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방울이의 엔젤 (3/11)
  • 03. 방울이의 엔젤

    [모닝엔젤. 오늘은 런치엔젤 할 생각 없냐.]

    한참이나 고민하다 보낸 메시지다. 은한은 보내기를 눌러 놓고도 후회했다. 시발. 이 주 만에 보내는 메시지가 이런 거라니. 잘근잘근 엄지손톱을 씹었다. 유치원 때 사라진 버릇인데 십 년이 훌쩍 넘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다, 백한결 때문이다.

    시험이 끝나고 느슨하게 풀어진 강의실은 조용하면서도 번잡스러웠다. 맨 뒷줄에 자리 잡은 은한은 컴퓨터 대신 핸드폰만 바라봤다. 호기심 어린 미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해 줄 말이 없었다.

    별거 아니야, 하기엔 너무나, 너무나 별일이고.

    그렇다고 나 곧 연애할지도 몰라. 누구랑? 183cm 공대남이랑, 이라고 말해 줄 수도 없었다.

    “아 씨 왜 답장 안 해.”

    한결은 십 분이 넘어가도록 답이 없었다. 바쁜가. 아닌데. 얘 지금 미분적분학 수업 들을 시간인데. 이 시간이면 늘 지루하다고 공대남 셋의 카톡방이 쉬질 않았단 말이다.

    한결은 은한이 더 손톱을 씹다간 엄지에 피가 나겠다, 싶을 때쯤에야 답을 했다.

    [한결: 뭐 먹고 싶은데?]

    고작 한 줄 적어 보내면서 참, 오래도 걸렸다. 은한은 툴툴거리면서도 치솟는 광대를 참아 내지 못했다. 미현이 꾸욱, 광대를 눌러 왔는데도 미소를 사그라트리지 않았다.

    은한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핸드폰 위를 돌아다녔다.

    [피자.]

    장난이었다. 어제 정신을 놓을 정도로 술을 마신 한결을 조금 놀려 보자, 한 시답잖은 장난. 이번엔 답장이 빨리 왔다.

    [한결: 알았어. 수업 끝나고 미대 앞으로 갈게.]

    “미친놈.”

    알기는 뭐가 알아. 숙취 때문에 뒤지기 직전일 거면서. 피자 먹고 길바닥에다 고대로 피자 한 판 만들려고……. 은한이 쯧쯧, 혀를 찼다. 결국 참지 못한 미현이 빼꼼, 고개를 들이 밀어왔다.

    “누가? 누가 미친놈인데?”

    “아, 아니야.”

    은한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며 핸드폰을 숨겼다. 가늘게 떠지는 미현의 눈을 알았지만, 그녀에게 내어 줄 관심이 부족했다. 모두 한결에게 쏟아붓는 중이라.

    [피자 말고, 감자탕.]

    은한도 역시 어젯밤 진우와 꽤나 술을 많이 마셨다. 피자는 무슨. 매콤하고 짭짤한 감자탕이 딱이다.

    [한결: 그래.]

    단조로운 한결의 메시지를 확인한 은한이 후다닥 진우에게 연락했다.

    [오늘 점심 백한결이랑 먹을 거니까 태준이 데리고 알아서 사라져라.]

    답장은 핸드폰을 끄기도 전에 왔다.

    [진우: Copy that.]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은한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꾹, 쑤셔 넣고 마우스를 쥐었다. 포토샵 창에 비치는 제 얼굴이 뭐라 정의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

    뭔진 모르겠지만, 나쁘진 않았다.

    * * *

    감자탕 집에 앉은 두 사람은 온통 정적과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미대 앞에서 만나 여기까지 오는 데도 어색해 죽는 줄 알았다. 백한결과 있는 게 어색하다니. 이쯤 되니 은한은 오늘 점심을 먹고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가늠했다.

    “어제 술 많이 마셨다며?”

    “어?”

    “톡방. 난리였잖아.”

    “어어…… 뭐.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어. 태준이 새끼가 오바한 거야.”

    한결이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으며 답했다. 은한은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가 보다, 고개를 끄덕여 줬다.

    주문한 식사가 나오고, 밥을 먹으면서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시험 결과나, 태준과 진우에 관련한 이야기가 다였다.

    그러다 은한은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뭘까, 뭘까. 한참 고민을 하다 알았다. 이 식당에 들어오고 나서, 한결이 단 한 번도 절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자연스레 밥만 먹고 있었다.

    그걸 깨달으니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벌써 마음을 정리했나. 그리 애절하게 말해 놓고, 고작 이주 만에 정리를 끝내 버린 건가. 어제 퍼부은 술은 마지막 미련에 불과했나.

    나는 이제, 이제야 좀 뭘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는 벌써…… 나를 세차게 쏟아지는 비에 쓸려 가도록 놓아 버린 걸까.

    은한이 천천히 수저를 내려놨다. 한결은 꽤 긴 시간이 흐르고서야 은한의 수저질이 멈췄다는 걸 알아챘다. 그가 찬물로 목을 축였다.

    “왜 나 안 봐?”

    “……보고 있는데.”

    “안 보잖아, 지금도.”

    한결의 시선은 은한의 어깨 뒤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은한이 허리를 살짝 틀어 그의 시선 안에 들어가고자 노력했다. 그에 한결이 후다닥, 조금 볼썽사나울 정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 은한이 조소했다. 그러자 한결이 억척스레 움켜쥐고 있던 수저를 떨어트리듯 놨다. 그의 고개가 조금 더 푹, 고꾸라졌다.

    저 잘생긴 정수리를 감자탕 먹다 볼 줄은 몰랐는데. 은한이 비죽,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잠시 정적을 이어 가던 한결이 작은 한숨과 함께 토해 내듯 말했다.

    “무서워서 그래.”

    “어?”

    “네가 무슨 말 하려고 밥 먹자고 했는지 감이 안 와서, 지금 되게 무서워.”

    은한은 까끌거리는 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섭다니. 누군가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어 보긴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한결이 약간은 짜증이 섞인 손짓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반듯한 그의 이마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방울아.”

    “…….”

    “나 아직 내 마음 하나도 정리 못 했어.”

    “…….”

    “네가 왜 날 만나자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내가 다 정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아직 멀었어. 엄청 오래 걸릴지도 몰라.”

    은한은 힘없이,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뭐야. 나 잊은 거 아니네. 괜히 땅굴을 팠다. 은한이 가볍게 수저를 들었다. 잠깐 잊고 있던 허기가 물밀 듯 밀려왔다. 반쯤 식어 버린 감자탕이 딱 먹기 좋았다.

    우물우물. 부지런히 음식을 씹던 은한이 흐음, 묘한 비음을 냈다.

    “그래서 만나자고 한 거 아니야.”

    “…….”

    “내가, 그…… 어…….”

    언젠가 한결이 씹어 먹고 싶다, 말했던 도톰한 입술이 머뭇머뭇 떨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했다. 한결은 우두커니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여전히 두렵지만, 언젠가는 들어야 할 말이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은한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미간도 긁었다가, 혀로 안쪽 볼도 쓸어내렸다. 그리 부산을 떨다 간신히 어젯밤부터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 고민하던 말을 내놓았다.

    “널 좋아하는 건 아닌데. 안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뭐?”

    “존나 이상하지? 나도 알아. 나도 그래서 굉장히, 혼란스럽거든? 그러니까 우리 어…… 잠깐만 만나 볼래?”

    “…….”

    “되게, 이상하고 이기적인 거 아는데. 너도 앞뒤 없이 이기적으로 고백했으니까, 이 정도는 봐줘라.”

    나도 잘 몰라서 그래. 알잖아. 모태 솔로인 거. 은한이 살코기가 잔뜩 붙어 있는 뼈를 수저로 쿡쿡 쑤시며 말했다. 이제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 건 은한 쪽이었다.

    한결이 자그마하고 동그란 은한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더 귀여워진 것 같네. 그 찰나에 그런 생각을 했다.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린 한결이 그 안에다 코를 파묻었다. 커다란 손이 그의 얼굴을 남김없이 가렸다. 그가 푸욱, 깊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에 은한의 귓바퀴가 움찔, 경련했다.

    한창 학생이 많은 점심시간. 오로지 한결과 은한의 테이블만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은한은 차마 고요를 깨지 못해 어정쩡히 들고 있는 수저만 고쳐 쥐었다.

    그때, 흡. 한결이 가슴팍을 들썩였다. 그 소리에 소스라칠 정도로 놀란 은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우는 거야? 씨발. 나 존나 나쁜 말 했나 봐. 어떡해. 도서관 베스트셀러라는 연애학개론인지 뭔지 읽고 올걸 그랬어!

    은한의 한쪽 다리가 덜덜덜 떨렸다. 달래야 하나. 어떻게 달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운다고 하기엔 한결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은한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한결을 살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았다. 한결이 우는 게 아니라는 걸.

    “웃냐?”

    “푸흐…….”

    “씨바…… 놀랐잖아. 왜 웃냐, 너?”

    은한이 숟가락 뒤꿈치로 콱, 테이블을 내리쳤다. 한결이 비로소 얼굴을 숨기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의 낯이 방금 피어난 햇살처럼 화사하게 개어 있었다.

    “좋아서.”

    “왜 좋아? 뭐가 좋아? 아직 너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모르겠다며. 그걸로 충분해.”

    전에는 기회조차 없었다. 헌데 은한이 너그럽게도 기회를 주겠단다. 이미 사지가 다 잘려 퍼덕이고 있는 한결에겐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적이었다.

    저만 잘하면, 어쩌면…… 꿈에서나 그리던 은한과의 관계가 현실이 될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뭐가 됐든, 평생 어쭙잖은 친구로 그의 옆에 있는 것보다야 훨씬 좋았다. 한결은 너무 좋아 쾅쾅 발을 구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웃었다,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한결의 표정을 응시하고 있던 은한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됐다. 은한이 열심히 고기를 바르고 있으니, 한결이 제 몫의 고기도 은한의 앞 접시 위에 올려 줬다. 은한은 익숙하게 한결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와 함께 밥을 먹을 때면 늘 삼 분의 이 이상을 저 혼자 먹었다.

    은한이 한 공기를 다 비워 갈 때쯤, 한결이 밥 한 공기를 더 주문했다. 은한은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새로이 나온 뜨끈한 밥을 막 입안 가득 채워 넣었을 때였다.

    “주말에 데이트하러 갈래?”

    “풉.”

    새하얀 밥 알갱이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눈썹을 들썩인 한결이 기다란 팔을 뻗어 은한의 입가를 닦아 냈다. 은한이 콜록콜록 거세게 기침했다. 한결이 채워 주는 찬물을 두 잔이나 연달아 비우고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뭐, 뭐, 뭘 하자고?”

    “데이트.”

    “그, 그런 걸 왜 해!”

    은한은 혹여 누가 들었나 싶어 분주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왁자지껄한 식당 안의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살짝 미간을 좁힌 한결이 은한의 빈 앞 접시에 감자탕 국물을 떠줬다.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 우리 방울이.

    “만나자며. 네가 만나자는 게 잠깐 사귀어 보자는 말 아니었어?”

    “그건 맞는데…….”

    “뭐든 해 봐야 알지. 네가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런 걸 해야 나도 무언갈 할 수 있지 않겠어?”

    “뭘…… 해?”

    “뭐하긴. 최선을 다해 널 꼬셔야지.”

    “아……?”

    “잘생긴 척. 멋진 척. 다정한 척. 아니다. 예쁜 척을 해야 하나……. 무튼 뭐든 다 할 거야.”

    한결이 짧은 머리칼을 곱게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찡긋, 한쪽 눈을 어그러트렸다. 무려 윙크였다. 윙크.

    쨍그랑.

    그 기이한 광경에 은한의 손에서 수저가 추락했다.

    “미친놈…….”

    너는 이제 백한결도, 모닝엔젤도 아니고 그냥 또라이3이야. 하태준을 위협하는 또라이3이라고.

    경악에 허물어지는 은한의 표정을 마주한 한결이 빙긋, 예쁘게도 웃었다.

    스무 살 겨울.

    그렇게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첫 연애의 시작이었다.

    * * *

    거울 앞에 선 은한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보통 때였으면 그냥 손에 집히는 대로 적당히 입고 나갔을 텐데. 괜히 데이트니 뭐니 그런 말을 해서 거울 앞에서 몇 분이나 허비하는지 모르겠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은한이 커다란 흰색 하프 집업 후드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 두툼한 청재킷을 걸치고, 검은색 바지는 아래를 돌돌 접어 매치했다. 포인트로는 빨간색 볼캡을 뒤집어썼다. 빙글빙글, 여러 번 돌아보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크로스백을 멨다.

    집 밖으로 나오자 골목에 기대어 있는 한결이 보였다. 큼큼, 목을 푼 은한이 세차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백한결!”

    얇은 검정색 폴라티에 하얀색 와이셔츠, 그 위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핸드폰을 보고 있던 한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은한이 종종걸음으로 그의 옆에 붙어 섰다. 한결의 시선이 분주하게 은한 위를 돌아다녔다. 어찌나 노골적인 시선인지 은한의 얇은 귓바퀴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뭐 여기까지 데리러 오냐. 그냥 거기서 만나면 되지.”

    “조금이라도 일찍 볼 수 있으니까.”

    한결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은한이 앙,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 새끼 고백하더니 이제 대놓고…….

    벅벅, 세게 볼을 문지른 그가 성큼성큼 한결을 앞질러 걸었다. 그의 뒷모습에 실실 웃음을 흘리던 한결이 기다란 다리로 금세 따라잡았다.

    “방울아.”

    “왜.”

    “너 오늘 유독 귀엽다.”

    “……지랄마.”

    “진짜야.”

    한결이 팔랑이는 은한의 모자 스트랩을 매만졌다. 얼굴도 작지. 모자 줄이 이렇게나 남고. 이러니 안 반하고 배겨. 한결이 푸슬푸슬 은한 몰래 웃었다. 이렇게 웃음이 헤프지 않았는데. 은한과 있으면 입꼬리가 주체가 안 됐다.

    “근데 방울아.”

    “또 왜.”

    “향수 뿌렸어?”

    “…….”

    악의 없이 한 질문이다. 허나 받아들이는 은한은 아니었나 보다. 은한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에이 씨. 막 집을 나서기 직전, 자꾸 시선에 걸려 오는 향수를 뿌리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한결이 맡을 줄 알면서도, 맡을 줄 몰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은한 역시 제 속내를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뭐, 뭐 그냥…… 옷 정리하다 봐서 뿌려 본 거야! 굳이 너 때문에 뿌린 거 아니거든?”

    “…….”

    “뭐! 씨발 왜 그렇게 봐!”

    “봐봐, 오늘 유독 귀여운 거 맞다니까.”

    한결이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확,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늘 그래 왔듯 얇은 몸뚱이가 쑥 딸려 온다. 낯선 향수 냄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선 늘 은한만의 향이 났는데.

    “방울아.”

