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네가 그리울, 거야(2권) (7/11)

07. 네가 그리울, 거야

우웅, 우웅. 몸을 떠는 핸드폰이 잠을 방해한다. 은한이 더듬더듬 이불 속을 휘저었다. 잡히는 건 온통 한결뿐이다. 좀 커다란 덩치가 아닌지라. 결국 핸드폰을 찾지 못해 눈을 떴다. 한결도 제 옆에 있고, 공모전도 물 건너갔고. 연락 올 곳이 없는데.

은한이 가느다란 시야로 간신히 핸드폰을 찾아냈다. 반짝이는 핸드폰에는 익숙지 않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란…… 선……배님. 유란 선배? 은한의 동공이 활짝 갰다. 부재중 통화가 떠 있는 걸 못 본 체하고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유란선배님: 야, 자냐.]

[유란선배님: 자? 진짜?]

[유란선배님: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자.]

[유란선배님: 어쭈. 전화도 안 받네?]

[유란선배님: 나 과방이거든? 지금 당장 노트북 들고 텨와라.]

은한이 꿈뻑꿈뻑 같은 메시지를 네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과방, 노트북, 텨와……. 잠에 취한 정신이 제대로 된 사고를 어려워했다. 그녀가 절 부르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노트북을 들고 갈 순 없었다.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두툼한 팔의 주인과 종일을 함께 보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제가 지금 친구랑 있어서요. 내일은 안 될까요?]

은한의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였다. 중간중간 오타도 나서 평소보다 시간이 곱절은 걸렸다. 답장은 보낸 시간이 민망할 정도로 빨리 왔다.

[유란선배님: 공모전 안 낼래? 당장 텨와라?]

공모전. 썩 반갑지 않은 세 글자에 은한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한결이 기껏 운동화로 덮어 놓은 악몽이 다시금 떠올랐다. 공모전을 내라니. 유란이 절 조롱하는 건가, 생각했다.

저 공모전 못 내는데요. 그리 답을 보내려 화면을 두드리고 있는데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유란선배님: 도와줄게. 오늘 밤새우면 제출일까지 낼 수 있어. 빨리 와.]

“…….”

은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낼 수 있어. 어떻게? 정말? 하지만 교수님이 내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또 모른다. 유란은 교수님들에게 맹목적인 사랑과 믿음을 받는 제자였다. 그녀가 진한 입김으로 교수님의 판단을 바꿔 놓았을지도.

만약 그렇다면, 제 디자인을 제출할 수 있다. 거기다 유란이 직접 도와주겠단다. 은한의 심장이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방울아……?”

보스락거리는 은한에 한결이 눈을 떴다. 은한은 차마 그의 부름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칫솔을 물었다. 그 채로 소파에 널브러진 바지를 주워 입기 시작했다.

“방울아?”

양말도 신고. 노트북, 노트북 어디 있지. 마우스! 충전기도 챙기고, 어…… 이어폰은? 아 됐어. 필요 없어. 은한이 가방을 멘 채로 입을 헹궜다. 그 후 모자까지 눌러쓰고서야 한결의 존재를 상기했다.

부스스한 몰골의 한결이 맹한 낯으로 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한이 침대에 걸터앉아 한결의 손을 잡았다. 한결이 자연스레 손가락을 얽어 왔다.

“어디 가?”

“나 공모전 낼 수 있을지도 몰라.”

“엉?”

“유란 선배가 도와준대. 제출이 이틀 후까지라서 내려면 지금 가봐야 해.”

“…….”

“진짜 미안. 휴가까지 나왔는데. 같이 못 있어 줄 것 같아.”

한결의 눈꺼풀이 분주하게 일렁였다. 그는 최선을 다해 은한의 말을 이해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어찌어찌 공모전에 나갈 수 있게 됐으니 준비하러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 같았다.

“지금? 밥도 안 먹고?”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두 달 만에 보는 건데. 재회가 너무 짧다.

“미안해. 나 엄청 열심히 한 거라서 그냥 이렇게 날리기 싫어.”

“……언제 올 건데? 나 여기 있을게.”

“어……. 오늘 학교에서 밤새울 거야. 어쩌면 내일도.”

“…….”

한결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또 언제 은한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의 아쉬움이 너무 컸다.

“한결아. 미안해.”

“……괜찮아.”

한결이 고개를 저었다. 은한에게 사과를 듣고 싶진 않다. 그의 죄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 애당초 죄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은한에게 중요한 일이면 저에게도 중요하다. 한결은 꾸역꾸역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최면을 걸었다.

삐뚤어진 은한의 모자를 바르게 고쳐 씌웠다. 방금 일어났음에도 신기할 정도로 잘생긴 은한이다.

“배고파서 어떡해.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일찍 잘 걸 그랬다. 피곤하겠어.”

“아니야. 하나도 안 피곤해. 밥은 과방에서 시켜 먹으면 돼. 너는…… 어…….”

“나는 집 가서 밥 먹을 거야. 오랜만에 집밥 먹고 좋지.”

“…….”

한결이 푸스스, 웃는다. 그를 응시하던 은한이 와락 그의 품에 달려들었다. 잠깐 굳었던 한결이 꼬옥 은한을 끌어안았다.

“한결아, 좋아해.”

“……그래.”

“진짜, 좋아해.”

“응.”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의 온기를 탐하던 두 사람은 한결이 먼저 몸을 일으키면서 떨어졌다. 은한이 발을 질질 끌며 현관으로 향했다. 하얗게 반짝이는 새 운동화가 은한을 기다린다. 은한은 바쁜 순간에도 조심조심 발을 집어넣었다. 한결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은한은 이제 집을 나설 준비를 완전히 끝냈다. 그가 답지 않게 우물쭈물 말을 먹었다. 한결은 독촉도, 채근도 하지 않으며 잠자코 그를 마중했다.

은한이 신발 끝으로 톡톡 바닥을 두드렸다.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저도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입도, 발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갈게.”

“응.”

“……전화해.”

“알았어. 얼른 가.”

살짝 뒤꿈치를 든 은한이 한결의 턱에다 쪽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는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듯 급하게 문을 나섰다.

도어락이 쓸데없이 맑은소리를 내며 잠겼다. 한결은 한참이나 현관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혹여 은한이 챙기지 못한 무언가를 가지러 돌아올까 봐.

하지만 끝끝내 은한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결이 작은 집에 홀로 남았다. 움직이는 거라곤 이른 아침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뿐이다.

외로울 정도로,

적막했다.

유란은 은한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공모전에 나갈 수 있게 해 준 것만도 절을 할 판인데, 달칵달칵 마우스를 움직일 때마다 입이 쩍 벌어졌다. 클릭 한 번에 훅훅 바뀌는 일러스트가 꼭 마법 같았다.

“소스 안 찾냐. 멍 때릴 시간 없을 텐데.”

“네? 네!”

화들짝 놀란 은한이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앱 디자인은 생각보다 신경 쓸 게 많다. 고작 750x1334 픽셀에 불과한데 아이콘 하나, 반응 동작 하나, 각양각색의 메뉴, 로그인 창, 하다못해 홈 버튼과 종료 버튼까지 추구하는 기능이나 분위기에 맞게 디자인해야 했다.

‘터치하면 이미지를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혹은 ‘터치하세요’ 그런 공지를 쓰는 데도 폰트의 크기, 위치, 색깔을 한 시간씩 고민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화면이 수십 개나 필요하다는 거였다. 거기다 태블릿 버전까지 만들어야 한다.

은한이 뻑뻑한 눈두덩을 꾹꾹 짓눌렀다.

“선배님.”

“왜.”

“저 할 수 있을까요.”

“못 할 것 같으면 집에 가.”

“…….”

“널 위해 열렬히 봉사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할 말이냐.”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후웁. 숨을 잔뜩 들이마신 은한이 마우스를 고쳐 쥐었다. 그때, 핸드폰이 눈치 없이 진동했다. 은한이 억 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흘끔 유란의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 어떠한 꾸지람도 없었다.

은한이 시선만 내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한결이었다.

볼캡을 눌러쓴 그가 화면 가득 차 있다. 배경으로는 익숙한 벽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모닝엔젤: 집 가다가 할머니 송충이 눈썹 봤다.]

[모닝엔젤: 기념으로 셀카 찍었어.]

[모닝엔젤: 잘생긴 내 얼굴 보고 힘내.]

[모닝엔젤: 방울이 파이팅.]

은한이 잠시 넋을 놓았다. 멀뚱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까짓 공모전, 얼마든지 완성해 주마.

실실 미소를 흘린 은한이 가볍게 답장을 보냈다.

[누구 애인인지 존나 잘생겼네.]

그리곤 모니터에 집중했다. 붕 떠오른 기분에 흥얼흥얼 알 수 없는 노래가 입술 새로 삐져나왔다. 앞으로 48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죽치고 있어야 함에도 만개한 웃음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좋냐?”

유란이 물었다.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은한이라.

“네.”

은한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뭐가 그렇게 좋냐?”

“전부요!”

공모전도, 선배님도 다 좋아요. 물론 백한결이 가장 좋지만. 은한이 뒷말을 삼켰다. 유란이 미친놈 보듯 흘끔대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틀간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완성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은한의 마음에 너무할 정도로 들었다. 인쇄해서 집 전체를 도배하고 싶을 정도였다.

“됐네. 인쇄 어디서 하는지 알지?”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중에 밥 사.”

“그럼요!”

유란에게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디자인 제출을 완료하고, 동기들과 술을 마셨다. 코가 삐뚤어지게 취해서는 이틀 동안 잠만 잤다. 그러니 성큼 개강이 다가와 있더라.

2학년 2학기는 별다름이 없었다. 공모전이라는 존재를 곁에 둔 것뿐. 과제와 시험에 치이는 건 똑같았다.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니 짧은 가을이 지나고 금세 또 겨울이 왔다.

한결은 그동안 부지런히 군 생활을 이어 갔다. 부지런하다고 하긴 그렇고, 지루한 시간을 잘 견뎌 냈다는 게 맞겠다. 아직 일병이긴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상병을 단단다. 그쯤 되면 어깨 주무르기는 못 받아도 신병이 병장 빨래를 할 때 자기 양말을 슬그머니 올려 둘 수 있을 정도랬다.

그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고 평화롭게 흘러갔다. 가끔 은한이 학교생활의 힘겨움을 토로했고, 한결은 잠자코 들어 줬다. 또 언제는 한결이 군 생활과 선임에 대한 불만을 토해 냈고, 은한은 함께 비속어를 남발해 줬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3학년은. 정말 사망년이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교수님들은 이제껏 독기를 어디다 감춰 두셨던 건지 듣도 보도 못한 과제를 퍼부었다.

그 틈틈이 동기들은 토익이나 자격증 준비를 시작했다. 은한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학원을 두 개나 등록했다. 일주일에 세 번은 토익 학원을 나갔고, 또 세 번은 컴퓨터 학원을 나갔다. 3D 그래픽과 웹 디자인도 배워야 하는데 엄두도 안 났다.

그렇게 또 반년이 훌쩍 지났다. 어제는 공모전 하나를 제출하고 동기들과 과방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었다. 하지만 세 시간 채 자지 못하고 일어났다. 한결에게서 전화가 올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번뜩 눈이 뜨였다. 제가 이렇게나 한결을 사랑하는구나. 깨달을 때마다 놀라웠다.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미대 앞 벤치에 앉았다. 아무리 이른 여름이라도 아침 바람은 조금 거칠다. 몽롱한 정신을 혼내는 듯했다.

우우웅. 핸드폰이 울리고 익숙한 번호가 나열됐다. 은한이 꾸욱,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공모전 제출은 잘 했어?

“응.”

-몇 시에 잤어?

“어…… 여섯 신가…….”

소리를 지른 적도 없는데 목소리가 죄다 쉬었다. 은한이 꿀꺽꿀꺽 커피를 삼켰다. 이제 카페인 없는 일상은 상상조차 안 됐다.

-또 과방에서 잤어? 집에 가서 자지.

“어어…… 한 시간 뒤에 디자인 교육론 수업이거든. 듣고 집 가서 씻게.”

