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혹시, 첫사랑 (9/11)

09. 혹시, 첫사랑

고뿔, 감기, 몸살. 뭐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병에 걸렸다. 밥도 안 먹고 내내 울다가 두 시간이나 비를 맞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은한이 밋밋한 천장을 노려보며 서러움을 먹었다.

아픈 서러움보다는, 시기가 어느 때인데. 지금 이렇게 아프면 과제는 언제 하고! 토론 준비는 언제 하고! 차라리 까무러치더라도 꾸역꾸역 학교에 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한 서러움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베개가 울린다. 은한이 베게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미현이었다.

-야. 너 오늘 학교 안 왔냐? 저녁 먹으려고 과방 왔는데 없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은한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물론, 쓸데없는 짓이었다.

“어…… 나 몸이 좀 안 좋아서…….”

-와 씨. 목소리 봐라. 감기야?

“그런 것 같아. 오늘 자체 휴강했다.”

-병원은? 약은?

“귀찮아……. 감긴데 뭐……. 잠이 보약이다.”

-존나…… 할아버지냐. 나가기 귀찮으면 보일러라도 빵빵하게 틀고 몸 좀 지져.

“응.”

아무리 귀찮아도 끼니는 챙기라는 잔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뚝. 그 소리와 함께 집안이 다시 정적으로 가득 찼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이 젖은 탓에 아직도 폭우 속에 서 있는 것 같다.

“으아…….”

은한이 찌뿌듯한 몸을 간신히 옆으로 뒤틀었다.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어 허공만 멀뚱히 쳐다봤다. 선잠이 들었다가 깼다가를 반복하니 눈을 깜박일 때마다 날이 어두워졌다. 그러다 보니 더는 잠도 오질 않았다.

꼬르륵. 이제야 배가 고파 온다. 은한이 내팽개쳤던 핸드폰을 들었다. 베개 아래에 파묻어 뒀더니 따끈따끈한 게 손난로가 따로 없다.

죽을 시킬까. 죽 맛없는데. 치킨 시키는 건 오바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배달 앱을 훑고 있는데, 문득 화면이 뚝 꺼졌다. 그리고 진우의 이름이 떴다. 은한이 움찔 몸을 떨었다.

또.

왜.

뭔데, 이번에는.

진우의 이름에 노이로제가 생기기 직전이다. 입술을 깨물던 은한이 께름칙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방울아…….

사포처럼 까끌거리는 진우의 목소리다.

“어어?”

-살아 있냐?

그럼 죽었겠냐. 목소리는 좋지 않지만, 우울함은 섞여 있지 않은 듯해서 한 시름 놨다. 은한이 코를 훌쩍였다.

-감기 걸렸지, 너도?

“어. 뒤지기 직전이지.”

-우리돈데.

그가 말하는 ‘우리’에 누구누구가 껴 있는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은한이 단단히 고뿔에 걸려 열이 오른 공대남 셋을 떠올렸다. 푸흐흐- 절로 웃음이 났다.

-밥은 먹었어?

“아니. 16시간째 침대에 누워 있는 중이다.”

-그럼…… 어…….

또, 또 말을 흐린다. 은한이 미간을 구겼다. 그냥 확 끊어 버릴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진우가 말을 뱉는 족족 은한의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그 딴에는 당연히 해야 했던 말인데. 듣는 저로는 쾅, 쾅. 지구가 멸망하는 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뭐. 말해.”

-우리 너희 집 주변인데 밥 먹으러 나올래?

“…….”

-불편하면 안 나와도 돼.

“…….”

은한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던 어제. 그렇게 한참이나 있다가 어영부영 헤어졌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서 오들오들 떨다 보니 인사고 뭐고 나눌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결과는…… 화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뭣하고, 다시 만난다는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니고. 그저 케케묵은 오해를 풀었다, 정도가 적당하겠다. 한결이 어떠한 감정일진 모르겠으나, 은한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멋대로 속죄하고, 멋대로 회개한 기분이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를 만나도 될까. 이렇게 만나고, 만나다 보면 우리는 어떤 사이가 될까. 친구? 아니면 연인? 것도 아니면 어정쩡히 아는 사람?

은한이 깊은 상념에 휩쓸려 가고 있으니, 기다리다 지친 진우가 웅얼웅얼 유혹 같지 않은 유혹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되게 맛있는 거 먹을 거야. 약국 가서 약도 사 왔어. 약사 쌤이 밥 먹고, 약 먹고 푹 자면 내일 다 나을 거래. 근데 방울이는 밥도 안 먹고, 약도 안 먹을 테니까 내일도 아프겠네? 불쌍해서 어쩌지?

“미친놈…….”

생각보다 욕설이 먼저 튀어나왔다. 옆에서 태준의 맞아! 맞아! 빨리 나와! 재촉이 들려왔다. 은한이 한 번 더 끙, 하고 앓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말없이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을 한결을 생각하면 나가도 되나, 싶기도 하고.

-아! 이건 진짜 말 안 해 주려고 했는데! 우리 백반집 갈 거다? 거기서 백반에다가 누룽지탕도 시킬 거야. 제육볶음이랑 계란말이도 추가할 거다. 완전 감기 뚝 떨어지겠지?

“아…….”

씨발. 맛있겠다. 은한이 질끈 눈을 감았다. 상체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는데. 백반집 맨날 혼자라서 못 갔는데. 지금 먹으면 밥 세 공기는 비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어, 어딘데.”

이건 음식에 눈 뒤집혀서 나가는 거야. 살려고 나가는 거야. 조용히 밥만 먹고 올 거야. 약 먹고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서 과제 해야 해.

백한결이랑은, 눈도 안 마주치는 거야.

은한이 주섬주섬 옷을 껴입으며 다짐했다.

백반집은 늘 그래 왔듯, 눈물 나게 맛있었다. 평소였다면 할머니 국밥을 먹었을 텐데…… 하고 잠시 우울해지긴 했지만. 네 사람은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밥공기를 비웠다. 아무런 말도 안 할 거라는 다짐이 민망할 정도로 식탁 위엔 대화가 없었다. 입속에 숟가락을 넣기도 바빴다.

“이모. 공깃밥 하나만 더 주세요!”

“두 개요!”

“아니, 세 개!”

“네 개 주세요.”

말로 치부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수저가 밥그릇을 긁는 소리, 이따금 코를 훌쩍이는 소리, 뜨거운 음식을 후후 부는 소리만 섞여 났다.

먹은 양에 비해 식사 시간은 길지 않았다. 목구멍에 쑤셔 넣듯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은한이 의자에 늘어졌다. 밥 먹는 것도 힘이 드는구나. 새삼 깨달았다.

“후식 뭐 먹을래?”

휴지로 입가를 닦아 낸 진우가 물었다. 은한이 답했다.

“커피.”

“안 돼. 약 먹는데 무슨 커피야. 아이스크림 먹자.”

“미친놈아. 감기에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하여튼 이 새끼는 말에 논리가 없어. 은한이 쯧쯧 혀를 차며 진우를 비난했다. 흐음, 고심하던 태준이 별안간 짝 손뼉을 쳤다.

“그럼 레모네이드 먹자. 우리 엄마가 감기 때마다 레몬이랑 생강 막 으깨서 타 주는데, 존맛임.”

“오. 좋아. 레몬 감기에 좋다고 어디서 본 것 같아.”

진우가 맞장구를 쳤고, 은한도 좋다며 짐을 쌌다. 한결은 가볍게 고개만 까닥였다. 네 사람은 감기약을 입안에 털어 넣은 후, 물로 건배를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해가 짧아졌다. 나왔을 때만 해도 노을이 세상을 덮고 있었는데, 지금은 새까맣기만 하다. 제법 쌀쌀한 공기에 은한이 후드 집업을 목 끝까지 채웠다.

골목길에는 카페가 없어 큰길까지 나왔다. 와글와글해진 인파에 조금 짜증이 났다. 이왕 여기까지 나온 거, 자주 가는 카페로 향하자고 조금 더 걸었다. 태준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던 은한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작은 꽃집 앞에서였다. 노란색 간판에 색색의 꽃들이 한 묶음씩 진열돼 있다. 원래 여기에 꽃집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했다. 꽃이라는 존재에 원체 관심이 없으니. 은한의 머릿속에 있는 학교 앞 지도는 술집, 밥집, 카페. 그게 다였다.

“꽃 사게?”

태준이 물었다. 은한이 흐음, 신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사려고 걸음을 멈춘 건 아니었다. 그냥…… 누군가가 떠올라서. 헌데 곧 가게를 닫으려는 모양인지 부지런히 화분을 가게 안으로 들여놓는 주인을 보고 있자 조급해졌다.

“저기, 지금 살 수 있어요?”

“아, 네! 그럼요.”

은한은 굳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진열된 꽃을 살폈다. 어느새 다가온 한결과 진우도 허리를 굽히고 꽃을 구경했다. 조금만 잘 찾아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게 꽃인데. 학교만 해도 돈을 왕창 들여서 여기저기 화단을 만들어 놨다. 근데 또 이렇게 사려고 보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쩜 다 예쁘냔 말이다.

“꽃은 왜?”

“있어 봐, 좀.”

은한이 미간을 좁혔다, 풀었다. 입술을 삐죽였다, 말아 물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다 간신히 하나를 골랐다.

하얀 꽃잎 안에 노란 꽃봉오리가 들어 있는 거였다. 처연하지만 고고하게 아름다운 꽃은 화려한 색을 가진 꽃 사이에서도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저, 이거 주세요!”

“얼마나 드릴까요?”

“음…… 어떻게 팔아요? 송이로도 살 수 있어요?”

“선물하실 거예요?”

일단 들어오라는 주인의 말에 은한이 그녀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에서는 은은히 맡을 수 있던 꽃향기가, 폭발하듯 은한을 감싸 안았다. 보통 많이 사 가는 대로 꽃다발 하나만 만들어 달라는 투박한 주문에 그녀는 빙긋 웃으며 솜씨를 뽐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꽃인데?”

은한의 어깨에 턱을 걸친 진우가 물었다. 난데없이 꽃을 사다니. 이해는 안 되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은한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몰라.”

“엉?”

“몰라. 근데 예쁘잖아. 그럼 됐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무신경한 은한의 표정에 진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인이 진우의 질문에 대신 답했다.

“수선화예요.”

“아. 수선화.”

솔직히 잘 모른다. 이름을 듣고도 낯섦을 느꼈다. 지나가다 어디서 한 번쯤 봤겠거니. 예쁘면 됐지. 그러고 말았다.

