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짤랑짤랑 - 주말의 투한스 (11/11)

외전. 짤랑짤랑 - 주말의 투한스

알람이 고막을 찢을 듯 울었다. 매일 아침,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끔찍한 소리였다. 은한이 눈을 감은 채 더듬더듬 협탁 위를 더듬었다. 곧 동그란 시계가 잡혀 왔다.

버튼을 눌러 알람을 끄니 정적이 침실을 가득 메웠다. 한숨 같은 하품을 하며 제 허리를 감싸 쥐고 있는 손을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 출근해야 해.”

“……응.”

잠에 취해 묵직한 숨이 목덜미에 흩어진다. 은한이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투덜거렸다.

“맨날 대답은 존나 잘하지.”

한결은 여전히 아침잠이 많았다. 출근 직전까지 퍼질러 잔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같이 사는 동거인으로서 냅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오늘도 은한의 귓바퀴에 온 얼굴을 욱여넣고 색색, 숨을 내쉬는 걸 보니 쉽게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흥, 거칠게 콧김을 내뿜은 은한이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한결이 허전해진 품에 손을 뻗어 이불 속을 휘저었다. 잡혀 오는 게 없다. 평소엔 두세 번쯤 더 깨워 주는데. 뚝 끊긴 은한의 목소리가 아쉬웠다. 그럼에도 이불을 벗어나진 않았다.

오 분, 아니 십 분 정도는 더 자도 지각은 아니니 괜찮다.

근데 우리 방울이 아침밥 먹여야 하는데. 뭐 먹이지.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사지를 축 늘어트렸다.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나게 됐지만.

“흐억!”

한결이 기겁하며 이불을 들쳤다.

“방울아, 뭐해!”

“보헌모흐나?”

한결의 페니스를 입에 문 은한이 깜빡깜빡 눈꺼풀을 움직였다. 그러잖아도 아침이라 벌떡 일어서 있는데, 뚱뚱하게 몸집을 부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경악한 한결과 달리 은한은 평온한 얼굴로 보면 모르냐, 란다.

한결이 허겁지겁 그를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은한이 쭈웁 귀두를 빨아 당겼다. 한결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한결이 좋아하는지, 자지러지는지 눈감고도 아는 은한은 순식간에 한결을 녹초로 만들었다.

잘근잘근 기둥을 깨물다가도 혀를 내어 귀두를 핥는다. 마찰에 달아오른 그의 통통한 입술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으…… 은, 한아…….”

단전 아래가 저렸다. 은한의 고갯짓이 빨라지면 질수록 몸이 붕 떠오르는 듯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한결이 몰아치는 사정감을 가늠하고 있을 때, 문득 휑하고 차가운 바람이 페니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 다 깼지? 씻고 나와라.”

입가를 물들인 타액을 아무렇게나 닦아 낸 은한이 말했다. 그리곤 미처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탐스러운 엉덩이를 흔들며 침실을 벗어났다.

바보처럼 눈을 깜박이던 한결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널브러진 이불, 바짝 일어선 채 버려진 페니스, 떠난 은한.

“바, 방울아? 이건 어쩌라고?”

한결이 허망하게 자신의 페니스를 내려다보며 은한을 불렀다. 그러니 저 멀리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샤워하면서 빼.”

“…….”

어쩜. 해답도 참, 명확하게 주시지. 한결이 찔끔 눈물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정쩡한 걸음으로 침실 욕실로 향하는데 조금 서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침잠이 많은 제 죄지. 깨우는 데에 얼마나 지쳤으면 이런 짓까지 하나 싶고.

거울 속으로 비치는 제 모습에 머리를 긁던 한결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자기야! 같이 씻으면 안 돼?”

“…….”

답이 없다. 분명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거다. 한결이 코를 훌쩍였다. 그래도 밤에는 얼마든지 제 마음대로 은한을 엎었다 돌렸다 할 수 있으니까 괜찮다. 거기다 내일은 주말이니 동틀 때까지 안 재워도…….

금세 기분이 좋아진 한결이 샤워기를 틀었다.

한결이 행복한 망상을 펼칠 동안 은한은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토스터에 식빵을 넣고, 냉장고에서 버터와 딸기잼, 사과를 꺼낸다. 능숙하게 사과를 깎아 접시에 올려 두곤 거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은한이 사라지고 얼마 있지 않아 수건을 덮어쓴 한결이 나타났다. 은한이 깎아 놓은 사과 하나를 입에 문 채 퐁 올라와 있는 식빵을 접시에 담고, 우유와 달걀을 꺼내 인덕션 앞에 섰다. 매일 아침 하는 스크램블이었다. 프라이팬이 달아오르길 기다리다 오늘은 치즈를 넣어 볼까, 싶어 다시 냉장고로 향했다.

두 사람의 아침은 대개 이러했다. 전날 과음하고 해장국을 시켜 먹지 않는 이상은. 직장인 남자 둘이 사는데 아침을 먹는 게 어딘가.

그렇게 대충 아침 식사 준비가 마무리되어 가면 머리칼이 촉촉이 젖은 은한이 욕실에서 나왔다.

“어떻게 급한 건 잘 빼셨고?”

식탁으로 다가오는 은한이 비죽,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완성된 스크램블을 접시에 담던 한결이 멈칫 굳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차가운 물 아래에서 제 것을 흔들던 자신을 잠시 상기했다.

한결이 침묵한 채 스크램블을 식탁 위에 놓았다. 은한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차박차박. 매끈한 발이 차가운 바닥 위를 걷는다.

그걸 보고 있던 한결이 냅다 은한의 허리를 잡아채 식탁 위에 올렸다. 눈높이가 언뜻 비슷해진 그와 코를 마주한 한결이 낮게 으르댔다.

“삐졌어.”

“그러게 누가 늦게 일어나랬나?”

은한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입에 물었다. 작은 턱이 아래위로 열심히 움직이며 사과를 조각냈다. 게슴츠레 눈을 뜬 한결이 미운 입술을 노려봤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동거하는 남친도 있는데 굳이 자위를 해야겠어?”

“지랄. 너 자위 자주 하잖아.”

“……어?”

“나 재워 놓고 하면서.”

한결의 입이 딱 다물렸다. 맞는 말이라서. 일상에 치이고 온 은한은 열과 성을 다해 섹스를 하다가도 세 번쯤 싸고 나면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근데 깨우기는 또 뭣하고, 아직 불끈거리는 페니스를 무시할 순 없고. 그래서 품 안에 있는 은한을 관음하며 제 것을 흔들어야 했다.

설마설마, 그걸 알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알았어?”

“글쎄. 존나 오래됐지.”

“…….”

한결이 무너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눈코입이 죄다 따로 노는 한결에 은한이 낄낄댔다. 한참 웃다가 두 다리로 한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도 굳은 한결의 낯은 풀릴 줄 몰랐다.

은한이 그를 달래려 볼과 광대, 콧잔등에 쪽쪽 짧게 입을 맞췄다.

“왜 나는 사랑스럽기만 하던데.”

“어?”

“나 피곤할까 봐 안 깨운 거 아니야?”

어느 남친이 애인 잔다고 자위하냐. 아이고 우리 자기 이렇게나 속도 깊고, 다정하고. 아침에만 좀 일찍 일어나면 완벽한데.

은한이 한결의 입술에 살포시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싱그러운 사과 향이 뿜어져 나왔다. 얇은 턱을 살짝 움켜쥔 한결이 급하게 입술을 부딪쳤다.

섞이는 입술은 이른 오전이라는 시간이 민망할 정도로 깊고, 질척하다. 한결은 마치 아침을 대신하려는 듯 열심히 은한의 혀를 빨아 당겼다. 은한 역시 잔뜩 입을 벌리고 한결을 받아 냈다.

두 사람의 입술은 스크램블이 미적지근하게 식을 때에야 떨어졌다.

찡긋, 한쪽 눈을 어그러트린 은한이 잔망스레 말했다.

“자기야, 좋아해.”

“……응, 나도.”

한결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한가득 피어오른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두 사람이 휘휘 주위를 둘러보다 쪽 뽀뽀했다. 사계절 내내 냉기를 뿜는 지하 주차장은 영 정이 안 갔다. 은한이 조금 삐뚜름한 한결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저는 깔끔한 셔츠에 니트 정돈데, 매일매일 넥타이까지 하고 출근하는 한결이 안쓰러웠다. 아니, 영업직도 아니고 연구직인데 무슨 옷을 이렇게까지 입으라 하는지 모르겠다. 뭐 덕분에 매일 눈이 호강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한결이 편한 게 좋았다.

한결이 살짝 뜬 은한의 옆머리를 쓸어내리며 정리했다.

“저녁에 태준이랑 진우 만나기로 한 거 알지?”

“어. 나 차 집에 두고 택시 타고 갈게.”

혹시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공대남 셋은 취직까지 같은 회사 같은 부서로 했다. 이 정도면 유비 관우 장비급 인연 아닌가, 싶다.

은한이 한결의 허리를 끌어안고 너른 가슴팍에 볼을 비볐다. 하루에 한 번씩 겪는 이별인데 도통 적응이 안 된다.

“일은 놀면서 하고,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산책도 한번 하고, 외근 나갈 일 있으면 땡땡이 많이 치고, 점심 두 그릇 먹고.”

“응. 방울이도.”

“가는 길에 로또나 하나 살까 봐. 헤어지기 싫어서 뒤지겠네.”

현실적인 한탄에 한결이 킥킥대며 웃었다. 로또 되면 좋지. 반절은 나누어서 부모님 드리고 반절은 어디 산 중턱에 집 하나 짓는 데 쓰면 좋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붙어 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삶이 될 터였다.

“가. 지각하겠다.”

한결이 톡톡 은한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은한이 눈썹 끝을 축 늘어트린 채 자동차로 향했다. 한결도 그 옆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색깔만 다르고 기종이 같은 세단은 은한의 누나가 통 크게 선물한 거였다.

차에 탄 은한이 룸미러에 달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조개껍데기를 툭 건드렸다. 아주 먼 옛날, 한결이 졸업 축하한다며 바닷가에서 주워 준 것이다.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오늘도 활기차게 보내고 나면, 주말 내내 한결과 알콩달콩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불끈 주먹을 쥔 은한이 엑셀을 지르밟았다.

한결과 은한은 서른하나가 됐다. 동거를 시작한 지는 이제 고작 일 년. 하지만 딱히 문제는 없었다.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11년을 연애했더니 이제는 영혼의 동반자 수준이라.

은한은 어느새 7년 차 직장인이었고, 한결은 6년 차 직장인이다. 열심히 돈을 모아 집도 마련했고 주말엔 근교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모든 것이 자리 잡은 지금.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사랑하는 중이다.

* * *

은한은 김치전 한 접시를 혼자 다 비웠다. 올 때마다 세 접시는 먹고 가는 듯했다. 얼마 남지 않은 접시를 본 한결이 추가로 한 접시를 주문했다.

