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첫 연애, 첫 공백
“방울아아 노오올자아아아!”
“…….”
“방울아아 노오오올자아아아아!”
은한이 꾸물꾸물 몸을 뒤틀었다. 어느 미친놈들이 아침부터 술을 처마셨나. 아니면 아침까지 술을 처마셨나. 왜 밖에서 고성방가야. 그리 생각하며 한결의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젯밤도 질퍽하니 섹스를 즐기고 잔 터라 여태 둘 다 나신이다.
한결은 잠에 취해 있으면서도 버릇처럼 은한의 등을 토닥였다. 뜨끈한 그의 체온이 잠깐 깬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은한이 막 다시 잠에 들려 할 때였다.
“강으으은하아아안!”
“방울아아아아아아!”
강으은한이 누군데. 방울이는 또 뭔데. 잠결에 그리 생각하다 눈을 떴다. 시팔. 내 이름이잖아. 은한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까치집이 된 머리칼이 마구잡이로 뻗쳐있다.
“방울아 왜 그래…….”
게슴츠레 눈을 뜬 한결이 은한을 쳐다봤다. 은한이 그와 눈을 맞춘 채 꿈뻑꿈뻑 눈꺼풀을 깜박였다. 방금 밖에서 내 이름이……. 꿈이었나.
“은방우우우우울!”
“방울아아아!”
한결의 동공이 빠르게 경련했다. 그 역시 창문을 부슬 듯 흘러오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은한이 우당탕 침대에서 나와 창문을 벌컥 열었다.
“방울이 안녕!”
“방울이 번개 맞았네!”
아니나 다를까. 태준과 진우였다. 건물 앞에 멀뚱히 선 두 사람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었다. 은한은 방금 일어났음에도 묵직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저 또라이 새끼들이 왜 꼭두새벽부터.
흘끔, 확인한 시간이 이제 7시를 넘어서고 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2월 중순. 해가 뜰 때까지 총질하는 데 환장한 그들이 이 시간에 일어날 리 없다. 무언가 또 좆같은 걸 구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뭐야.”
한결이 바닥에 떨어진 후드 집업을 은한의 어깨에 걸쳐 주며 빼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길바닥에 서 있는 절친한 친구들을 보는 순간 구겨지는 미간을 막지 못했다. 그건 태준과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와 씨발 백한결?!”
“오씨 어쩐지 전화 안 받는다, 했더니 여기 같이 있었어.”
“존나 소름.”
“너희 이제 막, 어? 시도 때도 없이 같이 자는 사이야?”
둘 다 벗고 있어. 어쩜 좋아. 진짜 딸 낳아 줄 건가 봐. 우리 곧 삼촌 될 것 같아. 태준이 소곤소곤 진우에게 말했다. 물론 소곤소곤하는 척이지, 정말 소곤소곤은 아니었다.
한결이 무심한 얼굴로 무언가 던질 걸 찾았다. 폭탄 같은 게 있으면 좋은데. 수류탄은 왜 마트에서 팔지 않는 거지.
“야. 너희 감방 가고 싶냐? 요즘 고성방가가 얼마나 무서운 죈데! 돌았어?”
은한이 협박 같지 않은 협박을 했다.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 두 사람이 아님을 알았지만.
“에이. 여기 근방 다 자취생들이라 본가 내려가고 없어.”
“나! 내가 있잖아, 멍청아! 내가 너희 신고할 거야!”
“정 없이 왜 그러실까.”
진우가 능청맞게 받아쳤다. 은한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추슬렀다. 저 새끼들이랑 대화를 시도해선 안 돼. 잘 알고 있잖아. 원하는 걸 들어주고 얼른 보내는 게 심상에 좋았다.
“됐다, 됐어. 왜 왔는데?”
집업 지퍼를 올린 은한이 쩌억 하품을 하며 물었다. 두 사람의 눈이 반짝반짝 태양을 담은 것처럼 빛났다. 은한은 그게 무서웠다. 광기 서린 눈이다. 인간을 탈피하고 완전한 또라이로 거듭난 눈이란 말이다.
태준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우리 바다 가자!”
“…….”
“…….”
한결과 은한이 꾹, 입을 다물었다. 바다라니. 가만히 있어도 얼어 죽겠다, 싶은데 바다라니. 은한은 대꾸 없이 창문을 닫았다. 방충망도 치고 꼼꼼히 걸쇠를 잠갔다.
“자자. 개졸려.”
“응.”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간 한결이 이불을 들치고 톡톡, 옆자리를 두드렸다. 씨익, 웃은 은한이 막 그의 옆에 몸을 뉘려 할 때였다.
딱! 타닥! 딱!
창문이 흔들렸다. 마치 우박이 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밖에서 돌멩이를 던지는가 보다. 으드득 이를 씹은 은한이 벌컥 다시 창문을 열어젖혔다.
“안 꺼져!”
“아, 바다 가자아!”
“그래 조금만 있으면 방학 끝인데! 가서 놀다 오자!”
“우리가 기차도 예약했어!”
“무려 가족석으로 예약했단 말이야!”
은한이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 있으니 등 뒤로 익숙한 온기가 다가온다. 그 순간,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낮은 음성이 잔잔히 귓가를 울렸다.
“피곤해?”
“……그건 아닌데.”
“그럼 가자. 가서 회나 먹고 오지 뭐. 넷이서 안 논 지 오래됐잖아. 쟤들 삐진다.”
한결이 은한을 타이르듯 말했다. 끙, 하고 앓은 은한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결과 침대에서 뒹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 번쯤은 멀리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진우의 말대로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인데 이렇게 보내는 게 아쉽기도 했고.
“아침 먹었냐?”
힘차게 기지개를 켠 은한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콧구멍을 찌르는 한기가 아까까지만 해도 싫었는데, 지금은 또 상쾌하다. 두 사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눈뜨자마자 바로 옴!”
“요 앞에 백반집 있거든? 거기 가 있어. 옷 입고 나갈게.”
“코오올!”
신난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멀어진다. 발랄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엉덩이를 바라보고 있던 은한이 꼼꼼히 창문을 닫았다.
“씻을까?”
한결이 물어 온다. 은한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안 씻고 가게? 우리 어제 섹스하고 피곤해서 걍 잤는데? 한결이 갸우뚱 고개를 꺾었다.
“일단 모닝뽀뽀부터 하고.”
목에 팔을 둘러 오며 하는 말에 한결은 푸스스,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고 사랑스러운 은한이다.
“씨바. 추워. 존나 추워.”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
“내 귀는 이미 떨어졌다.”
태준, 진우 그리고 한결이 순서대로 뱉은 말이다. 후들후들 떨고 있는 공대남 셋을 지긋이 보던 은한이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뒤틀었다.
“씹새들아. 너희가 오자고 했잖아.”
태준과 진우가 못 들은 척,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겨울 바다는 추웠다. 당연히 추울 걸 예상하고 왔음에도, 양 뺨을 후려치는 바닷바람에 발이 절로 동동 제자리서 굴렀다.
쏴아아, 쏴아아- 부서지는 파도가 마음을 뻥 뚫리게 하긴커녕, 오장육부를 죄다 얼리는 듯하다.
겨울 바다의 낭만은 몸에 열이 많은 사람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네 사람은 휘몰아치듯 움직이는 바다를 보며 겨울 바다를 새롭게 정의 내렸다.
“사진. 사진 찍자.”
진우가 말했다. 세 사람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움직이는 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거센 바람뿐이다.
“사진 찍자며.”
“그러니까. 빨리 폰 꺼내.”