꽃다발은 금세 만들어졌다. 카드를 내밀고 꽤나 묵직한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코끝에서 일렁이는 향기가 참 싱그럽다. 이래서 꽃을 사나, 싶기도 하고.

“어머니 드리게? 아니면 누나? 이게 대구까지 잘 가냐? 도착하면 줄기밖에 안 남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따라와.”

가게를 나선 은한이 호기롭게 앞장을 섰다. 끔뻑끔뻑, 눈을 깜박인 공대남 셋이 군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은한이 도착한 곳은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어두컴컴하게 불이 꺼진 건 익숙지 않았지만.

“할머니, 저희 왔어요.”

굳건히 닫힌 문 앞에 꽃다발을 둔 은한이 헤실헤실, 애교 있게 웃었다. 화답하듯 조금 세차게 흘러온 바람이 수선화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두 손을 단전 아래에 곱게 모은 진우가 팔꿈치로 툭 은한을 쳤다. 그가 소곤소곤, 누가 듣기라도 하는 양 목소리를 죽여 억울하다는 듯 말한다.

“야. 여기 올 거면 말을 했어야지. 나도 하나 사게.”

“너는 다음에 와서 놔.”

은한이 한 발자국 문 앞으로 다가갔다.

“공대 애들이라 센스는 다 죽 쒀 먹고 없어요. 역시 제가 제일 좋죠, 할머니? 길 가다 할머니 생각나서 샀어요. 근데 꽃 좋아하실랑가 모르겠네. 다음에는 그냥 크림빵으로 사 올까요?”

답은 없는데, 신기할 정도로 술술 말이 흘러나온다. 태준이 엉덩이로 은한을 밀어내고 자리를 빼앗았다. 은한이 눈을 부라렸으나 그런 걸 신경 쓸 태준이 아니었다.

“할머니 국밥 먹고 싶어요. 방금 저녁 먹고 왔는데 완전 맛없었어요.”

“지랄. 존나 맛있게 처먹어 놓고.”

“야. 조용히 해. 비밀이야.”

“얼씨구.”

은한이 꾸욱 태준의 발등을 짓밟았다. 태준은 윽 소리를 내면서도 자리에서 비키지 않았다. 진우와 한결도 잘 살고 있다느니, 할머니 가신 게 슬퍼서 단체로 감기에 걸렸다느니, 보고 싶다느니. 그런 말을 해 댔다.

네 사람은 삼십 분을 꼬박 국밥집 앞에 서 있었다. 가려고 하다가도 할 말이 생기고, 그립고 그래서. 도통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처음에는 활발하게 시작한 대화가 점점 가라앉고, 우울해졌다. 어느새 네 사람 모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가자. 할머니 우리 시끄럽다고 욕하시는 게 뒤통수에서 울리지 않냐.”

“어…… 가야지…….”

진우의 재촉에 은한이 훌쩍이며 눈을 비볐다. 그리고 막 발걸음을 떼려 하는데, 순간 무릎이 꺾였다. 어제부터 길바닥에 너무 오래 서 있었던 탓이다. 또또. 제 무릎 상태를 잊고 안일하게 행동하고야 말았다.

은한은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아스팔트 바닥에 질끈 눈을 감았다. 또 어디가 거하게 갈리겠구나. 아직 넘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팠다.

무릎과 손이 바닥에 닿기 직전, 누군가가 그의 팔뚝을 단단히 잡아챘다.

“조심해.”

한결이었다. 은한이 그의 힘에 이끌려 엉거주춤 중심을 잡았다.

“어어…… 고맙다.”

향수 냄새가…… 안 나네. 은한은 그 찰나에도 그것을 느꼈다. 아프다 보니 뿌리는 걸 잊고 나왔을 확률이 크지만, 그게 뭐라고 심장이 주제도 모르고 발광했다. 제가 한결에게 향수 냄새가 싫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은한이 바르게 섰을 때, 한결의 손은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진우의 옆에 섰다. 널따란 어깨가 가로등 빛을 등져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은한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그림자를 쳐다봤다.

“가자. 비타민 먹으러 가야지!”

태준이 은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은한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발을 뗐다.

근데 레모네이드에 들어가는 레몬 진짜 레몬이야? 거기도 비타민 있나? 레모네이드 시럽 넣어서 만든 거 아니냐? 시답잖은 태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방울아.”

“엉.”

“너랑 같이 있으니까 좋다.”

“…….”

“진짜, 좋아.”

태준이 히히, 그 특유의 웃음을 만든다. 잠시 굳어 있던 은한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찌릿찌릿 아리던 무릎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저 멀리 익숙한 카페가 보인다. 목구멍으로 넘길 레모네이드를 상상하자 어금니에 침이 고이며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기분 좋은 구김이었다.

그때, 주머니에 쑤셔 둔 핸드폰이 울렸다. 은한이 무심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생전 처음 보는 번호였다. 무심코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하니?

“네?”

-Oh, Hani. 나 파비우!

“……네?”

은한이 귀를 의심했다. 소름 끼치게 귀에 익은 이름이다. 파비우. 빙글빙글 능글맞게 웃고 있는 얼굴이 떠올랐다. 이질적일 만큼 새까만 눈동자와 높은 코, 짙고 날카롭게 생긴 눈썹.

하지만…… 그는…… 뉴욕에……. 아니, 어떻게든 서울에 오겠다고 제 신상을 다 털어 가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진짜…… 14시간을 날아서…… 왔으려고…….

은한의 의심을 한방에 뭉개려는 듯, 파비우가 소리쳤다. 뚝 멎은 은한의 걸음에 진우와 한결이 뒤돌아섰다.

은한이 뻐끔, 입을 벌린 채 두 사람을 응시했다.

-보고 시퍼써, 하니! 어디야!

“어…… 너는 어딘데?”

-나 서울이야!

오, 씨발. 하느님.

은한이 아주 오랜만에 신을 찾았다.

* * *

“뭐야, 다니엘 헤니야?”

“어, 그런 듯. 은하니 미국 가서 할리우드 배우랑 친해졌나 봐.”

과방이 북적북적하다. 인파 틈에 끼인 은한이 으득 이를 씹었다. 며칠 전 걸려 온 전화는 그, 파비우였다. 뉴욕에서 알던 그! 파비우!

은한은 감기도 다 낫지 못했는데, 주말 내내 파비우 손에 이끌려 서울을 여행했다. 남산, 명동, 강남, 홍대, 찜질방, 한강, 경복궁. 드라마에 좀 나왔다 싶은 곳은 전부 다녔다. 처음에야 반갑고, 서울을 워낙 좋아하니 소개해 줘야겠다, 했지만 은한도 일상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다 과제가 넘치다 못해 폭발해서 간당간당 숨만 쉬는 중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데려왔다. 파비우가 전부터 넌지시 나도 한국 캠퍼스 가보고 싶어. 그런 말을 흘리기도 했고.

“와아. 한국 사람 진짜 많다.”

파비우가 천국에 오기라도 한 듯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와, 한국이니까 한국 사람이 많지.”

미현이 귀엽다는 듯 그를 보며 웃었다. 파비우가 오마이갓. 소 뷰티풀. 같잖은 영어를 써가며 은한의 친구들을 찬탄했다.

“하니. 네 친구들 전부 배우 같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보다 예뻐!”

은한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처 들으며 모니터만 집요하게 응시했다. 은한이 수업에 가고, 과제를 하는 동안 파비우는 은한의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학식을 먹었다는 둥, 노천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둥, 총장님 동상이랑 사진을 찍었다는 둥.

늦은 저녁. 은한의 동기들이 슬슬 집에 가고 과방이 빌 때쯤, 은한은 간신히 과제를 제출했다. 단단하게 뭉친 어깨를 뒤틀고 있으니 넉살 좋은 파비우가 조물조물 어깨를 주물러 왔다.

“하니. 과제 다 했어?”

“어. 뒤지겠어.”

“그래서, 이제 나랑 놀아 줄 거야?”

은한이 휙 고개를 꺾었다. 잘-생긴 얼굴이 히죽히죽.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고. 아니 뱉으라면 얼마든지 뱉을 수야 있지만, 왠지 모르게 무슨 짓을 해도 밉지 않은 파비우라.

“그래, 뭐 하고 싶냐?”

“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포즈를 한 파비우가 미간까지 좁히며 고민한다. 그동안 은한은 노트북을 정리하고 짐을 쌌다.

“어! 하니!”

“우리 과방 되게 좁아. 소리 안 질러도 잘 들려.”

“나! 치맥!”

파비우가 왜 이걸 이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며 쿵쿵 땅을 굴렀다. 180이 훌쩍 넘는 덩치가 뛸 때마다 미대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은한이 성난 짐승을 달래듯 워워, 두 손을 흔들었다.

“가자. 먹으러 가자. 진정 좀 해.”

“진짜? 우왁! 나 드디어 한국 치킨 먹는 거야?”

“어어. 내가 세 마리 사 줄게.”

“아니야. 나 돈 많아. 내가 다섯 마리 사줄게, 하니.”

파비우가 찡긋 한쪽 눈을 일그러트렸다. 은한의 표정이 빠르게 썩어 갔다. 파비우 입으로 직접 말한 적이 없으나, 은한은 그가 보통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은근히 눈치채고 있었다. 뉴욕에서 람보르기니를 몰고 다녔으니. 지금도 강남에 있는 별 다섯 개 호텔에서 묵고 계신다. 무려 한 달 장기 숙박을 신청하셨단다.

은한을 덮다시피 끌어안은 파비우가 얼른 가자며 졸랐다. 은한이 그에게 짓눌려 낑낑 과방을 벗어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손진우]

오, 하나님. 세상에. 저 이제 막 인생에 적응하는 중인데, 어쩌자고 또 시련을 주시나요. 은한이 흐읍, 숨을 삼켰다.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파비우가 빼꼼 핸드폰을 훔쳐보며 물었다.

“쏭…… 지누? 누구야 하니? 그 사람?”

“어…… 아냐, 아냐.”

은한이 어정쩡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엉.”

-방울아 바빠?

“공적이지 않은 일로 바쁜 중이야.”

-어?

“용건. 용건 말해.”

-아, 우리 내일 퀴즈라서 도서관에 있다가 나왔거든. 너 아직 학교면 야식 같이 먹을래?

“…….”