    “뭐! 왜! 또 뭐!”

    “향수 뿌리지 마라. 나 네 샴푸 냄새 엄청 좋아한단 말이야.”

    “……변태 새끼.”

    경악으로 가득 한 은한의 표정에 한결이 눈을 어그러트리며 웃었다.

    “나 변태라니까. 저번에도 말했잖아. 네 생각하면서 딸도,”

    “닥쳐 씹새야. 한마디만 더하면 임시 연애고 뭐고 없어. 바로 쫑이야.”

    은한이 팔꿈치로 콱 한결의 옆구리를 찔렀다. 한결이 과장스럽게 억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은한의 어깨에 붙어 있는 팔은 떨어질 줄 몰랐다.

    은한도 굳이, 그를 밀쳐내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첫 데이트의 시작이었다.

    * * *

    한쪽 팔에 감각이 없었다. 한결이 그 커다란 덩치를 온전히 은한의 팔에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에 철썩 들러붙어 있는 그의 머리를 매정하게 밀어 버릴까, 하다 말았다.

    “으으…….”

    쾅쾅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영화 사운드보다 흐릿한 한결의 신음이 훨씬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 여우 같은 손진우. 월요일에 만나면 먼지가 날 때까지 패 주마. 은한이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한결은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다. 보통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던 게 다라 막상 데이트라는 휘황찬란한 이름이 붙으니 할 게 없었다. 영화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데이트에 어울린다, 싶어 고개를 끄덕여 줬다.

    솔직히 은한도 한결도 영화에 그다지 취미가 없다. 피시방에서 총질하는 게 훨씬 취향이지. 그래서 한결이 끊어 온 티켓을 제목도 보지 않고 좋다고 말했다. 한결의 말로는 며칠 전부터 진우가 재미있다고 노래를 부르던 영화란다.

    한결은 단 걸 좋아하는 은한에게 캐러멜 팝콘을 대자로 사서 들려 줬다. 은한은 보답으로 나초를 사 줬다. 두 손 가득 주전부리를 쥐고 상영관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평화로웠다.

    지금은 은한의 팝콘도, 한결의 나초도 바닥을 나뒹굴고 있지만.

    진우가 밥을 먹으면서도, 등교하면서도 추천했던 영화는 공포 영화였다. 십일월에 개봉하는 공포 영화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은한은 기이한 음악과 으스스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팝콘에만 집중했다.

    귀신, 영혼. 그런 걸 믿지 않으니 무섭지도 않았다. 피를 뒤집어쓰고, 입이 째지고 팔이 잘려 나오는 귀신에 와, 분장하기 힘들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 번쯤 귀신이 나올 듯 말 듯 하다가 쾅! 등장했을 때였다. 한결이 그 커다란 덩치로 은한에게 매달려 온 것은.

    “방울아. 미안. 진짜, 미안.”

    한결은 알 수 없는 사과를 내뱉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나초를 손에 쥐었다가도 입으로 가져가진 못했다. 얼마 있지 않아 그가 쥐고 있던 나초는 전부 바닥이 대신 먹어치웠다.

    백한결이 이런 걸 무서워하는구나. 되게 의외네. 손진우 이 새끼 이거 백한결 놀리려고 일부러 재밌다 한 거지? 하여간 또라이2. 은한이 조용히 혀를 차며 한결을 바라보았다.

    “나갈래?”

    어차피 흥미 없는 영화다. 한결이 이리 무서워하는데 굳이 보고 있을 필요가 없단 말이다. 냉큼 긍정할 거란 예상과 달리 한결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너랑 처음으로 같이 영화 보는 건데…….”

    그리고 속삭이는 말이 그따위였다. 은한은 장소도 잊고 거하게 한결을 비웃어 줄 뻔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중에 또 보면 되지. 그리 말해 주려다 벌벌 떨면서도 자리를 지키겠다 말하는 게 안쓰러워 가만히 있었다.

    한 시간이 흐르자 팔이 아팠다. 마디마디가 불거질 정도로 제 팔뚝을 움켜쥐고 있는 한결이 어이없기도 하고, 미련하기도 하고.

    “백한결.”

    “어…… 어?”

    “나 팔 아파.”

    “……미안.”

    은한이 몸을 뒤틀어 그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한결이 아쉽게 그를 놔줬다. 그러면서도 흘끔흘끔 영화를 보는 건 잊지 않는다. 아니 무서우면 왜 보냐고, 왜.

    온통 푸른빛인 공포영화에 비치는 한결의 피부가 창백하다. 은한이 쩝, 입맛을 다셨다.

    “야. 나 팝콘 먹여 줘.”

    은한이 한결 탓에 다 쏟아 버리고 반도 남지 않은 팝콘을 그에게 내밀었다. 한결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은한을 쳐다봤다.

    “어?”

    “나 영화 보는 동안 팝콘 먹여 달라고.”

    “…….”

    “왜. 그것도 못 해 줘?”

    “아니, 아니.”

    한결이 재빠르게 팝콘을 낚아챘다. 어슴푸레한 조명에 의존해 팝콘 통에 코를 파묻고 고심해서 팝콘을 고른다. 그가 곧 캐러멜이 잔뜩 발린 팝콘을 하나 꺼냈다. 은한이 아, 입을 벌렸다. 한결이 느릿하게 팝콘을 그의 입으로 배달했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팝콘이 사라진다. 한결이 몽롱한 눈동자로 은한의 입술을 관찰했다.

    “맛있네.”

    “…….”

    “계속해.”

    그 후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은한은 무심한 표정으로 영화를 봤고, 한결은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걸 은한의 입에 넣어 주겠다고 미간까지 좁힌 채 팝콘 통만 들여다봤다.

    “괜찮냐?”

    영화가 끝나고, 콜라와 팝콘통을 버리는 한결에게 은한이 물었다. 한결이 태연하게 되물었다.

    “뭐가?”

    “……됐다.”

    팔랑팔랑 손을 내젓는 은한에 한결이 샐쭉, 입꼬리를 올렸다. 참 좋은 영화 관람이었다. 은한에게 팝콘을 몇 개나 먹여 줬는지. 제 손이 다가갈 때마다 참새처럼 벌어지는 입술이 그렇게 귀엽고 어여뻤다. 머리통을 쾅쾅 내려치듯 무섭던 귀신은 이미 다른 세상 저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한결이 당연하다는 듯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은한은 파도에 휩쓸리듯 그의 겨드랑이 아래로 끌려갔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익숙해져 버린 한결의 품이다.

    달짝지근한 팝콘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영화관을 벗어나고도 코끝에 묻은 단내가 한참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우연찮게 발견한 만화책방에서 시시덕거릴 때도, 가볍게 맥주를 마실 때도 계속해서 일렁이며 은한을 간지럽혔다.

    어찌나 오래 이어지는 달콤함인지.

    은한은 그 단내가 내내 붙어 있던 한결에게서 나는 것이라 착각할 뻔했다.

    저녁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밤이 깊어지니 온도가 쭉쭉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맥주 펍을 나왔을 때, 한결이 손수 은한의 청재킷 단추를 채워 줬다. 은한은 코를 훌쩍이며 멍청하게 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행동이야 한결의 마음을 알기 전부터 숱하게 받아 왔던 것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과거에는 이 새끼가 또 날 개 취급하네. 내가 지 애완동물인 줄 알아. 정도로 여겼었지만.

    한결은 됐다는 은한의 만류에도 굳이 굳이 집에 데려다주고 싶다고 떼를 썼다. 그래. 언제고 안 데려다줬냐. 포기한 은한이 앞장서서 걷고, 한결이 따라 걸었다.

    오늘은 벽화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볼을 스쳐 가는 밤공기가 섬뜩할 정도로 시렸기 때문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밤을 헤쳐 내고 있는 가로등이 외로워 보였다. 은한이 위로하듯 손을 들어 가로등 빛을 쥐었다, 폈다 장난을 쳤다. 술에 취하니 별게 다 기껍다.

    “방울아.”

    “엉.”

    가만히 은한을 훔쳐보던 한결이 머뭇머뭇, 입술을 뗐다. 은한은 여전히 주홍빛에 관심을 빼앗긴 채였다.

    “오늘 어땠어?”

    “뭐가 어때? 아…… 데이트? 오늘 데이트였지, 참. 재미있었어.”

    “그래? 다행이네.”

    높낮이 없는 은한의 답에 한결이 바스러질 듯 얇은 미소를 만들었다. 씁쓸했다. 역시 오늘 방울이는 친구 백한결이랑 종일 놀았구나, 싶어서. 고작 한 번 만에 발전될 관계가 아님을 알지만, 사랑에 빠진 알량한 소년의 마음이라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결은 가로등 아래에 보드랍게 일렁이는 은한의 머리칼을 세었다. 그러다 툭, 단전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 놨던 마음을 뱉어 내고야 말았다.

    “손잡아도 돼?”

    “……어?”

    부지런히 걷던 은한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덩달아 한결의 다리도 멎었다.

    뭐라고……?

    은한이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자취방이 모여 있는 길목은 어색할 정도로 조용했다. 늦은 시간 때문이기도 했고, 날씨가 급히 겨울을 향해 다가가서이기도 했다. 바람과 가로등이 다인 길거리가 괜스레 더 춥게 느껴졌다.

    “싫으면 안 잡을게.”

    한결이 보란 듯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은한이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다.

    “…….”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마신 맥주 향이 흐릿하게 올라왔다.

    게이. 그거 뭐 별다른 거 없네. 맥주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그리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타인이 보기엔 평범한 친구와 하등 다름이 없던 오늘이었는데. 한결에겐 아니었겠지. 저와 처음으로 함께하는 영화라 그리 싫은 공포 영화도 꾸역꾸역 보려 노력하지 않았던가.

    은한이 꼬옥꼬옥, 힘주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무언갈 결심한 듯 질끈 눈을 감고 손을 뻗었다. 손이야 몇 번이나 잡아 본 것이다. 장난을 치느라. 또 끌려갔던 바이킹에서 동아줄처럼. 한결의 손은 그냥 조금 커다랗고 단단한 보통 인간의 손일 뿐이다.

    “…….”

    “…….”

    한결은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꿈인가, 싶어서.

    한참 기다리다 지친 은한이 눈을 떴다. 가로등을 등진 한결이 멀뚱멀뚱 서 있다. 역광 탓에 그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은한은 대충 한결의 표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으이구. 이상한 데서 어린 새끼.

    뚜벅뚜벅 한결의 옆으로 다가간 은한이 푹, 그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쑤셨다. 이미 한결의 손으로 가득 찬 주머닌데,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갔다. 손등과 손가락이 묘하게 스칠 때마다 흠칫흠칫 떠는 덩치가 조금 우습기도 했다.

    손잡고 싶다고 한 건 자기면서.

    “따뜻하네.”

    “…….”

    진심이었다. 한결의 온도로 데워진 주머니는 꼭 난로 같았다. 은한이 꼼지락꼼지락 조금 더 주머니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한결이 꾸욱, 은한의 손을 쥐어 왔다. 큰 손에 자그마한 손이 폭, 파묻히듯 잡혔다.

    은한은 한 번 더 마른 침을 삼키긴 했지만, 손을 빼내거나 하진 않았다.

    “안 가냐? 여기서 자게?”

    여전히 길바닥 한가운데에 멈춰 선 그림자에 은한이 재촉했다. 한결이 네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어. 가야지.”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리를 손을 잡은 채 걸었다. 비록 주머니 속에서 몰래 이루어진 손맞춤이지만, 그 어떠한 스킨십보다 어려웠고, 또 설렜다. 두 사람 모두에게 처음이라 그랬다. 아직 덜 자란 마음이다. 어설픈 감정에 손끝이 찌르르 울렸다.

    그래도 왠지 길가에 즐비한 가로등의 싸구려 주황빛이 고운 담홍색처럼 보였다.

    은한은 꾸역꾸역 억지로 두 개의 운동화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결이 엄지로 매끈한 은한의 손등을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수 초씩 굳는 작은 손가락을 알았지만 도통 지금이 믿기지 않아 자꾸만 쓰다듬게 됐다.

    “방울아.”

    “왜.”

    “지금 엄청 데이트하는 것 같다, 그치.”

    “……그러냐.”

    “나 데이트 태어나서 처음 해 봐.”

    “나도거든.”

    “다음에 또 하자.”

    한결의 말에 은한이 픽, 실소했다. 자박자박. 보도블록 위를 걷는 네 개의 발자국이 묘하게 규칙적이다. 한결은 걸음이 빠르다. 다리가 긴 편이기도 했고, 그냥 걸음걸이 자체가 빨랐다. 그런데 오늘은, 단 한 번도 절 앞질러 걸어간 적이 없다. 평소보다 훨씬 작아진 한결의 보폭에 은한이 웃음을 먹었다.

    “……너 하는 거 보고.”

    “어. 열심히 할게.”

    “뭘 열심히 해, 멍청아.”

    “뭐든.”

    은한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색 가로등 아래에 다다랐다. 언젠가 담배를 나눠 피고, 말다툼 같지 않은 말다툼을 했던 장소였다.

    하얀 가로등이 나타났다는 말은, 헤어질 때가 왔다는 뜻이다. 은한은 굳이 먼저 입을 떼지 않고 한결을 기다렸다. 저야 이렇다 할 생각도, 감정도 없는 상태지만 그는 다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결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야 아쉽게 은한의 손을 놓았다.

    은한이 한결의 온기를 훔쳐 후끈하게 달아오른 손이 식을까, 얼른 자신의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

    “…….”

    달보다 휘영청 한 빛을 뿜어내는 가로등 아래에서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섞고 있었다. 한결의 입술이 무언갈 말할 것처럼 달싹였다. 은한은 잘 가. 잘 자. 내일 보자. 내일도 모닝엔젤 할까. 그런 말을 예상했다.

    “방울아.”

    “어.”

    “오늘은 손잡았으니까, 다음 데이트 때는 뽀뽀하자.”

    “…….”

    깜빡, 깜빡. 은한은 찰나 동안 한결의 말을 열댓 번이나 되뇌었다. 그러다 간신히, 간신히 이해했다. 어려운 단어라곤 하나도 없는데, 참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뽀뽀.

    뽀뽀라니.

    온전히 그의 문장을 받아들인 은한이 번쩍, 다리를 쳐들었다. 그리고 콱, 한결의 발등을 짓이겼다. 그로 모자라 정강이도 차 주고 식을까 주머니에 고이 숨겨 놨던 손으로 복부를 때리기도 했다.

    “뒤져라. 뒤져. 그냥 뒤져 버려.”

    “아파. 아파.”

    한결은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음을 흘려 댔다. 그에 약이 바짝 오른 은한이 까득 이를 악문 채 한결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래도 한결의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조명 위로 한결의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 * *

    “방울아아아. 보고싶었어어어어.”

    태준이 와다다 달려와 온몸으로 은한을 끌어안아 왔다. 두툼한 덩치에 은한이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어느새 다가온 한결이 은한의 등을 받쳤다.

