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백한결, 백한결 그리고 백한결 (2/11)

02. 백한결, 백한결 그리고 백한결

“뭐가?”

두 번쯤 숨을 쉬고 뱉던 은한이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한결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어?”

“뭐가 너야, 인데?”

“…….”

수초간 은한의 얼굴 위로 한결의 시선이 분주히 돌아다녔다. 몽롱한 동공. 느릿하게 깜박이는 눈꺼풀. 발갛게 익은 볼. 진한 술 냄새를 뱉어 내는 통통한 입술.

아아. 방울이 취했구나.

한결이 픽, 하고 조소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담아 두던 말을 이따위로 하다니. 시뻘건 깍두기 국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었다. 아주 볼품없는 죽음이 되리라.

“됐다. 별 거 아냐.”

“별 거 아니라고?”

“어.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우리 소중한 방울이 길 잘못 들어서 굴러갈라. 한결이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일어섰다. 은한이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얇은 몸뚱이에 한결이 단단히 그의 팔뚝을 잡아 쥐었다.

“야. 내 취했나 보다.”

은한이 헤실헤실 눈을 휘었다. 술을 먹으면 훨씬 더 싱그러워지는 눈웃음이다. 한결이 남몰래 그 장면을 가슴속에 담았다.

“그런 것 같네.”

“계산 좀 해도.”

은한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한결에게 내밀었다. 한결이 군말 없이 그의 카드를 쥐고 카운터로 향했다. 어째 오늘은 둘이 왔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웃음으로 답을 때웠다.

저녁은 아침보다 훨씬 추웠다. 은한은 적잖이 취해 놓고도 춥다며 어깨를 한껏 좁힌 채 종종걸음을 걸었다. 주홍빛 가로등 아래에 나부끼는 은한의 머리칼을 훔쳐보던 한결이 입고 있던 야구 점퍼를 벗었다. 그리고 털썩, 아무렇지 않게 은한의 어깨 위로 얹었다.

커다란 점퍼는 이불처럼 은한을 푹 감싸 안았다.

“뭔데?”

“추워 보여서.”

“니는?”

“나는 술 취해서 안 추워.”

“…….”

은한이 희미한 시선으로 한결을 흘겼다. 넙데데한 어깨가 각이 꽉 잡혀 있는 게 추워 보이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뭐라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규칙적으로 이어진 보도블록을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벽화 앞에 다다랐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그 앞에 멈춰 섰다. 은한이 검지로 송충이 같은 할머니의 눈썹을 벅벅 문질렀다. 그런다고 지워지는 게 아닌 걸 알지만.

“암만 봐도 할머니 눈썹 이상타.”

“왜. 충분히 매력적인데.”

“지랄.”

은한이 조소했다. 백발에 눈썹이 짱구보다 진한 할머니라.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만, 초등학교 담벼락에 그려져 있기엔 영 이상했다.

“솔직히 이 눈썹은 원빈이 해도 몬생겼을 거라. 내 눈썹이 이런 눈썹이라 생각해 봐라. 끔찍하재?”

부끄러워서 같이 다니겠냐고. 은한이 버릇처럼 뒤꿈치로 한결의 발등을 콱콱, 짓밟았다. 한결은 오늘도 역시 반응이 없었다. 그저 흐흐, 웃을 뿐. 할머니 눈썹과 은한을 번갈아 보던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귀여울 것 같은데.”

“…….”

거짓 하나 보태지 않은 진심이었다. 은한이라면 무 도사 배추 도사처럼 눈썹을 기른대도 귀여울 듯했다.

한결은 은한이 제 말을 알량한 농담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이제껏 귀엽다는 말은 수백 번도 더 했고, 그때마다 은한은 비속어 섞인 답으로 그 말을 무시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은한이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한결을 응시했다. 가로등 빛을 담뿍 머금은 은한의 눈동자는 그 순간에도 반짝반짝 빛났다.

한결이 애써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왜. 내가 또 이상해?”