후다닥 씻고 또 수업을 들으러 와야 한다. 오후 수업 내내 꾸벅꾸벅 졸 모습이 선했다. 은한이 거칠어진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한결이 보드랍다며 조몰락거리는 볼인데. 다 옛말이 돼 버렸다. 오늘 집 가는 길에 팩이나 살까. 다음 주에 휴가 나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바쁘다고 점심 건너뛰지 말고.

“응…….”

-내 방울이 요즘 너무 말랐어.

“미안.”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

근래 그와의 통화 내용은 대부분 걱정과 괜찮다는 말의 반복이었다. 잠도,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하다못해 그가 휴가를 나와도 질퍽하게 뒹군 후에 잠만 퍼질러 잤다.

휴가에 맞춰 2박 3일 내내 시간을 비우려면 아주 많은 것들을 미리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니까 미안하네. 한결이야 같이 있기만 해도 된다고 말은 한다만. 말이 그렇지. 첫 휴가 때는 호텔도 빌려서 놀았는데.

은한이 푸욱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널브러졌다. 높고 푸른 하늘이 애석할 정도로 평화롭다. 대학만 들어가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뭐 때문에 이리 치열하게 사나, 의문이 들었지만 답 없이 그저 의문으로 끝났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하늘이 존나 예뻐서. 너는? 별 일 없어?”

-없지. 매일 똑같은 생활인데. 오죽하면 내가 책을 읽겠어?

부루퉁한 말에 은한이 소박한 미소를 만들었다. 이렇게 쓰잘데 없는 말의 주고받음이 참 좋다. 빡빡한 생활 속에서 잠시 하늘을 바라볼 여유를 제공해 주니까.

“보고 싶다, 모닝엔젤.”

-얼른 나가서 같이 아침 먹어 줄게.

“응. 기다릴게.”

통화는 담백하게 끝났다. 솔직히 더 이어 갈 말이 없었다. 늘 같은 생활의 반복인 한결과, 색다른 변화 없이 비슷한 일상의 저라서. 예전에는 정신없이 통화하다 한결이 선임에게 끌려간 적도 있었는데. 무슨 대화를 그리 했었나, 신기할 정도였다.

“강은한.”

“어…….”

익숙한 목소리에 은한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유란이 서 있었다. 은한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선배님?”

유란은 올 2월에 졸업했다. 그후 아주 유명한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다고 들었다. 스펙도, 성적도, 능력도.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왜 오셨어요?”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냐.”

“그건 아니지만…….”

유란이 버릇처럼 은한의 머리를 흩트렸다. 안 씻었단 말에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허공에 손을 털었지만. 은한이 후드를 뒤집어쓰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너 바쁘니?”

“어…… 한 시간 뒤에 수업 있어요.”

“아니. 그거 말고.”

“네?”

“우리 회사 인턴 구하는데. 너 해 볼래?”

은한이 끔뻑끔뻑, 요란하게 눈을 깜박였다.

“공모전 나가서 상 타는 것보다 인턴 하는 게 훨씬 좋아. 일도 알려 줘, 운 좋으면 적성도 찾고, 프로젝트 따면 공모전보다 훨씬 많이 쳐주지. 배울 것도 많을걸.”

기회라는 게, 이렇게나 뜬금없이 찾아온다. 은한이 빈 캔을 꽉 억세게 움켜쥐었다. 얇은 캔이 쉽게 일그러졌다.

“네! 할래요!”

은한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흰색이 나을까?”

“음…… 격식 차릴 필요 없다고 했다며.”

“그치. 흰 와이셔츠는 너무 딱딱해 보이려나?”

옷장 앞에 쪼그려 앉은 한결과 은한이 고민했다. 머리를 맞댄 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한결이 그리 많지 않은 난방과 셔츠를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은한은 셔츠보다는 후드나 맨투맨을 선호한다. 그래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입자.”

한결이 연하늘색 셔츠를 꺼내 들었다. 깨끗하고 청량한 게 은한의 인상과 딱 맞았다. 은한이 고개를 주억이며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내일은 은한이 첫 출근을 하는 날이다. 공교롭게도 한결은 딱 이틀 전에 휴가를 나왔다.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척척 휴가를 받아 내는 한결이 신기했다. 그래도 한결이 있어서 다행이지. 없었다면 동동 발만 구르고 있었을 터였다.

문득 회사로 면접을 보러 갔던 날이 떠올랐다. 전날 허겁지겁 구매한 수트를 펼쳐 두고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는데. 회사 면접. 디자인 회사 면접. 면접 질문. 면접 예의. 면접 옷. 면접 수트. 면접 머리. 면접 때 하면 안 되는 말. 면접 때……. 그런 걸 검색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면접 당일, 회사에 도착했을 때, 은한은 억 소리 나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회사가 유란의 아버지 회사라고. 끝장나게 디자인을 할 때부터 타고났구나, 어렴풋이 가늠하긴 했지만, 진짜 타고났을 줄이야. 어머니는 해외에서 웹 디자인을 전공하셨고, 아버지는 시각디자인. 고모와 이모 역시 디자인을 전공하고 같은 회사에서 일한단다.

그래. 그러고 보면 유란은 취직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다. 그녀의 위치에서 인턴을 추천하고 사장에게 직접 면접을 보게 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었는데.

이게 말로만 듣던 낙하산이구나. 은한이 넥타이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유란의 빽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뭐가 어떤가. 정사원도 아니고. 요즘은 인맥이 스펙인 세상인데.

회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디자인 회사라는 선입견에 딱 부합하는 인테리어였다. 하얀 벽에 진갈색 데스크. 간간이 걸려 있는 팝아트와 기하학적으로 생긴 조명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직원들은 헤드폰을 낀 채 포토샵을 만졌고, 카페테리아처럼 꾸며진 공간에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태블릿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은한은 태어나 처음으로 ‘사장실’이라는 팻말이 적힌 방에 발을 들여 봤다. 보통 면접을 사장실에서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곧 휘발했다.

‘인턴 하기로 한 학생?’

‘네. 안녕하세요, 강은한이라고 합니다.’

은한이 사르르 눈을 휘며 허리를 숙였다. 사회성 넘치게. 착해 보이게.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젊은이의 패기. 인터넷에서 봤던 단어들이 조잡하게 머리를 뛰어다녔다.

‘유란이랑 같은 학교라고요?’

사장님이자 유란의 아버지인 그는 무려 금발을 하고 있었다. 밝은 녹색 타이를 가감 없이 소화한 패션이 멋졌다. 와.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네. 유란 선배님께 많은 걸 배웠습니다.’

‘유란이가 누구를 가르칠 성격이 못 되는데. 어떤 걸 배웠어요? 유란이한테 말고, 학교에서.’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디자인에 매력을 느꼈고, 최근에는 앱 디자인과 웹 디자인에 흥미가 생겨…… 준비했던 대답을 하기 위해 막 입을 뗐을 때였다. 소파에 눌러앉은 유란이 핸드폰으로 SNS를 훑으며 말했다.

‘얘 잘해.’

단 세 음절이 다였는데, 사장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음 주부터 출근하세요.’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하는 방법을 몰라 유튜브를 보며 수십 번 고쳐 맨 넥타이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주름 하나 없는 슬랙스에 발을 집어넣은 은한이 과거 회상을 끝냈다.

“양말은?”

은한의 질문에 한결이 서랍장을 뒤졌다. 곧 네이비색 반양말을 꺼낸다.

“이거 신고, 로퍼 신자.”

“응.”

은한은 곧이곧대로 한결의 말을 따랐다. 아무래도 평상시 차림을 봤을 때, 세미캐주얼은 저보다 훨씬 잘 아는 한결이라. 한결의 손 아래에서 은한은 제법 괜찮은 직장인으로 변모했다.

“멋있네, 우리 방울이.”

소파에 기대앉은 한결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의 칭찬에 은한은 비로소 마음을 놨다. 앞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헤어스타일을 고민했다. 새로 산 가방도 쥐어 봤다가, 괜히 넥타이도 들어 봤다.

은한이 조용히 부산을 떨 동안 한결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툭 속마음을 내놨다.

“제대하면 열심히 살아야겠다.”

“엉?”

“얼른얼른 졸업하고, 방울이처럼 멋있게 취직하고 싶어.”

“…….”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아서 좀 슬프다.”

그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은한은 하루가 멀다고 성큼성큼 앞을 향해 가는데, 저만 제자리걸음이다. 얼마나 발버둥 치며 아득바득 살아야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솔직히 자신도 없었다.

은한이 한결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 취직한 거 아니야. 그냥 선배 빽 써서 인턴 하는 건데.”

“그래도. 멋있어.”

한결이 조심스레 은한의 셔츠 소매를 매만졌다. 푹 고꾸라진 어깨에 아쉬움과 조급함, 그리고 불안함이 가득 얹혀 있다. 은한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군대에 같이 갔어야 했는데. 어렸을 때 다리를 다치는 게 아니었는데. 한결과 이별 아닌 이별을 하고 수십 번은 넘게 한 생각이다.

제까짓 게 뭐라고 이 멋진 남자의 자존감을 패대기치는 건지. 은한이 잠시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한결의 기분이 나아질까. 오랜만에 보는 건데 종일 제 출근 준비만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밤이지만 오롯이 한결을 위해 쓰고 싶었다.

은한이 셔츠 윗단추를 툭 풀어헤쳤다. 그리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백 팀장님.”

“……어?”

“백 팀장님. 벌써 퇴근하세요? 저 아직 결재 받을 거 남았는데…….”

소파 위에 무릎으로 선 은한이 한결의 코끝과 자신의 코끝을 맞대었다. C급 성인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다. 한결의 동공이 경련한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대뜸 백 팀장이라니.

“오늘도 야근하는 건 팀장님이랑 저뿐이네요.”

은한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다. 속삭이는 음성에 색기가 가득하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한결의 입꼬리가 비죽 위로 치솟았다. 그가 붉게 물든 은한의 귓불을 짓눌렀다.

“읏…….”

“그러네요. 늘 은한 씨랑 저만 남네요.”

매끈한 턱선을 타고 내려온 손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뭉갰다. 은한이 한쪽 눈을 어그러트렸다.

“근데, 은한 씨.”

“네…….”

“내가 은한 씨한테 그렇게 일을 많이 시켰던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음성이다. 낯선 존댓말에 단전 아래 어디쯤이 찌릿찌릿했다. 입술을 누르던 손가락이 불거진 목젖을 괴롭혔다. 괴로운 감각에 은한이 쑥 뒤로 목을 뺐다. 한결의 커다란 손이 금세 다시 끌어왔지만.

“으응.”

“쓸데없이 야근이 잦아요.”

공기가 삽시간에 눅눅해졌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허공에서 섞여 들었다. 한결의 손이 쑥 셔츠 안으로 사라졌다. 느긋하게 단추가 풀어진다. 은한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빨간 혀가 나왔다 사라졌다. 한결은 그게 아쉬워서 애타게 은한의 입술을 핥아 댔다.

“낮에는…….”

“낮에는?”

“백 팀장님이랑 둘만 있지 못하니까요.”

“…….”

“지금은 둘이니까, 이런 짓도 하고. 저런 짓도 하고.”

은한의 눈이 야하게 휘어졌다. 배시시, 참 싱그럽게도 웃는다. 한결은 빠진 넋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그러는 새 은한이 한결의 하얀 반팔을 위로 끌어올렸다. 잘 짜인 복근이 드러난다. 어금니 사이로 침이 고였다.

한결이 재빠르게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입술이 거칠게 맞물리고, 타액과 혀가 얽힌다. 한결의 손이 부지런히 은한의 셔츠를 풀어 내렸다. 도톰한 유두가 드러나자 한결이 한가득 그것을 머금었다.

“아…… 팀장님…….”

은한이 살풋 눈을 감았다. 춥춥 빨아 당기다 이따금 아프게 물어뜯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은한이 한결의 귓바퀴와 턱선, 그리고 목젖에 이어 단단한 어깨까지 길게 쓸어내렸다. 익숙할 대로 익숙한 한결의 몸인데, 백 팀장이라는 호칭과 존대가 만나 낯선 감정을 일게 했다.