“이모. 저희 김치전 하나 더 주세요!”

“방울이 저거 온다케사뿌면 김치를 이빠이 준비해야 된다이까.”

언제부턴가 이모라 부르게 된 그녀의 한탄에 은한이 찡긋 윙크했다.

“이모 김치전이 맛있으니까 그렇죠!”

일 년 전쯤, 국밥집엔 새로운 메뉴가 생겼다. 해물파전과 김치전이었는데 은한은 김치전에 단단히 꽂혔다. 고소한 기름에 튀기듯 구워낸 김치전이 어찌나 맛있는지. 국밥을 시켜 놓고도 김치전 반절을 먼저 동나게 하곤 했다.

수선화를 유리병에 옮기던 그녀가 귀찮아 죽겠다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오늘 진우가 사 온 수선화 옆에는 저번 주 한결이 사 온 수선화가 아직도 예쁘게 피어 있다.

‘우리 엄마 이제 너것들 얼굴 다 이자뿟을 텐데 와 자꾸 사 온 대?’

이모는 그리 말하면서도 꽃병들을 구해 와 국밥집 여기저기에 뒀다. 노오랗고 하얀 꽃이 소담하니 참 예뻤다.

“퇴사하고 싶다.”

국밥을 뚝배기 채 들고 꿀꺽꿀꺽 마시던 태준이 앞뒤 없이 툭, 말을 뱉었다. 대학생 때는 ‘자퇴하고 싶다’였는데. 요즘은 ‘퇴사하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산다.

한 번에 소주를 털어 넣은 은한이 크,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왜 또?”

“씨이바. 팀장새끼가 자꾸 지랄해.”

“……너 백한결이랑 같은 부서 아니냐? 그 새끼가 백한결한테도 지랄해?”

은한이 눈을 부릅뜨며 젓가락을 휘둘렀다. 태준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선한 눈매에 눈물이 글썽였다. 보통 일이 아닌가 보다.

“아니. 나! 나한테만 지랄해!”

“왜?”

“전화 오는 사람이랑 수다 떤다고!”

“……하?”

별것도 아닌 거로 꼬투리를 잡는다거나, 옷차림으로 꾸지람을 한다거나, 같잖은 억지로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은한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진우가 휘휘 손을 저으며 대신 답했다.

“이 새끼가 전화 오면 그냥 R&D 2팀 선임연구원 하태준입니다. 하면 되는걸, 저는 누군데요, 무슨 일 하고 있는데, 그쪽은 어디서 뭐 하세요? 이 지랄 하고 있다니까. 소개팅 나온 것도 아니고?”

진우의 말에 은한이 박장대소했다. 하여튼, 그 빌어먹을 친화력 어디 안 가지. 태준은 연구원보다 영업팀이 훨씬 잘 어울렸다. 하지만 진우와 한결, 두 사람과 헤어지기 싫다고 꾸역꾸역 6년째 R&D 부서에 몸담고 있었다. 헤어지면 우울증에 걸릴 거라나, 히키코모리가 될 거라나.

“신입일 땐 무서우니까 걍 닥치고라도 있었지, 지금은…….”

진우가 푹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태준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의 말을 반박했다.

“아 왜! 우리 부서는 전화 잘 안 온단 말이야! 나도 직장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고. 장그래처럼! 전화 받고 옆 팀이랑 수다도 좀 떨고, 썸도 타고. 얼마나 좋아?”

“그냥 이직하라니까. 부서를 옮기든가. 영업팀이면 하루에 오십 명씩 만나고, 전화도 존나 할 수 있어.”

은한의 말에 깍두기를 난도질하던 태준이 코를 훌쩍였다.

“……한결아, 태준아. 나랑 같이 영업팀 갈래?”

“아니.”

“아니.”

한결과 진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일이 좀 손에 익었는데. 또 새로운 곳에 가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구박받으면서 일 배우는 건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태준이 시무룩하게 테이블에다 이마를 찧었다. 은한이 쯧쯧 혀를 차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줬다. 안 맞는 일을 하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아무리 연봉이 많다 한들, 힘든 건 어쩔 수 없을 테니까.

“하고 싶은 거를 해야지. 그러다 골병 들겄어?”

보통 때보다 곱절은 큰 김치전을 내려놓은 이모가 무심하게 한마디 거들곤 빈 소주병을 가지고 사라졌다. 태준이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끙, 앓았다.

한결과 은한, 진우가 그를 타이르고, 설득하며 소주 한 병을 비웠다.

“나 전화 좀.”

한창 태준을 달래고 있는데, 한결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고 사라졌다. 은한이 가는 눈으로 널찍한 그의 뒷모습을 흘겼다. 누구기에 자리까지 피하나 싶어서. 설마 상산가. 어떤 미친 상사가 금요일 밤에 전화하고 지랄이야.

한결은 오 분이 채 지나기 전에 돌아왔다. 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그의 셔츠에 바람 냄새가 담뿍 묻어난다.

“누구야?”

은한이 물었다.

“누님.”

“누나? 우리 누나는 왜 맨날 나 두고 너한테 전화하냐?”

우리 누나가 너한테 시누이 짓 하니? 우리 누나가 그럴 사람은 아니긴 한데 또 모르지? 얼굴을 단단하게 굳힌 은한이 취조하듯 캐물었다. 연하게 미소 지은 한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 독일 학회 다녀오시면서 소시지랑 햄 잔뜩 사 오셨다고 오늘 택배 붙이셨대. 내일 도착할 거라시더라.”

“개 좋아!”

금세 신난 은한이 한결의 팔뚝에 볼을 마구 문질렀다. 그냥 소시지도 아니고 독일 소시지라니! 부대찌개에도 넣어 먹고, 토스트에도 끼워 먹고, 그냥 구워도 먹고, 삶아도 먹고!

“자기. 우리 내일 저녁은 집에서 부대찌개에 쏘주 한잔할까?”

“그래.”

한결이 씨익 웃으며 은한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런 두 사람을 노려보던 태준이 숟가락을 탕탕 테이블을 두드렸다.

“야! 부대찌개 말고 나한테 집중해, 나한테!”

“태준이 너는 코 필러 맞을 때 됐다고 한번 내려오라시더라.”

한결의 말에 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맑게 갰다. 퇴사고 이직이고, 모두 하찮아졌다. 그가 두 손을 곱게 모으며 말했다.

“방울아. 누님 개는 안 키우신다니? 내가 개 역할 진짜 잘 한다고 말 좀 잘 해 주라.”

이직 말고 누님 개 노릇이나 하면서 살까 봐. 나 청소도 되게 잘하는데. 군대에서 배운 건 청소밖에 없어. 칼각! 누님 수건에 손 베이실지도 모른다.

태준의 방정에 은한이 휘휘 손을 저었다.

“아서라. 우리 누나 무섭다. 우리 집 최고 권력.”

은한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진우가 빈 소주잔들에 술을 채웠다.

“근데 누님 진짜 대단하시다. 내 동생이 자기 게이라고 얘랑 살 거라고 남자 데리고 오면 좀, 섬뜩할 것 같은데 말이야. 차도 사주시고, 어디 갔다 올 때마다 꼬박꼬박 선물도 사 오시고.”

은한이 킥킥거렸다. 그렇지. 저도 한결과의 관계를 털어놓을 때 머리털 반이 뜯기겠구나, 겁을 집어먹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먼 미래를 위해선 차근차근 관계를 털어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첫 타자가 은한의 큰누나였다. 사람이 띄엄띄엄 앉아 있는 카페에서 한결의 손을 꽉 움켜쥐고 말했을 때, 뭐랬더라. 팔짱을 끼고 한참 한결을 훑어보다 그랬었는데.

“잘- 생겨서 좋대.”

“하?”

“백한결 얼굴 볼 때마다 라식 하는 기분이란다. 눈이 맑아지고 정신이 또렷해진대.”

“…….”

“그리고 우리 집에 남자가 없잖냐. 아빠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지. 집에 있는 남자라곤 나 하난데 다리가 이래서 힘을 잘 쓰나, 덩치가 좋길 하나.”

“…….”

“근데 우리 자기가, 덩치도 좋고 성격도 좋고 그러니까 언젠간 쓸모가 있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 같아. 우리 누나 절대 손해 보는 짓은 안 하거든.”

은한이 기특하다는 듯 한결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한결이 어깨를 뒤틀며 수줍게 웃었다. 진우가 괜히 물었다는 듯 소주를 삼켰다. 목젖에 걸리는 술이 썼다.

한결의 귓바퀴로 손을 옮긴 은한이 일 년 전을 회상했다. 동거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가. 저와 한결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할까 봐. 양 부모님은 아직 친구 간의 동거로 알고 있지만, 누나만으로도 한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누나가 그랬어. 스무 살, 스물두 살 때 와서 게이라 그랬으면 그냥 다리 부러트려다가 집에 감금했을 거래. 근데 직장 번듯하게 잘 다니고 있는 놈들이 와서 그러니까, 아 얘들도 뭔가 생각이 있으려니, 했단다. 우리 누나도 늙었나 봐.”

김치전을 찢던 태준이 미간을 구겼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너희 딸 낳을 거잖아. 그냥 사고 쳤다 그래. 요즘엔 손주가 혼수라잖아.”

은한이 태준에게 휴지를 던졌다. 그놈의 딸 타령.

“그만해, 새끼야. 너 때문에 상상임신이라도 할 판이야.”

“아, 왜! 언제는 낳아 준다며!”

태준이 진짜 안 낳을 거냐며 찡찡거렸다. 은한이 능숙하게 그를 무시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한결이 무심하게 폭탄 하나를 던졌다.

“딸 생길 거였으면 방울이 벌써 여섯은 낳았어.”

“쿨럭.”

은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퍽퍽 한결의 등짝을 내리쳤다. 한결은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만 있다.

그에 낄낄거리던 진우가 소주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행복해 보인다, 너희.”

스무 살부터 시작한 연애가 서른한 살, 동거가 되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걸 빠짐없이 봐 온 진우로썬 퍽 뿌듯한 결말이었다.

“어, 행복해.”

은한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 * *

날이 좋은 날엔 꼬박꼬박 산책하는 편이다. 한결은 틈날 때마다 헬스장에 가서 땀을 잔뜩 빼고 왔지만 은한은 그게 안 됐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 떠서 차를 타고 출근하고, 차를 타고 퇴근한다. 직장도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서 미련스러울 정도로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래서 틈틈이 걸어 줘야 한다는 것에 강박관념을 가지게 됐다. 필라테스 같은 거라도 해 볼까, 하다가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야 하는 게 귀찮아 말았다.

한결은 은한의 산책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딱, 삼십 분. 거기까지는 잠자코 함께 걸어 줬다.

오늘은 집 주위에 있는 대공원에 산책을 왔다. 화창한 날씨, 살랑이는 푸른 나뭇잎,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에 갑갑했던 생활이 조금이나마 여유로워지는 듯했다.

