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네가 그리워
은한의 입장에선 모든 걸 잃은 것과 같았다. 험한 서울 살이에 연인과 친구를 동시에 떠나보내고 홀로 남았으니 당연했다. 제 다리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고독하고 외로웠다.
다치지 말걸. 그럼 지금 그들과 함께 논산 땅바닥을 뒹굴고 있을 텐데.
그래도 은한은 열심히 살았다. 한결이 학교도 잘 다니고, 잘 먹고 잘 자랬으니까. 사력을 다해 노력했다.
편지는 못 해도 일주일에 두 통씩 썼다. 제대로 잘 가고 있는 거 맞아? 하는 의구심이 들 때쯤 한결에게서 전화가 왔다. 포상 전화란다. 비록 짧은 통화라 어쩌다 포상 전화를 받게 됐는지까지는 듣지도 못했지만 살아 있다, 편지는 봤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은한이 연필을 고쳐 쥐었다. 오늘도 하루의 마무리는 그에게 보내는 편지다. 잠시 이제껏 한결에게 부쳤던 편지를 되짚었다.
<안녕하세요. 군인 아저씨? 나라를 지키느라 고생이 많아요. 부디 제가 내일도 백반집에서 평화로이 아침을 먹을 수 있게 열심히 나라 지켜주세요.
구라고, 모닝엔젤 없어서 아침 못 먹는다. 네가 필요해, 내 모닝엔젤. 보고 싶다.
아 절대 아침 때문에 보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보고 싶은 거야.>
<오늘 미현이랑 술 마셨다. 요즘 왜 이렇게 기운이 없냐고 까였어. 공대남 셋 떠나고 술 마실 사람이 없겠구나, 생각했는데 미현이가 나보다 주량이 센 걸 잊었다. 완전 취해서 집 기어 들어왔다가 새벽에 목말라서 깬 김에 편지 쓴다.
근데 쓸 말이 없네. 그냥 네가 알던 것처럼 살고 있어. 아침에 눈 떠서 학교 가고 수업 듣고 카페에서 동기들이랑 수다 떨고. 집 오면 과제 하고.
지금 백한결은 꿈나라겠네. 나도 꿈나라 가야지.
시간 나면 내 꿈에 놀러 와. 엉덩이 씻고 기다릴게.>
<오늘은 하태준이랑 손진우한테도 한 통씩 써 줬다. 그리고 네 거 쓰는데 손가락이 겁나 아파. 담부터는 컴터로 쓸까 봐. 요즘은 다 인터넷 편지로 보낸대. 그거 사진 첨부도 되나? 포토샵 간지나게 해 줄게.
아니다. 역시 군 편지는 손이지. 내 손가락을 포기한다.>
<야!!! 군 편지 다 뜯어서 검수하고 너한테 간다며! 좆된 거 아니야? 아니, 이렇게 쓰면 너한테 안 가려나. 아 모르겠다. 일단 쓸게. 누가 괴롭히면 전화해. 총 쌔벼서 대기 타고 있어. 같이 영창 가 보자.>
<검수 다 안 한대. 네가 사고만 안 쳤으면. 존나 다행. 너 사고 친 거 아니지? 나 계속 애인한테 편지 보내게 잘 좀 살어. 알았지?
그래도 미현이한테 셀카 한 장 보내 달랠까? 인화해서 동봉할게. 여친이라고 구라때려. 선임한테 친구들도 다 예쁘다고, 제대하면 소개해 준다고 그래. 그럼 군 생활이 좀 편하대.
아니다. 거짓말하지 마. 네 애인은 은방울이다. 똑똑히 기억해라. 근데 내 친구들이 예쁜 건 맞으니까 소개해 준다는 말은 해도 돼. 물론 제대하면 걍 연 끊어.>
<씹새 답장 존나 한 통도 안 해.>
<야 입대하자마자 편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미안하다. 몰랐어. 첫 편지는 부모님께 써라. 엉? 알았지?>
<야. 너 첫 편지 나한테 썼지? 내가 고무신 카페에 가입했는데 너랑 같이 입대한 사람들 첫 편지가 오늘 도착했대. 근데 나도 오늘 받았거든.
불효자 새끼.
하지만 기분은 좋네. 오늘 동기들이랑 술 마셨는데 자꾸 쪼개서 애들이 미쳤냐고 물어보더라. 미친 거 맞다고 함.
보고 싶다, 백한결.>
<야. 봄 없어. 한국에서 봄 증발했어. 벌써 개 더워. 쪄 죽을지도 몰라. 대구만큼 더워. 서울에서 못 살겠어.
나도 군대 갈래. 너랑 있으면 덜 더울 것 같은데.>
마지막 활자에 마침표를 찍은 은한이 봉투를 붙였다. 그리고 이제는 눈감고도 쓸 수 있는 주소를 꾹꾹 눌러썼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사서함 76-14호 11중대 2소대 131훈련병 백한결 앞
그리고 벚꽃이 대지를 뒤덮어 갈 때, 한결의 신병 교육 기간이 끝났다.
그 후 한결과 꼬박꼬박 전화통화를 할 수 있게 됐다. 대부분 같은 시간대였는데, 가끔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전화가 걸려 오기도 했다.
오늘은 한참 디자인 특강 수업을 듣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이제는 익숙한 긴 번호다.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고 있던 은한이 활짝 피어났다. 흘끔흘끔 동기들과 교수님의 눈치를 보며 복도로 나왔다.
오후 2시 반. 모든 강의실이 꽉꽉 차 있을 때라 복도는 고요했다.
“여보세요?”
-뭐 하고 있었어?
“뭐야. 이제는 인사도 안 해 주냐?”
-여보세요, 같은 거 할 시간에 네 목소리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고 그러지.
한결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낮고, 잔잔하고. 은한은 폐부가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갑갑한 학교에 한 줄기 빛이 내렸다.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여보세요, 할게.
“됐거든.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했어?”
-아아. 비 와서 자유시간 생겼거든. 일등으로 전화 부스에 달려왔지.
“비 와? 서울은 쨍쨍한데. 우산은 쓰고 달렸냐.”
-아니. 가서 씻으면 돼.
한결이 멋쩍게 웃는다. 은한은 함께 웃었다. 별일도 아닌데 목소리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겁다.
은한이 벽에 기대어 섰다. 본격적으로 통화를 할 심산이었다.
-수업 중이었던 거 아니야?
“……아니야. 공강이라 과방에서 시간 때우고 있었어.”
-그래? 다행이다.
“그치. 다행이지.”
한결은 부재중을 두 통 이상 남기지 않는다. 받을 때까지 하지 왜 안 했어. 언젠가 넌지시 그리 물어봤는데 일상생활을 방해하기 싫단다. 그게 은한에게 얼마나 사무치는 말이었는지 한결은 감히 짐작도 못 할 터였다.
그는 전화할 때마다 꼭 묻는다. 뭐 하는 중이었어. 바쁜 거 아니야? 하고. 이른 아침에 잠긴 목소리로 받으면 웃으며 잤구나. 더 잘래? 그리 물어 준다. 전화 한 통화가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래서 은한은 거짓말이 늘었다. 아무것도 안 해. 노는 중이었어. 집이야. 와 나 네 전화 아니었으면 지각할 뻔했다. 일어날 시간이었네. 그런 새하얀 거짓말.
“나 어제 신입생 환영회 갔었다?”
-그랬어? 하긴 너 2학년이지.
“어. 나도 몰랐는데 내가 2학년이더라고. 걔들이 나보고 선배라고 부른다? 은한 선배님. 은한 선배님 하는데 기분 존나 이상했어.”
-선배? 네가?
“……네가? 라니? 그거 굉장히 이상한 뉘앙스다?”
-와 방울이가 선배라니……. 세상에서 제일 쪼끄마한데. 상상이 안 되네.
“뒤질래?”
험악해진 은한의 목소리에 한결이 큭큭거렸다. 은한이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완전 대한민국 평균 키라고. 175. 얼마나 알차. 네 새끼가 너무 큰 거야. 내뱉는 목소리가 부루퉁하다.
“나 되게 근엄한 선배거든? 이번 신입생도 남자가 셋밖에 없어서 희소성 있는 남자 선배였다고.”
-어어…… 그건 반가운 소식이 아닌데. 아니, 반가운 소식인가.
한결은 자신의 라이벌을 남자로 봐야 할지, 여자로 봐야 할지 혼란스러운 듯했다. 은한이 쯧쯧 혀를 찼다.
“그래 봐야 다 너보다 덜 예쁘고 덜 잘생겼어.”
-그래? 그거는 확실히 반가운 소식이네.
한결이 허헝, 멍청한 소리를 냈다. 은한이 그치그치. 내 애인이 워낙 잘생겼어야지, 하며 그를 달랬다.
빡빡머리의 한결이 수화기를 잡고 웃는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늘 밝은 이야기, 좋은 이야기만 하려 노력한다.
“너는 언제 막내 탈출하냐?”
-글쎄. 백일 휴가 나갈 때쯤? 그래도 막내 생활할 만해. 뻗대는 선임이 없어서. 다른 곳은 밥도 떠먹여 달라고 한다던데. 나는 그냥 빨래 대신하고 내무반 닦고 어깨 주무르는 정도?
“방을…… 닦아……? 어깨를 주물러……?”
은한의 낯이 암울해졌다. 그 커다란 덩치를 구기고 걸레질을 하는 백한결이라니. 웃기기보다는 가슴이 아팠다. 그런 거 할 애가 아닌데. 싶어서.
거기다 어깨 주무르기는 웬 말이란 말인가. 그래 봐야 이십 대 초반일 텐데. 어깨가 아프면 군대에 가질 말았어야지!
“짜증 나.”
-뭐가.
“너 청소하고 어깨 주무르는 거.”
-괜찮아. 여기선 다 한 번씩 하는 거야. 몇 개월 지나면 나도 시키기만 할 텐데 뭐.
“그래도,”
-어, 방울아 나 끊어야겠다. 또 전화할게.
“벌써?”
-응. 나 아직 막내잖아. 미안.
“네가 뭐가 미안하냐.”
-이해해 줘서 고마워. 좋아해. 보고 싶어.
“……나도.”
한결의 숨소리라도 한번 더 들으려 했으나 전화는 금세 끊겼다. 아쉬운 마음에 통화 시간을 나타내는 핸드폰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푹 한숨을 내쉰 은한이 질질 끄는 걸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복도와 달리 묵직한 공기에 숨이 막혔다. 모든 학생이 눈을 반짝이며 강의를 듣는다. 그렇게 재미없다, 지루하다 해 놓고 막상 2학년이 되니 다른가 보다.
“똥 쌌냐?”
자리에 앉자마자 미현이 음흉하게 웃으며 소곤소곤, 물었다. 볼펜을 쥔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똥 쌌다.”
“쾌변은 했고?”
“아니. 개찝찝해. 싸다 끊었어.”
“그래? 그럼 수업 끝나고 술 마시러 가자. 소주가 변비에 좋대.”
“존나…… 너는 커서 뭐가 될까, 미현아?”
“나 이미 다 컸어. 발육도 짱짱해.”
미현이 가슴을 으스대며 말했다. 은한이 모든 걸 해탈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또라이 공대남 셋이 사라지고 나니 미현이 또라이로 발현 중이다. 그녀의 말로는 1학년 땐 나름 내숭이라는 걸 떨어 봤다는데, 근래 과제 때문에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모든 걸 내려놨단다.
내 주변에 정상이 없어.
그나마 덜 또라이인 한결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 * *
2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며칠 남지 않았다. 매미가 목청이 찢어지라 울어대는 여름은 진즉 와 있었다. 은한은 학과 컴퓨터실에 무려 20시간째 들어앉아 있는 중이다. 그래도 이번 중간고사는 시험보다 대체 과제가 훨씬 많다. 아니, 다행이 아니려나.
손톱만 한 아이콘들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산란한다. 생활 아이콘을 재창조해서 제출하라는데 이 무의미한 짓을 왜 하나, 싶다. 하지만 교수가 하라면 해야지. 은한이 뻑뻑한 눈을 간신히 치켜떴다.
“은한아. 너 곧 죽을 것 같아.”
“아니……. 죽지 않아! 죽을 수 없어!”
미현의 걱정에 은한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제가 무엇 때문에 이 케케묵은 컴퓨터실에서 하루를 꼬박 보냈던가.
“가서 좀 자.”
“다했어. 저장만 하면 돼. 저장.”
외장 하드를 꼽은 은한이 100메가가 훌쩍 넘는 일러스트 파일을 이동시켰다. 그의 다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덜덜 떨린다. 빨리.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기엔 빡빡한 시간이다.
미현이 달칵, 달칵. 부지런히 마우스를 놀리며 말했다.
“내일 애들이랑 과방에서 밤새 과제하기로 했는데 너도 올 거지?”
“아니. 나 사흘 동안 학교 안 와.”
파일 복사를 마친 은한이 허겁지겁 가방을 쌌다.
“……사흘 뒤에 이거 과제 제출에 디자인의 이해 시험인데? 인생 포기했냐?”
우리 아직 스물한 살인데. 벌써 포기하긴 너무 이르지 않니. 미현이 은한을 달랬다. 그러나 은한은 여전히 분주하게 나설 채비를 하느라 바빴다.
“그런 거 아냐. 나 요즘 고삼 때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거든? 무튼 간다. 안녕.”
팔랑, 손을 한 번 흔든 은한이 타다닥, 뜀박질 쳐 컴퓨터실을 벗어났다. 미현이 아직 종료조차 되지 못한 은한의 컴퓨터를 멍하니 쳐다봤다.
하얀 반팔 하나만 걸친 채 머리를 말렸다. 바쁘다, 바빠. 한 손으로 드라이기를 쥐고 반대 손으론 양말을 꺼낸다. 바지는 뭐 입지. 아, 어제 골라 놓을걸. 후회해도 늦었다.
서랍장을 죄다 연 은한이 가늘게 눈을 뜬 채 고민했다.
오늘은 한결의 첫 휴가 날이다. 무려 백일 휴가. 평생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날이 드디어 와 주었다. 시기는 썩 좋지 못했지만 은한은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사 개월 만에 보는 한결의 얼굴이다. 한껏 꾸민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는데 망할 과제가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만들어 놨다. 그래도 사흘 내내 함께 있을 테니까. 시간이 없애 주길 바라야지.
3박 4일 중 하루 정도는 집에서 보내랬더니 부모님이 애인이나 만나라고 하셨단다. 사지 멀쩡하게 있으면 됐으니까. 맛있는 거나 먹고 들어가라며 돈만 왕창 입금하셨다고.
참, 멋진 부모님이 아닐 수 없다.
은한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러 댔다. 그러다 우당탕 넘어져 무릎을 찧었는데도 바보처럼 웃었다.
그때, 딩동. 청량한 벨 소리가 울렸다. 은한이 갸우뚱 고개를 꺾었다. 올 사람은 물론 없고, 택배를 주문한 것도 없다. 엄마가 반찬을 보냈나, 싶어 문을 열고 빼꼼 얼굴만 내밀었다.
“서프라이즈!”
벨 소리의 주인은 한결이었다. 은한이 눈조차 깜박이지 못한 채로 버석하게 굳었다.
꿈……을 꾸는 건가. 근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환영이라도 보는 건가.
한결과는 학교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할머니 국밥이 너무 그립대서 일단 든든히 밥부터 먹고 뭐든 하자고 했는데. 지금은 한결이 막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었다.
“어…… 우리 방울이가 나보다 더 서프라이즈하네.”
한결이 훤히 드러난 은한의 맨다리를 보며 한쪽 눈썹을 비죽 뒤틀었다.
“누군지 알고 이 꼴로 문을 여셨을까, 응?”
나 없는 동안 이러고 다닌 거 아니지? 나 탈영한다. 농담 아니야. 그가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한결은 조금 까맣게 그을렸다. 눌러쓴 볼캡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머리는 여전히 빡빡이고. 스트라이프 린넨 셔츠 아래로 드러난 덩치는 약간 부풀었다. 살이 찐 건 아니고 어깨나 팔뚝이 떡 벌어진 게 근육이 붙은 듯했다.
여전히 잘생긴 한결이다. 시원한 웃음의 한결이다. 다정한 목소리의 한결이다.
진짜, 백한결이다.
“보고 싶었어, 방울아.”
입술을 깨문 은한이 투다닥 한결을 향해 점프했다. 한결이 단단히 은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왈칵, 한결의 향이 쏟아진다.
“나도.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그리웠던 온기도, 체취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
헤어질 땐 귀가 아릴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는데, 한결은 따가운 햇볕이 세상을 지배하고서야 절 보러 왔다.
* * *
태어나 먹은 국밥 중에 가장 맛있었다. 할머니 국밥이 언제고 맛있지 않았느냐 만은, 오늘은 유독 맛났다. 한결이 앞에 있어서 그런가 보다.
은한이 빵빵한 볼을 열심히 우물거린다. 그를 훔쳐보던 한결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맛있어?”
깍두기를 이미 한계치인 입안에다 꾸역꾸역 쑤셔 넣은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톰한 아랫입술에 깍두기 국물이 묻었다. 한결이 휴지로 그것을 익숙하게 닦아 냈다.