“어. 이상해.”

은한은 긍정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결은 간신히 유지하던 웃음마저 사그라트려야 했다. 언제 술에 취했었냐는 듯 하얀 얼굴에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쿵쾅쿵쾅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은한의 앞에서 늘상 뛰던 심장박동과는 달랐다.

차분하지만 시린 눈으로 한결을 보고 있던 은한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세 발자국쯤 걸을 때까지 멍청하게 서 있던 한결이 헐레벌떡 따라 걸었다.

술을 먹을 때마다 데려다주던 은한의 집인데 오늘따라 멀었다. 한결에게도 그랬고, 은한에게도 그랬다.

은한의 자취방 앞 가로등은 유독 밝다. 고장 나서 새로 갈기라도 했는지, 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다른 가로등과 달리 홀로 백색이었다.

한결이 은한에게 막 작별의 인사를 건네려 할 때였다. 은한이 먼저 입술을 뗐다.

“담배 피울래?”

“……어.”

쓸데없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인 한결이 안주머니를 뒤지려다 아차, 했다. 외투가 은한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 픽 웃은 은한이 한결의 점퍼 주머니를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마치 제 것처럼 한결에게 한 개비를 주고, 저도 한 개비를 물었다.

불을 붙이고 후읍, 숨을 들이쉬었다. 목구멍으로 쌉싸름한 연기가 울컥울컥 넘어간다. 혀끝에 남아 있던 알코올이 연기에 덮여 침몰했다.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면 담배 끄트머리가 붉게 익었다. 담배가 반쯤 사라질 때까지 한결은 은한의 담뱃불을, 은한은 한결의 담뱃불을 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쓴 연기에 은한이 혀로 볼 안쪽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낮게 한결을 불렀다.

“야.”

“어.”

한결이 한껏 머금은 연기를 제대로 뱉어내지도 못하고 답했다. 은한이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전봇대에 아무렇게나 비벼 껐다.

“너는 내가 여자로 보이냐?”

“…….”

그의 집으로 오는 내내 암담한 미래를 가늠하던 한결이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직설적인 은한을 잘 알면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결이 잘근잘근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다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근데 왜 내가 좋아?”

“…….”

이번에도 은한의 질문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또 다. 또 받아들이는 건 오롯이 한결의 몫이었다.

취한 게 아니었구나. 한결이 건조한 눈두덩을 벅벅 세게 문질렀다. 밝은 백색등에 눈이 아팠다. 정작 폭탄을 던진 건 자신인데, 차마 감당이 안 됐다.

침묵에 침묵만 더하는 한결에 은한이 미간을 좁혔다. 전봇대에 기대어 선 그가 대답을 종용했다.

“나는 여자가 아닌데.”

어쩌면 은한은 저도 모르게 한결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야, 하는 친구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근데 그건 단지 말을 이해한 것뿐이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 게 아니란 소리였다. 은한은 담담한 척하고 있지만 정말 척에 불과했다. 감히 생각도 해 보지 않았던 한결의 마음이라 혼란은 배가 되고 또 곱절이 됐다.

고개를 고꾸라트리고 울퉁불퉁한 땅바닥만 주시하고 있는 한결은 참 그답지 못했다. 하얀 조명이 그의 온몸으로 떨어졌다. 그게 꼭 묵직하고 차가운 눈에 뒤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은한이 걸치고 있던 점퍼를 한결에게 내밀었다. 한결은 그걸 보기만 할 뿐, 돌려받지 않았다. 은한은 고집스레 그것을 내밀고 있었다. 결국 진 것은 한결이었다.

그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점퍼를 움켜쥐었다. 한결이 후우, 한참이나 머금고 있던 연기를 뿜어냈다. 머리가 기이할 만큼 맑아졌다.

“내가 게이인가 보지.”

“뭐?”

“솔직히 게이인지는 모르겠어. 그냥 네가 좋고. 혹시나 해서 다른 남자도 열심히 살펴봤는데 별 관심 없고. 그게 다야.”