“좋네.”

“응, 좋네.”

두 사람은 아주 천천히, 흙바닥과 꽃내음을 만끽하며 걸었다. 봄과 여름이 적당히 뒤섞여 있는 계절은 산책을 하지 않곤 못 배겼다. 한결은 가벼운 니트를 입었고, 은한은 맨투맨을 입었다. 걸을 때마다 품 곳곳으로 스며드는 산들바람이 몸을 붕 떠오르게 했다.

손잡고 싶은데. 온 공원에 사람이 가득해서 아쉬웠다. 차라리 늦은 밤에 올 걸 그랬나. 은한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동거하기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갈 생각도 했었는데. 수년 전 버렸던 생각이 문득 아쉬워졌다.

은한이 신발 밑창을 간질이는 작은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태준이는 어때?”

“뭐…… 여전히 힘들어하지. 틈날 때마다 달래 주는데, 이번엔 좀 오래가네.”

“그래? 큰일이네. 그거 스트레스 장난 아닐 텐데.”

“어. 그래 보여서 진우랑 둘이 이야기해 봤는데, 이제는 그냥 이직하라고 해 줄까 봐.”

“흐음.”

어려운 고민이다. 잘 다니고 있던 직장에, 거기다 연차도 쌓였고 일도 손에 익었는데 관두기가 쉬울까. 거기다 이직하려는 분야가 완전히 새로운, 거기다 태준이 졸업한 기계공학과에 잘 부합하지 않으니 충돌하는 게 한둘이 아니리라.

다음에 만나면 조금 더 정성껏 등을 두드려 줘야겠다고 은한이 생각했다.

산책 시간이 늘어나자 은한의 발이 확연히 느려졌다. 한결은 조용히 그와 발을 맞춰 걸었다. 그렇게 햇살을 한껏 맞으며 작은 호수도 거닐고, 고즈넉한 정원도 구경했다. 은한은 모니터를, 한결은 매캐한 냄새가 나는 랩실 기계를 바라보고 있다가 접하는 자연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힐링이 되어 주었다.

“나이가 들긴 드나 보다. 옛날엔 도시가 좋았는데. 요즘은 나무가 그렇게 좋더라.”

은한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한 건 오랜만이다. 근래 회사 프로젝트가 잘 안 풀려 내내 야근에, 주말 출근에 침울해 있었다. 한결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호수를 감상했다. 햇볕을 머금어 반짝이는 물이 아름다웠다. 주위를 둘러본 은한이 몰래 손가락을 얽어 왔다. 한결이 다정한 눈빛으로 은한을 주시했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나중에 퇴직하면 정원 있는 집에서 살까?”

한결이 조금 더 나이가 든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말했다. 작은 연못도 만들고, 나무도 많이 심고. 해먹도 걸어놓고. 당연히 긍정의 반응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은한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아까 잠깐 생각했던 건데, 미국이나 유럽에 시골 귀퉁이서 살자.”

“갑자기?”

“어. 거기 가면 우리 길거리에서 뽀뽀해도 괜찮아.”

“…….”

“집에 남편이 기다려서 빨리 가야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법원이 땅땅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도 해 주고.”

내가 돈 진짜 많이 벌 테니까. 나랑 같이 이민 가자, 한결아. 은한이 봄에만 피어나는 귀한 꽃처럼 흐드러지게 웃었다. 한결이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은한은 늘 새롭다. 매년, 매 순간이 신기할 정도로 아름답고, 설레게 했다.

“방울아.”

“엉?”

“좋아해.”

“……나도.”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이 빙긋 눈을 휘며 웃었다. 눈이 부실 만큼 밝은 해가 떠 있을 때 나왔는데, 벌써 빨간 노을이 차츰 하늘을 물들여 가고 있었다. 은한이 한껏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다음 주에 공휴일 껴 있는데 캠핑 갈까?”

“캠핑?”

“어. 태준이랑 진우도 데리고 가자.”

“그래. 가서 고기 구워 먹자.”

버섯이랑 소시지도 굽자. 라면도 먹고. 맛있겠다. 맥주랑 소주 잔뜩 사 가자. 그런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며 공원을 가로질렀다.

해가 한풀 꺾이고 나니 기온이 떨어졌다. 바글바글하던 사람들도 한물 빠져나가고, 한적한 공원에 온몸이 나른해지는 듯했다. 한결이 집 가서 치킨에 맥주를 먹자며 어깨를 흔들었다. 은한이 그러자며 그와 함께 어깨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킬킬댔다. 커다란 길목 가운데에 있는 분수에 벌써 조명이 들어와 있다. 보통 때였으면 잠시 구경할 만도 한데, 치킨 먹을 생각에 들뜬 두 사람의 발은 분주하기만 했다.

치킨 먹으면서 영화 보자. 너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 VOD 나왔더라.

헐. 개좋아. 기분 좋으니까 치킨은 방울이가 쏠게.

간장 시켜도 돼?

두 마리 시켜도 돼.

평범한 주말이, 평범해서 눈부셨다.

* * *

드레스룸에 쓸데없이 끈적한 공기가 맴돈다. 붙어선 두 몸뚱이에서 홧홧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섞이는 입술이 간만이라 물고 있음에도 아쉽고, 또 아쉽다.

한결이 게걸스레 은한의 입술을 빨았다. 질척이며 섞이는 혀가, 타액이 단전 아래를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으응…….”

한결의 손이 은한의 엉덩이를 마음대로 뭉갰다. 은한의 발뒤꿈치가 살풋 들렸다가 바닥에 닿기를 반복했다. 어찌나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는지 어젯밤 기껏 세탁소에서 찾아온 셔츠에 이리저리 구김이 졌다.

쪼옥. 음란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한결이 은한의 콧잔등과 이마에, 또 광대에 끊임없이 키스했다.

“출근하기 싫다.”

오늘따라 유독 낮은 그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은한이 간지러움에 한쪽 눈을 일그러트렸다.

“나도. 우리 월차 쓰고 하루 종일 섹스나…….”

은한이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어딘가에 던져둔 핸드폰이 웽웽 사이렌처럼 울렸다. 은한이 으득 이를 짓씹었다. 최근 몇 주는 주말에도 출근했다. 일하는 건 괜찮다. 그만큼 통장에 꽂히는 돈이 두둑할 테니까.

문제는, 한결과 보낼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 그냥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없다는 게 아니라, 몸과 몸이 부딪치는 시간이. 보통 한결과의 섹스는 금요일 밤에 이루어진다. 자세히 말하면 금요일 밤부터 주말까지. 평일에는 그를 감당해 내고 다음 날 출근할 자신이 없어 미루는 편이었다.

근데 주말에도 출근하니. 언제 섹스를 하냔 말이다!

한결이 표독스럽게 변하는 은한의 이마에다 꾸욱 입술을 눌렀다.

“다녀와.”

“존나 짜증 나. 그냥 때려 칠까?”

“돈 많이 벌어서 이민 가자며. 그러려면 열심히 다녀야지요.”

“아아. 한결아아아.”

은한이 한결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왜 이 끔찍한 세상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거지. 한결이 울적한 은한의 등을 두드리며 흐트러진 옷을 매만져 줬다.

“오늘은 꼭 칼퇴할 거야.”

은한이 다짐하듯 말했다.

“안 그래도 돼.”

한결이 고개를 저었다. 뾰족한 눈으로 한결의 넥타이를 노려보던 은한이 답싹. 다시 그에게 안겼다. 늘 그렇듯, 온몸으로 안아 오는 커다란 품이 말도 못 하게 아쉬웠다.

은한은 한다면 했다. 종일 눈을 치켜뜨고 오피스를 살핀 결과 오늘도 칼퇴는 무리겠더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은한은 고민을 시작한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답을 찾았다. 반차를 쓰자. 아니면 사직서를 쓰든가. 하지만 사직서를 쓰면, 먼 미래에 한결과 이민가기로 한 꿈을 이룰 수 없으니 전자를 실행하기로 했다.

벌떡 일어난 은한이 뚜벅뚜벅 회의실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제 팀장이 된 유란이 잡다한 샘플들을 펼쳐놓고 무언갈 고심하고 있었다.

“이 팀장님.”

“어어. 왜?”

“저 반차 좀 쓰겠습니다.”

“왜?”

“아픕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유란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아프다는 사람 얼굴이 너무 멀쩡하다. 꼿꼿이 곧추선 허리도,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게 다물린 입술도. 분명 땡땡이가 분명한데, 그러기엔 너무나 비장했다.

“뭔 일 있냐, 너?”

“아니요. 아픕니다.”

“기각.”

“아 왜요!”

은한이 동동 발을 굴렀다. 보드라운 카펫이 깔린 회의실이 은한의 패악을 간신히 숨겼다. 유란이 쯧쯧 혀를 찼다. 요즘 제법 어른티를 내던 은한인데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반차 사유가 존나 성의 없어서. 차라리 땡땡이치고 싶어서요. 그러던가.”

“아. 그럼 땡땡이치고 싶습니다. 반차 쓰게 해 주세요.”

“기각.”

“아 또 왜요!”

“컨닝은 안 돼. 좀 크리에이티브 한 사유 없냐?”

“우씨.”

은한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팽팽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생각나는 변명이 없다. 뭘 내놓는다 한들 쉽게 만족할 유란도 아니다. 은한이 질끈 세게 눈을 감았다.

“애인이랑 섹스를 못 했습니다. 야근에 주말 출근까지. 애인이 서운해할까 봐 겁납니다. 저 걔 없으면 못 살아요. 살려 주세요.”

“하? 뭐, 참신한 사유기는 하다?”

“오늘 일 못 한 거 다음 주에 빡세게 할게요. 나 일 잘하잖아, 누나-아.”

유란의 의자 옆에 쪼그려 앉은 은한이 훌쩍훌쩍 가소롭게 울음을 연기했다. 그리고 어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고양이 캐릭터처럼 눈을 떴다. 아주 먼 옛날, 유란이 자신의 동생과 똑 닮았다고 말했던 얼굴이었다. 이걸 이렇게 써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은한은 그만큼 간절했다.

“……가라, 가.”

“와씨. 진짜요?”

“그래. 대신 다음 주에 와서 네 자리에 무슨 서류가 어떻게 쌓여 있든 불만하지 마라.”

“그럼요! 그날 집에 안 들어가고 일만 할게요. 아, 그래도 집에 안 들어가는 건 좀 그렇고. 자정까지 일할게요.”

은한이 사르르 눈을 휘며 웃었다. 유란이 픽, 실소했다. 반차 사유가 애인과의 섹스라니. 은한도 절대 정상은 아니다.

꾸벅, 꾸벅. 두 번이나 허리를 숙이며 사라졌던 은한이 와다다 다시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재료 중 하나를 집었다.

“저 이것 좀 빌려 갈게요.”

“야!”

“꼭, 반납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 미친놈……!”