미래의 백한결, 어른의 백한결과 섹스하는 느낌.

한결의 이마에 쪽 키스한 은한이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이제 막 엉덩이가 드러났을 때, 답삭 얇은 허리를 쥐어다 소파에 눕혔다. 은한이 꾸물꾸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제 위에 올라타 버린 한결을 이길 수가 없었다. 한결이 잠시 놓았던 유두에 다시 입술을 물었다. 잘근잘근 깨물고, 혀끝으로 핥고, 판판한 가슴팍을 잔뜩 모아 주무르기도 했다. 정신없이 가슴을 탐하고 있는데 은한이 두 손으로 그의 볼을 잡아 올렸다.

“팀장님. 저 바지 구겨지면 안 돼요…….”

내일 출근해야 한단 말이에요……. 온통 울상인 은한에 한결이 꽈악 입술을 짓씹었다. 씨발. 귀엽다. 어쩜 이렇게 귀엽지.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한가득 은한을 쥐어다 멋대로 휘두르고 싶었다.

“그럼 벗어요.”

한결이 몸을 일으켰다. 은한이 삐죽 입술을 내민다.

“팀장님이 안 벗겨 주시고요?”

“…….”

“벗겨 주시지.”

은한이 꼼지락꼼지락 몸을 돌려 한결을 향해 엉덩이를 쳐들었다. 새까만 슬랙스에 가려져 있지만 한결에게는 훤한 엉덩이다. 하얗고, 통통하고. 탱탱하게 올라붙은 엉덩이. 한결이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얼른요.”

예쁜 엉덩이가 약 올리듯 흔들린다. 섹스를 몰라서 공부했다느니, 물어봤다느니 했던 때가 언제라고 벌써 이렇게 사람 혼을 빼놓는지. 한결이 으득 이를 씹으며 은한의 바지와 드로즈를 한 번에 벗겨 냈다.

상상했던 것과 똑같은 엉덩이가 형광등 아래에서 번쩍인다. 한결이 엉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버석하니 굳었다. 은한이 손을 뻗어 테이블에 올려둔 바지 걸이를 집어 들었다.

“팀장님.”

“……네, 은한 씨.”

“바지 좀 걸어 주실래요?”

은한이 묘하게 웃으며 옷걸이를 내밀었다. 한결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집었다. 바지를 접기도 전에 은한이 시선에서 사라졌다. 어정쩡하게 바지를 쥔 한결이 삐걱삐걱 시선을 내렸다.

“은……한 씨?”

“우음.”

무어라 말할 틈도 없었다. 한껏 입을 벌린 은한이 한결의 페니스를 머금었다. 온 감각이 밀집된 페니스가 후끈하고 축축한 곳에 휩싸인다. 한결은 묵직한 현기증을 느꼈다.

“흐우…….”

은한이 쫍쫍, 귀두를 빨아 당겼다. 한두 번 한 펠라도 아니고, 이제는 혀를 어떻게 놀려야 한결이 좋아하는지 알았다. 한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아…… 방울아…….”

익숙한 호칭에 이번에는 은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가 잘근잘근 페니스 기둥을 씹었다. 우둘투둘한 핏줄이 그의 이에 찌부러졌다.

“방울이, 라뇨, 팀장, 님.”

“어흑! 너……!”

쭈웁, 고환을 세게 빨아 당겼다 놓은 은한이 다시 귀두에 집중했다. 불끈불끈 커지는 분홍 소시지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예전에는 흉기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이게 제 뒤에 들어오면 얼마나 거대한 쾌락을 선물해 주는지 안다.

은한의 고개가 열심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한결은 은한을 만지고 싶어 까무러칠 것 같았다. 얼른 바지를 걸고 말랑한 살결을 쥐어야 하는데. 덜덜 떨리는 손이 자꾸만 엇나간다.

“아, 씨……발.”

“와. 백 팀장님. 욕도 하세요?”

두 손으로 페니스 기둥을 쥔 은한이 한결을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눈에 질 낮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페니스가 말랑한 볼에 닿았다 떨어짐을 반복한다. 흡, 헛숨을 들이킨 한결이 바지에 집중했다. 그 순간에도 혹여 바지가 구겨질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요상한 한결의 표정에 은한이 큭큭거렸다. 손에 들어찬 살덩이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다. 은한이 슥슥 아래위로 페니스를 매만지며 조급한 한결을 구경했다.

“다했어. 다했어.”

그가 옆 협탁에 바지를 걸었다. 주름 하나 없이 곱게 걸린 바지가 신기할 지경이다.

한결이 은한의 허리를 쥐어다 쑥 위로 끌어 올렸다. 제 무릎 위에 마른 몸뚱이를 앉히고 급하게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은한이 한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읏, 천천히…… 천천히…….”

“미안.”

뒤늦게 젤을 바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테이블 아래에 있는 젤을 꺼낸 한결이 손바닥 가득 짜냈다. 한 손으론 은한의 뒷구멍을 매만지고, 반대 손으론 페니스를 쥐었다. 은한은 두 곳을 같이 만져 줄 때마다 정신을 못 차렸다.

“아흡, 응…… 아, 좋, 아…….”

축축한 한결의 손가락이 귀두 끝을 괴롭힌다. 뒷구멍에 들어온 손가락은 전립선을 짓뭉갤 듯 놀아났다. 은한의 뒤가 금세 녹진하게 풀렸다. 그게 꼭 저에게 길든 것 같아 한결은 붕 떠오르는 기분을 잡지 못했다.

“넣……어 줘. 흐, 으응, 아…… 빨리.”

“아직. 조금만 더.”

“괜찮아. 빨리이…….”

은한이 허리를 움직이며 페니스를 졸랐다. 젤에 질퍽해진 은한의 것이 한결의 페니스와 맞물렸다.

한결이 후욱, 거센 콧김을 뿜으며 육욕을 참아 냈다. 아직이다. 지금 삽입하면 은한이 고생한다. 과거에 한 번 정신을 놓아 제대로 풀어 주지도 않고 삽입했다 피를 봤었다. 거기다 내일은 첫 출근 날이 아닌가.

한결은 그 후로도 한참을 손가락만 움직였다. 은한이 짜증스레 턱과 목젖을 깨무는데도 넘어가지 않았다.

은한의 뒤가 세 개나 되는 손가락을 꿀떡꿀떡 잘 받아 삼킬 때쯤 한결이 몸을 일으켰다. 은한이 두 다리로 한결의 허리를 감싸 대롱대롱 고목의 매미처럼 매달렸다.

침대에 안착한 두 사람이 서로의 입술을 빨아 댔다. 한결이 능숙하게 콘돔을 씌운 후, 은한의 구멍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흐. 커, 커…… 으앗…….”

은한이 억세게 한결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미 참을 대로 참은 한결은 삽입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끝끝내 음모가 엉덩이에 비벼질 만큼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움, 직여도 돼?”

은한의 귓불을 빨아 당긴 한결이 음산하게 물었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르던 은한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페니스를 확 잡아다 뺀 한결이 퍽! 뿌리 끝까지 한 번에 박아 넣었다.

“아응, 흣! 아……!”

“하아…….”

처음부터 너무할 정도로 거센 움직임이다. 쿵쿵, 뱃속을 찧는 듯한 느낌이었다. 함부로 내벽을 헤집고, 탐한다. 전립선에 쑤셔 박히는 살덩이에 정신이 혼미했다. 은한이 꽉 힘주어 한결의 목을 끌어안았다.

“팀, 장님. 아응, 흡…… 팀장, 님…….”

“하아, 그거 말고. 이름, 내 이름 불, 후…… 러.”

두 볼기짝을 세게 움켜쥔 한결이 명령했다. 은한이 냉큼 한결의 이름을 불렀다. 신음 사이로 어그러진 단어를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한결은 충분히 만족했다.

온몸이 저리다. 뱃속은 간지럽고, 페니스는 터질 것 같다. 그가 휴가를 나올 때마다 엉망진창으로 뒹굴었는데, 할 때마다 혼이 쏙 빠졌다.

“으응…… 음, 아흑!”

“아, 은한아…….”

시야가 어지럽게 산란한다. 또렷이 보이는 거라곤 더운 숨을 토해내는 한결뿐이었다. 은한이 애타게 한결을 끌어안았다. 한결이 그를 마주 안은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전립선을 꾸욱, 뭉갠 채 정액을 토해 냈다. 은한 역시 한결의 배를 끈적하게 만들었다.

한결이 당연하게 은한의 입술을 찾아갔다. 한껏 입을 벌린 은한이 그의 밭은 숨을 고스란히 삼켰다.

그렇게 얼마나 키스를 했을까. 한결의 허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가 취직 안 했으면 좋겠어.”

“응?”

정사 후, 가볍게 샤워하고 잘 준비를 마쳤다. 한결이 은한을 위해 알람을 맞추고 있는데, 은한이 문득 그런 소릴 해 왔다. 취직을 안 했으면 좋겠다니. 저는 뭘 먹고 살라고. 돈 많이 벌 건데. 그래서 은한에게 신상 운동화를 두 개씩 사 주겠다는 꿈을 꼭 실현하고 싶었다.

“왜?”

“존나 멋있을 것 같단 말이야.”

“어……?”

“수트빨 장난 없을 텐데. 하얀 와이셔츠 입고 팔 걷어붙이고, 어? 머리 넘겨 가지고 아침마다 웃으면서 인사하면 누가 안 넘어가? 진짜 직원들이 너랑 있으려고 퇴근 안 하고, 막 야근하는 척하고. 그러면 어쩌지?”

한결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런 이유로 취직을 하지 말라니. 매일 집에서 퇴근하는 은한을 기다리는 것도 행복하기야 하겠지만. 그럼 제가 은한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협소해졌다.

“뭘 어째. 네 얼굴 프린트해서 등짝에 붙이고 다녀야지.”

“미친놈.”

“진심인데.”

아예 입사하는 날, 게이입니다. 근데 좋아하는 남자 타입도 하나뿐이에요. 여기는 없네요. 그리 말할 의향도 차고 넘쳤다.

온전히 은한에게 속해지는 거라면 두 팔 벌리고 환영이다. 그래서 은한이 불안하지 않다면. 계속 제 옆에 있어 준다면 못 할 게 없었다.

“……진짜?”

“진짜.”

께름칙한 은한의 물음에 한결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리던 은한이 슬쩍 미소를 흘렸다. 그가 취직을 안 한다거나, 입사 첫날 게이라 커밍아웃을 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냥 말만 들어도 좋았다.

은한이 버릇처럼 한결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를 끌어안은 한결이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내일 모닝엔젤 할까? 첫 출근인데 든든히 먹고 가야지.”

“응, 좋아…….”

“깨워 줄게. 어서 자.”

“아침잠도 많은 새끼가…….”

“아냐. 군대 가서 완전 바뀌었어. 걱정 말고 주무세요.”

“네. 그러지요, 백 팀장님.”

잠시 한결의 가슴팍에 볼을 비비던 은한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의 등을 몇 번 토닥여 주던 한결도 곧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서른이 되어 함께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해서 키스를 나누고, 함께 휴가 여행지를 고민하는 꿈을 꿨다.

완벽한 미래였다.

* * *

은한이 퉁퉁 부은 눈으로 쭈웁. 아메리카노를 빨아 당겼다. 하지만 입속에 들어오는 거라곤 공기 반, 밍숭맹숭한 찬물 반이다. 내려다본 컵 안에는 얼음만 잔뜩이었다. 벌써 다 먹었네. 은한이 쩝 입맛을 다셨다.

출근 첫날이었나. 이틀째였나. 언젠가 유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 인턴 시켜 주셔서 감사해요, 누나.’

‘뭐가 감사해. 너 존나 부려먹으려고 데리고 온 거거든.’

‘네. 열심히 할게요.’

그때는 몰랐다. 정말 부림당할 줄이야. 아니, 따지고 보면 회사에서 절 부려먹는 건 아니었다. 인턴 주제에 야근 수당까지 나오니까. 잡일을 도맡아 하는 저만 바쁜 것도 아니었고. 배우는 것도 많다. 평생 학교에 다녀도 모를 것들을 하루에도 몇 개씩 깨우쳤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힘들기 있냐고.

