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우리의 미래에게 (10/11)

10. 우리의 미래에게

[나 일어났어.]

[학교 가는 길이야. 개졸려.]

[오늘 두 시에 시험 치면 드디어 종강.]

[보고 싶어!]

은한은 부지런히 걸으면서도 핸드폰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동이 틀 때까지 전공책에 매달린 탓에 눈앞이 흐리고 머리가 핑핑 돌지만 아무렴 어떠냐. 겨울바람이 휘몰아침에도 은한의 세계는 온난한 봄이거늘.

[모닝엔젤: 어제 봤잖아.]

“이 새끼가…….”

잠시 멈춰선 은한이 아득 이를 갈았다. 질퍽하게 욕을 해 줄까, 하다가 아직 을의 처지라 굽히고 들어가기로 했다.

[보고 싶은 걸 어쩌라고 ㅜㅜㅠㅜㅜㅜㅠㅜㅜ]

[그러니까 오늘 나랑 놀아 ㅠㅠㅠㅠㅠ]

입을 삐죽인 은한이 답을 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은한의 머리칼이 담갈색으로 바뀌었다. 한결이 넌지시 옛날 머리가 더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바로 미용실에 가 염색을 새로이 했다.

뿐만이 아니다. 아침에 눈 떠서부터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쉬지 않고 메시지를 날렸고, 그가 밥을 먹든, 공부를 하든 옆에 철썩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와 다시 연애를 시작한 건 맞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히는 입술과 숱한 포옹으로 알았다. 아직 별은 따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런데도 불안했다. 예전 관계의 삼 분의 일 정도로 뜨뜻미지근한 한결 때문에.

한결은 조금 어색한 듯했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언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 모르니까. 본능적으로 상처받기가 싫어 적당히 거리를 두는 거다.

그게 섭섭하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노력해야지. 어찌 됐든 한결 없이 산다는 게 너무나 힘든 일임을 알았고, 헤어짐을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시험 끝나고 공대에서 딱 기다려. 형아가 데리러 갈게.]

또 하나의 메시지를 보낸 은한이 힘주어 발을 내디뎠다.

* * *

“피곤하지?”

오늘로써 은한의 삼학년이 끝났고, 한결의 이학년이 끝났다. 기나긴 겨울 방학의 시작이다. 은한은 이번 겨울 방학 동안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롯이 한결에게 할애하리라.

한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보다 네가 더 피곤한 것 같은데.”

“아닌데? 나 존나 쌩쌩해.”

은한이 과장스레 광대를 올리며 웃었다. 우스꽝스러운 은한의 표정에 한결이 큭큭거렸다. 그가 두 엄지로 은한의 눈 밑을 꾹 눌렀다.

“다크서클이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아씨.”

후다닥 그에게서 떨어진 은한이 눈 밑을 가렸다. 이놈의 다크서클은 조금만 잠을 못 자도 새카맣게 내려온다. 누나한테 화장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데이트는 할 수 있거든!”

“그래?”

“그래! 뭐 할래? 영화? 밥? 술? 아니면 놀이공원이라도 갈까?”

은한의 목소리가 통통 튀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한결이 그가 내민 선택지를 곱씹었다. 그러나 뭐 하나 썩 마음에 차는 게 없다.

“방울아.”

“엉.”

“너희 집 가서 낮잠이나 잘까.”

동그란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자그마한 머리통이 온갖 쓸데없는 걸 고민하는 게 훤히 보인다.

“그, 그럴까?”

은한이 어정쩡하게 미소 지었다. 집이 깨끗한가. 급하게 나오느라 치우지 않고 나온 듯한데. 빨래는 돌렸나? 설거지는? 이불이 침대 밑에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과거에는 한결이 집에 오든 말든 딱히 신경 쓴 적이 없다. 원체 어지르는 성격이 아니었기도 했고, 그의 시선을 중요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잘 보여야 한다고. 한결이 수십 번이나 드나든 집이지만 정체 모를 긴장감이 단전 아래부터 퍼져 나갔다.

“가자.”

“어, 어.”

은한이 열심히 한결의 보폭을 따라갔다. 조금 걱정은 되지만, 제 눈앞에 있는 넓은 등을 보고 있으니 다 괜찮아졌다. 이렇게 한결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못할 게 없었다. 그만큼 은한은 간절했다.

눈에 익은 골목길에 들어온 은한이 휘휘 주위를 훑었다.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골목길이 고요하다. 냅다 한결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

한결이 모호한 표정으로 은한을 내려다본다. 은한이 그와 시선을 맞추고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한결이 느리게 따라 웃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손을 맞잡아 준다. 옛날보다 조금 단단해진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집 앞에 도착한 은한의 손가락이 느리게 도어락 번호를 눌렀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누르는 건데 왜 이리 어색한지 모르겠다. 아마 등 뒤에 한결이 서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드, 들어가.”

문을 연 은한이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한결이 익숙하게, 하지만 묘하게 뒤틀린 몸짓으로 집안에 들어섰다.

“오랜만이네, 방울이 집.”

“어…… 그렇지?”

일 년 반 만이니까. 은한은 제집임에도 마치 타인의 집에 들어선 것처럼 조심히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놨다. 그동안 한결은 조금 변한 은한의 집을 살폈다.

은색이었던 노트북이 흰색으로 바뀌었고, 싱크대엔 못 보던 머그컵이 놓여 있고, 손바닥만 한 자유의 여신상 피규어가 침대 맡에 서 있다. 남색이던 이불도 연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리 넓지 않은 집을 금세 둘러본 한결이 털썩 소파에 앉았다. 그래도 이 소파는 여전해서 마음이 놓였다.

괜히 쭈뼛쭈뼛 방을 한 바퀴 돌던 은한도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후는 정적이었다. 농홍한 오후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온다. 이따금 골목길을 지나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으며, 또 종종 계단을 오르는 이웃의 발소리도 들렸다.

한결의 옆선을 훔쳐보던 은한이 벙긋벙긋 입술을 움직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혀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쉽게 나가질 않는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음성으로 만들어 냈다.

“양……치질 할래?”

“…….”

켜지지도 않은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한결이 은한을 바라봤다. 그의 예쁜 갈색 눈동자가 가늘게 경련한다. 은한이 다시 입을 뗐다.

“하자, 양치질.”

“……그래.”

한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은한의 얼굴이 화사하게 개었다. 와다다 뛰쳐 들어간 은한이 새 칫솔 하나를 꺼냈다. 기분이다! 생각하며 하나를 더 꺼냈다. 억센 포장지를 제거하고 있으니 거울 속으로 한결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거울 안에서 눈을 맞췄다. 한결은 언젠가 양칫물을 꿀떡 삼켜 버린 은한이 떠올라 웃었고, 은한은 그저 지금 상황이 좋아 웃었다.

양치질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분으로 끝났다. 수건으로 꼼꼼하게 입술을 닦은 은한이 먼저 소파에 가 기다렸다. 소파 말고 침대에 앉아 있을까, 음흉한 계획을 세웠다가 말았다. 아직은 좀 이른 듯해서.

욕실에서 나온 한결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다가온다.

“한결아.”

“어.”

“좋아해.”

은한이 한결의 손을 부여잡았다. 잠시 얽힌 두 손을 내려다보던 한결은 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은한은 그 얼굴을 차마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저 잘생긴 얼굴이 웃는 것인데. 이제껏 숱하게 봐 왔던 미소와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알아서.

한결의 볼을 부드럽게 쥔 은한이 촉, 짧게 입을 맞췄다. 그의 눈이 감긴다. 그것을 감상하던 은한이 이번엔 깊게 그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섞이는 혀는 평소와, 또 먼 과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상쾌한 치약 내음도, 은은한 온기도. 입술이 조금 더 질척하게 맞물렸다.

한결의 혀가 은한의 입속을 침범했다. 한껏 입을 벌린 은한이 그것을 받아 삼켰다. 찰나씩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입김이 뜨겁다. 콧구멍으로 뿜어내는 숨이 거칠었다.

은한이 더듬더듬 한결의 맨투맨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단단한 복근과 매끈한 살결이 손가락 끝에 묻어난다. 배꼽 아래가 찌릿했다.

그때, 한결이 은한의 손을 만류했다. 가느다란 손이 속절없이 내쫓겼다. 그와 동시에 입술이 떨어졌다.

은한의 눈이 살짝 어그러진다. 떠나간 한결의 온도가 얄미울 정도로 아쉬웠다. 진심으로 그와 섹스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니, 물론 하고 싶긴 하지만, 이렇게 조르는 이유가 성욕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다.

확인받고 싶은 거다. 우린 여전해.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서로 죽고 못 살아. 그런 거.

부서질 듯 얇게 미소 지은 한결이 은한의 허리춤을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멀지 않은 침대 위에 안착한다. ‘낮잠’이라는 명목으로 집에 들어왔으니 그걸 시행하려 하는가 보다.

은한이 익숙한 척, 한결의 품을 비집고 들었다. 한결 역시 익숙한 척, 그의 등을 쓰다듬는다. 넓은 가슴팍에 이마를 파묻은 은한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린다. 서럽고, 또 서럽다.

노력한다고 하는데, 한결은 도통 손에 잡히질 않았다. 온몸을 끌어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멀리 있다. 홀로 구렁텅이에 빠져 환상을 껴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한결아.”

은한이 나지막이 한결의 이름을 불렀다. 물기 어린 음성에 한결의 이름이 축축이 젖는다.

“응.”

은한 너머의 하얀 벽에 시선을 허비하던 한결이 답했다. 은한이 꾸역꾸역 그의 품을 조금 더 파고들었다.

“내가 더 잘 할게.”

“…….”

“……그러니까 마음 좀 열어 줘.”

제발. 나랑 사랑하자. 그러기로 했잖아. 나랑 다시, 연애하기로 했잖아.

백한결이라는 바다에서 끊임없이 추락한다. 얼마나 내려앉고 또 내려앉았는지 이제는 한 줄기 빛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숨이 막히고, 눈이 먼다. 하지만 한낱 물고기에 불과한 저라 감히 바다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나가면 죽으니까. 그저 감내하고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불안하고, 외롭고 우울하며 끔찍하다. 은한이 간절하게 한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한결아, 보고……싶어.”

“은한아?”

“흐으…… 이렇게 있는데도, 네가…… 보고 싶어……. 네가 날 보지 않는 것 같아. 얼굴 없는 너랑 대화하고, 입 맞추고, 매달리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잡고 사랑하는 기분이야.”

“…….”

서로의 상처가 많음을 안다. 무수히 패이고, 할퀴어지고. 그래도 열심히 연고를 발랐다고 생각했다. 새살이 나라고 다독여 주기까지 했는데. 결국엔 진한 흉터가 남았다. 더는 피도, 고름도 나오지 않는 상처임에도 이렇게나 아프고 쓰라리다.