“네가 꺼내.”
“싫어. 손가락이 얼지도 몰라. 내 손가락 네 개 되면 어떡해.”
“네 손가락은 네 개나 남겠지만 내 손가락은 세 개만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랄. 나는 설국열차에 나온 것처럼 팔 전체가 얼어서 떨어져 나갈 거야.”
또또 쓸데없는 데에 목숨 거는 공대남 셋이다. 은한이 푸욱, 바람에다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리곤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손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야. 빨리 붙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 앱을 실행시키고 번쩍,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잘 찍어 보자, 싶어 열심히 각도를 재고 있으니 커다란 손이 핸드폰을 앗아 갔다. 한결이었다. 기다란 팔이 셀카봉이 따로 필요가 없다.
한결이 눈짓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은한이 익숙한 폼으로 한결의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그걸 오롯이 목도한 진우와 태준의 표정이 썩어 갔다. 태준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동안 찰칵, 찰칵 네 사람을 담은 셔터가 끊임없이 울렸다.
“야! 여기서 연애하지 마!”
“꼬우면 부르질 말든가.”
“그건 안 돼! 너희 없으면 우리는 누구랑 놀라고!”
“그럼 닥치고 있든가.”
“……개새끼.”
“왈왈.”
얄밉게 웃은 한결이 개소리를 흉내 냈다. 태준은 약 올라 죽겠다는 얼굴로 쾅쾅 발을 굴렀다. 그 모습 역시 찰칵찰칵, 카메라에 담겼다.
“웃어.”
진우가 빙긋, 사람 좋은 미소를 만들며 읊조렸다. 세 사람이 그를 따라 생글생글 즐거운 척 미소 지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파도를 배경으로.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발을 헛디뎌 모래밭을 뒹군 태준도. 그를 보며 꺽꺽거리며 비웃는 진우와 은한도.
짧은 시간 동안 알차게 사진을 찍었다. 한결의 손이 발갛게 얼어붙을 때쯤에야 사진 놀이가 끝났다.
은한이 주머니에 들어온 한결의 손을 주물주물 매만졌다. 차가운 손에 마음이 아팠다.
진우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됐어, 됐어. 바다 충분히 봤어. 완전 알차게 즐겼어. 회에 소주나 먹으러 가자.”
“존나 콜.”
“당장 가자.”
“오징어회도 시켜 줘. 새우도 먹자.”
“방울이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다 먹고 방울이 닮은 딸 낳아 줘.”
“……뒤져. 뒤져라, 씹새야. 물러가라, 악귀야!”
은한이 발로 태준에게 모래를 날렸다. 태준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을 만개한 채로 도망 다녔다. 진우는 정상인 척, 쯧쯧 혀를 차며 부지런히 택시를 잡았다. 금세 태준의 뒷덜미를 잡은 한결이 뻑, 소리 나게 뒤통수를 내리쳤다.
“우리 방울이 애 못 낳거든?”
“그럼 네가 낳으면 되잖아!”
태준의 고함에 한결이 멍청한 표정을 했다.
“내가 애를 낳을 수가 있어? 어떻게?”
“등신아 그걸 왜 믿어!”
은한이 한결의 발등을 짓밟았다. 이 새끼 또라이3 맞다니까. 모닝엔젤이라는 칭호가 아깝다! 흥, 콧김을 내뿜은 은한이 총총 진우의 옆에 섰다. 진우가 끌끌 웃으며 은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뭐, 나름대로 즐거운 겨울 바다 여행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이 추운 날, 동해까지 온 네 사람을 위로라도 하듯, 회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시큼한 초장을 찍어 먹어도 맛있고, 와사비를 가득 푼 간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었다.
이제야 종류별로 주문한 회가 다 나왔는데, 테이블 위의 소주병은 벌써 다섯 병을 넘어서고 있었다. 은한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렇게 본격적인 낮술은 처음이야.”
막 오후 3시가 넘었다. 이른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또 택시를 타고, 바다 한 바퀴를 돌았음에도 그랬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은한이 오징어 회를 한가득 집어 우물우물 씹었다. 태준이 귀엽다며 볼을 매만졌는데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대신 한결이 신경 쓰고 있는 듯하지만.
“밤술 될 때까지 먹으면 되지.”
“유레카!”
진우의 말에 은한이 짝, 손뼉을 쳤다. 간헐적으로 똑똑한 새끼. 한결이 빈 잔에다 부지런히 술을 따랐다. 쪼로록 채워지는 알코올이 참 맛있어 보였다. 안주가 좋은 탓이다.
챙- 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하기 그지없다. 알싸한 소주를 크, 하는 감탄과 함께 넘긴 태준이 간장 아래에 가라앉은 와사비를 휘휘 저었다.
“야, 나 저번 주에 영장 나왔더라.”
나 어제도 피시방에서 밤새웠다. 그런 걸 말하는 듯한 어투였다. 별거 아닌 듯, 자연스레 흘러나온 말. 뭐 스무 살 보통의 건장한 남자라면 대수롭지 않게 할 만한 말이기도 했다. 대부분이 이맘때쯤 2년간의 감옥 생활을 명받으니까.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어 나도. 나는 이틀 전인가, 사흘 전인가.”
“너 등록금 입금했냐? 딱 지금이 영장 나올 땐데 멍청하게 입금했다? 엄마한테 빠가냐고 등짝 맞음.”
“그거 걍 제대 후 등록금으로 미루면 돼. 과사에 전화해 봐.”
“오 그래? 내일 해 봐야겠다.”
한시름 걱정을 던 태준이 히히, 웃으며 술을 채웠다. 그가 따라 주는 잔을 받고 있던 한결이 쩝 입맛을 다셨다. 당연히 가야 함을 알지만, 가기 싫은 건 당연했다.
“나도 곧 오겠네.”
“아직 안 왔어? 혹시 모르니까 병무청 들어가 봐. 일찍 갔다 오는 게 좋지.”
“우리 넷 다 같이 가자! 그리고 같이 복학해! 그럼 왕따 복학생 될 일 없어!”
태준이 좋은 생각 아니냐는 듯 신난 어투로 말했다. 진우와 한결이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한 홀로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주제라서. 친구들이 저와 같은 상황도 아니거늘,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방울이는?”
“어…… 나는…….”
은한이 우물쭈물 말을 삼켰다. 그러나 여섯 개의 눈동자가 채근해 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야 했다. 수저를 놓고 테이블 아래로 손을 숨겼다.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모자란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군대 안 가는데…….”
“어?”
“진짜?”
“뭐……?”
가장 눈을 크게 뜬 건 한결이었다. 테이블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물들었다. 다행히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준우와 태준이 금세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너 신의 아들이야?”
“와. 나 신의 아들 처음 봐. 악수 한 번 해 줄래?”
태준이 방정맞게 손을 내밀었다. 은한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소주잔에 술을 잔뜩 채우던 진우가 갑작스레 미간을 좁혔다.
“근데 그러면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어, 맞네. 공익도 못 갈 정도로 아픈 거면 심각한 건데.”
태준의 눈썹이 추욱 땅까지 처졌다. 방울아. 딸 낳아 달라고 안 할게. 아프지 마라. 그리 말하며 흑흑 우는 척도 한다. 아니 진짜 우는 건가.
은한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냐. 어렸을 때 교통사고 나서 발목 두 개가 으스러졌거든. 왼쪽은 무릎까지. 지금도 안에 뼈 말고 철심 들어 있어. 무릎 연골도 진짜 연골이 아니고.”