마치 은한이 입사하길 기다린 것처럼 온갖 프로젝트가 동시에 몰아쳤다. 해외 외주까지 받다 보니 회사가 밤낮없이 돌아갔다. 그저 커피나 타고, 종종 시답잖은 심부름만 하는 게 인턴일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안일했다.

은한 씨. 무선 충전 아이콘 좀 만들어 줄래요?

은한 씨! 이 자동차 러프하게 선 좀 따 주세요. 하단에 opacity 많이 줘서 들어갈 거니까 AI나 PSD 편한 거로 해 주시면 돼요.

은한 씨이, 이거 폰트만 레이어 분리해서 금박, 적박 두 개로 인쇄해 올래요? 내일 아침에 시안 보내기로 했으니까 빨리 부탁해요!

은한 씨. 이거 작년에 쓰던 은행 팸플릿인데 올해 그대로 쓰고 싶대요. 근데 위치랑 날짜, 참여자 명단이 달라요. AI 파일 넘겨줄 테니까 좀 고쳐 주세요.

은한 씨. 은한 씨. 은한 씨. 제 이름이 듣기 싫은 날이 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불릴 때마다 네! 명랑함을 흉내 내며 달려가지만 속은 지지고 볶고 난리였다. 출근한 지 이제 한 달. 적응은 했으나 일은 늘었다. 캘린더에 색색의 포스트잇과 형광펜이 난잡했다.

일단 인쇄소부터 들러야겠네. 오는 길에 우체국 들러서 서류도 부쳐야겠다. 그 후에는…… 은한이 분주히 일과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이디어 회의 시작합니다. A2실로 모이세요!”

“네!”

그마저도 다 하지 못했지만. 수첩과 펜을 챙긴 은한이 회의실로 달음박질쳤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나은 편이다. 꽤 큰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서 사무실이 조금 느슨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거기다 회식. 디자인 팀은 생각보다 회식을 자주 하지 않았지만, 한 번 마실 때 끝을 봤다.

회의실에 자리를 잡은 은한이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그랬더니 어느새 왁자지껄한 술집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은한은 소주잔을 쥔 채 정신없이 흘러가는 대화에 휩쓸려 웃고만 있었다. 저도 술을 사랑해 마지않지만, 지금은 잠이 고팠다. 얼른 파했으면 좋겠다. 집에 가서 늘어지라 잠이나 자게. 한탄 같은 바람을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데, 대뜸 대화 주제가 은한에게로 내다 꽂혔다.

“은한 씨, 일은 할 만해요?”

은한이 속해있는 디자인 2팀의 문 대리였다. 패션 센스는 좋으나 복부 비만인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삼십 대 남자. 그리고 유란의 이모부.

은한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배우는 것도 많고. 재미있습니다.”

“재미있지만은 않을 텐데. 요즘 회사가 바빠서. 두 달만 있다가 들어오지 그랬어요. 그럼 좀 덜 바빴을 텐데.”

“하하…….”

그러게요. 그럴 걸 그랬어요. 왜 진작 몰랐을까요. 은한이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기이한 표정을 해보였다. 그때, 누군가가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둘러 왔다.

“얘가 순진해서 인턴 할 생각 없냐니까 바로 홀라당 넘어오더라고. 지금 존나 후회 중일걸?”

유란이었다. 은한의 얼굴이 조금 맑아졌다. 새삼 제가 아직 대학생이라는 안도감이 들어서. 학생 때는 얼른 졸업하고 돈을 벌고 싶었는데.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생활의 연장인 회식 중이다.

“아니에요. 좋아요.”

“구라.”

유란이 은한의 소주잔에다 콸콸 술을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은한을 잡아먹겠다는 듯 일렁였다.

“짠 해.”

“옙.”

여러 개의 소주잔이 챙, 맑은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주가 달다.

드디어 어른의 길로 접어들었나 보다.

얼큰하게 취한 몸뚱이가 비틀비틀 볼품없이 부대낀다. 익숙한 골목길에 들어선 은한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한 시간 간격으로 부재중 통화 3통. 이상할 정도로 긴 번호. 한결이었다.

무심코 전화를 걸려다 말았다. 자정이 훌쩍 넘은 이 시간에 공중전화에 전화한다 한들, 누군가가 받을 리도 없고, 그게 한결일 리는 더더욱 없고.

“아씨…….”

또 못 받았네. 백팩에 핸드폰을 처박아 두는 게 아니었다. 기다렸을 텐데. 은한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짜증이 나 전봇대를 차려고도 했지만 포기했다. 저번에 한 번 차 보니까 존나게 아프더라고. 아픈 건 싫었다.

근래 은한은 의도치 않게 한결의 연락을 받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정말, 의도치 않았다. 회의하는 중이기도 했고, 야근하는 중이기도 했으며, 집에 오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어 버려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다못해 급하게 나오느라 핸드폰을 두고 와 종일 한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날도 있다.

예전에는 어떻게 그리 꼬박꼬박 받았지, 신기할 정도였다.

나 회식이야. 전화 못 받을 거야. 집 갈 때 연락할게. 단조로운 메시지라도 보낼 수 있으면 좋은데. 군대라는 게 너무 거대한 돌담이다. 구구절절 쓴 편지도 일주일이 훌쩍 넘게 지나야 한결의 손에 다다랐다.

“아…… 미안하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질질 발을 끌며 걷고 있으니 벽화가 나타났다. 할머니의 송충이 눈썹이 어째 조금 옅어진 듯했다.

은한이 멀뚱히 서서 벽화를 바라봤다. 그러다 카메라 앱을 실행시켰다. 벽화를 등지고 브이까지 했다. 언젠가 한결이 은한에게 파이팅, 하는 메시지와 함께 보냈던 사진과 같은 구도였다.

찰칵. 가로등 빛만 흩날리는 골목 어귀에 날카로운 전자음이 울렸다.

“편지랑 같이 보내 줘야지.”

은한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세 걸음도 채 이어지지 않았지만. 가로등 하나를 등지자 은한의 얼굴이 새까만 그늘에 잠겼다.

편지를 안 쓴 지도 한참 됐다. 마지막 편지가 언제였더라. 그래. 인턴을 하게 됐다고. 유란 선배가 소개해 줬는데 엄청 큰 디자인 회사라고. 그런 말을 썼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적어도 한 달은 됐다는 거다. 한결을 홀로 내버려 둔 지가. 은한이 꽉꽉 짓이기듯 입술을 깨물었다. 애인 자격 박탈이야, 강은한. 어쩜 이렇게까지 한결에게 무심했지.

집에 들어선 은한이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묵직한 짐을 덜어 냈음에도 여전히 어깨가 뚝 떨어져 있다. 일그러진 마음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저 아래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피곤했다. 몸뚱이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도.

일단은 자고. 그 후에 한결의 전화를 기다려야지. 자는 중에 전화가 올지도 모르니까 꼭 쥐고 자야지.

은한이 비척비척 기운 없이 욕실로 들어섰다.

우우웅, 우우웅. 손바닥이 경련했다. 근육통인가. 매일 마우스를 쥐고 있어서 드디어 손이 맛 간 건가. 은한이 잼잼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 깨달았다. 진동하고 있는 것이 움켜쥐고 잔 핸드폰이라는 걸.

“한결이?”

은한은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대뜸 그리운 이름부터 내뱉었다.

-어! 나 태준인데?

“아, 너냐…….”

목소리가 삽시간에 처졌다. 벌떡 일어났던 은한이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뭐야 지금 실망한 거야?

“아니, 라고 말하기엔 존나 티 났지. 그래도 예의상 아니라고 할게. 웬일이냐?”

-그냥 방울이 보고 시퍼서 전화 해찌이. 나 상병 달았다?

“벌써? 불쌍해서 어쩌냐…….”

-나? 나 안 불쌍해! 이제 내가 두 번째로 짱이야!

“너 말고 네 밑에 애들이 불쌍하다고…….”

입대했더니 하태준 또라이가 선임이라고 웃고 있으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이름 모를 이병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잘 지내지?”

은한이 상투적으로 질문했다. 오지에 떨어져도 잘 지낼 태준임을 알지만, 그냥 확인 차.

-하진우 덕분에 꿀 빨지. 근데도 시간이 존-나 안 가.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았다니.

“그러게.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았네.”

은한이 햇살을 담뿍 머금은 창문을 주시했다. 이번 여름이 지나가면 또 겨울이 온다. 고작 일 년 동안 은한은 2학년을 보냈고, 3학년 1학기도 벌써 반쯤 버텨 내고 있었다. 하지만 태준과 진우 그리고 한결의 시간은 여전히 1학년에 멈춰 있다. 가슴이 아팠다. 친구들을 버린 몹쓸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인턴은 어때?

“바빠 뒤질 것 같아.”

어제도 회식하고 들어왔다. 아니지, 오늘 들어왔다. 자각하니 또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은한이 대자로 사지를 펼쳤다. 주말이라고 쉬는 것도 아니다. 오늘 내일은 밀린 과제를 해야 한다.

인턴과 유란 덕택에 공적으로 학교 수업에 빠질 수 있게 됐지만, 시험이나 과제는 꼬박꼬박 내야 했다. 그러니 미치기 직전이었다.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오면 컴퓨터를 켜고 리포트를 쓰거나 시시한 디자인 작업을 했다.

내가 모니터인지, 모니터가 나인지 헷갈릴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도 돈 벌잖아. 쩐다. 방울이가 직장인이라니.

“돈을 벌긴 버는데……. 직장인은 아니야. 그냥 시다 정도. 그래도 쏠쏠하게 벌어 놨으니까 얼른 휴가 나와라.”

-왁! 그럼 우리 소고기 먹자. 2차로는 할머니 국밥집.

“그래 뭐든.”

또 한바탕 시끄러울 술자리가 보지 않아도 선했다. 은한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1학년 때는 하루가 멀다고 공대남 셋과 붙어 다녔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너는 한결이랑 괜찮냐?

“……어?”

뜬금없는 질문에 은한이 되물었다. 한결과 괜찮냐니. 대체 뭐가?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우리 부대 애들은 일 년쯤 되니까 다 헤어지고 질질 짜던데. 난리도 아니야.

“……그래?”

다들 그런 건가. 요즘 바빠서 고무신 카페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이따가 한 번 훑어봐야겠다. 은한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유 모를 초조함이 들었다.

-근데 너희는 뭐. 워낙 죽고 못 사니까. 백년해로해서 딸 낳아 줄 거지?

“……그래. 노력할게.”

-엉. 나 소고기 기억해 둔다?

“어, 어…….”

태준은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 전화를 끊었다. 은한은 오 분 남짓한 통화 시간을 멍하게 쳐다봤다. 그렇게 피곤했는데. 왠지 모르게 다시 잠이 들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부터 주전부리까지 손에 집히는 대로 털어 왔다.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이 언뜻 보면 백수가 따로 없다.

골목 귀퉁이에 쪼그려 앉은 은한이 담배를 물었다. 담배도 참 오랜만에 피운다. 바쁜 생활에 익숙했던 것이 낯설어지고 낯설었던 게 익숙해졌다.

학교와 학식, 그리고 늦잠이 낯설어졌다. 대신 지하철, 로퍼, 스케줄러 그리고 새벽 6시에 울리는 알람 따위와 친해졌다.

백한결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은한이 도로 건너편에 있는 백반집을 보며 후우, 진한 연기를 뿜었다. 코앞에는 언젠가 제가 먼저 한결에게 입을 맞췄던 하얀 가로등이 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그와 함께 그렸던 벽화가 있고, 더 걸어 나가면 술을 궤짝으로 퍼마셨던 국밥집이 있다. 도서관이 질릴 때 가던 카페도,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편의점도.

그래. 여기서 사는 것도 벌써 삼 년째가 되어 가는구나.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밝혔다. 시끄러운 동기 톡방 말고는 고요하다.

“…….”

오늘은 한결에게서 전화가 없었다. 왜 없지.

은한이 조금 짜증스레 액정을 문질렀다. 늘 한결의 전화를 기다리기만 하는 게 싫었다. 뭐랄까. 그도 저처럼 일이 바빠 제 전화를 못 받는 경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달까.

