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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마지막 스무 살 (4/11)

04. 마지막 스무 살

이대로는 안 된다. 종강하고 이틀이 흘렀을 때. 여전히 잠잠한 또라이 셋 채팅방을 보며 은한이 생각했다. 진우와는 어제도 시답잖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연락되지 않는 건 태준뿐이다. 태준의 연락처를 띄워 놓은 은한이 끙끙 속앓이했다.

“방울아아…….”

은한을 끌어안고 있던 한결이 애타게 그를 불렀다. 어, 왜. 은한이 로봇처럼 대답했다.

그는 섹스 같지 않은 섹스 후로 하루 16시간을 은한의 집에 붙어 있는 중이다. 방학 동안 과외 알바를 한다더니, 이제 하루 종일 함께 있지 못한다고 지금 다 붙어 있겠단다.

서빙알바도 아니고 과왼데. 이동시간 합쳐봐야 세 시간도 안 되거늘. 유난도 저런 유난이 없다.

그래도 매일매일 집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게 나쁘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이 같이 아침도 먹어 주고, 점심도 먹어 주고, 놀아 주고, 재워 주고. 보모 비용이라도 챙겨 줘야 할 판이다.

“내일 크리스마슨데, 하고 싶은 거 있어?”

목덜미에 쪽, 귓바퀴에 쪽, 온갖 군데에 입술을 눌러 대던 그가 물었다. 은한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새초롬히 한결을 바라봤다. 그게 또 뭐라고 그리 귀여운지. 히히, 개구쟁이처럼 웃은 한결이 춥. 도톰한 입술을 빨았다.

“하고 싶은 거?”

“어.”

은한이 흐음, 하며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사실 하고 싶은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들어주려고?”

“그럼. 못할 게 없지.”

으스대듯 말하는 한결에 은한이 픽, 실소했다. 애인이 크리스마스라 하고 싶은 걸 들어준다는데, 이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은한이 방금까지 낮잠을 자 부스스하게 일어난 한결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하태준이랑 저녁 먹고 싶어.”

“어?”

“저녁 먹고 새벽 2시까지 술도 마시고 싶다.”

“…….”

한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은한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실수했나. 못해도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태준에게 연락하는 그다. 그래서 당연히 저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는데.

은한이 분주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한결이 톡, 동그란 코끝을 건드렸다. 그 작은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가뜩이나 큰 눈망울이 곧 굴러떨어질 듯했다.

“방울아.”

“엉……?”

“그게 하태준을 갑자기 사랑하게 됐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냥 친구로서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그런 거지?”

“……어우. 미친놈.”

기겁한 은한이 발을 들어 한결을 차려 했다. 치켜든 발목이 단단히 그의 손아귀에 잡혀 실패했지만.

“진짜, 아니지?”

“야! 나가 뒈져, 그냥!”

“화내는 거 보니까 수상한데.”

“와. 네가 이러니까 진짜 하태준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이런 새끼가 내 첫 애인이라니.”

그 말에 한결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첫 애인이래. 내가 방울이 첫 애인이야. 심장께가 간지러워 벅벅 긁고 싶다. 한결이 빙글빙글 웃으며 은한의 복사뼈에 키스했다. 톡 도드라진 뼈가 어쩜 이리 탐스러운지.

“안 떨어져?”

은한의 발길질에 자리를 피한 한결이 콧노래까지 부르며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딱 두 번 울리고 끊겼다. 한결의 옆에 딱 들러붙은 은한이 수화기 건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엉, 백! 왜.

“하태준 보통 어딨는지 아냐? 이 새끼가 연락이 안 돼.”

-하태준? 알지, 그럼.

“어디?”

-신촌 피시방.

“피시방?”

한결의 한쪽 눈썹이 삐죽 위로 올라갔다. 게임에 영혼을 팔아넘긴 태준임을 알지만 설마 지금도 거기 있을까. 누구는 마음이 불편해 잠도 못 자는데. 신나게 마우스나 클릭하고 있다면 제대로 열이 뻗칠 듯했다.

“확실해?”

-확실하지. 저기, 내 맞은편에 앉아서 열겜 중이시니까. 하태준 곧 마우스 하나 부순다, 로 만원 빵 할래?

“하……?”

피시방의 위치를 알아낸 한결이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은한이 주섬주섬 청바지를 꿰입었다. 맨투맨도 찾아 입고, 두툼한 패딩에 목도리까지 든다.

“지금 가게?”

“내일은 없을지도 모르잖아. 지금 가자.”

은한이 단호한 표정으로 한결의 코트를 내밀었다. 쩝, 마른 입맛을 다신 한결이 께름칙하게 그것을 받았다. 오늘 종일 은한을 끌어안고 뒹굴려 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태준이 미워졌다.

은한을 이기지 못해 신발까지 신은 한결이 툭툭, 짜증스레 핸드폰을 두드렸다.

[우리 지금 그쪽으로 가니까 걔 좀 잡아 둬라.]

[진우: 잡아 두라고? 존나 쓸데없는 걱정이네. 저 새끼 죽을 때 컴퓨터랑 같이 묻어 달라고 할 새끼야. 하다못해 내가 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도 모름!]

태준이 더 미워졌다.

* * *

크리스마스이브의 신촌은 도떼기시장과 다름이 없다.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사람이 많았다. 왁자지껄한 소음은 덤이었다. 대충 한적해 보이는 술집을 찾았음에도 그랬다.

지하에 위치한 치킨집은 치킨을 어떻게 튀겼기에 튀김옷이 꼭 빵 같았다. 덕분에 그러잖아도 별로인 분위기가 밀가루 덩어리처럼 퍽퍽해졌다.

모든 이들이 즐겁게 웃고 떠드는데 네 사람 자리만 찬바람에 얼어붙은 듯 조용하다. 태준과 함께 있는데 어색하다니. 만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험은…… 잘 쳤냐?”

그러다 은한이 내놓은 말이 참 볼품없었다. 시험 끝난 지가 언젠데. 무슨 과목을 쳤었는지도 가물가물할 때였다.

한결이 테이블 아래로 은한의 허벅지를 매만졌다. 다 저 때문에 이 순간이 도래한 것 같아 미안했다.

“어…… 아니. 태어나서 시험을 잘 쳐 본 적이 없는데.”

태준이 턱 아래를 긁으며 답했다. 그의 손에 들린 포크가 어정쩡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아…… 그래……. 방학은 잘 했고?”

“방학을 어떻게 잘 해?”

“그러게…….”

은한은 울고만 싶었다. 이게 무슨 대화야. 달달달. 다리가 떨렸다.

그때, 한결이 치킨을 옆으로 밀어내고 턱, 네모난 상자를 하나 올려놨다. 케이크였다. 무려 3만 8천 원짜리 유명 카페 홀 케이크. 신촌역에서 내리자마자 은한이 태준에게 줄 뇌물이라며 직접 산 것이다. 케이크를 밥솥처럼 품에 안고 퍼먹는 태준을 알아서였다.

태준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슬그머니 상자를 매만졌다.

“이게 뭐야?”

“뇌물.”

“엉? 이 안에 돈 들었어? 신사임당 돈다발 그런 거?”

“아니, 병신아. 무슨 신사임당이야.”

“…….”

“화, 화낸 거 아니야. 어? 먹어. 너 주려고 산 거야.”

은한이 케이크를 꺼내 태준에게 밀어 줬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입이 째져라 웃고 있는 루돌프와 산타가 올라간 케이크는 지금의 상황과 너무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태준이 느릿하게 케이크로 포크를 가져갔다. 한 입, 두 입. 곧 케이크에 홀라당 정신을 빼앗긴 태준이 광대를 씰룩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지금!

은한이 막 입술을 떼려 했다. 그를 막아선 한결이 선수 치고 들어왔다.

“미안하다. 많이 놀랐냐.”

“어?”

“미안하다고.”

앞뒤 없이 쏟아지는 한결의 사과에 분주히 움직이던 태준의 포크가 내려앉았다. 은한은 제 심장도 함께 떨어지는 걸 느꼈다. 속이 울렁거렸다.

태준이 한결을 노려보다시피 쳐다봤다.

“맞아. 너희 좀 미안해도 돼.”

“…….”

은한의 고개가 죄인처럼 고꾸라졌다. 솔직히 태준에게 피해를 준 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리 죄스럽고 미안한지 모르겠다. 산산이 조각났던 태준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오늘이 경험치 이벤트 마지막 날이었단 말이야. 두 번만 더 이겼으면 렙업인데. 존나 아까워!”

너희가 갑자기 끌고 나오지만 않았어도! 태준이 쿵,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번뜩 턱을 쳐든 은한이 바보 같은 표정으로 태준을 바라봤다.

이벤트…… 렙업…….

믿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휘몰아치며 귓구멍에 박혔다. 벙긋벙긋 아래위로 입술을 움직였으나 말을 만들어 내진 못했다. 은한이 피곤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새끼 달래자고 이 추위에, 이 인파를 뚫고 신촌까지 나왔다.

“그, 그것도 뭐…… 미안해야 한다면 미안하다만……. 우리가 미안한 건 그게 아닌데…….”

“그럼?”

“어?”

“그럼 뭘 사과하는데?”

너희 나한테 잘못한 거 없는데. 태준이 크림 묻은 포크를 쪽 빨아 당겼다. 순진한 척 동그랗게 뜨인 눈이 그저 의문 때문일까. 악의와 조롱 때문일까. 은한은 태준의 저의를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은한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한결이 대신 입술을 뗐다.