은한이 턱 아래를 긁었다. 가면 보나 마나 한결이 있을 텐데. 어색하게 뭘 먹다 체할 바에는 파비우와 둘이 있는 게 나았다. 은한이 막 거절을 뱉으려 할 때였다. 핸드폰을 채간 파비우가 우렁차게 말했다.

“갈게요!”

정문 앞에서 만나요! 그리 말하곤 꾸욱. 단칼에 전화를 끊는다. 입을 쩍 벌린 은한이 파비우를 쳐다봤다. 정문을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게 아니고.

“너…… 미쳤냐?”

“음…… 쪼끔?”

“가면 그 사람도 있단 말이야.”

“응, 알아.”

빙긋. 참 발랄하게도 웃는다. 은한이 그를 따라 웃었다.

“아, 알아?”

“응.”

“이 씨방새. 알기는 뭘 알아. 야 이 씨팔! 네 나라로 돌아가 버려! 아니면 한국에 뼈를 묻게 해 주마!”

은한이 곱슬곱슬한 파비우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휘둘러 댔다. 뉴욕에 있을 때도 간간이 그의 머리칼을 잡아 본 터라 손에 착착 감기는 게 아주 제맛이었다.

“아! 하니, 아파!”

“아프라고 한 거야, 똘추야!”

치킨집의 메뉴판은 한 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파비우는 세 장 연달아 이어진 메뉴판을 보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를 정확히 12번 외친 그는 모든 메뉴를 먹어 봐야겠다더니 정말 모든 메뉴를 시켰다.

은한은 ‘마라 치킨’이라는 것을 태어나 처음 들어봤다. 마라탕에 들어가는 마라를 치킨에도 넣어 먹는구나. 초점 없는 동공으로 생각했다.

정말요? 이걸 다 주문하신다고요? 주문을 재차 확인한 점원이 께름칙한 얼굴로 떠나고, 테이블 위에는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울이가 뉴욕에 있을 때 만난 친구라……고요?”

진우가 포크 손잡이를 매만지며 물었다.

“방울이? 방울이가 누구요?”

눈을 동그랗게 뜬 파비우가 되물었다.

“나야, 나.”

은한이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What? 하니, 방울이야? 방울이 개 이름 같다. 드라마에서 들은 것 같아. 부잣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

“개 아니거든, 씹새야.”

“괜찮아. 하니 개보다 귀여워.”

“그것도 아니거든, 개새야.”

파비우가 헥헥, 개를 흉내 냈다. 은한이 더럽다며 그의 볼을 밀었다. 파비우는 그것도 좋다고 낄낄댄다. 두 사람을 보는 태준의 얼굴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뒷덜미가 섬뜩할 정도로 익숙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진우가 먼저 나온 맥주를 빈 잔에 하나하나씩 따르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은한이 친구요.”

“맞아요. 하니 친구예요. 하니 좋아해서 한국까지 왔어요.”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두른 파비우가 훅,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찌나 힘이 센지 의자 전체가 끼긱 하며 그에게로 끌려갔다. 은한은 퍽 익숙한 그의 힘인지라 평온한 얼굴로 맥주만 홀짝였다.

“우리 은한이가 많이 귀엽죠.”

“우욱, 우리 엄마도 그런 소리 안 해.”

은한이 헛구역질을 연기했다. 진우가 씨익, 가로로 길게 입을 째며 웃는다.

“네. 우, 리, 하니. 귀여워. So adorable.”

파비우가 유려하게 눈을 휘며 미소를 지었다. 우, 리에 악센트가 잔뜩 들어간 걸 은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적하지는 않았다. 지적한다고 관둘 파비우도 아니고. 눈빛이 요상한 게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확실했다. 뭔진 모르겠으나 정도를 넘어설 때 말려도 늦지 않으리라.

진우와 파비우의 눈에서 파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때마침 치킨이 놓였다. 파비우가 오씨, 한국 치킨이야! 비명처럼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다른 치킨이 연달아 줄줄이 쏟아졌다.

“……이 미친 파비우야. 이거 다 못 먹어.”

“걱정 마, 하니. To go 하면 되지!”

얼마나 많으냐면, 테이블이 모자라 옆 테이블을 붙여 치킨을 놔야 할 정도였다. 오늘 파비우의 아집으로 희생된 닭이 몇 마리일까. 은한이 테이블에 올라온 닭들에게 심심찮은 위로를 전했다.

“드세요. 모자라면 더 시켜요! 나 돈 많거든요. 아, 나 말고 나의 부모님이. 허헝.”

“아…… 예…….”

진우와 태준이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포크를 들었다. 은한도 막 치킨을 집으려 했다. 이상할 정도로 적막한 맞은편을 발견해 버려 허공에서 뚝 멎었지만.

버석하게 굳은 표정의 한결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파비우를 관찰하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관찰이고, 곧이곧대로 말하면 꼬나보는 거다. 어찌나 이글거리는 눈빛인지, 은한이 흘끔 그의 눈치를 봐야 할 수준이었다.

“하니. 다리 먹을래? 드라마 보니까 좋아하는 사람한테 다리 주더라.”

파비우가 바삭한 프라이드 닭다리를 집어 은한의 앞 접시로 가져왔다. 은한이 분주하게 눈을 깜박였다. 언제나 매너가 좋던 파비우지만, 이렇게 사사건건 챙겨 주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은한이 막 앞 접시를 들어 닭다리를 받으려 할 때였다.

“은한이 퍽퍽살 좋아하는데.”

한결이 먼저 은한의 앞접시에 두툼한 가슴살을 올린 것은. 파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한결과 진우를 잠시 번갈아 봤다.

“뭐야. 쏭지누가 하니 X 아니야?”

소곤소곤. 그리 묻는다. X. 그러니까 Ex-boyfriend. 전 남자친구. 은한은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이 미친놈! 어쩐지 하는 행동이 이상하더라니!

은한이 경악 서린 눈으로 파비우를 응시했다. 그걸 뭐라고 알아들었는지 싱글벙글 웃은 파비우가 한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퍽, 퍽? 퍽퍽? 그게 뭔데요?”

“뻑뻑한 살이요. 뼈 발라 먹기 싫다고 가슴살만 먹다 보니 가슴살이 좋아졌대요.”

“아아, 그랬구나. 하니 귀엽다.”

파비우가 은한의 머리칼에다 볼을 비비적거렸다. 은한은 일그러진 양은 냄비 같은 얼굴로 그의 스킨십을 받아 냈다. 파비우의 머리통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 가늠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파비우를 이곳에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은한이 뒤늦게 후회했다.

“그냥…… 좀…… 먹어라. 제발.”

은한이 아무 치킨이나 집어다 파비우의 입에 물렸다. 쑤셔 넣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파비우가 한껏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와씨! 존맛! 역시, 한국 치킨. 진짜 맛있구나? 하니가 미국에서 치킨 안 먹은 이유가 있네. 우걱우걱 치킨을 씹던 파비우는 곧 두 팔을 걷어붙이고 치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말 짐승처럼 먹어 댔다.

은한은 쯧쯧 혀를 차면서도 그의 앞으로 맥주나 절인 무를 밀어 줬다. 체하면 또 얼마나 찡찡거리며 귀찮게 할지 안 봐도 뻔했다.

“방울이 미국에서 어땠어요?”

접시에 코를 박고 튀김옷만 뜯던 태준이 물었다. 그답지 않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다. 파비우가 우물우물 치킨을 씹으며 고민했다.

“하니 제일 바쁜 학생이죠. 숙제도 다 해오고, 시험도 잘 치고. 그리고 일도 하고, 누나랑 장도 보고, 밥도 먹고. 또 나랑 술도 마시고. 소맥!”

파비우가 포크를 휘저으며 잠시 은한과 함께 했던 뉴욕을 떠올렸다. 1년이라는 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추억들이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하니 센트럴 파크에서 산책하는 거 좋아해요! 길게 말고 짧게! 첼시 마켓 랍스터도 좋아해. 어…… 에일린스 치즈 타르트도 좋아하고, 라파예트 스트릿에 있는 라 콜롬브 커피도 좋아해요.”

“아, 맞아. 거기 진짜 맛있지. 네가 말하니까 먹고 싶잖아.”

“나 한국 여행 끝나면 다시 뉴욕 가자. 누나랑 같이 먹으러 가자.”

파비우는 그 후로도 은한과 함께 했던 추억들을 쏟아 냈다. 길을 잃어 할렘가에 들어갔던 은한을 구하러 갔던 일, 은한이 좋아하는 매운 한국 라면을 시도했다가 눈물 콧물 흘렸던 일, 코리아타운에서 은한과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맛집 따위를 쉬지 않고 쏟아 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태준이 그를 칭찬했다.

“한국말 진짜 잘 하시네요.”

“헐. 진짜요?”

“네. 진짜요.”

“와아! 고마워요. 원래 욕밖에 못 했는데, 하니가 한국어 알려 줬어요. 내가 하니 좋아해서 따라다녔거든요. 따라 다니면서 한국어 배웠어요.”

하니. 나 한국말 잘 한대. 다 하니 덕분이야. 파비우가 은한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의 타고난 애교 중 하나였다. 은한이 능숙하게 그를 밀어내며 치킨을 골랐다. 이번에는 간장 치킨을 먹어볼까, 손을 뻗었는데 챙. 포크가 부딪쳤다. 다른 걸 집으러 가던 한결의 포크였다.

“아…… 미안.”

“…….”

은한이 확 팔을 오그렸다. 급격하게 시선이 아래로 추락한다. 물끄러미 은한의 정수리를 쳐다보던 한결이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원래 욕밖에 못 했어요? 무슨 욕 제일 좋아해요?”

“어…… 나는 존나요. 존나가 너무 좋아요. 포르투갈어에도, 영어에도 존나에 딱 맞는 말이 없어요.”

“존나가 없어요? 아니 존나가 없으면 뭘 써?”

“그러니까! 그래서 포르투갈어 쓰다가도 막 갑자기 존나가 나와.”

역시 한국어, 대단해. 태준과 파비우는 기이한 주제로 빠져들어 갔다. 두 사람이 잘 맞을 걸 진즉 예상한 은한에게는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야식 겸 술자리는 그렇게 흘러갔다. 태준과 파비우는 신나게 대화를 나눴으며 결국은 호형호제까지 하기로 했다. 진우는 종종 그들의 대화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모호하게 겉돌았으며 은한은 한결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한결은, 이렇다 할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했다.

파비우는 두 손에 주렁주렁 치킨을 매달고 가게를 나왔다. 은한이 네가 인간이냐, 아니면 치킨 나무냐 그를 비난했음에도 생에 최고의 날이라며 좋아했다.