    “숨…… 막혀.”

    “왜 그렇게 바빴어어어. 나는 누가 우리 방울이 훔쳐간 줄 알고오오 총장 찾아갈 뻔했잖아.”

    “미친놈아. 내가 진짜 실종됐어도 총장은 찾아가면 안 돼.”

    119, 아니 112에 신고해야지. 학교 총장을 왜 찾아가. 백발 할아버지가 뭘 한다고. 은한이 열심히 태준의 턱을 밀었다. 그런다고 떨어질 태준이 아니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안긴 채로 저녁을 먹을지도 몰랐다.

    은한은 이제 안다. 한결이 절 개 취급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하지만 태준은 확실히 절 개 취급하는 게 맞았다. 혹시 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가 나랑 닮았니. 언젠가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됐어. 충분히 재회했으니까 이제 떨어져.”

    태준이 자신의 볼을 은한의 볼에 비비적거리니 한결이 험상궂게 표정을 굳혔다. 그의 만류에도 태준은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한결이 덥석, 태준의 뒷덜미를 잡아다 진우에게 내팽개치듯 밀어내고야 은한은 편안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방울이, 안녕.”

    “오냐.”

    한결과 은한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진우가 새삼스레 인사를 해 왔다. 은한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영화는 재미있게 봤어?”

    “그럴 리가 있겠냐, 씹새야!”

    “엉.”

    넌지시 물어오는 진우의 질문은 온전히 조롱을 위해서다. 빽, 참새처럼 소리를 지르는 은한과 달리, 한결은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한이 헛웃음을 토했다.

    “재미있게 봤다고? 네가?”

    “엉. 좋았어.”

    재미있었냐고 물었는데 왜 좋다는 대답이 흘러와. 은한이 순식간에 피곤해진 표정으로 꾹꾹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래. 내 입에 팝콘 넣어 주는 게 그렇게나 재미있었나 보구나. 종종 검지가 아랫입술에 닿아 올 때마다 심장이 철렁였었는데. 그는 눈곱만큼도 모르겠지.

    “좋았다니 다행이네. 고심해서 추천해 준 보람이 있어.”

    진우가 야릇하게 미소 지으며 한결의 팔뚝을 두드렸다. 은한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세 사람의 대화에 한 마디도 얹지 못한 태준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뭐야. 나 두고 영화 봤어? 언제? 어디서? 무슨 영화?”

    “…….”

    “…….”

    “…….”

    세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꾹, 입을 다물었다. 분주하게 눈알을 굴려 그들을 훑어보던 태준이 쿵쿵, 발을 굴렀다. 유하게 생긴 얼굴에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다.

    “너희 나 왕따 시키냐!”

    “그걸 이제 알았다니 놀랍다.”

    “그러게.”

    진우의 말에 한결이 가볍게 긍정했다. 은한은 태준을 위로하듯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태준이 은한의 어깨에 눈가를 문질렀다. 작지 않은 키 차이에 허리가 잔뜩 굽었는데 불편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방울아. 얘들이 나 왕따시켜. 흐흡. 이제 학교 어떻게 다니지?”

    “널 왕따시키는 무리에 나도 포함되어 있단다, 태준아.”

    “아니야. 방울이가 그럴 리 없어.”

    “내가 그렇다는데 왜 아니래…….”

    쩝, 입맛을 다신 은한이 진우와 한결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저보다 십 센티 이상 큰 태준이 매달려 있으니 좀 무거운 게 아니다. 과장 조금 보태면 땅으로 꺼질 듯했다.

    진우가 솜씨 좋게 태준을 떼어 냈다. 태준의 기다란 사지가 은한을 향해 펄럭였다. 은한이 슬그머니 한결의 뒤로 몸을 숨겼다.

    “자자. 우리 태준이 국밥에 소주 먹으러 갈까? 응? 형아가 순대도 시켜 줄게.”

    “순대 말고…… 모둠 수육…….”

    “그래. 그거 시켜 줄게.”

    “구랭!”

    먹을 거에 홀라당 넘어간 태준은 금세 밝아졌다. 세찬 겨울바람 아래서도 부드럽게 일렁이는 그의 금발이 참 신나 보였다. 은한이 킥킥거리며 진우와 태준을 뒤따랐다. 한결 역시 안면에 미소를 가득 채우고 발을 옮겼다.

    중앙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였다. 외투 아래로 빼꼼히 나온 은한의 손가락 끝에 한결의 손가락이 스쳤다. 은한은 흠칫 놀랐으나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우연이겠거니, 애써 넘겼다. 그리고 막 학교 정문을 통과할 때, 이번엔 새끼손가락이 얽혔다.

    은한이 끼긱끼긱 로봇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두 새끼손가락이 약속이라도 하는 양 엉켜 있다.

    “뭐 하냐…….”

    은한이 소곤소곤, 태준과 진우의 뒷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손잡고 싶어서.”

    참. 당당하고 명확한 대답이다. 무어라 욕을 해 주려 했는데 쭉, 맥이 빠졌다. 그래. 네 좆대로 하세요. 은한은 그런 심정으로 털레털레 걸음을 옮기는 데 집중했다.

    “좋아해, 은한아.”

    아마 은한은 모르고 있는 듯하지만, 한결은 새빨갛게 물든 그의 귓바퀴를 숨김없이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얽힌 손가락을 빼내지 않는 그가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여기가 어딘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뭐 하는 중인지.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여유가 있더라도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친구들이랑 국밥 먹으러 가는 길에 하는 이유가 뭐냐?”

    몇 번이나 깜빡깜빡, 분주히 눈꺼풀을 움직이던 은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 없는데……. 싫으면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다시 할게.”

    “아서라…….”

    은한이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긍정도, 부정도. 딱히 동조해 주는 말도 아닌데 한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은한은 흘끔, 해사하게 피어난 그의 얼굴을 훔쳐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씹새. 잘생기긴 존나 잘생겼네.

    “차갑네. 좀 데파야겠다, 그자?”

    “엉?”

    은한이 하얗게 출렁이는 국밥을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더 먹고 싶은데, 차가워서 그런지 도통 손이 안 갔다. 안주가 없으면 술맛도 떨어지는 법. 은한이 빈 소주잔에 술을 채웠다.

    “데파야 된다고.”

    원래 뚝배기가 식으면 말하기도 전에 데워 주시는 할머닌데, 오늘은 재방송 드라마에 빠져 정신이 없으셨다. 은한이 툭툭, 옆자리에 앉은 한결을 재촉했다.

    “할머니한테 이것 좀 데파 달라 캐라.”

    “…….”

    왠지 미안해서 내가 말하기 싫단 말이지. 한결은 답하지 않았다. 확 눈살을 구긴 은한이 이번엔 진우에게 턱짓했다. 그러나 진우도 눈만 꿈뻑일 뿐이다. 태준은 젓가락을 쪽쪽 빨며 신기한 동물을 보듯 은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뭘 꼬나보노?”

    “방울이 꼬나보고 있지.”

    “미친놈.”

    말을 말자.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은한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리고 우렁차게 말했다.

    “할무니! 저희 국밥 좀 데파 주세요!”

    “큽!”

    “흡!”

    “합!”

    공대남 셋은 결국 꾸물꾸물 올라오던 웃음을 참지 못했다. 처음에는 왜 갑자기 대파를 찾나 싶었다. 은한이 대파 타령을 세 번쯤 하고서야 ‘대파’ 혹은 ‘데파’가 사투리라는 걸 깨달았다. 술이 오르면 사투리를 쓰는 은한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자주 듣는 단어는 외울 정도지만 ‘대파’는 진실로 놀라웠다.

    “뭐고……. 너거 지금 웃은 거가?”

    손으로 입을 가린 한결이 정색을 연기하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진우는 커다란 깍두기를 입술 사이로 쑤셔 넣으며 웃음을 함께 삼켰다. 태준은 그렁그렁 눈물까지 채운 채 숨도 쉬지 않았다. 그러나 은한의 심기는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린 후였다.

    “데파 달라는 말이 뭐가 웃기노?”

    “……그 대파를 파오리가 들고 있는 대파로 상상하면 좀…… 웃긴다, 방울아.”

    “미친…… 파……오리…… 대파…….”

    진지하게 읊조리는 진우의 말에 한결이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커다란 대파를 들고 있는 은한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아…… 존나 귀여울 거야. 다음에 같이 장 보러 가서 대파 들려 줘야지. 몰래 다짐했다.

    숟가락을 억척스레 말아 쥔 은한이 공대남 셋을 처단하듯 휘둘렀다.

    “야. 누가 봐도 데워 달라는 뜻이지. 그걸 파오리 대파로 알아 처 듣는 너거 언어 체계가 문제란 생각은 안 해 봤나? 국어 시간에 배운다고.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땐 앞뒤 문맥을 확인하라. 엉?”

    은한이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그사이 다가온 할머니가 뚝배기를 들어 올리며 쯧쯧 혀를 찼다.

    “어이고. 대학교 댕기는 애들이 데펴 달라는 말도 모르나?”

    “그쵸, 할머니! 얘들 다 바보예요!”

    구원과 같은 그녀의 말에 은한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이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대충 고개를 주억인 그녀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턱을 괸 태준이 여전히 호기심을 가득 채운 눈동자로 은한을 쳐다봤다.

    “방울이 진짜 존나 신기해. 존댓말 할 땐 사투리 안 나와.”

    “그러게. 사투리 관련 논문도 있나. 찾아보고 싶다.”

    상투적인 진우의 말이지만 어떻게 봐도 놀리는 거였다. 한결은 별다른 말없이 끅끅 웃고만 있는데, 그것도 짜증이 났다. 은한이 후우, 분노의 콧김을 내뿜었다.

    “씨이발. 이거 내 고딩 친구들한테 말하면 가들 바로 비행기 타고 날아온데이. 너거 좆되는 거라. 어디서 사투리를 비웃노.”

    “비행기? 대구에 공항이 있어?”

    “와. 나 대구에 공항 있는 거 몰랐어.”

    “네 새끼는 다른 것도 모르잖아. 부산에도 공항 있거덩?”

    “헐. 부산에도 공항 있어? 우리나라에 공항이 왜 그렇게 많아?”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다음 놀림 대상은 우리나라에 공항이 몇 개나 있는지 모르는 태준의 무식함이었다. 은한이 신나서 태준을 비웃었다. 태준은 조롱당한다는 것도 모르고 신중하게 스마트 폰에다 공항 따위를 검색했다.

    술자리에서 시간은 누군가가 훔쳐 가는 듯 사라졌다. 보글보글 끓어서 나온 국밥이 다시 차게 식었다. 테이블 위의 녹색 병은 곱절로 불어 있었다.

    잠시 담배를 피우고 온 진우가 덜덜 다리를 떨며 춥다고 아우성을 쳤다.

    “진짜 개 추워. 강제 금연을 할 시기가 왔어.”

    “겨울 싫은데…….”

    은한이 창밖을 바라보며 괜히 코를 훌쩍였다. 서울의 추위는 참 매섭다. 입을 수 있는 모든 걸 입어도 뼈가 시렸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스무 살인데도 한기는 이기지 못했다.

    숟가락을 거꾸로 쥐어 든 태준이 콱, 테이블을 내려쳤다.

    “추울 땐,”

    “아이스크림이지.”

    눈을 번뜩인 한결이 답했다. 쓸데없이 비장한 두 사람에 은한이 낄낄댔다. 하여튼, 또라이 새끼들.

    “짱껜뽀해. 혼자 가면 외로우니까 두 명.”

    태준이 테이블 가운데로 주먹을 내밀었다. 한결과 은한도 냉큼 행했다. 술 마시고 먹는 아이스크림만큼 맛난 것도 없다.

    “아아…… 나 추워서 나가기 싫은데에…….”

    진우가 몸을 비비 꼬며 태준의 가슴팍에 안겼다. 태준이 발작하듯 그를 털어 냈다.

    “왜 이래! 취했냐?”

    “취했지. 편의점 가서 천 원 내고 아이스크림 네 개 달라고 행패 부릴 정도로 취했어. 방울이가 다녀오면 참, 좋겠다.”

    지랄. 발음 존나 아나운서 뺨치겠구만. 은한이 입술을 뒤틀었다. 진우의 같잖은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한결이 내밀고 있던 주먹을 얌전히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럼 내가 방울이랑 갔다 올게.”

    “얼씨구. 저는 간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은한이 질색했다. 하지만 한결은 이미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주섬주섬 외투를 껴입고 있었다. 여전히 태준의 가슴팍에 기댄 진우가 스윽,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방울이가 가면…… 구슬 아이스크림 사 와도 되는데…….”

    “하……?”

    내가 고작 2500원짜리 구슬 아이스크림 따위에 넘어갈 줄 알았다면,

    정확히 봤네. 이 새끼 이거 은근히 머리 좋단 말이야.

    진우의 카드를 낚아채듯 잡은 은한이 외투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한결이 드라마에 집중한 할머니께 물었다. 그녀는 이가 시리다며 손을 내저었다.

    바깥은 진우가 말한 것처럼 추웠다. 오슬오슬 어깨가 떨리고 이가 부딪혔다. 이제 막 시작한 겨울인데도 이렇게나 춥다. 은한이 종종걸음으로 저 멀리 반짝이고 있는 편의점을 향해 갔다. 한결은 성큼성큼 기다란 다리로 은한과 속도를 맞췄다.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봉지에 구슬 아이스크림 네 개가 담겼다. 할머니께 드릴 크림빵도 하나 샀다. 다시 나온 밖은 그래도 좀 적응했다고 덜 추웠다. 은한이 달랑달랑 봉지를 흔들며 시린 밤공기를 한껏 머금었다. 알딸딸한 술기운이 겨울 내음에 휘발해 갔다.

    “방울아, 담배 피울래?”

    “엉.”

    국밥집을 몇 걸음 남겨두지 않았을 때, 한결이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은한이 작게 입을 벌렸다. 곧 입술 새로 새하얀 담배가 들어왔다.

    틱, 틱. 바깥에 얼마나 있었다고 얼어 버린 한결의 손가락이 라이터를 켜지 못했다. 잠깐 켜진 불에 얼른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였는데, 도통 다시 켜지질 않았다.

    틱, 틱, 틱. 담배를 꼬나문 한결의 한쪽 눈썹이 짜증스레 치솟았다. 은한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라이터에 불이 올라오길 기다렸다. 허나 일 분 가까이가 지나도 불은 올라오지 않았다. 고생한 한결의 엄지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끝끝내 불을 켜지 못한 한결이 쓰레기가 되어 버린 라이터를 주머니에다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방울아, 내가 금방 가서 사 올게.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

    한결이 막 뒤를 돌려 할 때였다. 은한이 그의 옷자락을 꾹 틀어쥐었다.

    “대써.”

    그리곤 살짝 뒤꿈치를 들었다.