“하…….”

어느새 한결의 표정은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모든 일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무심한 표정. 이제 당황한 건 은한이었다. 은한이 대꾸 없이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냈다. 아직 입안에 담배의 잔향이 가득한데 꾸역꾸역 연기를 머금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뭐 어쩌자고 한 소리 아닌데.”

“뭐 어쩌자고 한 게 아니면 계속 티 안 내고 있었어야지, 씹새야. 네 새끼가 오늘 한 말이 고백이랑 뭐가 달라.”

은한이 으르렁거렸다. 작은 덩치에 그리 유순한 얼굴이면서, 화내는 건 제법 무섭다. 아아, 이마저도 좋으니 어찌한다.

한결이 필터까지 간당간당하게 타들어 간 담배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흐릿한 불씨가 여기저기로 날아다녔다.

“그래. 고백한 거야.”

“뭐?”

“네가 나한테만 따로 전시회 가자고 해서 들떴고. 술 먹고 웃는 네가 너무 귀여웠고. 그런 너랑 눈 맞추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

“미안하다.”

“…….”

“네 말 듣고 보니까 내가 생각 없이 일 친 게 맞아. 존나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뭐라 할 말이 없네.”

한결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야 은한을 늘 좋아해 왔으니 평소와 달라지는 게 없다. 허나 은한은 분명 달라질 터였다. 저와의 관계도, 태준과 진우와의 관계도. 그 모든 걸 제 말 한마디가 어그러트린 거다. 은한에게는 날벼락과 다름없다.

자괴감에 눌려 침몰해 가는 한결에 은한은 벙긋벙긋 입술만 움직일 뿐, 별다른 소리를 만들지 못했다.

저 꼴을 보고 있으니 홧홧하게 타오르던 분노가 순식간에 식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는 게 살갗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은한이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우리 이제 어떡해?”

“…….”

“친구 할 수 있겠냐? 너도, 나도?”

한결의 표정이 참담히 무너져 내렸다. 친구 사이도 유지하지 못 한다니. 그 말은 은한을 다시 볼 수 없음을 뜻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하나. 그럼 은한의 성격에 절 걷어차고 팩, 뒤돌아 가 버릴 텐데.

일 초가 멀다고 휙휙 바뀌는 한결의 낯에 은한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렵다. 어려워. 180이 훌쩍 넘는 공대남과 썸을 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아, 이건 썸이 아닌가. 무튼, 고백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일단 가. 춥다.”

“…….”

“가라고. 너야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했을 테지만, 나는 아니잖아. 나도 생각 좀 해 보자.”

은한이 차갑게 얼은 자신의 볼을 문질렀다. 졸리다. 질퍽하니 술을 마시기도 했고, 몇 시간이나 너른 코엑스를 돌아다녔더니 피곤했다. 거기다 떠안게 된 한결의 마음까지. 얼른 집에 들어가 뜨끈한 물로 길게 샤워를 하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흘끔흘끔 은한을 살피던 한결이 슬그머니 입술을 뗐다. 찬 바닥에 한참이나 서 있던 발이 꽁꽁 얼어 저렸다. 손끝도 시렸는데 안달 난 마음이 먼저라 하나도 춥지 않았다.

“내일도…… 모닝엔젤 할까?”

“뭐?”

“해장도 할 겸…….”

“하?”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은한에 한결이 씨익 입술을 가로로 길게 찢었다. 참, 어색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냉정한 은한은 그 미소에 응해 주지 않았다. 한결의 입가에서 금세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갈게.”

그의 두꺼운 어깨가 축,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은한의 입술이 모나게 뒤틀렸다. 저 산만 한 덩치가 풀이 죽은 게 왜 이리 보기 싫은지 모르겠다. 설마 저도 한결을 좋아하나, 잠시 상상해 봤지만, 등줄기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아마 그저 절친한 친구의 우울함이 싫은 것이리라. 느리게 멀어지는 한결의 등짝을 보며 은한이 이미 죽은 담배꽁초를 한 번 더 짓이겼다. 그리고는 소리 높여 한결을 불렀다.