은한의 얼굴이 삽시간에 눅눅해졌다. 속눈썹 가득 매달린 눈물이 뜨겁다.

“호, 혹시 나 벌주는 거야? 내가 그때 너 너무 아프게 해서, 그래서……”

“강은한.”

벌떡 일어난 한결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한은 쿵, 심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제가 싫어진 걸까. 귀찮은 걸까. 매일같이 보고 싶다고 해서? 헤프게 사랑한다 말해서?

그도 이러한 감정을 느꼈겠지. 이따금 제가 바쁜 티를 낼 때마다, 전화를 못 받을 때마다. 또다시 후회한다. 반성도 한다.

무거운 감정에 짓눌린 은한을 보고 있던 한결이 얇은 허리를 추슬러 안았다. 엊그제보다, 어제보다 말라 버린 몸뚱이가 맥없이 끌려온다. 은한은 차마 선뜻 손을 뻗어 그를 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안겨만 있었다.

한결의 엄지가 은한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 냈다. 손가락에 스며드는 눈물이 심장에 푹푹, 날카로이 내다 꽂힌다.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흐으…….”

“요즘 네가 하는 행동이 날 좋아해서, 그래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이러면 백한결이 상처받을 텐데. 이러면 싫어할 텐데. 이러면 오해할 텐데. 잘해 줘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

“그럼 나는 거리를 두게 돼. 그래야 네가 좀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은 안 그런데, 자꾸 겁이 나. 네가 과거의 나처럼…… 지칠까 봐.”

한결이 아프게 웃는다. 단연코 은한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다만 겁이 는 것이다. 경험했던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알기 때문에. 다시 그 상처를 감내할 자신이 없으니 피하게 됐다.

한결의 입술이 은한의 눈가와 관자놀이에 내려앉았다.

“불안하게 했다면, 미안해.”

“…….”

“좋아해, 은한아. 좋아하고 있어.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흐…… 으윽, 흐어엉…….”

고개를 잔뜩 오그린 은한이 서럽게 눈물을 쏟아 냈다. 스무 살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도 이리 어렵진 않았던 것 같은데. 두 번째 사랑은 왜 이리 아프고 어려운지 모르겠다.

한결이 들썩이는 은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경련하는 귓바퀴에 입술을 묻은 채 그를 달랬다. 지금 이 상황이 도래한 이유가 다 제 탓인 듯해 마음이 아팠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은 배려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예전처럼 해도 괜찮아. 잘하지 않아도 돼.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나는 그런 방울이가 좋아.”

흡 숨을 머금은 은한이 눈을 홉떴다. 커다란 눈망울이 깜박임 한번 없음에도 툭툭 눈물을 떨어트렸다. 은한이 벅벅 얼굴을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너도.”

“어?”

“너도. 예전처럼 나를 사랑해 줘.”

그래야 내가 살아. 숨을 쉴 수 있어. 어차피 눈은 멀어 버렸고, 벗어나겠다는 의지조차 박살났다. 그의 도랑에 고인 제가 썩든 말든,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

그저 백한결이면 됐다.

애처로운 은한을 응시하던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나 아직 좋아하지?”

“단 한 순간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어.”

은한이 와락 한결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의 목덜미에 코를 욱여넣고 사랑해 마지않는 체취를 한가득 들이켰다.

한결 역시 눈을 내리감은 채 은한을 마셨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하나 없는 방에 두 사람의 숨결만 너울거린다.

“우리 약속 몇 개만 하자.”

은한이 울음을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많이 해도 괜찮아. 한결이 소곤소곤 은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은한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서운한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 주기. 혼자 앓지 말고, 혼자 감당하지 말고. 우리 이제 두 번째 연애야. 아직 서투니까, 그 전에 미리 알려 줘야 해.”

“알았어.”

“비밀도 없어야 해. 배려하지 마. 하얀 거짓말 그거 다 개소리야. 그래야 네가 상처받는 일도, 내가 상처받는 일도 없어.”

“……그래.”

“우리 충분히 아팠잖아, 한결아.”

더는 아프지 말자.

은한이 힘껏 한결을 끌어안고 작은 방안 가득 사랑을 채워 넣었다.

“한결아, 좋아해.”

“……나도. 좋아해, 은한아.”

잠시 시선을 얽고 있던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입술을 부딪쳤다. 아까 했던 입맞춤보다 훨씬 뜨겁고 격정적이다. 생각할 것도, 거스를 것도 없어진 청춘의 사내들은 앞만 보기로 했다.

한결이 훌떡 맨투맨을 벗어던졌다. 은한도 열심히 옷가지를 털어냈다. 제법 싸늘한 공기가 살갗을 스쳤지만 괜찮다. 곧 서로의 온기가 이 세상을 온통 채울 테니까.

쪽, 은한의 입술을 벗어난 한결이 온몸에 키스를 뿌렸다. 매끈한 이마, 보드라운 볼, 통통한 입술, 도톰한 목젖, 불거진 쇄골, 판판한 가슴, 작은 배꼽, 얇은 허벅지. 은한이 연한 비음을 흘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오랜만의 관계는 일 초를 멀다 하고 뜨거워졌다. 은한이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기분 좋은 긴장감과 기대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막 다리를 벌리고 그를 조금 더 품어 보려 할 때였다. 한결이 뚝, 무릎에서 멈췄다.

“이거, 뭐야?”

“어? 뭐?”

은한이 팔꿈치로 기대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 뒤를 쥔 한결의 얼굴이 험상궂게 굳어 있었다.

동그란 무릎이 짙은 노을에 비친다. 언뜻 보기엔 아무것도 없으나 자세히 보면 누군가가 할퀸 듯 오돌토돌한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

그날. 한결의 전화가 마지막으로 걸려 왔던 날. 마지막 시험을 치르러 가다가 아스팔트에 쭉 갈리다시피 했던 무릎이었다. 인턴과 한결에게 내몰려 보기 싫은 흉터로 남아 버린 상처.

“언제 생긴 거야?”

“그게…….”

은한의 머리가 팽팽 열심히 돌아갔다. 뭐라고 하지? 넘어졌다고? 계단에서 굴렀다고? 어디 계단? 어쩌다가? 학교? 아니면 뉴욕? 술 먹고? 아니면 그냥 헛디뎌서?

열심히 움직이는 은한의 눈동자를 주시하던 한결이 쾅, 침대를 내리쳤다.

“강은한.”

“…….”

“거짓말 안 하기로 방금 약속했어.”

“…….”

“말해.”

한결이 낮게 으르댔다.

“은한아.”

“…….”

은한의 무릎에 경건히 입을 맞춘 한결이 답을 독촉했다. 은한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로 잘근잘근 입술만 깨물어 댔다.

솔직히 말해도 될까. 그럼 분명 상처받을 한결이다. 제가 주는 상처가 아니라, 죄책감에 상처를 입겠지. 그 꼴을 올곧게 목도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얀 거짓말.

연인의 관계에선 까만 거짓말보다 독이 되어 숨통을 조이는 것.

그러나 조금이라도 일찍 토해 내야 훗날의 여파가 크지 않음을 충분히 겪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

“…….”

은한이 우물쭈물 말을 먹었다. 뭘 어떻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결이 이불을 끌어다 드러난 은한의 어깨를 덮었다. 그리고 엄지로 부드럽게 흉터를 쓰다듬었다.

“그날, 있잖아. 네가 마지막으로 전화했던 날.”

“…….”

“내가 시험 치러 간다고, 나중에 통화하자고 했던 날.”

한 번 말머리를 틔우니 잇는 건 쉬웠다.

“나 그날 엄청 힘들었거든.”

온몸을 후끈하게 달구던 몸살과, 지끈거리는 머리, 끊임없이 들이키던 커피와 밤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어 희뿌예진 눈앞, 시험에 대한 긴장함, 한결에 대한 죄책감. 부유하는 공기조차 절 도와주지 않던 때.

“아, 물론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슬핏 웃은 은한이 한결의 이마에다 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한결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은한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내가 회사에서 사고 하나 쳤다고 했잖아. 그때 좀 무리해서 무릎이 안 좋아졌어. 바로 병원엘 갔어야 했는데, 시험 기간이라 시간이 안 됐고. 그래도 기말 과제는 잘 하고 있었는데 컴퓨터가 맛 가서 처음부터 새로 해야 했어.”

“…….”

“이틀 내내 쪽잠도 못 자고 학교 컴퓨터실에 앉아 있었어. 삼십 분쯤 있다가 나가면, 시험 치러 여유 있게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과제를 하고 있는데 미현이가 들어오더라고. 시험 시간이 잘못 공지됐대. 당장 달려가야 시험을 칠 수 있었어.”

“…….”

“뭐, 그렇게 달려가다 넘어졌지. 아스팔트에 무릎을 갈았고. 피 진짜 많이 나더라. 솔직히 엄청 무서웠다. 어디 잘못돼서 또 수술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근데…… 그래도 나 한쪽 발 질질 끌면서 시험 치러 갔다. 공부한 게 아까워서. 이제껏 해 놓은 게 아쉬워서.”

“그때…… 내가 전화를 했고?”

“……응.”

“…….”

“저 멀리 강의실이 보이는데, 너한테 전화가 왔어. 아직도 그날이 생생해. 매미가 울고, 푹푹 찌는 더위에 등줄기에선 땀이 흐르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무릎에서 흘러내린 피가 양말을 적시고.”

그날을 상기하니 뒷덜미에 우수수 소름이 돋아났다. 차마 말 따위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지옥보다 더 끔찍한 하루였다. 신이 날 미워한다는 생각은 처음 해 봤다.

은한이 어그러지고 있는 한결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순간에도 네가 보고 싶었는데.”

“…….”

“비록 말은 못 해 줬지만, 진짜로. 네가 보고 싶었어. 힘이 들 때마다, 기쁠 때마다. 내가 서툴러서 표현을 못 한 거지. 앞으로는 잘 할 거야.”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 한결아. 은한이 한결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놓았다. 입술이 짭조름하다. 어느새 흠뻑 젖어버린 그의 얼굴에 후회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

“울지 마, 한결아.”

은한이 한결을 추슬러 안았다. 귓가에서 흩어지는 한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기가 가 참, 힘들었다. 토닥토닥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속삭여 주는 것과 온기를 내어 주는 것뿐이었다.

한결은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은한의 목덜미가 축축이 젖을 정도였다.

“한결아,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은한이 세 음절을 반복해서 읊조렸다. 그건 한결에게 전하는 위로이기도 했고, 자신에게 하는 위로이기도 했다.

우리는 상처받고, 그것으로 무너지고, 먼지가 되어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야 결국 정착지가 서로임을 깨달았고 어렵사리 다시 붙었다.

그래도 그 기나긴 여행으로 얻은 건 있었다. 과거보다 훨씬 단단해진, 우리.

앞으로 더 단단해질……

우리의 미래, 그리고 미래의 우리.