파비우가 버릇처럼 은한의 어깨에 매달렸다.

“하니. 나 오늘은 하니 집 가서 자면 안 돼?”

“미쳤군.”

“아. 하니이. 나 한국 대학생 집 너무 가 보고 싶었단 말이야. 조용히 잘게.”

“돌았군.”

“하니. 제발. 뭐 필요한 거 없어? 내가 마이크로 오븐…… 어…….”

“전자레인지.”

“어! 그거 사 줄게!”

“있거든.”

“신상으로 사 줄게! 하니 도시락 많이 먹잖아.”

파비우는 끈질겼다. 두툼한 덩치에 은한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은한이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 그냥 집 가서 재울까. 소주 사다가 왕창 먹이고 기절하듯 재우면 되지 않을까. 재워 놓고 과제 하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어깨가 훅 가벼워졌다. 누군가에게 단단히 붙잡힌 파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집 넓어. 우리 집 가서 자요.”

얼굴을 잔뜩 구긴 한결이었다.

* * *

띠리릭.

도어락이 잠김과 동시에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두컴컴한 집안, 부모님은 주무시는 모양인지 기척이 없다. 한결이 꾹꾹 눈두덩을 짓눌렀다.

“와. 나 한국 사람 집 처음 와 봐요.”

“…….”

파비우가 어디서 배웠는지, 실례합니다. 그리 말하며 신발을 벗었다. 멀쑥한 외국인이 예의 있게 현관 복도로 들어선다. 한결이 터져 나오는 한숨을 꾸역꾸역 삼켰다. 제가 데리고 왔는데, 싫은 티를 낼 수도 없고. 아, 죽고 싶다.

그냥 내버려 두면 은한의 집에서 잘 것 같았다. 정체도 모를 남자가 은한의 집에서 자는 건 까무러치기보다 싫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제겐 싫고 말고 할 권리가 없다는 걸.

근데 싫은 걸 어쩌느냔 말이다. 몸서리치게 싫다고.

그러는 와중에도 파비우에게 손님용 슬리퍼를 꺼내 준 한결이 간단하게 집을 소개했다. 여기는 거실, 저쪽은 부엌, 부모님 방, 드레스 룸, 어머니 서재, 제 방. 파비우는 호오, 와우, 마이갓, 세상에, 멋져! 따위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동자로 집을 핥았다.

그가 열렬히 거실을 관람하는 동안, 한결은 열 마리는 거뜬히 넘는 치킨을 식탁 위에 차곡차곡 쌓아 놨다.

“드라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에요.”

한결의 방에 들어선 파비우가 감동적이라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있는 거래 봐야 널찍한 침대, 책상, 책장, 작은 옷장, 종종 놓인 피규어가 다이거늘 뭐가 그리 신기하다는 건지. 한결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얼굴을 못 본 척했다.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내일 학교에 가려면 얼른 씻고 자야 했다.

“일단…… 편한 바지 드릴 테니까, 저기서 씻어요. 찬장에 새 칫솔 많으니까 꺼내 쓰면 되고. 샴푸랑 바디 샤워 같은 건, 영어로도 쓰여 있어요.”

“넵!”

한결이 즐겨 입는 추리닝 세트를 받아든 파비우가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 한결이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집에 오고도 피곤해 보긴 태어나 처음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 제가 자초한 일인 것을. 한결이 꾹 눈을 내리감았다.

파비우와 마주 보고 웃는 은한.

그에게 치킨을 먹여 주는 은한.

그와 둘만의 추억을 공유하는 은한.

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다. 가슴이 답답하다. 으득 이를 짓씹은 한결이 윗도리를 벗으며 다른 욕실로 향했다.

침대에서 자라는 한결의 권유에도 파비우는 한사코 거절을 뱉었다. 보일러가 켜진 바닥에서 자 보는 게 꿈이었다나, 뭐라나. 은한이 종종 등을 지지고 싶다 했었는데, 그걸 체험하게 돼서 행복하다고 했다. 한결이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흐린 무드등만 켜진 방이 고요하다. 흘깃 내려다본 파비우는 몸을 비비 꼬며 바닥을 느끼는 중이었다. 반짝거리는 눈은 한결의 방을 외울 듯 관찰하고 있다.

한결이 꾹 입술을 말아 물었다. 강은한이랑 무슨 사이에요? 얼마나 친해요? 자꾸 하니가 좋다느니 하던데, 혹시 게이에요? 그런 철없는 질문이 혀끝에서 달랑인다.

그때, 파비우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파비우가 미안!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놀란 한결이 덩달아 상체를 일으켰다.

“오! 하니야!”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파비우가 광대를 한껏 올리며 웃었다.

-부모님께 인사는 드렸어?

은한의 목소리가 한결의 귓구멍까지 파고들었다. 한결이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통화에 집중했다. 타인의 통화를 엿듣는 데에 취미가 있진 않았는데. 어쩌자고 이리 되어 버린 건지.

“아니. 주무셔서! 내일 인사할 거야.”

-안녕하세요. 파비우입니다. 브라질에서 왔습니다. 재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히 있다 가겠습니다. 꼭 말해야 해.

“응. 알았어. 메모장에 적어 둘게.”

-여기 서양 아니고 동양이야. 혹시 밥 주시면 웬만하면 남기지 말고 먹고. 빈 그릇은 알아서 정리하고. 냉장고 문도 함부로 열지 마.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네가 해. 또, 멋대로 다른 방에 들어가면 안 돼. 홈 파티 온 게 아니란 말이야.

“Okay. I'll keep that in mind.”

-그리고 또…….

은한의 잔소리와 당부는 아주 길었다. 한결은 맹한 얼굴로 파비우가 은한과 통화하는 걸 구경해야 했다. 은한의 목소리를 수화기로 들어 본 게 언제더라……. 아무리 기억을 거슬러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울했다.

“하니. 잘 자. 내일 봐.”

-오냐.

퍽 낯간지러운 인사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한결은 이유 모를 서운함이 들었다. 나도 물어 주지. 아니면 바꿔 주기라도……, 그리 생각하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주 제대로 미쳐 가는 중이다.

답싹 이불을 끌어안은 파비우가 한결을 향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데리고 와 줘서.”

“아…… 네. 뭐…….”

순수한 선의는 아니었지만, 그리 느끼면 됐지. 한결이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틀어 올렸다.

“고마우니까 마이크로 오븐…… 아, 뭐더라…… 아까 하니가 알려줬는데…….”

“전자레인지.”

“아! 맞아요. 그거 사 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한결이 옅게 웃었다. 파비우가 집요하게 한결을 주시했다.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한결은 등줄기가 섬뜩해지는 걸 느꼈다. 뭐지. 혹시 눈치챘나. 내가 은한이 전 남친인 거. 그래서 이 새벽에 치고받고 싸우기라도 하자는 건가. 그런 기이한 생각을 했다.

“우리 친구 할래요?”

“네?”

“하니랑 나랑 친구, 한…… 한교리? 한겨리도 하니랑 친구. 그럼 나랑 한겨리도 친구 하면 안 되나?”

“…….”

나 걔 친구 아닌데.

차마 하지 못한 말을 꽉꽉 목구멍 아래로 쑤셔 넣었다. 한결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당연히 거절하고 싶다. 저는 파비우가 싫었다. 그에게 궁금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너 대체 언제 돌아가니? 한국에 눌러살 건 아니지? 빨리 강은한 옆에서 떨어져 버려.

하지만 파비우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낯짝이 두꺼운 건지. 엉덩이를 끌어 침대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말 놓자, 우리. 나 존댓말? 그거 잘 못 해. 태주니랑은 말 놨어.”

빙긋빙긋 웃는 얼굴이 너무할 정도로 잘생겼다. 한결은 솟구치는 질투심에 이불 아래로 숨긴 주먹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그……래요. 친구, 하지 뭐.”

“그래! 친구!”

파비우가 쑥- 손을 내밀었다. 한결이 입술로만 호선을 그리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파비우가 벌써 한국에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며 신나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내일 은한과 파전에 막걸리를 먹을 거라느니, 그가 과제 할 때 옆에서 한국어 공부를 할 거라느니, 한결은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을 마구잡이로 쏟아 냈다.

한결은 점점 더 의식이 또렷해지는 걸 느꼈다. 또렷해지다 못해 잘 손질된 칼날처럼 날카로워진다. 눈을 감을 때마다 제가 없는 곳에서, 모르는 곳에서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상상됐다.

눈을 맞추고 웃는 두 사람은, 곧 손도 잡았고, 조금 있다가는 입도 맞췄다. 한결이 억척스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을 짓누르는 손톱이 아팠으나 힘은 빠지지 않았다.

돌이키지 못할 것을 돌이키고 싶은 밤이었다.

* * *

카페 의자에 앉아 등을 구부정하게 굽힌 은한이 모니터에 들어갈 듯 집중했다. 기말고사가 가까워지면서 눈보라처럼 몰아치는 과제에 파묻혀 딱 사망하기 직전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파비우는 쭙쭙 커피를 마시며 입술만 움직여 댔다.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은한은 무어라 욕을 해주려다가 그 시간도 아까워 말았다.

“하니. 그 사람 진짜 괜찮더라.”

“그 사람이 누군데.”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 한둘이냐. 너 이제 나보다 친구 많잖아. 파비우는 은한의 친구들을 섭렵하다 못해 친구의 친구까지 영역을 넓혔다. 농담 아니고, 한 달쯤 더 있으면 서울 인구 전체를 친구로 삼을 듯했다.

“한겨리.”

“……아?”

“잘생겼고, 다정하고. 하니가 왜 사랑했었는지 알 것 같아.”

딸깍딸깍 열심히 마우스를 두드리던 은한의 손가락이 뚝 멎었다. 이렇게 뜬금없이, 예고 없이 한결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말을 하는 저의, 아니 이유가 뭐냐?”

“이유? 이유 많지. 그 사람 나 엄청 싫어하는데도 옴총 잘 챙겨줬어. 잠옷도 주고, 씻는 것도 알려 주고. 이불도 펴 주고, 어머니가 오징……어 젓깔! 그거 반찬으로 줬는데 혹시 못 먹겠으면 말하라고도 해 줬어.”

“하아……. 그래. 뭐…… 그런 건 잘 하는 놈이지.”

“귀엽더라. 가끔 내가 안 본다고? 못 본다고? 생각하면 표정이 막 이렇게 됐는데. 내가 보면 이상하게 웃었어.”