“장난 그만해. 뭔지 알잖아.”

“아니, 모르는데.”

“하태준. 재미없어.”

“지금 하는 사과가, 너희가 사귀는 걸 사과하는 거야, 아니면 나만 모르게 숨겼던 걸 사과하는 거야?”

“…….”

살풋 미간을 좁힌 한결이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태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였다. 데구르르, 눈을 굴리던 은한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 둘, 다?”

그 말에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진우가 얼굴을 구겼다.

“전자는 너희들이 사과할 게 아니야. 사과하지 마.”

쉽게 듣지 못하는 진우의 낮은 목소리다. 움찔 몸을 떤 은한이 마구 고개를 주억였다. 가끔, 아주 가끔 멀게 느껴질 정도로 어른스러워지는 진우다.

태준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뒤집어썼다. 잔뜩 상해 푸석푸석한 그의 금발이 술집 조명에 산란하듯 흔들렸다.

“맞아. 그건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이지. 미안하다. 좀…… 당황했었어.”

“…….”

“내가 그…… 게이를 실제로 처음 봐서, 그게 또 내 친구들이라서, 그래서 놀랐어. 기분 상하게 반응해서 미안하다.”

“…….”

“그러게, 씨발. 좀 눈치라도 주지! 그럼 내가 그렇게 안 놀랐을 거 아냐! 전날까지 같이 술 처먹던 새끼들이 다음날 시험공부 하다 말고 우리 사귀어, 하는데 어떻게 안 섭섭하냐!”

자꾸만 가라앉는 분위기에 태준이 빽 소리를 질렀다. 한창 게임에 빠져있는데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이가 한결이라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도망가듯 자리를 피했던 걸 혼내러 왔나, 겁을 집어먹었는데 뇌물까지 사 들고 사과하러 왔단다. 응어리진 마음은 진작 풀린 상태였다.

아. 내가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구나, 알 수 있어서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그래. 그건 진짜 미안하다.”

“엉.”

단조로운 한결의 사과에 태준이 사르르 눈을 휘었다. 그리고 냉큼 다시 케이크에 집중했다.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가 피시방까지 배달된다니. 종종 삐져 볼까. 철없는 생각도 해봤다.

쇠뭉치 같던 분위기가 조금 유하게 풀렸다. 한결이 그제야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

“근데 연락을 그렇게까지 씹어야 했냐? 어떻게 읽지도 않냐, 너는?”

태준이 당혹 어린 눈동자로 우물우물 케이크를 씹었다.

“전화했어? 나 폰 없어. 삼 일 전에 집에서 나왔는데 깜빡하고 두고 나왔거덩.”

“집에서 나왔다고? 쫓겨났어? 왜? 뭔 사고를 쳤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은한이 두두두, 질문을 쏴 댔다. 태준이 포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고 안 쳤어. 쫓겨난 것도 아니야. 그냥…… 게임 하려고 나온 건데…….”

“하? 사흘 동안 피시방에 있었다고?”

“엉! 종강했잖아. 근데 마침 경험치 이벤트도 하더라고? 엄빠한테 말도 하고 나왔는데?”

흐흐흐, 웃은 태준이 케이크를 한가득 퍼 입에 쑤셔 넣었다. 비록 목표한 렙업은 성취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사흘이었다. 알찼던 게임을 상기하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가 모자를 벗으며 탈색 때문에 떡도 안 진다고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해 댔다.

은한의 표정이 썩어갔다. 흥, 거센 콧김을 뿜었다. 그리고 태준의 금발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개새끼……!”

태준이 챙그랑, 포크를 놓쳤다.

“아! 방울아! 아!”

“누구는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방울아! 아파! 야! 좀 말려!”

태준이 손을 휘저으며 한결과 진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태준을 외면했다. 그걸로 모자라 의자를 뒤로 빼고 깊숙이 등을 묻었다. 철저히 방관하겠다는 뜻이었다.

“네가 잘못했지.”

“방울이 파이팅.”

“아아악! 방울아!”

“뒤져. 뒤져라, 이 개새!”

진우가 태준의 비명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들었다. 식어 빠진 치킨은 영 맛이 없었지만, 태준의 비명은 참 좋은 안주였다. 한결과 진우가 챙, 잔을 부딪쳤다.

아주 오랜만에, 네 명이 함께하는 술자리의 시작이었다.

“방울아. 이 새끼가 왜 좋아? 솔직히 좋아하려면 얘보단 나 아니야?”

나는 잘생겼고 귀엽고, 종종 예쁘기까지 한데? 꽃받침을 만든 태준이 분주하게 눈꺼풀을 깜박인다. 은한은 많이 먹지도 않은 안주를 죄다 토해 낼 뻔했다.

한결과 사귀게 된다면…… 하고 상상했을 땐 그저 조금 거리껴질 뿐이었는데, 태준과 사귀게 된다는 상상은 감히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저도 모르는 새 한결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나 보다.

“닥쳐.”

한결이 태준의 뒤통수를 세차게 내리쳤다. 이게 누굴 넘봐. 태준이 글썽이는 눈으로 진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지누야……. 오늘 내 머리 너무 고생해…….”

아퍼. 호 해 줘. 그렇게 애교 같지 않은 애교를 떨다 결국 진우에게 또 뒤통수를 맞았다.

테이블 위엔 난도질만 당했지 양은 줄어들지 않은 치킨과 무수한 소주병 그리고 깔끔하게 먹어치운 케이크 흔적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은한이 술기운에 흐릿한 시야를 헤쳐 내려 눈을 깜박였다. 제 포크가 가는 곳이 치킨인지, 어렴풋이 남아 있는 케이크 크림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벅벅, 억세게 눈두덩을 문지르자 한결이 탁, 손을 낚아챘다.

“하지 마. 간지러워?”

“아니이…… 잘 안 보여서.”

“졸려서 그래. 집에 갈까?”

한결이 부드럽게 은한의 뒷목을 주물렀다. 요즘 백반집에서 아침 먹는 데에 맛을 들여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은 한창 졸릴 때였다. 슬슬 집에 가야지. 한결이 은한의 물잔에 물을 가득 따랐다.

“야! 가긴 어딜 가! 2분 뒤면 크리스마스란 말이야!”

“맞아! 안 돼! 못 가!”

태준과 진우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12월 24일 11시 58분. 곧 크리스마스였다. 근데 그게 뭐. 한결에겐 그저 시끄러운 빨간 날일 뿐이다. 물론, 은한과 둘이 보내면 달라지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둘이 보냈을 때다. 태준과 진우가 없어야 한단 말이다.

“그런 거 챙겨서 뭐 하게?”

“축하해야지!”

“뭘?”

“그 누구냐. 하나님? 예수님? 무튼 굉장히 대단하신 분의 생신이라고. 축하해야 해, 축하.”

태준이 케이크 상자 아래에 깔려있던 초를 집어 들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하는 친절한 점원의 말에 대충 주세요. 대답하고 받았던 것이다.

케이크는 옛날에 다 먹었는데 그걸 어디 꼽으려고……, 은한이 몽롱한 동공으로 태준의 손을 쫓았다. 그리고 감탄처럼 터져 나오는 욕설을 막지 못했다.

“미친놈…….”

초가 정착한 곳이 민둥맨둥한 닭가슴살이었기 때문이다. 맛없는 치킨 위로 초가 다섯 개나 꼽혔다. 진우가 낄낄거리며 라이터를 켰다. 멀뚱히 보고 있던 한결도 가세해 불을 붙였다.

역시. 여기서 정상인 건 나밖에 없어. 은한이 조용히 한탄했다.

치킨이 쓸데없이 환하게 빛난다. 노르스름한 촛불이 빵 같은 튀김옷을 뒤집어쓴 치킨도 맛있어 보이게 했다. 또 모르지. 진짜 맛있어졌을지도. 예수님의 기적이 이 하찮은 테이블에도 내렸구나.

은한의 의식이 느긋하게 샛길로 빠졌다.

“야. 근데 생일 축하 노래 부르냐? 거기 사랑하는 누구누구- 이렇게 부르잖아. 나 하나님 안 사랑하는데 어쩌지?”

“어…….”

태준의 말에 진우가 심도 높은 고민을 시작했다. 하긴 그렇다. 크리스마스에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수십 년 전 캐럴부터 며칠 전 나온 캐럴 따위만 울려 퍼졌지.

길어지는 진우의 고민에 태준이 팔랑팔랑 손을 휘저었다.

“됐다. 그냥 투한스 축하하는 거로 하자.”

“투한스?”

낯선 단어에 한결이 되물었다. 태준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한결을 타박했다.

“은한한결. 한이 두 번이니까, 복수 취급해서 투한’s 커플이지.”

“…….”

“…….”

은한과 한결의 표정이 기이하게 구겨졌다. 저 소름 돋는 작명은 무엇이란 말인가. 투한스라니. 싸구려 치즈 피자를 파는 미국 시골의 식당 이름 같았다. 녹슨 간판이 너덜거리고, 문은 삐걱대고 낡은 테이블에선 기름 냄새가 나는. 그러니까 존나 별로라는 말이다.

그런 둘과 달리 진우는 두 손을 고이 모은 채 태준을 찬탄했다.

“와. 존나 천재. 개 천재. 하태준 너 영어 좀 하는구나?”

“어 뭐…… 기공과 안 왔으면 영문과 갔을 정도?”

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진우가 오오, 오오오. 하며 감탄사를 연달아 뱉어 댔다. 한결이 픽, 조소했다.