    치이익-

    자신의 담배를 한결의 담배 끝에 붙인 은한이 흐읍, 숨을 들이켰다. 맞붙은 담배 끝에서 하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곧 새빨간 불이 은한의 담배에 옮겨붙었다.

    입안 가득 연기를 머금은 은한이 느릿하게 한결에게서 떨어졌다. 뭘 귀찮게 또 편의점까지 가려고. 이러면 되지. 그런 뿌듯한 낯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한결은 아무런 표정 없이, 담배를 들이키지도 않고 굳어만 있었다.

    잘생긴 얼굴 위로 어슴푸레한 연기가 흩어진다. 은한이 손으로 그 연기를 휘휘 훑었다.

    “……체했냐? 왜 그래?”

    “단단히 체했지. 너한테.”

    “……뭔 개소리야, 또.”

    “너무 체해서 숨쉬기가 힘들다, 방울아.”

    “…….”

    은한이 픽,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나중에 정 소화 안 되면 손 따 줄게. 인간이란 참 대단한 동물이다. 이런 말에 적응도 하고. 은한이 쌉싸름한 담배 연기를 저 단전 아래까지 삼켰다가 뿜어냈다. 하얗게 흩날리는 연기가 입김인지 담배 연긴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한결이 가늘게 일렁이는 은한의 머리칼에다 손장난을 치며 말했다. 꼭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거 되게 위험해.”

    “왜? 불똥 튈까 봐?”

    담배 불똥이 뜨거워 봐야 얼마나 뜨겁다고. 덩치 산만 한 새끼가……. 은한이 술과 니코틴에 취해 몽롱한 눈동자로 한결을 쳐다봤다.

    “이것 때문에 내가 너한테 반했거든.”

    “흐억!”

    은한은 가만히 선 채로 발을 헛디뎠다.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한결이 순발력 좋게 은한의 팔뚝을 잡아챘다.

    적응 못 했어. 이 새끼 이상한 소리에 아직 적응 못 했다고. 반하다니. 소름 돋을 만큼 유치한 소리라 생각했다.

    “바, 반, 반해? 이게 뭐라고?”

    “옛날에도 네가 이런 적 있거든. 술 먹고.”

    물론 은한은 기억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짐작하기로서니, 그날도 오늘처럼 라이터가 켜지지 않았고, 니코틴이 고팠던 저가 한결의 담뱃불을 훔쳐 갔으리라.

    “와 술이 확 깨더라.”

    한결이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없을 절경이었지. 착 내리깔린 풍성한 속눈썹 하며. 말랑한 광대를 발갛게 채운 열. 청량하면서 달큰한 샴푸향. 미미한 알코올 냄새. 씁쓸한 담배 연기가 온통 뒤섞여 지구가 아닌 듯했다.

    쿵쾅쿵쾅. 세계의 종말을 미리 훔쳐본 것처럼 뛰어 대는 심장에 삼켰던 연기를 토해낼 뻔했었다. 그리고 정말 도래했다. 종말이. 그 종말은 은한을 보지 못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한결의 세상에 내리쳤다.

    그러고 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은한을 몹시 사랑하게 됐다는 걸.

    한결은 다시금 메슥거릴 정도로 뛰어 대는 심장에 담배를 떨어트렸다. 신발 밑창으로 몇 번 지르밟았더니 금세 불길이 사그라든다. 남은 건 발광하는 심장뿐이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하지 마.”

    “야! 그런 거 보고 반할 인간은 세상에 너밖에 없어.”

    “그래 나뿐이니까 그냥 나한테만 해.”

    “또라이 새끼…….”

    은한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깊게 연기를 마셨다. 한결은 그런 소리를 듣고도 뭐가 좋은지 웃고만 있다. 그가 은한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봉지를 훔쳐 갔다. 그리고 빈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얽었다. 살짝 얼어 차가운 손에 은한이 흠칫 경련했다.

    “…….”

    “…….”

    얼른 피우고 들어가자. 그게 심신에 좋다. 은한은 열심히 담배를 피우면서도 굳이 얽힌 손을 풀지 않았다. 한결의 엄지가 부드럽게 손등을 매만질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떨었지만.

    그 순간, 콧등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은한이 분주하게 눈을 깜박이며 허공을 살폈다. 이번엔 그 무언가가 은한의 속눈썹에 걸려들었다.

    “어…… 야, 백한결. 눈 와.”

    “눈?”

    은한이 보란 듯이 자신의 눈꺼풀을 팔랑였다. 한결이 그의 속눈썹에 얹힌 눈을 살살 털었다.

    “첫눈이 일찍 왔네.”

    “오오씨, 첫눈.”

    은한은 눈이 좋았다. 아마 대구라는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이 그럴 테다. 진눈깨비만 조금 흩날려도 뉴스에서 몇 년 만의 폭설이라는 말을 하는 도시니 말이다.

    서울은 말 그대로 펑펑, 눈이 온다. 은한이 이월쯤, 서울에 막 상경했을 땐 도시 전체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은한이 망설임 없이 담배를 끄고 후다닥, 국밥집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야! 눈 와!”

    “눈?”

    “누운?”

    소주를 홀짝이고 있던 태준과 진우가 벌떡 일어섰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나온 두 사람이 집요하게 하늘을 주시했다. 그리 크지 않은 눈송이지만 확실히 보였다. 그들이 꺄아, 소녀처럼 소리를 질렀다.

    첫눈이란 게 그렇다. 별 의미도 없고, 값비싼 것도 아닌데 특별한 무언가를 제공했다. 특별한 기분이나 특별한 추억 같은 거.

    인적이 드문 길거리의 한복판에 선 태준이 고개를 치켜들고 쩌억 입을 벌렸다. 그의 목젖이 한껏 도드라졌다.

    “아이스크림 필요 없어! 존맛!”

    “하아…….”

    저 또라이 새끼……. 아무리 첫눈이라 한들, 자기가 지금 먹는 눈이 미세먼지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까……. 은한이 착잡하게 구슬 아이스크림의 뚜껑을 뜯었다. 쟤 진짜 제정신 아니야. 그리 말하며 한결과 진우를 바라봤는데, 하마터면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릴 뻔했다.

    “진차 마힛는 거 가히도 하호.”

    “그허게.”

    진우와 한결 역시 입을 쩍 벌린 채 고개를 쳐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 두 사람의 말을 간신히 이해한 은한의 얼굴이 순조롭게 썩어 갔다.

    진짜 맛있기는. 그거 매연이랑 미세먼지라니까. 어우…….

    은한이 주춤주춤 공대남 셋에게서 멀어졌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이름 모를 노래가 떠올랐다. 간절히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런 은한을 알았을까, 어느새 다가온 태준이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방울아. 첫눈 먹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서울 풍문이 있어.”

    “그건 어디서 굴러온 개소리냐.”

    “손진우 선생님께서 하신 개소리이니라.”

    개소리인 건 아는구나. 은한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진우와 한결은 여전히 미세먼지를 혀끝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은한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태준이 그들의 옆으로 가 다시금 입을 벌렸다.

    “하아…….”

    세 사람을 응시하고 있는 은한의 눈가에 피곤이 잔뜩 서렸다.

    그래. 진정한 친구는 친구의 또라이 짓을 함께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겠냐.

    아이스크림 뚜껑을 닫은 은한이 그들과 같이 입을 벌렸다.

    살포시 혀 위에 내려앉는 눈이, 정말로 묘하게 달았다.

    술은 넷이서 함께 먹었는데, 은한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두 개뿐이었다. 진우가 취해서 못 걷겠다며 태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찡찡 떼를 썼기 때문이다. 태준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진우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번엔 은한이 먼저 한결의 주머니를 파고들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손이 시려서. 역시나 한결의 주머니는 따뜻했다. 한결이 입이 째질 듯 웃으며 물었다.

    “내일은 뭐 해?”

    “어…… 과제? 시디 과제가 개많아. 도서관 PC실이나 카페에 박혀 있을 거야.”

    “나도 네 옆에서 공부할까? 다음 주에 퀴즈도 있고.”

    “PC실 마우스 소리 엄청 큰데. 시끄러울걸?”

    “괜찮아.”

    그래라, 그럼. 은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대화와 함께 걸으니 금방 백색 가로등이 나타났다. 우리 집이 이렇게 가까웠나, 싶었다.

    어느새 거리를 덮은 눈이 가로등의 하얀빛을 반사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눈부시고 밝게 느껴졌다. 은한은 이번에도 먼저 손을 빼내지 않았다. 아마 오 분쯤 지나야 한결의 이별 준비가 끝나리라. 헌데 한결은 십 분이 넘어서도 은한의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방울아.”

    “어.”

    “담배 하나만 더 피우자.”

    “…….”

    한결의 말에 은한이 가늘게 눈을 떴다. 잠시 고민하다가 당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라이터 없으면 안, 핀, 다. 누가 하지 말래서.”

    그리 말했더니 한결이 큭큭거린다. 그가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보였다. 진우와 헤어지기 전, 그에게 받아 온 것이다.

    멀쩡한 라이터를 요리조리 살피던 은한이 께름칙하게 턱을 주억였다.

    한결은 담배를 꺼내면서도 은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은한이 담뱃값에서 담배 두 개비를 꺼냈다. 하나는 한결의 입에 물려 주고 하나는 제 입에 물었다. 라이터에 불을 켰다. 이번에는 보란 듯 제 거에다 먼저 불을 붙였다.

    그 후 막 한결의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한결이 은한의 턱을 쥐어 올렸다.

    그리고 닿았다.

    담배와 담배 끝이.

    치이익-

    불씨는 금세 옮겨붙었다. 담배 두 개비에서 진한 연기가 흘러나오는데도 한결은 떨어질 줄 몰랐다.

    “…….”

    “…….”

    은한이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오랫동안 한결의 얼굴을 보기는 처음이다.

    얇은 쌍꺼풀이지만 진한 눈매. 저와 달리 굵은 선을 가진 콧날. 담배를 물고 있어 살짝 벌어진 입술.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오감이 비정상적으로 민감해졌다. 자욱한 담배 냄새 사이로 한결 특유의 체취가 흘러왔다. 사부작사부작 가라앉는 눈발의 수다도 들려왔고, 묘하게 불규칙한 그의 숨소리도 들렸다.

    그쯤 은한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거구나. 백한결이 반했다, 말한 순간이 이거구나.

    “왜. 너도 나한테 반했어?”

    천천히 멀어진 한결이 장난스레 말했다. 유치하기 그지없는 대사였다. 그가 두어 모금 빤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애당초 니코틴이 목적이 아니었던 터라. 눈으로 물든 바닥은 신발 밑창으로 비비지도 않았는데 불을 삼켜 버렸다.

    한결이 머금고 있던 연기를 내뿜으며 죽어 버린 담배꽁초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기다란 장초가 그 옆에 떨어졌다. 은한이 물고 있던 담배였다.

    “백한결.”

    “어?”

    “뽀뽀하자.”

    “……어?”

    한결이 미처 그 말을 이해할 틈도 없었다. 은한이 쥐고 있던 한결의 손을 세게 잡아당겼다. 훅, 허리가 꺾이고 말랑한 입술이 닿아 왔다.

    “…….”

    “…….”

    한결은 멀뚱히 눈을 뜬 채였고, 은한은 질끈 눈을 짓이기듯 감은 채였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1차원 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쪽.

    입술은 무어라 감상하기도 전에 떨어졌다. 은한은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뭐했다고 붉어진 입술이 참, 탐스러웠다. 한결이 집요한 시선으로 그의 입술을 관찰했다.

    “가, 이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은한이 손을 빼냈다. 드문드문 눈송이가 내려앉는 그의 광대가 발갛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한결은 간지러워지는 손바닥과 가슴께를 참을 수가 없었다.

    “……백한결?”

    한결은 멀어지는 은한의 손을 낚아채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데려갔다. 은한의 마른 몸뚱이가 속절없이 끌려갔다. 같은 남자임에도 완력 차이가 하늘과 땅이었다. 한결이 그를 벽 쪽으로 몰아세웠다.

    “왜…… 왜 이래.”

    은한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래 봐야 벽이라 한 걸음도 멀어지지 못했다.

    “은한아.”

    “어, 어?”

    “좀 빠른 거 아는데. 이왕 뽀뽀한 거 키스도 하자.”

    “……어?”

    은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두운 골목에서도 용케 달빛을 받아낸 커다란 눈동자가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혼란과 걱정, 그리고 약간의 기대가 마구잡이로 얽혀 있는 눈동자였다.

    한결이 은한의 두 볼을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혹여 은한이 거절을 뱉을까, 허겁지겁 입술을 삼켰다.

    “으…….”

    은한의 잇새로 영 로맨틱하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결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쪽쪽, 도톰한 아랫입술을 빨았다. 낯선 감각에 당황한 은한이 살풋 입을 벌렸다. 한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작은 턱을 내리눌렀다. 입술 사이가 조금 더 벌어지고 얇은 숨소리가 혀끝으로 느껴졌다.

    “으응…….”

    왼쪽으로 고개를 꺾은 한결의 혀가 조심히, 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게 은한의 입속으로 미끄러졌다. 놀란 은한이 흠칫 등허리를 떨었다. 허나 한결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혀가 질척하게 섞였다. 움직이는 근육이 얼마나 된다고, 맞붙은 입술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잠깐잠깐 틈이 생길 때마다 하얀 입김이 퍼졌다.

    “흐…….”

    키스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간신히 한결의 혀를 받아내고만 있던 은한이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를 정도였다. 한 뼘이나 나는 키 차이 때문에 발꿈치가 들렸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종국에는 은한의 발에 쥐가 났다. 간지러운 통각을 참지 못한 은한이 끙끙 앓고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한결은 그리 오랜 시간 내내 입술을 섞어놓고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쥐. 쥐 났어.”

    “어?”

    “쥐 났다고, 씹새야. 존나 멀대 같이 커서는…….”

    은한이 조심조심 발목을 뒤틀었다. 찌릿! 발가락이 온통 저렸다. 걷지도 못하고, 눈 덮인 길바닥에 앉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은한에 한결은 웃음이 튀어나올 듯했다. 별게 다 귀엽네.

    “집까지 업어 줄게.”

    “뭐? 싫어!”

    “왜.”

    “너…… 또 막 어? 이왕 뽀뽀하고 키스한 거 다음 거까지 하자고 덤빌 것 같단 말이야.”

    툴툴대는 은한의 입술이 잔뜩 빨려 부어있다. 그래서 한결은 꾸역꾸역 참던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제가 아무리 변태기로서니, 아직 마음이 쌍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는 연인에게 그런 걸 요구할 리가.

    한결이 은한의 이마에 쪽쪽 입술을 내렸다.

    “어이구. 우리 방울이 아직 어려서 못 잡아먹어요.”

    “……진짜 잡아먹으려고 했냐?”

    “나중에. 열심히 먹여서 포동포동하게 살찌면. 그때.”

    “……개새끼.”