“요즘 바쁘지?”
“으우웅.”
은한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쪽 턱을 괸 한결이 픽 실소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한참 기말고사 기간이구만.”
“……안 바뻐. 과제 다 해 놓고 왔어.”
“그래서 눈 밑이 새까맣구나?”
“……많이 까마냐?”
수저를 내려놓은 은한이 양손 검지로 다크서클을 가렸다. 그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닌데.
“아니. 적당히 귀여울 정도로만 까매.”
넉살맞은 한결의 말에도 은한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밥도 뒷전이라니. 한결은 괜히 다크서클을 언급했다고 자책했다.
데구르르, 눈을 굴리던 은한이 곧 다시 수저를 쥐었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콩깍지 아직 껴 있지? 다크서클이 요즘 유행하는 액세서리다, 생각해.”
나 사흘 내내 너랑 놀려고 진짜 열심히 살았단 말이야. 한탄하는 입술 사이로 두툼한 수육이 사라진다. 꼭꼭 씹어 먹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응. 고마워.”
“너 좋으라고 한 거 아니거든.”
나 좋으라고 한 거지. 은한이 수저를 휘저으며 꾸짖듯 말했다. 한결은 그마저도 좋아 실실 웃음을 흘려 댔다. 제가 미안하지 말라고 부러 저리 말하는 걸 안다.
은한이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한 공기를 더 주문했다. 새 밥공기와 함께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왕만두 다섯 개가 턱, 테이블에 얹어졌다.
“왜래 오랜만에 왔어? 이것도 무.”
“으아아, 할머니! 사랑해요!”
은한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할머니가 눈가의 주름을 휘며 은한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시선이 모자 아래로 휑한 한결의 머리카락 언저리를 나돌았다.
“닌, 군대 갔냐?”
“예.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중입니다.”
한결이 간단히 거수경례하며 말했다. 할머니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나라가 말이여. 창창한 애들 데려다 헛고생이나 시키고. 문제여 문제.”
은한이 입에 욱여넣던 만두를 다시 빼내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죠! 백한결은 잘생긴데다가 똑똑한데! 솔직히 얘 정도면 면제 아니에요?”
“그러지, 그러지.”
그녀가 허허 웃으며 긍정했다. 은한이 좋다고 사르르 눈을 접었다. 그런다고 한결이 뜬금없이 군 면제를 받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은지.
“근데 다른 애들은 어따 팔아먹고 둘이 왔어?”
할머니가 물었다.
“아아, 걔들 게임 한다고 안 왔어요. 그래도 새벽엔 들를지도 모르겠네요.”
“어이구. 누가 장사한대? 오지 말라 그래!”
한결의 대답에 그녀가 흥, 콧방귀를 끼며 멀어졌다. 은한과 한결이 눈을 맞추고 미소를 주고받았다. 저리 말하면서도 서비스로 줄 만두를 쪄 놓고 기다릴 그녀다.
은한이 뜨거운 만두를 그냥 입에 넣었다 에베베, 요상한 소리를 내며 뱉어 냈다. 한결이 찬물을 밀어 주고 수저로 만두를 반으로 쪼갰다. 은한이 만두를 쳐다보며 태준과 진우의 행방을 재차 확인했다.
“미친놈들. 나오자마자 피시방이래?”
“하다못해 서울까지 오지도 않았어. 부대 주변 피시방일걸.”
“……끔찍하다.”
은한이 군복을 입은 채 피시방에서 삼시 세끼를 해결할 두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도 나온 김에 몸에 좋은 것도 먹고 그러지. 쯧.
사지 멀쩡하고 허우대가 장대한 두 사람이니 어디 다치진 않았겠지만, 사고는 한두 개쯤 쳤을 것이라 확신했다. 진우는 빙글빙글 웃으며 저를 괴롭히는 인간에게 똥을 던졌을 것이고, 태준은 내무반 가운데에 대자로 뻗어 억지를 썼을지도 몰랐다.
은한의 숟가락이 두 사람을 걱정하느라 뚝배기에 꽂힌 채 움직이질 않았다. 한결의 입술이 비죽 뒤틀렸다.
“어허. 나 앞에 두고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마.”
“……안 했거든.”
“거짓말도 하지 마.”
“미안합니다.”
멋쩍게 웃은 은한이 식은 만두를 입에 집어넣는다. 제 얼굴 반만 한 만두를 꿀떡꿀떡 잘 먹는 걸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힐링, 휴가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하루에 한 번 은한이 밥 먹는 것만 봐도 모든 피로가 풀릴 듯했다.
“밥 먹고 뭐할까?”
한결은 이미 모든 반찬이 은한의 앞에 밀집되어 있음에도 꾸역꾸역 그의 앞으로 밀어 줬다.
“날도 좋은데 어디 가서 산책이나 할까? 아니면 영화?”
커피? 것도 아니면 뭐 다른 거 더 먹을래? 참 많은 선택지가 쏟아진다. 은한이 퉁퉁하게 볼을 불린 채 턱을 저었다. 한결은 그가 음식물을 다 삼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밖에 덥잖아. 산책은 무슨. 내가 예약해 놓은 게 있어.”
“예약?”
“엉. 오늘은 형아가 리드할 테니까 따라오기만 해.”
“…….”
형아. 리드. 그다지 은한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한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은한을 바라봤다. 은한은 무엇인지 알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 한결의 입에 만두를 쑤셔 넣었다.
은한이 한결을 데리고 온 곳은 호텔이었다. 무려 5성급 호텔의 수페리어 스위트 더블룸. 이름조차 생경했다.
막 호텔 로비에 들어서서는 광대가 폭발하는 줄 알았다. 너무 좋아서.
‘방울아. 아직 대낮인데. 벌써 여기를……. 그래도 나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 내일 아침까지도 걱정 없다고.’
능글맞게 말하며 웃었는데.
룸에 들어서고는 새파랗게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이런 문화에 문외한인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고급 호텔이다. 거기다 방만 두 개가 넘는다. 문도 직원이 열어 주던데. 이제 막 들어왔음에도 에어컨이 빵빵하고 냄새까지 좋은 이 방은 하루에 못 해도 백만 원이 왔다 갔다 할 터였다.
“방울아……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나는 삼만 원짜리 모텔 대실도 오케인데……. 한결은 앉지도 못하고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반면에 은한은 침실에 들어갔다, 욕실에 들어갔다, 전면 유리 아래로 펼쳐진 서울 야경에 감탄했다, 소파에 뒹굴었다 난리도 아니었다.
“무리 하나도 안 했어. 누나가 세미나 갔다가 당첨됐다고 여기 숙박권 준 거거든. 서울까지 올라오기 귀찮대. 내가 땡큐! 하고 받았어. 내가 한 건 네 휴가 맞춰서 예약한 것밖에 없다. 잘했지?”
“워…….”
그럼 다행이긴 한데……. 군대 백일 휴가 나와서 이런 호사를 누릴 줄이야……. 한결이 그제야 어색하게 소파에다 엉덩이를 붙였다. 은한은 금세 포르르 널따란 거실을 가로질러 와인 바 앞에 섰다.
“여기 와인도 공짜야! 내가 친구랑 논다고 했더니 누나가 다 결제해 놨댔어! 우리 오늘은 있어 보이게 와인으로 취해 보자.”
우리 방울이가 술은 또 몹-시 좋아하지. 한결이 몸을 일으켜 은한의 옆으로 다가갔다. 은한은 잘 알지도 못하는 와인을 일렬로 쭉 나열해 놓고 이게 맛있을까, 저게 맛있을까 고민 중이었다.
한결이 은한의 머리 위에 턱을 얹었다. 그립던 샴푸 향이 올라온다.
“또 양칫물 마시려고.”
“엉?”
“아니야.”
“양치? 뭔 개소리야.”
“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한결이 능청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은한이 그러겠다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 댔다. 곧 소파에 누워 열심히 핸드폰을 두드린다.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나 보다.
짤똥한 반바지 아래로 은한의 다리가 팔랑인다. 여름인데 어째 타지도 않는 건지. 하얗고 매끈한 다리가 아래위로 일렁거리는 게 한결을 약 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했다.
거기다 언뜻언뜻 보이는 허벅지라니. 저 살결이 얼마나 말랑말랑한지, 조금 더 올라가면 어떤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는지 잘 알고 있거늘.
한결이 탁한 눈동자로 화창한 창밖과 은한의 다리를 번갈아 봤다. 지금 덤비면 안 되겠지. 지금 일을 쳐 버리면 와인도 못 마시고 이른 초저녁 곯아떨어지고 말 터였다.
얼마 만에 만나는 건데. 온갖 로맨스 영화를 다 찍고 회포도 풀고 대화도 나누고 싶었다.
꾹꾹 눈두덩을 누른 한결이 소파로 다가갔다.
“우억!”
그리고 번쩍 은한을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은한이 마구 사지를 휘저었으나 입대 후 근육을 더 기른 한결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맛에 운동했지. 마음대로 엎었다, 뒤집었다 하려고.
“왜 이래!”
“대화 좀 하자고.”
“무슨 대화! 무슨 대화를 하려고 침실로 가는데?”
이 새끼 존나 마음이 투명하게 보이는 새끼네! 은한이 툴툴거리면서도 축 몸을 늘어트렸다. 몸으로 대화하자는 거지, 몸으로. 그리 생각하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저도 한결을 오매불망 기다려 왔으니까.
일단 바지부터 벗고, 그다음에 키스하면서 윗도리도 벗어야지. 하는 귀여운 계획도 세웠다.
침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하얬다. 커다란 베개는 네 개나 올려져 있었는데 보고만 있어도 잠이 솔솔 밀려올 듯했다.
한결이 살포시 은한을 침대 위에 내려놨다. 은한이 꼬물꼬물 바지버클을 풀었다.
“뭐해.”
“뭐하긴. 몸으로 대화할 준비하지.”
은한은 한결이 말리기도 전에 바지를 침대 아래로 내던졌다. 하얀 다리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이렇게 푹신한 침대에서 하는 섹스라니. 자취방에 옵션으로 딸린 침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덕분에 한결은 코가 시큰해졌다. 21년 평생 흘려본 적 없는 코피와 오늘 첫 만남을 하게 생겼다.
은한이 막 티셔츠도 벗으려 할 때, 한결이 그의 손을 잡아챘다.
“왜. 네가 벗기게?”
“……하아.”
이 요망한 방울을 어쩌면 좋아. 딸랑딸랑 어찌나 세차게 우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한결이 벅벅 마른세수했다. 그 후 은한을 설득하듯 가만히 눈을 맞춘 채 말했다.
“저녁에 야경 보면서 와인 마시자.”
“엉. 일단 섹스부터,”
“아니. 그러려면 우리 방울이 눈 밑에 있는 다크서클부터 없애야 할 것 같은데?”
그가 쪽쪽 은한의 눈 아래에 입술을 눌렀다. 절 위해 과제를 미리 몰아 했을 은한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안쓰러운지 모른다. 물론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다.
휴가 미룰 수 있다던데. 은한이 종강할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 보고 싶은 마음이 말도 못 하게 사무쳐서 앞뒤 분간 않고 나온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자라고?”
은한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한결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얼마나 오랜만에 만난 건데. 백만 원이 넘는 호텔방에 들어와서는 순수하게 잠만 자라니. 한결이 미쳤나, 싶었다. 군대 가서 남성성을 상실하고 돌아온 걸까.
“어. 이야기 좀 하다가, 자. 두 시간쯤 자면 깨워 줄게.”
“…….”
은한은 피곤했다. 스무 시간 동안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컴퓨터만 노려보고 있었는데 당연했다. 지금도 눈알이 뻑뻑하고 눈꺼풀이 무겁다.
하지만 이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학창시절 때부터 시험 기간에는 늘 있던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은한에게는 그 무엇보다 한결이 중요하고, 고팠다.
“나 잠 하나도 안 와. 내가 자면, 너는 뭐하게?”
“너 구경할 건데.”
한결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은한이 허, 실소를 흘렸다. 훌러덩 아랫도리를 벗은 채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이리와.”
한결의 손이 은한의 골반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제 몸 위에 그를 올려 두고 그대로 이불을 덮었다. 은한이 머리끝까지 사각이는 이불에 파묻혔다.
“……진짜 자?”
“바로 자지는 말고.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 주다가 자.”
“…….”
한결의 가슴께에 턱을 댄 은한이 잠시 고민했다. 첫 번째 고민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자도 되나, 였고 두 번째 고민은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지, 였다.
그러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 리 없지. 매일 강의와 과제에 치이는 삶을 사는데.
“없어. 재미있는 이야기.”
“그럼 그냥 자.”
“싫은데.”
은한은 피곤한 얼굴로 부릅 눈을 치켜떴다. 화난 포메라니안 같았다. 한결이 나지막이 웃자 그의 목젖이 일렁였다. 은한이 검지로 그 목젖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안 힘들던?”
“어? 나?”
“그래 너. 엄청 힘들었을 것 같은데. 땡볕에서 구르고, 걸레질하고, 뭣도 없는 새끼 어깨도 주무르고.”
“글쎄. 생각보다는 괜찮았어. 너 못 보고, 술 못 먹고, 늦잠 못 자고. 그 정도만 힘들지 훈련이랑 청소쯤이야.”
쓸데없이 긍정적인 놈. 아니 쓸데 있는 건가. 어찌 됐든 그의 군 생활이 평탄하다면 다 괜찮았다.
“그래도 자꾸 어깨 주물러 달라면 어깨 빼 버려. 힘 조절 잘못해서 죄송하다 그러고. 다시는 그런 소리 못 하게.”
은한은 살벌한 소리를 웅얼웅얼 잘도 했다.
한결이 어정쩡하게 웃었다. 가끔 보면 목덜미가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은한이다. 어깨를 탈골시키라니…….
한결은 더는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해 봐야 안 좋은 소리만 이어질 테다. 제 생활을 듣던 은한이 편지에서 했던 말처럼 총기를 훔쳐 기다리라고 할지도 몰랐다.
군대서 괜찮다 느껴지는 건 삼시 세끼 꼬박꼬박 나오지만, 맛은 그저 그런 식사와 좋은 공기가 다다. 그것 말고는 죄다 짜증나고 끔찍하고 힘든 일뿐이다. 한결은 은한이 그 지옥 같은 곳에 발도 들이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태준이랑, 진우는…… 잘 산대냐.”
은한의 목소리가 점차 늘어지기 시작했다.
“음…… 잘 몰라. 휴가 받기 전에만 잠깐 전화하고 나머지 통화 시간은 죄다 너한테만 썼거든.”
논산에서 신병 훈련이 끝난 후 한결만 다른 부대로 배정됐고, 태준과 진우는 같은 부대에 들어갔다. 군인끼리 연락이 될 리도 없고. 한결 역시 그들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 네가 날 어마어마하게 좋아한다는 걸 잠시 잊었다.”
은한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괜히 민망해진 한결이 토닥토닥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둘 다 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사고 칠까 봐 걱정하는 거지. 그 새끼들 갑자기 말뚝 박는다고 할까 봐 겁난다고. 아니면 뉴스에 나온다거나.”
한결은 말을 아꼈다. 그럴 여지가 충분히 있는 둘이기 때문이다.
“설마 그러진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성인인데. 알아서 잘 살고 있을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은한이 하암, 크게 하품했다. 누워 있는 데다가 한결의 심장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니 잠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아까만 해도 안 잔다고 뻐겼는데 무거운 눈꺼풀을 이길 방도가 없다. 그리웠던 그의 품이 온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그를 잠잠히 내려다보고 있던 한결의 입꼬리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그가 은한의 이마에 꾸욱, 입술을 눌렀다.
“잘 자.”
“……응.”
아주 오랜만에 주고받는 굿나잇 인사였다.
* * *
대리석 테이블 위에 빈 와인 병이 얼기설기 놓여 있다. 무려 세 병이다. 한결이 빈 잔에 와인을 반절 채웠다. 꼴꼴꼴. 익숙지 않은 소리가 난다.
“진짜 하루에 열 번씩 생각한다니까? 나도 군대 가고 싶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은한이 칭얼거렸다. 혼자 학교 다니기 싫다더니 ‘입대하고 싶다.’로 결론이 났다. 옆에서 시끄럽게 굴던 세 사람이 한순간 몽땅 사라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결은 제 잘못도 아니거늘 괜히 미안해졌다.
“좋은 거 하나도 없는데 왜 오고 싶어 해.”
“……네가 거기 있잖아.”
학교 재미없어. 백한결 없어서. 삐딱하게 턱을 괸 은한이 푸후, 숨을 내쉰다. 진한 알코올 향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한결은 그 와중에도 은한의 말이 좋아서 웃음을 삼켜야 했다.
이기적인 걸 안다. 은한의 일상을 조금도 방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제가 그립다고, 보고 싶다고 해 주는 은한에 만세라도 부를 것 같았다.
군대 가면 철든다는데. 아직 한참 멀었다. 은한을 좋아하는 한, 머리가 하얗게 셌을 때도 그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으리라. 한결이 확신했다.