“야, 백한결!”

“……어?”

“나 내일 늦잠 잘 거니까 열한 시 넘어서 와.”

한결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은한은 홱 뒤를 돌았다. 작은 몸뚱이는 금세 사라졌다. 그래서 한결은 가로등이 뿜어내는 하얀 빛만 주시하고 있어야 했다.

우습고 유치하지만, 홀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가로등 빛이 꼭 천국으로 향하는 길처럼 느껴졌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한결의 얼굴에 달이 흠뻑 피어났다.

* * *

두 사람의 분위기는 며칠 전 식당에 들어섰을 때와 확연히 달랐다. 은한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딱히 반응이 없었고, 한결 역시 조용히 그가 좋아할 만한 반찬만 밀어 줄 뿐, 따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침도 점심도 아닌 애매한 시간의 일요일. 자취방이 가득한 길목에 있는 식당은 손님이 없다. 그 덕에 두 사람의 고요가 더더욱 묵직하게 온몸을 짓눌러 왔다. 한결은 밥 한 숟갈에 반찬으로 은한의 눈치를 봤다. 어찌나 짭조름한지 다른 반찬이 필요치 않았다.

“야. 모닝엔젤. 뭘 자꾸 꼬나 봐.”

참다못한 은한이 물었다. 질문이기보다는 따지는 것에 가까웠다. 한결이 깨작거리던 수저를 내려놨다.

“눈치 보는 건데.”

“그러니까. 왜 눈치를 보느냐고.”

“…….”

“너 때문에 밥을 못 먹겠잖아.”

은한은 그리 말하면서도 수저 가득 밥을 퍼 입으로 날랐다. 그것으로 모자라 그 작은 입에 어묵볶음도 집어넣고 김치도 적당한 크기를 찾아 쑤셔 넣는다. 귀엽게.

한결이 은한 몰래 식탁 아래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래위로 회색 추리닝을 맞춰 입은 은한이 말도 못 하게 귀여운데, 평소라면 볼을 왕창 뭉개 줬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손바닥이 간질간질 난리가 났다.

열심히 우물우물 밥을 씹던 은한이 꿀꺽, 음식물을 삼켰다. 그리고 밤새 머릿속을 나돌아 다니던 말을 토해 냈다.

“내가 씹어 먹고 싶게 생겼냐?”

“어……?”

너무나 뜬금없는 은한의 말에 한결의 턱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한결은 은한의 화법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이쯤이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를 겪어 왔음에도 그랬다. 벅벅 뒷덜미를 긁고 있으니, 은한이 젓가락으로 소시지 하나를 집어 한결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내 입술이 통통해서.”

“어?”

“씹어 먹고 싶다고.”

“…….”

“이렇게 소시지를 씹듯이.”

“…….”

“씹어 먹고 싶다고 했잖아, 네가.”

은한이 부러 소시지를 꽉꽉 깨물어 먹었다. 탱탱한 소시지가 투둑, 툭 터지는 소리가 한결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어……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소시지 씹듯이는 아니고…….”

“그럼?”

“그냥…… 말랑말랑하고 탱탱해 보이는 게…….”

“보이는 게?”

“키스하고 싶다는 말이었지.”

한결이 비죽, 웃었다. 그 찰나에 은한과 입을 맞추는 절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런 한결의 모습에 은한이 집었던 소시지를 투둑, 떨어트렸다. 떨어진 소시지가 데구르르 굴러 한결의 공깃밥 앞에서 멈춰 섰다.

“에이. 마지막 소시지였는데. 더 달라고 할까? 너 이거 좋아하잖아.”

휴지로 소시지를 집어 치운 한결이 이모를 불렀다. 그가 능청맞게 반찬을 추가하고, 한가득 쌓인 소시지가 다시 나올 때까지 은한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한결이 앞으로 소시지를 내밀어 주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뭘…… 하고 싶다고?”