“지랄하네. 우리 과 영어 이름도 모르는 새끼가.”

“야! 알거든!”

“뭔데?”

“……내일 알려줄게! 내일!”

뻐팅기면서도 테이블 아래로 분주히 ‘기계공학과’를 검색한다. 은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과잠에도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단다. 이 모자란 친구야. 내가 너를 달래자고 여기까지 왔다니. 잠을 설쳤다니.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로 슬펐다.

“투한스! 빨리 불어, 불어!”

태준이 초 꼽힌 치킨을 두 사람 앞으로 밀었다. 촛농이 뚝뚝 흘러내리는 걸 잠시 바라보고 있던 은한과 한결이 못 이기는 척 후- 바람을 불었다. 일렁이던 작은 불길이 순식간에 연기로 돌변했다.

태준과 진우가 짝짝짝, 요란하게 손뼉을 쳐 댔다. 진우가 덕담 같지 않은 덕담을 했다.

“야. 늦었지만 축하한다. 꼭- 결혼해서 애도 낳고 햅삐햅삐한 인생을 살도록 해!”

“딸! 딸 낳아 줘, 딸!”

이왕이면 방울이 닮게 낳아라! 태준이 입술을 가로로 길게 째며 웃었다. 은한을 꼭 빼닮은 딸이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삼촌이 될 수 있을 듯했다. 어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귀엽다.

은한이 초점 없는 눈동자로 태준과 진우를 번갈아 봤다. 그러다 반쯤 차 찰랑이는 소주잔을 한 번에 비워 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이 달았다.

아. 세상이 쓰면 소주가 달다는 게 이런 거구나.

또라이력 만렙인 친구 새끼들 덕에 세상의 쓴맛을 깨우치다니!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야, 백한결.”

“응, 방울아.”

“나 집에 가고 싶다.”

“나도.”

“갈까?”

“그래.”

투한스가 미련 한 줌 없이 자리를 뜨고, 애타게 투한스를 부르짖는 태준과 진우의 목소리로 오랜만의 술자리가 끝났다.

* * *

크리스마스는 눈이 와야 따뜻한데. 그저 건조하기만 한 대기가 온갖 칼바람을 죄다 몰고 왔다. 은한이 한껏 어깨를 접은 채 걸었다. 알딸딸하던 술기운은 진즉 추위에 휘발한 상태였다.

“조심히 들어가.”

“뭐 문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냐.”

은한이 제 등 뒤에 있는 출입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결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헤어지기 아쉬워서 한 마디라도 더 해 봤다.”

“가게? 1시 넘었는데?”

“가야지.”

묘하게 단호한 한결의 음성에 은한이 입술을 삐죽였다. 목도리에 한껏 파묻힌 말간 얼굴이 온통 불만에 물들었다. 추운데 뭐 하러 가. 그냥 자고 가면 되지.

“자고 가.”

“싫어.”

“싫-어어?”

지금 싫다고 한 거야? 안 돼, 도 아니고. 싫어어? 우리 집이 춥기를 해, 냄새가 나? 은한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홉떴다. 데구르르, 눈알을 굴린 한결이 멋쩍게 웃었다.

“나도 자고야 싶지. 따끈따끈한 방울이 끌어안고 자면 얼마나 좋은데.”

“근데 왜 가?”

은한은 진심으로 한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고 가. 왜 갑자기 내외야. 오늘 낮에만 해도 등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놓고?

그래도 크리스마슨데. 같이 자면 좋지 않은가. 솔직히 은한은 아침 일찍 열심히 양치질한 후, 메리 크리스마스. 담백한 인사와 모닝 키스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느 외국 로맨스 영화처럼.

술도 마셨고. 태준과 화해도 했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한 신촌도 걸었고. 퍽 괜찮은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았는데.

친구들이 말하기를 크리스마스 땐 모텔 잡기도 힘들다는데 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한결이 새빨갛게 언 은한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고작 손톱만 한 귓불이 꽝꽝 얼어 있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마음이 아팠다.

“나 오늘 술 많이 마셔서 플라토닉을 이어갈 자신이 없단 말이야.”

“하?”

“내가 정신 놓고 방울이 홀라당 잡아먹으면 어떡해.”

장난을 조금 섞긴 했지만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근래 매일같이 은한의 집을 드나들면서도 어두워지면 칼같이 튀어나왔다. 은한이 ‘플라토닉 러브’를 하자는데 들어줘야지. 어쩌겠는가. 한결은 뭐든 ‘러브’이기만 하면 됐다.

한결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은한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통통한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한껏 뿜어진다. 그러고 보니 담배를 안 피웠네. 들어가기 전에 한 개비 피우자고 할까. 아니, 추우니까 그냥 들여보낼까.

한결의 생각이 샛길로 빠지고 있을 때 은한이 그의 코트 깃을 우악스레 잡아 쥐었다. 한결의 등이 훅, 굽어졌다.

은한과 한결의 코가 닿을 듯 말 듯 했다.

“플라토닉 그거 이제 그만하자.”

“……어?”

한결이 느릿하게 눈을 꿈벅였다. 뭘 그만하자고……? 맹한 한결에 은한이 고개까지 저으며 말했다.

“안 해도 돼.”

“에? 그래도,”

“그…… 어…… 내가 공부 겸 좀 찾아봤는데 뭐……. 괜찮은 것 같더라?”

“아?”

뭘 해? 뭘 공부했는데? 뭘 찾아봤는데? 한결은 어렴풋이 은한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설마, 하는 마음에서. 정말 그걸, 공부했을까. 아니, 그게 공부가 가능한 건가, 싶었다.

“무슨…… 공부?”

혼잣말 같은 한결의 되물음에 은한이 흡, 숨을 먹었다. 추위에 발갛게 얼었던 그의 광대가 다른 이유로 붉게 물들었다. 한결의 심장이 쿵쾅쿵쾅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 공부가, 그것에 관한 공부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결이 씨익, 입술을 잔뜩 끌어올리며 두 손으로 은한의 볼을 한가득 쥐었다.

“우리 귀엽고 예쁘고 박력까지 있는 방울이는, 공부할 게 없어서 그걸 공부했냐.”

“싫음 말아라. 플라토닉, 정신적 사랑. 그거 계속 이어 가는 거지 뭐.”

집 갈 거야. 꺼져. 은한이 콱 한결의 신발을 짓밟았다. 한결은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발을 밟히면서도 실실 새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공부했대. 그러니까, 나랑 섹스하려고…… 공부까지…….

“기특해서 그러지. 존나 기특해서.”

“기특, 하면, 자고, 가든, 지!”

씨근덕거리는 은한을 바보처럼 내려다보던 한결이 팔을 뻗었다. 그리고 띡띡띡, 익숙하게 은한의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철컥 문이 열린다.

그와 동시에 차게 식은 두 입술이 허겁지겁 부딪쳤다. 집안은 후끈할 정도로 따뜻했다. 바쁘게 나서느라 미처 보일러를 끄지 못했나 보다. 그게 다행이었다. 당장 옷을 벗어도 춥지 않을 테니까.

“으응…….”

이제 섞이는 입술쯤이야 그저 작은 스킨십에 불과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붙었다 떨어지니 당연했다.

얇은 허리를 한껏 끌어안은 한결이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던지고 성큼성큼 침대로 향했다. 공중에 들린 은한의 발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은한이 툭툭, 부산스레 한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한결은 이번엔 절대, 절대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불에 눕고 나서는 티끌만큼이나마 남아있던 여유조차 사라졌다. 쪼옥, 쪽. 여기저기를 헤집는 혀가 난잡하다. 입천장을 바짝 긁어내리는 한결의 혀에 은한이 흠칫 등허리를 떨었다.

더듬더듬. 커다란 손이 바쁘게 웃옷을 파고든다. 그렇게 만지고 싶던 유두가 검지에 걸려 왔다. 한결이 조금 더 깊숙이 은한의 입속을 탐하며 그것을 꾸욱, 짓눌렀다.

“흣!”

소스라치게 놀란 은한이 팩, 고개를 뒤틀었다. 떨어진 입술에 한결이 살풋 눈을 구겼다. 그리곤 음산하게 중얼거린다.

“미루면 안 돼. 플라토닉도 안 돼.”

“멍청아. 그게 아니고, 신발, 신발.”

은한이 한결의 몸뚱이에 깔린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한결이 흘끔, 아래를 내려다봤다. 꼼꼼하게 리본까지 묶여 있는 운동화가 여태 은한의 발을 감싸고 있었다. 촙, 입술을 아쉽게 빨았다 놓은 한결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가 손수 신발을 벗겨 내는 동안 은한은 후다닥 옷가지를 털어 냈다. 후드도 방구석으로 던져 버리고 바지 버클도 풀었다. 이렇게 된 거,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끝내 버려야 한다. 은한이 머릿속으로 열심히 봤던 영상을 빠르게 돌려 복습했다.

한결은 그 순간에도 벗겨 낸 신발을 신발장에 예쁘게 두고 왔다. 은한이 넙데데한 등짝을 구경하며 웃었다. 어쩜. 내 남친 존나 멋져. 등도 넓고, 어깨도 넓고. 복근도 있고. 키도 크고. 제가 한 게 뭐라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또.”

“엉?”

“또 뭐 할 거 없지?”

나 이제 중간에 못 멈춘다, 방울아. 차라리 죽여. 한결이 부지런히 자신의 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그의 눈이 형형하게 반짝인다. 여린 달빛만 한가득인 방안에 짐승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는 듯했다.