발갛게 열이 오른 은한의 입술이 알아듣기 어려운 불만을 쏟아 낸다. 한결이 몽롱하게 그의 입술을 주시했다. 오물오물. 먹는 것도 없는데 맛있게도 움직인다. 종종 입술을 핥거나 깨물면 저절로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한결이 테이블 위를 나뒹굴고 있는 초콜릿을 고심해서 골랐다. 뭐가 좋을까, 하다 은한과 꼭 닮은 걸 집었다. 하얗고 동그란, 초콜릿.
입 앞으로 내밀었더니 냉큼 받아서 또 우물우물. 오른쪽 볼로 갔다가 왼쪽 볼로 옮겨 가는 게 육안으로도 보인다.
“맛있어?”
“엉.”
은한이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은한의 볼을 부여잡은 한결이 그대로 그의 입술을 삼켰다. 놀란 듯 멈칫거리던 은한이 곧 엉덩이를 들썩이며 혀를 받아먹었다.
달콤한 초콜릿이 서로의 입속을 분주히 돌아다닌다.
반쯤 몸을 일으킨 한결이 은한의 엉덩이 아래로 손을 넣어 주욱 자신 쪽으로 당겼다. 테이블 위로 붕 뜬 은한이 미끄러지듯 한결에게 끌려갔다. 은한의 무릎에 치인 와인 병이 와르르 아래로 곤두박질쳤지만 두 사람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으음…….”
은한이 한결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입술이 조금 더 깊이 맞물렸다.
질척하게 섞이는 혀에 초콜릿은 허무할 정도로 금세 녹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초콜릿보다도 단 서로의 혀가 있으니까. 한결이 그리웠던 은한을 단단히 끌어안고 열심히 혀를 놀렸다.
진한 알코올 냄새 사이로 초콜릿 단내와 척척한 타액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응…….”
세찬 에어컨 바람이 조금은 춥다 싶을 정도로 방을 물들이고 있는데, 둘만 더웠다. 한여름 바깥 온도를 죄다 몰고 온 것처럼.
치아도 핥고, 혀를 깨물고, 입술을 빨고. 그렇게 잡아먹을 듯 키스하고 있는데 문득 은한이 떨어져 나갔다. 휑해진 입술에 한결이 구겨지는 미간을 숨기지 못했다.
“왜.”
“목욕하자. 같이.”
“……갑자기?”
“아니. 갑자기 아니야.”
벌떡 일어난 은한은 미처 잡기도 전에 거실을 가로질렀다. 욕실로 가면서 훌떡훌떡 잘도 옷을 벗는다. 이제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허벅지 사이로 진분홍빛 페니스가 달랑인다. 얇은 허리도, 날개뼈가 불거진 등도,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까지.
아아…….
욕실로 사라진 은한에 한결이 꿀꺽꿀꺽 와인을 삼켰다. 그러나 이미 불모지가 된 목구멍은 기껏 쏟아 넣은 액체를 흔적도 없이 증발시켰다.
여전히 목이 마르다.
아무래도 은한을 쪽쪽 빨아먹어야 갈증이 해소될 듯했다.
한결이 은한을 따라 욕실로 향했다. 물론 똑같이 옷을 내던지며 왔다. 에어컨 바람이 기분 좋게 살갗을 식혔다.
못해도 네 명은 족히 들어갈 만큼 커다란 욕조에 물이 잔뜩 찰랑이고 있다. 술 먹다가 자꾸 욕실에 들락거린다 했더니 이걸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희뿌연 습기가 은한의 나신을 더 야하게 만들었다. 한결이 느릿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급하게 굴지 않아도 이미 제 입안에 있는 은한이라서.
비치된 입욕제 중 하나를 던져 넣은 은한이 물 온도를 확인했다.
“우리 집에는 욕조 없잖아. 여기까지 온 거 같이 몸 좀 지지자.”
“……지지자가 뭐냐, 지지자가.”
귀엽게. 한결이 타박 같지 않은 타박을 하며 은한의 등을 쓰다듬었다. 올록볼록 도드라진 척추가 뭐라고 입안에 침이 고인다. 낮에 재우기까지 했으니 오늘 밤은 좀 무리해도 되지 않을까. 지레 김칫국을 퍼마셨다.
욕조에 걸터앉은 은한이 턱을 잔뜩 치켜들고 한결을 깔보듯 쳐다봤다.
“운동 좀 했나 보네, 군인 아저씨.”
옷 너머로 봤을 때도 근육이 좀 붙었나, 했는데. 벗겨 놓으니 완연하게 그의 근육이 드러났다. 쩍쩍 갈라진 복근과 단단한 가슴근육, 넓은 어깨 아래로 떨어진 삼두근까지.
“너한테 잘 보이려고 열심히 했지.”
한결이 씨익, 능글맞게 웃었다. 학교에 다닐 때야 공강 시간에나 교내 헬스장에 들렸지만, 부대 안에서는 자유 시간마저 규칙적이라 운동할 시간이 넘쳐났다.
“어떻게 마음에 드나?”
“으아 존나 아저씨 같아!”
슥슥 복근을 문지르며 말하는 한결에 은한이 기겁했다. 부러 저러는 걸 알지만 제가 원래 알고 있던 한결과 너무할 정도로 달라 소름이 끼쳤다.
“그렇게 웃지 마. 원래대로 웃어.”
“내가 원래 어떻게 웃었는데?”
“왜 있잖아. 캠퍼스의 전형적인 훈남 선배님상.”
“그게 뭔데?”
전혀 갈피를 못 잡는 한결에 은한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고 유하게 눈을 휜다. 억지스런 웃음에 그의 광대가 덜덜 경련했다.
한결이 큭큭대며 은한의 볼에 입술을 눌렀다 뗐다.
“그게 훈남 선배님이라고?”
“아! 이거 아닌데! 무튼 원래대로 웃어. 군대 가서 아저씨 되지 마라. 차 버린다.”
네. 그럼요. 한결이 대충 대답하며 욕조에 몸을 담갔다. 자리를 잡은 그가 이리 오라며 손을 뻗었다. 은한이 냉큼 그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뜨끈한 온도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밖은 차가운 에어컨을 잔뜩 틀어 놓고 아래는 따뜻하니 신선놀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우 시원하다…….”
한결의 가슴팍에 등을 기댄 은한이 고개를 뒤틀며 말했다. 한결이 목젖을 일렁이며 웃었다.
“나보다 네가 더 아저씨 같은데.”
“……아니거든.”
“그래 뭐. 아니라고 하자.”
한결은 문득 아저씨가 된 은한을 상상했다. 번듯한 정장을 차려입고,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해 반쯤 부은 눈으로 출근하는 그. 운전하는 그. 신호가 걸려서야 넥타이를 매는 그. 따뜻한 커피를 쥐고 하품과 함께 오피스에 들어서는 그.
은한은 아저씨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고, 또 멋있으리라. 그때도 제가 옆에 있다면 좋으련만. 한결이 쪽쪽 은한의 동그란 어깨에 입술을 내리며 빌었다.
“멍들었네.”
그러다 무릎을 시퍼렇게 물들인 멍을 발견했다. 아까 소파에서 다리를 팔랑일 때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엎드려 있어서 그랬나.
한결의 낯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하필 무릎이다. 은한이 태어나 제일 아팠던 다리에. 지금도 칼이 무섭다는 다리에.
“아아. 아까 집에서 넘어졌어.”
은한이 대수롭지 않게 벅벅 멍을 문질렀다. 그런다고 옅어지는 게 아님에도 그랬다.
“집에서?”
“엉.”
드라이기를 쥐고 양말을 신으면서 옷을 골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 분이라도 한결을 일찍 보겠다고 온갖 방정을 다 떨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웠다.
연애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
“조심 좀 하지.”
한결의 목소리가 온통 우울에 침몰해 있다. 은한이 대꾸 없이 무릎을 물속으로 숨겼다.
한결은 제가 다리 수술을 했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이따금 과한 보호를 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하면 저보다 더 화들짝 놀랐고, 버릇처럼 조물조물 종아리를 주무르기도 했다. 섹스할 땐 복사뼈를 녹여 먹겠다는 듯 핥아 댔다.
“응, 조심할게.”
수술은 중학생 때 했다. 뼈가 으스러져 일 년 가까이 목발 신세를 저야 했지만, 이제는 오래 걷지 않으면 제가 수술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산다. 하지만 한결은 그러지 못할 듯했다.
은한이 마치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한결의 가슴팍에 볼을 비비적거렸다. 푹 한숨을 내쉰 한결이 은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근데, 백한결.”
“응.”
“내 등 뚫리겠다.”
“응?”
“꼬챙이에 꿰이는 것 같아.”
아까부터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불편해서 안 되겠다. 은한이 허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척추뼈 사이를 쿡 찌르고 있던 한결의 귀두가 야하게 뭉개졌다.
“아…… 방울아…….”
“야! 느끼라고 한 거 아니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턱이 잡혔다. 그리고 불편한 자세로 한결의 입술을 받아들여야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연인에, 술도 적당히 마셨겠다. 이제 막 육욕을 알기 시작한 스물한 살 사내 둘은 거리낄 게 하나도 없었다. 게걸스레 서로의 입술을 빨고 타액을 삼켰다.
촉촉 거리는 간지러운 소리에 꿀꺽, 무언가가 넘어가는 소리가 곁들여졌다.
흥분한 한결이 거세게 혀를 빨아 대서 혀뿌리가 뽑힐 듯 아렸다. 은한이 지지 않겠다는 듯 한결의 입술을 깨물어 댔다. 그렇게 얼마나 혀를 섞었을까. 입술이 퉁퉁하게 부풀고, 혀가 바짝 마를 때쯤에야 진했던 키스가 끝났다.
이제 본격적인 섹스가 시작되려나 싶어 은한이 막 뒤를 돌려 했을 때였다. 쑥, 하고 몸이 들렸다. 촤아아, 몸뚱이에서 물이 쏟아졌다.
“뭐, 뭐…….”
은한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분주히 눈동자를 굴렸다. 한결이 그를 번쩍 들어다 세면대 위에 대충 수건을 깔고 은한을 앉혔다. 은한이 막 상황을 캐물으려 한 순간, 시야에서 한결이 사라지고, 페니스가 뜨거운 무언가에 담겼다.
“아흑!”
은한이 본능적으로 세면대 턱을 움켜쥐었다. 은한의 페니스를 문 한결이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였다.
“아…… 백한……결!”
예상치 못한 쾌락에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 봤으나 골반을 꽉 붙든 한결의 손은 풀리지 않았다. 은한은 어쩔 수 없이 발가락을 꼬옥 접은 채 쾌감을 감내해야 했다.
한결의 목구멍이 조여든다. 귀두가 쭉, 세게 빨렸다. 흡입력에 짜부라진 귀두가 탱글탱글 솟아올랐다. 그 선연한 감각에 은한이 탁탁탁 한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는 물러날 줄 몰랐다.
“으응…….”
한결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은한을 올려다봤다. 처음엔 부끄러운 듯 눈을 피하더니 이윽고 귓불을 매만져 온다. 한결이 그에 화답하듯 조금 더 깊이 은한의 것을 담아냈다.
“아…… 흐, 좋아…….”
커다란 손이 양쪽 볼기를 한가득 움켜쥐고 있다. 손바닥에 가득 한 살덩이가 어찌나 착착 감기는지. 평생 이렇게 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간간이 한결의 이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얇은 허리가 들썩였다. 한결이 페니스 전체를 입에 담고 볼이 홀쭉하게 될 만큼 빨아 당겼다.
“아흣!”
은한이 차마 쌀 것 같다, 알려 줄 틈도 없었다. 비릿하고 찐득한 액이 한결의 혀를 더럽혔다.
“으아…… 미안. 야 뱉어라, 빨리.”
화들짝 놀란 은한이 미쳐 사정의 후희를 즐길 틈도 없이 한결의 앞에 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한결은 여전히 은한의 것을 물고 있는 채였다.
마주치고 있는 눈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그리고 꿀꺽.
“미친놈아! 야동 찍냐!”
입안에 담겨 있던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은한의 정액이 목젖에 들러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경악에 물든 은한이 다리를 휘저었다. 한결이 비로소 떨어져 나갔다.
“너, 너……!”
은한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 꾹 입을 다물었다. 화를 내면서도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아니 자기가 먹고 싶어서 먹은 건데. 제가 강요를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멜랑꼴리한 기분은 어쩌지 못했다.
한결에게 하면 안 될 짓을 한 기분이다. 저도 한결의 정액을 입에 담아 본 적 있는 터라 죄악감은 더했다.
“별로였어? 표정이 왜 그래?”
“몰라 이 새끼야…….”
한결의 고개가 갸우뚱, 꺾였다. 그를 밀어낸 은한이 첨벙첨벙 욕조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엔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방울아?”
“이리 와. 오늘은 욕조에서 하고 싶었단 말이야.”
한결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를 떨었다.
어쩜. 내 방울이 박력 좀 봐.
좋아 죽겠다, 아주.
척척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낯선 맛이 느껴진다. 한결이 삼킨 정액 탓이었다. 은한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괴상한 맛을 털어 냈다.
“으…….”
맛 너무 이상해. 그가 베- 혀를 내밀며 인상을 쓴다.
“나는 괜찮은데.”
한결이 보란 듯 찹찹 입맛을 다셨다. 은한의 눈코입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그가 후다닥 욕실을 벗어났다. 한결이 그를 안고 있던 포즈로 돌덩이처럼 굳었다.
아, 나 지금 펠라하다가 정액 먹었다고 버림받은 건가, 싶어서.
다행히 은한은 금세 돌아왔다. 한 주먹 가득 안주로 먹던 초콜릿을 쥐고. 그의 의도를 알아챈 한결이 쩍 입을 벌렸다. 곧 달큰한 초콜릿이 목구멍까지 쑤셔 넣어진다. 한결이 큽큽, 헛기침했으나 은한은 꾸역꾸역 초콜릿을 하나라도 더 넣어 보겠다 눈을 홉떴다.
다음부터는 순순히 뱉어야겠다.
한결이 조용히 다짐했다.
다시 키스가 이어졌다. 은한은 온통 달기만 한 한결의 혀가 만족스러웠다.
한결의 검지가 은한의 엉덩이골 사이를 파고든다. 꽉 아물린 주름을 검지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이미 퍽 오랫동안 물에 앉아 있던 터라 노곤히 풀린 구멍은 평소보다 쉽게 손가락을 반겼다. 한결이 꾹, 검지 끝에 힘을 줬다.
“흐으…….”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은한의 비음이 흘러나온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한결의 손가락이 쑤욱, 끝까지 들어왔다. 물 온도보다 훨씬 뜨거운 내벽이 한결의 손가락을 옴팡지게 물었다.
“방울아.”
“응, 으응…….”
한결의 혀가 은한의 귓바퀴를 야하게 핥는다. 그 사이를 파고드는 저음에 은한이 한껏 목을 접었다.
“나 없는 동안 자위 몇 번이나 했어?”
“별로……. 흣, 안 했어…….”
“거짓말.”
한결의 검지가 휘익, 내벽을 휘저었다. 은한이 허리를 들썩이며 한결에게 철썩 달라붙었다. 오랜만에 받는 한결의 손가락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점점 더 거칠어지는 움직임에 은한이 끙 앓으며 거짓말을 정정했다.
“이, 일주일에 두 번쯤…….”
한결이 착하다는 듯 은한의 관자놀이에 촉, 키스했다. 이제는 중지도 뒷구멍에 들어오고자 주름을 문질러 댔다. 은한의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여기도 만졌어?”
“흣, 아! 아니이…….”
은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한결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는다. 중지까지 집어넣은 그가 한참을 떨어져 있었음에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지점에 손을 놀렸다.
만져 달라는 듯이 살짝 부풀어 있는 전립선이다. 한결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또, 거짓말하지.”
“아흑! 응, 아! 거기……!”
“진짜, 안 만졌어?”
“안…… 만졌어어…….”
거듭되는 부정에 한결이 흐음, 목젖을 일렁였다. 4개월이 넘게 닫혀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손가락을 받아들일 리 없다. 마치 처음으로 몸을 섞을 때처럼 젤로 수 분을 풀어 줬어야 할 터였다.
거짓말을 한 대가로 한결이 내리는 벌은 훨씬 생경하고 자극적이었다. 그의 검지와 중지가 가위 모양으로 벌어졌다. 울컥울컥, 빈틈을 찾은 물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은한이 허읍, 숨을 삼키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순간 두려워졌다. 뱃속 가득 물이 찰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해, 했어. 만졌어.”
은한이 쾌감에 내몰려 속죄했다. 한결의 목덜미에 얼굴을 잔뜩 욱여넣고 부르르 몸을 떤다. 괴롭히는 것에 가까운 자극인데, 그마저도 한결이라고 페니스가 뚱뚱하게 부풀었다.
“어떻게 만졌는데?”
한결의 질문은 끝을 모르고 짓궂어졌다. 은한의 눈썹이 추욱,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걸, 응…… 왜 알고 싶은데…….”
“궁금하니까 그렇지.”
상투적인 한결의 대답에 은한이 팩 머리를 쳐들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가느다란 물방울이 여기저기를 나돌아 다닌다.
“너, 너는 자위 안 했냐!”
“했지. 왜 궁금해?”
“그래! 나도 궁금하다.”