이미 문 너머로 사라진 은한에 유란이 질퍽한 욕을 내뱉었다.

* * *

현관에 들어선 한결이 넥타이를 풀며 핸드폰을 밝혔다. 메인 화면엔 방긋 웃고 있는 은한만 있을 뿐, 다른 메시지나 전화가 없다. 으음. 낮게 신음한 한결이 메시지창을 켰다.

[나 퇴근해.]

[방울이는 오늘도 야근?]

그 이후로 답이 없다. 드레스룸에 코트를 건 한결이 톡톡 핸드폰을 두드렸다.

“바쁜가.”

그래도 이상한데. 은한은 아무리 바빠도 꼬박꼬박 연락은 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에 연락에 집착하듯 굴었으니까. 근데 그런 그가 연락이 없다.

한결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차라리 많이 바빠 핸드폰을 볼 새도 없는 것이면 좋겠는데. 홈웨어를 꺼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일정하게 들려오는 신호음에 애가 탔다. 한결의 발이 탁탁, 조금 짜증스레 바닥을 두드렸다. 꽤 오랫동안 신호음이 가도 받을 기미가 없어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귀에서 핸드폰을 떼자 익숙한 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다. 은한의 벨소리였다.

“핸드폰을 놔두고 갔나……?”

한결이 드레스룸을 나왔다. 벨소리가 크게 들린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벨소리를 따라갔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 한결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침실 앞이었다.

문고리를 쥔 한결이 느리게 문을 열었다. 침실 특유의 묵직한 공기가 문 틈새로 쏟아졌다.

“안녕.”

“…….”

“일찍 왔네.”

한결이 툭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흡,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잔뜩 부푼 폐가 뻥,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너…….”

은한은 나신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 완벽한 나신은 아니다. 그의 목에 매끈한 방울 하나가 걸려 있었으니까. 그가 살짝 몸을 뒤틀 때마다 딸랑, 딸랑. 쓸데없이 맑고 청아한 소리가 한결의 고막을 괴롭혔다.

“오늘 칼퇴한다고 했잖아.”

“…….”

“이리와. 나 너랑 떡칠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섰어. 아플 지경이야.”

얇은 허벅지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벌어진다. 평소보다 조금 더 붉어진 그의 페니스가 일자로 빳빳하게 서 있었다. 한결은 계속 숨을 들이마시기만 할 뿐, 뱉어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고 신경 좀 썼어. 어때?”

은한이 침대 위에 무릎으로 서 한결에게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한결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금세 한결의 코앞으로 다가온 은한이 능숙하게 그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드로즈까지 한 번에 잡아 내리자 탄탄한 복근 아래로 커다랗게 발기한 페니스가 퉁, 튀어나왔다. 은한이 소리 죽여 웃었다.

“못 본 새에 더 큰 것 같다?”

한결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은한이 앙, 귀두를 물었다. 후끈하고 촉촉한 점막이 한결의 귀두를 조였다.

“윽…….”

짜릿한 쾌감에 한결의 한쪽 얼굴이 일그러졌다. 춥춥, 쭈웁. 야한 소리가 침실을 울린다. 고환을 물고 있던 은한이 혀를 내어 뿌리부터 귀두 끝까지 핥아 올렸다. 잘근잘근 이로 기둥을 깨물며 머리를 흔드니 방울이 경련했다.

“그, 그만…… 아, 은한아. 그만해.”

“……왜?”

벌써 쌀 것 같아? 귀두 끝에 입술을 붙인 은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장난기 많은 고양이 같다. 고양이 같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한결이 반쯤 풀려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끌었다. 손바닥과 손등을 싸매는 넥타이의 보드라운 실크 느낌조차 평소와 달리 느껴졌다.

막 넥타이를 바닥으로 집어 던지려 했다. 넥타이 끝에 유두를 스친 은한이 흠칫 떨지만 않았으면 그랬을 터다. 자기가 떨어 놓고도 놀란 은한이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한결은 그 웃음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왜 그래?”

은한이 두 손으로 한결의 것을 주무르며 그의 행동을 재촉했다. 한결이 침묵한 채 은한과 그의 목에 달린 방울과 자신이 쥐고 있는 넥타이를 번갈아 봤다. 일렁이는 눈에 평소와 다른 육욕이 꿈틀거린다.

한결의 두툼한 페니스에 볼을 문지르던 은한이 농담 삼아 말했다.

“왜. 묶기라도 하시려고?”

“그래도 돼?”

받아들이는 한결은 농담으로 받지 않은 듯했지만. 은한이 바보 같은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설마 ‘그래도 돼.’라는 답이 들려올 줄은 몰랐는데. 당황한 은한은 차마 뒤는 생각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어, 뭐, 그래…….”

얌전히 두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한결의 생일 선물로 자신이 줬던 구찌 넥타이가 부드럽게 손목에 감긴다. 금실로 수놓아진 벌이 은한의 손목에 들러붙었다.

기다란 넥타이는 은한의 손목을 세 번이나 칭칭 감고도 한참이나 남았다. 그렇게 세게 묶지도 않았는데 묘한 압박감이 든다. 은한이 넥타이로 묶인 자신의 손목을 남 일처럼 관찰했다.

“이제 어떡, 흐앗!”

한결이 넥타이 끝을 억세게 잡아 침대 위로 휙 끌어 올렸다. 딸랑- 은한이 경쾌한 방울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그에게 이끌려 갔다. 금방까지 한결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베개가 코앞에 있다. 쓸리기라도 한 건지 손목이 아릿했다. 은한이 소리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섹스만 하면 다정한 백한결은 지구 반대편으로 사라졌지. 은한은 새삼스레 그걸 또 깨달았다.

넥타이와 침대 머리판을 한 번에 움켜쥔 한결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귀 끝에 팔이 스칠 정도로 쳐들려 있어 움직이는 건 다리뿐인데. 그마저도 이불을 허우적거릴 뿐, 한결에게 닿지 못했다.

와. 이런 느낌은 또 처음이네.

수백 번은 더 한 섹스인데.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감각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아…….”

한결의 묵직한 숨이 목덜미에서 흩어진다. 그의 진득한 시선이 등줄기를 지나 엉덩이의 가장 높은 산까지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선다.

은한이 자신의 나신을 감상하고 있는 한결의 표정을 상상했다. 그 짜릿함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리 내 남자 친구라지만 가끔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섹시하단 말이지.

베개에다 얼굴을 파묻은 은한이 웅얼거렸다.

“한결아.”

“어.”

“어떻게, 주인님이라고도 불러 줄까?”

한결이 피식 웃는다.

“아니. 이름 불러 주는 게 좋아.”

“네. 원하시는 대로.”

고분고분한 은한이 사랑스럽다. 섹스할 땐 평소와 성격이 달라지는 은한인데, 오늘은 또 다르다. 한결에게 섹스란 은한의 몸에 대한 갈망과 쾌락을 채우기 위함도 있지만, 그를 탐색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또 새로운 강은한을 발견했다. 어금니 사이에 침이 고였다. 새로운 은한을 낱낱이 집어삼키고 싶었다.

“으응…….”

여전히 넥타이를 말아 쥐고 은한을 속박한 한결이 반대 손으로 그의 매끈한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은한의 등허리가 꿈틀거린다.

통통한 귓불을 쭉 빨아 당겼다 놓은 한결이 얇은 목선에서 멈췄다. 방울에 꿰인 리본이 어색하게 묶여 있다. 거울 앞에서 혼자 낑낑거리며 묶었으리라. 그 노력을 아낌없이 칭찬하는 바이다. 덕분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로 흥분했으니까.

커다란 손이 은한의 몸뚱이 여기저기를 함부로 주무른다. 제법 단단한 팔뚝도, 침대 사이에 숨겨진 가슴팍도, 그나마 살이 많은 허벅지까지. 그리고 아껴 두고 아껴 두던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미끈한 무언가가 묻어 나왔다.

한결의 미간이 확 좁아 들었다. 끈적하고 미끌거리는 촉감이 낯설지 않았다.

“이게 뭐야.”

“내가…… 미리 풀었어.”

“뭐?”

“그냥 들어오면 된다고.”

은한이 흘깃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얇은 귓바퀴가 새빨갛다. 한결을 기다리면서 홀로 자신의 뒷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었다. 빨리하자고 엉덩이를 흔들어도 혹여 피를 볼까, 한참이나 손가락만 쑤셔 댈 한결을 잘 알아서.

“아!”

한결의 손이 매섭게 은한의 볼기짝을 스치고 지나갔다. 통통한 엉덩이가 탱글거리며 흔들린다. 꽤 거친 손찌검이었던지라 하얀 살갗이 금세 붉게 색을 바꿨다.

“왜 때려!”

“누구 마음대로 여기에 손을 집어넣어.”

“일 분이라도 너랑 빨리하고 싶으니까 그랬지!”

지도 자위하면서! 은한의 발이 동동 짜증스레 침대를 내리쳤다.

“아, 나 진짜 급하다고! 내가 너랑 섹스한다고 반차까지 썼단 말이야!”

“…….”

“야. 씹냐? 어?”

“…….”

“한결아. 자기야. 그냥 좀, 넣어 줘라. 어? 다음부터 안 그럴, 흐업…….”

지금…… 뭐…… 무슨…….

두툼한 살덩이가 순식간에 끝까지 쑤셔 박혔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듯한 페니스에 눈을 커다랗게 뜬 은한이 꺽꺽 숨을 먹었다. 한순간에 뒤를 가득 메운 페니스를 믿을 수가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부피감인데, 뒷구멍은 우물우물 한결의 것을 물어 댔다.

“진짜, 후우…… 제대로 푼 모양이네.”

은한의 등에 가슴을 붙인 한결이 허스키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 말고 다른 게 사랑해 마지않는 구멍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소리에 홧김에 쑤셔 넣긴 했다만, 이렇게 꽉 맞물려 들어가니 정신이 뭉텅뭉텅 녹아내렸다.

또 졌다. 은한에게.

“아…… 흡, 하, 한결, 아, 윽!”

은한의 손가락이 벅벅 베개를 긁었다. 쾌감이고 뭐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뇌를 지배했다. 저도 모르게 사지를 뒤틀며 한결을 벗어나려 했다. 감히, 한결을 벗어나려 했다. 감히. 침대 위에서.

“안 돼, 안 돼.”

쯧쯧 혀를 찬 한결이 훅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은한의 상체가 번쩍 쳐들렸다. 단단한 손이 부드럽게 골반을 감싸온다. 그 덕에 그러잖아도 깊었던 삽입이 배꼽 아래를 쿠욱, 짓눌렀다. 이미 뭉개질 대로 뭉개진 전립선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하, 한……결아. 아…… 어떡, 흣. 아…….”

평소라면 탁탁, 그의 허벅지나 팔뚝을 때리며 만류했을 텐데 단단히 묶인 손은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번개 같은 쾌감에 페니스가 질질 정액을 물처럼 흘렸다. 은한이 움찔움찔 몸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움직일게.”