“헐 미친. 그게 뭐가 별 거 아냐. 존나 무서운데.”
“의사 선생님이 다리 갈라서 철심 더 넣고 싶으면 뛰어도 된댔는데. 그거 존나 아파서 평생 안 뛰려고. 오래 걷는 것도 안 돼.”
다리 안에 철심이 녹스는 기분이야. 은한이 끔찍한 느낌을 상기하며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태준과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은한의 말을 경청했다. 굳은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건 한결뿐이다.
“전혀 몰랐네.”
“내가 너희들이랑 마라톤을 뛰었냐 뭘 했냐. 허구한 날 술집에 들어앉아 있는 게 단데. 해 봐야 놀이동산? 그것도 백한결이랑 뭐 먹는다고 벤치에 앉아만 있었어.”
은한이 묵직해진 분위기에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단단히 뭉친 공기는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한결 때문이었다. 그는 무언가에 화가 난 듯도 했고, 실망한 것 같기도 했으며, 회의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흉터 못 봤는데.”
한결이 낮음 음성으로 말했다. 은한의 복사뼈에 입을 맞춘 게 몇 번인데. 그렇게 큰 수술 흉터가 양쪽 발에 있었다면 못 봤을 리 없었다.
은한이 흘끔 그의 눈치를 봤다. 혹시 미리 말하지 못해서 화가 났나, 싶어서. 군대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제 과에 남자가 많이 없을뿐더러 몰려다니는 동기들은 죄 여자다. 누나만 둘인 집은 당연히 군대의 군자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공대남 셋과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단 말이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분주히 입을 놀렸다.
“어어 누나가 성형외과 하거든. 흉터 보기 싫다고 대학 들어오기 전에 지웠어.”
“그럼 우리 2년이나 떨어져 있어야겠네.”
“야 내가 같이 군대 가도 2년 떨어져 있는 건 똑같거든. 아니, 더 낫지. 너 휴가 나오는 거 꼬박꼬박 챙겨, 면회도 가, 전화도 받아. 내가 입대하면 진짜 일 년에 두 번 볼지도 몰라.”
“……그런가.”
잠시 생각하던 한결이 곧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한의 말이 백번 옳다. 같이 입대하면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터였다. 휴가 맞추기도 어렵고, 면회도 힘들겠지.
근데 왜 이리 뱃속이 울렁거리는지 모르겠다. 맛있게 먹은 회가 메슥거리며 올라오려 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좋은 건지 태준이 금세 주제를 돌렸다. 그의 젓가락에 잡힌 회가 질척질척하니 초장 위를 뒹군다. 한결이 탁한 시선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야 우리 형이 그러는데 군대 갈 때 살 거 존나 많대.”
“그래? 몸만 가면 되는 거 아냐?”
“아니야! 시계도 사야 하고 선크림도 사야 한대. 형이 엄청 커다란 거로 사랬어.”
나 바디로션 만큼 커다란 거로 사 갈 거야. 타면 안 돼. 내 소중한 피부……. 태준이 조심히 자신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가 건졌던 회는 여전히 초장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와, 너 바디로션도 아냐?”
“야! 나 엄마 화장품도 빼앗아 바르거든? 근데 방울이 누님이 성형외과 하신다고? 나 가면 지인 DC 같은 것도 돼? 군대 가기 전에 튜닝 싹, 하고 다녀오면 되잖아. 대구까지 내려갈 의향이 아주 차고 넘치는데!”
태준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종알종알 말을 이어갔다. 군대가 그렇게 즐거울 만한 주제가 아닌데. 참, 발랄한 또라이다. 은한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누나 좋아할걸. 아무래도 남자들은 잘 안 가니까. 뭐 하고 싶은데?”
“눈! 눈 여기 이렇게 좀 뒤로 째고. 어…… 코도! 코볼이 좀 줄었으면 좋겠어. 입술도 되나?”
“아…… 그냥 얼굴 전체를 갈아엎으시겠다고요?”
태준이 가능하다면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비장하다. 이렇게까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는데. 은한은 누나에게 건너 들은 짧은 지식으로 태준에게 성심껏 상담을 해 줬다. 태준은 호오, 호오 눈을 반짝였고 별생각 없던 진우 역시 나도 해 볼까, 하며 혼잣말을 했다.
“방울이 너는 안 해? 아니면 혹시 한 건가?”
“아, 누나가 한번 해 보라고 권유는 했는데. 칼이 무서워. 다리 때문에 수술방 몇 번 드나들었더니 생각도 하기 싫다.”
은한이 진저리를 치며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태준과 진우가 이해한다며 수긍했다.
“하지 마.”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한결이 입술을 삐죽인다. 은한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한결의 팔뚝에 턱을 괬다. 이 새끼 그렇게 안 봤는데…….
“왜? 너 막 성형하면 싫고, 안 만나고 싶고, 자연미남이 좋고 그런 거냐?”
“아니. 그런 거 딱히 생각 안 해 봤는데.”
“근데 왜 싫대?”
“……네가 더 잘생겨지고 귀여워지면 나 군대 들어가서 어떡하라고. 불안해. 탈영할지도 몰라.”
“…….”
은한의 표정이 요상하게 뒤틀렸다. 태준과 진우는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상태였다. 한결만 그저 울상이다. 진짜, 성형하지 마라. 지금도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단 말이야. 더 예뻐지면 안 돼.
침통한 한결을 응시하던 은한이 벅벅 턱 아래를 긁었다. 얘 취한 거 아니겠지. 오늘은 평범한 소주잔으로 마셨으니 아직 취하지 않았겠지. 아, 차라리 취한 거였으면 좋으련만. 맨 정신에 저런 소릴 한다는 게 무서울 정도다.
젓가락을 쥔 은한이 아무렇지 않은 척, 오징어 회를 집었다.
“너희가 적응해. 나도 아직 적응 못 했는데, 얘 종종 이래.”
“……적응하기 전에 오그라들어 죽는다에 한 표.”
“두 표.”
진우와 태준이 차례대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은한이 어정쩡한 미소를 만들며 음식에 집중했다. 곧 진우와 태준 역시 젓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울상인 건 한결밖에 없었다.
네 사람은 얼큰하게 취해서야 횟집을 나왔다. 쌩쌩 몰아치는 바닷바람에 순간 모든 알코올이 휘발하는 듯했으나, 모텔 로비에 들어서니 다시금 취기가 올라왔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벌써부터 솔솔 잠이 온다.
큰 방이 다 나갔단다. 이 추위에 겨울 바다의 낭만을 즐기고자 하는 미친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네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낄낄거렸다.
어쩔 수 없이 방을 두 개 잡았다. 6층. 은한은 엘리베이터를 탄 채 몽롱한 시야로 올라가는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씻고 바로 곯아떨어져야지. 그런 다짐만 했다.
“너희 둘이 같은 방 쓸 거지?”
“어.”
“엉?”
진우의 물음에 한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한은 맹한 표정으로 진우를 쳐다봤고. 아. 나뉘어서 자야 하는구나. 하긴 제가 한결을 두고 태준이나 진우와 자는 것도 이상했다.
“여기 방음 잘 된대. 우리 옆방이라고 신경 쓰지 말고. 어?”
진우가 음흉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은한이 퍽, 그의 복부에다 주먹을 꽂았다.
“방음이 잘 되는지 안 되는지 니 새끼가 우예 안다고!”
“억…… 인테리어가 방음 잘 되게 생겼잖아…….”
“지랄.”
은한이 한 번 더 진우를 때렸다. 진우는 맞으면서도 장난이 즐겁다는 듯 실실 웃음을 흘려댔다.