“보여 줄까?”
“어……?”
전혀 상상도 못 했던 결과에 은한이 쩍, 입을 벌렸다. 보여 준다고? 뭐를? 자위하는 거를? 대체 왜? 한결이 제 앞에서 페니스를 흔들고 저는 앞에 멀뚱히 서 그 모습을 보는 걸 상상하자 절로 도리도리 머리가 흔들렸다.
“아니.”
“……나는 보고 싶은데.”
“그것도 아니야.”
은한이 단호히 말했다. 입술을 삐죽인 한결이 은한의 뒷구멍을 늘리는 데 집중했다. 나중에 제대하면 기념으로 보여 달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결이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가 오므렸다, 전립선을 문질렀다가 주름만 괴롭히다를 반복할 동안 은한은 제 배꼽을 찔러 대는 그의 페니스를 조심히 잡았다. 그리고 슥슥, 아래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그의 페니스가 꺼덕였다.
그러잖아도 하얀 김이 욕실에 가득 차 있는데 두 사람 입술 틈에서도 후끈한 열기가 쏟아진다.
“이제, 넣어.”
“벌써?”
“빨리…….”
은한이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의 아래에 깔린 한결의 고환이 아무렇게나 짜부라졌다. 한결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콘돔 가져올게.”
“그냥 해.”
“그래도,”
“어차피 물속인데 뭐 어때.”
은한이 부러 찰박, 물을 내리쳤다. 한결이 코를 찡긋거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기도 한데 그냥 수긍하기로 했다. 아릿할 정도로 바짝 올라붙은 페니스가 급했기 때문이다.
은한의 엉덩이가 살짝 위로 들리고, 한결이 벌름거리는 구멍에다 페니스를 맞췄다.
“아흑…….”
순조롭게 귀두가 들어간다 싶더니 금세 빡빡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언제 어떻게 받아들여도 억 소리 나게 크고 굵은 페니스다. 은한이 으득 어금니를 씹었다.
“존나…… 윽, 분홍 소시지…….”
“후. 뭐라고?”
“아니, 야…….”
은한의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다. 한결이 페니스를 반만 넣은 채 잠시 기다렸다. 후우후우, 호흡을 고른 은한이 직접 엉덩이를 내리기 시작했다.
“아파?”
“……응.”
눈살을 한가득 찌푸린 은한이 대답했다. 거짓말을 못 하겠다. 가끔 자위하면서 뒷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보긴 했지만, 말 그대로 손가락이다. 한결의 것을 받아들이는 건 여전히 벅찼다.
한결이 은한의 페니스를 쥐어 살살 흔들었다. 그 자극에 내벽이 옴찔옴찔 경련했으나 윗입술을 씹은 채 견뎌 냈다. 일단은 은한이 아프지 않은 게 최우선이다.
“하윽!”
“윽…….”
질끈 눈을 감은 은한이 확 주저앉았다. 얼마 남지 않은 페니스가 북, 내벽을 긁으며 뱃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은한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한결 역시 눈썹 사이를 좁히며 신음을 흘렸다. 뜨끈하고 좁은 구멍이 한결의 것을 오물오물 씹어 댔다.
아. 움직이고 싶다. 마구잡이로 은한을 탐하고 싶다.
한결이 은한의 어깨에 이를 세웠다.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솟구치는 본능이 이성을 죄다 갉아먹고 은한을 제멋대로 취할 듯했다. 동그란 어깨에 잇자국이 또렷이 남았다.
“후…… 움, 직여도 돼…….”
한결의 짙은 눈동자가 은한의 얼굴 위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열락에 달아오른 광대와 잘근잘근 씹어댄 붉은 입술, 제 팔뚝을 힘주어 잡은 손가락, 똑똑 물이 떨어지는 가는 머리칼.
뭐 하나 저를 미치게 하지 않는 게 없다.
한결이 휙, 몸을 뒤집었다. 은한을 엎드리게 하고 다리를 살짝 벌려 그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은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결의 것이 서서히 물러갔다. 내벽을 한가득 끌고 나가는 페니스에 은한이 흡, 숨을 말아 먹었다.
“으응, 흐……. 아!”
한결은 한동안 천천히 허리짓을 이어 갔다. 잠자코 그의 움직임을 받기만 하던 은한이 그를 따라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질나게 전립선을 건드리는 몸짓이 아쉬웠다. 이제 한결의 페니스가 무리 없이 은한의 안을 드나들었다.
은한이 제 골반을 쥔 한결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빨리, 응? 빨리.”
그 말이 기폭제라도 된 양, 페니스를 귀두까지 빼냈던 한결이 한 번에 뱃속을 파고들었다. 쿵! 은한은 정말 폭탄이라도 터진 줄 알았다. 거칠게 짓눌린 전립선이 찌릿찌릿 온몸을 쾌감으로 절여 놨다. 귓구멍에 삐이- 하고 이명이 울렸다.
그 후로는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와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결의 골반에 치이는 엉덩이가 새빨갛게 붉어질 정도였다.
“아흐, 응. 아……흑! 음, 읏…….”
“하아…… 하아.”
뻐득뻐득 욕조를 쥔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사납게 일렁인 물이 욕조 벽에 막혀 다시 되돌아온다. 야릇하게 부딪혀 오는 잔파도가 뒷덜미를 섬뜩하게 했다.
아. 좋아.
은한이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생각했다. 자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전립선을 콱콱 자비 없이 짓뭉개 오는 한결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부부 사이에 섹스가 어느 정도 있어야 좋다더니, 그 말을 백번 천번 이해하는 바였다.
한결이 은한의 등에 배를 붙였다. 그리곤 손을 아래로 내려 바짝 솟아 있는 유두를 매만졌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은한이 흠칫 몸을 떨었다.
“방울아. 남자도, 후…… 여기로 느낄 수 있대.”
“시, 싫어…….”
꼴사납게 가슴으로 사정하는 제 모습을 상상한 은한이 부정의 말을 뱉었다. 그러나 한결의 손가락은 유두를 잡아 비틀다 못해 쭉쭉 당기기까지 했다. 간지럽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통각이 짓눌리는 전립선 쾌감과 섞여 간다.
은한이 욕조 턱을 잡은 손 위로 얼굴을 쏟아 냈다. 허억, 허억. 밭은 숨에 정신이 다 혼미할 정도다.
끝없이 거세지기만 하는 한결의 허리 짓에 은한의 무릎이 속절없이 휘청였다. 박음질이 미세하게 엇나간다. 한결이 얼굴을 구기며 쑥, 페니스를 빼냈다. 은한은 휑한 공백감에 놀랄 틈도 없이 골반이 잡혀 벌떡 일어서게 됐다.
“서, 서서 하게……?”
엎드려서 하는 것도 힘이 부치는데 서서라니. 걱정 가득한 은한의 턱을 살짝 누른 한결이 입술을 맞물렸다. 얇은 다리 한쪽을 올리고 한 번에 페니스를 쑤셔 넣는다.
한순간에 단전 아래까지 치고 들어온 듯한 페니스에 은한의 다리가 허물어졌다. 한가득 물고 있던 입술도 떨어졌다.
한결이 쯧,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리곤 두 다리 모두 제 허리에 둘러 허벅지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에 짓눌린 허벅지가 드문드문 하얗게 질렸다.
공중에 떠오른 몸뚱이에 은한이 경악으로 동공을 물들였다.
“미친……놈! 너 인간 맞냐! 아흑!”
아무리 제가 말랐다 한들, 성인 남잔데 장난감을 들 듯 하는 한결이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잘못하다간 진짜 발기발기 찢겨 잡아먹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인간 아닌데.”
지금은 나도 내가 뭔지 모르겠다.
한결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은한의 무게까지 얹힌 피스톤질은 평소보다 훨씬 깊고, 격했다. 은한은 차마 입을 다물 틈도 없이 뜨거운 신음을 토해 냈다. 언제 사정했는지도 모를 정액이 가랑이를 타고 투둑, 욕조 안으로 떨어졌다.
“으핫, 응! 흐…… 아흐, 으응!”
“하아, 하아…….”
혹여 떨어질까, 겁을 집어먹은 은한의 몸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 덕에 구멍은 꽈악 한결의 페니스를 삼키고 놓아주질 않았다. 한결이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정말 딱, 미치기 직전이다. 자꾸만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은한의 귓불을 빨고, 목덜미에 보란 듯 흔적을 남기고, 턱을 물기까지 했다.
한참 전부터 내장을 간지럽히던 사정감이 번개처럼 등줄기에 내리쳤다. 온몸으로 은한을 끌어안은 한결이 억누르던 정액을 토해 냈다.
“윽.”
“흐읏…….”
콘돔 없이 하는 섹스는 처음이다. 홧홧한 뱃속에 말 못 할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상해.”
은한이 슥슥 아랫배를 문지르며 코를 훌쩍였다. 그의 이마와 콧잔등에 쪽쪽, 입을 맞춘 한결이 낮게 소곤거렸다.
“빼 줄게.”
“……싫어.”
존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빼 줄 것 같아, 너. 내가 뺄래. 은한이 버둥버둥 몸을 흔들었다. 한결이 조심히 그를 내려놨다. 완전히 풀려 버린 다리가 휘청휘청, 올곧게 서질 못했다.
샤워기를 튼 은한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후 뻐끔거리는 뒷구멍을 향해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으…… 아무리 제 구멍이라지만 손을 대는 건 영 이상하다.
막 손가락 두 마디가 들어가고 찐득한 한결의 정액이 느껴졌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싸왔다. 그대로 세면대에 상체가 짓눌렸다.
“……백한결?”
고개를 쳐든 은한이 거울 속으로 한결을 응시했다. 하지만 한결은 이미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을 놓아 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가 본 적 있는 눈이었다. 첫 섹스를 했을 때, 또 종종 과하게 흥분했을 때.
아, 좆됐…….
참담한 제 미래를 깨닫자마자 두툼한 한결의 페니스가 밀고 들어왔다.
은한이 비명처럼 신음을 내질렀다.
한결은 아주 오랫동안 은한을 쥐고 놔주지 않았다. 대충 씻고 욕실을 나오자마자 푹신한 소파에서 한 번, 야경이 펼쳐진 창문에 기대어 한 번. 그쯤에는 제대로 닦지 못한 물이 다 마를 정도였다. 그 후에는 당연하게 침실로 가 몸을 섞었다.
은한이 탁한 시선으로 한결의 어깨에 얹혀 대롱대롱 흔들리는 제 다리를 주시했다. 조금만 시선을 굴리면 낮은 신음을 흘리는 한결도 볼 수 있다.
아직도 눈동자에 육욕과 색욕이 가득하다.
이렇게 있다간 진짜 해 뜰 때까지 그의 것을 받아야 하겠구나. 저도 마음 같아선 오랜만에 만난 연인과 불타는 섹스를 밤새 하고 싶지만, 정말 마음만 그랬다. 체력은 진즉 한계에 부딪혔고, 정신력마저 깜빡깜빡 방전 상태다.
은한이 간신히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털썩, 침대에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이른 아침에 눈을 뜬 건 눈부신 햇살도, 연인의 속삭임이나 키스도 아닌 진우의 전화였다. 방울아, 보고 싶었다! 로 시작한 그 혼자만의 통화는 저녁에 만나! 로 끝났다.
온몸이 내 것 같지 않다. 은한은 핸드폰을 협탁에 두지도 못하고 베개 아래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눈꺼풀이 졸음 때문에 무거운 건지, 아니면 어제 흘린 눈물에 부풀어 무거운 건지 분간할 순 없었지만, 수면이 부족한 건 확실했다.
게슴츠레 눈을 뜬 은한이 간신히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렸다. 귓가에 흩어지는 숨소리를 따라가자 절 끌어안고 있는 한결이 보인다. 잘생긴 얼굴이 살풋 미소까지 짓고 있다.
“개……새끼…….”
참 잘도 잔다. 누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구만. 그래도 참아야지. 국가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데. 내가 참아야지. 그리 생각해도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은한은 꾸물꾸물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잘 뻗은 쇄골에 잇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다. 어젯밤 제가 제발 좀 그만하자며 물어뜯은 거였다.
씩. 만족스레 웃은 은한이 검지로 그것을 매만졌다.
“……왜 더 안 자고.”
느릿하게 눈을 뜬 한결이 물었다.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다. 허스키한 음성에 어젯밤 그의 신음이 환청처럼 섞여 든다. 괜히 부끄러워져 시선을 돌렸다.
한결은 잠귀가 어둡다. 알람 소리 같은 걸 쉽게 듣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제가 옆에서 뒤척이면 금세 잠에서 깬다. 은한은 왠지 모르게 그것이 좋았다.
“진우한테 전화 와서.”
“진우?”
“어. 저녁에 보재.”
“……싫은데.”
눈살을 구긴 한결이 은한의 엉덩이를 매만졌다. 기절하듯 잠든 은한의 몸을 닦아 내긴 했으나 옷은 입히지 않았다. 덕분에 손을 뻗는 족족 보드라운 살결이 감겨든다. 완벽한 아침이다.
은한은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솔직히 밀어낼 힘이 없었다.
“뭐가 싫냐. 오랜만에 보는 건데.”
“둘만 있고 싶으니까 그렇지.”
한결이 은한의 머리칼에 코를 파묻었다. 낯선 호텔 샴푸 냄새가 가득하다. 그래도 은한에게서 나는 거라 좋기만 했다.
“너랑 둘만 있는 게 조금 무섭다, 나는.”
은한의 말에 한결이 한쪽 눈썹을 삐죽 올렸다.
“왜?”
“또 섹스하다 까무러칠까 봐 그러지.”
“……까무러친 게 아니라 그냥 잠든 거던데.”
“그거나, 그거나. 말이 많아!”
은한이 한결의 턱을 물어뜯다시피 깨물었다. 한결이 윽, 소리를 내며 얼굴을 뺐다.
“오랜만에 봐서 그래, 오랜만에.”
“지랄. 누가 들으면 언젠 안 그랬던 줄 알겠네. 야 우리 나름 만난 지 반년 넘었거든? 섹스만 수십 번을 했다. 어디서 구라를 때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한결이 은한의 구겨진 미간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키스를 바쳤다. 그래도 차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지는 못했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지키지 못할 말임을 알아서.
“꺼져. 소파 가서 자. 나는 못 움직이겠으니까.”
“어? 안 돼. 그것만은. 제발.”
심술 가득한 은한의 말에 한결이 울상을 했다. 부러 더 단단히 은한을 끌어안았다. 절대로 놔줄 수 없다. 평생 이렇게 끌어안고 살 것이다.
은한이 딱딱딱, 이를 부딪치며 닥치는 대로 한결을 물어 댔다. 한결은 귓불이나 목덜미를 물리면서도 고집스레 은한을 안고 있었다.
결국 먼저 지친 건 은한이었다. 그가 사지를 축 늘어트리며 눈을 감았다. 그 몇 분 화를 냈다고 온몸이 피로했다.
“더 잘 거야. 내 옆에서 자고 싶으면 조용히 자라.”
“예. 그럼요.”
한결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베개도 고쳐 주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은한은 곧 색색 잠이 들었다. 한결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그를 보듬어 주다 눈을 감았다.
아쉽고 또 아쉬운 휴가가 이제 고작 이틀 남았다.
막 점심때가 지나서 일어난 두 사람은 TV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배가 고파 무엇을 시켜 먹을까, 룸서비스 책자를 뒤지다 라운지가 무료라는 직원의 말을 들었다. 후다닥 옷을 입고 라운지로 올라갔다.
서울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라운지는 풍경도 좋았고, 음식도 맛있었다. 브런치 메뉴를 몰라서 검색해 본 건 비밀이다. 어쨌든 맛있으면 됐지.
나온 김에 호텔 정원이나 산책하자, 했다가 땡볕에 금세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뭐 얼마나 돌아다녔다고 땀이 나서 욕조 가득 물을 받아 놓고 거나하게 씻었다. 섹스는 하지 않고, 물장구나 치며 놀았다.
창가로 노을빛이 밀려들 때쯤, 한결이 물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괜찮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거실 카펫에 대자로 누워 하품하던 중이었다. 은한이 빙그르르 몸을 굴려 한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거 내가 해야 할 말 아니냐?”
그래도 휴가 나온 건데. 그냥 멍만 때리다 복귀해도 돼? 뭐 좋은 것도 보러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야 하는데. 한결의 가슴에 턱을 올린 은한이 흥, 콧김을 뿜었다.
괜히 호텔 예약했나. 어디 놀러나 갈걸.
한결이 슥슥 은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흩어진다.
“지금 너무 완벽한데. 방울이 얼굴 보고, 방울이 먹고 얼마나 좋아. 이게 휴가지.”
“존나…… 느끼해…….”
은한이 우욱, 토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결이 큭큭대며 은한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쪽쪽 키스했다. 앙앙 이를 세워 깨물기도 하고, 손목에 키스마크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너랑 같이 있기만 하면 돼.”
은한을 추슬러 안은 한결이 제 몸 위로 그를 턱, 올려놨다. 은한이 익숙하게 자리를 잡는다. 쿵, 쿵. 심장이 평화롭게 섞여 들었다.
“그럼 다행이고.”