    은한은 버릇처럼 한결의 발등을 밟아 주려다 저린 다리에 신음을 흘렸다. 한결이 그의 앞에 등을 내보이며 쪼그려 앉았다.

    “업혀. 고이고이 데려다만 주고 갈 테니까.”

    “…….”

    아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은한이 마지못해 한결의 등에 체중을 실었다. 그래도 건장한 사내라 무거울 만도 하거늘, 한결은 참 쉽게도 몸을 일으켰다.

    “방울아.”

    “왜.”

    “좋아해.”

    “…….”

    “진짜로. 많이 좋아해.”

    “알았어, 알았어.”

    괜히 민망해진 은한이 그의 등에다 코를 묻었다. 한결의 냄새가 났다. 흘끔, 뒤돌아본 하얀 길거리엔 내내 네 개던 발자국이 두 개만 찍혀 있다.

    은한은 왠지 그 발자국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한결 몰래 부푼 입술을 매만졌다.

    스무 살. 첫눈 아래에서의 첫 키스는 적당히 달콤했고,

    적당히 알딸딸했으며,

    충분히 설렜다.

    * * *

    귀가 새빨갛게 얼 정도로 날이 추워졌다. 후끈한 카페에 들어왔는데도 목도리는 포기하지 못했다. 패딩만 의자에 걸쳐 놓은 은한이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린 채 맞은편의 한결을 주시했다.

    “…….”

    정확히 말하면 한결은 아니고, 한결의 입술.

    알아볼 수 없는 수식을 쓸 땐 새부리처럼 살짝 튀어나온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잘근잘근 입술을 씹는다. 얼음이 동동 뜬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전에는 혀를 내어 입술을 핥는다. 그렇게 움직임이 많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또 없지도 않았다.

    은한이 소리 없이 끙, 하고 앓았다. 도통 포토샵에 집중이 안 된다. 그깟 키스가 뭐라고. 이렇게나 절 흔들어 놓는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은한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냈다. 선선한 공기가 목덜미를 파고들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은한은 과제를 하는 중이었고, 한결은 며칠 뒤에 있을 전공 퀴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늘 도서관에 박혀 있는 게 질려서 나들이 겸 카페까지 나왔는데 모니터가 보이지 않았다. 한결의 입술에 혼을 홀딱 뺏겨 버려서.

    자꾸만 한결을 향해 흘러가는 시선을 억지로 노트북에 고정시켰다. 비록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화면을 보고 있긴 했다.

    “방울아.”

    “어, 어?”

    “하기 싫어?”

    제 얼굴로 떨어지는 무수한 은한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한결이 아니었다.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은 그가 은한을 쳐다봤다. 마주치는 시선에 놀란 은한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마구잡이로 마우스를 눌렀다. 딸깍딸깍딸깍. 우렁찬 마우스 소리가 괜히 민망했다.

    “흐억!”

    그러나 예민하기 그지없는 포토샵은,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클릭질에 프로그램이 중지됐다는 팝업창을 메롱 하듯 띄워 버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은한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씨바…… 좆됐어…….”

    아. 카페 와서 한 번도 저장하기 안 눌렀는데. 어떡해. 피와 땀이 섞인 작업물이거늘. 같은 노동을 또 하게 생겼다. 은한이 참담하게 테이블 위로 쿵, 얼굴을 박았다.

    한결이 은한의 뒤통수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얇은 머리칼이 참 부드럽다.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아직 해도 안 졌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형아가 사 줄게.”

    유하게 흘러나오는 타이름에 쿵쿵, 이마를 박고 있던 은한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다. 어이구. 그렇게 슬펐어. 한결이 말랑한 그의 볼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뭐 사 줄 건데.”

    “뭐 먹고 싶은데? 너희 집 앞에 백반 먹으러 갈까?”

    짧게 고민하던 은한이 곧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이 허한 속을 달랠 필요가 있다. 하얀 쌀밥에 매콤한 김치찌개를 생각하자 포토샵의 조롱이 조금 잊힌 것도 같았다.

    밖은 여전히 쌩쌩 겨울바람이 불었다. 어째 바람 너는 지치지도 않냐. 은한이 툴툴거리며 버릇처럼 한결의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화들짝 놀라 금세 빼긴 했지만. 와씨. 지금 너무 대낮이야. 너무너무 밝은 대낮이라고. 스윽, 길거리를 훑었다. 다행히 본 이가 없는 듯했다.

    한결 역시 주머니에 들어온 은한의 손을 당연하게 쥐었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와. 우리 너무 경계심 없는 게이 커플인 것 같아.”

    은한의 말에 한결이 웃었다.

    “커플로 인정해 주는 거?”

    “어?”

    한결은 은한이 답하지도 않았는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그가 은한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은한이 한결의 힘에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이쯤이야 친구 사이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스킨십이니 괜찮았다. 실로 한결의 마음을 알기 훨씬 전부터 그의 팔 받침대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근데 그건 말 그대로 친구일 때고. 지금은 아니니까.

    은한이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한결의 옆구리에 착 달라붙었다. 속눈썹 위로 떨어지는 한결의 시선에 부러 눈을 홉떴다.

    “뭘 봐. 추워서 그래, 추워서.”

    “……알아.”

    낯빛 가득 미소를 피운 한결이 은한의 머리칼에다 턱을 비볐다. 다른 냄새는 하나도 얹어지지 않은 은한만의 샴푸 향이 느껴졌다.

    어제도 좋았지만, 오늘은 더 좋은 냄새다.

    아마 내일은 더, 더 좋아지겠지.

    바깥에 찬기가 기승을 부리면 부릴수록 몸뚱이는 게을러졌다. 오늘도 깔끔하게 두 공기를 비운 은한이 식당 의자에 늘어지듯 기댔다. 언제 또 도서관까지 가지. 언제 과제 끝내지. 나는 졸업 언제 하지. 그런 답 없는 고민이 몰아쳤다.

    “도서관 갈까, 아니면 카페?”

    한결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은한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작은 손이 신기해서 자꾸만 만지게 된다. 언젠가는 하루 날 잡고 종일 은한의 손만 가지고 놀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귀찮으니 꺼지라고 거하게 욕을 얻어먹겠지만.

    “백한결.”

    “어.”

    은한은 등받이에 목을 꺾은 채 누리끼리한 식당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름 자국이 한 개, 두 개, 세 개……. 벌레 시체가 드문드문 끼어 있는 형광등이 뭐라고 계속 주시하고 있게 됐다.

    “우리 집 가서 공부할래?”

    “……어?”

    “카페 멀어. 도서관은 더 멀어. 밖은 춥고. 나는 지금 딱 한 시간 정도 낮잠 자고 싶거든? 그러니까 나 낮잠 잘 동안 우리 집에서 공부해라, 너.”

    덧붙이는 사설이 쓰잘데없이 길다. 말해 놓고 보니 한결과 저와의 관계에선 참,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라 자꾸만 주절주절 변명이 붙었다.

    “…….”

    한결은 침묵했다. 은한이 자세를 고쳐 바르게 앉았다. 정말 딱 한 시간만 자면 종일 매달렸던 작업물이 날아간 것을 극복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다고 또 한결만 홀로 도서관에 보내거나 이대로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튼 그랬다.

    “방울아.”

    “엉.”

    “나 변태라니까.”

    “아, 진짜 이 새끼가!”

    은한이 숟가락을 추켜세우고 한결을 위험했다. 한결이 낄낄거리며 숟가락을 피해 고개를 뒤틀었다.

    결국 은한의 뜻대로 두 사람은 그의 집에 들어섰다. 한결은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흐읍, 집안 가득한 은한의 냄새를 들이켰다. 변태 같다고 은한에게 정강이를 차였지만, 들이쉬는 숨은 멈추지 않았다.

    은한이 작은 소파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여기서 공부해. 냉장고에 마실 거 있나? 모르겠는데 있으면 걍 꺼내 먹어.”

    은한은 정말 잘 생각인 듯했다. 고개를 주억인 한결이 가방에서 전공 책을 꺼냈다. 자신의 점퍼와 한결의 코트를 곱게 옷걸이에 건 은한이 본격적으로 잘 준비를 시작했다. 한결은 연필을 든 채 뽈뽈 돌아다니는 은한을 눈으로 좇았다.

    받쳐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내리던 은한이 말했다.

    “눈깔 돌리고 공부해라.”

    “너무하네. 애인을 집까지 데려왔으면 인간적으로 키스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어이구, 지랄.”

    은한이 노골적으로 한결의 말을 비웃었다. 그러나 한결은 그 웃음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눈치챈 은한은 뒤틀리는 입술을 숨기지 못했다.

    “김치찌개 처먹고 키스 하고 싶냐, 너는?”

    “그럼 양치질하고 하면 되지.”

    한결이 보란 듯 가방에서 칫솔 세트를 꺼내 들었다. 은한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키스. 키스라.

    맞아. 내가 포토샵 날렸던 게 저 빌어먹을 백한결의 입술 때문이었지. 검지로 미간을 긁으며 잠시 고민하던 은한이 작게 읊조렸다.

    “……그러던가.”

    두 사람은 좁은 화장실에서 어깨를 맞대고 헐레벌떡 양치질했다. 앞니가 부서져라, 거세게 칫솔질을 하는 한결에 은한이 낄낄거리다 거품을 먹고 기침을 해 댔다. 평소보다 훨씬 열심히 양치질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치아를 확인한 두 사람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

    한결이 가만가만 은한의 손을 주무르며 물었다. 은한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뭘 물어. 하겠다고 양치질까지 해 놓고.”

    한결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리곤 조심히 은한의 턱을 감싸 쥐었다. 은한이 쉽게 그 손아귀에 이끌려 갔다.

    가볍게 눈을 감았다. 마주하는 입술은 그래도 한번 해 봤다고 익숙했다. 그렇다고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한결이 쪽쪽, 입술을 빨 때마다 얇은 어깨가 흠칫흠칫 경련했다.

    치약 맛이 강하게 나는 한결의 혀가 은한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선연한 감각에 은한의 입술이 살풋 벌어졌다. 한결은 망설이지 않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으응…….”

    섞이는 혀는 과거의 어느 날보다 훨씬 저돌적이고 진득했으며, 뜨거웠다. 밀폐된 공간에 오롯이 둘만 있다는 게 왠지 모를 배덕감을 들게 했다. 목덜미의 솜털이 바짝 곧추섰다.

    혀가 질척하게 얽힐 때마다 소파를 쥐어뜯는 은한의 손을 한결이 잡아챘다. 마구잡이로 얽혀드는 혀처럼 손가락도 엉켰다.

    귓바퀴를 스치고 가는 공기가 등줄기를 오싹하게 했다. 오감이 민감해진다. 온몸이 어떻게든 한결을 더 느껴 보고자 발악하는 것 같았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 하나 없는 집이라 서로의 숨소리를 너무할 정도로 가감 없이 전달했다. 그게 어찌나 자극적인지. 은한이 저도 모르게 자꾸 숨을 먹었다. 점점 치받아 오는 그의 숨에 한결이 쪽, 입술을 떨어트렸다.

    “하아…….”

    “…….”

    여전히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은한이 혀를 내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흠뻑 젖은 입술을 핥았다. 그리곤 내놓은 말이,

    “아, 씨발. 잠 다 깼어.”

    따위다. 한결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보통 때보다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웃음소리였다.

    “재워 줄까?”

    목소리는 웃음소리보다 훨씬 낮았다. 그 낮은 음성에 은한이 그 몰래 움찔 등허리를 떨었다. 그랬으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내가 애냐.”

    “방울이, 애 아니야?”

    “그럼 애냐? 하루가 멀다고 술 처마시고 다니는데?”

    “그래? 그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잡아먹을 수 있겠네.”

    한결이 앙, 동그란 코끝을 깨물었다. 낯선 통각에 은한이 한쪽 눈을 어그러트리며 휙, 얼굴을 내뺐다.

    “쫓겨나고 싶냐.”

    “그럴 리가요.”

    한결이 순순히 물러났다. 그 전에 살짝 부풀어 오른 은한의 입술을 한 번 삼켰다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파에서 내려가 테이블에 바짝 붙어 앉은 그가 연필을 들었다.

    구름 위에서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다. 지금 컨디션이면 두툼한 전공책의 모든 문제를 원활히 풀 수 있을 듯했다.

    소파에 삐딱하게 앉은 은한이 한결의 너른 등짝을 바라봤다. 뭘 처먹고 자라야 저렇게 어깨가 넓어지지. 나도 어깨 때문에 XL 사이즈 입어 보고 싶다. 그런 무의미한 생각을 이어 갔다.

    사각사각 움직이는 연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물러간 잠이 다시 다가올 것 같기도 하고. 은한의 눈꺼풀이 확연히 느려졌다. 벅벅 눈두덩을 문지른 그가 한결을 불렀다.

    “야.”

    “응.”

    “……어떻게 재워 줄 건데?”

    부지런히 움직이던 한결의 연필이 멈췄다. 그게 뭐라고 긴장이 돼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은한을 전혀 모를 한결이 흐음, 잠시 고민했다. 재워 준다고 말만 했을 뿐, 따로 생각해 둔 방법은 없는가 보다.

    “자장가 불러 줄까?”

    “아니. 존나 사절.”

    은한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낯간지러운 짓은 절대로, 절대로 싫었다. 한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또 잠깐 고민하던 한결이 별안간 벌떡 일어섰다.

    성큼성큼 제게 다가오는 한결에 은한이 소파 끝으로 도망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우어억! 미친놈아, 안 놔!”

    그리고 그 행동은 옳았다. 아니, 조금 더 멀리 도망갈 걸 그랬다. 한결은 기다란 팔로 쉽게 은한을 잡아 들었다. 은한의 사지가 힘차게 퍼덕였다. 그래도 한결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곰 인형 해 줄게. 나 정도 크기 곰 인형이면 개 비쌀걸?”

    “됐거든!”

    한결은 은한을 안은 채 침대로 점프했다. 두툼한 덩치와 무게에 눌린 은한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돌았어. 네 새끼 몸이 어떻게 곰 인형이야, 흉기지. 한결에게 잔뜩 짓눌린 은한이 웅얼웅얼 불만을 토했다. 한결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조금 더 힘주어 은한을 끌어안았다.

    “백…… 한결. 너희 방울이…… 압사 직전이다…….”

    은한이 탁탁탁, 한결의 팔뚝을 두드렸다. 그제야 옥죄고 있던 힘이 한결 유하게 풀어졌다. 은한이 억눌려 있던 숨을 한숨처럼 토해 냈다. 그렇게 세 번쯤 숨을 몰아쉬고 나니 지금의 상황을 올곧게 볼 수 있게 됐다.

    “하아……. 네가 곰 인형이 아니라 내가 곰 인형이 된 것 같은데.”

    단단한 팔과 다리에 둘둘 감겨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 취급으로 모자라 인형 취급이라니. 우리 엄마가 이러라고 날 낳은 게 아닌데.