파비우가 양손 검지로 눈가를 추켜올렸다. 삐죽 째진 눈이 우습다. 백한결이 저런 표정도 할 줄 알던가. 본 적이 없으니 믿을 수가 없다. 와르르 웃음을 쏟아낸 은한이 파비우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렸다.

“근데 걔가 널 왜 싫어하지? 네가 좀 비호감이긴 해도, 싫어할 정도는 아닌데. 태준이랑 진우랑도 친구 됐잖아, 너.”

“Oh, 하니……. 너 바보야?”

파비우가 끔찍하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은한이 코를 찡긋거렸다. 바보한테 바보란 말을 듣다니.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새끼가 누구한테 바보래.”

“하니 바보 맞아. 내가 하니한테 자꾸 어? 막 이렇게 하고, 요렇게 하고. 그러니까 질투 나서 그런 거잖아.”

파비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뭔데. 네가 나한테 언제 그런 짓을 했어? 은한이 모호한 낯으로 파비우를 주시했다.

“뭔 개소린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만?”

“세상에 파비우 싫어하는 사람 없어. 한겨리는 하니를 나한테 뺏길까 봐 날 미워하는 거야.”

“…….”

뺏기다니. 그건 한결에게 제가 소유되어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지금은, 연인도 친구도 아닌 그저 아는 사람에 불과하다. 잠시 굳었던 은한이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만약에 그렇다면 나한테 왜 헤어지자고 했겠어. 걔 이제 나 안 좋아해.”

“흐음…… 그건 쫌 이상하네!”

“어, 아니야.”

“하지만 그가 널 신경 쓰고 있는 건 맞아. 확실해! 당연히 하니도 한결을 신경 쓰고 있고!”

“…….”

틀린 말은 아니지. 같이 밥 먹는 것도 눈치 보는데. 어마어마하게 신경 쓰는 중이지. 삐뚜름하게 턱을 괸 은한이 푸후- 한숨을 내뱉었다.

파비우가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며 소곤소곤 속삭였다.

“한겨리한테 무슨 일 있었지 않을까? 설마 정략결혼! 아니면 전생의 인연을 만나서! 그것도 아니면 한겨리 옛 여자친구가 임신.”

“싸물어, 좀. 드라마 찍냐!”

은한이 찹찹, 파비우의 입술을 때렸다.

“그런 일 아니거든. 그리고 그 새끼 첫사랑 나거든. 옛 여자친구 없다고. 그냥 존나 나쁜 일이었거든.”

“뭐야. 하니 다 알아?”

“어. 나도 얼마 전에 알았다.”

그 사건을 상기하자 바짝바짝 목이 탔다. 은한이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삼켰다. 파비우가 가늘게 눈을 뜬 채 그를 흘겼다.

“근데 왜 가만히 있어?”

“어?”

“한겨리가 진짜 하니 싫어해서, 미워서 헤어지자고 한 거 아니잖아.”

“…….”

은한이 턱 아래를 벅벅 긁었다. 손톱을 잔뜩 세워 날카로운 자국이 남았다. ‘미워서 헤어지자고 한 게 아니다’라. 그때 한결의 상황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모르지 그건. 백한결만 알겠지.”

“왜 몰라! 어제 처음 본 나도 아는데!”

“와씨. 너 이러기냐? 어? 뉴욕에 있을 때는 나 상처 준다고 그 사람이 싫다느니 온갖 욕은 다 해 놓고 왜 이래?”

은한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파비우가 지지 않고 쿵쿵 발을 굴렀다.

“그건 한겨리가 저렇게 멋찐 남잔지 몰랐을 때 했던 거고. 하니 생각해 봐. 내가 어? 막 한겨리 꼬셔서 섹스하면 어떻겠어?”

“뭐? 뒤질래. 지금 당장 비행기 타고 싶냐? 내가 목만 떼어다가 비행기 태워 줄까?”

은한이 파비우의 멱살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파비우가 짤짤짤 흔들리면서도 헤벌쭉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한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바르게 앉았다. 광대에 열이 찬다. 한겨울에 후끈후끈 아주 난리가 났다.

젠장. 내장까지 다 뒤집혀 탈탈 털린 기분이다.

“뭐, 한겨리가 아니라고 해도 괜찮아.”

“뭐가 괜찮아, 씹새야.”

“가서 다시 꼬셔. 하니라면 꼬실 수 있어.”

“하?”

파비우가 은한의 손을 꼬옥 감싸 쥐었다. 한결 만큼 커다란 손이 참으로 따뜻하다. 은한이 멍하니 그 손을 바라봤다.

“하니. 우리 아직 어리고, 사랑도 잘 몰라. 그래서 실수하고 그러는 거야. 거기다 첫사랑이잖아.”

“…….”

“혹시, 혹시, 혹시 하면 해 보면 돼.”

은한의 눈꺼풀이 느리게 팔랑였다. 혹시. 혹시. 얼마나 많이 해 본 생각인가. 혹시, 단지 화가 나서 제게 헤어지자 한 건 아닐까. 혹시 백한결이 날 만나러 뉴욕까지 온 게 아닐까.

혹시, 백한결이 아직 날 좋아하지 않을까.

“근데…… 내가 걔한테 상처 엄청 많이 줬단 말이야.”

“그래서?”

“어?”

“또 아프게 할 거야? 안 그럴 거잖아.”

“…….”

“근데 왜 걱정해? 한겨리 군대 갔었다며? 한국 군대…… 거기는 감옥 같은 거라고. 이제는 잘못하면 달려가서 안아 줄 수 있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럼 사과할 시간도 많아질까. 바로잡을 기회도 늘어나고? 그렇게 될까. 점점 초점이 사라지는 은한의 동공에 파비우가 덥석 그의 볼을 쥐었다. 통통하게 부푼 입술이 참 귀엽다. 아, 하니가 탑이었으면 내가 꼬셨을 텐데. 아쉽다. 여러 번 생각해도 여전히, 아쉽다.

파비우가 주물주물 은한의 볼을 매만졌다.

“나는 전 남친 네 명이랑 같이 섹스해 보는 게 꿈이야. 혹시 첫 남친이 제일 잘하면 아쉽잖아! 걔 다시 꼬셔서 사귈 거야. 삼십 살 되기 전에.”

“미, 친……놈.”

“허헝.”

파비우가 머지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은한이 부르르 몸을 떨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개방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전 남친 넷을 모아다가 섹스를…….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저런 짓도 꼭 하겠다며 굳게 다짐하는 새끼가 있는데, 그에 비하면 저는 양반이다.

파비우가 자신의 커피를 흔들었다. 얼음만 잘그락거리고 액체는 없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은한의 커피를 뺏어 마셨다. 은한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지라 신경 쓰지 않았다.

쭈욱, 쭉. 파비우는 단 두 번의 목 넘김 만에 커피를 동 냈다. 은한이 텅 빈 커피 컵을 허망하게 주시했다.

“하니.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대사가 있어. 주인공이 사랑 때문에 엉엉 울고 있으면 옆집 사는 친구가 소주 마시면서 꼭 이 말 해 주더라.”

“뭔데?”

“가서 잡아, 기집애얏!”

“……하?”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너 그러다 죽을 때까지 땅 치면서 후회해엣!”

파비우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미성을 흉내 냈다. 입술도 새초롬하게 모은 꼴이 우습기 짝이 없다. 이따금 TV를 돌리다 저런 장면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은한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빨대를 미련스레 빨아 댔다.

아무리 열심히 빨아도 나오는 게 없다. 툭 던지듯 커피를 내려놨다. 파비우가 금세 커피 두 잔을 새로 사 왔다. 새까만 물이 컵 안에 가득 차 일렁인다. 텅 빈 컵은 버려지고 없었다.

그래. 뭐가 문제야. 이미 어그러진 관계 따위, 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

백한결.

내가 너랑 다시 만나야겠다. 일 년 반이 지났는데 아직도 네가 좋은 걸 보면, 못 고쳐. 이거 병이야. 처음부터 시작해서, 태준이 말대로 딸내미 순풍순풍 낳고 깔깔거리며 살아야 편히 눈감고 뒤지겠어.

만나만 봐. 존나게 잘해 줄 거니까. 이제껏 있었던 일. 하나도 기억도 안 나게 온갖 사랑 다 줄라니까.

은한이 흥, 콧김을 뿜으며 빨대를 물었다. 쭉쭉 들어오는 커피가 입안을 담뿍 채웠다.

시럽 한 방울 넣지 않은 커피가 달았다.

* * *

“야. 너희 어디야?”

-우리? 우리 도서관이지. 기말이잖아.

“저녁 안 먹냐?”

-어…… 먹어야 되긴 한데……. 우리랑 먹게?

“그럼 내가 왜 전화했겠어. 인턴 끝나고 못 사준 고기 지금 사 줄게. 셋……, 셋 다 같이 나와라? 어? 나 지금 나가니까 정문 앞으로 나와!”

알겠다는 진우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은한이 덜덜 다리를 떨었다. 말과 달리 그는 이미 정문 앞이었다. 후우, 숨을 길게 뱉으니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벌써 겨울이 왔다.

[하니. 존나 파이팅!]

은한이 십 분 전, 파비우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는 마지막 학기라 3학점만 듣는 미현과 놀러 갔다. 무려 옥 반지를 사고 싶다고 삼청동엘 가셨다. 사극에서 봤는데 꽂혔다나.

파비우를 잘생긴 애완견처럼 취급하는 미현과, 그녀가 예쁜 데다가 한국인인 데다가 욕도 잘해서 좋은 파비우는 영혼의 짝이 된 지 오래다.

덕분에 은한은 아주 오랜만에 종일 과제와 씨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파비우의 조언을 지극히 받들어 ‘백한결 잡기’의 첫째 날이다. 누군가를 마음먹고 꼬시는 건 난생처음이라 쿵쾅쿵쾅 심장까지 뛰어 댔다.

은한이 잠시 파비우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야. 근데 걔를 어떻게 꼬시지?’

‘처음에 어떻게 꼬셨는데?’

‘안 꼬셨어. 걔가 나 좋다고 따라다녔는데.’

‘……오, 갓. 그럼 옛날에 했던 대로 해.’

‘했던 대로? 진짜? 나 막 욕하고 때리고 그랬는데?’

‘……거기에 반한 무언가가 있겠지. 한겨리 취향 아주 신기하다.’

‘뒤진다?’