은한이 한결의 짧은 머리를 문질렀다. 까끌까끌한 촉감이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이게 언제 다시 기려나. 빨리 길어서 저랑 같이 학교 다니면 좋겠거늘. 아직 일 년 반은 족히 더 남았다.
은한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였다. 한결이 숨을 쉬고 뱉을 때마다 제 몸도 함께 일렁인다. 그게 참 좋았다.
“한 시간쯤 있다가 나가자.”
“왜? 진우랑 태준이 일곱 시는 넘어야 온다고 하지 않았어?”
“케이크랑 마카롱 같은 것 좀 사게.”
“웬 케이크?”
한결이 곰곰이 생각했다. 넷 중 누군가의 생일인가, 싶어서. 허나 생각나는 숫자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태준과 진우의 생일을 몰랐다. 서로 그런 걸 챙길 리도 없고, 챙김 받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아는 거라곤 8월 말에 있는 은한의 생일뿐이다.
그때 휴가 나올 수 있으려나. 못 나오면 슬플 것 같은데. 은한이 아니라,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은한의 생일이라 고작 전화로 퉁 치고 싶진 않았다. 선물도 생각해 놓지 못했다. 아직 두 달이나 남은 은한의 생일에 한결의 머리통이 분주해졌다.
은한이 딴생각으로 빠지는 한결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군대 가면 단 거 먹고 싶다던데. 고무신 카페에서 그러더라고. 휴가 나온 남친이 케이크 한 판을 다 먹더래. 군대에선 초코파이 같은 것밖에 못 먹으니까. 그리고 태준이야 원래 단 걸 좋아하잖아.”
“…….”
“마침 이 호텔 주위에 유명한 디저트 집이 있더라고. 거기서 사 가게.”
미리 봐뒀던 가게 위치를 상기한 은한이 흐흥, 콧노래를 불렀다. 케이크를 받고 좋아할 진우와 태준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한결이 그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다른 남자 너무 챙기는 거 아니냐.”
“얼씨구. 또 시작이지.”
“사는 건 좋은데. 내가 살 거야.”
“……뭔 소리야.”
“네가 사 주는 게 싫어. 내가 살 거야. 알았지?”
예. 네 좆대로 하세요. 은한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한결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이제 곧 맡지 못하게 될 그의 체취를 폐부 가득 들이켰다.
* * *
태준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건 치즈였다. 그냥 앞뒤 없이 치즈. 진우 역시 그 메뉴에 동의했다.
‘치즈가 뭔데? 뭐 피자, 파스타 그런 거 말하는 거야?’
그리 물었더니 그냥 치즈가 들어간 모든 음식이면 된단다. 군대에선 늘 한식만 주야장천 나오고, 특식이라 봐야 햄버건지 샌드위친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게 나오니.
덕분에 네 사람이 화포를 풀 장소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선택됐다. 만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라이 공대남 셋과 포크질을 할 줄이야. 늘 국밥만 먹어 댔지.
네 사람은 조명이 예쁜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여름밤만큼 바깥에서 맥주를 마시기 좋은 날이 없다. 피자와 파스타로 모자라 치즈가 얹어졌다는 해산물 요리에 스테이크까지 죄다 시켰다. 진우가 용돈을 두둑이 받았다며 다 시켜 버리자고 떼를 썼기 때문이다.
“아, 존나 눈물 나는 맛이다.”
“태어나서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는 것 같아.”
태준과 진우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쉼 없이 포크를 움직였다. 나름 대식가인 은한이 그들을 위해 수저를 놓을 정도였다. 군대에서 밥 안 먹이니? 국방부에 민원 넣을까? 근데 국방부에서 그런 민원도 받냐? 그런 소리만 해 댔다.
두 사람은 윗배가 빵빵하게 부풀 때까지 열심히 먹다 그 후로는 맥주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맥주를 대량으로 팔지 않아 한잔, 한잔 따로 주문해야 했는데 그래서 더 술이 잘 들어가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에 양해를 구한 후, 사 온 디저트까지 더하니 완벽했다.
“좋다.”
태준이 의자에 늘어지며 푸후- 숨을 뱉었다. 진한 알코올 향이 코끝에서 흩어진다.
“좋냐.”
“좋지, 그럼.”
은한의 물음에 진우가 대신 답했다. 진우와 태준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은한이 그들을 따라 웃었다.
서울 도시 한복판임에도 매미가 우렁차게 울어 댔다. 이따금 머리칼을 살랑이게 만드는 바람과, 종종 신나게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 그리고 식당 안의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소음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집에는 들렸어?”
“아니. 오늘 밤에 가야지.”
진우의 답에 은한이 쯧쯧 혀를 찼다. 저런 새끼를 아들이라고 용돈까지 챙겨 준 부모님 마음이 어떠할까, 싶어서.
“게임이 그렇게 좋더냐.”
“진짜 총 쥐어 보니까 게임이 얼마나 쉬웠던 건지 실감 나더라고. 그러니까 더 하고 싶어서 미치겠더라. 거기선 내가 최곤데.”
“헐. 나도. 나도 그랬어.”
진우의 말에 태준이 짝짝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은한은 대화하는 걸 관뒀다. 입대해도 여전한 친구들이라. 은한의 포크가 돌돌돌 식은 파스타를 말았다. 치즈가 잔뜩 엉겨 붙어 있는데도 맛만 좋았다.
홀짝홀짝 마시니 또 맥주가 동났다. 한결이 맥주 네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태준은 배도 안 부른지 전투적으로 케이크를 퍼먹었다. 은한이 그의 앞으로 케이크를 밀어 줬다.
“어떻게 살았냐? 괴롭히는 선임은 없고?”
“없어. 우리 병장님이 나 존나 귀여워해.”
“……너를? 대체 왜?”
“자기 동생이 개또라인데 나랑 하는 행동이 똑같대.”
태준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묻어 있던 생크림이 투둑 아래로 떨어진다.
은한이 조소했다. 그게 쪼개면서 할 말이라고 생각하니. 어찌 됐든 괴롭힘당하는 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어쩌다 또라이라는 이미지를 거기서도 가지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들어 봐야 속만 답답하리라.
“손진우 너는. 너는 어때?”
“나야 뭐 행정실에서 뒹굴 매점에서 뒹굴 그러다 종종 전화나 받고…….”
“엉……?”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은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우는 씨익 입술을 길게 째며 묘한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맥주 나왔습니다. 생맥주가 가득한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태준이 꿀꺽꿀꺽 단숨에 반을 삼켜 냈다.
“얘 아버지 국회의원이잖아. 대령이 아버지랑 친구래.”
아! 그래서! 은한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드문 ‘신의 아들’이지만, 진우 역시 참 드문 인간이다.
“와…… 진짜 존나 있어 보인다, 너.”
“응. 나도 몰랐는데 우리 아버지 되게 있는 사람이더라고.”
진우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조차 남달랐다. 손진우랑 더 친하게 지내야지. 은한이 내심 그와의 우정을 돈독히 만들었다.
“덕분에 나도 종종 훈련 빠지고 손진우랑 논다.”
태준이 허헝, 요란하게 웃으며 진우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진우가 썩어 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은한의 아랫입술이 삐죽, 불만스레 튀어나왔다.
“우리 한결이도 좀 데리고 가지.”
왜 너네만 편하게 군생활하냐. 얘는 고작 한 살 더 많은 병장 어깨도 주무른다는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진우와 태준이 조금, 아주 조금 얄미웠다. 걸레질을 하네, 빨래를 대신하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픈데.
중얼중얼 이어지는 은한의 한탄에 한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습한 여름밤 공기 사이로 그의 웃음소리가 나돈다.
진우가 헛숨을 삼키며 짧은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와. 방울이 너 그런 소리도 할 줄 아는구나. ‘우리’ 한결이라니.”
“나도. 나도 ‘우리’ 태준이라고 불러 줘, 방울아.”
태준이 허리를 굽힌 채 은한을 졸랐다. 한결이 그의 정수리에 딱, 소리 나게 딱밤을 때렸다. 악! 짧은 비명을 지른 태준이 왜 때리냐며 발을 굴렀다.
“꺼져.”
방울이 내 거야. 한결이 두 팔로 은한을 끌어안으며 훠이훠이, 손을 휘저었다. 두 손을 곱게 모은 태준이 한 번만 들으면 안 되겠냐고 사정한다. 대체 ‘우리 태준이’가 뭐라고. 쟤 애정 결핍이던가. 하는 행동을 보면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은한이 잠시 고민했다.
“뒤진다, 진짜. 말로 할 때 꺼져.”
질퍽한 욕을 뱉은 한결이 험상궂은 표정을 만들었다. 진우는 작작하라며 태준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내가 불러 줄게. 아이고! 우리 태준이! 아이고!”
“그게 뭐야, 미친놈아!”
태준이 기겁하며 동동 앉은 채 발을 굴렀다. 진우가 씨익,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뭐. 해달라며. 우리 태준이! 케이크 더 먹을까?”
“왁!”
“아니면, 맥주? 맥주 더 마실까, 우리 태준이? 진우가 먹여 줄게.”
“내가 잘못했어! 이러지 마!”
은한은 왁자지껄한 소음에 새삼 현실을 자각했다.
아. 내가 지금 공대 또라이 셋과 함께 있구나.
그러고 나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물한 살 여름밤.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게 무색할 정도로 네 사람의 술자리는 여전히, 즐거웠다.
* * *
진우와 태준을 택시 태워 보내고, 두 사람은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적당히 알딸딸한 취기가 솔솔 잠을 몰고 왔다. 양치질하며 찬물을 덮어쓰고, 보드라운 샤워 가운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웠다. 언뜻 확인한 핸드폰 시계가 새벽 2시를 향해 가고 있다.
“내일은 뭐 할까?”
한결이 앙, 은한의 볼을 빨았다 놓으며 물었다. 아직도 쌩쌩한 체력이 놀랍다. 그러니 그렇게 짐승처럼 절 괴롭힐 수 있는 거겠지.
“내일은 집에 가.”
“……어?”
“아무리 부모님이 괜찮다 하셨어도 첫 휴간데. 저녁 정도는 같이 해야지.”
저처럼 자취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오랫동안 아들을 보지 못했던 적이 없으실 터다. 은한은 한결이 꽤나 사랑받는 아들인 걸 알았다. 입대에 맞춰 할머니가 오실 정도고, 아주 가끔 흘려듣는 소리로는 깨가 쏟아지는 부모님이라 했다.
사랑이 넘치는 가족에게서 소중한 아들을 빼앗은 파렴치한이 되긴 싫었다. 한결과 얼마나 더 만날진 모르겠으나 지금 마음으로는 평생 함께하고 싶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가족에게도 잘 보여야 했다.
“……알았어.”
한결은 생각보다 순순히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은한이 착하다는 듯 그의 짧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저녁만이야. 점심은 나랑 먹고 가야 해.”
“응.”
“근데 부모님 케이크 좋아하셔? 내일 체크아웃하고 집 가는 길에 한 판 더 사자. 부모님 드리게.”
내가 줬단 소리는 하지 말고. 그냥 오는 길에 샀다고 해. 은한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결은 물끄러미 은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대답 안 해.”
“그냥. 너무 좋아서.”
“네가 날 안 좋아한 적이 언제 있기나 했냐.”
데구르르 한결에게서 떨어져 나간 은한이 쭈욱 기지개를 켰다. 내일 한결과 헤어지고 나면 또 학교에 가야 한다. 시험공부도 해야 하고, 과제도 마무리해야 했다. 고작 2학년인데 뭐가 이리 바쁜지 모르겠다. 3학년은 사망년이라던데. 벌써 겁이 난다.
“벽화 보고 싶다.”
은한은 두 바퀴를 구르고서야 침대 맞은편에 다다랐는데, 한결은 한 바퀴를 채 구르기도 전에 은한을 품에 안았다. 귓가에 듣기 좋은 저음이 흐드러졌다.
“벽화? 갑자기?”
“매일 보다가 안 보니까 그립네. 할머니 송충이 눈썹이 가물가물해.”
한결이 백발 할머니의 시커먼 눈썹을 상기하며 소박하게 웃었다. 꿈틀꿈틀 몸을 돌린 은한이 한결의 턱을 매만졌다. 한결이 쪽쪽, 그의 손가락에 키스했다.
“나름 네 작품이라고 애정하는 꼴이 굉장히 하찮네.”
“에이. 그거 아니었으면 너랑 만나지도 못했다고.”
“……그건 그렇지.”
주황색을 만들었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한결이 떠올랐다. 덕분에 제 대학 생활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긴 했지만, 어찌 됐든 좋은 인연들임은 확실했다. 진우도, 태준도 그리고 한결도.
“다음 편지 보낼 때 사진 찍어서 같이 보낼게.”
“고마워.”
은한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한결이 마구 비비적거렸다. 은한이 간지러움에 꺄르륵,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편지 보내는 거 귀찮지?”
“귀찮긴 뭐가 귀찮아. 손가락 운동도 하고 좋구만.”
얄팍한 거짓말임에도 한결은 굳이 딴지를 걸지 않았다.
“그럼 다행인데……. 편지 보내지 말란 소리는 못하겠다. 밤마다 읽는 게 너무 좋거든.”
일과를 끝내고 그의 편지를 읽을 때면 꼭 그와 같이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다. 캠퍼스 풍경과 은한의 집, 그리고 술집이 즐비해 있는 거리가 생생해서.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던 저와 은한이 꿈같기도 했다.
한결에겐 가장 홀로이면서, 동시에 가장 은한과 함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 존나 열심히 쓸 거야. 기대해. 내가 토지 저리 가라 길게 써 줄 테니까.”
“어. 기대할게.”
한결이 온 얼굴에 행복을 그렸다. 은한은 그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꼈다. 고작 활자 따위에 저리 좋아하다니. 편지 더 열심히 써야지. 길게 써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가볍게 일렁이는 한결의 목젖을 보고 있던 은한이 거기다 촉. 짧게 입을 맞췄다.
“헤어지기 싫다.”
“그러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헤어져야 하려나.”
“이게 다 좆같은 군대 때문이야.”
은한이 대상 없는 분노를 퍼부어 댔다. 고양이가 그르렁거리는 것 같다. 벽화 사진 필요 없으니까 셀카나 찍어 달랠까, 한결이 생각했다.
“또 휴가 나올게.”
“그게 네 맘대로 되냐.”
“훈련 전부 1등 해 버리면 돼.”
내 동기 중에 내가 휴가 제일 많이 받을 거야. 격주로 나올게. 어쩜 이리 자신감에 가득 찰 수 있는지. 은한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조금 무서웠다. 다음 휴가 땐 새까맣게 탄 한결이 마동석 같은 몸을 하고 있을까 봐.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제가 한결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지도 몰랐다.
“다 좋은데, 다치진 마라.”
“안 다쳐.”
한결이 괜한 걱정하지 말라며 은한을 꽉 끌어안았다. 은한 역시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한가득 감싸 쥐었다.
“한결아.”
“응.”
“좋아해.”
“…….”
“진짜. 좋아해.”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기댈 사람이 없어져서. 또 사랑한다, 좋아한다 속삭여 주는 사람이 없어져서. 일 년도 아니고 고작 4개월 떨어져 있었는데. 사무치게도 그리웠다.
그래도 재촉하지 않았다.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아마 한결은 제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님에도 사과를 전해 올 터였다.
은한의 이마에 입술을 붙인 한결이 아주 오랫동안 키스를 바쳤다. 은한은 가지런히 눈을 감은 채 울렁이는 그의 심장박동과 그의 숨소리를 외우려 노력했다.
“나도, 좋아해.”
“잘 다녀와.”
“응. 금방 올게.”
두 사람은 밤이 새도록 고백을 속삭였다. 보고, 입을 맞추고, 품에 안고 있음에도 그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끝내 창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밀려오고서야 꿈속으로 떨어졌다.
행복하지만 그 행복을 더 잇지 못해서 아쉬운 밤이었다.
* * *
생애 첫 공모전을 나가게 됐다. 종강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학과 공지가 내려왔다. 모든 시디과 학생이 공모전에 참여해야 한다고. 교수가 직접 피드백을 해줄 테니 작품 하나씩은 꼭 내라고 했다. 대기업의 앱 디자인 공모였는데, 심사위원 대다수가 우리 과 출신이라 내기만 하면 입상은 따 놓은 거랬다.
강제적이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자소서에 한 줄 추가할 수만 있다면, 방학 한 달쯤이야.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공모전 조는 3명으로 이루어졌다. 3학년 1명, 2학년 1명, 1학년 1명. 선후배가 돈독해지란 의미로 무작위로 정해진 조는 정말, 너무 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곱 개 강의 중 여섯 개를 F 받아서 시디과 신기록을 세웠다는 새내기와, 곧 반수를 할 거라니, 자퇴를 할 거라니 말이 많은 3학년 선배와 한 조가 됐기 때문이다. 미현은 은한의 조를 보며 딱 한 마디 했다.
술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 불러라, 친구.
한 조당 내야 하는 작품은 2개. 작품마다 3명의 이름을 올릴 수 있어 어떠한 작품이든 상을 받기만 하면 됐다.
“씨발…….”
그래. 상을 받기만 하면 되는데. 작품을 내야 상을 받지.