“키스.”

“그 키…… 그 단어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정상이냐?”

“내가 너 좋아한다니까?”

“…….”

그래. 보통의 연인 관계는 그렇다. 마음도 섞고 몸도 섞고. 그 정도는 은한도 잘 알고 있었다. 욕을 뱉으려 입을 뗐던 은한이 꾹,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상상하면서 딸…… 도 친다고 했지. 설마설마 그 대상이 저일 줄이야.

진짜 내 생각하면서 딸치냐, 는 질문을 하려다 말았다. 긍정이 들려올까 두려워서.

머리 한 귀퉁이에 사는 리틀 은한이 한결과 입을 맞췄다. 그걸로 모자라 훌떡훌떡 옷을 벗더니 한결과 몸도 맞췄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속이 메슥거렸다. 없어서 못 먹는 소시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어째 손이 안 갔다.

은한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가자.”

“벌써? 너 아직 한 공기도 다 안 먹었는데?”

한결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입맛 없어. 갈래.”

“…….”

한결은 말없이 짐을 챙기는 은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보다 한참 작은 손이 두꺼운 외투에 가려진다. 늘 뒤집어쓰던 모자도 앞으로 꾹 눌러쓴 채 눈을 피한다.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목도하고 있으니 참, 슬펐다. 슬퍼할 자격이 없는데도 그랬다.

은한이 막 크로스백까지 멨을 때, 한결이 후, 답답한 마음을 뱉어왔다.

“내가 너랑 키스하고 싶다는 게, 입맛까지 떨어질 정도야?”

“뭐?”

“역겹고 구역질 나고 그래?”

“……백한결.”

한결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분노나 실망 때문은 아니고, 제가 너무 싫어서였다. 저도 처음 은한을 좋아한다, 깨달았을 때 참 많은 방황을 했다. 얼마나 놀랍고 당혹스러웠던가. 저야 홀로 오랜 시간 동안 은한의 주위를 맴돌며 제 감정을 정의했지만, 은한은 아니었다. 아마 저보다 훨씬 더 당황스러울 터였다.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좋아하는 밥을 앞에 두고 일어설 정도면 얼마나 역겹다는 건가.

한결은 차마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은한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상투적인 표정으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싫으면 안 할게.”

“야.”

“친구…… 그거 다시 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밥 먹고 가라.”

“백한결!”

한결은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식당을 떠났다. 식탁 위에 만 원짜리 두 장만 덩그러니 남았다. 꽉, 입술을 깨문 은한이 그를 따라나섰다. 벌써 저 멀리 길을 따라 걷고 있는 한결의 뒷모습이 보였다.

“…….”

은한은 딱 두 발자국만 뛰었다. 그리고 멈춰 섰다. 잡아서 어떡할 건데. 그냥 친구 하지 말자고 그래? 아니면, 잘 생각했다. 얼른 마음 정리해라. 그리 말해? 것도 아니면 일단 사귀어 보자, 그럴 거야?

“아으으…….”

은한이 신경질적으로 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급하게 나오느라 로션도 바르지 못한 살갗이 쓰라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나중에 만날걸. 괜히 멀어질까, 두려워서 아침 먹자는 그의 말을 수락해 버리고 말았다. 충분히 생각하고 만났어야 했는데.

은한은 한결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전혀 가늠해 보지 않았다. 일평생 고백을 받아 본 게 처음이라 상대방이 얼마나 고민했을지, 망설였을지 알 리 없었다.

그 말로가 이러하다. 은한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린 한결의 뒷모습에 아스라이 말을 흘려보냈다.

“역겨운 거 아닌데.”

구역질나고 역겹고,

그런 거 아닌데.

* * *

시험 기간 내내 비가 왔다. 장마철도 아닌데 무슨 비가 이렇게까지 오는지 모르겠다. 비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온도는 낮아졌다. 겨울이 이르게 오려나 보다.