“내일 아침 여섯 시까지 일어나는 거 잊지 마라. 핸드폰 알람 잘 맞춰 둬. 하태준은 내가 업고라도 나갈 테니까.”
네 사람은 바다까지 온 김에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다. 술김에 좋다고 해 버리긴 했으나,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일어날 수 있을진 모르겠다.
“알았어.”
은한 대신 한결이 대답했다.
네 사람은 간단한 인사와 함께 찢어졌다. 모텔 방은 평범했다. 하얀색 침대. 촌스러운 붉은 벽지. 싸구려 조명등. 먼저 슬리퍼를 꿰어 신은 한결이 익숙하게 은한을 부축했다.
은한이 버릇처럼 한결의 품을 파고들었다. 취한 상태로도 둘만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연히 그의 온기가 고파졌다.
“졸려어…….”
“응. 알아. 얼른 씻고 자자.”
한결이 바람 냄새가 가득한 은한의 머리칼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만 해도 꼿꼿이 서 있다가 제 앞에서 흐트러지는 은한이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그를 침대에 앉힌 후 신발도 벗기고, 외투도 벗겼다. 혹시 씻기 전에 잠이 들까 후다닥 욕실에 들어가 일회용 칫솔을 가져왔다. 은한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칫솔을 받아 물었다. 하지만 양치질을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작은 손이 침대에 툭 떨어져 있다.
“방울아. 양치질해야지.”
“우응…….”
“……너 우리랑 술 먹고 집 가서 어떻게 씻었냐.”
은한과 사귀게 된 후로 오늘처럼 질퍽하니 술을 마신 적이 없다. 그의 사투리를 오랜만에 듣는 것이니 확실했다. 한결이 은한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우리 방울이. 손도 많이 가요.”
“액아?”
“응. 네가.”
한결은 나지막이 타박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띄워 놨다. 턱을 살짝 누르니 입이 벌어진다. 흐릿한 모텔 조명 아래로 열심히 칫솔을 움직였다. 꼼꼼하게 양치질을 시켜 주고 싶은데, 무딘 손이라 힘들었다.
대충 다 닦아 낸 듯해서 욕실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한결이 막 칫솔을 빼냈다. 은한이 꿈뻑꿈뻑 눈꺼풀을 움직인다. 그리고…….
꿀꺽.
“억! 안 돼. 방울아 그거 먹으면 안 돼!”
“마시따…….”
“…….”
한결이 으헉,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앓았다. 그를 안다시피 해 허겁지겁 욕실로 향했다.
물 마셔. 아니, 넘기진 말고. 퉤 해야지, 퉤. 으아 방울아! 마시지 말라니까. 뱉어야지. 퉤 해. 지지야. 지지. 욕실에서 한결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울렸다.
결국 두 사람이 씻고 누운 건 그 후로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나마 나중엔 은한이 조금 술에서 헤어나 수월했다. 다만 이제는 한결이 술에 취한 기분이었다. 아침부터 무리한 몸이 피곤하다고 아우성이다.
은한을 토닥이던 한결이 쩍, 하품했다. 내일 일어날 수 있으려나. 안 일어나면 손진우가 깨우러 오겠지. 아니, 그들도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다.
“백한결…….”
“응. 자도 돼. 어여 자.”
한결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은한이 반짝, 눈을 떴다. 그의 동공이 흐릿하게나마 초점을 잡았다. 한결이 옆으로 돌아누워 그와 눈을 맞췄다. 은한의 집이 아닌 곳에서 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색다른 기분이다.
“내가 군대 안 가는 게 싫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등을 쓰다듬던 한결의 손이 뚝 멈췄다. 저의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제가 아까 반응을 잘못했던가.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가 홀로 군대에 가지 않아 질투가 난다거나 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아니. 네가 고생 안 하는 거잖아. 좋아.”
한결이 부러 조금 더 단호히 말했다. 은한이 손을 들어 한결의 귓불을 주물렀다. 하긴 제가 칼바람에 잠시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도 못 봐서 대신 드는 그다. 마른 입술을 핥은 은한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한결은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횟집에서부터 제 기분이 안 좋았던가, 하고. 되짚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저 낮은 온도에 사지가 꽁꽁 얼었다,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은한이 눈치챌 정도면 아마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맞으리라.
그 후에는 또 고민이었다. 왜 내 기분이 좋지 않을까. 분명 은한이 군대에 가지 않는 건 환영할 일인데. 이 잘생긴 얼굴이 땡볕에 고생할 일도 없고, 이 자그마한 몸뚱이가 흙밭을 구를 일도 없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한결은 머지않아 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걱정돼서.”
“뭐가 걱정되는데.”
한결은 또 잠시 침묵했다. 은한은 잠자코 그를 기다려 줬다. 이 순간이 도래한 게 모두 제 잘못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미리 낌새라도 줬으면 한결이 이렇게 벼락 맞은 표정을 지을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한결이 자신의 귓불을 만지는 은한의 손을 훔쳐다 쪽, 손바닥에 키스했다. 모텔 비누 냄새 사이로 은한의 체취가 느껴진다.
“입대하고 나면, 나는 빡빡머리에 가진 것도 없고 하는 것도 없이 흙바닥만 구르고 있을 텐데. 너는 2학년도 되고, 3학년도 되고, 슬슬 취업 준비도 시작하겠지. 나보다 훨씬 이르게 직장인이 될 거고.”
“……그렇겠지.”
“내가 널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
네가 훨훨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지금도 네 연락 하나에 하루 종일 쩔쩔매는 난데. 거기선 어쩌지. 버틸 자신이 없어.
한결의 목소리가 확연히 눅눅해졌다.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이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자꾸 이렇게 제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게 됐다.
“네가 벌써 보고 싶은 기분이야.”
“…….”
“지금도 보고 싶어.”
한결이 토해내듯 뱉어낸 말에 은한의 낯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한결은 속이 울렁거려 까무러칠 판이다. 질끈 눈을 감고 모든 걸 등지고 싶었다.
실망하면 어쩌지.
늘 그렇듯 그런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아…….”
은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의 심장이 철렁였다.
“왜 그런 걱정을 해.”
“어……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그냥…… 막연히 그런 걱정이 돼.”
“한결아. 너 잘났어. 공부도 잘하고, 잘 생겼고, 다정하고. 엄청 사랑스러운 내 애인이야. 나는 이렇게 네가 좋은데 왜 너는 널 못 믿어.”
“…….”
“그런 걱정하지 마라, 어? 아침에 눈 뜨고 다시 잘 때까지 네 전화만 기다릴 테니까.”
은한이 촉. 한결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해사하게 눈을 휘며 웃는다. 예쁜 호선을 그리는 눈이, 한소끔 꽃잎처럼 벌어지는 입술이. 감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한결이 넋을 놓은 채로 그를 주시했다.
살이 에일 듯 추운 스물한 살 겨울.
한결은 또 한 번 은한에게 반했다.
* * *
아침이나 저녁이나. 바닷바람이 어찌나 대찬지. 날아갈까 무서울 지경이었다. 네 사람은 기적같이 여섯 시에 눈을 떴다. 잠을 다 털어내지 못한 상태로 외투만 걸치고 허겁지겁 바다로 나왔다.
아직 시뻘겋게 죽어 있는 하늘이다. 그래도 곧 해가 뜰 무렵인지, 지평선 끝이 조금 더 환하게 물들어 있었다. 가로로 길쭉한 구름이 느긋하게 하늘을 산책했다. 해가 떠오르지 않았음에도 퍽 볼만한 절경이다.