    한결이 나른한 얼굴로 부정했다.

    “기분 탓이야. 어여 자.”

    “씹새…….”

    은한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흘끔, 그의 얼굴을 훔쳐본 한결이 빙글빙글 웃으며 턱 끝까지 이불을 덮어 줬다. 쪽쪽, 관자놀이와 말랑한 볼에 뽀뽀도 해 줬다. 눈살을 찌푸리는 은한을 알았지만, 밀어내지 않는 거로도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잘 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은한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가라앉았다. 한결은 한쪽 팔을 괸 채 은한의 얼굴을 감상했다. 언제, 어떻게, 몇 번을 봐도 어째 이렇게까지 제 스타일로 생겼나, 싶다. 덕분에 없던 이상형도 생겼으니.

    그런 사람과 지금은 밥도 같이 먹고, 키스도 하고, 한 침대에 누워 있기까지 하다. 한결은 새삼 또 좋아서 비실비실 주책없이 웃음을 흘려 댔다.

    쪽, 쪽. 잠이 든 줄 알고 이마에 입술을 누르고 있는데 은한이 잠긴 목소리로 한결을 불렀다.

    야.

    엉.

    왜 나 처음 봤을 때 방울 같다고 했어? 내가 그렇게 개처럼 생겼냐?

    어…… 강아지 느낌도 없는 건 아닌데, 그냥…… 귀여워서.

    ……그게 다라고?

    네가 강은한입니다, 하고 소개하는데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반짝반짝 빛도 나는 되게 예쁜 방울. 아.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됐다. 이과놈한테 뭘 기대해. 그냥 못 들은 거로 할게.

    진짠데.

    못 들은 거로 한다고.

    알았어. 예쁜 방울이.

    쫓겨나고 싶다고?

    그럴 리가요. 주무세요.

    * * *

    도둑질도 처음이 어려운 거지, 두 번, 세 번은 쉽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로 주야장천 은한의 자취방에 드나들었다. 어떤 날에는 정말 머리 싸매고 공부만 했고, 또 어떤 날에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키스만 해 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니 또다시 다가오고야 말았다. 끔찍한 기말고사 기간이.

    “뒤질 것 같아…….”

    하루가 지날수록 눈 밑 다크서클이 자욱하게 짙어졌다. 은한이 꾹꾹 눈두덩을 세게 짓눌렀다. 창창한 스무 살이거늘. 시험 앞에선 좋은 체력도 금세 바닥이 났다.

    한결이 쩌어억, 자그마한 입이 째지라고 하품하는 은한의 뒷목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것으로 모자라 제 몫의 커피도 밀어 줬다. 은한의 커피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은한과 공대남 셋은 도서관 한 귀퉁이에 있는 스터디룸을 빌려 시험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중간 때는 한결과의 냉전 같지 않은 냉전 상태라 얼굴 한번 못 비췄는데, 이번엔 근 일주일 내내 스터디룸에서 함께 썩어 갔다.

    얼추 비슷하게 끝나는 종강이라 네 사람은 내일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나도…… 너무 졸려…….”

    눈알이 빠졌을지도 몰라. 방울아 내 눈알 좀 찾아 줘……. 전공책 위에 볼을 파묻은 태준이 한층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사각사각 열심히 샤프를 움직이던 진우가 픽, 그를 비웃었다.

    “지랄한다. 누가 보면 밤새 공부하신 줄?”

    “내가 밤새 공부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냐, 너.”

    태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눈동자에 실핏줄이 잔뜩 선 것이 부족한 수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우는 확신에 차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새벽 4시까지 게임했잖아, 너.”

    “……어떻게 알았지.”

    민망한 웃음을 만든 태준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진우가 한심하다는 듯 태준을 쳐다봤다.

    “‘닉네임을입력해주세요’님이 접속하고 계십니다, 하고 알림 뜨던데.”

    “…….”

    잠시간 정적이 스터디룸에 내려앉았다. 진우의 콧구멍이 마구 벌렁거렸다. 결국 그도 어제 새벽까지 게임을 한 거란 말이다.

    가장 먼저 웃음을 터트린 것은 은한이었고, 다음은 한결이다. 태준은 멍청한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그가 검지와 엄지로 부드럽게 진우의 콧구멍을 쥐었다. 벌렁거리던 진우의 콧구멍이 일순간 굳었다.

    “손진우 너…….”

    “…….”

    “역시 내 친구답다. 원래 시험기간이 제일 렙업하기 좋은 거 아니겠냐. 그래서, 승률은 좀 올렸고?”

    “어, 존나. 어제 세 판 연달아 승리함.”

    콧구멍이 막힌 탓에 진우의 목소리가 요상하게 가늘어졌다. 태준이 의자를 끌어 그 옆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오씨, 대박. 자랑 좀 해봐.”

    두 사람은 금세 학교를 벗어나 피가 난무하는 전장 어딘가로 순간이동을 했다. 은한이 삐딱하게 턱을 괸 채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저도 그다지 성적에 목숨 거는 타입은 아닌데, 저 두 사람에 비하면 모범생과 다름없다.

    “쟤들 진짜 우리 학교에 잔디 깔고 들어온 게 아닐까. 이번에 도서관 리모델링한다던데, 그게 손진우 아버님의 재력일 수도 있지 않냐.”

    은한의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한결이 답했다.

    “좀 딸려 보여도 교수님 말 이해는 해.”

    “구라.”

    “전부는 아니고, 어느 정도…….”

    “안녕하세요, 출석 부르겠습니다, 오늘 수업은 이만하죠. 그것만 이해할 것 같은데.”

    그럴지도. 한결이 푸흐흐 웃으며 은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은한이 또 나른히 하품을 내뱉었다. 뜨끈한 히터가 잔뜩 나오는 스터디룸은 스터디 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한결의 커피를 쭙쭙 들이킨 은한이 반쯤 풀린 눈동자로 한결을 바라봤다.

    “너는 잠 안 오냐?”

    “나? 나 별로 잠 없다니까.”

    “까고 있네. 저번 학기 아침 수업 죄다 지각했다며.”

    “……그걸 방울이 네가 어떻게 알아?”

    한결이 미간을 좁혔다. 은한은 합, 입을 다물었고 태준과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 가던 진우도 목소리를 삼켰다. 왁자지껄하던 스터디룸이 삽시간에 고요히 가라앉았다.

    은한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경련했다. 차마 한결도, 진우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전공책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금방까지만 해도 잘 읽히던 활자가 아무렇게나 나돌아 다녔다.

    그때, 진우가 어렵사리 무거운 입술을 뗐다.

    “내가 말해 줬어.”

    “왜?”

    “왜긴 왜야. 그냥 시답잖은 이야기하다 보니 나온 거지.”

    “…….”

    한결의 한쪽 눈썹이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은한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서늘한 기운이 흐르는 작은 공간은 그 소리마저 천둥처럼 들리게 했다.

    아우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제발, 그냥 넘어가라. 제발. 은한의 볼펜 촉이 툭툭툭 부산스레 종이를 괴롭혀댔다.

    “내가 들은 기억이 없으니까, 둘이 따로 만난 적이 있다는 거네.”

    한결의 한 마디에 부유하는 공기가 쇳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은한은 이제 마른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와씨. 이상한 데서 날카로운 새끼. 어떻게 거기까지 추론하냐. 꽉꽉 입술을 억세게 짓씹다 우연히 만났어. 커피 한잔했지. 그따위 말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진우가 선수를 쳤다.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했어.”

    “무슨 도움.”

    한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덕분에 은한은 턱턱 막히는 숨에 헛구역질할 것 같았다. 부지런히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지 않음을 잘 알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도움.”

    진우가 빙긋 미소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미소였다. 한결과 진우는 꽤 오랫동안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묘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를 휘몰아치듯 나돌았다.

    째깍째깍. 있지도 않은 시계 소리가 귓가에서 요동쳤다. 수초가 지난 후에야 은한은 그게 자신의 심장 소리임을 깨달았다.

    “…….”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진우를 주시하던 한결이 곧 전공책에 집중했다. 은한은 알았다. 그가 포기한 게 아니라는 걸. 아마 시험이 끝나고 나면 진우를 따로 불러다 추궁할 터였다.

    뭐…… 진우와 제가 따로 술을 마셨고, 그 덕분에 한결과 스스럼없이 입술을 맞댈 수 있는 사이가 됐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은한이 한결을 따라 책에 코를 파묻었다.

    “뭔데 지금.”

    문제는 태준의 존재를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까먹고 있었다는 것. 세 사람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에 끼지 못하고 있던 태준이 꺼져 가는 태풍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뭐냐고. 이건 나를 왕따시킨다는 장난으로 넘어가 주긴 좀 그렇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일까, 했더니. 은한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얼굴을 구겼다. 그러잖아도 시험 때문에 환장할 판인데. 왜 하필 오늘 이리도 몰아치는지 모르겠다.

    “별거 아니야.”

    “지랄 마라.”

    무심하게 넘어가려던 진우의 말에 태준이 으르댔다. 장난기에 흠뻑 젖어 있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음성이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진우가 꾹 입을 닫았다. 태준을 타이르는 건 늘 진우의 몫이었는데. 오늘은 그저 타이름으로는 끝나지 않을 듯해서.

    “말해.”

    태준이 간결하게 세 사람을 독촉했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줄 의향이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근래 야릇한 분위기를 내뿜는 은한과 한결, 그리고 진우를 지켜보며 참고 참다 내놓은 말이니 당연했다.

    “너희 존나 이상해, 요즘.”

    그 말에 은한의 입술이 탄성을 내뱉듯 살짝 벌어졌다. 이상해. 언젠가 제가 한결에게 했던 말이다. 그래. 태준의 시선에선 이상할 수밖에 없으리라. 실로 지금의 사회에서 ‘이상하다’고 정의될 관계이기도 했고.

    은한이 제 손가락에 괴롭힘당하던 종이를 놓아줬다. 끊임없이 매만진 종이 귀퉁이가 우글우글 일어나 있었다.

    “태준아.”

    “어.”

    “나 백한결이랑 사귀어.”

    “…….”

    네 사람이 천천히 뒤틀려 간다.

    * * *

    시험이 끝나는 순간, 그렇게나 울부짖던 방학이 도래했다. 그래도 기쁘지 않았다. 은한은 동기들 손에 끌려간 술집에서 그 어느 것도 먹고 마시지 못했다. 종일 입에 넣은 게 하나도 없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은한이 테이블 아래로 핸드폰의 홈 버튼을 꾸욱, 짓눌렀다. 드러난 화면엔 어떠한 연락도 없다. 오늘로써 벌써 수십 번째 반복하고 있는 행동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은한이 공대남 셋과 함께 있는 채팅방에 들어섰다. 공대 또라이 셋, 이라 적혀 있는 공간은 어제부터 시간이 멈춰 있다.

    [진우: 7번 스터디룸.]

    [태준: 빨리왕!!!]

    [모닝엔젤: 다 와 가.]

    한참 전에 외워 버린 활자를 또 읽었다. 시험 잘 쳤냐. 술 마셔야지. 그런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는데 도통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은한은 활자를 만들어 내는 대신 화면을 죽였다.

    그때,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은한이 허겁지겁 핸드폰을 들었다.

    [모닝엔젤: 술 마셔?]

    한결이었다. 이유 모를 실망감이 올라왔다. 기다리던 이가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응. 근데 재미없다. 단조롭게 답장을 전송한 은한이 또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관찰하고 있던 미현이 쾅, 소주잔을 부술 듯 내려놨다. 화들짝 놀란 은한이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은하니?”

    “어?”

    “행동하는 꼬라지가 영 보기 불편하다? 무슨 일 있으면 말을 해주든가. 안 해 줄 거면 무슨 일 있다고 티를 내지 말든가.”

    “……미안하다.”

    “와. 사과한다는 건 무슨 일이 있으나 말을 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네?”

    미현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즐거워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은한이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공대남 셋과의 관계도, 제 동기들과의 관계도. 모든 게 어그러지고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미안.”

    은한은 한 번 더 사과했다. 진실을 털어놓았을 때의 상대방 반응을 이미 체험한 탓이었다. 태준과 같은 얼굴을 한 미현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묵직한 눈꺼풀을 내리감은 은한이 잠시 어제 일을 상기했다.

    ‘……어?’

    한참이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던 태준이 조심스레 반문했다. 정말 조심스러웠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잘못 들었지? 그런 표정이었다. 그에 은한은 속이 뒤틀렸다. 뒤틀리다 못해 오장육부가 부글부글 끓는 화염에서 익어 가는 듯했다.

    왜. 뭐. 우리가 어때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과거의 저도 한결에게 몹쓸 짓을 해 놓고, 뭐가 그리 당당하다고 열이 뻗쳤다.

    ‘사귄다고. 손잡고 뽀뽀하고 그거. 보통 남자랑 여자랑 하는 거. 우리 둘이 그거 한다고.’

    ‘…….’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태준의 표정이 볼품없이 박살 났다. 눈코입이 요란하게 흘러내리는 듯했다. 이성적으론 괜찮았다. 그래, 마음 맞으면 사귈 수도 있지. 근데 그건 말 그대로 이성적일 때다. 가장 먼저 불쾌함이 들었고, 그리 살갑게 지내던 은한과 한결이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타인보다 낯설어졌다.

    그리고 배신감도 들었다. 그걸 이제야 이야기해 주다니. 이제껏 저 몰래 뒤에서 얼마나 시시덕거렸을까. 낌새를 보아하니 진우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저만 까맣게 몰랐다.

    ‘나 먼저 간다.’

    태준이 선택한 건 자리를 뜨는 거였다. 당장 은한과 한결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완연하게 성장하지 못해서, 아직 어른의 칭호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서.

    거세게 일어난 탓에 의자가 멀리까지 밀려 나갔다. 곧 벽에 쾅, 하고 부딪히며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태준아.’

    한결이 덩달아 일어섰지만, 책도 다 챙기지 않고 달리듯 스터디룸을 나서는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결이 진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아무렇지 않나 보다?’

    ‘내가 도와줬다고 말했잖아.’

    진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한결은 각목처럼 꼿꼿이 선 채로 진우와 대화를 이어 갔다.

    어떻게 알았는데. 언제 알았는데. 뭘 도와줬는데. 은한은 진즉부터 알고 있던 일이 주고받아졌다. 종종 저에게 떨어지는 시선을 알았으나 은한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태준의 부서진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해서 한결도, 진우도 신경을 써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끝났다. 짧게 휘몰아친 태풍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네 사람을 발기발기 찢어 놨다.

    우우웅.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진동에 은한이 과거에서 헤어 나왔다.

    [모닝엔젤: 집에 갈 때 연락해. 데리러 갈게.]

    너도 참……. 아마 저보다 훨씬 마음이 해져 있을 한결이다. 저는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든 지 세 달이 채 안 됐는데도 이리 심란한데 그보다 곱절에 곱절의 시간을 함께 보낸 한결은 오죽하겠나, 싶다.