첫 조모임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톡방에 [중앙 도서관 스터디룸 B실로 2시까지 와 주세요.] 그리 남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없었다.
은한은 쌩쌩 에어컨 바람이 몰아치는 스터디룸에 무려 한 시간 하고도 29분째 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혼자면 어쩌지.
내가 두 작품이나 혼자 만들 수 있을까.
아, 그냥 하지 말까.
하지만 동기들은 다 하는데. 나만 안 해?
머리가 지끈거린다. 은한이 관자놀이를 꽈악, 짓눌렀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낯선 얼굴이 등장했다.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후배셨다.
“안녕하세요. 좀…… 늦었네요.”
무려 녹색. 녹색의 머리칼을 한 그가 피어싱한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웃었다. 좀…… 늦었네요? 좀? 이 정도면 약속 시각인 2시에 일어나서 나온 거 아니냐.
은한이 울컥울컥 치받는 욕을 삼켜 냈다. 요즘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후배에게 욕하면 과 이미지만 좆될 뿐이다.
“어. 좀. 많이. 늦었네.”
“아. 많이 늦었나요? 죄송합니다.”
또 굳이 ‘많이’라는 단어를 꼬집는다. 은한은 진작 이 조모임이 망할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어째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좋지 않은 결과가 도래할 듯했다.
1차 시안은 교수님들이 보시기 전에 4학년 선배들에게 먼저 컨펌을 받는다. 그 후 2차 시안까지 수정이 완료되면 교수님이 피드백을 해 주셨다. 오늘은 1차 시안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시디과 전용 강의실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줄줄이 모여 곧 뻥- 하고 터질 것 같았다. 아. 그냥 터졌으면 좋겠다. 지구 폭발 안 하냐.
유에스비를 움켜쥔 은한이 벅벅 마른세수했다.
흘끔, 훑어본 강의실 안에 녹색 머리칼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도 없다. 아니,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미현이네 조 발표는 환상적이었다. 앱의 아이덴티티와 완벽히 어우러지는 이미지에 부과설명. 화면 전환 애니메이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문제는 다음이 바로 은한의 차례라는 거다. 단상에 선 은한이 큼큼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 조는 유비쿼터스 홈에 맞춰 ‘편안하지만, 실용적이다.’ 라는 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밀레니엄(Millennials)세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까지 앱을 이해하고, 또 이용하기 쉽도록 앱 메인에 집 내부 일러스트를 배치했습니다. 해당 가구를 누르면 인공지능이 작동되고, 길게 누르면 미세 조정이 가능합니다.”
은한은 오늘 해가 떠오를 때까지 달달 외우고 또 외우던 말을 주춤거림 없이 뱉어 냈다. 동기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다. 홀로 바닥을 기기 싫었다.
비록 조 편성이 엉망이지만 최선을 다했다. 물론, 만족스럽지 못했다. 지금도 눈을 괴롭히는 프로젝터에 속이 울렁거렸다.
“이상입니다.”
은한이 말을 마치자 강의실 가득 적막이 맴돌았다. 꼭 그 적막이 저를 아작아작 갉아먹는 듯했다. 곧 호된 꾸지람을 들을 사람처럼 푹 고개를 고꾸라트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야. 강은한. 너 핸드폰 안 쓰냐?”
4학년 선배였다. 성격은 더럽지만 디자인은 끝장나게 한다던. 그녀의 목소리에 비아냥이 가득했다. 은한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씁니다.”
“핸드폰 폰트가 저렇게 작으면 어떻게 보고 쓸래? 네 선배는 어떤 새낀데 모바일 적정 폰트 크기도 안 가르쳐 줬냐. 레이아웃 잡고 핸드폰에 넣어 봤어야지. 글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터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이 나올지, 아닐지.”
“…….”
“네 말대로면 집 일러스트를 터치한다는 건데. 가스레인지 끄려다가 냉장고 끄고, 에어컨 켜려다가 TV 켜겠다?”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은한은 쥐구멍은커녕, 바늘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환풍기로 뛰어들까.
“그리고. 이게 다야? 다른 애들은 스크린이 적어도 14갠데. 너희 조는 두 개 합쳐서 14개가 안 되잖아.”
“그게…….”
“거기다 아이콘도. 디자인 하나도 새로 안 했네? 저거 그냥 원래 핸드폰에다 백그라운드만 바꾼 거잖아. 저걸 누가, 어떻게 심사하냐? 어?”
뭘 봐야 심사를 하지. 저거 출품할 수는 있겠냐. 그가 제 옆의 친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친구가 못하지. 교수님들이 통과 안 시켜 줄 걸, 하며 동의했다.
은한은 이제 환풍구가 아니라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죽고 싶다. 쪽팔리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이런 감정은 난생처음이었다.
“2차 시안 때까지 고쳐 오겠습니다.”
“못 고칠 것 같은데. 집 일러스트가 메인인데. 사이즈 조정을 어떻게 하려고? 아예 새로 만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
그럼, 씨발 나보고 뭐 어쩌라고. 하지 말라고? 때려치우라고? 속은 핵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고 난리가 났지만, 은한은 무감각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했기 때문이다.
“해 보겠습니다.”
“……그러던가.”
꾸벅, 허리를 숙인 은한이 유에스비를 빼냈다. 그 후로 또 한참 발표가 이어졌다. 은한은 초점 없는 눈동자로 발표를 관망했다.
우우웅.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 핸드폰. 핸드폰. 그놈의 핸드폰. 은한이 느릿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미현이었다.
[미현: 소주 마실래? 누나가 쏜다.]
은한이 저 멀리 서 있는 미현을 쳐다봤다. 미현이 씨익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은한이 가늘게 웃으며 화답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두드리는 활자는 전혀 달랐다.
[나 너무 피곤해. 다음에 마시자.]
[미현: 알았어. 그 녹색 머리 새끼 머리에 잔디 심어 버릴까 보다.]
[농약 아끼지 말고 팍팍 뿌려 줘라.]
[미현: 힘내라 은하니.]
은한은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죽였다. 강의실 모서리 어디쯤을 멍하니 주시했다.
“…….”
한결이 보고 싶었다.
* * *
은한은 아주 오랜만에 해가 떠 있을 때 집으로 돌아왔다. 불도 켜지 않고, 씻지도 않고 풀썩 바닥에 엎어졌다. 몸이 무겁다. 그 이유가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두 개 다이리라.
“하아…….”
땅이 꺼져라. 세상이 무너져라. 그런 심보로 한숨을 내쉬었다. 배는 고픈데 입맛이 없다. 잠은 오지만 자고 싶진 않았다. 몸 상태가 엉망이다.
우우웅, 우우웅. 핸드폰이 규칙적으로 진동했다. 멍하니 그 진동을 무시하던 은한이 퍼드득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이 꽉 찰 정도로 기다란 번호.
한결이다. 은한이 녹색 전화 아이콘을 연달아 두드렸다.
“백한결!”
-금방 받네? 오늘 공모전 시안 발표라고 해서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안 받을 줄 알았으면서 왜 했냐.”
-혹시나 운 좋으면 우리 방울이 목소리 들을 수 있을까, 했지.
한결이 수화기 너머로 능글맞게 말하며 웃는다. 은한의 입술에도 미소가 걸렸다.
“끝나고 집에 왔어.”
-벌써? 원래 그런 거 끝나면 다 같이 술 마시지 않아?
“아아. 미현이가 술 마시자고 했는데, 피곤해서 그냥 왔어.”
-피곤해? 잠 못 잤어? 밥은? 먹었고?
피곤하단 말에 질문이 와르르 장대비처럼 쏟아진다. 엄마보다 걱정이 훨씬 많은 한결이다. 은한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있었던 탓인지 온몸이 끈적하다. 리모컨을 쥐고 희망온도를 최저로 내렸다.
“지금부터 내일까지 잘 거야. 밥은 일어나서 먹을래.”
-전화 끊을까?
“아니. 싫어. 끊지 마.”
은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에겐 밥보다, 수면보다 한결이 고팠다.
-방울아.
“어…….”
-무슨 일 있었어?
귀신같네. 은한이 노트북이 들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크로스백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평소라면 내 재산 중에 제일 비싼 거야! 하며 애지중지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부서졌으면, 하고 바랐다.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아니. 내가 무슨 일이 있어. 빈둥대다가 어제 밤새워서 시안 준비했거든. 피곤해서 그래.”
-진짜?
“어. 진짜. 너는 오늘 뭐 했어? 오늘은 병장 새끼가 시비 안 걸든?”
은한이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한결과 통화하면서 는 것이다.
-이제 나한테 관심 안 가진다니까.
한결은 드디어 막내를 탈출했다. 그래 봐야 고작 일병이지만, 어깨 주무르기가 막내 몫이 되었단다. 걸레질과 빨래만 하면 된다고 즐거워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도 짜증 나. 부대는 학교 전학 가는 것처럼 못 바꾸냐. 손진우 있는 부대로 옮기면 좋겠는데.”
-사고 치면 돼. 근데 사고 치면 너랑 이렇게 자주 통화 못 해. 우리 편지도 전부 검수당할걸.
“윽. 존나 끔찍하네. 그럼 오늘 뭐 했어?”
-축구했어.
“축구?”
-어. 오랜만에 공 차니까 재미있더라. 제대하면 축구 동아리 들까 봐. 방울이도 같이 들래?
“어……. 나는 응원할게.”
중학생 이후로 축구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전반전만 뛰어도 병원에 실려 갈 터였다. 은한이 조물조물 아프지도 않은 제 발목을 주물렀다. 늘 한결이 주물러 줬는데. 커다란 손이 그립다.
-아…… 네 다리. 미안. 잠깐 잊었어.
“별게 다 미안하네. 그래서 축구는 이겼어?”
-당근 이겼지. 내가 데이비드 백이야. 두 개의 심장.
“얼씨구.”
그 후로 한결의 일상을 건네받았다. 서 상병이 여자친구랑 싸웠는데 종일 훌쩍인다. 점심 메뉴로 나온 국이 얼마나 맛이 없었는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제 동기가 장난으로 군화 끈을 묶어 놔서 넘어질 뻔했다. 날이 너무 더워서 병사 한 명이 더위를 먹고 쓰러졌다. 하지만 나는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라.
한결과의 통화가 이어질수록 은한의 얼굴은 피어났다. 늘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결의 일상이 왜 이리 재미있는지.
은한은 그때야 뭘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씻고, 치킨 시켜 먹어야지. 시안이 망했든, 아니든. 오늘 나는 충분히 수고했으니까 만땅으로 충전하고 내일부터 다시 파이팅 해야지. 그리 다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느꼈다.
앞으로 한결 없이 사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 * *
“콜록, 콜-록.”
치킨에 맥주를 세 캔이나 마셨다. 그 후 바로 곯아떨어졌는데. 문제는 최저 온도로 맞춰 놓은 에어컨을 끄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은한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단단히 시달리게 됐다.
“은하나. 너 곧 죽을 것 같아.”
“차라리, 콜록, 죽고 싶다.”
과방에서 미친 듯이 마우스를 놀리고 있으니 미현이 걱정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해 왔다.
온몸이 홧홧한 열을 뿜어 댄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목은 칼칼했으며 눈알은 쓰렸다. 아씨. 주말이라 병원도 못 가는데. 은한이 카페에서 사 온 유자차를 들이켰다. 식어 빠진 유자차가 속을 메슥거리게 했다.
“그냥 쉬지. 미련하게 학교를 왜 왔어.”
미현이 쯧쯧 혀를 찼다.
“안 돼. 나 완전 까인 거 봤잖아. 이거 다하고 콜록, 장렬히 전사할 거야.”
“하?”
“너 아니어도 충분히 혼났다. 그러니까 좀 봐주라.”
늘 한결에게 전화가 오는 시간. 오늘도 어김없이 핸드폰이 온몸으로 울어 댔다. 그리고 여보세요. 네 음절을 내뱉는 순간, 된통 혼이 났다. 정말 된통.
감기-이?! 비명으로 시작한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어쩌자고 에어컨을 켜고 잤냐. 주말이라 병원 문도 안 여는데. 일단 약국 가서 약부터 사 먹고 집에 딱 붙어 있어라. 아, 약 먹기 전에 밥도 먹어야 한다. 요즘 죽도 배달되니까 꼭 시켜 먹어라.
진짜 탈영해 버리기 전에 몸조심해라.
협박과 걱정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은한은 그가 신신당부한 것 중에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약은 원래 챙겨 먹는 성격이 못 됐고, 죽은 맛없어서 싫었다.
아침 통화를 상기한 은한이 쩝, 입맛을 다셨다. 내일은 그래도 좀 나아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야 걱정을 덜 할 텐데. 어쩐다.
흐웁, 크게 숨을 들이마신 은한이 머리를 털었다. 일단은 작업부터. 그가 모니터에 들어갈 듯 집중했다. 그런 은한의 뒤통수를 가만히 노려보던 미현이 따뜻한 거라도 사 오겠다며 과방을 나섰다. 은한은 여전히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문이 닫히고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당연히 미현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갑 두고 갔냐. 하여튼 존나 덜렁대. 내 카드 가져가. 가방에 있어.”
“진짜? 가져가도 돼?”
“어!”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젯밤 내내 시달렸던 악몽의 주인공이니 당연했다. 벌떡 일어난 은한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안녕.”
은한에게 가감 없이 독설을 퍼붓던 선배다. 은한이 어쩔 줄 모르고 데구루루 눈만 굴렸다. 그 순간에도 노트북을 숨기는 건 잊지 않았다.
긴 생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그녀가 까치발을 들며 은한의 어깨너머를 훔쳐봤다.
“작업 중?”
“네. 고칠 게 많아서…….”
“감기 걸렸어? 목소리 되게 안 좋네.”
“아…… 어제 에어컨을 켜 놓고 자서……. 죄송합니다.”
“그걸 왜 나한테 죄송해해.”
은한을 지나친 그녀가 낡은 소파에 털썩 드러눕듯 앉았다. 은한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비죽,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고칠 거 많다며. 작업 안 해?”
“아, 네!”
후다닥 자리에 앉은 은한이 달칵달칵 열심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하지만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기분 탓이야. 기분 탓. 설마 날 보고 있겠어.
그리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너 왜 말 안 했냐. 너희 조 이상한 애들만 모인 거.”
“아……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호구 같은 새끼.”
“…….”
아 호구. 네. 제가 호구죠. 소문으로만 듣던 팀플 호구가 제가 될 줄은 몰랐는데. 그리됐네요. 혀끝에 맴도는 말은 많은데 뱉진 못했다. 은한은 마우스에 손을 올린 채 버석하니 굳어 있었다.
“내 이미지만 좆같아졌잖아. 완전 히스테릭한 선배로. 어?”
“……죄송합니다.”
왜 제가 죄송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선배니까 죄송해야겠지요. 은한이 탁한 눈동자로 화면 가득한 집 일러스트를 주시했다. 집에 가고 싶다. 자취방 말고. 본가에. 누나들한테 찡찡거리고 싶다.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으니 어느새 그녀가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익숙한 샴푸 냄새가 났다. 저와 같은 샴푸 냄새. 한결이 좋다고 노래를 부르던 냄샌데.
한결의 얼굴을 떠올리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섯 마디 정도의 욕은 더 감당할 수 있을 듯했다.
“작품 두 개 내지 말고. 하나만 해.”
“네?”
“교수님 컨펌까지 2주 남았어. 너 혼자 어떻게 다 하려고? 그냥 하나만 해.”
“그래도 돼요?”
“내가 너희 조 팀원 좆같다고 교수님한테 잘 말씀드릴 테니까 지금 하는 시안만 존나 파.”
“아……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해요. 선배님.”
정말! 좋은 선배님이구나! 은한이 사르르 눈을 휘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가 은한의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새끼. 웃는 거 귀엽네.”
“네! 그런 말 되게 많이 들어요. 더 귀엽게 웃을까요?”
은한이 고개까지 살풋 옆으로 꺾으며 생글거렸다. 그녀가 깔깔, 우렁차게 박장대소했다. 한참이나 웃던 그녀가 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핸드폰.”
“예?”
“핸드폰 달라고.”
“아, 네!”
은한이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조심히 올려뒀다. 그녀가 빠른 손놀림으로 번호를 입력했다.
“아이디어는 좋으니까 잘 발전시켜 봐. 진도 안 나가면 연락하고. 도와줄게.”
“……천사 같으시네요, 선배님.”
“어머. 그래? 밖에 가서 소문 좀 내고 다녀라. 시디과 이유란이 그렇게 비단결 같고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요즘 남자들이 아직도 청순녀에 환장을 해요. 미개한 새끼들. 유란이 쯧쯧 혀를 찼다.
“넵!”
은한은 꼭 그러겠다는 뜻으로 주먹까지 쥐어 보였다. 한 번 더 그의 머리를 쓰다듬은 유란이 과방을 벗어났다. 안녕히 가세요. 은한은 그녀가 문을 닫고 나서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선배님에 대한 존경심이 어찌나 뻐렁치는지. 이 몸뚱이로도 밤새 작업할 수 있을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미자차를 양손에 쥔 미현이 돌아왔다. 은한은 오미자차를 썩 즐기지 않았지만, 싱글벙글한 얼굴로 맛있게 마셨다.