상기할 필요가 없던 대화였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시간아 가지 마라. 아니야, 빨리 가라. 마구잡이로 뒤섞인 머리통이 엉망이다.

그러는 사이, 공대남 셋이 기다란 다리를 뽐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은한이 작위적인 웃음을 만들었다.

“안녕?”

“엉?”

아 씨바. 안녕은 무슨 안녕이냐. 언제부터 꼬박꼬박 인사를 했다고. 은한이 올렸던 손을 푹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오늘의 한결은 진회색 코트에 베이지색 니트를 받쳐 입었다. 아니 시험기간에 도서관 가는데 코트를 왜 입어, 왜.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이 번호를 따였어, 시팔.

은한이 입술을 삐죽이며 발걸음을 뗐다. 태준이 익숙하게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은한이 시선은 한결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어디 고깃집 갈래?”

“소고기!”

“그래. 가자.”

뭔들 못 사 주겠니. 백한결 입에 들어가는 건데. 은한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많이 먹어.”

“…….”

몸소 집게를 든 은한이 한결의 앞 접시에다 고기를 올렸다.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래도 혹여 모자랄까 싶어 불판 위에 고기는 죄다 한결의 앞으로 대령했다. 사귈 때는 그가 절 이리 챙겨 줬었는데. 저는 그저 오물오물 받아만 먹었다.

아, 나 엄청 별로인 애인이었구나, 반성까지 했다.

“방울아, 우리는?”

태준이 쪽쪽 젓가락을 빨며 울상을 해보였다.

“자, 여기.”

은한이 대충 고기를 집어다 진우와 태준의 앞 접시에 놔 줬다. 진우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분홍빛을 띠고 있는 고기를 집어 들었다. 어찌나 분홍빛인지. 언뜻 보면 생고긴 줄 알겠다. 아무리 소고기라도 그렇지. 이럴 바에는 육회를 먹지…….

“방울아. 우리가 싫으면 그냥 말로 해. 굳이 돈까지 써 가면서 이렇게 상처를 줘야겠니?”

“뭐래. 얼른 먹어. 냉면이랑 볶음밥도 시켜 줄게.”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진우와 태준은 덜 익으면 어떠냐고. 어차피 소고긴데. 레어라 생각하고 먹자며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남자 넷이서 먹는데, 고기 6인분은 우습다. 딩-동. 벨을 누른 은한이 추가로 꽃등심 4인분을 주문했다. 태준이 평소 자주 가던 삼겹살집과는 사뭇 다른 벨소리라며 낄낄댔다.

“맛있어? 더 먹고 싶은 건 없고?”

테이블에 바짝 붙어 앉은 은한이 한결에게 물었다. 느릿하게 젓가락질을 이어 가던 한결이 은한을 뚫어지라 주시했다. 깊은 눈매에 당혹과 의문이 가득하다. 은한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기 한 점을 더 한결의 앞 접시에 올려놨다.

아. 시발. 꼬시는 게 존나 힘든 거구나. 계속 처 웃어서 광대에 경련이 일 듯했다.

그래도. 시작하면 끝을 봐야지. 내 기필코 너랑 다시 밤새도록 떡치는 사이가 되고 말 거야. 흥, 콧김을 뿜은 은한이 열심히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곧 불판과 하나가 될 것처럼 고기 굽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큼지막한 손 하나가 집게를 부드럽게 빼앗아 갔다.

“너는 왜 안 먹어.”

한결이었다. 불판을 몇 번 뒤적이던 집게가 잘 익은 고기를 집어 은한의 앞 접시로 다가온다. 은한이 맹한 얼굴로 그걸 쳐다봤다. 한결은 그것으로 모자라 소금과 쌈장까지 그의 앞으로 밀어 줬다. 음식을 짜게 먹는 은한을 알아서였다.

은한의 입꼬리가 꿈틀꿈틀 움직인다.

“어! 먹을게!”

고기에 소금을 담뿍 찍은 은한이 입안 가득 고기를 욱여넣었다. 사르르 뿜어져 나오는 육즙이 천상의 맛이다.

식사는 길었다. 고기를 시키고, 볶음밥도 먹고, 냉면까지 먹었다. 못 움직이겠다며 의자에 늘어진 태준을 끌고 계산까지 마쳤다. 은한은 삼십만 원 돈이 나갔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못해도 십만 원 치는 한결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걸로 충분했다.

태준이 고기 냄새를 떨쳐낸다며 푸다닥 푸다닥 팔을 휘저었다. 쯧쯧 혀를 찬 진우가 카운터에 비치된 페브리즈를 그에게 난사했다. 태준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페브리즈도 좋은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그렇게 느껴져!”

“미친놈…….”

태준을 밀어낸 은한이 만세를 했다. 진우가 온몸에 고루고루 페브리즈를 뿌려줬다. 핑그르르 한 바퀴를 도니 꿉꿉한 고기 냄새가 사라지고 은은한 다우니향이 퍼졌다.

네 사람은 페브리즈 한 통을 동낼 듯 뿌려 대다가 직원의 눈초리에 쭈뼛쭈뼛 가게를 나섰다. 겨울은 해가 짧다. 이제 고작 일곱 시거늘 하늘이 별 하나 없이 새까맸다.

“방울아, 잘 먹었다. 우리도 취직하면 목구멍까지 소고기 넣어 줄게.”

“오냐. 너희 다시 도서관 가지?”

목 끝까지 두툼한 점퍼를 올린 은한이 공대남 셋에게 물었다. 진우가 열람실에 자리를 맡아 뒀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갈래. 나 시각매체론 공부해야 해.”

“그래. 가자. 어차피 우리 책상 4인용이야.”

씨익 웃은 진우가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 했다. 하지만 작은 몸뚱이가 쏙 빠져나가 중심을 잃고 휘청여야 했다. 포르르 걸음을 빠르게 한 은한이 한결의 옆에 붙어 섰다. 한결이 경련하는 동공으로 은한을 응시했다. 은한이 눈을 접으며 특유의 웃음을 짓는다.

“너는 기말고사 몇 개 치냐?”

“……어?”

“기말고사. 몇 개치냐고.”

“아…… 나, 다섯……개.”

“와. 많이 치네. 나는 전부 과제 대체라서 두 개밖에 안 쳐. 과제 존나 많아. 토 나와. 그래도 미현이가 작년에 했던 거 줘서 숨 쉴 틈은 있어.”

통통한 입술이 아래위로 열심히 움직인다. 한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정쩡한 표정을 했다. 그래도 듣고 있다는 반응으로 간간이 고개를 끄덕여 주긴 한다.

뒤에서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태준이 진우에게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까, 진우야.”

“……나도 모르겠다, 태준아.”

“방울이가 어디 아픈 걸까, 진우야.”

“그건 아닌 것 같다만, 나쁜 일은 아니니까 일단 두고 보자, 태준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은한과 한결을 따라 걸었다. 아주 오랜만에, 네 사람이 함께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기다란 책상에 금빛 조명등이 하나씩 켜진 열람실은 꽤 많은 학생들이 앉아 있음에도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시험 기간이라 빽빽한 도서관이 후끈후끈하다. 그들의 머리에서 뿜어지는 열이리라.

은한이 쭈뼛쭈뼛 공대남 셋을 따라갔다. 은한은 대개 도서관에 오면 피시실이나 노트북실에 있었다. 책보다 모니터를 들여다볼 일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공대남 셋의 자리는 깊숙한 곳에 있었다. 나름 명당에 자리를 잡은 걸 보니 오전부터 들어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두 자리씩 마주 보고 있는 4인석. 한결이 가방과 외투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옆자리를 치워 냈다. 은한이 샐쭉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싸. 백한결 옆자리.

아무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었다. 가방에서 필기구와 두꺼운 전공 책을 꺼냈다. 노트도 꺼내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보려 했는데 벌써 진이 빠졌다.

식사 내내 한결의 눈치를 본 데다가, 어제는 파비우와 놀아 주고 밤새워 과제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정체되어 있어 쇳덩이처럼 무거운 열람실 공기는 아무리 들이켜도 적응이 안 됐다.

하지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어쨌든 당장 다음 주가 시험이고, 미리미리 해 놔야 다른 과제에 할당할 시간이 늘어나니까. 형광펜을 들고 교수님이 집어 주셨던 부분들을 다시 체크해 갔다.

인쇄 매체는 인상(印象)이 지속되며, 매체 자체가 보존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되풀이하여 보이는 이점이 있고, 기억효과가 높고 설득력도 큰 특색을 가지고 있다.

당연한 걸, 이미 알고 있는 걸 참 길게도 늘어트려 놨다. 은한이 부루퉁히 입술을 부풀리며 꼭꼭 활자를 씹어 먹었다.

시계조차 무음인 열람실은 사그락사그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이따금 누군가가 기침하는 소리, 딸각이는 펜 소리로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은한은 어느새 책에 푹 빠졌다. 흘끔흘끔 제 옆선을 훔쳐보는 한결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약 세 시간 동안 진우는 네 번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태준은 자판기 음료 두 개를 뽑아 마셨다. 오로지 은한과 한결만 엉덩이 한 번 떼지 않고 책에 파묻혀 있었다. 막 열 시를 지났을 무렵, 한결이 주섬주섬 가방 안을 뒤졌다.

새까만 글씨에서 빠져나온 은한이 한결을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한결이 담뱃갑을 들어 보였다. 은한이 흘깃 앞에 앉은 태준과 진우를 살폈다. 정수리만 보인 채로 알 수 없는 수식을 쓰고 있는 두 사람은 폭탄이 떨어져도 모를 듯했다.

조용히 일어서는 한결에 은한이 따라 몸을 일으켰다. 한결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봤지만, 그는 생글생글 웃어 주기만 했다.

열람실을 나오니 잠시 잊고 있던 소음이 마구잡이로 들이닥쳤다. 은한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와. 열람실 개 답답하다, 진짜.”

“어…… 좀, 그렇지.”

한결이 주머니에 쑤셔 넣은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코끝에서 흔들거리는 은한의 금발에 딱 까무러치기 직전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무슨 생각으로 제 옆에서 알짱거리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물어볼까, 고민했지만,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유난 떤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참은 게 수십 번이다. 저 작은 머리통에 비집고 들어가 낱낱이 살펴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혹시나, 혹시나 했는데. 은한은 도서관 밖 흡연 장소까지 한결을 따라왔다. 한결이 느릿하게 담배를 물었다. 시험 기간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파비우에, 은한까지 겹쳐 근래 달고 살았던 담배임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나도.”