    평소였으면 됐다, 내가 애냐. 그리 답해 줬을 은한인데 순순히 알겠다며 답장을 보냈다.

    제 작은 손으로 그를 위로해 주고 싶기도 했고, 그의 낮은 목소리로 위로를 받고 싶기도 했다.

    우리 괜찮겠지, 한결아.

    그렇게 말하면 그는 아마도,

    응. 괜찮아, 방울아.

    그리 답해 줄 것이다.

    * * *

    은한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한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바람 냄새 사이로 한결의 체취가 콧구멍을 파고들었다. 그것을 한껏 들이마셨다. 마음을 나눈 지 얼마나 됐다고 그의 냄새가 벌써 이렇게나 편하다.

    한결이 토닥토닥 은한의 등을 두드렸다. 위로받을 사람이 저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은한은 그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현관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무릎과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또 느꼈다.

    은한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뗐다.

    “태준이한테 연락해 봤어?”

    “응.”

    “답장은?”

    “아니.”

    “하아…….”

    어쩌지 우리. 은한이 뻑뻑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시험이 끝났음에도 기쁘지 않은 건 일평생 오늘이 처음이다. 하다못해 술자리에서도 눈치 없이 우울을 마시고 있었다. 동기들이 2차에 가자는 말조차 건네지 않았을 정도였다.

    어렴풋이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는데. 아주, 아주 먼 미래일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준비하지 못한 채로 맞이한 태풍이 참, 고달프다.

    그래도 이겨 내야지. 평생 몰아칠 태풍이 아니니 사그라들긴 할 터였다.

    은한이 한결의 가슴팍에 이마를 문질렀다. 쿵, 쿵, 쿵.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좋았다.

    “야.”

    나지막이 한결을 불렀다. 잔뜩 눌린 목소리가 평소보다 탁하다.

    “응.”

    한결 역시 단조롭게 대답했다. 은한이 그 몰래 손을 말아 쥐었다.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 누구냐고 물어봐.”

    “어?”

    “얼른.”

    한결이 시선을 내려 은한을 바라봤다. 보이는 거라곤 예쁘장한 정수리뿐이다. 귓바퀴라도 보고 싶은데 빛 한 점 없는 방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마른 입술을 핥은 한결이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어.”

    “……누군데.”

    “너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소주잔 위로 나눴던 대화의 반복이다. 비록 말하는 이는 반대가 됐지만. 한결이 넋을 놓고 어두운 방 귀퉁이를 응시했다. 은한이 민망한 마음에 괜히 중얼중얼 말을 붙였다.

    “이렇게 된 거, 말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나 때문에 친구랑도 멀어졌잖아, 너. 이왕 만날 거면 제대로 만나야지.”

    “…….”

    “그렇다고 내 마음이 억지라는 건 아니고. 어? 뭔 말인지 이해하지?”

    답을 주지 않는 한결에 은한이 빼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에 그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알 수 있는 건 발광하는 그의 심장뿐이다.

    잠시 그를 살피던 은한이 다시 푹 코를 파묻었다.

    “태준이한테 너랑 사귄다고 말할 때 아차 싶더라.”

    “…….”

    “그렇게 당당하게 사귄다고 말했는데. 너한텐 말 안 해 줬더라고. 물론, 요즘 우리가 하는 짓이…… 어, 무튼, 그런 걸 보고 너도 눈치챘겠지만…….”

    “…….”

    “말해 주고 싶었어.”

    은한이 답을 독촉하듯 볼을 비볐다. 흔한 코트 소재에, 지극히 평범한 온도에, 조금 빠른 듯한 심장 소리가 다인데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아마 저는 정말로 한결을 사랑하나 보다. 담뱃불을 나눈 후, 하루에도 몇 번씩 깨닫는 거였지만 늘 새로웠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은한의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양치질할까.”

    은한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

    두 사람에게 양치질하자는 말은 키스가 하고 싶다는 표현이다. 은한의 집을 드나들면서 생긴 둘만의 암호였다.

    양치질을 빌미로 두 사람은 현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고작 숨소리와 온기로 위로라는 게 가능할 줄 몰랐다. 은한과 한결은 두 손을 꼭 붙잡은 채 오랫동안 입술을 섞었다. 자욱하던 치약 맛이 사라지고, 온전히 서로의 체취와 혀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이나 오래.

    은한의 턱을 가볍게 쥔 한결이 쪽쪽, 그의 입술을 빨았다. 은한은 아랫입술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저렸는데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한결의 입술이 코끝과 미간을 지나 이마에 다다랐다. 그는 이 순간을 기억하듯, 한참이나 이마에 머물렀다.

    은한이 느리게 들썩이는 한결의 목젖을 주시했다. 저보다 훨씬 도톰하고 날카로운 목젖이 새삼 또 신기하다.

    “진우한테 너무 섭섭해하지 마라.”

    “……안 섭섭해. 고마워해야지.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야.”

    쓸데없는 은한의 걱정이었다. 섭섭한 게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고마운 건 사실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글라스로 소주를 퍼마시고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을지도 몰랐다. 방울이를 외치며 온갖 행패를 다 부렸겠지.

    한결이 은한의 볼을 한가득 쥐었다. 통통했던 볼인데 시험 기간과 마음고생이 겹쳐 반절로 줄어든 것 같다. 가슴이 아팠다. 내일 열심히 먹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진우랑 태준이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폭탄 던진 건 난데 왜 네가 알아서 해.”

    “그 폭탄을 만든 게 나니까.”

    “…….”

    “메이드 바이 백한결.”

    “씹새. 이상한 데서 존나 논리적이야…….”

    은한이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였다. 한결은 그게 또 귀여워 검지로 톡, 아랫입술을 건드렸다.

    “늦었다. 갈게. 잘 자.”

    흘끔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 한결이 마지막으로 쪽, 은한의 이마에다 입을 맞췄다. 은한이 긍정도 뱉지 않았는데 그는 코트를 꿰어 입고 가방을 들며 부지런히 갈 준비를 시작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한결의 행동을 쫓던 은한이 툭, 또 다른 폭탄을 내던졌다.

    “자고 가라.”

    “어?”

    “자고 가.”

    한결이 가방을 걸치다 말고 굳었다.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처럼 이상하고 어정쩡한 포즈였다.

    “춥잖아. 어차피 내일도 만날 건데. 그냥 자고 가.”

    “……진도가 너무 빠른데, 방울아. 물론 나는 언제 어디서든 준비가 돼 있어.”

    “……평소라면 쫓아냈을 텐데.”

    “진짜……? 진짜 자고 가라고?”

    장난기라곤 없는 말에 한결이 툭, 가방을 떨어트렸다. 전공책이 가득한 가방이 둔탁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은한이 그 가방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상한 의도는 일절 존재하지 않던 말인데 한결이 저리 반응하니 저도 기분이 묘했다.

    “나 혼자 있으면 땅굴 파고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자고 가라, 어?”

    “…….”

    “새벽에 하태준한테 찌질한 구남친처럼 자? 하고 연락할 것 같단 말이야.”

    은한이 이불 속에 구겨져 태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절 상상했다. 파르르 어깨가 떨렸다. 말도 못 하게 끔찍하다.

    미련 없이 가방을 버린 한결이 성큼성큼 은한에게 다가왔다. 그리 넓지 않은 자취방은 몇 초 만에 한결을 다시 은한의 앞으로 안내했다.

    무드등을 등진 한결의 넙데데한 그림자가 은한을 머리칼 하나 빼놓지 않고 삼켰다.

    “너는 그냥 그게 다일 수도 있는데. 나 오해해. 오해하고 싶어. 솔직히 이미 했어, 오해.”

    “…….”

    “나 변태라고 했잖아. 그새 까먹었냐?”

    “…….”

    “잘 생각해라, 방울아. 하태준한테 찌질한 구남친 짓 하는 게 나을지, 백한결한테 밤새도록 나쁜 짓 당하는 게 나을지.”

    너 지금 나 협박하니? 그게 뭐라고 험상궂은 표정까지 하며 경고하듯 말한다. 은한이 푹, 고개를 고꾸라트렸다. 그리고 푸흡 웃음을 흘렸다.

    “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줄 몰랐다?”

    “…….”

    “무슨 나쁜 짓을 어떻게 하실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 바이다.”

    한결의 콧구멍이 마구 벌렁거렸다. 그 우스운 얼굴에 은한이 킥킥 박장대소를 했다. 저렇게 멍청한 모습의 백한결이라니. 사진이라도 찍어 두고 싶을 정도다.

    아, 뭘 망설여. 찍으면 되지.

    은한이 더듬더듬 소파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핸드폰을 쥐었다. 카메라 앱을 실행하려 엄지를 움직이고 있는데, 핸드폰이 쑥 손을 빠져나갔다.

    허리를 숙인 한결이 집요하게 눈을 맞춰 왔다. 은한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해 줬다.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한결의 눈동자가 참 예뻤다.

    “농담이면 재미없다.”

    “…….”

    “삐질 거야.”

    “얼씨구.”

    “……진짜 나 자고 가?”

    은한은 답 대신 양손으로 한결의 귓바퀴를 잡았다. 쪽.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후 우뚝 솟은 콧대와 반질반질한 광대, 얇은 쌍꺼풀과 진한 눈썹에까지 입맞춤을 뿌려 댔다.

    “네 새끼만 남자냐.”

    “…….”

    “나도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자위하는 남자거든.”

    은한이 한결의 귓바퀴를 움켜쥔 채 말했다. 얘는 귓바퀴도 단단하다. 만지작만지작 손가락을 놀리고 있으니 한결이 초점 잃은 동공으로 은한을 응시했다.

    “방울이 너 되게…….”

    “엉?”

    “멋있다.”

    “…….”

    “박력도 있는 줄은 몰랐는데.”

    ……멍청한 새끼. 제가 쪼그마해서 좆만 하다 생각하고 있던 게 분명하다. 자기는 그리 당당하게 네 생각하면서 딸도 쳐. 그래 놓고. 은한이 엄지로 한결의 광대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어?”

    “자고 갈 거지?”

    “…….”

    한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굳건히 입술까지 말아 문 것이 전쟁 나가는 장군이라도 되는 듯했다. 은한이 강아지를 달래는 양, 툭툭 그의 볼을 두드렸다.

    “가서 씻고 와.”

    자야지.

    투닥탁. 화장실로 뜀박질치는 한결의 뒷모습에 은한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백한결이랑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이리 어색하다니. 침대에 함께 누운 게 한두 번이 아니고. 시험 기간엔 종종 끌어안고 세상모르게 잠을 잤었다. 물론 섹스어필이라곤 전혀 없이, 정말 끌어안고만 잤다. 수면 부족에 내몰려 베개에 머리를 붙이자마자 곯아떨어졌으니까.

    은한이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뚫어지라 주시했다. 섹스. 그걸 코앞에 두고 있다. 살면서 몇 번 읊조려 보지도 않은 단언데. 백한결이랑……. 뭐 첫 키스도 했는데 섹스쯤이야! 라고 생각해보려 하지만 좀처럼 긴장이 풀리질 않았다.

    “방울아. 긴장돼?”

    한쪽 팔을 괸 채 은한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결이 연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렇게 당차게 자고 가라 말할 땐 언제고. 지금은 관 뚜껑 덮이길 바라는 시체처럼 두 손을 고이 모아 천장만 노려보고 있다.

    어우, 귀여워. 지금이라면 진짜 은한을 잘근잘근 냠냠, 씹어 먹고 핥아먹고 빨아먹고 녹여 먹고. 온갖 나쁜 짓은 다 할 수 있을 듯했다.

    “아니. 전혀.”

    “그래?”

    그리 단칼에 부정하니 조금 배알이 꼴렸다. 저도 쿵쾅쿵쾅 뛰어 대는 심장을 추스르지 못했는데. 네가? 그런 얄궂은 마음에서였다.

    한결의 손이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은한의 허리춤에 다다라서 느려졌다. 그의 손이 살짝 옷자락을 들치고 미끈한 뱀처럼 살결을 더듬는다.

    은한은 평소보다 뜨거운 손에 움찔 어깨를 떨 만큼 크게 놀라 버렸다.

    어느새 한결의 손이 가슴팍까지 올라왔다. 만지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지금은 은한의 긴장을 풀어 주는 데 목적을 두기로 했다.

    “방울아.”

    “……어.”

    한결의 입술이 은한의 귓가로 다가왔다.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귓구멍을 울린다.

    “네 몸 되게 부드럽다.”

    은한이 목을 움츠렸다. 그의 낮은 음성이 가슴팍을 쓰다듬는 손길보다 더 자극적인 것 같았다.

    한결의 손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도드라진 갈비뼈를 쓰다듬기도 하고, 판판한 가슴살을 모아 주무르기도 했다.

    시근덕거리는 숨만 내뱉고 있던 은한이 휙, 몸을 옆으로 돌렸다.

    “나도 만질래.”

    “……얼마든지.”

    은한의 눈동자가 수많은 감정에 절여져 있다. 그중 가장 큰 게 오기라 한결은 웃음을 억누르는 게 힘들었다. 저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작은 손이 어색하게 윗도리 안으로 스며든다.

    생각보다 차가운 손가락에 한결이 흠칫거렸다. 제 목덜미 어딘가를 향해 있던 은한의 시선이 확 치켜 뜨였다.

    “좋아?”

    “……뭐가?”

    “방금 움찔했잖아.”

    “네 손이 차가우니까 그렇지.”

    “그럼 안 좋아?”

    “……좋아.”

    한결이 헛숨을 삼켰다. 고작 아랫배를 매만져 놓고 좋냐니. 제가 그를 너무 이르게 잡아먹으려 한 건가, 싶다.

    은한의 손이 조금 더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돌도돌 도드라진 복근이 신기해 한참이나 주물러 댔다. 공강 시간마다 교내 헬스장에 간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지니 또 새로웠다.

    한결이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동 많이 했어.”

    “그런 것 같아.”

    “너한테 멋있어 보이려고.”

    목소리가 자꾸만 가늘어졌다. 어차피 둘밖에 없는 공간이라 그냥 말해도 되는데, 음성에 소곤소곤 쇳소리가 섞인다. 그게 뭐라고 입술이 바짝 마를 만큼 자극적이었다.

    “나는 안 했는데…….”

    은한이 제 배를 만지작거리는 한결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건 딱 질색이다. 물렁한 가죽이 괜스레 민망해졌다. 그나마 홀쭉한 배를 위안 삼았다.

    “내가 만들어 줄까?”

    “뭘?”

    “복근.”

    “그게 네가 만들어 준다고 만들어지는 거냐?”

    은한이 무슨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한결이 훌쩍, 몸을 올려 순식간에 은한의 위로 올라탔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팔을 엑스자로 꼬아 훅,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리곤 평소보다 조금 세게 은한의 턱을 쥐었다.

    부딪히는 입술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으응…….”