옆으로 돌아누워 한결의 나신을 감상하던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는 바이다.”

한결이 점프하듯 침대로 올라왔다. 출렁이는 침대에 은한이 큭큭거렸다. 입술이 다시 맞물린다. 두 다리로 한결의 허리를 감싼 은한이 적극적으로 타액을 받아 마셨다. 간간이 딱딱거리며 부딪히는 치아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한참이나 입술을 물고 빨던 한결이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이번에야말로 은한을 충분히 맛볼 셈이었다.

마른 상체 여기저기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은한이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갈비뼈를 핥아 내는 입술이 간지러워서.

“왜 웃어.”

한결이 물었다.

“간지러워.”

“안 돼, 웃지 마.”

“간지러운데 어떡해?”

은한이 한결이 닿았던 갈비뼈를 긁으며 되물었다. 동그란 눈에 의문이 가득하다. 그걸 고스란히 목도한 한결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보자.”

“엉?”

은한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흘러갔다.

과거의 섹스 같지 않은 섹스처럼 두 페니스를 한 번에 움켜쥐고 시원하게 한 발 빼냈다. 은한이 탈력감에 털썩, 침대에 쓰러졌다. 아, 그냥 자고 싶다.

은한에게 섹스란 두 개의 뜨거운 살덩이를 비비기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집요하면서도 애처로운 한결의 눈빛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한결이 초조하게 은한을 채근했다.

“잠 와?”

“……아니.”

벌떡 일어난 은한이 금세 다시 커져 꺼덕이는 한결의 페니스를 톡 건드렸다. 씨발 이 어마어마한 분홍 소시지를 어떡하지……. 좀 적당히 건강했으면 좋으련만. 은한이 쩝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한결은 염려하는 표정을 지은 채로도 말랑한 은한의 엉덩이를 한가득 쥐고 주물러 댔다.

은한이 괜히 확인하듯 되물었다.

“계속…… 할 거지?”

“어?”

“끝까지 할 거잖아. 그치?”

엉덩이를 만지던 한결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착잡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방울아.”

“응.”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

“플라토닉…… 좀 더 하지, 뭐.”

이 멍청한 새끼. 호군가. 은한이 코를 찡긋거리며 생각했다. 대체 언제까지 저를 중심에 두고 모든 걸 맞춰 가려고. 게이 섹스를 공부했다는 제 말에 그리 해사하게 웃어 놓고는 이제 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은한이 뜬금없이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곤 분주히 책상 서랍을 뒤졌다. 한결이 입을 벌린 채 눈으로 그를 쫓았다.

은한은 무언가를 한가득 쥐고 돌아왔다. 어두운 방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은한이 손을 뻗어 무드등을 켰다.

“내가 네티즌 형들한테 물어봤는데 이거 있어야 된대.”

“아……?”

“엄청 오래 공들여서 풀어 줘야 한다고 했어.”

“…….”

은한이 가져온 것은 젤 두 통과 콘돔 한 박스였다. 무려, 박스. 한결이 괴생물체라도 건드리듯, 툭. 젤을 쳤다. 투명한 액체가 가득 든 젤 통이 데구르르, 침대 위를 구른다.

“샀어?”

“당연하지. 설마 주웠겠냐?”

“……나랑 섹스하려고?”

“그럼 먹으려고 샀겠냐?”

이 새끼 왜 이래. 은한이 답지 않게 멍청한 말만 반복하는 한결을 흘겼다. 조심히 콘돔 박스를 뜯었다. 제가 사긴 했지만 만져 보는 건 생소했다. 콘돔은 학창시절, 보건 시간에 만져 본 게 다고 젤은 생전 처음이다.

대충 콘돔 한 줌을 늘어놓은 은한이 새초롬히 입술까지 모은 채 젤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그런 은한을 한참 쳐다보고 있던 한결이 말했다.

“뽀뽀할래.”

“그걸 새삼 왜 물어보냐.”

은한이 픽, 웃었다. 애새끼도 아니고. 가끔 보면 이상할 정도로 어려지는 한결이다. 꼭 초등학생의 풋사랑을 보는 것 같달까. 막 젤 포장을 뜯어냈을 때, 턱이 잡히고 짧게 입술이 부딪쳤다. 정말 말 그대로 뽀뽀였다.

“방울아, 좋아해.”

“엉. 나도.”

시선을 마주한 은한이 사르르, 눈을 휘었다. 도톰한 애교 살이 올라오고, 쌍꺼풀이 예쁜 호선을 그린다. 한결이 그의 양쪽 눈두덩에도 쪽쪽 입술을 내렸다.

젤을 건네받은 그가 심각하게 물었다.

“엎드리는 게 편할까, 아니면 다리 벌리는 게 편할까?”

“어……. 엎드릴래.”

은한이 휙, 뒤를 돌아 꾸물꾸물 엉덩이를 쳐들었다. 부유하는 공기가 엉덩이를 혼내듯 스치고 지나갔다. 부끄러워서 죽고 싶었다. 백한결에게 엉덩이, 아니, 그보다 더한 걸 보이다니. 섹스라는 거 정말 보통 감정이 아니고서야 할 게 못 됐다.

등 뒤로 달칵, 젤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방울아. 이거 차가워.”

꼬옥 입술을 말아 문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그의 뒤통수를 보던 한결이 젤로 질척해진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로 가져갔다. 은한이 움찔, 온몸을 떨었다. 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거기다 이질적이며 야릇한 느낌까지 더해지니 퍽 끔찍한 경험이 됐다.

“으…….”

한결이 부드럽게 주름진 구멍을 문지른다. 단단하게 닫힌 구멍이 흠칫흠칫 경련했다.

은한은 온 힘을 다해 베개를 쥐어뜯었다. 예전에 한결이 말했던 것처럼 저도 충분히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지만,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 한 것도 없는데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이게 진짜 좋을까. 아니야. 세상의 모든 게이가 하는 건데. 좋으니까 하겠지. 은한이 끊임없이 자신을 타일렀다.

“손가락 넣을 거야.”

“……어.”

젤이 미적지근하게 달아올랐을 때, 한결이 경고하듯 말했다. 은한이 조금 더 꽉 입술을 깨물었다. 주름 위로 뭉툭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한결의 손가락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주름을 해치고 삽입됐다.

아프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방울아 아파?”

“아……니. 그냥 좀 이상해.”

한결이 손가락을 꿈틀대며 부지런하게 은한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툭 불거진 꼬리뼈에 뽀뽀를 해 주기도 했다.

“하나 더 넣어도 돼?”

“어어…….”

은한이 후우, 후우. 호흡을 골랐다. 곧 한결의 중지도 주름을 문질러 댔다. 고작 손가락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인데, 느껴지는 압박은 훨씬 컸다. 팽팽하게 벌어지는 구멍에 은한이 큽, 숨을 먹었다.

굵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다. 그걸 뒷구멍으로 받아 내려니 딱 죽을 맛이었다. 끝끝내 한결의 손가락 두 개를 전부 집어삼킨 은한이 베개에 볼을 마구 비비적거렸다.

“흐으…….”

“아파?”

“아……니.”

솔직히 존나 아파. 개 아파. 그리 칭얼거리고 싶었다. 허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모든 걸 때려치우고 플라토닉 러브를 주장할 한결을 알아 그러지 못했다.

“그럼 하나 더 넣어도,”

“아직. 아직. 조금만…….”

손가락도 이리 버거운데 분홍 소시지는 어떻게 받아 낸다. 참담한 미래를 가늠한 은한이 흥, 콧김을 내뿜었다. 한결이 그의 허락을 기다리며 또 쪽쪽 엉덩이에 키스했다.

“네 여기 엄청 좁다. 그리고 뜨거워.”

“나도…… 알아.”

네 손가락 마디마디에 진 주름까지 느껴질 정도라고. 거기다 후끈거리는 젤이라니. 뭐 하나 익숙한 감각이 없다. 은한은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좀…… 움직여 봐.”

“알았어.”

한결이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곤 슥슥, 손가락을 잘게 넣었다 뺐다. 손가락을 따라 주름이 밀려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 한결이 그것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은한이 엎드려 있어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부끄럽다고 발로 차였을지도 몰랐다.

손가락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은한의 구멍은 확실히 부드럽게 이완됐다. 이제 손가락이 완전히 빠져나와도 구멍이 빠끔, 열려 있을 정도였다. 마른 입술을 핥은 한결이 본격적으로 은한의 구멍을 헤집기 시작했다.

“으응…… 흣…….”

은한의 목소리가 묘하게 색스러워졌다. 낮고, 숨소리가 한껏 묻은 신음. 한결이 질척해진 은한의 뒤를 열심히 문질렀다.

“아흑!”

그러다 무언갈 꾹, 짓누르고 지나갔는데 은한이 확, 엉덩이를 당겼다. 구멍에서 빠져나온 손가락에 휑한 공기가 스쳤다.

“방울아……?”

“거, 거기 이상해.”

은한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결을 뒤돌아봤다. 발갛게 익은 눈가가 뒷덜미를 짜릿하게 만든다. 한결이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다시 해 볼게.”

“이상한데…….”

한결의 손이 단단히 은한의 골반을 잡아챘다. 그 후 다시 구멍을 파고들었다. 녹진하게 풀린 구멍은 이제 손가락 두 개쯤은 쉽게 받아 물었다.

“으응!”