“왜 안 떠.”
“언제 떠.”
태준과 진우가 아니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은한이 코를 훌쩍이며 도끼눈을 떴다.
“시끄러워. 곧 뜨겠지.”
“나는 6시 32분에 뽕, 하고 뜨는 줄 알았지.”
“나는 뽕, 까지는 아니지만 6시 33분쯤엔 다 뜨는 줄 알았지.”
이 새끼들 이과 맞나. 분명 입학 비리가 존재했음이 틀림없는데. 욕설을 잔뜩 장전하고 있는 은한의 입술을 툭, 건드린 한결이 나름 공대생의 면모를 모이며 입을 뗐다.
“야. 태양은 가만히 있고, 지구가 1,609km/h로 자전하는데. 어떻게 1분 만에 뽕하고 다 뜨냐. 1분 만에 다 뜨려면 지구가 대체 몇 배로 빨리 돌아야 하는 거야? 생태계가 존나 엉망으로 뒤집히겠네.”
“아 그랬지! 맞아! 그렇게 배웠어! 근데 그 해가 이 해야?!”
“그럼 해가 또 있냐?”
한결이 이런 새끼가 내 친구라니, 하는 표정으로 태준을 쳐다봤다. 진우는 저는 아닌 척,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일출을 감상하느라 바빴다.
그때, 해 귀퉁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은한이 탁탁탁, 한결의 팔뚝을 두드렸다.
“뜬다. 뜬다!”
“오오! 금색이야!”
“오오. 그러게 빨간색일 줄 알았는데.”
“나는 노란색 같은데.”
“색이 뭔 상관이야 빨리 소원이나 빌어.”
네 사람은 꼬옥 두 손을 포개 쥐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에는 몰아치는 칼바람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신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금빛 태양에 비치는 네 사람의 얼굴이 산타클로스에게 소원을 비는 어린아이처럼 설렘에 물들어 있다.
소원을 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짝, 눈을 뜬 은한이 익숙하게 한결의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뭐 빌었냐?”
“방울이네 누님 병원에서 성형 잘 되게 해 달라고.”
“군대 다녀와서 자취하게 해 달라고. 눈치 안 보고 술 먹게.”
태준과 진우가 시시덕거리며 답했다. 시답잖은 소원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참 중요한 소원이기도 했다. 은한이 팔꿈치로 툭, 한결을 쳤다.
“너는?”
“비밀인데.”
“에?”
비밀? 은한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한결을 흘겼다. 뭐 그렇게 대단한 소원이라고 말을 안 하실까. 말해. 말하라고. 그리 채근했으나 한결은 단호히 고개만 저었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방울이 너는 뭐 빌었는데?”
진우가 물었다.
“나는…… 너희 군대 조심히 다녀오게 해 달라고.”
공대남 셋이 지긋이 은한을 응시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부끄러워 은한이 툭, 발로 모래를 찼다.
“와…… 감동인데.”
“그러게.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우리 소원이 존나 하찮아 보이잖아.”
“다치지 말고 갔다 와라. 괜히 일 만들지 말고. 탈영하지 말고. 그래도 누가 때리면 시발 가만두지 마. 코뼈고 광대고 다 내려 앉혀서 우리 누나 병원에서 진료 받게 만들어 버려. 알았냐?”
“예! 알겠, 습니다!”
태준이 군인 어투를 흉내 냈다. 은한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태양은 그새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할 정도로 동그랗다. 활활 타오르는 태양이 떴다고, 바닷바람도 한풀 꺾였다. 네 사람은 꽤 오랫동안 파도 위로 일렁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에 밀려 쏴아아, 쏴아아. 다가왔다 사라지는 파도와 농홍색 태양. 이 정도면 충분히 겨울바다의 낭만을 즐긴 듯했다.
“야. 우리 퇴실 몇 시냐.”
“11시.”
“그럼 일단 다시 자고, 해장하자.”
“콜.”
나누는 대화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계속 그렇게 장난을 치고, 서로를 위하며, 늘 함께함으로써 행복할 줄 알았다.
그래, 그랬었다.
* * *
2월 말. 개강을 며칠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은한은 은한대로 바빴고, 공대남 셋은 그들대로 바빴다.
태준은 뭐 그리 살 게 많다고 하루 종일 쇼핑을 해 댔고, 진우는 못할 게임을 미리 다 하겠다며 피시방에 들어앉아 나오질 않았다. 한결 역시 나름대로 이리저리 준비하는 듯했다. 은한은 수강신청에 바짝바짝 피가 마른 상태였고.
그리고 오늘은, 입대를 고작 이틀 앞둔 날이었다. 공대남 셋의 머리칼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날이기도 했고.
은한은 동기에게 비싼 카메라도 빌려 왔다. 그들이 거울을 보며 침통해하는 모습을 낱낱이 담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또라이1, 2, 3이라는 걸 잠시 잊고 한 오판이었다.
태준은 미용실에 들어서자마자 디자이너에게 양해를 구했다. 돈은 다 낼 테니 바리캉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진우와 한결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낄낄,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디자이너는 익숙하게 자리를 안내해 주고 간단히 바리캉 사용법까지 알려 줬다. 한참 입대가 많을 시즌이라 그런 요청이 많았나 보다.
“Who’s first?”
자유의 여신상처럼 바리캉을 쳐든 태준이 근엄하게 말했다. 나, 나, 나, 나! 진우가 번쩍 손을 들었다.
위이잉-
바리캉 소리가 쓸데없이 청량하다. 숱 많고 단정한 머리칼이 곧 뭉텅뭉텅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정작 진우는 좋다고 웃는데, 은한은 괜히 제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도 카메라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야! 씨발 미쳤냐!”
진우가 의자에 앉은 채로 동동 발을 굴렀다. 태준이 집요하게 윗머리만 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생긴 진우가 순식간에 중국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변발. 세상에 저 머리 스타일을 실제로 볼 줄이야.
동그란 두상 아래로 까맣게 늘어진 머리칼은 꽁지만 없지, 확실히 변발이었다.
은한과 한결이 꺽꺽, 숨을 먹으며 바닥을 굴렀다.
“크흡. 변…… 발…… 시발 하태준 돌았냐…….”
“야 중국, 큭, 귀족 같다, 너.”
“중국 드라마에선 엄청 멋있게 나오던데. 네가 하니까 그냥 코미디네.”
“바리캉 내놔! 내 머리가 도화진 줄 알아?!”
진우가 요리조리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며 울상을 했다. 장난을 위해 서로 머리를 밀어 주기로 하긴 했지만. 변발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태준은 바리캉을 뺏기지 않으려 저 멀리 도망가 찰칵찰칵 진우를 찍어 댔다. 한참 웃던 은한이 조금 더 가까이서 진우를 구경했다.
“야 네 두피 존나 하얗다.”
“그래? 그거 칭찬이야?”
“어…… 욕은 아니지?”
“역시. 나는 변발을 해도 잘생긴 얼굴인가 봐.”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한참이나 뚫어지라 거울을 쳐다보던 진우는 금세 제 머리에 적응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중국 성조를 흉내 내며 뒷짐을 졌다. 워! 쓰! 취! 빠! 마! 그런 소리가 툭툭 튀어 올랐다. 은한과 한결은 또 배를 잡고 바닥을 굴러야 했다.
“하태준. 이리 와. 이제 네 머리 밀자.”
“너 다 안 밀고?”
“변발한 손진우가 하태준 머리 미는 것도 존나 신기한 광경일 것 같지 않냐. 이리와. 밀어 줄게.”