    누워서 하는 키스는 처음인데, 또 새로웠다. 목구멍까지 쑤셔 넣어지는 한결의 혀가 조금 버거우면서도 간절했다. 쪽쪽쪽, 애타게 그의 타액을 집어삼켰다. 어느새 은한의 후드도 땅을 뒹굴었다. 시린 공기가 살갗을 휩쓸고 지나갔다.

    간간이 부딪치는 배가, 가슴이, 갈비뼈가 오싹한 무언가를 제공한다.

    쪼옥, 쪽. 입술이 분주하게 붙었다 떨어짐을 반복했다. 한결의 손이 츄리닝 바지를 끌어 내렸다. 은한이 저도 모르게 확 다리를 오므렸다.

    “뭐…… 뭐…….”

    “바지 입고 섹스할 순 없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나도 벗을게.”

    잠깐 침대 아래로 내려간 한결이 훌떡훌떡 재빠르게 옷가지를 벗어 던졌다. 이제 두 사람이 입은 거라곤 손바닥만 한 드로즈가 전부다.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한결이 조심조심 은한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부끄러움에 질끈 눈을 짓이기는 은한이 사랑스러웠다.

    우리가 정말 섹스를 하는구나. 너와, 내가. 마음이 맞아서. 이렇게 온기를 공유하는구나.

    사무칠 정도로 행복했다.

    은한의 페니스는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낯선 감각에 어쩔 줄 모르면서도 몸집을 키운 페니스를 보고 있자니 어금니가 간지러웠다. 이러다 진짜 그를 씹어 먹을지도 모르겠다는 기이한 생각을 했다.

    “흐앗!”

    한결이 검지와 엄지로 살짝 기둥을 쓰다듬었다. 깜짝 놀란 은한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덩달아 놀란 한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너야말로……!”

    “어?”

    “거길 왜 만져!”

    시뻘겋게 달아오른 은한을 찬찬히 살피던 한결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애를 데리고 뭘 하겠다고.

    “그럼 키스하다 손잡고 자는 게 섹스겠냐.”

    “그, 그렇진 않겠지만!”

    “방울아.”

    “…….”

    “천천히 해도 돼.”

    왜 그렇게 놀라. 한결이 가만가만 은한의 등을 쓰다듬었다. 씩씩, 거칠게 움직이던 은한의 가슴팍이 잔잔해졌다.

    “아냐. 할 거야. 그냥…… 처음이라서 그래.”

    “나도 처음이야.”

    “근데 넌 어떻게 이렇게 능숙하냐?”

    “……시뮬레이션을 존나 돌려 봤거든.”

    큼큼, 한결이 켜져 있지도 않은 TV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변태라 수십 번도 더 말했지만 낱낱이 까발려진 기분이라 영, 쑥스러웠다. 은한이 꿈뻑꿈뻑 눈을 깜박이며 한결의 옆선을 살폈다.

    시뮬…… 레이션……. 변태 새끼…….

    한결을 흘겨보며 숨을 고르던 은한이 덥석, 그의 드로즈 위로 손을 올렸다.

    “계속하자.”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은한이 어색한 폼으로 한결의 페니스를 쓰다듬었다. 굵직하고 두꺼운 페니스가 말도 못 하게 낯설었다. 세상에 제 것을 제외하고 낯설지 않은 페니스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간지러운 은한의 손가락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결이 순식간에 드로즈를 벗었다.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주한 살덩이에 은한이 요상한 신음을 내뱉었다.

    “으헉.”

    “너도 벗어.”

    “나, 나도?”

    “아니면, 벗겨 줘?”

    은한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후다닥 속옷을 벗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이불을 뒤집어썼다. 남자의 알몸뚱이야 찜질방이나 수영장이나 어딜 가든 쉽게 볼 수 있는 건데 왜 이리 민망하고 수치스러운지. 방금 선악과를 베어 문 아담이라도 된 것 같았다.

    “불 꺼줄까.”

    한결이 은한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은한이 턱을 내저었다. 은한은 제 앞에 있는 사람이 한결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드러난 가슴팍도, 벗은 아랫도리도 다 처음 보는 것이다. 익숙한 건 한결의 얼굴뿐이었다. 섹스라는 행위가 끝날 때까지 한결의 얼굴은 아주 좋은 버팀목이 되어 줄 터였다.

    “이리 와.”

    한결이 톡톡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은한이 침대 모서리 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민망하게 웃은 은한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마저도 어정쩡한 거리에서 멈췄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한결이 얇은 허리를 답삭 쥐어다 훅 끌어당겼다. 은한의 마른 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금세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한결이 톡, 은한의 페니스를 건드렸다.

    “만지고 싶어.”

    “…….”

    “만져도 돼?”

    한결의 진한 눈동자에 온통 저뿐이다. 흐릿한 조명 아래서도 그게 신기할 정도로 또렷이 보였다. 은한이 괜찮다는 듯 한결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곧 커다란 손이 다정하게 페니스를 쥐어 왔다. 그 선연한 감각에 은한이 꽉 입술을 깨물었다.

    “흐…….”

    기둥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귀두로 목적지를 옮겼다. 단단한 엄지가 귀두를 짓누르듯 쓰다듬는다. 순식간에 아랫도리로 피가 몰렸다. 부끄러움에 식었던 살덩이가 단단하게 굳어 간다. 한결이 집요하게 그것을 응시했다.

    “으응, 보…… 지 마…….”

    “싫어. 다 볼 거야.”

    한결이 쪽쪽 은한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내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손길도 한층 끈적해졌다. 은한의 허리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멀어지는 게 싫어서 허리가 따라갔다. 한결이 그에 칭찬하듯 조금 더 빠르게 위아래로 손을 움직였다.

    “하윽. 으…… 읏…….”

    섹스라는 거. 좋은 거구나.

    은한이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샤워하면서 대충 해치우듯 하던 자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꼬리뼈가 간지럽고 단전 아래가 찌릿찌릿했다.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가만히 있질 못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그때, 문득 몸이 들렸다. 그리고 안착한 곳은 한결의 허벅지 위였다. 은한이 눈을 크게 뜬 채 한결을 쳐다봤다. 뭔데. 왜 그러는데. 그런 시선이었다.

    “으앗!”

    한결이 한 손으론 은한의 엉덩이를 틀어쥐고, 반대 손으로 덜렁이는 두 페니스를 한 번에 잡았다. 단단하고 뜨거운 살덩이 두 개가 비벼졌다. 놀란 은한이 한결의 목덜미를 가득 끌어안았다.

    “후우……, 방울아…….”

    한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숨소리가 고막에 직통으로 때려 박혔다. 키스하면서 숱하게 들어오던 숨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훨씬 눅눅하고, 흥분에 가득 차 있다.

    서로의 페니스에 짓눌린 귀두가 규칙 없이 어그러진다. 왜 나왔는지 모를 미끈한 액이 부딪히는 살덩이를 더 야하게 만들었다.

    “으응, 읏!”

    “하아, 하아…….”

    한결의 손이 속도를 더해 갔다. 그러잖아도 뜨거운 페니스가 마찰열에 타오르는 듯한데. 입술 새로 한 번도 내뱉어 본 적 없던 소리가 흘러나갔다. 은한은 그게 제 것인지, 한결의 것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흐, 음…… 아…….”

    사지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살아 있는 부위라곤 한결에게 잡혀 있는 페니스뿐이다. 은한이 더운 숨을 토해 내며 위아래로 허리를 움직였다.

    숨이 모자라다. 흐읍, 흐읍. 간신히 공기를 들이키면 폐부 가득 한결의 냄새가 차올랐다. 몸도, 정신도 한결에게 침몰해 갔다. 그리고 완전히 그에게 잠겼을 때,

    퓻- 하얀 정액이 한결의 손을 더럽혔다. 뜨거운 탁액을 뒤집어쓴 그의 페니스도 곧 절정을 토해 냈다.

    은한이 풀썩 쓰러지듯 한결의 승모근에 고개를 파묻었다. 비릿한 냄새가 한결의 체취를 해치고 코를 찔렀다.

    “섹스 세 번 하면 진짜 복근 생길지도 모르겠다.”

    뭐 얼마나 격렬하게 움직였다고 허벅지와 아랫배 근육이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쪽쪽, 쪽. 은한의 어깨에 키스하던 한결이 작게 웃는다.

    “잠 온다…….”

    은한이 묵직한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시험 기간 내내 잠이 부족했는데, 어제도 태준을 신경 쓰느라 밤새 한숨도 못 잤다. 그런 상황에서 뜨끈한 한결의 온기에 취해 절정까지 다다르고 나니 온몸이 노곤히 녹아내렸다.

    지금 자면 완벽해. 기절하듯 잘 수 있을 것 같아. 못해도 12시간 침대에서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서서히 늘어지는 은한의 몸을 느낀 한결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자게?”

    “응. 잘래.”

    “섹스하다 말고?”

    “다 했잖아, 섹스.”

    “아?”

    “어?”

    당혹 서린 시선이 허공에서 엉켜 들었다. 한결의 입술이 벙긋벙긋 이상한 모양새로 움직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한결이 은한의 볼을 양손으로 쥐었다. 말간 얼굴에 졸음이 가득하다.

    “남자끼리 섹스 어떻게 하는지 알아?”

    “뭐…… 방금 한 것처럼……?”

    “하아…….”

    하. 이렇게 어이가 없을 수가. 정말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당황은 배가 되고, 탈력감은 곱절이 됐다. 모른다니! 섹스가 뭔지 모른다니! 한결은 손톱만큼의 과장을 보태지 않고,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그것도 모르고…….”

    “모른다고? 내가? 뭘?”

    은한이 뻔뻔하게 되물었다. 차라리 장난이라 믿고 싶은데 그저 수면 욕구로 그득한 눈동자엔 거짓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방울아.”

    “엉?”

    “남자끼리…… 그러니까 게이도 섹스를 해.”

    “알아. 우리도 방금 했잖아.”

    “아니, 그러니까…… 후…… 삽입 섹스를 한다고. 남녀처럼.”

    드문드문 이어지는 한결의 말에 은한이 미간을 좁혔다. 삽입 섹스라 하면 페니스를 어딘가에 넣고 흔듦을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넣는 것만 가능하지 않은가.

    은한은 섹스도 낯설었지만, 게이는 완전 문외한이라 한결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로?”

    입? 순수하게 물었다. 정말 모르니까 묻는 거였다. 한결이 또 벙긋벙긋 입술만 움직였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은한의 양쪽 엉덩이를 부여잡았다. 찬바람이 익살맞게 벌어진 엉덩이 사이를 쓸고 지나갔다. 은한의 등허리가 부르르 경련했다.

    “여기로.”

    “여기……? 설마…….”

    은한의 동공이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한결을 바라봤다, 한결 뒤의 허공을 바라봤다,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은한이 괴성을 지르며 한결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니까 뒷구멍에 제 페니스의 두 배에 달하는 한결의 페니스가…… 삽입……. 가뜩이나 하얀 은한이 새파랗게 질렸다.

    “미친놈아! 그걸 어떻게 뒤에 넣어! 안 해! 안 해, 섹스! 우리 뭐더라……, 어! 플라토닉 그거 하자, 그거!”

    발작하듯 펄쩍 뛰는 은한에 한결의 입이 떡, 벌어졌다. 플라토닉이라니. 평생 감히 입에도 담아 본 적 없는 단어였다. 지금도 한 번밖에 빼내지 못한 페니스가 달아올라 꺼떡이는데 플라토닉이 웬 말인가!

    “아까는 일주일에 자위 세 번 하는 남자라며!”

    “야, 그건 분홍 소시지만 한 게 내 거기, 어? 거기 들어온다는 걸 몰랐을 때지!”

    은한이 마트에서 파는 3천 원짜리 분홍색 소시지를 떠올리며 파들파들 어깨를 떨었다. 섹스하다 죽고 싶진 않다. 병원에 실려 가고 싶지도 않다. 목욕탕에서도 보지 못한 크기의 페니스를 뒤에 넣으면 죽거나 실려 가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할 터였다.

    절대,

    싫다.

    “나는 앞으로 성욕이 없는 인간이야. 득도했다고. 네 무지막지한 좆 때문에.”

    “하?”

    “그렇게 알고. 그냥 코- 자자.”

    은한이 열심히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곤 탕탕, 옆자리를 두드린다. 반쯤 허물어진 한결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한결이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은한의 옆에 몸을 뉘었다.

    “진짜…… 플라토닉 해?”

    “어. 해.”

    장난이지? 장난이라고 말해 줘. 그런 의미로 한 말인데 은한은 단호하게 긍정을 해 왔다. 한결이 참담한 표정으로 휴지를 둘둘 말았다. 그리고 서로의 몸에 눌어붙은 정액을 닦아 냈다. 휴지를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 순간에도 알몸을 드러낸 은한이 추울까, 싶어서.

    “그럼 나는 어쩌고?”

    “뭘 어째?”

    “나 변태잖아. 맨날 혼자 네 생각하면서 딸 쳐?”

    “…….”

    은한이 흐음, 하며 고심했다. 그래. 고백하기 전부터 딸을 치네, 마네 했던 백한결이다. 플라토닉이라는 거짓 이름을 뒤집어쓰고 혼자 버려두기도 영, 미안한 짓인 건 맞았다. 하지만 항문 파열로 병원을 가고 싶진 않다고.

    엉망으로 꼬여가는 머릿속에 은한이 잔뜩 미간을 구겼다.

    “어렵다.”

    “나도.”

    “일단 자자. 나 피곤해.”

    “……알았어.”

    한결이 부루퉁하게 은한을 끌어안았다. 이제 은한은 퍽 익숙하게 한결의 품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 작은 몸에 한결은 조금, 기분이 풀렸다.

    창밖으로 쌩쌩 바람이 몰아친다. 가끔 덜거덕거리는 창문의 악 소리가 들려왔다. 서로의 온기로 달아오른 이불 속이 둘만의 벙커처럼 느껴졌다. 가라앉는 은한의 숨소리를 감상하던 한결이 마른 입술을 뗐다.

    “방울아.”

    “어어…….”

    반쯤 잠이 든 은한이 흘리듯 답했다. 한결이 은한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드러난 이마에 쪽, 입술을 내렸다.

    “나 되게 섭섭하고 우울한데, 그래도 네가 싫다면 안 할 거야.”

    다짐하듯 말하는 한결에 은한이 살풋 눈꺼풀을 올렸다. 말똥말똥한 그가 열심히도 절 내려다보고 있다. 은한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 존나 고맙다.”

    촉. 한결이 은한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은한아. 좋아해.”

    “……나도.”

    다시 눈을 감고 한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쿵, 쿵, 쿵. 일정한 심장박동이 자장가처럼 들려와서 금세 잠이 들었다.

    흐지부지 끝난 섹스긴 하지만,

    스무 살 첫 경험으론 그렇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그래서 더 좋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아니. 씨발, 분홍 소시지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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