* * *

인천 공항은 여행의 시작점으로 오면 좋지만, 그냥 오기엔 과하게 멀다. 은한은 기나긴 지하철 여행으로 벌써 사지의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그냥 돈 좀 더 주고 공항 리무진 타고 올걸. 이런 건 지하철 타고 가 줘야 맛이라는 태준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탔었다.

“힘들어?”

“어. 존나 지하철도 멀미라는 게 있구나.”

은한이 한결의 팔에 매달려 축 늘어졌다. 멀미로 모자라 빽빽한 인파에, 어찌나 넓은지 안에서 바람까지 부는 듯한 실내에. 한결이 골골대는 은한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커피 사 줄까?”

“저 새끼 보내고, 마시자.”

턱짓으로 신난 파비우를 가리킨 은한이 다시 늘어졌다. 뒤통수도 잘생긴 파비우가 태준과 진우에게 나불나불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파비우가 한국을 떠나는 날이다. 은한에게는 ‘드디어’고 피비우에게는 ‘세상의 종말’과 같은 날이었다.

한국 전체를 가져가려 하는 건지, 집채만 한 캐리어가 무려 다섯 개다, 다섯 개. 은한이 파비우 덕에 고생하는 진우와 태준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티켓팅을 하고, 짐도 부쳤다. 여권과 핸드폰만을 덜렁 든 파비우가 울상을 해보였다.

“비행기 타기 싫어, 하니…….”

“야, 씨바 퍼스트 타면 비행시간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 싶을 것 같구만.”

“와, 파비우 퍼스트 타?”

태준이 짝짝 손뼉을 치며 선망의 눈동자를 했다. 비즈니스도 감지덕지한 일반 서민에게 퍼스트라는 건 머나먼 좌석이었다.

“태준. 브라질 놀러 오면 내가 퍼스트 끄너 줄게!”

파비우가 탕탕, 호탕하게 태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갈까?”

“나도. 나도 지금 당장 떠날 수 있어.”

엉덩이로 태준을 밀어낸 진우가 빙긋, 사람 좋은 웃음을 만들었다.

공대남 셋은 파비우와 꽤나 친한 사이가 됐다. 아, 정정한다. 태준, 진우와만 친하고 한결은 그저 데면데면한 사이. 은한이 사실을 털어 줬음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게 퍽 귀여워 은한은 굳이 더 한결을 설득하지 않았다.

“네 명 다 같이 와. 우리 집 존나 넓어! 올 때 김치만 사 오면 문 열어 줄게. 근데 전라도 배추김치. 그거로 사 와야 해.”

미간을 한껏 좁힌 파비우가 경고하듯 말했다. 그게 뭐라고 태준과 진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우가 허허헝, 멍청하게 웃었다.

이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무리 퍼스트라도 비행시간을 늦출 순 없으므로.

“잘 가, 파비우.”

웬일로 은한이 먼저 팔을 벌렸다.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굽힌 파비우가 은한의 품에 안겼다. 파비우가 즐겨 쓰는 향수 냄새가 난다.

“응. 하니 잘 있어. 또 놀러 올 거야.”

“당연히 그러시겠지. 그…… 고마웠다. 뭔 말인지 알지?”

그가 아니었다면 한결과 다시 만난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다. 시간의 흐름에 모든 걸 맡기고 그를 잊었거나, 감당하지 못해 망가졌거나.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지. 어떻게든 한결을 잊어 보겠다고 떠난 뉴욕에서, 그와 다시 만날 자신감을 주는 사람을 만났다.

“흐음…… 알지!”

파비우가 멀뚱히 선 한결에게 윙크를 날렸다. 한결의 어깨가 흠칫 경련했다. 빙글빙글 능글맞게 웃은 파비우가 은한의 등줄기를 묘하게 쓸어내렸다. 한결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삭, 구겨졌다.

“나. 나 안아 줘, 이제.”

은한의 후드를 잡아 뒤로 빼낸 한결이 쩍 팔을 벌렸다.

“Oh, 내가 한겨리 안으면 하니가 질투할 텐데.”

파비우의 눈썹이 파도처럼 씰룩인다. 저럴 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서양인인데. 하는 행동은 전주 파 씨에 이름은 비우인 한국인이다. 은한이 팔짱을 낀 채 흥,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끝까지…….

“아이고, 아닙니다. 마음껏 안으세요.”

엉덩이만 아니면 돼. 내 거란 말이야. 혼잣말처럼 읊조린 은한의 말에 태준과 진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방울이가 진짜 딸 낳아 줄 생각인가 봐. 어, 그런가 보다. 미리 작명소 알아볼까? 두 사람이 소곤소곤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을 주고받았다.

한결을 꽉 힘주어 끌어안은 파비우는 진우와 태준에게도 격렬한 포옹을 선사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진우의 발이 대롱대롱 들릴 정도였다.

파비우가 라운지 입구 앞에 섰다. 퍼스트 클래스는 입국 심사를 따로 하지 않고, 직원이 직접 와서 봐 주고 간단다. 태준은 또 한번 경의 어린 눈빛으로 손뼉을 쳐댔다.

“하니, 한겨리. 나중에 결혼할 때 초대해! 내가 냉장고 사 줄게!”

“이왕 사줄 거 TV도 부탁한다. 65인치로. 그거 들어갈 정도로 큰 집 사 놓고 기다릴게.”

“그래!”

은한의 말에 한결이 남몰래 주먹을 꾹, 쥐었다. 얼마나 먼 훗날일지 모르지만, 어렴풋이나마 저와 동거할 생각인 듯한 은한이라. 김칫국이면 어떤가. 지금은 좋아 죽겠으니 다 괜찮았다.

65인치 들어갈 정도로 큰 집이면 돈 열심히 벌어야겠네. 방울이 집에 넣어 두고 도서관 가서 공부나 할까. 한결이 생각했다.

“잘 가, 파비우.”

“보고 싶으면 영상통화 해.”

“응. 너무 슬퍼하지 마. 나 금방 또 올 거야!”

태준과 진우의 배웅에 파비우가 껄껄 목젖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은한은 알았다. 파비우가 오 년 이내로 한국에 정착할 것이란 걸. 어쩌면 한결과 저보다 빨리 집을 마련할지도 몰랐다.

파비우는 그 후로도 수십 번쯤 더 팔을 흔들다가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은한이 곧 쓰러질 것처럼 몸을 늘어트렸다. 한결이 익숙하게 그를 추슬렀다.

“방울이 너무 오래 서 있었어. 빨리 어디 들어가자.”

“엉! 여기 맛집 존나 많대! 우리 여기서 저녁까지 먹자.”

뭐 먹지? 나 꿀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건 밥 먹고. 비빔밥부터 먹을까? 전주보다 여기가 더 맛있대. 진우와 태준이 시시덕거리며 맛집 블로그를 탐방했다. 한결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들을 방관하고 있었다.

“야, 백한결.”

한결에게 기대어 있던 은한이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너 나랑 살 거지?”

“……어?”

“나는 너랑 살 거야. 돈 많이 벌어서 냉장고에 너 좋아하는 거 다 채워 두고, 잠도 같이 자고, 양치도 같이 하고, 그렇게 살 거야. 내가 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게.”

“…….”

“우리 꼭 같이 살자. 둘 다 취직하고 나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데, 아무리 바빠도 집에 오면 네가 있잖아. 형아가 돈 진짜 열심히 벌게. 한결이는 몸만 와, 알았지?”

고개를 쳐든 은한이 눈을 맞추고 싱그럽게 웃는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와 살포시 벌어지는 입술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한결이 지금 있는 곳이 북적이는 공항이라는 것도 잊고 그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소박하게 미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나누는 감정은 소박하지 않았다. 이 넓은 공항을 꽉 채우고도 터져나갈 것처럼 크고, 거대하고, 벅찬 감정이다.

한결은 부끄럽게 눈물이라도 흘릴 뻔했다. 은한이 헤실헤실 웃으며 한결의 품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태준과 진우의 어깨 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비빔밥 먹으러 가자, 비빔밥! 낙지 비빔밥도 판다냐?”

“어, 판대. 소고기 비빔밥도 있고, 참치 비빔밥도 있어. 돌솥도 있다.”

“나는 돌솥! 돌솥 존맛이겠다.”

“아…… 돌솥 맛있겠네……. 낙지도 먹고 싶고 돌솥도 먹고 싶고……. 아씨. 두 개 시키면 오바냐?”

은한이 턱 아래를 긁적이며 고민한다. 세 사람이 분주하게 메뉴를 정했다. 꽤 오랜 시간을 할애해 각자 하나씩 메뉴를 골라잡더니 동시에 한결을 뒤돌아봤다.

“백한결 너는 뭐 먹을래?”

진우의 질문에 빙긋 미소 지은 한결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는 방울이가 먹고 싶은 거.”

“…….”

“…….”

우워억! 미친놈! 백한결을 척결하라! 진우와 태준의 욕설이 와르르 쏟아졌지만 한결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사그라질 줄 몰랐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쯤이면 적응 못 한 너희들이 비정상 아니냐.”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넌지시 비판 한마디를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후루룹, 국물을 떠먹던 태준이 휴지를 슥슥 뽑아 찔끔, 눈물을 닦아 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국물이 그립고 또 그립던 그 맛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선두로 진우와 한결, 그리고 은한까지 모두 휴지를 뽑았다.

“존나 맛있어…….”

“그때 그 맛이야…….”

캠퍼스에 봄이 왔다. 작년에 왔던 봄이 올해라고 오지 않을 리 없으니 당연한 거였다. 그러나 작년 봄에만 해도 있던 국밥집이 올해는 없을 줄 알았다.

강의가 끝난 금요일 저녁. 네 사람은 늘 그랬듯 술이나 한잔하려 학교 앞을 배회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꽃 사 들고 할머니를 뵈러 갈까, 싶어서 들렸는데. 어두컴컴하던 국밥집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뭐야, 공사하나? 헐, 벌써 새 가게 생기나 봐. 그런 걱정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는데, 어째 간판도,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테이블과 양념통도 변한 게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시커먼 남자 넷이서 가게 유리에 찰싹 들러붙어 안을 살피고 있으니 벌컥 문이 열렸다. 짤랑짤랑- 없었던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밥 먹을 거요?’

파마한 아주머니였다. 할머니가 입으시던 붉은색 앞치마를 입은. 네 사람은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오랜만에 들어서는 국밥집은 여전했다. 조금 낡은 메뉴판도, 오래된 TV도, 조금씩 다 다른 모양새를 가진 의자도. 네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당연하게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거늘 낯설게 느껴졌다.

‘저…… 저희 국밥 네 개랑 소주 주세요.’

‘예에.’