한결이 페니스를 뒤로 물리며 읊조렸다. 그 와중에 보고는 한다. 은한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한결이 못 본 척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

느릿하게 빠져나간 살덩이가 콱콱 내벽을 찌른다. 딸랑이는 방울 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격렬하게 진동했다. 거대한 압박감에 확 오그라든 내벽인데, 한결의 것은 그사이를 헤치고 가장 깊숙한 곳을 때리고 나갔다.

“하읏, 응. 아…… 아흡, 으응…….”

“그만, 윽, 좀 조여.”

“그게 내, 흐, 마음대로……, 안, 아응!”

뱃속이 꿈틀거린다. 한결의 것을 거부하는 건지, 반기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철썩, 철썩. 내벽에 쏟아부었던 젤이 한결의 페니스에 쓸려 죄다 삐져나왔다. 그게 사타구니와 볼기를 질척하게 적셨는데 음모끼리 들러붙어 기이한 감각을 제공했다.

“흐읏, 응! 아…….”

내벽이 마구잡이로 휘저어진다. 손목이 묶인 상태에서 배려 없는 한결의 움직임이 평소와는 다른 오르가슴을 퍼부어 댔다. 발기한 귀두로 전립선이 눌릴 때마다 발가락이 안으로 곱아 들었다.

한결아. 제발, 좀. 한결아. 한결아.

은한이 신음에 눌린 목소리로 애타게 한결을 불렀다. 그만두라는 소리도 아니었고, 더 해 달라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정신을 놓기 직전이라 그의 이름을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부르짖는 거였다. 그 울음 사이로 방울 소리가 울렸다. 은한은 그 소리에 노이로제라도 걸릴 듯했다.

한결은 은한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온몸에 키스했다. 그가 좁디좁은 곳에다 우악스레 페니스를 쑤셔 넣었을 때, 은한은 온 힘을 쥐어짜 구멍을 조였다. 부러 그런 건 아니었고, 절로 그렇게 됐다.

“아흑!”

“윽…….”

한결이 단말마의 신음을 흘리며 며칠 내내 참고 있던 정액을 토해 냈다. 평소보다 많은 양의 정액이 가감 없이 은한의 속으로 흘러갔다. 늘 끼던 콘돔조차 착용하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하아, 하아…… 후읏, 하아…….”

은한이 열심히 밭은 숨을 골랐다.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폭우 같은 쾌락에 시달려 저릿하다. 후끈한 뱃속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고작 한 번(물론, 한결에게만 한 번이고 은한에겐 한 번이 아니지만 보통 섹스 횟수는 한결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한 번이라 하겠다), 고작 한 번 했을 뿐인데 뭉쳐 있던 욕구가 완전히 사라졌다. 은한은 모든 걸 포기하고 자고 싶었다. 아니면 곧 까무러치겠지.

한결도 은한의 위에 몸을 포개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은한이 헐거워진 넥타이를 발작하듯 털어 냈다. 불그스름해진 손목에 살갗으로 느껴지는 통각은 없었지만, 시각적으로는 통각이 느껴졌다.

“하아…….”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야 은한은 규칙적인 호흡을 할 수 있게 됐다. 여태 뒤에 박혀 있는 한결의 것이 사라지면, 더 원활하게 호흡할 수 있겠지. 은한이 툭툭 한결을 두드렸다.

“빼.”

“……벌써?”

한결이 아쉬운 티를 감추지 못했다. 그가 꼬옥 은한을 감싸 안았다. 덕분에 얕았던 삽입이 훅 깊어졌다. 오밀조밀한 주름 사이로 한결의 정액이 비집고 샜다.

“아흣!”

은한이 몸을 잔뜩 오그리고 부르르 떨었다. 민감해진 내벽이 활발하게 꿈틀거리며 한결의 것을 씹어 댔다.

“여기는 더 해도 된대.”

한결이 허리를 좌우로 뒤틀며 구멍을 헤집었다. 반쯤 일어선 은한의 페니스를 만져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랄 마라.”

은한이 으르댔다. 그의 분노를 나타내듯, 방울이 찌르르 울렸다. 한결은 그 순간에도 그게 귀여워 작게 웃었다. 방울이가 방울 달고 딸랑딸랑. 동영상으로 보관하고 싶다고 하면 쫓겨나겠지. 한결이 코를 찡긋거리며 말을 삼켰다.

슬그머니 뒤로 성기를 물렸다가 부드럽게 전립선을 문질렀다. 은한의 몸이 흠칫흠칫 떨린다. 쥐고 있는 페니스도 어느새 완연히 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더는 제 움직임을 만류하지 않는 은한.

이건 무음의 허락이다. 이제 그쯤은 알았다.

한결이 은한을 뒤집고 그의 다리를 어깨에 얹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에 앞서 쪽. 촉촉한 은한의 이마에 뽀뽀했다.

“천천히 할게.”

“존나 하나도 신뢰가 안 갑니다만.”

“진짜야.”

한결이 보란 듯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퍽퍽 제멋대로 은한을 들쑤시는 맛도 좋지만, 이렇게 느릿하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시선을 섞는 섹스는 또 다른 맛이 있다. 한결은 무엇이든 간에, 은한과 함께하는 섹스라면 두 팔 벌리고 환영이었다.

은한이 모든 걸 포기했다는 듯 축 늘어졌다.

집요하게 그와 눈을 마주친 한결이 천천히 페니스를 뺐다가 집어넣었다. 녹진하게 풀린 내벽이 기분 좋은 쾌감을 선사한다.

“으응…… 읏, 하아.”

“은한아. 사랑해.”

“응…….”

은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한결이 부드럽게 그의 턱을 감싸 쥐었다. 입술이 맞물리고 혀가 엉킨다.

치열했던 평일의 끝이자, 사랑으로 충만할 주말의 시작이었다.

* * *

주말 오후는 부유하는 먼지조차 여유롭고, 나른하다. 두 사람은 소파에 퍼질러 누워 주말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한결의 품에 기대어 만화책을 보던 은한이 흘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자기야. 밥 뭐 먹을까?”

느지막이 12시에 눈떠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고팠다. 마찬가지로 만화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한결이 흐음, 하며 고민했다.

“누님이 주신 소시지 남았나?”

“아니. 진작 다 먹었지.”

“그럼 시켜 먹을까?”

은한이 만화 주인공의 얼굴을 주시하며 메뉴를 상기했다. 중식, 일식, 양식부터 패스트푸드까지. 매번 생각하지만 참 살기 좋은 우리나라다. 만화책을 덮은 은한이 꾸물꾸물 몸을 뒤틀어 한결을 바라봤다.

“시켜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글쎄. 생각나는 건 딱히 없는데.”

한결이 매끈한 은한의 이마에 쪽, 입술을 내렸다. 동그란 눈이 열심히 돌아가며 메뉴를 되짚는다. 그러다 내놓은 결론은 한결의 예상 밖이었다.

“오랜만에 장 보러 갈까?”

“장?”

“어. 우유랑 달걀도 떨어졌고. 미현이가 그러는데 밤 식빵이 그렇게 맛있대. 우리도 그거 사 먹어 보자.”

맛있는 음식을 떠올린 은한의 발이 달랑달랑 신나게 흔들렸다. 반면 한결의 얼굴은 조금 굳어졌다.

“……그냥 주문하면 안 돼? 가면 한 시간은 걸어야 하는데.”

그가 부드럽게 은한의 무릎을 주물렀다. 은한의 무릎은 꾸준히 물리치료를 하는데도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비라도 내리면 걸음걸이가 확연히 더뎌진다. 묘하게 어긋난 걸음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에이. 그 정도는 괜찮아. 의사 쌤이 산책하듯 걷는 건 괜찮댔어.”

은한은 이미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한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부루퉁하게 입술을 부풀렸다. 그렇다 한들. 언제고 제가 은한을 이긴 적이 있던가.

한결이 삼십 분 만에 모든 장을 보리라, 다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장을 보면 식사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보다 간식으로 치부되는 게 훨씬 많았다. 과자, 사탕, 초콜릿류부터 한결이 좋아하는 감자튀김까지. 요즘엔 물만 넣고 끓이면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가 많이 나와 그것까지 잔뜩 사니 카트가 터져 나갈 듯했다.

은한은 마트 전체를 쓸어 가겠다는 것처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은한의 입에 들어가는 거라면 뭐든 오케이인 한결은 별말 없이 카트를 끌었다. 벌써 삼십 분 넘었는데. 슬슬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걱정만 하며.

은한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진열대에 각양각색의 시리얼이 줄지어 서 있다. 은한이 먹어 본 것과 먹어 보지 않은 것에서 고민할 동안 한결은 넘치기 직전인 카트를 정리했다.

“한결아.”

“응.”

“이리 와 봐.”

노란 패키지의 시리얼을 든 은한이 한결을 불렀다. 한결이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것 좀 봐.”

은한이 영양 정보가 적힌 박스를 가리켰다. 한결이 좁쌀만 한 글씨를 읽으려 허리를 숙였다.

쪽.

순간 시리얼로 얼굴을 가린 은한이 그의 볼에다 짧게 입을 맞춰왔다. 그리고는 휘휘 주위를 둘러 혹시 본 사람이 있을까, 걱정한다. 한결이 멍청한 표정으로 은한을 쳐다봤다.

“아유. 너무 멋있으셔서요. 저도 모르게 뽀뽀부터 해 버렸네.”

“…….”

“혹시 애인 있으세요?”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낯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한결이 피식 그를 따라 웃었다. 이렇게 예고 없이 사랑스러울 때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당장 홀딱 벗겨다 온몸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한결이 다른 시리얼을 집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활자들을 읽어갔다. 영양소 함유. 비타민. 아몬드와 크랜베리가 가득. 시리얼에 시선을 고정한 한결이 무심함을 연기했다.

“……결혼했는데요.”

“어머, 어머. 젊어 보이시는데. 벌써 결혼하셨구나. 아쉽다.”

은한이 묘하게 한결의 팔꿈치를 쓰다듬었다. 한결의 손에 들려 있던 시리얼이 투닥, 카트 안으로 날아갔다.

“근데, 커피 한 잔 정도는 괜찮아요.”

“아…… 커피 한 잔 정도는 괜찮아요? 그럼 이왕 괜찮을 거 밥 아니, 술은 어때요?”

“뭐…… 그 정도는.”

한결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글맞게 웃었다. 은한의 입꼬리에 매달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뒤질래. 이 새끼가? 그 정도는 괜찮아요-오? 괜찮아아-아?”

퍽퍽. 제법 매서운 손길이 팔뚝을 때린다. 한결이 벅벅, 맞은 팔뚝을 문지르며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했다.

“근데 진짜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와서 작업 걸면 어쩌지.”

“뭘 어떡해! 씨바. 고민돼? 어? 그럼 그 새끼랑 살던가.”