“어?”

“나도 줘.”

은한이 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맡겨놓은 것도 아니고, 달라는 말이 참 쉽게도 나온다. 뭐, 그렇게 버릇을 들인 게 저라 딱히 불만은 없었다.

“담배 끊었다며.”

“다시 피워.”

“…….”

한결이 담뱃갑을 통째로 은한에게 내밀었다. 탁탁 담뱃갑 바닥을 두드린 은한이 하얀 담배를 꺼내 문다. 한결이 라이터도 내밀었다. 은한이 가만히 그것을 응시했다. 빙글빙글 웃던 얼굴이 잠깐 어그러진다.

붙여 달라는 건가. 대충 넘겨짚은 한결의 엄지가 라이터 휠을 세차게 돌렸다. 새빨간 불빛이 은한의 얼굴 위로 일렁였다. 하지만 은한은 멀뚱히 불을 보고만 있다.

“……안 붙여?”

기다리다 못한 한결이 물었다. 은한이 한결의 담배 끝에 매달린 불씨와 타오르는 라이터 불을 번갈아 봤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라이터 불에 담배를 가져다 대고 흡, 숨을 삼킨다. 은한의 담배에도 붉은 불씨가 타올랐다.

쿨럭, 세게 연기를 빨아 당긴 은한이 기침을 토해 냈다. 어깨를 움찔 떨 만큼 놀란 한결이 저도 모르게 그의 등을 두드리려 손을 올렸다가 굳었다.

“콜록, 콜록.”

은한의 잔기침은 꽤나 오래 이어졌다. 한결의 손이 안절부절못하며 허공에 나돌았다. 간신히 목을 가다듬은 은한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와. 오랜만에 피니까 적응 안 된다.”

“다시 피운다며?”

“어…… 어. 지금부터 다시 피워.”

“그게 무슨…….”

한결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 은한의 붉어진 얼굴이 보기 싫다. 꽉꽉 필터를 씹던 그가 구석에 있는 자판기에서 사이다를 뽑아 왔다. 그리고는 뚜껑까지 따 은한에게 내민다.

은한이 연기를 뿜으며 한결의 손에 들린 사이다를 노려봤다.

“너는 아무한테나 이렇게 다정하냐?”

“어?”

“됐다. 아무것도 아니야. 땡큐.”

사이다를 낚아챈 은한이 꿀꺽꿀꺽 그것을 삼켰다. 가슴에 얹혀 있던 연기가 쑥 아래로 내려간다.

두 사람은 조용히 담배만 태웠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를 멍하니 관찰하던 은한이 입술을 뗐다.

“나 천체와 우주 드랍했다?”

“……왜?”

“중간고사 18점 맞아서.”

“…….”

“씨발 존나 뭐라는 건지. 교수님이 외계어 하셔. 막 세모랑 삼지창이 싸우는 수식어가 끝도 없이 쏟아지는데. 와, 교양이 교양 수준이 아니야. 천체와 우주 A+받는 애들은 내일 당장 은하계로 떠나도 되겠더라.”

은한의 입술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결이 초점 없는 동공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그를 구경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의인데, 두 시간 동안 몸을 뒤틀며 앉아 있었겠지. 당장 뛰쳐나가고 싶으면서도 평점이 걱정돼 볼펜 끄트머리를 씹었을 터다. 그런 그를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푸흡.”

“비웃냐?”

“크흐흑.”

웃음이 터졌다. 아주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한결의 웃음소리가 시린 겨울바람 사이로 흩어진다. 은한이 눈을 부라렸다.

“이 새끼가. 존나 아픈 마음을 터놓고 있는데. 비웃네?”

“왜 그랬어. 열심히 들으라고 내가 수업도 옮겼는데.”

“그러게. 그냥 네가 들었어야 했어. 나는 지구가 1,609km/h로 자전하는 걸 알면 B는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지.”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

“별거야.”

“…….”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도 안 잊었어. 못 잊었어. 툭, 담배를 내던진 은한이 한결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예쁜 호선을 그리는 눈매, 살풋 벌어진 입술, 동그란 광대. 새까만 밤하늘을 지배한 달보다도 환한 미소였다.

덕분에 쿵- 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을 추스르는 건 오롯이 한결의 몫이었다.

바람에 담배 냄새를 털어 냈다. 그로 모자라 교내 카페에서 태준과 진우 몫의 커피까지 샀다. 열람실에 들어섰을 땐 열한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끙, 기지개를 켠 은한이 책에 코를 파묻었다. 아니 파묻으려 했다.

“…….”

마이쮸에 곱게 붙은 분홍 포스트잇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터다. 은한이 집요하게 포스트잇을 주시했다. 누군가가 버리고 갔나, 하기엔 뜯지도 않은 마이쮸다. 흘깃 태준과 진우를 봤더니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방정을 떨고 있다.

“…….”

은한이 포스트잇에 빼곡히 적힌 글자를 읽었다. 지루한 전공책을 읽다 동글동글한 글을 보고 있자니 절로 입꼬리가 치솟았다.

-안녕하세요.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우입니다. 들어오실 때부터 눈을 뗄 수 없었어요. 한겨울에 벚꽃이 휘날려서요. 세상에 없는 줄 알았던 이상형을 열람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공부하느라 바쁘신 거 압니다. 혹여 잠깐 시간이 나시면 연락 주세요. 제발요. 나쁜 사람 아니에요. 010-XXXX-XXXX.

손바닥보다 작은 포스트잇에 열심히도 활자를 욱여넣어 놨다. 은한은 포스트잇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가끔 받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정성 어린 쪽지는 처음이다. 그것도 백한결 앞에서. 나이스 타이밍도 이런 나이스가 없다.

야. 나 아직 안 죽었어. 나 아직 잘생겼나 봐.

은한이 포스트잇을 전공 책에 옮겨 붙이고 마이쮸를 깠다. 포도 맛. 어쩜 내 취향에 딱 맞는 걸 사셨네.

주위를 휘휘 둘러본 진우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존나, 아니 아주- 귀여우시게 생겼어.”

태준이 말을 더한다.

“연보라색 후드 입고 있었어.”

“머리는 이렇게 올려 묶었고.”

“너 나가자마자 와서 두고 우리한테 인사도 하고 갔어.”

어째 쪽지를 받은 은한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그들이다. 은한이 그래? 진짜? 귀여워? 그런 추임새를 넣으며 웃었다. 마이쮸를 제 입에도 하나 넣고, 진우와 태준 그리고 한결에게 하나씩 나누어 줬다. 벌써 반이나 동났다.

입안에 퍼지는 달큰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형광펜을 든 은한이 핸드폰 번호 열한 자리에 줄을 쳤다. 흐흥. 그렇게 웃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공대남들의 여섯 개 눈동자가 은한의 핸드폰에 박혔다.

“지금 연락하게?”

“지금?”

눈을 땡그랗게 뜬 진우와 태준이 물었다.

“어…… 너무 늦었나?”

보란 듯 화면을 밝혔던 은한이 핸드폰을 뒤집었다. 어차피 연락할 생각은 없다. 백한결 눈치 보기도 바빠 죽겠는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이미 제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데 연락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리라.

그냥, 한결을 놀리는 거였다. 요란하게 이리저리 변하는 한결의 얼굴이 우스워서.

생각보다 한결을 꼬시는 게, 쉬울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몰래 작게 웃은 은한은 금세 책에 집중했다. 태준과 진우도 다시 정수리를 보였다. 한결만, 은한의 책 가장자리에 붙은 포스트잇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은한이 찌뿌듯한 몸을 뒤틀며 길게 하품했다. 졸리니 검은 게 글씨인지, 하얀 게 글씨인지 구분하기도 힘들다.

풀썩 엎드린 은한이 책에 볼을 비비며 열람실을 훑었다. 지하철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자 꽉 차 있던 책상에 듬성듬성 공백이 생겼다.

그런 은한의 뒤통수를 보고 있던 한결이 책상 위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얼음만 남은 커피 컵, 캔, 구겨진 종이, 마이쮸 포장지, 그런 것들. 한 움큼 쓰레기를 든 한결이 끼긱,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한이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볼은 여전히 책에 묻은 채였다.

“버릴 거 없어?”

목소리를 내리깐 한결이 물었다. 은한이 대충 눈만 굴려 책상을 훑었다. 언뜻 봐도 깔끔하게 쓰레기를 정리한 한결이다.

“어? 없는데…….”

“진짜 없어?”

“어. 없어.”

“다시 찾아봐.”

“뭐를?”

“버릴 거.”

“…….”

말은 제게 하고 있는데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은한이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굴렸다. 종착지는, 필통에 붙여 둔 분홍 포스트잇이었다.

뭐야……. 귀엽게 왜 이래, 얘?

은한은 쉽게 한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분홍색 포스트잇이 마음에 안 든다 이거지. 자기는 여자한테 번호도 막 주고 다니는 주제에.

은한이 소리 없이 콧방귀를 끼었다. 봐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제가 철저히 을의 처지임에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없어. 버릴 거.”

“…….”

한결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리고는 조금 짜증이 섞인 걸음걸이로 열람실을 나간다. 넙데데한 그의 등짝을 보고 있던 은한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아 씨바. 너무 귀엽잖아. 어쩌지. 뽀뽀해 주고 싶다.

그런 두 사람을 오롯이 목도하고 있던 진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생긴 건 안 그래서 은근히 악랄한 은한이다.

“한결이 너무 괴롭히지 마라, 방울아.”

“내가 뭐.”

은한이 온 얼굴에 주렁주렁 웃음을 매단 채 대꾸했다. 진우가 쯧, 혀를 차며 짐을 쌌다. 언제부턴가 목을 고꾸라트리고 자고 있는 태준을 깨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 시험 기간이라 조용한 캠퍼스엔 싸늘한 바람만 불었다. 진우가 평일이라 아직 지하철이 있는데, 택시를 타고 싶다며 중얼거렸다. 태준이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택시를 타자고 졸랐다. 한결은 뭐든 괜찮다며 그들을 방관했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무언갈 고민하던 은한이 한결의 팔꿈치를 잡아챘다.

“백한결.”

“어?”

“내가 데려다줄까?”

“……어?”

“요즘 밤길 위험하잖아. 내가 데려다줄게.”

“…….”

꿈벅, 꿈벅. 한결이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표정을 했다. 180이 훌쩍 넘는 스물세 살의 건장한 남자가 밤길이 위험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흔한 걸까.