“그새 얼굴이 좋아진 것 같다?”
미현이 물었다.
“어. 천사님이 잠시 왔다 가셨다.”
“엉……?”
“있어. 천사님.”
아유. 내 주변엔 무슨 천사님이 이렇게 많아. 전생에 얼마나 착한 짓을 한 거야. 은한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마우스를 클릭했다.
2차 시안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뭐. 나쁘지 않네. 유란의 피드백은 그게 다였지만 은한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반응이었다. 이대로면 무난하게 자소서에 한 줄 추가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김칫국을 항아리째로 퍼마셨다.
다음날, 그러니까 공모전 제출을 딱 일주일 남겨 둔 날. 여름 무더위가 절정에 다다랐던 날.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은한의 조 선배가 나타났다.
“조모임 해야지?”
네? 내가 너랑요? 너랑 나랑 같은 조예요? 몰랐는데요. 새까맣게 까먹어 버렸는데요. 하지만 은한은 철저히 약자였다. 이제 막 먹이사슬 최하층을 벗어난 2학년 나부랭이.
“야. 집이 뭐야. 유비쿼터스가 주젠데. 로봇으로 바꿔.”
“……네?”
“일러스트 너무 유아틱하다. 인공지능에 일러스트가 웬 말이야. 그냥 전부 플랫 디자인으로 바꾸자.”
“아?”
“색도. 온색 말고, 한색으로 엎어.”
이 미친놈이 어디서 약을 빨고 왔나. 은한은 제 노트북으로 선배 새끼의 머리를 조각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직접 파헤쳐 볼 뻔했다.
끔찍한 현실에 은한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꿈이면 깨라. 이제 깰 때 됐어.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은한은 여전히 뒤룩뒤룩 살찐 선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은한이 온 내장을 다 쏟아낼 듯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할 시간 없어요. 당장 일주일 뒤에 제출인데. 언제 아이디어 다시 짜고 컨셉 잡고 작업해요. 못 해요. 거기다 로봇에 플랫 디자인이라니. 로봇을 어떻게 플랫 디자인 형식으로 만들어요?”
“야, 씨발 선배가 하자면 하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
그래. 그랬다. 선배가 하자면 해야 했다. 그냥 강의 팀플도 아니고. 학과 전체가 나가는 공모전에, 선후배가 친해지라고 부러 만든 조인데.
자퇴할까.
엄마한테 뺨 맞겠지.
은한은 결국 참담히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 * *
영혼이 몸을 떠난 듯했다. 화낼 기력도 없었다. 모든 게 무감각하고, 의미 없이 느껴졌다. 살아서 뭐하나. 종국엔 그런 생각까지 했다.
교수님의 피드백이 끝났다. 벌써부터 입상이라도 한 것처럼 신나 하는 조도 있었고 아쉬워하는 조도 있었다. 은한은 그냥 까였다.
아이디어가 별로고, 여기는 뭐가 문제고, 이곳을 이렇게 고쳐봐. 하는 까임이 아니라, 그냥. ‘이건 내지 마라.’ 그렇게 딱 한 마디를 들었다.
발표도 뭐 같이 했다. 은한의 아이디어가 아니니 붙일 말도 없었다. 물론, 디자인은 더 뭐 같았다. 꾸역꾸역 로봇 형태를 플랫 디자인 형식으로 바꿨고, 배경도 죄다 블루 계열로 뒤엎었다.
다 그 돼지 선배 새끼의 말대로 한 것이다. 그는 어제부로 연락이 안 됐다. 초록색 후배는 어디 가서 뒤지기라도 한 건지. 못 본 지 한참이었다.
널따란 강의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조들이 교수님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고칠 부분을 짚어 갔다. 그 한가운데에, 은한은 어정쩡히 섬처럼 떠 있었다. 파도가 몰아친다. 거센 줄 몰랐던 그 파도는 은한을 통째로 휩쓸어 심해로 끌고 내려갔다.
은한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 없이 강의실을 벗어났다.
도착한 곳은 미대 뒤편에 있는 흡연 장소였다. 어떻게 걸어도 발바닥에 담배꽁초가 밟히는 곳이다. 쓰레기통 옆에 자리를 잡은 은한이 담뱃갑을 꺼냈다.
술 마실 때 간혹 한결의 담배를 빼앗아 피우던 건 다 옛말이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일주일에 한 갑씩 꼬박꼬박 태웠다.
“…….”
이번 주는 사흘 만에 한 갑을 태웠지만. 담뱃갑 안에는 돛대 하나만이 남아있다. 그마저도 짜증이 났다. 줄담배를 태우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편의점까지 가기는 또 귀찮았다.
담배를 문 은한이 라이터를 켰다. 순식간에 불이 붙고, 폐부 가득 메케한 연기가 차올랐다.
“후우우…….”
연기를 뱉는 건지, 한숨을 뱉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 은한은 청량한 하늘을 바라보며 뻑뻑 담배를 태웠다. 그러다 울컥 치솟는 분노에 쾅! 쓰레기통을 발로 찼다. 두꺼운 쇠로 만들어진 붙박이형 쓰레기통이 파르르 경련했다.
“아윽!”
은한의 발은 으스러지는 듯했고. 오래간만에 피부 속에 숨어 있는 철심의 존재를 느꼈다. 그대로 주저앉아 발목을 주물렀다. 지이잉, 울리는 다리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아팠다.
“씨발, 씨발, 씨발.”
이게 다 그 돼지 새끼 때문이야. 잘 할 수 있었는데. 저도 동기들처럼 칭찬받을 수 있었는데. 진짜 열심히 했는데. 은한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런 허무함과 좌절감은 난생처음 겪는 것이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에 매달린 담배가 하염없이 타들어 갔다.
“조그마한 게 담배도 피우냐.”
“…….”
머리 위로 떨어지는 미성에 은한이 고개를 들었다. 유란이었다. 삐딱하게 담배를 꼬나문 그녀가 한심한 눈으로 은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 지금?”
“어…… 아까 했나요?”
죄송합니다. 은한이 다시 고개를 오그렸다. 옆에 있는 존재가 유란임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생의 첫 실패를 경험했느니 당연했다.
아. 본가나 내려갈까. 얼마 남지 않은 방학 동안 동기들은 막바지 공모전 준비로 바쁠 터였다. 그 사이에 낙동강 오리 알처럼 표류하느니, 사라지는 게 나았다.
“근데 저 안 작아요.”
은한이 웅얼웅얼 말했다.
“뭐?”
“저 안 조그마하다고요.”
“…….”
유란이 가늘게 눈을 뜨곤 은한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는 걸.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웬 개새끼가 잘 차려가던 밥상을 밥상째로 집어삼키고, 부수고, 깽판을 쳐 놨으니. 유란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웠다.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 꼭 닮은 누군가가 생각나서.
“작은데.”
“안 작아요. 선배님이 크신 거예요. 왜 다 그렇게 키가 커요? 선배님도 그렇고, 또라이 셋도 그렇고.”
“또라이?”
“아, 제 친구들이요.”
죄다 멀대 같이 키만 커서. 사람 자존감 낮아지게. 맨날 방울이라고 개처럼 부르고. 중얼중얼 이상한 한탄을 이어 가던 은한이 아! 단말마의 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필터까지 탄 담배가 은한의 손가락을 지졌기 때문이다.
유란이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를 내던졌다. 작은 불씨가 이리저리 튄다.
“내가 멀대 같냐?”
“예?”
“멀대 같이 크다고 그랬잖아.”
“누가요?”
“니가요.”
“……제가요?”
언제요? 은한이 꿈벅꿈벅 눈꺼풀을 움직였다. 유란이 쯧, 혀를 찼다.
“됐다. 후배님아. 술 마실래?”
“술이요?”
“어. 후문 앞에 할리비어라고 있거든? 거기로 친구 몇 명 데리고 와. 많이 데리고 와도 된다. 유란 선배님이 돈이 존나 썩어나시거든.”
“지금요?”
“그럼. 내일 올래? 정신 차려, 새끼야.”
유란이 은한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겨 내 뒤집어씌웠다. 쨍쨍한 햇볕이 가감 없이 눈을 괴롭힌다. 은한이 눈살을 구겼다.
“빨리 와라. 나 기다리는 거 안 좋아해.”
유란은 차마 대답하기도 전에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은한이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훤한 대낮이지만 술은 고팠다. 지금 상황에 고프지 않은 게 이상하리라.
강의실에 들어선 은한이 분주히 시선을 굴렸다. 미현이. 미현이가 어디 있지. 그때, 톡톡 누군가가 어깨들 두드렸다. 미현이었다. 은한이 막 술이라는 단어로 입을 떼려 했다.
“은하나. 술 마시자.”
“어? 나도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코 삐뚤어지게 마셔야지! 해 뜰 때까지 아무도 집에 못 가.”
“왜……?”
내가 공모전 못 나가게 된 게, 해가 뜰 때까지 술 마실 정도로 큰일인가. 은한이 잠시 고민했다. 미현이 되려 이상하다는 듯 은한을 쳐다봤다.
“네 생일이잖아.”
“아? 내…… 생일?”
은한이 핸드폰 달력을 확인했다. 제 주민 번호에 적힌 숫자와 같은 숫자가 동동 떠 있다. 진짜 내 생일이구나. 그래. 제 생일은 매미가 목이 찢어져라 울어댈 때, 여름 절정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어…… 그러네. 내 생일이네.”
은한이 훌쩍 코를 찡그렸다. 생일을 잊고 살다니. 제가 예순도 아니고.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겼는데. 이게 전부 망할 돼지 선배와 녹색 후배 덕분이다.
“케이크는 가는 길에 사 가자! 딸기 케이크 어떠냐. 내가 딸기가 먹고 싶어.”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두른 미현이 신난 듯 말했다.
“나는 초코!”
어느새 동기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그래. 그럼 두 개 다 사자!”
그녀들은 신나게 메뉴를 정했다. 우리 은하니 생일이니까 맛있는 거 먹자. 술부터 골라. 소주, 맥주, 막걸리. 아니면 존나 고급지게 양주? 아…… 뭐가 좋지. 여름이니까 막걸리 어떠냐. 아니지. 여름엔 맥주지. 지랄. 사계절 내내 이슬이와 함께하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어디로 내팽개쳤냐.
우르르 쏟아지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은한이 뒷덜미를 벅벅 긁었다.
“있잖아…….”
“뭐야. 설마 약속 있냐, 너?”
“어…… 약속이겠지? 그…… 유란 선배가 술 사 주신다는데. 같이 갈래? 내 생일파티는 다음에 하자.”
은한이 신발 밑창으로 땅을 문질렀다. 친구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유란이 다가가기 쉬운 이미지가 아니니. 혼자 가야 하나. 친구 못 데리고 갔다고 혼내진 않겠지.
“유란 선배?”
아니나 다를까. 눈살을 잔뜩 찌푸린 미현이 되물었다. 은한이 어물쩍 고개를 끄덕였다.
“야. 팩트 있냐? 좀 빌려줘라.”
“나 섀도 번졌어?”
“아씨. 나 화장 안 하고 왔는데.”
“이럴 게 아니라 일단 화장실로 가자.”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이어졌다. 가방에서 온갖 화장품을 꺼낸 동기들이 분주히 화장을 고쳤다. 꼭 미팅 나가는 새내기 같았다. 은한은 어느새 제 손에 얹어진 거울로 미현이 아이라인을 고치는 걸 돕고 있었다.
“가게?”
“당연히 가야지. 유란 선배님이랑 친해지고 싶었단 말이야.”
“……왜?”
“왜긴. 멋있잖아. 공부도 잘해, 디자인도 잘해. 거기다 존나 예뻐. 남자 선배들도 언니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잖아.”
“맞아. 결혼하고 싶어.”
“내 이상형이 유란 선배야.”
결혼, 이상형. 그런 게 왜 유란의 옆에 붙는 건지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아니, 찰나 동안에는 친구들이 저와 같은 동성애잔가, 싶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그게 사랑이 아니라 동경이라는 걸 깨달았다.
은한은 풀 메이크업을 마친 친구들에게 휩쓸려 술집에 다다랐다.
“왔냐?”
유란은 생맥주에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를 씹고 있었다. 동기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안녕하세요.”
유란이 빙긋, 미소 지으며 그녀들의 말을 흉내 냈다. 동기들이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술자리는 부드럽게 흘러갔다. 유란은 적당히 말이 많았고, 적당히 대화를 리드해 갔다. 동기들의 의미 없는 수다에도 귀를 잘 기울여줬다. 은한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그저 열심히 술만 축냈다. 얼른 취해서 집에 가고 싶었다. 가서 오늘 하루가 꿈이었던 것처럼 자고, 내일 아침 눈 뜨자마자 대구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아! 언니. 오늘 은하니 생일이에요.”
언제부턴가 호칭이 언니로 바뀌었다. 유란이 비스듬히 은한을 응시했다.
“생일?”
“네! 그래서 저희가 케이크 사 오려고 했는데 깜빡했네요. 지금 가서 사 올까요? 빵집 문 열었나?”
갑작스레 거론된 제 이름에 은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든 시선이 은한에게 집중됐다. 은한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뭐지. 나보고 갔다 오라는 건가, 싶어 군말 없이 엉덩이를 떼려 했다.
“내가 갔다 올게. 술 마시고 있어.”
“야. 무슨 생일 주인공이 케이크를 직접 사.”
“그게 뭔 상관이야. 술도 깰 겸 다녀올게. 아까 뭐랬지? 딸기랑 초코랬나?”
나간 김에 담배도 피우고 와야지. 은한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지갑을 찾았다. 그러자 동기들이 빽 소리를 지르며 각자 지갑에서 이만 원씩 꺼냈다. 은한의 손에 금세 육만 원이 들렸다.
“남는 건 은하니 용돈 해.”
미현이 끌끌 아저씨처럼 웃으며 말했다. 픽, 실소한 은한이 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고 몸을 일으켰다.
곧 등 뒤로 다시 왁자지껄한 수다가 이어졌다. 은한은 괜히 핸드폰을 켰다 죽이며 질질 걸음을 끌었다.
그래도 동기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홀로 집에 박혀 있었으면 우울함이 끝도 모르고 절 잠식시켰으리라. 이렇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기만 해도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아, 씨발…….”
빈 담뱃값에 금세 기분이 더러워졌지만. 아까 돛대를 피우고 다시 사지 않았던 걸 깜빡했다. 은한이 멍하니 길거리를 바라봤다.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제각각 다르게 웃으며 나돌아 다닌다.
피곤한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고작 담배가 뭐라고.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기분이다. 제 인생 전체가 빈 담뱃값이라도 된 것 같았다.
쓸데없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에 시선을 낭비하고 있는데, 눈앞으로 하얀 담배가 다가왔다. 환영인가. 은한이 맹하게 입을 벌린 채 생각했다.
“필요 없어?”
유란이었다. 감사합니다. 은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좆같지?”
“네?”
“공현준 말이야.”
돼지 선배의 이름이다. 은한은 답 대신 하얀 연기만 내뿜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서. 당연히 속으론 온갖 말을 다 했다. 암요. 좆같지요. 딱 한 대만 때려 봤으면 좋겠네요. 아니, 세 대쯤.
요란하게 변하는 은한의 얼굴에 유란이 큭큭댔다.
“잊어. 그 새끼는 이미 글러서 답이 없어.”
“네…….”
“상은 못 타도 포토샵 엄청 늘었잖아. 아마 네 동기 중에 네가 제일 많이 늘었을걸? 혼자 작품 두 개나 만들었지. 그중 하나는 통째로 갈아엎었지.”
“…….”
“한 달에 열리는 공모전이 몇 갠 줄 아냐. 입상 못 한 건 조금만 고쳐다 다른 곳에 내면 돼. 기죽지 마라.”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모전이 한두 개도 아니고. 앞으로 밥 먹듯이 할 공모전인데 상 하나쯤은 놓쳐도 괜찮았다. 은한은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쌉싸름하던 담배 연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선배님은 진짜 천사신가 봐요.”
“그래? 그런 소리 태어나서 딱 두 명한테 들어 봤다.”
“하나는 저고, 또 한 명은 누군데요? 남자친구?”
“아니. 내 동생.”
유란이 길게 연기를 뿜으며 미소 지었다. 은한이 호오, 하며 입술을 둥글게 말았다. 그녀에게 동생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서. 물론 은한은 그녀의 나이도 잘 몰랐다.
“동생요? 선배님 동생 있으세요?”
“지금은 없어.”
“네?”
“죽었어.”
“…….”
은한은 또다시 답할 말을 찾는 데 실패했다. 어쩌지. 뭐라고 해야 하지. 미국처럼 아임 쏘리, 라도 해야 하나. 은한의 눈꺼풀이 불안하게 깜박거렸다. 유란이 탕탕 은한의 등을 두드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보인다.”
“어……. 죄송해요.”
“넌 뭐가 그렇게 맨날 죄송하냐.”
“……그러게요.”
씁쓸하게 웃은 은한이 필터만 남은 담배를 전봇대에 비벼 껐다. 유란이 그런 은한을 정의할 수 없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너 내 동생 닮았어.”