수줍게 주문했는데, 턱턱, 턱턱. 투박하게 놓이는 뚝배기는 조금 예의가 없었다. 그리운 누군가의 손길이 떠올랐다. 네 사람은 하얀 김이 폴폴 오르는 국밥을 앞에 두고도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여덟 개의 눈동자가 TV 앞에 앉은 낯선 아주머니에 박혀 있었다. 그래, 낯선 아주머니. 분명 낯설다. 근데 왜 묘한 친근함이 느껴지는 걸까.

진우가 느리게 국물을 떠먹었다. 꿀꺽, 뜨끈한 국물이 목젖을 탁 때리는 순간 번쩍 눈이 뜨였다. 요란하게 변하는 진우의 얼굴에 나머지 세 사람도 헐레벌떡 수저를 들었다.

그 맛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씩 먹던 할머니의 국밥 맛. 학교 앞의 다른 국밥집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칠맛. 네 사람은 대화 없이 밥 두 숟갈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며 뚝배기 하나를 뚝딱 비워 냈다.

한결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리고 경건하게 말했다.

‘저희 국밥 네 개 더 주세요.’

‘소주도 두 병 더 주세요!’

드라마에 고정되어 있던 아주머니의 시선이 네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숟가락을 쳐든 네 사람이 씨익, 가로로 길게 입술을 쨌다.

‘며칠 굶었어라? 만두라도 한 판 쪄 줄까?’

커다란 은색 쟁반을 가져온 그녀가 빈 뚝배기를 탁탁 겹치며 말했다. 은한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오늘은 배 터질 때까지 국밥만 먹을래요.’

‘……뭐, 그러쇼.’

아주머니는 금세 뚝배기 네 개를 새로 가져왔다. 분주한 그녀의 손길을 관찰하던 진우가 넌지시 입을 뗐다.

‘혹시…… 원래 이 국밥집 하시던 할머니랑…… 무슨 사이세요?’

‘…….’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뚝 멎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진우와 태준, 그리고 은한과 한결을 차례로 훑었다. 그러더니 꽤나 거대한 진실을 투박하게 뱉어 냈다.

‘딸내민디.’

‘아…….’

네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보니 약간 처진 눈매와 툭 불거진 콧방울이 닮은 듯도 했다. 공깃밥까지 마저 내려놓던 그녀가 은한의 옆에 놓인 수선화 한 다발을 주시했다.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가게 앞에 놓여 있던 것이다.

‘그람 그쪽들은 또라이 넷인갑네.’

‘예?’

‘우리 엄마가 종종 이야기하더이다. 젊은 새끼들 넷이 허구한 날 와서 술을 오-지게 처먹는다고.’

‘네. 그 젊은 또라이 새끼 넷이 저희가 맞을 것 같네요.’

태준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할머니가 다른 곳에서도 우리 이야기를 했구나. 하긴 조금 농담을 보태면 부모님보다 할머니를 더 자주 봤었다. 그녀도 못지않게 정이 들었으리라.

‘우리 엄마가 걱정을 허벌나게 했어. 남자 새끼들이 귀신 쓰인 거 맨키로 웃다가 또 어느 날은 처 울고, 싸우고. 아주 지랄 염병을…….’

‘……죄송합니다.’

‘그걸 왜 나한테 죄송해? 나 앞으로도 여기서 쭉 장사하니께 우리 엄마 있을 때 맨키로 와서 술이나 팔아 주고 가.’

만두는 걍 쪄 줄 테니께. 그녀가 시크하게 뒤를 돈다. 어쩜 뒷모습도 할머니 판박이다. 네 사람이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네!’

‘아 시끄러버!’

‘죄송합니다!’

눈을 마주한 네 사람이 허허헝 바보처럼 웃었다. 잠깐 잃었던 아지트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실로 별다르지 않았다.

일도 많고, 탈도 많고, 추억도 많았던 스무 살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국밥집이다. 아마 그들은 스물다섯, 스물여섯, 또 어쩌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돼서도 이곳에서 추억을 쌓을 터였다.

어느새 테이블 위엔 빈 소주병이 즐비하다. 게슴츠레 눈을 뜬 은한이 녹색 병을 하나하나 세어 보다 관뒀다. 다 셀 만하면 또 소주를 시키고, 또 시키고. 세는 게 의미가 없다.

은한이 두툼한 만두에다 푹, 젓가락을 거꾸로 꽂아 넣었다. 배도 부르고, 알딸딸하고, 그리웠던 할머니도 만난 기분이고. 다, 좋은데. 정말 다, 좋은데. 뭐 하나가 걸린다.

“방울아?”

만두를 난도질하는 은한을 가만히 주시하던 한결이 그를 불렀다. 은한의 얼굴이 번쩍 쳐들렸다. 마치 그가 부르길 기다린 것처럼.

“백한결.”

“어?”

“내가 말할까, 말까 존나 고민을 했었는데. 암만 생각해도 해야겠다.”

“어어. 해.”

은한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낸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하다. 한결이 물 대신 소주로 목을 축였다.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은한이 말할까 말까 고민까지 했을까. 한결이 빠르게 최근 제 행동들을 되짚었다.

은한이 탁탁,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태준과 진우를 불렀다.

“야! 너거도 좀 들어 봐레이.”

“뭔데, 뭔데.”

태준이 꽃받침까지 하며 은한에게 집중했다. 소주를 시키다 못해 냉장고에서 직접 꺼내 온 진우까지 은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은한이 꽉 휴지를 구겨 쥐었다.

“내 도서관에서 분홍색 포스트잇 받았던 거 기억하재? 왜 그 포도 맛이었나, 딸기 맛이었나. 아무튼 마이쮸에 붙어 있던 거.”

“어엉. 기억하지. 포도 맛이었어. 맛있더라.”

진우가 그때 마이쮸 먹고 꽂혀서 한동안 왕창 사 먹었다며 잠깐 샛길로 빠졌다. 은한이 그의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었다. 내 말에 집중하라고!

“그거! 분홍색 포스트잇! 나는 그 날 도서관에서 나옴서 버렸거든?”

“그랬냐?”

“당연하지! 나는 존나 백한결뿐이니까!”

빽 내지르는 은한의 말에 한결이 등신처럼 웃었다. 나뿐이래. 좋아 죽겠다, 아주. 스무 살까지 포함하면 만난 지 이 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저런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장이 넘실거렸다.

은한이 웃고 있는 한결에 맹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퍽. 단단한 팔뚝에 주먹을 꽂았다. 제법 매서운 주먹에 한결이 윽,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근데 이 새끼는 교양 들으러 갔다가 번호 따였는데 바아-로 번호 줬데이!”

한결이 팔뚝을 감싼 채로 굳었다. 태준이 쥐고 있던 숟가락을 짤그랑, 놓쳤다.

“헐! 백한결. 진짜 그랬냐, 너!”

“…….”

한결이 꾹, 입을 다물었다. 본래 죄인은 말이 없는 법이다. 은한이 동동 발을 굴렀다.

“맞다니까? 내가 봤다. 직접 보고 들었다 아이가.”

나는 벚꽃이 흩날리고, 이상형 같고. 그런 절절한 고백도 눈물을 머금고 거절했는데. 이 새끼는 번호 좀 주세요. 하는 소리에 냉큼 번호를 찍더라니까.

그날을 상기한 은한이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천체와 우주. 결국, 제 성적표에 첫 F를 남긴 희대의 교양. 그 교양 OT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터였다. 예상치 못한 재회, 예상치 못한 질투. 그리고…….

‘나 이 수업 뺄 거니까, 네가 들어.’

쌀쌀맞던 배려.

은한이 팡팡 자신의 가슴께를 두드렸다.

“내가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잠이.”

“…….”

“니. 그 여자랑 톡 했나, 안 했나?”

“…….”

“왐마! 답 없네! 했네, 했어. 이 새끼 했다.”

눈을 잔뜩 커다랗게 뜬 은한이 진우와 태준에게 동의를 구했다. 진우가 숟가락 뒤로 탁! 뚝배기를 내리쳤다.

“백한결 양아치네!”

“그치. 양아치지. 이런 놈이 뭐가 좋다고 나는 맨날 질질 짜고, 술 마시고, 뉴욕까지 도망도 갔다 왔네. 아이고.”

은한이 울음을 연기했다. 한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의 검지가 애꿎은 테이블 모서리를 괴롭힌다.

“그…… 연락 별로 안 했어. 그것도 되게 나쁜 짓 한 건데. 네가 보고 있는 거 알아서…… 그래서 유치한 짓 좀 한 거야.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진짜 양아치네!”

“맞아. 양아치네!”

진우와 태준이 신랄하게 한결을 비난했다. 한결의 넙데데한 어깨가 불에 익는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다. 은한이 입술을 삐죽였다. 분명 일 분 전까지만 해도 엄청 미웠던 것 같은데. 저 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쓰라리다.

은한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아 기죽는다.”

“…….”

“…….”

태준과 진우의 표정이 삽시간에 썩어갔다. 얄미운 한결은 그새 또 좋다고 웃고 있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원래 연애하면 저렇게 되는 건가. ‘귀신 쓰인 거 맨키로 웃다가 또 어느 날은 처 울고, 싸우고. 아주 지랄 염병’을 하는 게 저런 거구나.

태준과 진우는 넓은 아량으로 투한스를 이해하기로 했다. 어쨌든,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보는 건 썩 즐거운 일이니 말이다.

은한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이제 가자. 내 잠 온데이.”

“아 왜! 더 마시다 가자!”

“너거 둘이 더 마시던가.”

“백한결 멀쩡한데? 저 새끼 술 안 취하잖아. 데리고 가게?”

태준의 생떼에 은한이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으쓱였다.

“그럼? 나 백한결 없으면 못 자. 가지고 가서 베개로 써야 돼.”

그 말에 한결이 희한하게 어깨를 뒤튼다. 수줍어하는 새색시 같았다. 진우는 자신의 눈 밑으로 사라지지 않을 다크서클이 내려오는 걸 느꼈다. 그가 꾹꾹 눈두덩을 짓눌렀다.

“……그래. 다 이해해 줄 테니까 딸만 만들어 와라. 넉넉히 물고 빨게 한 넷쯤.”

“엉. 노력할게.”

은한이 대충 대답했다. 그놈의 딸 타령. 어찌나 끈질기게 하시는지 조만간 진짜 배가 불러올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킁, 코를 훌쩍인 은한이 계산서를 집었다. 그리고 멋지게 카드를 꺼냈다.

“오늘은 방울이가 사 줄게. 방울이가 제일 슨-배님이니까.”

“예스! 감사합니다, 슨배님.”

벌떡 일어난 태준이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혔다. 은한이 그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렸다.

“오냐.”

능글맞은 은한의 말에 진우와 태준, 또 한결이 박장대소했다. 아주 오랜만에, 국밥집에서 네 사람이 함께한 즐거운 술자리였다.

“한겨랑.”

“응.”

“우리 담배 피우까?”