“방울아. 공부 너무 하더니 조금 미쳤니?”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한결에 태준이 대신 답했다. 답보다는 물음이었다. 비난을 가장한 물음. 은한이 벅벅 뒤통수를 긁었다. 그의 보드라운 금발이 아무렇게나 헝클어졌다.

“그치? 이건 좀 오바긴 해?”

허허허. 어색하게 웃는 모양새가 저도 퍽 멋쩍은가 보다.

“그럼 그냥…… 갈게. 잘 가라.”

공대남 셋과 길을 함께하던 은한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했다. 좀 먼 곳에서 자취할걸. 그럼 같이 택시를 타던, 지하철을 타던 했을 텐데.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아쉬움이 들었다.

도서관에 있을 땐 그리 잠이 오더니 지금은 또 말똥하다. 파비우는 호텔에 들어갔으려나. 술이나 마시자고 할까. 오늘 백한결 꼬시기 검토도 받을 겸.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도는데, 툭.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왔다. 한결이었다.

“데려다줘.”

“어?”

“데려다 달라고.”

한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몇 번 분주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던 은한이 활짝 웃음을 피웠다.

“그래!”

쿵쾅쿵쾅 심장이 뛴다. 칼바람이 부는 초겨울인데. 꽃이 만개한 봄이라도 되는 듯했다. 어디서 꽃내음이 흘러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은한이 냉큼 한결의 옆에 붙어 섰다.

“우리는?”

얼빠진 진우가 물었다. 은한이 왜 그걸 저에게 묻느냐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 한두 번 가냐? 애도 아니고. 알아서 가라. 안녕.”

이왕 가는 거 빨리 좀 가 주면 좋겠는데. 은한이 히죽 웃으며 진우와 태준을 쫓아냈다.

진우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태준을 데리고 후다닥 사라져 줬다. 이쯤 되면 큐피드가 따로 없다. 다음에 거하게 술 사 줘야지. 은한이 다짐했다.

“배 안 고파? 야식 먹을래?”

헤실헤실. 웃음을 감추지 못한 은한이 물었다. 한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까 고기 많이 먹어서 배불러.”

“아…… 그래?”

아쉽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덜 먹일걸. 얄팍한 후회를 했다.

지하철에서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학교, 시험 하다못해 날씨 뭐 그런 거. 대화 지분의 90퍼센트가 은한의 것이었지만, 어쨌든 대화이긴 했다.

한결의 집은 지하철로 고작 네 정거장밖에 안 된다. 머릿속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살갗으로 체험하는 건 처음이다. 단 한 번도, 한결의 집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

은한은 또 반성했다. 데려다준다고, 뽀뽀하고 싶다고, 혹은 더한 걸 하고 싶다고. 무슨 명목이든 매일같이 제 집에 드나들었던 한결인데. 정작 저는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

한결의 아파트는 정원이 넓었다. 잘 관리된 정원을 가로지르면 겨울임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은한이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녹색과 붉은색이 규칙적으로 섞여 있는 보도블록의 녹색만 밟으며.

주홍빛 가로등에 비치는 녹색은 꼭 보라색처럼 보였다. 바닥에 시선을 꼽은 채 걷고 있는데, 문득 온전한 녹색 보도블록이 시야에 들어왔다. 은한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얀 가로등 하나가 어둠을 헤치고 있다.

“……고장 났었는데, 잘못 갈았나 봐.”

한결이 그를 따라 가로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은한이 뒤를 돌아 이제껏 지나쳐 왔던 가로등을 살폈다. 일제히 주황색을 뿜고 있는데, 이 가로등만 새하얀 빛을 발산한다.

은한이 씨익 입술을 길게 찢었다.

우리 집 앞에 하얀 가로등이 없어졌다 했더니. 여기 있었네.

살풋 눈을 감은 은한이 그리웠던 백색 등을 한껏 머금었다. 다 잘될 것 같다. 제가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걸, 그러니까 한결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토닥여 주는 듯했다.

그런 은한을 보던 한결이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은한.”

“엉.”

은한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답했다. 올 것이 왔구나. 속이 울렁거린다. 어떤 비수가 제 가슴팍에 꽂힐지 가늠이 안 됐다.

“너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우우웅- 우우웅-

한결이 말을 하기 시작하길 기다린 듯, 은한의 핸드폰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은한이 흘끔 핸드폰을 살폈다.

[파비우]

지금 상황에서 썩 달갑지 않은 존재다. 어색하게 미소 지은 은한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한결이 마땅찮은 낯으로 입술을 뗐다.

“전화 받아.”

“안 받아도 돼.”

“괜찮아. 받아.”

“…….”

은한이 어쩔 수 없이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아, 받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께름칙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하니! 한겨리 꼬셨어?!

들리면 안 될 소리가 우렁차게 쏟아진다. 길거리에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겨울의 자정. 파비우의 목소리가 잠잠하던 공기를 와장창 뒤흔들었다.

“하하, 하……. 꼬시긴…… 누굴…… 꼬셔…….”

뒤늦게 꾹꾹 소리를 줄였지만 이미 한결의 표정이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지고 난 후였다. 은한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이미 찔끔 눈물을 흘렸다.

-뭐야? 암것두 안 해써? 나 오늘 일부러 하니랑 안 놀았는데? 뭐했어? 바보야?

“바보 아니라! 고……. 일단 끊어.”

-뭐했는데! 알려 줘!

“아 지금 같이 있으니까 끊으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 은한이 신경질적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콱콱콱 두드렸다. 으…….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은한의 얼굴이 엉망이다. 두 손으로 벅벅 볼을 문지른 그가 웅얼웅얼 말을 먹었다.

“파비우가…… 미현이랑…… 술을, 마셨나 봐…….”

“…….”

“아닐……수도, 있고…….”

아. 씨발. 나가 죽을까. 은한이 참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망했다. 쫄딱 망했어.

한결의 시선이 은한의 얼굴 위로 난잡하게 흩뿌려졌다. 볼 안쪽을 혀로 쓸어내리던 그가 입을 뗐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어?”

“없어? 없으면 가고.”

“아니야. 있어. 되게 많아.”

은한이 다급함에 한결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한결은 물끄러미 그것을 보면서도 손을 빼내지 않았다. 제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은한이 먼저 손을 가져갔다. 한결은 찰나지만 닿았던 은한의 온기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응.”

“…….”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뒤튼다. 대충 그가 할 말을 짐작한 한결의 광대가 마구 꿈틀거렸다. 다행히 긴장한 은한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이렇게 기꺼워해도 되나 싶다. 제가 은한에게 던진 폭탄이 몇 개고, 꽂은 비수가 몇 갠데. 주제도 모르고 손바닥이 간지럽다.

은한이 잡아먹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결은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힘들긴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제가 먼저 말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후웁, 숨을 잔뜩 들이킨 은한이 간절히 입술을 뗐다.

“백한결.”

“응.”

“내가 너…….”

“응.”

“너…….”

“응.”

은한이 입술 끝에 힘을 줬다. 뒷덜미를 긁기도 하고, 관자놀이를 매만지기도 했다. 꽉 눈을 짓이기듯 감더니 와다다- 수십 번이나 되뇌었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좋아해. 아직도, 좋아해. 여전히 좋아해. 못 잊겠어. 내가 진짜 노력했거든. 근데 아직도 네가 좋아. 미치겠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다못해 자면서도 네 생각밖에 안 해.”

“…….”

“내가 잘못한 거 알아. 너 외롭게 둔 것도 미안해. 늦었지만, 한 번만 기회 더 주라.”

진짜, 잘 할게. 내가 너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닐 거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전화할 거고, 숨 들이쉬고 내쉬는 것까지 보고할 거야. 애절할 정도로 이어지는 은한의 말이다. 한결이 주머니에 숨긴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은한이 한 발자국 한결에게 다가왔다. 고요한 밤사이로 은한이 숨자락이 밀려온다.

“좋아해.”

“…….”

“진짜…… 좋아해, 한결아.”

어느새 동그란 눈매 가득 그렁그렁 습윤한 물기가 차올라 있다. 은한 딴에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고백은 항상 떨리고 이유 모를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홀딱 벗겨진 채 하얀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

한결은 아주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애가 탄 은한이 동동 발을 구를 정도였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말을 해 줘야지. 물론 전자의 대답은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어…… 싫냐? 아무래도 싫지? 그래, 싫을 수밖에 없지…….”

이상한 말이 입 밖으로 뿜어진다. 메슥거릴 정도로 그의 대답이 간절해 어쩔 수 없었다.

한결이 드디어 입을 뗐다.

“포스트잇.”

“……어?”

알아듣기 힘든 단어였다. 말도 아니고, 단어. 은한이 살풋 미간을 구겼다.

“버릴 거야?”

“…….”

은한이 곰곰이 그의 말을 되씹었다. 포스트잇, 버릴 거야?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분홍 포스트잇이 퐁,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한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도서관 나올 때 버렸어. 모태 게인데. 연락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그래?”

힌결이 재차 확인했다. 은한이 한 번 더 고개를 주억였다. 손톱만큼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다.

한결의 손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은한의 머리칼로 향했다. 은한은 가만히 서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 커다란 손이 툭, 머리 위에 얹어졌다. 그리고 슥슥, 낯선 금발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흐트러지는 촉감은 그대로다. 동그란 머리통도, 가느다란 머리카락도.

금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이 얇은 귓바퀴를 지나 보드랍고 말랑한 볼에 정착했다. 은한이 감춰뒀던 버릇처럼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한 번만, 안아 보자.”

한결이 말했다. 은한이 사르르 눈을 휘었다. 곱게 접히는 웃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두 번 안아도 되는데.”

“…….”

한결이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은한이 먼저 와락 그의 품에 달려들었다. 마주 닿는 심장 소리가 감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정감을 제공한다.

은한이 꼬옥 한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결 역시 힘주어 은한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하얀 가로등 아래에 선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의 온기를 들이키고 있었다.

지구의 반을 돌았다.

한 번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두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무수한 눈물을 흘렸고, 웃음은 아주 적었다.

감당할 수 없이 쏟아지던 외로움. 그 위로 흩뿌려진 죄책감과 미안함. 그 악랄한 감정으로 많은 상처와 조금의 성장을 겪었다.

함께 스무 살, 스물한 살을 보냈던 우리는 각자 다른 스물두 살을 보냈고,

드디어 스물셋.

생애 두 번째 연애는 또다시 함께하게 됐다.

첫사랑이, 다른 이름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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