방울아 잘 찍어라. 진우가 태준의 어깨에 가운을 둘러 주며 신신당부했다. 은한은 웃음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도 열심히 두 사람을 찍었다.
변발의 진우가 태준에게 어떠한 머리를 선사할지 기대가 됐다.
그리고 진우는, 태준의 머리를…….
“야! 그래도 나는 인간이었잖아!”
“왜. 겁나 맛있어 보이는데.”
무려 수박으로 만들어 놨다. 번개 모양의 검은 줄이 태준의 이마에서부터 뒷목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은한은 너무 웃겨서 카메라를 떨어트릴 뻔했다. 수박을 만들다니. 손진우 창의력도 태준 못지않다.
“잘 익었는지 한번 쳐 봐도 돼?”
진우가 노크할 것처럼 손을 들고 능청맞게 물었다. 태준이 그의 손을 피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 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했다.
“이게 뭐야. 변발처럼 멋있지도 않고.”
“실망하지 말게, 친구. 웃기긴 존나 웃기다네.”
“……그래? 웃겨?”
코를 훌쩍인 태준이 거울 속으로 들어갈 듯 가까이 다가갔다. 좌로 우로 관찰하더니 곧 씨익 입술을 가로로 벌린다.
“진짜, 개웃기긴 하다. 수박이라니.”
“그치?”
진우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들을 보던 한결이 꾹꾹 광대를 눌렀다. 일 년 치를 다 웃은 기분이다.
“변발과 수박이 대화하네…….”
“그러게…….”
한결과 은한이 쯧쯧 혀를 찼다. 진우와 태준은 다정하게 셀카까지 찍었다. 어깨동무를 한 채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기도 했다. 은한은 미소를 만개한 채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백한결 머리는 방울이가 미나?”
“디자인과인데. 어마무시하게 밀어 주겠지?”
은한이 얼떨결에 바리캉을 건네받았다. 받긴 받았으나 설마 제가 직접 밀게 될 줄은 몰랐던지라 당혹스러웠다. 변발과 수박이 기대가 함뿍 찬 눈으로 은한을 채근했다. 한결은 어느새 제 손으로 가운까지 입고 앉아 있었다.
“어…… 뭐…… 그냥 밀면 돼?”
“안 되지! 우리는 변발이랑 수박인데!”
흐음, 고민하던 은한이 바리캉을 켰다. 그리고 꾸욱, 꾸욱- 열심히 머리를 밀었다. 덜덜덜 진동하는 기계가 망설임 없이 한결의 머리칼을 뭉텅뭉텅 잘라 냈다.
은한은 마치 죄를 짓고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죄 없는 머리카락들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기분이다.
아. 백한결이 진짜 군대에 가는구나. 지금은 하루가 멀다고 매일 만나는데. 이제 일 년에 열 손가락을 간신히 꼽을 정도로 보겠구나. 아침도 홀로 먹고, 잠에 드는 것도 혼자겠지. 그의 따뜻한 품 없이 두 번의 겨울을 보내야 할 테였다.
내 삶에서.
백한결이 사라지는구나.
은한은 뜨끈해지는 눈시울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혼자라니.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뭐 얼마나 된다고 이리 두려운 건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뭐야! 그냥 다 밀면 어떡해!”
다른 생각에 빠져 버린 은한은 한결의 머리칼을 한 번에 다 밀어버리고야 말았다. 태준이 쿵쿵 발을 굴렀으나 그 어떠한 소음도 은한의 귓구멍을 통과하진 못했다.
“……방울아?”
비로소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한결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렁그렁한 은한의 눈을 보니 심장이 철렁였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기는.”
한결이 두 손으로 은한의 볼을 부여잡았다. 은한은 그게 또 사무치게 슬펐다. 이렇게 따스한 한결의 손길을 더는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평생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제가 생각보다 많이 나약한가 보다.
“방울아. 울어?”
“우리가 가는 게 그렇게 슬퍼? 우리 엄마도 안 울던데. 방울이가 우네.”
태준과 진우가 은한의 등을 토닥였다. 은한이 축축하게 웃었다. 영 어정쩡한 미소였다.
“우리가 군대 짱 먹고 올게! 울지 마!”
“야. 군대 짱 먹으려면 장교 정도는 돼야 하지 않냐? 쉰 돼서 제대하게?”
“그렇게 오래 걸려? 그럼 부짱 먹고 올게!”
“부짱……. 존나…… 옛날 사람……. 너 나랑 동갑 아니지? 버디버디 세대 아니냐, 너?”
“그게 뭔데?”
“톡 없던 시절에 쓰던 거.”
“뭐! 톡이 없던 시절이 있었어?! 석기시대야?!”
한결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은한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네 사람이 진지해질 날이 있을까. 아마 백 살쯤 되어서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온갖 흑역사를 들추겠지. 이 할아버지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또라이였는지 아니? 하며 대대손손 알려 줄 터였다.
은한은 그 흑역사의 한 가운데에 변발과 수박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 * *
태준, 진우와 헤어진 두 사람은 당연한 듯 은한의 자취방으로 왔다. 그곳에서 그 어떠한 대화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은한이 까칠한 한결의 머리를 끊임없이 쓸어내렸다. 늘 보드라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었는데. 이제는 휑하기만 하다.
“어색해. 너 안 같아.”
“네가 밀어놓고 그런 소리를 해. 섭섭하게.”
“……섭섭해? 미안.”
“장난인데.”
한결이 쪽쪽 은한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눌렀다 뗐다. 은한은 살풋 눈을 감은 채 그의 키스를 하나하나 소중히 기억했다. 평소에 귀찮을 정도로 자주 부딪혀 오는 그의 입술인데. 오늘은 말도 못 하게 아쉬웠다.
잠시 그의 입맞춤을 받던 은한이 훌러덩 후드를 벗어던졌다. 말랑한 살결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한결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은한이 그의 목 뒤로 팔을 두르고 바짝 몸을 붙였다.
“하자.”
“지금? 아직 해도 안 졌는데?”
“해질 때까지 하면 되지. 그리고 해지고 나서도 해.”
“…….”
한결은 순식간에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핥았다. 은한과 함께하는 섹스야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지금 은한의 상태가 썩 온전치 않은 것 같아 망설여졌다.
“방울아.”
“하자. 하고 싶어.”
“…….”
은한이 한결에게 간절히 매달렸다. 그러나 한결은 눈만 멀뚱히 뜬 채 은한을 살피기만 했다. 참다못한 은한이 세게 한결을 밀쳤다. 한결의 상체가 속절없이 침대로 파묻혔다.
그리고 쑥, 바지가 내려갔다. 한결이 무어라 말리기도 전에 은한이 앙, 그의 것을 물어 삼켰다.
“은한아!”
소스라치게 놀란 한결이 은한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찰싹, 손등으로 매서운 손바닥이 떨어졌다. 우물우물. 은한이 어색하게 입술을 놀렸다. 아직 완전히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입안을 가득 채운 살덩이가 버거웠다.
“윽.”
촉촉한 입안과 뜨거운 혀. 그리고 제 아래에 있는 은한. 한결은 그것만으로 딱 까무러쳐 죽을 것만 같았다. 한결의 손은 어느새 잔뜩 부푼 은한의 볼을 매만지고 있었다. 얇고 보드라운 살결 아래로 느껴지는 제 페니스가 선연했다.
“후응…….”
은한이 페니스를 조금이나마 더 삼켜 보겠다고 꾸역꾸역 목구멍을 열었다. 목젖을 짓누르는 귀두가 괴로웠다.