은한의 집이 멀지 않았을 때였다. 조금 색이 바랜 벽화를 지나고, 익숙한 골목길을 가로질러 이제 막 정을 붙이기 시작한 주홍 가로등 아래에 다다랐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은한이 담배를 피우자, 제안했다.

한결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잘 피우지 않아 몇 주 내내 가지고만 다녔더니 가장자리가 죄다 어그러졌다. 딱 두 개비가 남아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한결이 익숙하게 은한의 입에 담배 하나를 물렸다. 자신도 하나 꼬나물고 더듬더듬 라이터를 찾았다.

칙- 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막 은한의 담배에 불을 가져가려 할 때였다.

한결의 양 귓바퀴를 잡고 쑥 끌어 내린 은한이 그의 담배 끝에다 자신의 담배 끝을 맞대었다. 그리고 흐읍,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훔쳐간 담뱃불이 은한의 것에도 발갛게 익었다.

내리깔린 은한의 속눈썹에 속속히 가로등 빛이 걸린다. 그 아래로는 얇은 속눈썹 그림자가 지고, 매끈한 광대는 술기운에 평소보다 조금 붉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와 장난기가 어린 웃음소리가 함께 흘러나온다.

잠시 넋을 잃었던 한결이 비죽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일부러 그랬지.”

“엉. 니 꼬실라고.”

“…….”

무슨 욕심이 이리 과한지 모르겠다. 이미 꼬실 대로 꼬셔져서 제 인생이라곤 하나도 없는 삶이거늘. 더 꼬시려 하는 이유가 뭘까. 개처럼 바닥을 기기라도 하라는 건가. 뭐, 그가 원한다면 그래 줄 의향도 차고 넘쳤다.

은한이 이미 목적을 다 한 담배를 전봇대에 비벼 껐다. 얇은 불씨가 봄바람에 흩날렸다.

“한결아.”

“응.”

“좋아한데이.”

“……알아.”

“알면 됐다.”

근데 알아도 계속 말해 줄 거데이. 맨날맨날. 하루도 안 빼놓고, 말해 줄 거다.

은한이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한결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왜냐하면, 내가 니를 맨날맨날 좋아하니까.”

“…….”

자정을 넘은 시간은 이래서 좋다. 온 세상이 고요하고, 아무도 없고, 밖에서 한결과 이렇게 몸을 붙이고 있어도 그 누구도 이상한 눈초리로 대하지 않는다. 세상에 오롯이 둘만 존재하는 기분.

한결이 두 팔로 한가득 그를 마주 안았다.

가끔은, 은한이 너무 사랑스러워 꿈꾸고 있는 듯할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머리 위를 지배한 달이, 우리를 내리쬐는 가로등이. 전부 제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무섭고 두렵다. 어느 날 번쩍 눈을 뜨면 은한이 제 옆에 없을까 봐. 세상에 없을까 봐.

한결이 조금 더 단단히 은한을 끌어안았다. 혹시, 혹시나 정말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열심히 말해 줘야지. 고백해야지. 아낌없이 사랑을 줘야지. 늘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나는 매 순간순간 널 좋아해.”

“…….”

그 말에 은한이 빼꼼 고개를 든다.

“……하여튼 공대 주제에 말은 존나 잘해요.”

나는 삼지창도 모르고 세모도 모르는데. 니는 어떻게 다 알지? 은한이 웅얼웅얼 샛길로 빠졌다. 피식 웃은 한결이 은한의 두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쪽. 입술이 가볍게 맞물렸다 떨어진다.

“은한아.”

“어엉…….”

“우리 들어가서 양치질할까. 양치질하고, 샤워도 같이 하자.”

“…….”

음란한 의도가 잔뜩 담긴 한결의 말에 은한이 꿈뻑꿈뻑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술에 젖어 무겁다. 한참 희뿌연 시선을 갈무리하던 그가 샐쭉 웃음을 만들었다.

“코올.”

통통한 입술을 과장스레 모으는 그에, 한결은 웃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웃음이 헤퍼진다. 이제는 그가 저와 같은 지구에 존재한다는 사실로도 얼굴 가득 웃음이 만개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물론,

그래서 행복했다.

* * *

“우리 방울이, 오늘은 양칫물 먹으면 안 돼.”

“안 돼-에?”

“응. 안 돼. 먹으면 뽀뽀 안 해 줄 거야.”

“아라쓰! 고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지! 뽀뽀해야지!”

소파에 앉은 은한의 다리가 팔랑팔랑 바쁘게 움직인다. 그가 한결의 훈계에 열심히 고개를 주억였다. 집에 들어온 은한은 익숙한 공간에 모든 이성을 놓아 버렸다.

그에게 찬물을 들려준 한결이 후다닥 욕실로 가 치약을 얹은 칫솔 두 개를 가져왔다. 손에 쥐여 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저 꼬옥 쥐고만 있다.

“할머니 국밥 진짜 맛있었어, 그치이.”

형광등 어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우물우물. 한결이 응, 맛있었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해 주며 칫솔을 다시 가져갔다. 안 되겠다. 차라리 먼저 샤워를 시키면 술이 좀 깨리라.

“방울아. 우리 샤워 먼저 할까?”

“샤워?”

“응. 씻고 나서 양치하자.”

“……싫은데.”

은한의 입술이 퉁퉁하게 부풀었다. 그가 삐뚜름하게 시선을 내려 한결을 흘겨봤다. 그리고 내뱉는 말이,

“나는 양치하고 뽀뽀 먼저 하고 싶은데.”

“……하아.”

사람 속을 죄다 뒤집는다. 누구는 아니겠냐고. 근데 뽀뽀 말고도 할 게 산더미란 말이다. 미간을 좁힌 한결이 푸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옅은 알코올 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그게 은한에게서 나는 건지, 제게서 나는 건지 분간이 어려웠다.

조금 굳은 한결의 얼굴에 은한이 훅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한결의 코끝에 자신의 코끝을 맞대었다.

“화났어? 할게. 방울이 한다, 샤워. 지금 하러 간다.”

그리 말하고는 비척비척 욕실로 걸어간다. 불안한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한결이 뒷목을 긁었다. 화난 거 아닌데. 누가 보면 하루가 멀다고 화내는 사람인 줄 알겠다.

이렇게 가끔, 은한은 뜬금없는 곳에서 한결의 눈치를 보곤 했다. 한결은 그게 말도 못 하게 아프고 쓰렸다. 은한에게 차마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생겼음을 느껴서.

벅벅 마른세수한 한결이 훌떡 윗도리를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방울아, 옷은 벗고 샤워해야지.”

“아, 은한아…….”

한껏 벌어진 은한의 턱이 버겁게 움직인다. 입안에 가득 찬 살덩이 때문이었다. 입술을 꼬옥 다물고 있음에도 턱끝으로 타액이 매달렸다.

귀두를 핥고 빨아 당기고, 그러다 두툼한 기둥을 중간까지 꾸역꾸역 목구멍에다 집어넣는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힘겨움을 나타내는데도 중간에 그만둘 줄을 몰랐다.

“으윽, 하아…….”

한결은 진한 쾌감에 눈살을 구기면서도 은한을 뚫어지라 주시했다. 그가 한쪽 볼로 페니스를 물면 놓치지 않고 볼을 쓰다듬었다. 얇고 보드라운 피부 안에 들어있는 제 페니스가 믿기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현실감이 없다 해야 하나.

“병태.”

은한이 눈을 홉뜨고 한결을 노려본다. 그러면서도 오물오물 페니스를 빠는 건 여전했다.

“새삼 이제 안 것처럼 왜, 후우…… 그래.”

능글맞게 받아친 한결이 얇은 귓바퀴와 통통한 귓불을 쓸어내렸다. 따뜻하고 촉촉한 입안에 더 있고 싶은 마음과, 한시라도 빨리 그의 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충돌한다.

자꾸만 목젖을 찌르는 귀두를 참지 못한 은한이 페니스를 토해 냈다. 휑, 하고 차가운 공기가 페니스에 들러붙는다. 한결이 아쉬운 마음에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런 그를 알기라도 하는 듯, 은한이 귀두만 쫍쫍 열심히 빨아 댔다.

“아…… 후, 으…….”

새빨간 혀가 나왔다, 들어왔다를 반복한다. 어찌나 힘주어 빨아 당기는지 귀두가 똑 하고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손으로는 고환을 부드럽게 매만지는데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은한아, 나와, 나와.”

쑥쑥 휴지를 뽑은 한결이 은한을 만류했다. 정액을 입에 담는 걸 싫어하는 그라. 그의 입 안에 싸면 또 양치질을 해야 한다. 급해 죽겠는데 그럴 여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은한이 잠자코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기둥을 쑥쑥 아래위로 쓸어 주며 사정을 도왔다. 곧 한결의 페니스 끝이 끈적한 탁액을 흩뿌렸다. 한결이 능숙하게 휴지로 닦아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리 와.”

침대 아래에 있는 은한의 허리를 잡아채자 쑥, 쉽게도 끌려 올라온다. 그렇게 먹이는데, 왜 살이 안 찌는 건지 미스테리하다.

협탁에서 젤과 콘돔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꺼냈다. 콘돔이 언뜻 봐도 대여섯 개가 한번에 잡혀 나왔다. 한결은 하얗게 질리는 은한의 안색을 봤지만 못 본 척했다.

은한이 꾸물꾸물 몸을 뒤집으며 말했다.

“세 번이야, 세 번.”

“어?”

“최대 세 번이라고.”

“…….”

젤 뚜껑을 열던 한결이 버석하니 돌덩이처럼 굳었다. 팩, 돌아누운 은한의 뒤통수에 번복하겠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 번……. 읊조리고 되뇔수록 너무한 숫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은한이 힘들다는데. 저에겐 선택권도, 반박할 권리도 없었다.

“……방금 펠라로 싼 것도 포함해서?”

한결이 뭉근히 은한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물었다. 은한의 고개가 휙, 날카롭게 돌아온다. 침대에 멀뚱히 앉아있는 커다란 덩치가 우울에 구겨져 있다. 하여튼, 섹스라면 정도를 모르는 한결이다.

“……그건 빼 줄게.”

그 모습이 퍽 귀엽기도 하고. 그 말에 한결의 얼굴이 활짝 갰다. 좋다고 멍청하게 웃은 한결이 손바닥 가득 젤을 짰다. 손바닥을 비비며 차가운 젤을 뜨겁게 달궜다. 절 기다리는 동그란 볼기짝 두 개에 어금니 사이로 침이 고였다.

“으응…….”

곧 한결의 손가락이 능숙하게 다물린 주름을 문질러 왔다. 은한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순간이 제일 심한 이물감을 제공한다. 차라리 한결이 들어오고 나면 홀라당 정신이 나가 버려 괜찮지. 저도 만지지 않는 곳을 한결이 만진다는 게, 참…… 부끄럽다.