무슨 이기적이고 멍청한 생각이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같잖은 바람이었다.

늘 저만 한결에게 상처를 주는 듯해서. 저도 상처를 받아야 조금이나마 공평하지 않은가.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덜기 위한 바람이다.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 끈 은한이 무릎 사이로 얼굴을 욱여넣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구겨져 있다가 집에 들어섰다.

현관에는 한결이 사 줬던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요즘 내내 로퍼나 구두만 신어 운동화를 신을 새가 없었다. 은한이 괜히 한번 더 운동화를 정리했다.

나올 때만 해도 배가 고팠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입맛이 없다. 편의점 봉지째로 냉장고에 처박은 은한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할 일이 많다.

다른 생각을 할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 * *

-방울아. 뭐해.

한결에게서 전화가 왔다. 퍽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은한이 망설임 없이 마우스를 놨다. 그리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고작 이틀 동안 듣지 못한 한결의 목소리가 말도 못 하게 반가웠다.

“과제 하고 있었어.”

-바빠?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전화했어? 무슨 일 있었어?”

-급하게 대민봉사 나갔다 왔어. 원래 주말엔 쉬는데, 장마 때문에 주변 마을 논 귀퉁이가 무너졌거든. 여기 비 엄청 많이 와. 오늘 전화 못 할 것 같다고 어제 연락한 건데…….

“아아…… 미안. 나 어제 프로젝트 끝나서 회식했거든. 핸드폰 가방에 넣어 둬서 몰랐어.”

-괜찮아.

“…….”

-…….

익숙지 않은 정적이다. 은한이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묵직한 무음이 어깨를 콱콱 짓밟는 듯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요즘 한결과의 통화 사이엔 정적이 많다. 대체 뭐 때문에 그리 좋던 관계에 침묵이 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제 탓이겠지.

“한결아.”

-응.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은한이 잘근,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사과할 건 사과를 해야 했다. 그래야 한결과 계속 이어질 수 있을 테니까. 여느 연인들처럼 헤어지고 질질 짜는 거,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한결은 잠깐 침묵하다 입을 뗐다.

-왜 그런 거로 사과를 해. 바쁠 텐데 어떻게 꼬박꼬박 전화를 받아.

“이해해 주면 고마운데.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알지? 오늘도 종일 네 전화만 기다렸어.”

-그랬어?

수화기 건너로 잔잔한 웃음이 흘러왔다. 은한은 그제야 메슥거리던 속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소파에 깊숙이 기대 고개를 한껏 꺾었다. 얼룩 하나 없는 형광등이 시선 위로 잔뜩 잔상을 남겼다.

-밥은? 또 안 먹었지?

“……귀신같은 새끼.”

-집에 먹을 건 있어?

“낮에 편의점 가서 사 왔어.”

-근데 왜 이 시간까지 안 먹었어? 나 오늘 통화 많이 할 수 있는데, 밥 먹는 거 들어 줄까?

“……그래.”

너는 어떻게 이다지도 다정한 사람일까. 신기했다.

은한이 그의 말을 따라 도시락을 꺼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 두고 물과 수저도 준비해 소파에 앉았다. 잊고 있던 허기가 물밀 듯 밀려왔다. 쪽쪽 젓가락을 빨며 못했던 대화를 나눴다.

“봉사는 어땠어? 힘들었겠다.”

-그냥 삽질하는 거지 뭐. 이제 몸 굴리는 거엔 적응해서. 삽질 엄청 잘해. 하다못해 땅바닥에서도 잘 자.

“그게 뭐야. 존나 슬프잖아.”

-적응 못 한 것보다 낫지. 일 년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너는 오늘 밥 뭐 먹었어? 밥 챙겨 먹기도 힘들었겠네.”

-되게 신기한 경험이었어. 삽질하다 밥을 먹는데, 먹어도 먹어도 국이 안 줄어. 비가 너무 오니까.

“……아무래도 국방부에 민원 넣어야겠다.”

그런 사소하고, 쓸데없는 대화. 하지만 연인 사이에선 필히 주고받아야 하는 대화.

처음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 작은 고랑이 생겼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고랑이었다.

뭐 어떤가. 정말 작은 고랑인데. 열심히 흙으로 덮고 밟아 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그래, 그렇게 믿었다.

* * *

“죄송, 합니다.”

“하아…… 은한 씨.”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은한이 꾸벅,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예 들 수조차 없다. 이제 인턴 2개월 차. 잔 실수야 비일비재했지만, 저 때문에 일이 어그러진 적은 없었다.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없길 바랐는데. 결국은 이런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문 대리는 일단 시청에 전화해서 일주일쯤 늦을 것 같다고 연락해. 공손히 사과하는 거 잊지 말고, 이 주임은 현장 계약 연장해. 금액은 최대한 맞춰 줄 테니까, 되는 대로 많은 사람 보내 달라고 하고.”

“네.”

“예.”

서 팀장의 지시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멀뚱히 서 있는 건 은한뿐이었다. 서 팀장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은한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동 발을 굴렀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그런 상황이 아닌 것 같죠, 은한 씨?”

“네……. 정말 죄송합니다.”

“야근해야 할 것 같은데. 은한 씨 오늘 시간 괜찮아요? 웬만하면 주말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집에 안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럼 일단 해체 작업부터 도와주세요.”

서 팀장이 빠른 걸음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은한이 뒤를 돌았다. 쉰 개가 넘는 계단이 은한을 무섭게 야단쳤다.

시청에서 부탁한 공공 디자인이었다. 곧 오픈할 쇼핑센터 입구 계단. 사람이 길게 늘어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을 오를 때마다 100원씩 아동복지센터에 기부되는 시스템인데, 그저 회색 돌덩이로 두면 아쉽다고 디자인하게 된 거였다. 계단 폭에 한 줄 한 줄 시트지를 붙이는 거로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파란 계열의 쇼핑센터와 기부 취지를 고민하다 어린 왕자가 선택됐다. 푸른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떠 있고, 장미 넝쿨이 즐비한 게 주변 환경과 썩 잘 어우러졌다.

어린 왕자도, 장미도 거꾸로 매달려 있어서 그렇지. 가장 아래 계단엔 하늘이 가라앉아 있었다. 예쁜 일러스트가 순식간에 기이한 그림으로 바뀌었다.

‘은한 씨. 일러스트 아래부터 번호 하나씩 매겨 줄래요? 가장 적은 번호가 첫 번째 계단에 붙여질 거예요.’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왜 바보처럼 거꾸로 번호를 매겼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원래라면 어린왕자의 발 부분이 1번이고, 하늘이 50번이 되어야 했다. 은한은 인쇄된 시트지에 하늘부터 1번을 매겼고.

시트지를 붙일 때, 위에서 혹은 아래서부터 차례대로 붙였다면 금세 이상한 점을 깨달았을 거다. 하지만 촉박한 마감 기한에 현장은 바빴고, 정신이 없었다. 손 가는 대로 시트를 집어 34번이 적혀 있으면 34번에 붙이고, 21번이 적혀 있으면 21번 자리에 붙였다.

그렇게 3분의 2쯤 완성되고 나니 하늘에 거꾸로 매달린 어린 왕자가 나타난 거고.

계단에 붙이는 시트지는 일반 시트지가 아니다. 공업용 시트지로 물에 젖어도, 마찰이 가해져도 잘 뜯기지 않았다. 칼로 긁어내듯 뜯어야 했다. 얼룩도 잔뜩 남아서 한 번 붙인 시트지는 몇 년간 유지됐다. 바꾸는 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근데 그걸, 작업한 지 사흘 만에 전부 떼고 새로 붙이게 됐다. 가로가 8m나 되는 시트지 50개를 다시 인쇄해야 하는 건 너무 슬프니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겠다.

낭비한 시간도, 돈도. 다 은한의 탓이었다.

“아…… 죽고 싶다.”

번호를 거꾸로 붙이는 사소한 실수였는데, 결과는 사소하지 않았다.

내장을 다 토해 낼 듯 한숨을 내쉰 은한이 바닥에 널브러진 칼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욕을 읊조리며 시트를 긁어내고 있는 아저씨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소매 끝으로 아무렇게나 땀을 닦아 낸 은한이 핸드폰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 그리고 부재중 전화 한 통. 한결이었다.

“씨발…….”

오늘도 못 받았어. 미안하다고 사과한 지 며칠이 흘렀다고. 또, 못 받았다. 한결은 이제 부재중을 한 통 이상 남기지도 않았다. 그게 신경질이 날 정도로 슬프고 괴로웠다.

계단에 걸터앉은 은한이 무릎에 이마를 찧었다. 오늘 종일 시트지만 뗐는데, 아직도 반밖에 못 했다. 현장 직원도, 디자인 팀도 슬슬 퇴근을 준비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 죽을까. 일도, 연인도. 다 최악을 달리고 있다.

“뭐야. 일 하나 쳤다고 죽기 직전이네?”

툭.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은한이 고개를 들었다. 유란이었다. 그녀 역시 은한 덕택에 종일을 쪼그려 앉아 시트만 뜯어냈다.

“누나…….”

“울상 하지 마. 안 죽어.”

“죽을 것 같은데요…….”

아니. 죽고 싶어요. 은한이 다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침마다 닦고 나오는 로퍼에 하얀 먼지가 자욱하다. 희뿌연 제 상황을 의미하는 듯했다.

“저 진짜 바보 같죠. 1부터 50까지는 애도 세는데. 그걸 못 해서…….”

“야. 이럴 거면 아예 땅굴 파고 들어가라.”

“죄송해요. 누나 막 저따위 애를 인턴으로 데려왔다고 혼나신 거 아니에요?”

“혼났으면 네가 어쩌려고?”

“나가 죽으려고요.”

“아이고. 지랄을 아주 발랄하게 한다, 너.”

유란이 팡팡, 은한의 등을 두드렸다.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함이 아니라, 매질에 가까웠다. 은한은 그 매질을 잠자코 견뎌 냈다. 차라리 더 세게 때려 주길 바랐다.

유란 딴에는 장난을 건 거였는데, 분위기가 심상찮다. 그녀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괜찮아. 나도 학생 때부터 일했는데 좆같은 사고 진짜 많이 쳤어. 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지. 앞으로는 뭐 하나 해도 꼼꼼히 확인할 거 아니냐.”

“그래도요…….”

“됐다. 일어나. 맥주나 마시러 가자.”

유란이 은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느다란 뼈대면서 힘도 좋다. 은한이 질질 그녀에게 끌려갔다.

길었던 하루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은한이 이틀째 제가 친 사고를 수습하고 있을 때, 간신히 한결과 연락이 닿았다. 대충 도시락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는 중이었다. 도시락을 챙겨 계단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기다란 번호를 보며 잠깐 망설였다. 아. 또 울면 어쩌지. 끔찍했던 공모전처럼. 한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펑펑 눈물을 쏟을지도 몰랐다. 후우, 후우. 호흡을 고른 은한이 께름칙하게 전화를 받았다.

“응.”

-바빠?

첫 물음이 바쁘냐다. 은한이 쓰게 웃었다. 바쁘지. 무지 바쁘지. 모든 걸 관두고 백한결 탈영시켜서 산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지.

“조금.”

-……그럼 끊을까?

뭘 또 끊어. 은한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저녁 먹는 중이었어. 너 안 바쁘면 밥 동무나 좀 해 줘라.”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회사야?

“어…… 회사는 아니고. 현장. 내가 사고 하나 거하게 쳤거든.”

-무슨 사고?

은한은 최대한 간단히 사건을 설명했다. 그래도 제 잘못을 축소하진 않았다. 한결에게 회개하는 거였다. 비겁하게. 은한이 억척스레 움켜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놨다. 반도 줄지 못한 밥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잖아도 없던 식욕이 바닥을 쳤다.

-많이 혼났어?

“아니. 거의 안 혼났어. 그래서 더 짜증 나. 내가 미워.”

-지금은, 해결된 거야?

“해결하는 중이지.”

-힘들겠네, 우리 방울이.

“어. 평생 일 안 하고 놀고먹고 싶을 만큼.”