“……방울아?”
묘한 기운을 눈치 챈 한결이 휙 상체를 일으켰다. 은한은 여전히 고집스레 제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하지만 훤한 대낮인 탓에 볼 수 있었다. 은한의 기다란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한결이 조금은 강하게 은한을 밀어냈다. 드러난 마알간 얼굴에 붉은 코끝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왜에…… 하고 싶다니까…….”
코를 훌쩍이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한다. 한결이 푸욱,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려 했다. 잡히는 게 없어 이마만 만지다 끝났지만.
“이리와.”
“흐읍…….”
나긋한 한결의 말에 은한은 간신히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달려들 듯 쏟아지는 은한의 온기가 후끈했다. 한결이 토닥토닥. 그의 등허리를 두드렸다.
“평생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울어.”
“나도…… 알아……. 아는데…….”
은한이 한결의 목덜미에 얼굴을 욱여넣고 마구 비비적거렸다. 하다못해 부모님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면서도 이리 슬프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1년에 부모님을 보는 횟수나, 한결이 나오는 휴가 횟수나 그리 큰 차이가 없을 텐데. 이성적으론 그걸 잘 알고 있지만 심장이 이성을 따라가질 못했다.
“좋네.”
“뭐가.”
눈치라곤 하등 존재하지 않는 한결의 말에 은한이 눈을 홉떴다. 뭐가 좋아. 설마 나랑 헤어지는 게 좋아? 그런 의구심을 한가득 담은 눈이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게 이렇게까지 몸소 와닿는 건 처음이라, 너무 좋아.”
“……미친놈.”
“응. 방울이한테 미쳤지.”
나 제정신이 아니야. 그걸 몰랐단 말이야? 껄껄, 할아버지처럼 웃은 한결이 마구 뽀뽀를 해댔다. 은한이 훌쩍훌쩍, 코를 찡긋거리며 한결을 밀어냈다.
“나 웃을 기분 아니야.”
“그럼 나보고 너 우는 거 계속 보고 있으라고?”
“…….”
그건 아니지만……. 은한이 아랫입술을 잔뜩 내밀었다. 한결이 톡, 그 입술을 건드렸다.
“이건 빨아 달라는 건가.”
은한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한가득 입술을 삼켜 버렸다. 뻐끔, 벌어지는 입술은 수많은 키스에 버릇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결이 부드럽게 은한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언제 맛보든 달콤하고 짜릿할 만큼 좋은 은한의 혀다.
한결의 고개가 옆으로 뒤틀리면서 키스는 조금 더 진득해졌다. 혀가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질척이며 섞이는 타액이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흐으응.”
은한은 혀끝을 세워 입천장을 긁어내리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자기는 모르고 있겠지.
아아. 아쉽다. 아쉬워 죽을 것만 같다. 이제 이 입술을 마음껏 탐하지 못한다니.
한결이 쪽쪽 은한의 혀를 빨았다. 말랑한 혀는 하루 종일 입에 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혀를 섞었을까. 규칙적이지 못한 호흡에 두 사람의 입술이 아쉽게 떨어졌다.
한결이 살짝 흐트러진 은한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그가 비밀을 속삭이듯 낮게 읊조린다.
“나 어디 한군데 부러질까?”
“어?”
“한 삼 층에서 떨어지면 죽지는 않고 적당히 공익 갈 정도는 되지 않을까?”
“미쳤냐!”
은한이 퍽! 한결의 가슴팍을 때렸다. 정신 나갔지, 아주. 어디서 떨어져? 삼 츠응? 뒤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만. 거기서 잘못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 거꾸로 떨어지지 않을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삼 층에서 떨어져 사지가 기이하게 뒤틀린 그를 상상한 은한이 한 번 더 퍼억, 그의 복부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이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윽…… 가기 싫으니까 그렇지.”
개고생하는 거나 훈련하는 건 괜찮은데. 우리 사랑스런 방울이 못 보는 게 너무 아쉽네. 한결이 흑흑, 울음을 연기했다. 능청맞은 한결의 모습에 은한이 피식, 실소했다.
“됐어. 좀 떨어져 봐. 하던 거나 마저 하게.”
“……마저 하게?”
“왜. 싫어?”
“아니. 너무 좋아서 그러지. 봐봐. 나 입 귀까지 찢어졌어.”
한결이 허허헝, 멍청하게 웃었다. 은한이 그새 살짝 죽어 있는 페니스를 부드럽게 쥐어 다시 입에 담았다. 목을 뒤로 젖힌 한결이 윽, 단말마의 신음을 흘렸다. 은한은 그에 신이라도 난 듯, 아래위로 턱을 열심히 움직여 댔다.
한결이 진한 눈동자로 은한을 내려다봤다. 늘 밝은 갈색을 유지하던 그의 동공이 먹물보다 새까맸다.
둘이서 만들어 가는 관계에 어린아이 역할은 항상 자신이었는데. 염치없이 애정을 갈구하고, 유치하게 마음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리 온몸으로 절 사랑한다, 좋아한다, 그리울 것이다 말해주는 은한을 보고 있자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이 벅차올랐다.
지금 이 순간을 추억으로 삼기만 해도 2년이 쏜살같이 지나가리라. 한결이 건방지게 넘겨짚었다.
은한의 턱이 빨라졌다. 이미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귀두 끝이 염치없이 입안을 긁어 댔다. 한결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차오르는 사정감이 아쉬워 이를 악물었으나 그새 테크니컬해진 은한을 이기지 못했다.
“으엑…….”
생전 처음 타인의 정액을 입으로 받은 은한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결은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웃고야 말았다.
“뱉어. 양치해야겠다.”
“우으…….”
한결이 휴지를 둘둘 말아 은한의 앞으로 내밀었다. 데구르르 눈을 굴리던 그가 주르륵, 입에 담고 있던 걸 뱉는다. 입안에 가득한 비린내가 어색한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한결이 은한의 입가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슥슥 엄지로 닦아 냈다.
“양치하고 와. 하고 오면 나도 해 줄게.”
“됐어.”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은한이 후다닥 욕실로 뛰어간다. 한결이 집요하게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힘찬 양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치아에 척척하니 달라붙은 정액을 열심히 닦아 내고 있으리라.
그 모습을 상상하니 안 보고는 못 배겨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 후 욕실 문에 기대어 양치하는 은한을 관찰했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칫솔이 부지런히 드나든다. 집중한 눈썹 사이는 좁아지고, 상체는 거울을 향해 살짝 굽어 있다.
그게 뭐라고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은 양칫물을 삼키지 않고 잘 뱉어 낸 은한이 이이- 하며 입을 가로로 길게 쨌다. 하얀 치아가 반짝반짝하다. 한결이 잘했다며 두 볼을 한가득 움켜쥐고 키스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다시 침대로 이동했다. 한결이 은근히 그의 아랫도리에 손을 가져갔지만 은한은 한사코 그의 손을 밀어냈다.
“너무 슬퍼서 안 설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 근데 그런 느낌이 들어.”
탁탁, 한결의 가슴을 베개 정리하듯 두드린 은한이 거기다 볼을 파묻었다. 이마로 떨어지는 한결의 입술에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환한 대낮이었는데. 지금은 창문으로 불그스름한 노을이 쏟아지고 있다.
한결과 헤어질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말이다.
“내일 몇 시에 갈 거야?”