“……네?”
“진짜. 엄청 닮았어.”
“…….”
“그래서 내가 가끔 발작하듯 너한테 잘해 줄지도 모르거든?”
“…….”
“근데 그거 존나 행운이니까 로또 맞았다 생각하고 받아.”
마지막 연기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당긴 유란이 툭 담배를 던졌다. 그 후, 휙 뒤를 돌았다.
어어……. 은한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다.
“같이 안 가 주시게요?”
“내가? 귀찮게 왜?”
맛있는 거로 사 와라. 유란이 미련 없이 술집 안으로 사라졌다. 은한이 바보 같은 얼굴로 그녀가 남기고 간 불씨를 내려다봤다.
발걸음이 무겁다. 그렇게 바라던 집인데, 어쩐지 들어가기가 싫었다. 시끄러운 곳에 있다 와서 그런가. 적막한 골목길이 외로워 보였다.
은한은 노란 가로등 아래의 벽화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한결에게 벽화 사진을 보내 주지 못했다. 근래 공모전 준비로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찍을까. 핸드폰을 꺼내려다 말았다. 어두컴컴한 탓에 썩 예쁜 사진이 안 나올 듯해서.
내일. 내일 찍어야겠다.
은한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월아 네월아. 느릿하게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익숙한 길이라고 금세 백색 가로등에 다다랐다.
“…….”
그리고 은한은 집을 목전에 두고 돌덩이보다 더 단단히 굳어야 했다.
“방울이 안녕.”
“너…….”
“8분 남았다. 엄청 걱정했어. 생일 못 챙겨 주는 줄 알고.”
“…….”
한결이 가로등 아래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생일 축하해.”
케이크를 든 그가 그 어떠한 날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나 눈부신 웃음인지. 은한은 저도 모르게 후두둑,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한결이 소중하게 들고 있던 케이크를 툭,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부대 안에서 친구에게 사정에 사정을 더해 주문 제작한 케이큰데.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성큼성큼 은한에게 걸어간 한결이 그의 볼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말간 얼굴이 금세 흠뻑 젖었다. 심장이 뭉툭한 칼에 자비 없이 난도질당하는 듯했다.
“왜 울어.”
“흐으…….”
“무슨 일 있었어? 응?”
한결이 은한의 눈가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어떻게든 달래 보려 하는 노력이 무심하게 은한의 눈물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벌어진 입술 새로 나오는 축축한 숨 한 자락에, 한결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무슨 일일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서럽게 우는 걸까.
분명 어제 전화를 할 때만 해도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 더디긴 했지만 감기도 다 나아가는 듯해 안심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은한의 생일이다. 당연히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집 앞에서 한참이나 기다릴 걸 각오하고 온 거였다. 자정이 지나서 와도 실망하지 말아야지. 그런 걱정만 하고 있었거늘.
“은한아.”
“흑, 크읍…… 흐어어엉.”
“하아…….”
한결은 자신이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종일 붙잡고 사는 건 은한과의 통화와 그가 보내 준 편지가 다인데. 이렇게나 펑펑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가로등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었다.
한결이 조심히 은한을 끌어안았다. 작은 몸뚱이가 기다렸다는 듯 안겨 온다.
“누굴까.”
“흐으, 윽…….”
“누가 우리 방울이 괴롭혔지.”
내가 총으로 쏴 버릴까. 나 총 엄청 잘 쏴. 칭찬 되게 많이 받았어. 한결이 중얼중얼 부러 말을 이었다. 공기 중에 산란하는 은한의 울음소리를 듣기 싫어서.
은한이 한결의 허리를 꽉 세게 껴안았다. 그리웠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그동안의 서러움을 다 토해 냈다. 그렇게 숨기고 숨겼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온갖 하얀 거짓말은 다 했는데. 이리 나타나 버린 건 반칙이다. 예쁘게 웃은 건 반칙이다.
은한은 울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힘든 일상은 둘째고, 한결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제 딴에는 배려하고자 한 일인데 괜한 상처를 줘 버린 듯했다.
“흐읍, 흐……. 끅.”
“일단 들어가자. 응?”
이렇게 있다간 생일의 마침표를 길바닥에서 찍을지도 몰랐다. 제 소중한 방울이의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이거늘.
한결이 은한을 추슬러 안다시피 했다. 못 본 새 바짝 말라 버린 몸뚱이가 쑥 가뿐하게도 딸려 온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은한의 집을 향해 갔다.
두 걸음 채 걷지 않았을 때, 은한이 버둥버둥 몸을 뒤틀어 그의 품을 벗어났다.
“잠깐, 흡, 만, 잠깐만.”
은한은 엉엉 울면서 가로등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는 모서리가 일그러진 케이크 상자를 주워 들었다. 그 후 다시 한결에게 팔을 내민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는 서러움이 가득한데, 케이크 상자는 또 억척스레 쥐고 있다.
“하…….”
너는 어쩜 이 순간에도 사랑스럽니.
한결이 경외 어린 감탄을 하며 그를 다시 추슬렀다.
은한은 집에 들어와서도 오랫동안 울었다. 처음엔 그만 울라며 달래던 한결이 추후엔 그의 울음을 방관하기만 했다. 이다지도 서럽게 우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듯해서. 그냥 만족할 만큼 울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한결은 은한이 우는 동안 물도 떠 주고, 눈물도 닦아 주고, 등도 두드려 주고. 할 수 있는 대로 위로를 전했다.
우는 것이 힘에 부칠 때쯤에야 은한은 울음을 사그라트렸다. 그가 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못 볼 꼴을 보인 것 같아 민망했다.
곽 휴지를 쑥쑥 뽑은 한결이 은한의 코에다 대고 흥, 을 외쳤다. 장난을 거는 거였다. 휴지를 빼앗은 은한이 고개를 오그리고 코를 풀었다.
“……어떻게 여기, 끅, 있냐, 너.”
그래도 맹한 목소리는 나아지질 않았다. 간헐적으로 치받는 딸꾹질은 덤이다. 한결이 히죽, 익살맞게 웃었다.
“방울이 생일 축하해 주려고 휴가 받았지.”
“……히끅.”
신기한 새끼. 애인 생일이라고 맞춰서 휴가도 마음대로 나오는 새끼. 손진우보다 네가 더 대단해. 은한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한결을 쳐다봤다. 잘생긴 얼굴이 참으로 기특하다.
“요즘 군대는, 끅, 애인 생일이라고 휴가도, 끅, 주나 보다?”
은한이 괜히 퉁퉁하게 말을 불렸다. 뭐 얼마나 큰일이라고 세상 풍파를 홀로 다 맞은 것처럼 울어 댔나 싶다. 그냥…… 한결의 얼굴을 보니 왈칵 눈물부터 치솟더라.
“사격 일등 했어.”
내가 전부 일등 해 버린다고 했잖아. 한결이 탕탕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어찌나 뿌듯함이 가득한 얼굴인지. 은한은 픽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쯤에야 끈질기던 딸꾹질이 가라앉았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그렇게 딴 휴가를 길바닥에다 버렸냐?”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어. 미안.”
“사과를 왜 해. 아쉬워서 그래, 아쉬워서.”
은한이 쩝 입맛을 다셨다. 그가 기다리는 줄 알았으면 일찍 올 걸 그랬다. 그럼 훨씬 오랫동안 함께 있었을 텐데. 제한된 만남이라 한 시간 한 시간이 아깝고 또 아쉬웠다.
은한의 손이 한결의 까칠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결이 등허리를 구부정히 굽히며 그의 손길을 받아 냈다.
“저녁은 먹었어?”
“어, 라고 대답해 주고 싶은데 아니.”
한결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꼬르륵, 천둥이 쳤다. 은한은 하마터면 또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이 무더위에 주린 배를 쥐고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한결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깟 생일이 뭐라고. 원래 연애라는 게 이리 불편하고 힘든 건가.
“집에 먹을 게 라면밖에 없다. 그거라도 먹을래?”
넌지시 물어본 말에 한결은 세 번이나 고개를 주억였다. 훌훌 울음을 털어낸 은한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한결이 그를 따라 엉덩이를 뗐다.
자그마한 식탁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가득 찼다. 그래 봐야 라면에 햇반, 김치 그리고 케이크가 다였지만. 라면과 케이크가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나 배가 고프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은한은 케이크를 꺼내 보곤 잠깐 숨을 멈춰야 했다. 빨간 리본이 묶여있는 방울이 케이크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툰 솜씨로 쓴 ‘방울아, 생일 축하해’’는 덤이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렇게 정성 가득한 생일은 처음이라.
“이게 뭐야, 멍청아.”
“되게 못 썼지. 연습 좀 하고 쓸 걸 그랬어.”
한결이 후루룩 라면을 먹으며 큭큭댔다. 은한은 한결이 식사를 마칠 동안 물끄러미 케이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주섬주섬 핸드폰을 찾아내 찰칵 사진을 찍었다.
한쪽이 뭉개진 케이크가, 태어나 봤던 그 어떠한 케이크보다 예쁘다고. 은한이 생각했다.
“방울아.”
“응.”
“케이크 마음에 들어?”
“응.”
“다행이네. 근데 혹시 몰라서 선물을 하나 더 준비했어.”
은한이 그제야 케이크에서 시선을 뗐다. 선물. 그 얼마나 설레는 단언가. 은한이 두 손을 내밀었다. 어디 한 번 줘 봐. 선물. 그런 낯이었다.
무릎으로 현관까지 기어간 한결이 자신의 가방을 낚아채 왔다. 그가 평소에 메던 가방보다 훨씬 크다. 은한이 호오, 입술을 동그랗게 만 채 그를 주시했다.
“짜잔.”
한결이 꺼낸 것은 하얀 박스였다. 포장 하나 되어 있지 않은 그저 하얀 박스. 아, 박스 가운데에 익숙한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긴 했다. 은한이 죽고 못 사는 스포츠 브랜드 로고였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은한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아니지? 설마. 그 비싼 걸. 설마! 머리통에 설마라는 단어가 다람쥐처럼 뛰어다녔다.
씨익, 시원하게 웃은 한결이 설마를 확인시켜 주려는 듯 상자를 열었다.
“왁!”
은한이 풀썩 상자를 향해 쓰러지듯 다가갔다. 하얀색 로우탑. 통기성이 뛰어난 메시 소재. 끝장나는 착화감. 양말처럼 부드럽지만 질긴 내구성. 그리고 멋들어진 로고. 은한은 신발에 선뜻 손조차 대지 못하고 찬탄하기만 했다.
“이거…… 이게 선물이야?”
“마음에 안 들어?”
“내 거라고?”
“응. 방울이 거.”
“…….”
은한이 신발과 한결을 번갈아 봤다. 한참 그러더니 잘근잘근 입술을 씹는다.
“미쳤냐? 이렇게 비싼 걸? 야 우리 직장인 아니고 스물한 살 대딩이거든? 거기다 넌 군인!”
“뭐 어때. 훔친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과외 한 거로 산 거야.”
“그래도! 가서 화, 환불해!”
자그마한 머리가 팩, 옆으로 돌아간다. 한결이 지그시 은한을 응시했다. 얇은 귓바퀴가 새빨갛다. 광대는 씰룩씰룩. 눈꺼풀은 파르르. 도톰해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입술은 벙긋벙긋.
“방울아. 진심이야?”
“그럼! 야 이게 얼만데!”
“……네 콧구멍 벌렁거리는데.”
한결이 툭 은한의 코끝을 건드렸다. 그러자 은한이 합 숨을 집어삼킨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 이거 사려고 힘들게 과외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빨리 신어 봐.”
“…….”
“얼른. 네 운동화 사이즈 보고 사 오긴 했는데……. 안 맞으면 내일 바꿔야 해.”
데굴데굴 눈알을 돌리던 은한이 슬쩍 신발 한 짝을 집었다. 손가락에 착 감기는 재질에 눈물이 날 듯했다. 은한은 또 잠시 굳어 신발을 구경했다. 답답한 한결이 훅훅 끈을 풀어 쩍 주둥이를 벌렸다.
“야! 그렇게 험하게 다루면 안 돼!”
찰싹 한결의 손등을 내려친 은한이 조심조심 발을 밀어 넣는다. 어차피 밖에서 신는 운동환데 저리 소중한가, 의문이 들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두 개씩 사 줘야지. 하나는 외출용, 하나는 소장용. 유명한 셀럽들이 그러는 것처럼. 한결이 아무도 모르게 결심했다.
자그마한 손이 꼼지락꼼지락 끈을 조인다.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마음에 드는 듯했다. 한결의 만면에 조용히 웃음이 피어올랐다. 산 보람이 있다.
신발을 다 신은 은한이 벌떡 일어나 조신하게 발을 굴렀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한결이 큭큭대며 그를 구경했다.
“야 기억나냐? 나 일학년 때 욕망 주제로 운동화 그렸던 거?”
“기억하지.”
“와 그 욕망을 이렇게 채울 줄이야.”
너무 좋아. 진짜 너무 좋아. 은한이 끊임없이 혼잣말을 이었다.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감탄하다, 한결에게 만개한 미소를 보내다, 또 운동화를 감상한다.
한참이나 운동화에 시선을 쏟던 은한이 문득 웃음을 사그라트렸다.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펑펑 울다가 운동화에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니. 저도 물욕에 환장한 어리석은 인간인 모양이다.
에이. 그러면 어때. 좋은 게 좋은 거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 터다. 지금은 돼지 선배도, 녹색 후배도, 공모전에 내지 말라며 호된 표정을 하던 교수님도 생각나지 않았다.
“방울아.”
한결이 단조롭게 은한을 불렀다.
“엉?”
“내 욕망도 채워 줘라.”
얄궂게 웃는 한결에 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욕망이 뭔지 아주, 잘, 알겠지만 예의상 물어는 줄게. 그래, 한결아. 네 욕망이 뭐니?”
“양치질하는 거.”
은한이 꾹 입을 다물었다. 긍정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조급해진 한결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싫어?”
“……아니.”
씩, 입술을 가로로 길게 짼 은한이 쑥쑥 신발을 벗어 던지곤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한결이 그에 질세라 욕실로 뛰쳐들어갔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어련히 말해주겠거니 싶어서.”
양치 후 입술이 팅팅 부르틀 정도로 키스했다. 한결은 그러고도 모자란지 꾹꾹, 은한의 입술을 누르고, 만지고, 쓰다듬으며 아쉬운 티를 냈다.
은한이 그의 손가락에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서운하지?”
“응.”
한결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그렇게 못 미덥나, 싶기도 하고. 또 고민을 토로할 정도로 의지가 안 되나, 싶기도 하고. 분명 절 위해 하얀 거짓말을 했을 은한을 안다. 하지만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지라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공모전에 못 나가게 됐거든.”
“……왜?”
은한은 상투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 왕창 울고 났더니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가 짜인 것부터 돼지 선배와 녹색 후배, 그리고 유란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한결은 간간이 듣고 있다는 반응을 해 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
한결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저 은한을 담뿍 끌어안은 채 등을 매만져 주기만 했다. 타인을 위로하는 것에 서툴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은한이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마 수화기만 쥔 채 멍청히 굳어 있었을 터였다. 번듯한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건 또 다른 방식의 자괴감이 되었겠지.
은한이 어정쩡하게 웃었다.
“말하고 나니까 되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아니야.”
미래, 그러니까 취직을 준비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잘 알고 있다. 피부로 겪어 보지 않았으나 세상도 학교도 떠들썩하니까. 거기다 같잖은 인간관계까지 겹쳤으니 오죽할까.
“휴가 더 자주 나와야겠다.”
고작 말이나 활자 따위로는 위로가 안 될 듯하니. 이렇게 끌어안고라도 괜찮다, 등을 두드려 줘야 했다.
“응. 자주 나와라.”
은한이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한결의 위에 올라탔다. 잔잔히 울리는 심장박동이 좋았다.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이 그제야 몸을 짓눌러왔다. 무거운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한결아.”
“응.”
“고마워.”
“뭐가.”
“생일 축하해 줘서.”
위로해 줘서.
안아 줘서.
또, 나한테 고백해 줘서.
그가 없었으면 사방이 꽉 막힌 이 좁은 방에서 서서히 죽어 갔을 것이다. 숨이 끊긴다는 게 아니라, 감정의 죽음을 경험했을 터였다. 기계처럼 눈을 뜨고, 학교에 가고, 시험을 치고, 스펙을 쌓고 종종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취기에 내몰려 잠이 들고. 그런 삭막하고 평범한 하루의 반복이었겠지.
한결이 가만가만 은한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나도 고마워.”
“뭐가.”
“재워 줘서.”
“하……?”
“그리고 자취해 줘서. 아유. 우리 방울이 자취 안 했으면 모텔 대실비로 백만 원은 나갔을 거야. 그걸로 운동화 두 개는 더 살 수 있겠다.”
한결의 손이 은한의 엉덩이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물주물. 거리낌 없이 통통한 살덩이를 뭉갠다. 이 씹새……! 은한이 퍽, 한결의 명치를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한결은 둔탁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낄낄거렸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투닥투닥 몸을 뒤엎었다. 그러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창문에 스며들고야 지쳐 잠이 들었다.
뭐, 나쁘지 않은 생일이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