한결은 조금 전 건드렸던 부분을 금방 찾아냈다. 전립선.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날 수 없다는 쾌락의 시작점. 은한의 허리가 들썩였다. 한결이 그를 관찰하며 끈적하게 내벽을 눌러 댔다.

“음, 하읏……. 응…….”

그렇게 얼마나 손가락을 움직였을까. 검지와 중지를 가위 모양으로 늘려도 은한은 아픈 기색을 내지 않았다. 배꼽까지 올라붙어 있는 작은 페니스만 봐도 고통에서 동떨어져 나온 걸 알 수 있었다.

한결이 나지막이 은한을 불렀다.

“방울아.”

“흐으, 응! 아……. 으읏.”

“나 넣고 싶어.”

“흐…… 버, 벌써?”

“여기 다 풀린 것 같은데. 아니야? 더 할까?”

한결의 손가락이 보란 듯 벌어졌다. 호흡하듯 개폐하는 구멍 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그 선연한 감각에 은한이 덜덜 허벅지를 떨었다. 정말 다 풀린 모양이다.

은한이 코를 훌쩍이며 한결을 올려다봤다.

“넣는 건 얼굴 보고 하면 안 돼?”

“왜 안 돼.”

한결이 그를 추슬러 안고 슥슥,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가늘게 경련하던 마른 몸뚱이가 잔잔히 가라앉는다. 은한이 먼저 다리를 벌렸다. 쪽, 그의 콧잔등에 키스한 한결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어색한 손놀림으로 콘돔을 꼈다.

“천천히 해야 된다. 어?”

“알았어.”

다시 보는 분홍 소시지는 여전히 두렵고, 놀랍고, 무섭다. 은한이 푸후- 벅찬 숨을 내쉬었다.

콘돔을 다 씌운 한결이 곧추선 자신의 페니스를 쥐었다. 그가 선서라도 하는 듯 말했다.

“은한아 좋아해.”

“……알아.”

은한이 잔잔한 애정을 함빡 머금은 눈동자로 한결을 응시했다. 말도 못 하게 무서운데, 저 멀끔한 낯을 보고 있으면 조금 안심이 된다. 손을 들어 올려 잘생긴 턱선을 쓰다듬었다. 한결이 고개를 꺾어 손바닥에 키스를 해 왔다.

곧 거대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뒤로 맞물렸다. 은한은 버석하게 굳는 사지를 숨기지 못했다. 주름이 천천히 벌어진다.

“아…… 흑…….”

“하아, 은한아…….”

은한이 한결의 팔뚝을 잔뜩 힘주어 쥐었다. 쪼그마한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덩달아 열에 물들어 있던 얼굴도 창백해졌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아파…….

은한은 속으로 고통을 삼켜 냈다. 한결의 행동에 제약을 주고 싶지 않았다. 설마 죽기야 하겠나. 이 정도는 참아 낼 수 있을 테다. 아까 상기했다시피, 세상의 많은 게이가 하는 거니까.

은한이 억세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러지 않고는 당장 그만두자고 한결을 조를 듯했다. 그에 한결이 삽입을 멈췄다.

“왜…… 나 괜찮……아. 계속해.”

“…….”

한결의 짙은 시선이 떨어져 내린다. 은한이 그 시선을 마주하며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한결이 후,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그가 검지를 은한의 입가로 가져갔다.

“입술 말고, 이거 씹어.”

“…….”

은한이 군말 않고 그것을 물었다. 다시 한결의 것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안 씹으려고 했는데, 정신 차리니 한결의 손가락에 온통 잇자국을 내 놓고 있었다.

“후우…….”

“응, 흐읏…….”

길었던 삽입이 끝났다. 엉덩이 아래로 까슬한 한결의 음모가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뱃속에 가득 찬 페니스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꽉 씹어 문 한결의 손가락을 놓아주지 못했다.

한결은 부지런히 반대 손을 놀렸다. 은한의 머리칼을 쓰다듬기도 하고, 축 늘어진 페니스를 흔들어 주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은한이 입안에 있던 한결의 검지를 빼내고 그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움직여……도 돼.”

“진짜?”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한결이 천천히 허리를 물렸다. 이렇게 멍하니 있어 봐야 은한에게도, 저에게도 좋지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온 거, 얼른 끝내는 게 좋았다.

커다란 살덩이를 따라 밀려나는 주름이 쓰렸다. 그런데도 은한은 허리를 들며 한결의 움직임을 도왔다.

미간을 잔뜩 구긴 한결이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까 손으로 만졌던 부분을 찾고 있는 거였다. 다행히 눈치 있는 귀두가 볼록 솟아있는 전립선을 훅, 긁어냈다.

“아흣!”

은한이 휙, 고개를 뒤로 꺾었다. 손가락으로 만졌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전립선 전체를 뭉개는 듯한 느낌. 그 한 번의 자극으로 허벅지가 벌벌벌 떨렸다.

헐떡헐떡 넘어가는 숨에 한결이 확인하듯 그 부분을 한 번 더 문질렀다. 역시나 은한의 입에서 쾌락에 절여진 달콤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방울아.”

“응…… 으응…….”

“이제 안 아프지?”

은한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의 입꼬리가 씨익, 위로 치솟았다. 드디어, 드디어 제대로 된 섹스의 시작인 거다.

두 손으로 단단히 은한의 골반을 틀어쥔 한결이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두 사람의 몸이 거칠게 흔들린다. 꺼릴 것이 없어진 한결의 두툼한 페니스가 콱콱 전립선을 후벼 팠다.

“아흥, 으…… 흣!”

“읏, 후…… 은한아.”

“아…… 어, 어떡. 하응! 읏!”

은한의 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을 휘저었다. 한결이 그것을 낚아다 제 목 뒤로 둘렀다. 그 덕에 두 사람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파고드는 페니스가 깊어진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아흐!”

눈앞이 번쩍번쩍, 난리가 났다. 분명 한결의 페니스가 문지르는 건 배꼽 저 아래인데 온몸이 저렸다. 구멍이 홧홧하다. 모든 감각이 한결이 드나드는 곳에만 집중됐다.

싸늘할 정도로 추운 계절에, 둘에게만 여름이 내렸다. 어찌나 더운지 속눈썹 끝에 대롱대롱 땀이 매달릴 정도였다.

“하응, 아…… 좋아…… 흣, 거기…….”

한결을 바짝 끌어당긴 은한이 애타게 쾌락을 토로했다. 가쁜 숨소리를 비집는 신음에 한결이 으득 어금니를 씹었다. 온몸을 은한의 안에 욱여넣겠다는 듯 세차게 허리를 움직여 댔다. 철썩철썩. 살갗이 붙었다 떨어지면서 음란한 소리가 났다.

은한이 얼룩진 눈으로 한결을 바라봤다. 어스름한 빛이 한결의 얼굴과 섞이며 산란했다.

아까는 그리 무섭게 느껴지던 한결의 것이 지금은 사랑스러운 무언가로 바뀌었다. 발가락이 곱아들 정도로 쾌감을 주는 무언가.

“아, 은한아…….”

“으응, 읏, 하윽!”

오감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민감해졌다. 쾌감에 살풋 구겨진 한결의 눈살이, 그의 숨소리가, 또 체취가. 간헐적으로 부딪히는 입술이, 그의 단단한 아랫배에 비벼지는 페니스와 그를 받아 내는 뒤가 정신을 통째로 앗아 갔다.

“후으, 아, 너무 좋……아, 은한아.”

한결이 차마 넘쳐나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가만히 눈만 마주하고 있어도 꼬리뼈가 간질간질할 만큼 좋은데, 온몸을 부딪치다 못해 그의 안에 제가 들어가 있다니. 까무러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 도…… 흐읏, 응…….”

나도, 좋아. 흐릿하게 미소 지은 은한이 대답했다. 한결이 쪽쪽, 키스를 해 왔다. 종종 그의 턱에 매달린 땀방울이 가슴팍 위로 떨어졌는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다.

한결의 페니스가 힘차게 전립선을 내리 긁는 순간, 아랫배가 지끈거리며 소변 욕구가 올라왔다.

아, 안 돼. 아쉽다. 너무 아쉬워. 이미 쾌감에 영혼을 팔아넘긴 은한이 사정 욕구를 참아 냈다. 그러다 보니 절로 뒤를 꼬옥 조이게 됐다. 한결이 윽,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조이면, 후우…… 안 돼.”

싸기 싫단 말이야. 한결이 한껏 입을 벌려 은한의 귓불을 빨아 먹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은한이 확 어깨를 좁혔다.

“아니면, 응! 내가 쌀 것 같,”

하지만 이미 늦었을 때였다. 한껏 조인 뒤를 북, 긁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모든 근육이 통제를 벗어났다. 뇌가 뭉텅뭉텅 녹아내린다. 의지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픽- 정액을 토해 냈다. 축축해진 아랫배에 한결이 낮게 웃었다.

“쌌어?”

“아…… 씨……발. 너 때문이잖아.”

“칭찬이지?”

큭큭거린 한결이 부드럽게 은한의 페니스를 다시 감싸 쥐었다. 열이 잔뜩 오른 손바닥이 뜨거울 정도다. 은한이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너 싸고 끝내.”

“싫어.”

“어떻게 또 세워. 이제 안 설 걸?”

아까 한결과 페니스를 마주 잡고 한 발 빼냈으니 벌써 두 번째다. 은한은 홀로 자위를 할 때도 연달아 두 번을 넘긴 적이 없었다. 한결이 씨익, 입술 끝을 뒤틀었다. 그리고 콱, 이제는 익숙한 은한의 전립선을 짓뭉갰다.