두 사람은 오늘 함께 밤을 보낸 후, 내일 이르게 헤어지기로 했다. 한결이 아무래도 준비할 것도 많고,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단다. 당연히 훈련소 앞까지 배웅을 나가려 했더니 그마저도 괜찮다고 했다. 부모님도 오시고, 태준과 진우도 같은 훈련소니 굳이 먼 길을 오지 마란다.
장난기라곤 하나 없는 그의 말에 은한은 께름칙하니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음. 4시 저녁 약속이니까, 2시쯤엔 나가야지. 할머니까지 올라오신대서 못 빠져. 미안.”
“그게 뭐가 미안해. 당연한 거지. 나도 훈련소 앞까지 가고 싶은데…….”
“됐어. 아직 추워. 부모님이 데려다주신다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이렇게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한결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아 봐야 다섯 시간일 터였다. 그 후 훈련소는 전화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잘살고 있겠지, 건강하겠지. 막연히 그런 가늠으로만 서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거다.
은한은 잔인할 정도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이 미웠다.
“들어가기 전에 전화할게.”
“응.”
멍하니 천장을 주시하고 있던 은한이 옆으로 돌아누워 팔을 괬다. 노을로 물든 한결은 빡빡머린데도 참, 잘생겼다. 은한이 까칠한 한결의 머리를 열심히 쓰다듬었다. 앞으로 한동안 만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별게 다 그리웠다.
은한의 시선을 느끼고 있던 한결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봐.”
“…….”
“못생겼어?”
“아니. 잘생겼어.”
자그마한 손가락이 우뚝 선 한결의 콧날을 조심히 매만진다. 간지러운 손길에 한결이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손가락은 툭 불거진 눈썹뼈도 만지고, 판판한 광대도 훑었으며 시원하게 뻗은 입술선도 놓치지 않았다.
한결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이며 그 손길을 담아냈다.
“…….”
“…….”
두 사람은 한동안 시선만 마주하고, 숨소리만 공유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고요히 부유하는 공기조차 아쉬운 심정이라 따로 할 게 없었다.
은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태준에게 잡혀 온갖 쇼핑센터를 돌아다니고, 미용실도 가며 부산을 떨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이제는 한결이 은한을 바라볼 차례였다. 은한의 가슴팍까지 이불을 덮어 준 한결이 본격적으로 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얇은 눈꺼풀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연한 실핏줄이 보인다. 그 아래론 길고 촘촘히 뻗은 속눈썹이 있고. 신기할 정도로 하얀 피부는 볼 때마다 손을 대고 싶어 고역이다.
요철하나 없이 동그란 코끝은 어디에 있든 빛을 모아 반짝였다. 언젠가 씹어 먹고 싶다, 말했던 도톰한 입술은 늘 물고 빠는데도 아쉽고 또 아쉽다.
이런 얼굴을 가져 놓고 눈을 내리깔며 제 담뱃불을 훔쳐 가다니. 어떻게……
“안 좋아하고 배겨…….”
색색 숨 쉬는 것조차 신기하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보통의 인간들이 숨을 쉬는 것과 하등 다름이 없는데 은한이라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주 평범한 것도 세상 그 무엇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은한이다.
한결이 꾹- 조금 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은한은 여전히 제 품 안에서 평온히 잠을 자고 있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헤어지기 싫어서 어쩌지. 보고 싶어서 죽으면 어쩌지.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할 연인의 입장에서 과연 누가 더 서로를 그리워할까. 아마 한결이지 않을까. 그는 넓지만, 또 다른 의미로 좁은 감옥에 갇혀 새벽에 눈을 뜰 때부터, 이른 저녁 눈을 감을 때까지 은한만을 생각하고 되뇔 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은한은 그러지 못하겠지. ‘일상’이라는 게 존재할 테니까.
한결이 씁쓸하게 웃었다.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은한을 눈동자에, 또 마음에 담던 한결은 어슴푸레한 해가 떠오를 때쯤에야 눈을 감았다.
한결은 은한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다. 가장 먼저 시선에 들어온 게 살짝 부은 은한의 얼굴이라 행복했다. 한결이 은한의 매끈한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언제 일어났어.”
잔뜩 잠긴 음성이 바닥을 긴다. 은한이 한결의 귓불을 만지며 답했다.
“두 시간 전쯤.”
“깨우지.”
“자는 거 보고 싶어서 안 깨웠어.”
어젯밤 나도 그랬는데. 한결이 말을 삼키며 웃었다. 흘끔 확인한 시간이 벌써 11시다. 어쩌자고 이 시간까지 잤나, 짜증이 났다. 1분 1초가 아까운데. 한결이 텁텁한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은한은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그의 위로 올라탔다.
“가지 마라.”
왜 이러실까. 진짜 손잡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게. 한결이 푸스스, 웃으며 은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안 가도 되는데. 대신 감옥 가야 돼. 기다릴 수 있어?”
“…….”
흥. 하는 소리가 턱 아래에서 흩어진다. 그 귀여움에 한결의 목젖이 아래위로 일렁였다.
“훈련 열심히 해서 휴가 많이 받을게. 뭐든 1등 하면 휴가 준대.”
“응. 다 1등 해.”
“그럴게.”
쿵, 쿵, 쿵. 맞닿은 심장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게 뛴다. 은한이 눈을 내리감은 채 한결의 심장 소리를 외울 듯 집중했다. 두 사람은 이따금 입술도 섞고, 시선도 마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밥을 먹은 지 한참이나 돼서 배가 고플 만도 한데, 끼니를 해결할 시간조차 아쉬웠다.
하지만 아낀다고 아껴질 시간이 아니다. 잔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금세 이별을 가져왔다.
슬슬 나갈 시간이 되자 한결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은한은 고집스레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 잘 다니고.”
“응.”
“수업 꼬박꼬박 나가야 돼.”
“응.”
“아프지 말고.”
“응.”
“내 생각 많이 하고.”
“응.”
“그렇다고 너무 보고 싶어 하진 말고.”
“…….”
잘 먹고, 잘 자고, 잘살고 있어. 나도 그럴 테니까.
한결의 목소리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잔잔했다. 그래서 더 슬펐다. 은한은 꽉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어제도 충분히 울었다. 헤어지는 순간에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은한의 눈이 사르르, 휘어진다. 겨울 막바지에 근근이 남아 있는 눈을 모두 녹이는 봄맞이 햇살 같았다. 한결이 그의 양쪽 눈두덩에 쪽, 쪽 입을 맞췄다.
은한은 주섬주섬 옷을 입는 한결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게 꼭 작은 강아지 같아서, 한결은 그 순간에도 사진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파에 올라선 은한이 손수 목도리를 둘러 줬다. 한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빙긋빙긋 웃기만 한다.
“방울아.”
“어.”
“좋아해.”
“……나도.”
은한이 한껏 드러난 한결의 정수리에 꾹 입술을 눌렀다. 한결이 마치 세례를 받는 기분이라며 큭큭댔다. 은한은 따라 웃지 못했다.
결국 한결은 신발까지 꿰신었다.
진짜 도망갈래, 우리.
은한은 철없이 치솟는 말을 꼭꼭 씹어 삼켰다. 소화는 안 될 테지만.
“갈게.”
“…….”
은한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한결은 그를 이해한다는 듯 쪽, 이마에 키스를 남긴 채 뒤를 돌았다.
달칵.
겨울의 끝자락과 함께 한결이 떠났다.
그렇게 은한은 홀로, 스물한 살의 봄을 보내게 됐다.
아마 여름도, 가을도. 그리고 다시 찾아올 겨울도 홀로 보낼 터였다.
치솟는 울음을 감출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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