[태준: 방울아. 오늘도 바빠?]

[태준: 방울이 얼굴 까먹겠어 ㅠㅠ]

은한이 멍하니 반짝이는 핸드폰을 쳐다봤다. 일주일이 좀 넘는 시험 기간 동안 은한은 공대남 셋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오늘 저녁? 팀플 있는데. 내일? 내일은 선배님이랑 공부하기로 했어. 밥? 먹었는데. 술? 무슨 시험 기간에 술이야.

그럴싸한 변명으로 태준과 진우의 부름을 모두 거절했다. 그동안 한결은 채팅방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채팅방을 아무리 올려도 나오지 않는 한결의 이름에 은한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다. 방금 시디 과제와 함께 리포트를 제출했다. 한결과 함께 갔던 디자인 페어 리포트였다.

무감각하게 기계처럼 타이핑을 하면서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는지 모른다. 왜 연락 안 하지. 진짜 독하게 마음 정리 중인가. 아니 뭐 그렇게까지 빠를 필요는 없는데. 모닝엔젤이 필요해. 시험 기간 내내 아침 못 먹어서 눈앞이 흐릿할 정도라고.

그런 잡념 때문에 고작 5장짜리 리포트를 이틀 내내 붙잡고 있었다.

[진우: 오늘 시험 끝나는 날 아니야? 술 먹자, 방울아.]

우두커니 복도에 서 있으니 답을 기다리지 못한 진우가 독촉을 해 왔다. 태준의 메시지가 연달아 이어졌다. 공대남 셋은 은한보다 이틀이나 먼저 시험기간이 끝난 상태였다.

[태준: 사실 우리는 벌써 할매국밥집임. 오후 세 시부터 달림.]

[태준: 빨리 왕.]

[태준: 방울아 빨리와아아아!]

은한이 핸드폰의 모서리를 문질렀다. 어쩌지. 갈까. 가면 백한결 있을 텐데. 괜찮을까. 아니…… 나야 괜찮겠지만 걔가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는데 툭, 누군가가 어깨를 쳤다.

“은하니!”

미현이었다. 언젠가 한결에게 소개해 주려 했던 제 친구. 그녀의 뒤로 우루루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대남 셋을 알기 전만 해도 하루가 멀다고 붙어 다녔던 동기들이었다.

“시험 끝났는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은하니 시험 힘들었나 봐. 얼굴이 개죽이상이 아니라 그냥 죽상이야.”

“개웃겨! 죽상이래.”

“누나들이 사 줄게. 맥주도 마시자.”

미현이 두 손으로 은한의 볼을 쥐고 주물럭거렸다. 한결의 손보다 훨씬 작고 보드랍다. 은한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 그녀의 손을 털어 냈다.

“약속 있어.”

“뭔 약속?!”

“어…… 그냥 친구.”

“뭐. 그 공대 또라이 셋?”

“……어떻게 알았냐?”

“네가 쪼개면서 보는 톡방 이름이 공대 또라이 셋이더만?”

은한이 삐죽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그거 사생활 침해야. 그리 말했더니 미현이 깔깔 웃었다.

“나는 우리 막내 은하니가 호옥시, 여자친구라도 생겼나 해서 봤지. 우리랑도 안 놀고, 수업만 끝나면 사라지고.”

“맞아. 너 요즘 엄청 내외한다?”

“우리를 너무 매몰차게 버리는 거 아니냐?”

“존나 섭섭하다고.”

장대비보다 더 많이 쏟아지는 불만에 머쓱해졌다. 친구들이 좀 섭섭해하는 게 아닌 듯해서. 그래. 이런 날에는 동기들이랑 노는 게 낫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아니던가.

은한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우우웅, 한 번 더 울리는 진동 소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진우: 백한결이 너 보고 싶어 죽겠대.]