“아흑!”

소스라치게 놀란 은한이 한결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런다고 밀릴 덩치가 아니었지만. 한결의 어깨에 걸쳐진 다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너, 이 미친……!”

“다시 섰는데?”

한결이 칭찬하듯 은한의 귀두를 엄지로 슥슥 문질렀다. 은한이 경악 서린 눈동자로 제 페니스를 쳐다봤다. 그의 말대로 빼꼼히 얼굴을 쳐든 게 분명 발기해 있다.

“자, 그럼.”

한결은 가뿐히 은한을 뒤집었다. 순식간에 뒤집힌 시야에 은한이 멍청히 눈을 깜박였다. 뒤로 축축하고 끈적한 젤이 한가득 쏟아진다. 곧 두툼한 페니스가 밀려왔다. 아흐……. 은한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기, 깊어…….”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한결의 골반에 엉덩이가 잔뜩 짓눌렸다. 그만큼 그가 깊이 들어왔단 말이다. 아랫배를 만지면 들어와 있는 그의 페니스가 느껴질지도 몰랐다. 혹여 정말 만져질까 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찰팍찰팍. 질퍽이는 젤이 야릇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 소리가 뒤통수로 울려 퍼지니 등줄기가 오싹한 게 식은땀이 났다. 쑥쑥 들어왔다 나가는 한결의 페니스가 방금 사정했다는 것을 잊게 했다.

“흐…… 아응, 읏!”

“하아, 하아…….”

그 후, 한결의 허리 짓은 은한이 한 번 더 탁액을 토해 낸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몸을 뒤집어 앞을 보고, 또 옆으로, 또는 그의 위에서. 야동에서 봤던 모든 체위를 다 해 봤다. 침대 귀퉁이와 아래에 한결이 대충 묶어다 버린 콘돔이 즐비했다.

은한이 귀 옆에 중심을 잡고 선 한결의 팔을 움켜쥐었다. 우둘두둘 핏줄이 잔뜩 선 것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아흡, 음…… 아, 그……만, 아…….”

그가 원하는 만큼 받아 주고 싶지만, 진작 바닥을 친 체력이다. 설마 섹스하다 죽을까. 복상사가 쉬운 것도 아니고. 복상사까지는 아니지만, 어찌 됐든 병원 신세는 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탈수증이나, 과로 같은 병명으로.

지금이 몇 시일까. 이미 해가 한 번 떴다가 진 건 아닐까. 열락에 아무렇게나 녹아 버린 뇌가 사고를 거부했다.

목이 말랐다. 바짝 마른 목구멍이 깔끄럽기까지 했다.

“그만, 그만…… 어흑, 백한결 그만…….”

“후우, 방울아 조금만, 더 하자.”

씨발아. 네 조금은 조금이 아니라고. 은한이 그를 벗어나 보려 버둥버둥, 발을 휘저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한결의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쪽쪽쪽. 그의 입술이 복사뼈에서 종아리까지 내려온다.

키스하느라 잠시 멈춘 한결의 허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은한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눈꺼풀을 움직일 힘도 없거늘, 오르가슴은 끝을 모르고 쌓이고 또 쌓였다. 그건 고문과 같았다.

“방울아?”

“씹새…… 흡, 나가 뒤져……. 너 진짜…….”

한결이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투명한 눈물방울이 투둑투둑, 그의 볼을 타고 내려온다. 쿠쿵. 거대한 운석이 지구와 충돌해 박살났다. 아. 내가 은한이를 울렸어. 해일 같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쉼 없이 발기하던 아래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목말라.

훌쩍임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헐레벌떡 냉장고로 가 물을 떠 왔다. 은한이 물을 마시는 동안 흘끔흘끔 눈치를 보며 진심 어린 사과도 전했다. 그러나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은한의 마음이 아니라 제 마음이.

한결이 짜증스레 마른세수했다. 정말 은한의 말대로 나가 뒤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좆 흔들고 싸 내는 게 뭐라고 그렇게 정신을 놨었나.

한결의 손이 허공에 쳐들렸다. 그 손은 한결의 뺨으로 매섭게 내려앉았다. 반성의 매질이었다.

철썩, 집을 울릴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은한이 툭, 물 컵을 떨어트렸다. 한결이 헙, 숨을 들이켜며 간신히 물 컵을 받아 냈다.

“야!”

“어……?”

“왜 때려!”

“반성 중인데……. 진짜 미안. 내가 생각보다 엄청 많이 참았나 봐.”

“그래도 그렇지 왜 때려!”

한결의 볼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은한이 더듬더듬 볼을 쓰다듬었다. 후끈한 마찰열이 느껴질 정도다. 뭐 그리 큰 상처라고 마음이 아팠다.

“이씨…… 빨개졌어…….”

“걱정하는 거야?”

한결이 흐흐흐, 멍청하게 웃음을 흘렸다. 울상이던 은한의 낯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그의 손이 반대쪽 뺨을 뻑 후려갈겼다. 무려 주먹이었다.

“아!”

“아니. 걱정 안 했는데. 니 새끼는 좀 맞아야 돼.”

벌겋게 올라오는 살갗에 놀라긴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찌나 괘씸한지. 섹스하다 죽을 각오는 해 봤어도 울 거라곤 손톱만큼도 예상치 못했다. 전부 백한결 때문이다.

한결의 양쪽 볼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꼭 홍조가 올라온 홍당무 같았다. 잘생긴 홍당무.

볼을 벅벅 문지른 한결이 빈 잔에 다시 물을 채워 왔다. 은한이 홀짝홀짝 물을 마시는 동안 온몸에 튄 정액을 대충 닦아 냈다. 오래전에 싼 정액은 이미 굳어 닦이질 않았다.

아오. 짐승. 진짜 나가 뒈지든가 해야지. 일단 은한을 재우고, 어떻게 나가 뒈질지 계획을 세워야 했다.

한결이 눈물에 달아오른 은한의 눈가를 아스라이 문질렀다.

“같이 씻을까?”

“얼씨구?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니야. 반성했어. 진짜로 씻기만 할 거야.”

두 손으로 은한의 볼을 쥔 한결이 쪼옥, 쪽. 입술을 눌렀다 뗐다. 은한이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한결이 후다닥 달려가 욕실 문을 열어 줬다.

참으로 탈도 말도, 그리고 눈물도 많던 두 사람의 스무 살, 첫 섹스였다.

“구멍 다 부었잖아, 개새야.”

“호 해 줄까?”

“꺼져! 지금 당장 집으로 꺼져 버려!”

한결이 입술을 가로로 벌리며 웃었다. 은한이 콱 그의 어깨를 깨물었는데도 만개한 웃음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어렴풋이 해가 뜨고 있었다. 섹스를 밤새 하다니. 첫 경험으로는 너무 성대한 거 아니냐. 한결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은한이 생각했다.

은한이 침대와 벽 사이에 간당간당하니 끼인 콘돔을 집어 들었다. 아까 한결이 치운다고 치웠는데,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꼭지가 묶여 있는 콘돔에는 한결의 하얀 정액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이걸 대체 몇 개나……. 짐승 같은 새끼……. 아니 짐승도 이 새끼보다는…….

은한이 휙, 쓰레기통으로 콘돔을 던졌다. 날아간 콘돔이 쏘옥, 정체를 감췄다.

“방울아.”

“엉.”

은한을 추슬러 안은 한결이 작은 몸 위로 꼼꼼히 이불을 덮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공부 어떻게 했는지 물어봐도 돼?”

만년 전교 3등이 전교 1등에게 할 것 같은 질문이었다.

“무슨 공부? 아…… 그 공부?”

은한이 잠시 과거를 되짚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늦은 밤이 되어 한결이 떠나면 후다닥 컴퓨터를 켰었다. 서치 엔진을 켜 두고 별의별 걸 다 검색했었지. 게이, 섹스, 게이 섹스, 호모, 호모 섹스. 남자끼리 처음 할 때, 남자끼리 섹스. 뭐 그런 거. 온갖 검색을 하다 자기 전, 검색 목록과 방문 기록을 지울 때면 딱 죽고 싶었다.

은한이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만 빼꼼, 내놨다.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인데 괜히 쑥스러웠다.

“어…… 게이 커뮤니티 같은 게 있더라고? 거기 형들 존나 친절해. 하나 물었는데 댓글 서른네 개 달렸어. 근데 뭐 제일 좋았던 건…… 동영상이지.”

“…….”

“몰랐는데 야동 사이트에 게이 카테고리가 따로 있더라? 거기서 추천 순으로 다섯 갠가 봤어.”

“그랬어?”

한결이 게이 동영상을 보며 새파래졌다, 빨개지기를 반복하는 은한을 상상하며 웃었다. 아. 그걸 혼자 보고 그러냐. 나중에 같이 보자고 하면 또 뺨 맞으려나.

그런 한결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한은 아래위로 입술을 움직이며 열심히 말을 이어 갔다. 섹스를 목적지로 둔 나름의 험난한 여정이었다.

“근데 서양 야동 보니까, 동양인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사이즈가 거기에 들어가긴 하더라고? 밑에 깔린 사람이 막 좋다고 more, more…… 하는데 자신감이 확 생겼지.”

“……됐어. 그만 말해.”