이제는 팔뚝으로 모자라 발등도 짓밟는다. 한결은 그저 그의 질투가 너무 좋아 허헝, 멍청하게 웃고만 있었다.

왜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행복해 보이는 한결의 모습에 은한이 흐웅, 콧김을 뿜었다. 팔짱을 낀 그가 진열대에 기대어 섰다.

“나도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와서 작업 걸면 홀라당 넘어갈 거야. 나는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술도 먹고 그러다 분위기 무르익으면…….”

“야.”

한결이 단번에 얼굴을 굳히며 으르렁거린다. 이번엔 은한이 끅끅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이기지도 못할 거 왜 놀려.”

은한이 카트를 밀며 시리얼 코너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니 턱. 커다란 손이 카트를 부여잡고 행로를 방해한다.

“진짜야?”

“엉?”

“진짜로 나랑 똑같이 생긴 새끼가 와서 작업 걸면 그럴 거야?”

“…….”

아. 이 귀여운 놈을 어쩌면 좋지. 서른 넘은 주제에 귀여워. 사랑스럽게. 은한이 꿈틀거리는 광대를 추슬렀다.

“백한결 씨.”

“왜.”

“나는 존나 너밖에 없네요.”

“…….”

돌덩이처럼 굳은 한결을 지나친 은한이 쇼핑을 이어 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번뜩 정신을 차린 한결이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금세 은한을 따라잡았다.

언제 토라졌었냐는 듯, 만면에 웃음꽃이 피어 있다. 은한의 앞에선 그렇게 헤플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진짜 나밖에 없어?”

“어. 그러니까 너랑 살고 있지. 평생 너랑 살 거고.”

“…….”

“싸랑한데이, 백한결.”

은한이 찡긋 한쪽 눈을 일그러트렸다. 주위를 성의 없이 둘러본 한결이 카트에 들어있던 시리얼을 집어 들었다. 그걸로 은한의 얼굴 위를 가리고 쪽. 순식간에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은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보라 그러라지.”

“……그래. 보라 그러라지.”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후로도 카트는 끊임없이 차올랐다. 우유에, 사과와 청포도까지.

“이제 밤 식빵 사러 가자!”

달걀 한 판을 조심히 카트에 넣은 은한이 싱글벙글 웃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한결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대파가 놓여 있는 매대 앞에서였다.

은한이 한결의 팔뚝 옆으로 빼꼼 눈만 내밀었다.

“파 사게? 우리 파 필요 없는데?”

“어, 먹을 건 아니고…….”

“그럼?”

한결이 산처럼 쌓인 파 중에 가장 새파랗고 기다란 것을 집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은한에게 넘겨줬다. 은한이 무심결에 그걸 받아 들었다.

“풉…….”

해 봐야지, 해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제야 행동한다. 먼 옛날, 늘 그렇듯 국밥집에서 소주를 마시던 날. ‘대파’달라는 은한의 사투리를 이해하지 못해 파오리를 떠올렸던 그날. 함께 장을 보러 가면 꼭 들려 봐야지, 생각했었는데.

꾸역꾸역 웃음을 억누른 한결이 무덤덤한 얼굴로 핸드폰 카메라 앱을 켰다. 그리고 찰-칵.

알 수 없는 한결의 행동에 은한의 눈썹이 비죽 위로 치솟았다. 도톰한 입술이 새 부리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다.

“……뭐 하냐, 너?”

“아니야. 이제 됐어. 내려놔도 돼.”

“뭐했냐고.”

한결이 히죽거리며 은한과 진우, 그리고 태준이 있는 채팅방에 사진을 전송했다. 마침 베이지색 후드를 입은 은한이 귀엽기 그지없다. 이가 간지럽다. 또 집에 가면 한바탕 깨물며 난리를 피울 것 같았다.

“씹냐?”

“파오리.”

“어?”

“파오리 생각나서.”

은한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파오리가 뭐야. 갑자기 그게 왜 나오는데? 그냥 대파가 있어서? 한결이 갸우뚱 고개가 꺾이는 은한을 못 본 체 하며 카트를 끌었다.

[태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방울이 국밥 대파 머거써요?]

[진우: 저걸 그냥 찍게 해주던? 백한결 오늘로 세상 하직하냐?]

[태준: 자기가 파오린줄 모른다에 한 표.]

[태준: 두 표.]

[태준: 세 표.]

곧 난리 난 톡방을 그가 보겠지만. 아마 엉덩이를 세 대쯤 아프게 차일 테지만. 뭐 어떤가. 일단 지금은 귀엽고, 깜찍하고, 재미있어 죽겠다.

* * *

한결이 취하는 일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은한도 그와 동거를 하면서 두어 번 본 게 다였다. 그가 말술인 이유도 있었고, 취할 때까지 술을 먹지 않아서기도 했다. 그런 그가 취하는 상황은 딱 하나였는데, 타의에 의해 술을 마실 때였다.

“바아앙울아아…….”

“으아. 야, 넘어져! 넘어져!”

한결의 부서는 다행스럽게, 회식이 잦은 편은 아니었다. 문제는 잦지만 않지, 한번 마시면 끝을 봤다. 팀장도 알아주는 말술이라는데, 한결이 술을 꿀떡꿀떡 너무 잘 마시니 회식 때마다 옆에 앉혀 놓고 놔주질 않는단다. 다른 사람들은 와이프가, 혹은 남편이 걱정한다는 그런 변명으로 빠질 수라도 있지. 대외적으로 한결은 독신이라 그럴 수조차 없었다.

좆같은 사회생활. 은한이 비틀거리는 한결을 추슬러 안으며 으득 이를 갈았다. 아마 태준과 진우도 기어서 집에 갔으리라.

“방울아아 나 취해써…….”

“알아. 알아.”

냄새가 아주 술에 흠뻑 빠졌다가 온 것 같다. 은한이 코를 찡긋거리며 그를 소파로 안내했다. 이대로 침대에 눕히면 내일 오후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잠만 내리 잘 한결이다. 어떻게든 옷을 갈아입히고, 씻겨야 했다.

소파에 늘어지듯 누운 한결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살짝 드러난 동공에 초점이 없는 건 당연하고,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은한이 한결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주머니에도, 손에도 넥타이가 없는 걸 보니 술집에 두고 나왔거나, 택시에 두고 내렸거나. 이럴 줄 알고 데리러 간다고 한 건데. 언제 끝날지 모르니 오지 말라고 극구 만류를 했다.

바지 버클도 풀고, 양말까지 벗긴 은한이 흘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가 훌쩍 넘은 시간. 조금 있으면 해도 뜨겠네. 스물도 아니고 서른인데 이렇게까지 죽자고 술을 마셔도 되나 걱정이 됐다.

“한결아.”

“응…….”

“자기야.”

“으응…….”

“씻어야지.”

“응…….”

한결의 고개가 매가리 없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린다. 푸욱 한숨을 내쉰 은한이 부엌에 가 찬물을 가져왔다. 그건 또 어떻게 안 건지. 두 손을 곱게 내밀고 물을 기다린다.

귀엽기는.

픽 웃은 은한이 커다란 손에 물 잔을 들려 줬다. 꿀꺽꿀꺽 거칠게 움직이는 목젖이 단숨에 물을 삼켰다. 한결의 동공이 조금이나마 빛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한 잔 더 줄까?”

“으응.”

또 두 손을 다소곳이 내민다. 은한이 후다닥 물을 한 잔 더 가져왔다. 한결은 새로이 가져온 물도 한 번에 마셨다. 그래도 내쉬는 숨엔 알코올 냄새가 가득했다.

은한이 한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붉어진 광대, 쌍꺼풀이 죄다 풀린 눈, 벌어지다 만 입술. 흐트러진 한결이 낯설었다. 저에게는 늘 좋은 모습, 멋진 모습, 예쁜 모습만 보여 주려 하는 그니까.

“한결아.”

고요한 새벽에 은한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어어?”

한결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부릅, 매서운 눈을 만들었다. 말을 듣고 있다는 표시인가 보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은한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좋아해.”

“…….”

“어제는 말 못 해 줬더라. 미안.”

한결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인다. 그가 팔을 들어 툭, 은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런 거로 미안해하지 마.”

“…….”

“우리 앞으로 평생 같이 살 건데, 백 번쯤은 까먹어도 괜찮아.”

“……우리 한결이 말도 차암 예쁘게 하지.”

한결의 볼에 쪽 입을 맞춘 은한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묵직한 몸이 버겁게 이끌려 왔다.

“그래도 내일도 말해 줄 거야. 그러려면 씻고 주무셔야겠지요?”

“어어…….”

멀다고 생각한 적 없던 욕실인데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어깨에 매달려 있는 한결이 말도 못 하게 무거웠기 때문이다. 기다란 다리가 주춤주춤 요상하게 걷는다.

막 욕실 앞에 다다랐을 때, 한결이 발뒤꿈치에 꾹 힘을 줬다. 은한이 장애물에 걸린 듯 턱하고 걸려 비틀댔다.

“방울아아.”

“오냐.”

“……같이 씻자.”

“…….”

은한이 가늘게 눈을 뜨고 한결을 흘겼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건지 웃고 있는 낯짝이 얄미웠다. 얼큰하게 취해놓고도 내 엉덩이는 보고 싶다 이거지.

“어차피 혼자 씻길 생각 없었거든요? 너 치약으로 머리 감을 것 같다고.”

이미 전적이 한 번 있다. 한결의 말에 의하면 저는 양치하다 치약을 그냥 냅다 삼킨다는데, 한결은 치약을 샴푸로 이용했다. 그래 놓고 꾸물꾸물 침대로 들어와 오늘따라 샴푸가 시원하다나, 두피가 상쾌하다나 그런 소리를 해 댔다.

다음날 빼빼 마른 치약이 욕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니야아. 치약은 이 닦는 거지. 방울이 바보네. 그것도 모르고.”

“예. 제가 좀 바보지요. 바보의 동거남은 옷이나 마저 벗어 보시겠어요?”

한결을 변기 위에 앉힌 은한이 자신의 옷도 훌렁훌렁 털어 냈다. 한결의 시선이 집요하게 은한의 나신을 따라갔다. 그 모습에 은한이 헛숨을 삼켰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쫓아낼 수도 없고. 사랑해 마지않는 제 연인이거늘. 은한이 한결의 칫솔에다 치약을 듬뿍 짜 내밀었다.

“자, 이건 칫솔에다 치약 짠 거. 이걸로는 뭐 해야지요?”

“양치질.”

“그렇지. 우리 자기 똑똑하네.”

“양치질 다 하면 뽀뽀하나?”

한결의 머리가 갸우뚱 옆으로 흘러갔다. 맹한 눈에 음흉한 속내가 가득하다. 은한은 결국 박장대소하고야 말았다. 좀 힘들긴 해도, 그가 종종 취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귀여우니까.