한결의 손가락 하나가 쑤욱, 쉽게 은한의 뒤로 들어왔다. 엊그제도 방탕하게 뒹군 듯한데, 꽉 다물려 있는 구멍이 신기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방울아, 아파?”

“흐…… 아니이…….”

고개를 끄덕인 한결이 손가락 하나를 더 집어넣으려 했다. 허나 아물린 엉덩이 사이가 잘 보이질 않는다. 은한이 엎드리면 좋은데, 그럼 무릎에 무리가 간다. 한결의 눈이 게슴츠레 얇아졌다. 잠시 고민하던 한결이 그를 번쩍 들어 제 무릎 위에 눕혔다. 예쁜 엉덩이가 한층 볼록, 솟았다.

“야!”

화들짝 놀란 은한이 빽 소리를 질렀다. 엄마한테 엉덩이 맞는 다섯 살배기도 아니고. 이 수치스러운 자세는 뭐란 말인가.

한결이 무심하게 답했다.

“잘 안 보여.”

“거길 왜 보는, 흣!”

한 손으로 엉덩이를 벌리고 손가락 두 개를 욱여넣었다. 끈적한 젤이 손가락을 부드럽게 안으로 안내한다. 확 두꺼워진 침입자에 은한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단단한 허벅지를 마구 쥐어뜯었으나 한결은 아무런 통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구멍을 넓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 흐응, 응…….”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내벽을 마구 헤집는다. 전립선을 꾹꾹 누르고, 구멍을 벌리고,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저릿한 쾌감에 몸이 뒤틀렸다. 배꼽 아래로 찌부러지는 한결의 페니스가 느껴졌다. 조금 전에 싸 놓고 벌써 이렇게나 단단하다.

“너, 엉덩이 진짜 예뻐.”

한결이 찰싹, 엉덩이를 내리쳤다. 타격감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엉덩이가 목구멍을 바짝바짝 바르게 했다.

“읏, 엉덩이를 왜 때려 변태냐!”

“응. 변태라니까. 그런 의미로 한 대만 더 때려 보자. 아니, 두 대.”

한결이 찰싹, 찰싹. 연달아 볼기를 내리쳤다. 은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픈 건 아닌데, 감당할 수 없는 수치라서.

“하, 하지 마!”

진짜 혼나는 거 같잖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은한이 이를 세워 앙, 한결의 무릎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한결은 여전히 구멍과 엉덩이에 온 정신을 바친 상태였다. 한결의 무릎에 가지런한 잇자국이 깊게 새겨졌다. 은한이 허탈하게 입을 벌렸다. 시발 뭐야 이거. 살갗이 아니라 가죽이야?

“그냥, 넣어. 좀!”

구멍은 한결의 손가락을 세 개나 삼킬 정도로 넓어졌다. 그런데도 볼기 위로 떨어지는 진득한 시선은 떠날 줄을 몰랐다.

참다못한 은한이 동동 다리를 휘저었다. 한결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조금 불그스름해진 엉덩이에 쪽 입술을 내리고 그를 놓아줬다. 은한이 열심히 사지를 움직여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왜 인제 와서 부끄러워해.”

“……내 마음이거든, 개새야.”

“흐음.”

한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거로 대화를 끝냈다. 더 이어간다 한들 어차피 결론 없이 끝나리라는 걸 잘 알았다.

한결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은한이 다리를 쩍 벌려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결이 훅 그의 품으로 끌려갔다. 얇은 손가락이 한결의 턱선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뽀뽀.”

“……응.”

은한의 턱을 가볍게 그러쥔 한결이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살풋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시원한 치약 맛 아래로 미미한 알코올 냄새가 맴돈다.

한결이 느릿하게 은한의 뒷구멍에 자신의 것을 맞췄다. 오래 시간을 들여 풀어 줬음에도 귀두만 닿으면 확 오므라드는 구멍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한결은 구멍의 신랄한 거부에도 꾸욱, 귀두를 쑤셨다. 은한이 한결의 팔뚝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성기가 은한의 속으로 사라지면 질수록, 은한은 키스에 집중하지 못하고 밭은 숨을 내뱉었다. 한결이 그의 원활한 호흡을 위해 목젖으로 입을 옮겨 갔다.

“아…… 진짜 존나…… 흐으, 커. 커도 응, 너무…… 커.”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 번 섞은 몸인데. 어째 받아들일 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크기다. 점차 구겨지는 은한의 미간을 관음하던 한결이 쪽쪽, 잘게 키스했다.

한결의 음모가 사타구니에 짓눌릴 정도가 됐을 때야 길었던 삽입이 끝났다. 은한이 후우우, 길게 숨을 내뿜었다. 한결은 은한이 세 번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잠자코 보고 있었다.

“……움직여도 돼?”

도톰한 귓불을 빨아 당겼다가 혀를 내어 핥았다를 반복하며 고된 시간을 참아 냈다. 몇 번 더 숨을 몰아쉬던 은한이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의 두툼한 페니스가 천천히 물러간다. 온 내벽을 다 이끌고 가는 느낌이다. 은한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한결이 그러지 말라고 톡톡 인중을 두드렸다.

“그……냥 빨리, 해.”

쾌락이 몰려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고통임을 안다. 은한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한결을 졸랐다. 한결은 굳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쑥, 길게 빠진 페니스가 콱! 은한의 예민한 부분을 거칠게 문질렀다. 괴로울 정도로 짓이겨지는 전립선에 은한이 어깨를 잔뜩 오그렸다. 찔끔, 비집고 나오는 눈물은 덤이다.

“후우, 아파?”

“아니, 흣, 아니.”

은한이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내벽을 느낀 한결이 은한과 철썩 붙어 있던 상체를 조금 떼어 냈다. 허벅지에 단단히 힘을 주고, 얇은 종아리를 팔에 걸쳤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준비였다.

은한이 저도 모르게 베개를 쥐어뜯었다. 몰려올 쾌락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단전을 간지럽게 했다.

“아응, 하…… 앗! 응!”

“아, 은한아…….”

척척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볼기와 사타구니가 따갑다. 한결이 할퀴고, 헤집고, 쑤시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홧홧하게 불이 붙었다. 찌릿하고 저릿한 쾌감이 해일처럼 은한을 덮쳤다. 이미 한계까지 들어와 있는 한결인데, 조금 더 품고 싶었다.

“아…… 좋, 아! 흐으.”

“하아, 하아…….”

한결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침대가 끼익, 끽 사납게 비명을 질렀다. 콱콱 전립선을 함부로 뭉갤 때마다 뇌가 뭉텅뭉텅 녹아내렸다. 그리고 조금 더 세게 박히는 순간, 건드리지도 않은 앞이 울컥 하얀 액체를 토해 냈다.

쾌감이 절정의 정점에 다다랐다. 은한의 마른 몸뚱이가 움찔움찔 잘게 경련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멈출 한결이 아니다. 자비 없이 쾅쾅 내려찍는 허리짓에 은한의 목이 마구 뒤틀렸다. 더 이상의 오르가슴은 괴롭다.

“잠……깐, 흐응! 아, 잠, 깐…….”

“후우, 읏.”

“그, 그만…… 한결아, 흑, 그만, 아! 흐읍, 응…….”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은한이 필사적으로 한결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러자 낮게 으르댄 한결이 무릎으로 두 다리를 꽉 누르고, 두 손을 한꺼번에 모아 쥐어 결박한다.

종종 이럴 때가 있다. 한결은 자신의 온몸을 감옥으로 만들어 은한을 그 안에 가두려 했다.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제 소유라는 듯.

씨발, 씨발, 씨발. 이 새끼는 왜 섹스만 하면 그 다정한 버릇을 다 개 주는 거냐고. 은한이 입을 잔뜩 벌리고 울부짖었다. 그래 봐야 나오는 건 질퍽한 신음뿐이었다.

쑤셔 박히는 전립선으로 모자라 손끝까지 저릿저릿할 때쯤, 쿠욱 깊숙이 페니스를 박아 넣은 한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틈이 은한이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순간이다.

“하아…… 하아…….”

“후…….”

쑥 페니스를 빼낸 한결이 묵직해진 콘돔을 벗겨 끄트머리를 묶었다. 그리곤 당연하게 침대 옆에 꺼내 둔 콘돔 중 하나를 쥐어 이로 물어뜯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은한이 축, 사지를 늘어트렸다.

다시 두툼한 살덩이가 안으로 들어오고,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결이 은한의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

“깨물, 지…… 으응, 앗 마아……. 밴드, 다 썼, 아흑, 응!”

은한은 한결의 쇄골이나 가슴팍, 팔뚝이나 허벅지를 깨무는 편이다. 제 몸에 환장한 한결을 조금이나마 사그라트리기 위해, 그러니까 제가 살기 위해 깨물었다. 반면에 한결은 목덜미나 뒷목, 혹은 종아리나 발목을 깨문다. 여름만 되면 온몸이 집채만 한 모기에 물린 것처럼 난도질 됐다.

“사 줄게. 후우…….”

내가 밴드 사 달라고 하는 소리냐고! 안 그러겠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 하지! 으득 이를 간 은한이 복수하겠다는 듯 한결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한결의 두 번째 사정은 첫 번째 사정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 그에게 모든 정기와 체력을 빨아 먹힌 은한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은한의 매끈한 이마에 쪽 키스한 한결이 판판한 가슴살을 모아다 한 움큼 머금는다. 아직도 육욕과 색욕이 그득한 눈동자다.

“아직, 한 번 남았어.”

“이…… 씨바…….”

두 번이라고 할걸. 무슨 생각으로 세 번이라 쳐 씨불였니, 과거의 나야. 은한이 참담하게 눈을 내리감으며 과거의 언사를 후회했다. 물론,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쓸데없이 박력 있게 콘돔 포장을 벗기는 한결을 응시하며, 흐리게 웃었다.

그래, 떡 치다 죽어 보자.

* * *

은한의 집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다른 공간보다 조금 더 밝다. 하얗고 얇은 커튼이 가감 없이 아침 햇볕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눈살을 구긴 한결이 더듬더듬 침대를 휘저었다. 이쯤 휘저었으면 말랑하고 따뜻한 살결이 잡혀 와야 하는데, 어째 사그락거리는 이불자락뿐이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번쩍 눈이 뜨였다. 가장 먼저 쨍-한 빛이 시야를 정복한다. 언젠가 커튼을 좀 어두운 거로 바꾸자 했더니 싫단다. 아니면 수업이고 알람이고 모든 걸 내팽개치고 잘 거라고. 집이 밝아야 억지로라도 일어난다 말했던 은한이다.

두어 번 눈꺼풀을 깜박이니 하얀 천장이 보이고 또 두어 번 눈을 깜박,

“일어났어?”

미처 은한을 찾아내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먼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한결의 시선이 음성을 따라갔다.

침대 아래에 햇살을 담뿍 머금은 은한이 절 보고 있었다. 불씨 없는 담배를 꼬나문 채로.