“왜. 들어 봐. 그래서 원래는 혼자 해 보려고 그거, 젤 산 거야. 커뮤니티 형들이 혼자 해 보는 것도 긴장을 풀어 준댔어. 젤이랑 콘돔도 형들이 추천해 준 거거든. 막 딸기향 초코향 그렇게 냄새나는 건 화학약품 들어간 거라서 안 좋대.”

“…….”

“댓글 단 형 중의 한 명은 만나서 가르쳐 준다고까지 했어.”

“뭐?!”

“완전 착하지? 근데 하태준 신경 쓰느라 만날 정신이 없었어.”

경악에 휩싸인 한결을 눈치채지 못한 은한이 비실비실 웃었다. 한결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저와 섹스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공부했다니 참, 감사한 일이긴 한데……. 그냥 나한테 물어보지 왜 일면식도 없는 새끼들한테……. 미친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만나서 알려 주겠다는 미친놈은 얼굴도 연락처도 모르지만, 영 좋지 않은 인간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잘했어. 잘했는데…… 다음부터는 그런데 글 올리지 마.”

“왜?”

“어…… 질투 나서 그래.”

입을 삐죽인 한결이 꽉, 온몸으로 은한을 끌어안았다. 그걸 그저 애정 공세로 판단한 은한이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알았어. 어차피 이제 물어볼 것도 없어. 나 완전 준비성 철저하지 않냐?”

“어. 완-전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허헝…….”

“이제 자.”

은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정말 길었던 하루다. 태준을 만났던 것부터 섹스까지. 그걸 상기하자 순식간에 몸이 뭉근하게 녹아내렸다. 내일 오후까지 늘어지게 잘 수 있을 듯했다.

관자놀이에 한결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은한이 그 키스에 화답하듯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백한결.”

“……메리 크리스마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취를 느끼며 동시에 눈을 감았다.

스무 살의 크리스마스는 비록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었지만, 친구와 연인 덕에 행복할 만큼 사랑으로 충만한 날이었다.

* * *

“아우우우!”

텅 빈 집안. 소파에 널브러진 한결이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오랜만에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는 날이다. 평소라면 컴퓨터도 켜 두고, TV도 켜 두고.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혼자 있는 줄 모르며 보냈을 테지만 오늘은 영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너무해…….”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핸드폰 때문이었다. 꾸욱, 홈 버튼을 짓눌렀다. 켜진 화면엔 여전히 이렇다 할 연락이 없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연락을 안 하냐고!”

한결이 팍 핸드폰을 내던졌다. 생각보다 크게 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신줏단지 모시듯 핸드폰을 주워 왔다.

고장 나면 안 돼……. 고장 나면 내 방울이랑 연락할 방법이 없단 말이야…….

은한은 연말을 맞아 본가에 내려갔다. 원래는 종강하자마자 내려가려 했는데, 부모님이 해외여행을 가셔서 미루고 있다가 늦게 내려간 거였다. 학기 내내 얼굴 한 번 못 봤던 부모님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다 1월이 훌쩍 넘어 돌아오겠단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억장이 무너졌지만, 티를 내진 못했다.

부모님을 뵌다는데.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절 데리고 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제 사랑스러운 방울이가 얼른 돌아와서 웃어 주길 기다릴 수밖에.

뒹구르르, 구르다 바닥에 떨어졌다. 커다란 덩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소파에서 뒹군 탓이다. 묵직한 통각이 어깻죽지를 타고 올라왔는데 신음 하나 뱉지 않았다. 대신 한숨이 흘렀다.

“후우…….”

핸드폰을 켰다, 껐다를 수십 번째 반복하다 결국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방울아 뭐해?]

방울이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게 참 슬펐다. 학기 중에는 무슨 수업을 듣고 있겠구나. 그 교수님 수업 엄청 못 한다고 싫어하는데. 졸고 있으려나. 그 정도까지 유추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은한이 잠을 자는지, 밥을 먹는지 하다못해 살아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답장은 생각보다 금방 왔다.

[방울이♥: 엄마랑 장 보러 옴.]

[맛있는 거 사러?]

어머님이랑 있었구나. 뭐 먹으려고 그러나. 이왕 내려간 거 왕창 먹고 통통하게 살 쪄 왔으면 좋겠다. 그럼 또 잡아먹…… 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또 진동이 울렸다. 한결이 온 얼굴을 휘며 핸드폰을 봤다.

[방울이♥: ㅇㅇ]

“…….”

우리 방울이. 답장도 참, 단조롭게 보내지. 예쁘게. 한결이 끙, 앓으며 바닥에다 볼을 비비적거렸다. 뭐라고 답을 보내야 해. 보낼 말이 없어. 이미 진즉 바닥을 친 제 언어 능력이 슬펐다.

한결이 은한과의 톡방을 슥슥 위로 올려봤다.

12월 28일

[자?]

12월 29일

[방울이♥: ㅇㅇ 일찍 잤어. 나 씻고 옴.]

[오늘은 뭐해?]

14시간 뒤,

[방울이♥: 친구ㄷ이랑 술 ㅁ마ㅗ셨음.]

[이 시간까지?]

12월 30일

[방울이♥: 톡 못 보고 잤다.]

[술 많이 마셨나 봐? 숙취는?]

[방울이♥: 엄마가 콩나물국 해줌. 존맛.]

[나도 먹어보고 싶다.]

[방울이♥: 요즘 중국집에서 콩나물국도 한대. 배달 ㄱㄱ]

그리고 오늘, 12월 31일. 근 사흘과 전혀 다르지 않은 메시지의 반복이었다. 이거 사귀는 거 맞나. 보통 핸드폰을 손에서 안 떼지 않나. 우리 아직 삼 개월도 안 됐는데. 한창 좋을 때인데. 왜 우리 방울이는 30년 함께 산 부부처럼 굴까.

한결이 푸우욱, 내장까지 쏟아 낼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귀고 나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이 없다. 강의 시간 말고는 주야장천 붙어 있었고, 종강 후에는 아예 딱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이게 보통의 연인 관계에서 흔한 일인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웠다.

한결은 그렇게 해가 떨어질 때까지 거실 바닥에서 시간을 보냈다. 태준과 진우가 방울이도 없는데 피시방에 나오라며 노래를 불렀지만 총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연말 데이트를 나갔다 오신 부모님이 저녁으로 뭘 먹고 싶으냐고 물어도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엄마가 코트를 벗으며 쯧쯧 혀를 찼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바닥에 철썩 들러붙어 멍 때리고 있는 아들이 한심해서.

“요즘 연애하는 것 같더니 차였니?”

“억…… 엄마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근데 왜 그러고 있어? 우리 아들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잘생겼는데. 차였어? 얼굴만 써먹어도 2년은 만났겠다. 무슨 짓을 했기에 벌써 차여. 안 그래요, 여보?”

“2년 되기 전에 결혼해라. 얼굴은 딱 2년이야. 아니었으면 나 너희 엄마랑 이렇게 못 살고 있어.”

“맞아. 너희 아빠 얼굴 말고 괜찮은 게 없잖니.”

“그 말, 잘생겼다는 말로 들리네.”

“호호호. 당신 요즘 책 좀 읽나 봐요?”

어두컴컴한 한결과 달리 부모님은 늘 그렇듯 고소한 깨를 솥째로 볶으셨다. 그들이 저녁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고도 한결은 여전히 바닥 신세였다.

진짜…… 엄마 말대로 이러다 차이는 거 아냐? 방울이가 벌써 나 질렸나.

나만 이렇게 애타고 보고 싶고 그런 건가.

제가 먼저 시작한 마음이고, 그래서 제 마음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은한에게 마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쁘게도, 근래의 은한은 작게나마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드러내 줬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나 보다. 인간이란 게 이리도 탐욕스럽다.

“미쳤지. 미쳤어.”

나가 뒤지자. 한결이 바닥에다 쿵, 이마를 찧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대구 내려가면 놀아 줄 거냐고 물어볼까. 싫어하면 어쩌지. 찌질하고 할 일 없는 남자 친구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자괴감과 우울함이 아그작 아그작 한결을 씹어 먹어 갔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제 것인 게 없었다. 이대로 바닥에 파묻혀 생을 마감할 듯했다.

만약 정말 은한의 마음이 떠난 거면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때,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우우웅, 진동했다. 한결이 무심하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또 태준이나 진우의 메시지일 것이라, 넘겨짚었다.

하지만 발신자는 은한이었다. 활자 대신 사진이 먼저 떴다. 판다 그림 팩을 붙인 은한이 발랄하게 브이를 한 셀카였다. 무려, 셀카.

[방울이♥: 누나가 해줌. 겁나 웃기지.]

“어흡!”

벌떡 일어난 한결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라도 지를 듯해서. 셀카라니! 은한은 셀카를 잘 찍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도, 종종 올리는 SNS 사진도 죄다 타인이 도촬하듯 찍어 준 게 다였다.

그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왜 그러나, 싶어 넌지시 말을 건넸다가 ‘지도 안 찍으면서?’ 하는 비난을 받았다.

한결은 반쯤 넋을 놓은 채 핸드폰에 들어갈 듯 코를 박았다. 쭈우욱, 확대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코입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내 방울이. 거기서도 잘 먹고 잘 사는구나. 다행이다. 전장에 남편을 빼앗긴 아내처럼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찍어 눌렀다. 그러고 있으니 또 한 번 우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방울이♥: 사진]

설레는 두 글자에 한결이 허겁지겁 다시 채팅방으로 돌아갔다.

“으하…….”

[방울이♥: 누나가 비싼 거라는데 개좋음.]