-내가 돈 많이 벌어서 평생 놀고먹을 수 있게 해 줄게.

“……말만 들어도 존나게 고맙다, 야.”

-진짠데.

은한이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아주 오랜만에 짓는 미소였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 없는 서울 하늘은 별 하나 보여 주지 않는다. 이런 날에는 좀 허락해 줄 만도 한데.

“한결아.”

-응.

“나 우울해.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 좀 해봐.”

-음……. 몇 달 전에 이병으로 들어온 애가 있는데, 엄청 귀여워.

“몇 달 전인데 일찍도 이야기한다.”

원체 친구도 가족도, 타인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한결임을 알지만 놀라울 때가 있다.

그건 그렇고 귀엽다니. 은한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런 형용사는 저에게만 쓰던 한결인데. 달달달 다리가 떨렸다. 우울해서 다른 말을 해 보라 했거늘, 오히려 속을 뒤집고 있다.

“귀여워? 나보다 더?”

-푸흡. 방울이 귀여움이랑은 좀 다른데.

“뭐가 어떻게 다른데, 씹새야. 이 새끼가 나라 지키라고 군대 보냈더니 어디서…….”

은한이 으득 이를 갈았다. 그래. 따지고 보면 한결은 게이다. 온통 남자가 득실거리는 군대에 눈이 돌아갈 만도 했다. 왜 그 걱정을 안 했지.

바람만 펴 봐라. 부대까지 가서 뼈째 씹어 버릴 테니까.

-관심병사라고 알아?

한결의 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관심병사라. 익숙하지는 않은 단어다. 은한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 알아.”

-하는 행동이 되게 귀여워. 없던 동생이 생긴 것 같아. 우리 부대 애들도 다 좋아해. 부대에선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뭐…… 평소엔 괜찮다가 가끔 중학생이 되는 애야.

“그래? 어떻게 귀여운데?”

은한이 주물주물 무릎을 매만졌다. 종일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욱신거리는 게 장난이 아니다. 병원에 가 봐야 하나. 무서운데. 또 수술해야 한다고 그러면 차라리 다리를 잘라 달라, 빌 것이다. 살과 뼈를 도려내고 무언가를 집어넣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아픈 일이었다.

-걔가 소시지 엄청 좋아하거든? 나도 만만찮게 좋아하는데 그거 나오는 날엔 걔한테 다 몰아줘. 그럼 고맙다고 김치 준다? 자기 김치 싫어해서 떠넘기는 거면서 엄청 으스대. 근데 애들이 다 속아줘.

“……너 소시지 좋아하냐? 몰랐다?”

백반집에서 소시지가 나올 때마다 제가 홀라당 다 먹었던 것 같은데. 한결은 손도 대지 않아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

되게…… 멍청했구나, 나.

그뿐만이 아니다. 한결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도 잘 모른다. 단 걸 즐기지 않고 매운 걸 좋아한다. 그 정도. 뭘 먹자고 해도 좋다고만 했었으니까.

-좋아하는데, 방울이 너를 더 좋아하니까.

“……아. 그런 말 할 거면 예고 좀 해라.”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할 뻔했잖아. 그리 말했다가 된통 혼났다. 또 뭘 안 챙겨 먹었냐고. 은한이 톡톡 무릎을 두드리며 그의 걱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엄마보다 잔소리가 곱절은 더 많은 한결이다.

그때, 저 멀리서 문 대리가 은한을 불렀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저녁 시간이 벌써 끝났나 보다.

“나 가 봐야겠다.”

-퇴근 안 해?

“사고 친 거 수습해야지. 휴가 나오면 소시지 왕창 사 줄게. 형아 요즘 돈 많이 번다?”

-혀엉? 형이라고 했어?

“그럼. 돈 벌면 형이지.”

그가 나지막이 웃는다. 그 웃음소리 한 번으로 은한은 얼마 남지 않은 하루를 견딜 힘을 얻었다. 그래. 악착같이 버텨서, 성공해야지. 전 세계 소시지를 다 사다가 백한결 냉장고에 가득 채워 줘야지.

전화를 끊은 은한이 찌뿌듯한 몸을 한껏 뒤틀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견디면 모든 게 평화로워질 거라 생각했다.

물론,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 * *

“잉크 하나를 바꿔 넣었나 봐요.”

“아니. 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브랜드 잉크를 넣으면 어쩌자는 거야!”

오늘은 인쇄한 시트지가 배달 오는 날이었다. 오늘부터 주말까지 빡세게 일하면 미룬 마감기한이지만, 그거라도 맞출 수 있겠다 싶었는데.

배달 온 시트지는 뒤틀림이나 번짐 하나 없이 깨끗하게 인쇄됐다. 색이 달라서 그렇지. 1번에서 38번까지는 같은 톤이지만, 39번부터 50번까지는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어린왕자의 금빛 머리칼이나, 붉은 장미, 혹은 밤하늘 같은 게. 인쇄 중간에 잉크 하나가 동났고, 급한 마음에 다른 브랜드 잉크를 집어넣은 듯했다.

“다시 뽑아야겠죠?”

“이대로 붙이면 욕먹지. 회사 이미지에도 안 좋아. 이쪽 시청이랑 일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 시간에 어디 가서 뽑으라고 이따위로 보낸 거야! 당장 내일부터 붙여도 될까 말깐데!”

팀 전체가 엉망진창이다. 은한이 끔찍한 현실에 질끈 눈을 감았다. 인쇄. 인쇄를 다시 해야 하는데,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다. 다시 주문하고 배달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방법이……. 꽉꽉 입술을 눌러 씹던 은한이 번뜩 눈을 떴다.

“파주, 파주에 인쇄 단지 있지 않나요? 전화해 볼까요?”

“파주? 거기 몇 시까지 영업하는지 알아요?”

“학교 선배들이 과제 제출할 때 급하면 막차 타고 파주 가시더라고요. 아마 새벽까지 할 거예요.”

전화해 본 결과, 은한의 예상대로 파주 인쇄 단지는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한단다. 시트지 하나를 둘둘 말아 당장 파주로 떠나기로 했다. 그곳에서 어떤 잉크와 기계를 사용하는지 모르니 직접 가서 하나하나 색을 대조해야 한다.

“이 주임이 다녀올래요?”

“제가 가서 기다리다가 완성되면 실어 오겠습니다.”

은한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제가 친 사고니 뭐 하나라도 일을 더 하고 싶었다. 어차피 집에 가봐야 마음 편히 잠도 못 잔다.

문 대리가 코를 찡긋거렸다.

“인쇄 다 하고 서울 도착하면 아침일 텐데…….”

“괜찮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잠깐 고민하던 그가 곧 그리 하라며 고개를 주억였다. 은한은 아직 일이 마무리된 것도 아닌데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속죄하고 사나 보다.

유란이 함께 가겠다며 자처했다. 은한이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몰래 웃었다. 몇 번이나 느끼는 거지만 참 좋은 선배다.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자동차에 올라탄 유란이 세게 에어컨을 틀며 말했다. 딱 그녀다운 위로였다. 시원한 바람이 눅눅했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은한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안 될까 봐 무서워요.”

“원래 사회 초년생이 다 그런 거야.”

“네. 이렇게 사고치고 수습하다 보면 누나처럼 멋진 사회인이 되겠죠?”

“존나 입에 처 발린 소리. 내가 회사 사장 딸이라고 부러 그러는 거지?”

“와. 누나 눈치 쩐다.”

유란이 끌끌, 할아버지처럼 웃었다. 은한이 그 웃음에 동조하며 툭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풍경에 시선을 버렸다. 그러면서 치받는 기침을 꾸역꾸역 눌러 내린다. 차 안에 에어컨 바람이 가득한데 자꾸만 식은땀이 맺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마를 닦아 냈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몸살기가 있었다. 목도 아프고, 열도 났다. 눈알도 뻑뻑한 게 이번 몸살로 호되게 고생할 모습이 선했다.

하지만 티를 낼 수가 있나. 부러 더 씩씩하고 활기차게 작업장을 휘젓고 다녔다.

“피곤하지?”

“……아니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같잖은 거짓말을 해 봤다. 유란이 대놓고 은한을 비웃었다.

“파주 멀어. 잠깐 자.”

“그래도,”

“자라면 자. 인쇄 들어가면 내가 잘 거야.”

“……네. 감사해요, 누나.”

은한이 입술을 길게 잡아 쨌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였으나 운전에 집중한 유란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은한이 쇳덩이 같은 눈꺼풀을 잠시 내리감았다. 정말 잠깐만, 잠깐만 그러고 있으려 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땐 낯선 인쇄소 앞이었다.

어째 몸이 더 무거워졌다. 은한이 후욱, 헛숨을 마시며 차에서 내렸다. 꿉꿉하고 더운 열기가 몸을 덮쳤다. 땅거미가 자욱한데도 후끈한 열기는 사그라들 줄 모른다.

“이 저녁에 서울에서 올라오셨어?”

인쇄소 아저씨가 쯧쯧, 혀를 찼다. 젊은 남녀 둘은 대충 봐도 개고생을 하다 온 티가 났기 때문이다.

“맡기던 인쇄소에서 잉크를 중간에 교체해서요. 이 칼라랑 가장 비슷하게 인쇄를 해야 하는데. 될까요?”

“해 봐야 알지.”

유란의 말에 흥. 콧방귀를 낀 아저씨가 기계 전원을 켰다. 은한이 부지런히 노트북을 두드렸다.

하늘과 어린 왕자의 얼굴, 그리고 장미의 부분 부분을 잘라 시트지에 반복해서 배치한다. 그 후, 여러 기계와 잉크를 섞어 가면서 인쇄해 가져온 시트지와 색을 비교했다. 적당히 비슷해선 안 됐다. 지긋이 봐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같아야 했다.

한창 어린 왕자만 노려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은한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방울아.

한결이었다. 8시에 가까워진 시간. 평소라면 퇴근을 했을 때라 전화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맞은편에 선 유란은 인쇄된 시트지를 헤집으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색을 대조하고 있었다.

“한결아. 나 일하는 중인데.”

-아……. 많이 바빠?

“미안. 다음에 연락하자.”

그래. 알았어. 바빠도 밥 챙겨 먹어. 한결은 모난 음절 하나 없이 물러났다. 뚝, 전화가 끊겼다. 그런데도 은한은 수 초간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비로소 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와. 나 방금 뭐한 거지.

차라리 받지 말 걸 그랬다. 나중에 전화가 됐을 때. 너무 힘들었어. 평소처럼 그런 한탄이나 할 걸. 이렇게나 차갑고 무심하게 사과를 해 본 건 태어나 처음이다.

‘미안.’

그리 말했지만, 그 순간에는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한결과의 통화에서 좋아한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주를 이룬 지는 꽤 오래됐다. 그래도 이제껏 건넨 사과들은 진심이긴 했다.

전화박스에서 툭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한결이 상상됐다. 종일 흙바닥을 뒹굴다 하루의 마무리로 전화를 건 것일 텐데. 그리 모질게 전화를 끊었다.

최악이다. 진짜 별로네, 나.

버석하니 굳어 있는 은한에 유란이 물었다.

“왜?”

질문보다는 재촉에 가까웠다.

“……아, 아니에요.”

은한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종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메케한 잉크 냄새와 녹슨 기계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눈알이 후끈거리고 코끝이 찡했다.

한결이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아저씨가 대놓고 귀찮은 티를 내기 시작할 때쯤에야 만족할 만한 잉크를 찾아냈다.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8m짜리 12개를 인쇄해야 해요. 얼마나 걸릴까요?”

“인쇄는 금방 하지. 근데 급속이라 비싼 거 알지?”

“네. 상관없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은한과 유란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밖을 나오자 우렁찬 매미 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서울보다 나무가 많은 파주라 매미 소리가 곱절로 컸다. 거기다 후덥지근한 열기까지. 가뜩이나 띵하던 머리가 아주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유란이 끙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배고프다.”

“어…… 주변에 먹을 게 있을까요?”

새까맣게 죽은 거리는 서울과 전혀 달랐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 보이질 않는다. 노란 가로등 아래에 부대끼는 나무들뿐이었다. 편의점은 됐으니 귀신이나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다.