“어. 해 줄게. 샤워 잘하면 펠라도 해 줄게.”

“와씨. 대박.”

칫솔을 냅다 입에 쑤셔 넣은 한결이 전투적으로 양치질하기 시작했다. 은한은 그동안 샤워기를 틀어 온도를 조절하고 몇 가지 샤워용품들을 꺼내 놨다.

한결은 키스를 하겠다는 의지인지, 펠라를 받겠다는 의지인지 눈을 잔뜩 홉뜬 채 알차게 샤워를 해갔다. 중간에 샴푸를 샤워 볼에 짜 은한에게 한 소리 들은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 아, 그사이에도 은한의 몸을 직접 닦아 주겠다며 팔을 휘둘러 대다 넘어질 뻔도 했다.

한결의 머리 위에 수건을 걸친 은한이 이번엔 침실로 그를 안내했다. 그래도 술이 좀 깬 건지, 아니면 완전히 침식돼 모든 의지를 상실한 건지 한결은 군말 없이 침실까지 당도해 줬다.

“우아, 침대 좋아.”

침대에 대자로 뻗은 한결이 새삼 푹신한 침대에 감탄을 뱉었다. 불편한 자세로 그의 머리칼을 말려 주던 은한이 의무적으로 답했다.

“네가 직접 누워 보고 고른 거니까 당연히 좋겠지요.”

“내가아? 내가 골랐어?”

“네. 그쪽이 직접 고르셨어요.”

우리는 왜 새벽 다섯 시에 침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은한은 금방 취하는 대신 금방 술에서 깼다. 반면에 한결은 취하는 게 느린 만큼 깨는 것도 느렸다. 샤워까지 했으면 적잖이 정신을 차릴 만도 하거늘.

한결이 잘 고른 것 같다며 탕탕 침대를 두드렸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침대 전체가 일렁인다. 아, 이거 코끼리가 지나가도 흔들림 없는 침대랬는데. 속았나. 은한이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대충 머리도 다 말려 주고, 드로즈도 입혔다. 그때의 한결은 이미 반쯤 수면에 들어선 상태였다. 불을 끈 은한이 꼬물꼬물 한결의 품을 파고들었다.

“자기야. 키스는?”

“해야지…….”

“펠라는?”

“그거뚜…….”

대답은 잘하지. 은한이 검지로 퉁, 한결의 코를 튕겼다. 살풋 미간을 구기기만 할 뿐, 감은 눈은 떠지지 않는다. 술을 궤짝으로 들이부었구나, 아주. 주말에 물리 치료하러 갈 때 한결의 건강검진도 알아봐야겠다고 은한이 생각했다.

“한결아, 자?”

“…….”

“좀 섭섭하네. 나는 키스도 펠라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

그래도 좋다. 백한결이 취한 것도 보고. 은한이 한결의 품에 안겨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한결은 곯아떨어진 상태임에도 은한의 허리를 껴안아 왔다. 그리고 반대 손은 당연하게 엉덩이를 주무른다. 은한이 킥킥 작게 웃었다.

“하여튼 버릇 어디 안 가지.”

“…….”

“다 괜찮으니까 밖에 가서 다른 사람 엉덩이는 주무르지 마라. 어?”

어둠에 가려 어슴푸레한 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은한이 멍하니 까만 천장을 올려다봤다. 귓가에 흩어지는 한결의 숨소리가 속절없이 평화롭다. 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뒤늦게 잠이 밀려왔다. 새벽 같은 아침에 출근해서부터 지금까지 한결을 기다리느라 쪽잠도 못 잤으니 졸릴 만도 했다.

“한결아.”

“…….”

“잘 자.”

내일도 봐.

동거의 좋은 점은, 기나긴 이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아무리 늦어도 함께 하는 이 ‘집’에 돌아오니 말이다. 늦으면 늦는 대로, 이르면 이른 대로 소파에 앉아 TV나 보고 있으면 상대방이 나타났다. 얼마나 좋은가.

굳이 약속을 따로 하지 않아도 함께 하는 게 당연한 사이. 그 누구보다 상대의 편에 서 줄 수 있는 사람. 울적해서 퇴근하면 등을 토닥이며 나를 위로해 줄 사람. 대화도 늘었고, 맞대는 온기도 늘었으며 공유하는 감정은 곱절이 됐다.

그나저나 내일 해장은 뭐로 시켜 주지.

그런 생각을 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한결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완벽히 잠을 털어내지 못한 정신이 몽롱하다.

살짝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팔뚝에 찰싹 달라붙은 은한이 있다. 저와 같은 디자인의 잠옷을 입고, 같은 샴푸를 쓰고, 같은 시간에 잠이 드는 저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색색. 그가 일정하게 내뱉는 숨이 귓가를 간질인다.

참, 완벽한 아침이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치받는 감동은 줄어들 줄 몰랐다.

잠시 뜨끈한 은한의 온기를 만끽하던 한결이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은한이 허우적허우적 무심코 한결을 찾았다. 그 사이에 자신의 베개를 끼워 주자 꼬옥 끌어안고 다시 깊은 잠이 든다.

귀여워라. 한결이 소리 없이 방정을 떨었다.

조금 흐트러진 베개를 바르게 놓아 줬다. 침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이불 역시 어깨까지 올려 주면 예쁜 잠자리가 완성됐다. 혹여 깰까, 중간중간 숨까지 멈추며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결이 은한의 이마에 쪽쪽, 입술을 내렸다. 그리고 아쉽게 침실을 벗어났다. 노곤히 수면에 취한 침실 공기와 달리 거실은 주말 햇살을 한가득 받아 눈이 부셨다.

“으아…….”

거실 한가운데에 선 한결이 뒤늦게 기지개를 켰다. 굳어 있던 마디마디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이가 드는 걸 실감하는 순간 중 하나다.

무의미하게 TV 채널을 돌리던 한결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원 버튼을 눌렀다. 뚝- 끊기는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묵직한 정적이 거실에 내려앉는다.

“…….”

조용한 집은 익숙하지 않다. 혼자 있던 적이 없어서 그랬다. 늘 은한과 함께이니까. 주말은 더 그랬다. 한결은 여전히 아침잠이 많았고, 은한은 굳이 한결의 주말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은한이 아침 겸 점심으로 간단히 요기를 때우고 있으면 한결이 맹한 낯으로 거실에 입성했다. 그럼 삐죽삐죽 모나게 뻗친 머리를 연하게 웃으며 쓸어 준다.

평소엔, 보통 날엔, 늘. 그러는 편인데 어째 오늘은 한결이 먼저 일어났다. 소파에 퍼질러 앉아 발을 까닥이던 한결이 부엌으로 향했다. 사랑하는 은한을 위해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해볼까, 싶어서. 물론 발휘할 실력은 없지만, 우리에겐 파워 블로거들이 있으니까.

부엌용 태블릿으로 톡톡 ‘주말 브런치 추천’ 말만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단어들을 입력한다. 검색을 누르자 와르르 쏟아지는 이미지들은 입에 넣기 미안할 정도로 예쁘게 생겼다.

은한이 단 걸 좋아하니 만들면 기뻐하지 않을까.

팬케이크로 메뉴를 정한 한결이 부지런히 찬장과 냉장고를 뒤졌다. 언젠가 사 놓은 팬케이크 가루가 여기쯤 있었던 것 같은데.

프라이팬을 꺼내고, 팬케이크 반죽을 하고, 데코레이션 용의 딸기와 블루베리도 씻었으며 메이플 시럽도 꺼내 놨다. 거기다 은한의 누나가 사 주신 핸드메이드 접시까지. 잘 완성만 하면 SNS에 좋아요 백 개쯤은 그냥 찍힐 거나한 한 상이 완성되리라. 한결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일단 손에 익은 스크램블을 하고, 베이컨과 소시지도 구웠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문제는 팬케이크였다. 팬케이크. 서양 영화에서는 매일 아침 후다닥 구워 먹는 그것.

기포가 올라오면 뒤집으세요. 블로그에는 참 쉽게 적혀 있는데. 그냥 뒤집으면 되는데. 한결의 팬케이크는 뭐가 문젠지 뒤집히질 않았다. 그러니까, 반죽이 너무 묽어서 뭉개졌다. 그래서 더 익히겠다고 기다리고 있으면 새까맣게 타 버렸다.

“으…….”

한결이 끙 앓으며 뒤집개를 휘둘렀다. 어느새 반죽은 동나고, 화려한 색의 ‘익힌 반죽’들이 수북이 쌓였다. 어쩌지. 그냥 짜파게티나 끓일까. 우울한 한결이 코를 훌쩍이고 있는데, 등 뒤로 익숙한 체온이 느껴졌다.

“웬일로 일찍 일어났어?”

“어…… 벌써 일어났어?”

“내가 물을 말인데.”

은한이 한결의 넓은 등에 볼을 문질렀다. 침대가 휑한 느낌에 일어났는데 한결이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한결이 부산스레 프라이팬을 긁었다. 엉망이 된 팬케이크가 부끄러웠다.

“그냥 눈이 떠졌어.”

“우리 자기도 나이 들었나? 아침잠이 없어지는 거 보면?”

“아니야. 오늘 처음이라고.”

한결의 입술이 퉁퉁하게 부풀어 올랐다. 은한이 킥킥거렸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주물주물, 나쁜 손버릇이 한결의 엉덩이를 탐한다. 발꿈치를 들고 그의 어깨너머로 프라이팬을 훔쳐봤다. 밀가루와 섞인 무언가가 요상하게 뒤틀려있다.

“김치전이야?”

한결이 흡, 헛숨을 삼켰다. 김……치전. 마음이 쓰라렸다. 그래도 제가 만든 거라고 김치전 취급을 받으니 조금 슬프다.

“……아니. 팬케이크.”

“…….”

은한이 끔뻑끔뻑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프라이팬 위의 괴생물체를 관찰했다. 팬케이크.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좀 다르다. 맛깔난 갈색빛은 어떻게 봐도 존재하질 않았다.

“자기야. 생긴 건 상관없어. 맛만 있으면 되지.”

생크림 올리고 슈가 파우더 뿌리면 괜찮아, 괜찮아. 포크를 가져온 은한이 수북이 쌓여 있는 팬케이크를 집었다. 그리고 겁 없이 한입 가득 삼켰다. 우물우물. 하얀 볼이 열심히 움직인다. 뒤집개를 꼭 움켜쥔 한결이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니, 기대했다.

“한결아.”

“어?”

“이거 김치전 맞는 것 같은데.”

“……어?”

“매워. 매운 팬케이크……. 창의적이긴 하다.”

“…….”

한결의 눈코입이 죄다 따로 논다. 우유로 입을 헹구던 은한이 그의 표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얼빠진 한결은 귀한 구경거리다.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다.

한결이 툭 힘없이 프라이팬을 내려놨다. 은한이 다정하게 그의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이왕 한 거 계속해 봐.”

“될까?”