“……없어서 놀랐잖아.”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한결의 목소리가 신기할 정도로 낮다. 은한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그가 조금 더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한결아.”

“응.”

“우리 헤어졌을 때 말이야.”

“…….”

“내가 담배 끊었다고 했던 거 기억나?”

“어.”

“왜 끊었게?”

“……글쎄.”

한결은 과거 일 년의 공백을 떠올리는 걸 싫어했다. 찰나라도 되뇌는 순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외롭고, 슬퍼졌으니까. 그러나 은한은 종종 그때를 상기하곤 했다. 잊어서는 안 되는 어떠한 역사를 기억하려는 것처럼.

잘근잘근 필터를 씹던 은한이 담배를 뱉었다.

“네가 생각나서. 담배를 피우면, 네 생각이 났어. 하얀 연기 사이로 마법처럼 나타난 백한결이 나를 괴롭혔지.”

왜 너를 혼자 뒀냐고 화내기도 하고, 아니면 울고 있는 나를 비웃기도 하고. 또 가끔은 시답잖은 장난을 걸기도 하고.

은한의 입술이 느리게 붙었다 떨어짐을 반복했다. 한결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은한이 그러한 말을 꺼내는 이유를 몰라서.

“근데 소용없더라.”

“…….”

“담배를 피우는 사람 옆에도, 상점에 널린 담뱃갑에도, 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에도. 온통 네가 있어서.”

한결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헐벗은 차림 그대로인 은한이 침대로 올라와 한결의 무릎 위에 앉았다. 한결이 몽롱한 정신으로도 은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은한이 한결의 콧잔등과 볼에 꾹, 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근데 지금은 좋아. 어디서든 널 떠올릴 수 있으니까.”

“…….”

“좋아해.”

“…….”

“내가 매일매일 말해 주겠다고 했잖아.”

“…….”

“매일매일 너를 좋아하니까.”

좋아해, 한결아.

사랑해 마지않는 그가 웃는다. 햇살보다 눈부시고 따스한 미소다. 그의 눈가에 걸려 있던 햇살이 마음으로 날아와 스며들었다.

은한이 만들어 낸 담홍빛 세계로 속절없이 추락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오로지 그만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래도 다 괜찮았다. 그의 세계에 갇힌 대가로, 매일 같이 이 거대한 행복을 약속받았으니까.

그래서 한결은 감히,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 *

봄을 앞둔 2월은 말로만 봄을 앞두고 있다. 휑, 세차게 몰아치는 칼바람에 은한이 학사모를 움켜쥐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하얀 연기가 입에서 뿜어졌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피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눈물도 많았고, 웃음도 많았던 대학교를 떠나는 날이다. 졸업식. 절대 안 올 줄 알았던 그 날이 결국엔 왔다. 은한은 여기까지 사지 멀쩡히 와 준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돈 많이 벌어서 냉장고에 백한결이 좋아하는 소시지 종류별로 다 채워 주기, 목표에 한 발자국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졸업식엔 아는 얼굴이 별로 없었다. 동기들이 전부 작년에 졸업해서. 그러나 은한은 외롭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외로웠으면 좋을 텐데.

“찍어! 찍어!”

“야 현수막 수평 안 맞잖아! 잘 좀 들어 봐!”

“백한결 옆으로 좀 더 가라고!”

“아, 싫어. 여기 설 거야.”

졸업장을 쥐어뜯을 듯 세게 쥔 은한이 부들부들 경련하는 광대를 간신히 올리고 있었다. 방학인데, 그냥 집에서 잠이나 쳐 잘 것이지. 굳이 이른 아침부터 때 빼고 광내고 멋들어지게 나와 주신 공대남 셋은 은한을 조금 행복하고, 아주 많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딸랑- 방울이 졸업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딸랑>

쓸데없이 커다란 현수막 때문이었다. 디자인 센스는 개 준 건지. 요즘 현수막 제작하는 곳에 가면 기본 디자인 다 해 주는데. 희멀건 바탕에 검정 글씨가 턱턱 박힌 현수막은 ‘방울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민망하게 했다.

“그냥…… 대충, 찍어…… 개새들아…….”

입꼬리를 추켜올린 은한이 작게 으르댔다. 졸업생들이 몰려드는 본관 앞, 은한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라고 말하고 비웃음과 조롱이라 한다)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비웃음을 보내는 사람은…….

“너희 진짜 존나 웃긴다.”

카메라를 든 은한의 큰 누나였다. 그녀가 예쁘게 립스틱 바른 입술을 가로로 길게 째며 웃었다.

“호호호, 친구들 너무 센스 있다.”

옆에 선 엄마도 다르지 않았다. 은한은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는 동안 카메라 셔터는 쉼 없이 움직였다. 제가 미쳐 대학원에 들어가지 않고서야, 인생에 마지막이 될 졸업식인데 이게 뭐란 말인가. 좀 적당히 장난스럽고, 적당히 웃고, 어디 가서 진탕 술이나 마셨으면 좋겠거늘.

“어머니! 누님! 한 장 찍으시죠!”

태준은 붙임성이 좋다.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차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누나가 ‘오지고’ 뒤에, 엄마가 ‘렛잇고’ 뒤에 섰다.

모든 걸 포기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은한이 두 여인에게 팔짱을 낀 채 빙긋 웃음을 지었다.

뭐가 어찌 됐든,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준 공대남 셋에게 이 영광을. 그리고, 그들의 졸업식에 선물할 악몽을 약속하며.

“야, 너 팔이랑 다리랑 같이 나가는 거 알고 있냐?”

“……아니.”

“좀 제대로 걸어 봐.”

“……못하겠어.”

길게 느껴졌던 졸업식을 마치고, 네 사람과 은한의 누나, 엄마는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주차장인데, 한결의 걸음걸이가 영 이상했다.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같이 나가니 당연했다.

“아오. 그럼 이거라도 들고 있어.”

은한이 쥐고 있던 꽃다발을 한결의 품에 안겼다. 한결이 신부처럼 두 손으로 곱게 꽃다발을 쥐었다. 그제야 좀 괜찮은 걸음걸이가 됐다.

“긴장돼. 아까 엉겁결에 인사하고 아직 제대로 인사 못 드렸어. 어쩌지.”

“……상견례 왔냐?”

우리 엄마 스물다섯 살 아들 장가보낼 생각 아직 없거든. 은한의 타이름에도 슬픔과 긴장으로 물든 한결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아들. 엄마 간다?”

누나가 운전석에 앉고, 차 문을 연 엄마가 짧은 인사를 전해 왔다. 아무래도 직장이 있는 두 사람이라 서울에 오래 머물 순 없었다. 은한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엉. 다음 주에 내려갈게.”

“조심히 가세요, 어머님.”

“안녕히 가세요.”

“방울이, 아니 은한이는 저희가 잘 돌보겠습니다.”

공대남 셋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엄마가 잘생긴 남정네들한테 인사를 다 받아 본다며 웃었다. 시동을 건 누나가 진료가 밀려 있다며 엄마를 독촉했다.

“누님. 제가 취직하면 누님 손길 아래서 다시 태어나러 꼭 대구에 가겠습니다.”

태준이 굳건한 표정으로 먼 미래를 약속했다.

“네. 지인 할인으로 반값 해 드릴 테니까 오세요.”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순식간에 몇백만 원을 할인한다. 태준이 누나의 발등에 키스라도 할 듯 다가가다 진우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

누나와 엄마는 쿨하게 떠났다. 집안에 졸업식이 한두 번도 아니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만 세 번씩. 스무 번에 달하는 졸업식이 특별할 리 없었다.

매연 한 줌조차 남지 않은 주차장에 한결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제대로 인사 못 드렸어…….”

“아, 상견례 아니라고!”

은한이 괜찮다며 탕탕 한결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도 한결의 얼굴은 여전했다.

“꽃다발이라도 준비할걸.”

“야, 내가 졸업하지 우리 엄마가 졸업하냐?”

그리고 우리 엄마 꽃 안 좋아해. 반지, 돈다발. 이런 거 좋아하지. 은한이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전했다. 한결이 돈 많이 벌어야겠다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우리도 가자, 얼른.”

진우가 시간을 확인하며 동동 발을 굴렀다. 네 사람은 오늘 당연히, 술을 마시기로 했다. 그래도 졸업식인데 학교 앞에서 마시긴 그렇고, 바닷가에 가서. 우리는 청춘 아니냐며 이번에야말로 겨울 바다를 제대로 즐겨 보자 다짐했다.

물론, 태준과 진우만 다짐했다. 은한은 벌써 한기가 살갗에 들러붙어 오는 기분이라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바다에 뛰어들 것도 아니면서 겨울 바다를 뭐 어떻게 더 즐기겠다는 건지.

“기차 시간 좀 봐봐.”

“여기서 서울역까지 얼마나 걸리냐?”

“어…… 지하철 타면 삼십 분, 택시 타면 이십 분?”

머리를 모은 공대남 셋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고심했다.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은한이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다. 고급 외제차의 로고가 박힌 차키였다.

삐빅.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새까만 외제차가 헤드라이트를 번쩍였다. 공대남 셋의 시선이 자연히 그리로 이끌려 갔다. 자동차를 한 번 훑은 그들의 눈동자가 은한에게로 가 박혔다.

“야. 나 직장인이야. 무슨 기차를 타.”

은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공대남 셋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바, 바, 방울아. 차, 차, 샀어?”

“와, 개쩐다…….”

“…….”

각기 다른 세 사람의 반응에 은한이 피식, 멋들어지게 웃었다. 그리고 마치 자동차 모델이라도 된 듯 보닛에 걸터앉아 말했다.

“아니. 누나가 렌트해 줬어. 이박 삼일. 쩔지. 사고 나면 머리털 다 뽑아 버리겠대. 조심조심 운전해야 해.”

호오, 창문에 입김을 분 은한이 코트 소매로 벅벅 지문 자국을 닦았다. 그제야 댕그랗게 커졌던 공대남 셋의 눈이 정상적인 크기로 돌아왔다.

“그럼 우리 이 차 타고 바다 가? 개좋아!”

태준이 방방 자동차로 뛰어왔다. 은한이 스크래치 난다며 조용히 다가오라고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꽁냥꽁냥 자동차를 구경하는 은한과 태준을 주시하던 진우가 팔꿈치로 툭, 한결을 쳤다. 한마디 말없이 굳어 있는 한결이 걱정돼서.

“열등감 느끼냐?”

“…….”

“우리도 일 년 뒤면 졸업이잖아. 열심히 해서 초봉 오천 찍는 곳으로 취직하자. 요즘 반도체 쪽 보너스 끝장난대.”

중얼중얼 한결을 위로해 보려 노력하는데, 어째 듣는 것 같지가 않다.

쥐고 있던 꽃다발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쥔 한결이 몽롱한 동공으로 말했다.