다음 셀카는 팩을 떼고 찍은 것이었다. 방금 씻고 나온 건지 촉촉이 젖은 앞머리에, 세상 모든 빛을 삼킨 듯 반질반질한 피부, 익살맞게 눈을 휘며 웃고 있는 모습.

저장. 저장. 저장. 한결은 같은 사진을 다섯 번이나 저장했다. 혹시나 핸드폰이 고장 날까, 메일로 전송시켜 놓기까지 했다. 물론 바로 배경화면을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울이♥: 왜 읽고 씹냐.]

[방울이♥: 너도 셀카 하나 보내. 얼굴 까먹겠다.]

메시지를 쓸데없이 꼼꼼히 읽은 한결이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이거 지금 보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거지. 아니라도 그렇게 믿으련다.

한결은 온갖 소리를 내며 환호를 지르고 싶었다. 십 분 전만 해도 지옥의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지금은 천국으로 모자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한 듯했다. 저에게 은한이 이렇게나 대단한 존재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방울이♥: 왜 쳐 웃어. 웃기냐?]

[아니 너무 귀여워서. 방울아 보고 싶어.]

[방울이♥: 빨리 셀카나 보내라고.]

[알았어.]

한결이 허겁지겁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대충 걸치고 있던 후드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옷장이란 옷장 문을 죄다 열어 두고 고심해서 옷을 골랐다. 집에 있지만, 후줄근하지는 않은 모습으로. 그렇다고 너무 꾸민 티가 나서는 안 된다.

한참 옷장을 노려보다 네이비색 맨투맨을 집었다. 안에 하얀 반팔을 받쳐 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목선 사이로 하얀 반팔이 언뜻 보일 정도로. 셀카는 가슴 선까지 다 나오니까.

그 후엔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조명이 좋은 곳을 찾아다녔다. 아빠가 저런 새끼가 내 아들이라니,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그 어떠한 것도 한결을 막을 순 없었다.

한결은 현관 자동 센서 앞에서 셀카를 수십 장이나 찍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괜찮다고 생각되는 걸 은한에게 전송했다. 대학 합격 발표를 확인할 때만큼 떨리는 순간이었다.

답장은 금방 왔다.

[방울이♥: 시밬ㅋㅋㅋㅋ 표정 존나 이상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장이 철렁였다. 한결의 눈썹이 뚝 아래로 추락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상해? 셀카를 잘 안 찍어서 그래. 다시 찍을까?]

[방울이♥: 됐어. 짱나게 그래도 잘생겼네.]

[진짜?]

[방울이♥: 보고 싶다 백한결.]

한결은 흡 숨까지 멈춘 채 그 채팅창을 캡쳐했다. 평생 보관할 거야.

[나도.]

[진짜 너무 보고 싶어.]

[방울이♥: 누나들이 맥주 마시러 가재. ㅃㅃ]

한결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이제 이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 많이 마시지 말라며 답장을 보낸 한결이 산뜻한 걸음으로 부엌에 들어섰다.

부모님이 작게 웃었다. 드디어 멀쩡하게 돌아온 아들이다. 저 나이에 연애하면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도 생사가 왔다 갔다 한다. 그들 역시 겪었던 과거라 충분히 이해했다.

팔을 걷어붙인 한결이 아버지가 손질 중인 콩나물을 집으려 할 때였다. 핸드폰이 울린 것은. 또 은한인가, 싶어 헐레벌떡 핸드폰을 확인했다.

[방울이♥: 맞다. 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진짜 방울이네. 한결의 입술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그래.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었지. 그가 분주하게 엄지를 놀렸다.

[나 복은 됐고. 방울이 사랑만 많이 받으면 되는데.]

답은 몇 초 지나지 않아 금세 왔다.

[방울이♥: 지랄.]

어떤 표정으로 답을 보냈을지 훤하다. 식탁에 이마를 파묻은 한결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그래, 이게 연애지. 왜 남들이 그렇게 환장하는지 온몸으로 경험하는 바이다.

“좋냐?”

“엉. 좋아.”

아버지의 물음에 한결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행복이 가득했다.

방울이가 좋아 죽겠어, 아빠.

* * *

그 후, 1월 1일이 지나고 1월 3일쯤 됐을 때, 한결은 결국 은한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많아 봐야 고작 다섯 번 주고받는 메시지다. 곧 은한에 대한 목마름으로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니 갈증은 더했다.

-엉, 왜.

은한은 늘 그렇듯 단조롭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라는 흔한 말도 하지 않는다. 소파에 누워 있다시피 하던 한결이 벌떡 일어났다.

“방울아.”

-엉.

“뭐해?”

-누나가 쇼핑 가재서 따라가려고. 우리 누나 돈 존나 많이 벌거든. 가서 싸바싸바하고 옷 얻어 입게.

이렇게나 종알종알 말이 많은 은한이다. 이상하게도 메시지만 보내면 그리 차갑고 무뚝뚝하며 무심해졌다. 한결이 그래? 그렇구나…….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을 꾸역꾸역 덧붙였다.

-너는 뭐하는데?

“나는…… TV 봐.”

-뭐 봐?

“어, 그냥…….”

-오늘 저녁에 과외 있잖아.

“어어 그렇지.”

감사하게 제 스케줄은 또 외우고 있다. 한결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은한은 절 좋아하고 있는 게 맞다. 그걸 잘 알고 있는데. 애정을 확인하지 못해 안달 난 애새끼가 된 기분이다.

-뭐야. 전화 걸어 놓고 대꾸가 왜 이래?

묘한 낌새를 눈치챈 은한의 목소리가 확 튀어 올랐다. 한결이 탁탁탁 발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러다 결심한 듯 꾹 핸드폰을 세게 쥐었다.

“방울아. 나 부탁하고 싶은 거 있어.”

-부탁? 뭔데?

“연락 좀 자주 해 주라.”

-……어?

“네가 연락을 많이 안 해서, 보고 싶고 불안해.”

-…….

“혼자 좋아하고 애타는 기분이야.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는데도 그래.”

한번 입을 여니 쉬웠다. 줄줄 쏟아지는 한탄에 은한은 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혹여 귀찮으니까 끊자. 뭘 그런 거 가지고, 하는 답이 들려올까 무서웠지만,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싶어.”

-…….

“귀찮, 으면 어쩔 수 없는데……. 그래도 그냥……, 그렇다고.”

-…….

“유치하지?”

은한은 여전히 답이 없다. 고요한 수화기 건너편에 한결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라고 할까. 낮술 했다고. 또 글라스로 소주 처먹었다고. 미친 소리라고. 그렇게 말해야 하나.

1초 동안 수십 가지의 생각이 머리통에 휘몰아쳤다. 진심으로 전화한 걸 후회했다. 나름 성인이고 철이 들 만큼 들었다 생각했는데, 은한의 앞에선 자꾸 무너지고 어려졌다.

-한결아.

“어?”

-나 첫 연앤 거 알지.

“어어. 나도 첫 연애야.”

-그…… 어…… 미안해. 연락 기다리는 줄 몰랐어.

“……그랬어?”

-핸드폰을 잘 안 만졌거든. 가족들이랑 노느라고 정신없었어. 변명 같겠지만, 어…… 무튼 미안하다.

그래도 절대 너 안 좋아하고 그런 거 아니야. 나도 자기 전에 네 생각해. 아침에 눈 떠서도 생각하고. 근데 연락할 생각은 못 했어. 은한은 조곤조곤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한결은 거실에 우두커니 선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몰랐구나. 안심이 됐다. 귀찮아서도, 애정이 줄어서도 아니라니. 그걸로 다 괜찮았다.

-이제 연락 자주 할게.

“고마워.”

-나야말로. 앞으로도 말 해 줘라. 나는 그런 거 진짜 하나도 몰라.

-강은한! 빨리 나와!

-어어. 잠깐만!

멀리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쇼핑을 가기로 했다는 누나인 듯했다. 한결이 어느새 솟아오른 광대를 벅벅 문질렀다.

“누나 기다리시네. 가 봐.”

-……연락 자주 할게.

“알았어. 얼른 가 봐.”

응. 끊는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한결이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남자 앵커가 상투적인 표정으로 무어라무어라 뉴스를 이야기하는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웃겼다. 파란 뉴스룸이 예쁜 담홍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중증이다.

우우웅. 진동이 울렸다.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또 한 번 우우웅, 진동한다.

[나 누나 차 탐.]

[출발했음.]

[신호 걸려서 멈춤.]

[누나가 미용실도 가재. 염색할 거래. 세 시간 동안 미용실에서 죽치고 있어야 할 듯.]

[신호등 바뀌어서 출발함.]

[백화점 별로 안 멀어서 금방 감.]

[대구는 서울보다 덜 추워. 살만함. 그래도 목도리하고 나와따.]

[어떤 차가 깜빡이 안 켜고 들어와서 누나가 쌍욕함. 이럴 땐 같이 욕해 줘야 해.]

[백화점 도착!]

[누나가 쇼핑할 때는 속이 든든해야 한다고 밥 먹재.]

[돈가스집 옴.]

[사진]

[우동 정식 시켰어. 맛있어 보이지.]

[존맛임.]

[누나가 밥 먹을 때 계속 핸드폰 만지면 우동이랑 내 뇌랑 바꿔버리겠대. 밥 다 먹고 연락할게.]

와르르 쏟아지는 메시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읽은 한결이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 이 사랑스러운 방울이를 어쩌지.

진짜 좋아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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