“왜 안 돼. 백한결이 못하는 게 어디 있어.”

빙긋 미소 지은 은한이 식탁 의자에 앉았다. 한결이 흥, 거세게 콧김을 뿜었다. 그래. 못할 게 없지. 고작 밀가루 반죽 굽는 건데. 뭐가 어렵다고.

뭐가…… 어렵다고……. 어렵구나. 한결이 팬케이크와 씨름한 지 벌써 두 시간이 흘렀다. 은한은 소파에 늘어져 언뜻언뜻 보이는 한결의 뒷모습을 초점 없는 동공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뱃속에서 요란한 천둥이 몇 번이고 친 상태다.

은한이 잠시 고민했다.

허기가 우선인가. 한결의 도전이 우선인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식사해!”

오씨. 드디어. 은한이 후다닥 부엌에 들어섰다. 주방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애써 못 본 척하고, 식탁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오오!”

은한이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곱게 포개진 네 장의 팬케이크. 색깔도, 두께도. 팬케이크의 정석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한 치도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에 적당히 올라간 딸기와 블루베리. 사이사이에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생크림과 고운 눈 같은 슈가파우더까지. 정말 완벽한 팬케이크였다.

“한결아. 쩐다.”

은한은 엄지를 추켜들었다. 한결이 양 허리에 팔을 대고 씨익, 길게 입술을 쨌다.

“먹어봐.”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에 은한이 포크를 들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또 매울까 싶어 조금만 떼어 먹었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팬케이크는 걱정이 민망할 정도로 맛있었다. 폭신폭신한 케이크가 잇새로 뭉개질 때마다 이유 모를 짜릿함이 등줄기에 흘렀다.

은한의 입안으로 팬케이크가 뭉텅뭉텅 사라진다. 한결이 입을 가린 채 동동 발을 굴렀다.

“맛있어?”

“마이허!”

“많이 먹어. 내가 백 장도 만들어 줄 수 있어.”

“웅!”

은한이 칭찬의 의미로 한결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고 본격적으로 팬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식탁 위에 접시가 하나뿐이다. 은한이 한쪽 눈썹을 뾰족하게 올렸다.

“너 건?”

“나는…… 맛본다고 너무 먹어서 별로 안 땡겨.”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조금 고민하던 한결이 냉장고에서 어제 먹고 남은 김치찌개를 꺼냈다. 은한이 푸흐흐, 가느다랗게 웃었다. 하긴. 단 걸 좋아하지도 않는데 아침부터 설탕 냄새를 너무 많이 맡았다. 그를 위해 몇 가지 반찬과 밥을 퍼 주고 다시 팬케이크에 집중했다.

한 식탁에 김치찌개와 팬케이크가 동시에 올라간 주말 늦은 아침 식사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 * *

집에 콕 처박힌 주말에 내리는 비는 참 평화롭다. 두꺼운 유리창 밖에서 부슬부슬. 아무리 세차도 보금자리 안으로 침범하진 못하니까. 멍하니 눈을 뜨고 추락하는 빗방울을 세기만 하면 됐다.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 놨음에도 비 때문인지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은한이 한결의 품을 파고들었다. 한결이 능숙하게 은한의 허리를 보듬어 안았다.

일요일 밤. 두 사람은 흔한 액션 영화를 보며 와인을 마시는 중이었다. 과음하면 한 주의 시작인 내일이 괴롭고, 그렇다고 술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고. 그러다 보니 일요일 밤은 와인 마시는 날로 지정돼 버렸다.

“월요일이 영원히 안 왔으면 좋겠어.”

“나도. 출근하기 싫다.”

한결과 은한이 힝, 소리를 내며 얼싸안았다. 어째서 일주일에 주말은 이틀뿐인 거지. 사흘이 평일, 나흘이 주말이어야 인간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무의미한 생각을 해 봤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TV의 휘황찬란한 빛이 번쩍번쩍 난리다. 시선을 끌 만한 영상인데 어째 집중이 안 됐다.

안주로 꺼내 놓은 청포도를 하나 딴 은한이 한결의 입에 하나 넣어 주고, 자신도 하나 물었다. 툭, 터지는 포도가 싱그럽다.

꾸역꾸역 TV에 시선을 낭비하고 있던 은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저와 달리 영화에 집중한 한결이 있다. 그의 얼굴 위로 여러 색깔의 빛이 마구잡이로 산란한다.

진한 눈썹과, 굵은 선의 코. 예쁘게 뻗은 턱선, 가파르지 않게 올라간 속눈썹, 끝이 살짝 말려간 입술. 십 년을 넘게 본 것인데 볼 때마다 넋을 잃게 됐다.

은한이 쥐고 있던 와인 잔을 버렸다. 대신 그의 턱을 감싸 쥐었다. 한결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은한에게 돌아왔다. 갈색 눈동자에 어렴풋이 은한이 비쳤다.

쪽.

은한이 짧게 한결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그 후로도 쪽쪽. 폭우처럼 쏟아지는 입맞춤은 멈출 줄 몰랐다. 은한이 한결의 손에 들려있던 와인 잔을 빼앗고, 그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푸흐흐 웃은 한결이 얇은 허리를 쥐어 자신의 무릎에 올렸다. 은한이 옳다구나, 하며 깊숙이 입술을 맞물려온다.

사뿐한 뽀뽀였던 입맞춤이 진득한 키스가 됐다. 달짝지근한 청포도 맛 아래로 씁쓸한 와인 향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혀가 질척하게 섞인다. 난사하는 총소리 위로 넘어가고 넘어오는 타액의 끈적한 소리가 너울거렸다.

은한이 한결의 목덜미와 도톰한 귓불을 매만졌다. 한결의 손도 어느새 은한의 옷자락을 파고들어 등줄기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초옵,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은한은 그러고도 아쉬워 한결의 볼과 콧잔등에 뽀뽀를 해 댔다. 목선까지 내려온 은한에 한결이 목젖을 일렁이며 웃었다.

“왜 이래, 갑자기.”

“그러게. 갑자기.”

“응?”

은한이 한결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흐읍, 한가득 숨을 들이키면 한결의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저와 같은 바디워시 냄새. 그리고 한결 특유의 체취. 은한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진짜 갑자기 네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 싶을 때가 있어. 네가 눈 깜박이는 것도, 웃는 것도,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도, 그러다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것도.”

“…….”

“막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이가 간지럽고, 어깨가 뒤틀려.”

“은한아.”

“아직도 그래. 여전히 그래.”

“…….”

“네가 좋아. 너무 좋아, 한결아.”

얇은 홈웨어 너머로 은한의 말랑한 볼이 비벼진다. 한결이 자그마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가 은한의 귓바퀴에 속삭였다.

“이렇게 서정적이시면 곤란한데.”

“…….”

“설레서 어떻게 자라고. 응? 설마 날 이렇게 들쑤셔 놓고 열시 땡 하자마자 잘 거 아니지?”

“글쎄다.”

“어허.”

한결이 은한을 소파 위로 눕혔다. 야한 분위기를 감지한 은한이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봐줄 한결이 아니었다. 은한의 옷을 들춘 그가 그 안으로 쑥 얼굴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판판한 배를 촉촉촉. 입술로 난도질했다.

“아! 간지러워! 하지, 마! 아, 한결아!”

옆구리까지 핥는 혀에 은한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꺄르르, 어린아이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골반을 꽉 움켜쥔 손은 풀릴 줄을 몰랐다. 결국 한결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은한을 사랑해 줬다. 널따란 거실에 은한의 비명 같은 웃음이 나돌아 다녔다.

“능력도 좋지, 우리 자기. 이제는 섹스도 안 하고 애인 진을 다 빼놓네.”

소파에 축 늘어진 은한이 밋밋한 천장을 보며 푸념했다.

“예쁜 말만 골라서 하니까 그렇지.”

그를 끌어안고 있던 한결이 큭큭거렸다. 한결은 아직도 놀라웠다. 제 짝사랑이 첫사랑이 되고, 마지막 사랑까지 되어 가는 걸 오롯이 목도하고 있는 게 믿기질 않았다. 먼 훗날, 어떻게 죽더라도 사랑 하나는 원 없이 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은한을 바라보는 한결의 눈빛에 사랑이 넘쳐흘렀다.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 내던 은한의 눈이 매끈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자러 갈까?”

“벌써? 아홉 시밖에 안 됐는데.”

한결이 시계를 흘끔거리며 눈치 없이 답했다. 은한이 그의 귓불을 검지와 엄지로 꾹꾹 눌렀다.

“두 번 하게 해 줄게.”

“……어?”

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묻는다. 은한이 옆으로 팔을 괴고 한결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주름이 많이 없는 입술이 조금 전의 키스로 약간 부풀어 있다. 더 빨고 싶은데. 저녁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식욕이 인다. 아, 색욕인가.

“왜. 하기 싫어?”

은한이 서지 않았음에도 두툼한 한결의 페니스를 무릎으로 자극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린 것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살덩이가 사랑스럽다.

“……두 번이나? 내일 월요일인데?”

커다란 손은 이미 엉덩이를 뭉개고 있으면서 그리 묻는다.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은한이 픽, 조소했다.

“싫은가 보네. 그럼 말고.”

그리 말하며 몸을 빼는데, 답삭 허리가 잡혔다. 그리고 주르륵,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끌려간다. 은한이 애써 웃음을 삼켰다. 귀여워라. 우리 한결이는 언제까지 절륜하려나. 나이 마흔에도 이러면 곤란한데. 그런 복에 겨운 걱정을 잠시 해 봤다.

“아니. 아니. 너무 좋아. 가자. 빨리.”

한결이 번쩍 은한을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땅에 놀란 은한이 파닥파닥 사지를 휘젓는다.

“나 걸어갈 수 있어!”

“그 체력 아껴서 한 번 더 하자.”

“미쳤냐? 두 번이라고. 내가 분명 두 번이라 그랬다? 어?”

“…….”

“야! 대답해. 백한결!”

“…….”

“한결아. 자기야. 두 번이라고.”

“…….”

“씨바, 백한결!”

달칵. 침실 문이 닫히면서 은한의 비명 역시 뚝 끊겼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와인 잔만 덩그러니 남았다. 절정에 다다른 액션 영화가 쾅쾅, 펑! 온갖 소음을 내며 빈 공간을 채웠다.

뭐, 곧 침실이 더 시끄러워지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성장과 퇴화를 반복하며 산다. 나이가 들수록 퇴화가 줄지만, 성장도 줄었다. 그 모호한 정체기가 좋았다. 그저 그 순간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그 순간순간의 합으로 그들은 또 다른 미래를 감당해 내야 할 터였다. 그게 웃음일지, 눈물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괜찮다. 모든 게 뒤틀리고 변한다 한들, 마주하는 눈동자는 그대로일 테니까. 사랑을 속삭이는 입술도, 부딪치는 서로의 온기도. 다, 그대로일 테니까.

그래서 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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