“우리 방울이…… 존나 멋있지…….”

쟤가 내 애인이야. 우리 방울이 운전할 줄도 아나 봐. 한결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일렁인다. 애지중지하던 아들내미가 다 큰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라도 되는 듯했다. 방금 떠난 은한의 어머니도 은한을 이런 눈으로 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미친놈…….”

내가 널 얕봤다. 사과한다. 쯧쯧 혀를 찬 진우가 태준과 은한에 동참했다. 오씨, 계기판 쩐다. 헤드램프 봐. 범블비 뺨 후려침. 시트 개쩔어. 내 침대보다 좋아. 야 여기 손잡이 무선충전이야. 핸드폰 올려 두면 충전된대. 블로그에서 봤어.

“근데 방울아. 너 이런 차 몰 정도로 운전 잘 해?”

“그러게. 너 운전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진우와 태준이 넌지시 걱정을 내놓았다. 스크래치 하나만 나도 수십만 원이 깨질 텐데, 싶어서.

은한이 뱅글뱅글 차 키를 돌리며 답했다.

“아 어학연수 끝나고 미국 여행할 때 한창 몰고 다녔지. 거기는 차 없으면 못 다니니까.”

“존나…… 달라 보인다, 너.”

그럼 안심하고 타겠습니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점심 먹자. 신난 태준이 보조석에 자리를 잡았다. 궁둥이를 다 붙이기도 전에 은한에게 잡혀 끌려 나와야 했지만.

“돌았냐. 거기 백한결 자리야. 나와.”

“아 왜! 나 여기 앉고 싶어!”

“뒤지게 처맞기 싫으면 나와라.”

은한이 질질 태준을 끌어냈다. 태준이 울상을 하며 어쩔 수 없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진우가 그러게 왜 넘볼 수 없는 자리를 넘보느냐며 그를 비난했다.

보조석 문을 연 은한이 멀뚱히 서 있는 한결을 불렀다.

“야, 백한결!”

“……어?”

“타!”

아, 어쩜. 우리 방울이 박력 봐……. 찔끔, 감동의 눈물을 닦아 낸 한결이 자동차를 향해 다가갔다.

* * *

삼 년 만에 온 겨울 바다는, 예쁘고 아름답고 그런 것보다…….

“누가 내 귀 뜯어 갔나 좀 봐 줄래?”

추웠다. 어째 저번에 왔을 때보다 더 추운 듯했다. 목이 절로 굽어든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어깨가 경련한다. 네 사람은 코가 새빨갛게 얼었다. 그로 모자라 광대와 귀도. 그래도 ‘낭만’을 즐겨 보겠다고 온 곳이니 꾸역꾸역 모래사장 한복판에 서 있는 중이었다.

“와. 콧물이 나오다가 얼었어. 존나 신기해.”

태준이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평소였으면 더럽다고 욕을 해줬을 텐데, 너무나 공감 가는 말이라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졸업식이라 잔뜩 차려입고 왔더니 더 춥다. 코트 자락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한기가 너무할 정도로 시렸다.

“야. 이대로 서 있으면 굳겠다. 좀 걷자.”

진우의 말에 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발걸음을 뗐다. 겨울 바다가 좋은 건, 모래사장에 발이 빠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파도가 닿았던 모래사장이 단단하게 얼어있다. 이따금 성난 파도가 구두 앞까지 아슬아슬하게 밀려왔는데, 바다 산책의 또 다른 묘미였다.

한결이 모래사장에 박혀 있던 조개껍데기 하나를 주워 들었다. 하얀 바탕에 초콜릿색 무늬가 예쁘게 수놓아진 조개껍데기였다. 흘러오는 파도에 씻어 은한에게 내밀었다.

“방울아.”

“어?”

“졸업 축하해.”

“…….”

조개껍데기를 잠시 바라보던 은한이 빙긋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반들반들하면서도 오돌토돌한 껍데기의 촉감이 좋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으며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는 데에 집중했다. 파도색, 물색, 상아색, 팥죽색. 보통의 색감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조개껍데기가 수수하게 예뻤다. 그 덕에 추운 바람을 잠시나마 있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걸음걸이가 느린 은한 탓에 태준과 진우는 벌써 저 앞에서 걷고 있다. 무슨 장난을 그리 치는지, 태준은 벌써 두 번이나 모래밭을 굴렀다. 찡찡대는 태준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한결아.”

은한이 진우와 태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결을 불렀다.

“응.”

“우리 저번에 왔을 때, 일출 보면서 소원 빌었잖아.”

“그랬지.”

“그때 너 뭐 빌었냐?”

하태준은 성형 잘 되게 해 달라고 빌었고, 손진우는 자취하게 해달라고 빌었고, 나는 너희들 군대 잘 다녀오라고 빌었는데. 너는 끝까지 말 안 해 줬잖아.

은한이 물끄러미 한결을 응시했다. 한결 역시 은한을 쳐다봤다. 쏴아아, 쏴아아-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별거 아니야.”

“구라깐다. 존나 별거면서. 우리 비밀 없기로 했다. 얼른 말해라. 내가 또 술 먹고 지랄하기 전에.”

“…….”

제법 매서운 은한의 표정에 한결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진짜 별거 아닌데. 그냥…… 너랑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사이가 되게 해 달라고.”

“……그때도 사귀는 중이었잖아. 미래 정도는 상상해 볼 수 있는 관계 아니었냐.”

“어렸으니까.”

어렸으니까. 담담한 다섯 음절에 참 많은 의미가 담긴다. 은한이 발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서걱거리며 흩어지는 모래알갱이가 구두 밑창을 뚫고 발바닥으로 느껴졌다. 툭, 발을 차 까슬까슬한 모래를 털어 냈다.

“어떻게 시나리오라도 짜 놓을까?”

“어?”

“스물아홉까지 열심히 벌고, 서른에 동거하고 그런 거. 서른하나에는 결혼해서 파비우한테 냉장고랑 TV 뜯어내자.”

“…….”

“결론은, 하태준 말대로 딸 낳고 백년해로하는 거로.”

어때? 은한이 헤실헤실 눈을 휘며 웃었다. 진한 노을이 그의 웃음에 담뿍 묻어났다. 한결이 잠시 눈 깜박이는 것조차 잊고 넋을 놓았다.

“……그래, 그러자.”

두어 번 그의 말을 되뇌고 나니 당연하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결이 자신의 턱 아래를 긁었다. 낯간지럽고, 부끄럽다. 꼭 청혼이라도 받은 기분이다.

그런 한결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은한이 다시금 입술을 뗐다.

“한결아, 좋아해.”

오늘 건 아직 말 안 해 줘서. 한결의 손을 감싸 쥔 은한이 그의 손등에다 쪽, 짧게 입을 맞췄다.

“나도.”

한결의 입매가 시원하게 가로로 벌어졌다. 머리 위로 내려앉는 붉은 노을이 난로처럼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보이는 태준이 기다란 나무 막대기 하나를 찾아든다. 그리고는 차갑게 언 모래 위를 가르기 시작했다. 입술까지 새초롬하게 모으고 한 획 한 획 힘주어 무언가를 쓴다.

태준 진우 한결 은한 뽀에버

세상에. 은한이 썩어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요즘 뽀에버는 초딩도 안 쓰지 않나. 쟤 머리통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저가 만약 심리학과였다면 태준을 연구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을지도 몰랐다. 석사 논문으론 태준을, 박사 논문으론 파비우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겠지.

태준이 은한을 향해 붕붕 팔을 흔들었다.

“방울아! 졸업 축하해!”

“그래.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존나 감명 깊었다.”

“그치? 그거 내 아이디어야!”

“어, 당연히 그럴 거라 예상했다.”

두 손 가득 조개껍데기를 쥔 은한이 태준이 그려 놓은 활자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하나하나 정성 들여 껍데기를 놨다.

태준 진우 한결 은한 뽀에버 ♡

하트 모양을 완성한 은한이 뿌듯하게 웃었다.

“뽀에버 옆에는 하트 하나 붙여 줘야지.”

“오씨. 역시 디자인학과는 다르구나?”

“그거 좆도 상관없거든.”

은한이 코트 끝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래도 한결이 준 조개껍데기는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잘 씻어다가 침대 맡에 둘 셈이었다.

네 사람은 태준과 은한의 공동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옛날처럼 마구잡이로 흩날리는 머리칼이 우스웠다. 또 먼 훗날 곱씹을 추억 하나가 생겼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간당간당하게 걸렸다.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은 바다 위로 금가루가 흩뿌려진다. 그 찬란한 죽음을 잠시 목도하고 있었다.

은한이 태준과 진우 몰래 한결의 손을 잡았다. 세찬 바닷바람에도 따스한 손이 참 그답다고 생각했다. 한결이 당연하고 익숙하게 손가락을 얽어왔다.

부서지는 파도 사이로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이 빙긋 웃음을 만들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한 태준이 쾅쾅 발을 굴렀다. 고운 모래가 허공에 나부꼈다.

“아, 여기서 연애하지 말라고!”

“꼬우면 부르지 말라고.”

“개새끼.”

“왈왈.”

한결의 대꾸에 태준은 다시 패배를 맛봤다. 삼 년 전 그날처럼. 진우가 울상인 태준을 성의 없이 달랬다.

은한이 쯧쯧 혀를 차면서도 웃었다. 어째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그들, 아니 우리라서.

“춥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엉. 그때 갔던 곳 맛있더라. 거기 가자.”

“콜.”

네 사람이 느리게 모래사장을 벗어났다. 몰아치는 바람이 네 사람을 꽁꽁 묶어 둔다. 다시는 떨어지지 말라는 듯이.

뚜벅뚜벅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던 은한이 잠시 뒤를 돌아봤다. 진한 노을을 담뿍 머금은 바다가 여전히 찬란한 금빛을 띠고 있다. 네 사람의 과거 혹은 미래처럼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추워. 얼른 가자.”

한결이 바다에 정신을 빼앗긴 은한을 추슬렀다. 고개를 끄덕인 은한이 그의 옆에 붙어 섰다.

은한이 천천히 태준과 진우, 그리고 한결을 바라봤다.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선 기분이 든다. 두 달 전에 스물넷을 떠나보내고, 스물다섯에는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그랬다.

올해가 지나면 스물여섯이고 금방 스물일곱, 여덟. 또 서른과 마흔 그리고 그 후가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어떠한 나이는 성장이 더딜 때도 있을 거고, 또 어떠한 나이는 전보다 퇴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 훗날, 바쁘고 힘든 인생에 고달파지더라도, 혹은 과거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행복해지더라도.

함께하는 우리는 늘 스무 살, 국밥집에 앉아 소주를 기울이는 그때로 남아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름다웠던 우리의 스물,

찬란했던 우리의 청춘,

가장 빛났던 우리의 사랑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딸랑딸랑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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