“글쎄. 일단 나가 보자.”

유란이 자동차에 올라탔다. 은한이 그녀를 따라 질질 발을 끌었다.

유란의 차가 멈춘 곳은 공교롭게도 국밥집 앞이었다. 24시간 국밥집. 도로를 달리다 드문드문 만날 수 있는 식당.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조차 수십 분 거리에 있어 어쩔 수 없이 국밥집에 들어서야 했다.

24시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가게 안은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좀 왁자지껄하면 좋으련만. 축 늘어진 몸이 바닥에 들러붙기 직전이다.

돼지국밥 두 개를 주문한 유란이 긴 머리칼을 올려 묶었다.

“서울 올라가면 바로 시트지 붙일 것 같은데 열심히 먹자.”

“……죄송해요.”

“그러라고 한 말 아니거든.”

은한이 머리를 오그렸다. 오늘 여러모로 나쁜 짓을 많이 한다. 어디 아무도 없는 곳에 기어들어 가 숨고 싶었다. 자괴감이 최고조에 다다라 있다.

툭하면 울고 싶고, 자고 싶고, 모든 것에 무력하다. 우울증이라는 게, 그리 멀고 어려운 병이 아닌 듯했다.

뜨끈한 국밥이 턱턱, 테이블에 놓였다. 대충 들어왔는데 맛집 같다며 유란이 콧노래를 불렀다. 희미하게 웃은 은한이 수저를 들었다.

“역시. 맛있네.”

“그러네요.”

후끈한 국물이 참 오랜만이다. 최근 끼니를 죄다 편의점 도시락 따위로 때웠기 때문이다. 까슬까슬하던 목구멍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국물을 반겼다. 잊고 있던 허기가 입맛을 돋게 했다.

“잘 먹네.”

유란이 오도독 깍두기를 씹으며 말했다. 새우젓을 통째로 쏟아 붓던 은한이 히죽거렸다. 공대남 셋이 입대를 하면서 자연히 국밥집과도 거리를 뒀다. 동기들이 국밥을 썩 즐기지 않기도 했고, 혼자 가긴 또 뭣하고. 정말 가끔, 전날 술을 진탕 마신 미현이 해장하자고 할 때나 먹었다.

그립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엔 꼭 창가에 앉았었는데. 술잔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던 게 엊그제 같았다.

“힘들지? 일하랴 학교 과제하랴.”

“네. 죽을 것 같아요.”

“후회하냐. 인턴 한 거.”

유란이 넌지시 물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잘못이야 은한이 했지만, 아직 어린 나인데. 괜히 사회생활을 일찍 배우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취업난이라 해도 3학년부터 인턴을 나가는 일은 잘 없으니까.

사랑하던 동생이 떠올라 이것도 해 주고 싶고, 저것도 해 주고 싶었던 게 과한 욕심이었나, 싶은 요즘이다.

“아니요.”

은한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배우는 거 진짜 많아요. 취직하면 그냥 컴퓨터 앞에서 포토샵이나 만지면 될 줄 알았는데 현장도 나가고 인쇄소도 들르고.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그래? 존나 긍정적이네.”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 거. 어차피 나중에 취직하고 다 겪어야 할 일이잖아요. 남들보다 일찍 힘들고, 나중에 익숙해질 거라 생각하면 안 힘들어요.”

“어이고. 기특한 새끼.”

유란이 쓱쓱 은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씩, 웃은 은한이 다시 뚝배기에 코를 박았다. 얇은 셔츠 아래로 언뜻 비치는 쇄골이 툭 불거져 있다. 누가 보면 먹이지도 않고 일 시키는 줄 알겠네. 유란이 공깃밥 하나를 추가로 주문했다.

늘 한결이 하던 일이다.

백한결. 백한결. 백한결. 어째 떨어져 있어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평상시엔 해사하게 웃는 한결의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새까만 얼굴의 한결이 쾅쾅쾅, 심장을 내리쳤다.

간만에 왕성해진 식욕이 푸시시 사그라들었다. 입안이 텁텁했다. 연거푸 찬물을 들이켰음에도 나아지질 않았다.

“왜. 더 안 먹어?”

“아…… 그만 먹어도 될 것 같아요.”

“너 밥 엄청 먹는다고 미현이가 그러던데.”

“졸려서 그런가 봐요.”

부러 눈을 비비적거렸다. 유란이 가늘게 눈을 뜨며 은한을 흘겼다. 뭔가 있는데. 어떻게 꾀어내야 들을 수 있으려나, 생각하다 말았다. 들쑤셔 봐야 긁어 부스럼일 듯해서.

그래도 더 먹지. 잠 못 잘 땐 밥이라도 많이 먹어야 해. 하고 구슬려 봤으나 은한은 고개를 저었다.

완성된 시트지를 싣고 서울까지 올라오니 어슴푸레한 해가 뜨고 있었다. 서울답지 않게 조용한 도로가 낯설다. 은한이 건물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동살을 멍하니 응시했다. 멀지 않은 과거에 태준과 진우, 그리고 한결과 함께 봤던 일출이 떠올랐다.

되게 추웠는데. 소원 하나 빌겠다고 발을 구르며 기다렸었지. 아직도 그 추위가 생생하거늘, 지금은 창문을 죄다 열고 있어도 푹푹 찌는 여름이다.

“누나.”

“어?”

“겨울 바다 가 보셨어요?”

“아니. 얼어 죽을 일 있냐.”

왜 너는 가 봤어? 유란이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물었다. 은한이 푸흐흐 연기처럼 웃음을 흘렸다. 모래사장에서 고꾸라진 태준이 떠올라서였다. 그때 찍었던 사진이 아직 핸드폰에 있을 텐데. 좀 이따 집에 가서 봐야겠다. 생각난 김에 인쇄해서 편지나 부쳐 줄까.

“네. 친구들이랑요. 되게 좋아요. 나중에 꼭 가 보세요.”

“……그래.”

유란이 룸미러로 은한을 살폈다. 평소와 너무 다른 은한이라. 이번 일 때문에 충격을 많이 받았나. 이렇게나 서정적인 은한이 아니었는데. 뭐…… 많이 힘들면 어련히 말해 주겠지. 애도 아니고. 유란은 그저 새벽 감성에 취해 그런 것이라 넘겨짚었다.

이제는 집만큼이나 익숙한 현장에 도착할 때쯤, 은한은 잠시 주춤했던 몸살기가 완전히 제 몸을 정복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곱게 앉아만 있는데 가쁜 숨이 뿜어진다.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유리에서 뿜어지는 냉기가 끓어오르는 열을 찰나나마 삭혀 주는 듯했다. 괜찮다. 아프지 않다. 최면을 걸었다. 아파 봐야 받을 수 있는 건 동정뿐이다.

“다 왔다.”

“네!”

목소리를 한껏 튕긴 은한이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와 뒷좌석에 가득한 시트지를 하나하나 조심히 꺼냈다. 두려운 마음으로 팀장님께 컨펌을 받았다. 다행히 오케이 사인이 났다. 그 순간에는 뻑뻑하게 막혀 있던 마음 어딘가가 뻥 뚫린 것 같았다.

“은한 씨.”

기뻐할 새도 없었다. 이 주임이 직접 하나하나 매긴 번호를 따라 시트지를 분류하고 있는데 문 대리가 은한을 불렀다. 재빠르게 일어난 은한이 그의 앞으로 뛰어갔다.

“네. 부르셨어요?”

“밤새 한숨도 못 잤지?”

“어…….”

긍정을 해야 하나, 부정을 해야 하나. 긍정하며 힘든 티를 내기엔 너무 염치가 없고, 부정하기엔 완연한 거짓이다.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은한이 쭈뼛거리고 있자 문 대리가 툭툭 어깨를 두드려 왔다.

“집 가서 씻고, 눈 좀 붙여요.”

“네?”

“은한 씨 안색이 너무 창백해. 날도 더운데 더위 먹으면 어쩌려고. 쓰러지거나 아프면 더 큰 피해 주는 거 알지?”

“아…….”

피해라는 무정한 단어가 나오긴 했지만 어서 집에 들어가서 쉬란 말을 돌려 하는 것이다. 은한도 그쯤은 알았다. 손끝을 괴롭히던 그가 조심히 입술을 뗐다.

“저…… 유란 누나도 고생 많이 하셨는데요.”

“걔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문 대리가 유란의 체력은 슈퍼맨급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은한이 잘근잘근 입술을 씹다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씻고만 오겠습니다.”

“오후에 출근해요.”

“감사합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현장 속으로 사라지는 문 대리를 잠시 지켜봤다. 그러다 속이 메슥거릴 때야 구석에 아무렇게나 둔 가방을 들었다.

근 24시간 만의 퇴근이었다.

* * *

집에 들어선 은한이 로퍼를 털어 내듯 벗었다. 침대와 소파가 당장 이리 와 안기라며 유혹했지만,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온몸이 먼지와 땀으로 엉망이다. 얼른 씻고, 얼른 자고, 또 출근해야 한다.

테이블 위에 약 봉투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퇴근길에 사 온 것이다. 약이라는 존재를 가까이 두지 않았는데 현실이 그리 만든다. 하루라도 빨리 낫겠다, 휘황찬란하게 쳐 놓은 사고를 마무리하겠다, 다짐의 증표였다.

은한은 한여름임에도 김이 폴폴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그리고 가방 구석에 처박힌 삼각 김밥을 꺼내 들었다. 식후 약을 먹으라는 약사의 말에 편의점에서 대충 집어 온 것이다.

우걱우걱. 사료 먹듯 삼각 김밥을 베어 물었다. 데우기도 귀찮아 그냥 먹었더니 퍼석한 밥알이 입안에서 따로따로 나돈다.

“…….”

바보 같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멀쩡한 TV도 있는데 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고요한 집이다. 움직이는 거라곤 밥알을 조각내는 턱뿐이었다.

우우웅. 답답한 정적을 깨고 핸드폰이 울렸다. 은한이 느릿하게 핸드폰을 쥐어 들었다. 미현이었다. 많은 활자가 한 번에 와르르 쏟아졌다.

[미현: 은하니. 존나 바쁜 거 아는데 혹시 시험도 까먹었을까 봐. 디자인과 문화 410페이지 6단원까지 시험 범위야. 다음 주 월요일 11시. 디자인 마케팅이랑 타이포그래피는 대체 과제 있는 거 알지? 동기 클라우드에 교수님이 주신 소스 올려놨어.]

은한은 세 번이나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흐린 시야가 글자를 인식하지 못 해서기도 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다.

무지막지하게 덥다 했더니 기말고사가 코앞이구나.

[고마워. 학교 가면 밥]

삼각김밥을 문 채 메시지를 쓰고 있는데 후두둑 밥알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은한이 물고 있는 건 짭조름하고 눅눅한 김 한 장이 다다. 바닥을 온통 더럽힌 밥알이 가슴께에 콱 박혀 왔다.

[고마워. 학교 가면 밥 살게.]

동태 같은 눈알로 메시지를 마저 입력했다. 답장은 보내자마자 왔다.

[미현: 비싼 거로.]

은한이 슬핏 가늘게 웃었다. 그래. 단조로이 답을 보내고 한참 동안 나동그라진 밥을 보고 있었다.

나한테 왜 그러니. 내가 널 먹고 싶어서 먹었니. 약사 선생님이 먹으래서 먹었지. 그렇게 같잖은 대화를 걸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꼴사납게 울기라도 할 것 같아서.

은한은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표정 없이 바닥을 닦았다. 그 후에 약도 먹고 양치질도 했다. 그리고 느긋이 침대에 누웠다. 고요한 공간과 달리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은 시험. 거기다 대체 과제. 계단 작업은 못 해도 삼 일 안에는 끝날 것이고, 회사에 양해를 구한 후 빡세게 과제를 하면…… 아니, 그럼 시험공부는 언제 하지. 410페이지까지라니. 좁쌀 같은 글씨가 흩뿌려진 전공 책을 생각하자 얼마 먹지도 않은 삼각 김밥이 뱃속에서 발악했다.

