법의 하나는 르니예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프리야가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드윈에게 미안한 마음이야 가득 있지만 그렇다고 그를 위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방법 말고도 다른 좋은 수가 있을 것이다. 에드윈도, 르니예에게도 이득인 소원이.
“그러니까 제 남편이, 음…….”
제 남편이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 아니, 에드윈이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르니예의 아버지와 르니예가 죽고 그들의 재산을 에드윈이 상속받는 것이다.
남편을 살리자고 아버지를 죽일 수는 없지.
“아, 음, 어쩌지.”
르니예는 거의 남지 않은 모래알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시간이 끝나간다.”
“그러니까, 아, 그래서.”
르니예는 초조함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쥐어뜯었다. 소원을 빌지 않으면 사지가 뜯기는 고통 속에 죽어갈 것이다.
기껏 살아났는데 죽을 수는 없지. 르니예는 아무 소원이나 빌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도무지 ‘제 남편이’로 시작되는 무난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다 되었,”
“되어 주세요!”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졌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조각상의 말허리를 잘라 먹으며 르니예가 우렁차게 외쳤다.
“제 남편이.”
신전 안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되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