은한이 몸을 뒤틀었다. 창자가 죄다 꼬이는 기분이다. 답지 않게 챙겨 먹은 약이 체한 것 같았다. 이래서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데.

꾸욱 세게 눈을 감은 은한이 잠에 드려 노력했다. 자야 해. 자야 해. 그런 강박감이 이불을 쇳덩이처럼 만들었다.

그때. 우웅, 우웅. 베개 아래에 쑤셔 넣은 핸드폰이 울렸다. 은한이 짜증스레 핸드폰을 꺼냈다. 기다란 번호. 한결이다.

“……여보세요.”

-어. 받았네.

“응.”

받으라고 한 거면서. 은한이 볼 안쪽을 혀로 핥았다. 지금은 부유하는 공기조차 신경에 거슬렸다.

-전화……해도 돼?

“응.”

밤새우고 방금 퇴근했어. 오후에 출근하래. 세 시간쯤 자다가 일어날 거야. 몸살도 났어. 어찌나 아픈지. 내가 직접 가서 약도 사 왔어. 하루하루가 끔찍해. 해줄 말은 많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귀찮았다.

드문드문 이상하게 끊어지는 한결의 목소리엔 망설임이 가득하다. 혹여 또 제가 바쁠까 눈치를 보는 거겠지. 백한결이 눈치라니. 은한이 망쳐 놓은 한결의 버릇이었다.

-해 줄 말 있어서 전화했어.

“뭔데?”

상투적으로 되물었다. 눈은 지긋이 내리감은 채다. 수화기 사이로 들릴 듯 말 듯한 한결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은한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심이었다.

-다음 주에 휴가 나가.

“휴가? 또?”

-……또?

번뜩 눈을 뜬 은한이 합, 입술을 겹쳐 물었다. 그 찰나에는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속이 울렁거린다. 아까 느꼈던 구역질과는 차원이 다른 메슥거림이었다. 고작 세 음절로 이렇게까지 큰 사고를 칠 수가 있나. 또, 라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저도 파악이 안 됐다. 믿고 싶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쓰린 맛이 느껴졌다. 억척스레 삼켰던 약이 기어코 역류한 모양이다.

“아,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

“다음 주…… 언제 나오는데?”

-……금요일.

“아, 금요일…….”

종강 사흘 전이네. 은한은 그 순간에도 어떻게 해야 이틀을 오롯이 한결과 보낼 수 있는지 고민했다. 물론 이상적인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니까. 제가 몸이 세 개쯤 되면 모를까. 고작 하나로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를 옆에 두고 공부나 과제만 붙잡고 있어야 할 테다. 그래도 되나. 그럴 바엔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않나. 금쪽같은 휴가를 그렇게 낭비할 순 없지. 가족이나 다른 친구들과 보내는 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수면 부족에 몸살까지 겹친 뇌가 사고를 거부하고 휴식을 달라 아우성이었다.

멀지 않은 과거엔 한결 그 자체가 휴식이었는데. 목소리 한 줌, 미소 한 번으로 온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었다.

“그…… 한결아 있잖아…….”

-바쁘면 안 봐도 돼.

“어?”

-시험 기간이지? 휴가 미룰게. 너 인턴 끝나고, 그때 나가지 뭐.

이상하리만큼 멀쩡하고 아무렇지 않은 한결이다. 은한은 잠시 제가 방금 뱉었던 또, 라는 말이 꿈이었나 되짚어 봐야 했다.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서운한 티를 낼 줄 알았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었고.

몽롱하다. 약 기운이 드나 보다.

“…….”

은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어느 것 하나 한결에게 좋지 않을 듯해서. 은한이 등신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니 한결이 다시 말머리를 열었다. 아니 닫은 것과 같았다.

-바쁠 텐데. 끊을게.

“벌써?”

-응. 또 전화할게.

“한…….”

준비했던 말을 꺼내 보이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은한은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한참이나 뚜, 뚜, 삭막한 신호음을 듣고 있었다.

한결아, 보고 싶어. 그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정말로 많이 그립다고. 네 온기가 사무칠 정도로 그리워서 힘들다고. 근데 내 마음이 옹졸할 정도로 좁아서. 차마 그 말을 전할 틈이 나질 않는다고.

“하아…….”

걱정과 한탄을 한숨에 섞어 토해 낸 은한이 꾹 눈을 감았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건 정말 작은 고랑이었는데. 어느새 몸집을 잔뜩 부풀렸다. 이제는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볼품없이 땅에 처박힐 듯했다.

누가 먼저 고꾸라질까.

어렴풋이 답을 알 것도 같았다.

* * *

또 전화하겠다던 한결은 며칠간 전화가 없었다. 애가 탔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후회가 됐다. 아, 좀 살갑게 받아 줄걸. 그깟 몸살이 뭐라고. 일이 뭐라고. 가장 소중한 사람을 그리 매몰차고 정 없이 대했나 자학했다.

그 자괴감은 곧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나한테 정떨어졌으면 어쩌지. 그만하자고, 헤어지자 그러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하지. 회사 일은 안정이 됐으나,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똑같았다.

몸살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이쯤이면 절 놔줄 만도 한데. 시도 때도 없는 두통을 유발했다. 식욕은 바닥을 기었고, 간헐적으로 몰아치는 열은 이제 없으면 어색할 지경이었다.

몰아치는 과제와 시험 탓에 말도 못 하게 바빴다. 찰나라도 한결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모든 현실이 은한을 절벽으로 내몰았다.

은한이 샷을 두 번이나 추가한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갑디차가운 액체에도 후끈한 열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 씨발…….”

은한은 밤새 학교 컴퓨터실에 들어앉아 있었다. 요즘 과하게 쓴 노트북이 저세상으로 떠나서. 한창 과제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뻑!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암전됐다. 새까만 화면에 비치는 제 얼굴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버석한 얼굴에 바보처럼 벌린 입술, 부스스한 머리.

백업도 못 했는데.

순간에는 진심으로 자퇴를 고민했다. 그래도 어쩌나. 해야지. 이제껏 아득바득 살아온 게 아까워서 컴퓨터실에 살림을 차렸다. 노트북의 사망으로 어제오늘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월차를 썼다. 인턴 주제에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도무지 방도가 없었다.

“어흐…….”

머리가 띵했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서 신물이 올라왔는데 그래도 무언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은한의 손이 분주히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렸다. 혹여 또 컴퓨터가 절 배신할까, 아예 외장 하드를 꽂아 놓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이면 다 끝난다. 오전 시험과 자정까지인 과제를 제출하면 비로소 여름방학이다. 방학 동안은 오롯이 인턴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될 때, 은한은 학교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은한이 흘끔 모니터 시계를 확인했다. 9시 24분. 11시에 시험이니 아직은 괜찮다. 시험 장소는 널따란 교실이 많은 2 공학관. 가서 정리 자료를 한 번 훑어본다 하더라도 10시에 출발하면 넉넉했다.

바짝 곤두서 있던 어깨를 의식적으로 눌러 내렸다. 하지만 긴장한 몸은 금세 다시 꼿꼿이 굳었다. 마치 다가올 무언가를 예감한 것처럼.

벌컥.

컴퓨터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은한이 흘끔 시선만 돌렸다. 종강 막바지에 다른 컴퓨터실에 올 사람이 없는데.

“은한아!”

밭은 숨을 몰아쉬는 미현이었다. 은한이 얼마 남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쭙쭙 빨아 마시며 눈썹을 올렸다. 왜. 눈짓으로 말했다.

“디자인과 문화 시험 10시래!”

“……어?”

“과대가 시간 공지 잘못, 하아…… 했대. 너 동기 톡방 안 볼 것 같아서 내가 존나, 하아, 뛰어왔다.”

“…….”

오 씨발. 하느님. 저 괴롭히는 거 정도껏 좀 하세요. 은한이 으득 이를 짓씹었다. 짜증 나. 너무 짜증 나. 쾅쾅 발을 구르며 하늘에다 쌍욕을 남발하고 싶었다.

포토샵을 저장한 은한이 가방에다 필기구나 전공 책을 아무렇게 쑤셔 넣기 시작했다. 헐레벌떡 다가온 미현이 짐 싸는 것을 도왔다. 그녀가 하루가 멀다고 바짝바짝 말라 가는 은한을 훔쳐봤다.

“아예 안 잤냐?”

“어.”

“하…… 너 얼굴 너무 안 좋아.”

“괜찮아. 오늘만 버티면 끝인데.”

은한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잠이 없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는데. 인턴으로 생활 패턴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니, 바뀌었다기보다는 틀에 맞춰 온몸을 욱여넣는 중이었다.

미대 건물을 나온 두 사람이 전속력으로 공학관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귀를 괴롭히는 매미 소리도,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도, 제 몸무게조차 힘겨워하는 가짜 무릎도. 뭐 하나 은한을 괴롭히지 않는 게 없었다.

“아윽!”

결국은 철퍼덕, 볼품없이 무너졌다. 아스팔트에 세차게 갈린 무릎이 통각보다 피를 먼저 내뿜었다.

“강은한!”

소스라치게 놀란 미현이 그를 부축했다. 은한이 꽉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이 아프다. 발목도 아팠다. 그럼에도 마음껏 아파할 수 없는 현실이 가장 아팠다.

“괜찮아?”

“하…… 괜찮아.”

은한이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시험이 20분이 채 남지 않았다. 미현이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무릎에 댔다. 제대로 쓸렸는지 뻐끔뻐끔 피를 쏟아낸다.

은한이 부드럽게 그녀를 밀어냈다. 흐리게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다니까. 가자.”

“아씨. 병원 가자. 어?”

“그래. 일단 시험부터 치고.”

물리치료랑 선 긋고 산 지 좀 됐는데. 계단에 시트를 붙일 때부터 한계라 악을 지르더니 기어코 병원 신세를 지게 될 듯했다.

절뚝이는 걸음으로 막 공학관 건물에 들어섰을 때였다. 핸드폰이 우렁차게 울린 건. 대부분 진동으로 해 놓는데, 혹여 잠이 들어 회사 연락을 못 받을까, 소리로 바꿔 놓은 거였다.

은한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화면을 꽉 메울 정도로 긴 번호.

아아…….

한결아.

어떻게 타이밍이……. 그에게 시험 시간을 알려주지 않았다. 연락이 없었으니 그러질 못했다. 그러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이 시간에 전화한 거겠지.

은한의 엄지가 쉽게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나돌았다. 나쁜 말 하지 말아야지. 이번에는 진심으로 미안해야지. 최대한 상냥하게, 상황을 설명해야지. 그런 다짐을 하며 꾸욱 녹색 버튼을 짓눌렀다.

“한결아.”

-은한아.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말이 겹칠 것 같아 은한이 와다다, 먼저 말을 쐈다.

“한결아. 미안. 진짜 미안. 오늘 저녁이나 내일 통화하면 안 돼?”

-…….

“정말, 미안해. 한결아. 내가 지금,”

-많이…… 바빠?

“어어 지금 시험,”

-그래도 은한아, 조금만 통화하면 안 될까. 나 할 말 있는데…….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다. 통화를 조른다는 것부터가 그답지 않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은한의 다리가 홀 한가운데에 뚝 멈춰 섰다. 이상하다. 얘 목소리가 이렇게 낮았던가.

은한은 그때 무심코 예감했다. 아. 백한결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내가 이걸 들어 줘야겠구나. 위로해 줘야겠구나.

하지만…….

“야 강은한! 시험 10분도 안 남았어!”

여전히 현실이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넋을 놓고 있던 은한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한결아. 나 지금 시험 치러 가는 길이라서 전화 받기가 좀 그래. 내일 종강하거든? 주말에 휴가 나와라. 그때 보자.”

-…….

“어? 한결아…… 제발…….”

제발, 나 좀 살려줘. 한결아. 나 너무 힘들어.

소리 없이 토로했다. 은한이 질끈 눈을 감았다. 등줄기에 흐르는 땀과 양말까지 시뻘겋게 물들이는 피가 섬뜩한 감각을 제공했다.

-……그래.

밥 거르지 말고 챙겨 먹어.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뚝. 전화가 끊겼다.

어느 때보다 묵직한 신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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