* * *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친구들을 바래다준 은한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동기들과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시답잖은 이야긴데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적당히 오른 술기운에 묵직한 발걸음도 좋았다.

찰박찰박. 거칠게 쏟아지는 비에 아스팔트 위로 물결이 생겨났다. 은한이 한참 전에 흠뻑 젖은 캔버스로 척척, 세게 발을 굴렀다. 바짓단이 짙게 젖었다.

얼른 가서 샤워하고 자야지. 그렇게 한참 걷다 뚝, 멈춰 섰다. 엄마보다 자주 보는 벽화 앞에서였다. 할머니의 송충이 눈썹이 비에 젖어 흐릿하게 보였다. 한참이나 벽화를 주시하고 있던 은한이 핸드폰을 꺼냈다.

내내 주머니에 있었던 핸드폰이 손난로처럼 따끈했다. 꾹, 홈 버튼을 누르자 온통 노란색으로 가득한 화면이 반짝 드러났다.

[진우: 백한결이 너 보고 싶어 죽겠대.]

그 메시지를 끝으로 세 시간 후, 태준이 느낌표로 채팅방을 도배해 놨다.

[태준: 백한결 취했다!!! 취했어!!! 방울아!!!]

[진우: 나 백한결 취한 거 첨 봄.]

[태준: 나도. 사진 찍자.]

[진우: 동영상도 찍자.]

[태준: 근데 얘 어떡하지? 요즘 추워서 버리고 가면 얼어 죽을지도 몰라.]

채팅방을 내리는 은한의 손이 분주했다. 녹녹하게 차 있던 술기운이 금세 휘발했다.

[진우: 택시 태워 보내면 알아서 내리지 않을까?]

[태준: 눈도 못 뜨는데?]

태준의 마지막 메시지까지 읽은 은한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집에 보냈어, 아니면 버렸어.

착잡한 심정으로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뚜루루. 단조롭게 가는 신호음에 괜히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이열 방울이. 오랜만이야?

진우의 목소리는 멀쩡했다. 세 시간을 훨씬 넘게 술만 마셨을 텐데도 그랬다. 은한이 한쪽 발을 들었다. 신발 밑창에 가득 차 있던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백한결은?”

-한결이가 왜?

“어?”

-한결이가 왜.

은한은 진우의 되물음에 잠시 당황했다. 왜냐니. 눈도 못 뜰 정도로 취했다고 메시지를 보내놓고, 왜냐니. 살짝 미간을 좁힌 은한이 다시 캐물었다.

“취했다며. 어떻게 했어? 집에 보냈어?”

-아아. 그거.

진우는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은한이 짜증스레 벽화를 걷어찼다. 바짓단에 들러붙어 있던 물방울이 촥, 튀어 올랐다.

“눈도 못 뜰 정도로 마실 때까지 뭐했어. 걔가 주량이 한두 병도 아니고.”

-…….

“집에 잘 보낸 거야?”

한결의 커다란 덩치가 비 오는 가로등 아래에 구겨져 있는 걸 떠올렸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설마 한결을 그리 두지 않았을 태준과 진우겠지만 걱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 동기와 놀지 말고 국밥집에 갔어야 했나. 후회까지 됐다. 아까까지만 해도 좋았던 습윤한 비 냄새가 미워졌다.

“왜 대답이 없어. 백한결 걔 가뜩이나 요즘 마음고생 심할…….”

은한이 합, 입을 다물었다. 아아, 실수다. 여기서 할 말이 아닌데.

시험 기간 내내 은한의 머릿속에는 한결이 존재했다. 제 마음이 역겹고 구역질 나냐는 말을 들었는데,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리포트를 쓰다가도 한결의 이름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그의 이름 말고도 게이, 키스 뭐 그런 것도 있었다.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다 싫었다. 앞뒤 없이 마음을 떠안겨 준 한결도, 그로 인해 온몸의 가시를 곤두세우고 사는 저도, 대답이 없는 진우도.

쏴아아- 비가 더 거세졌다. 이제는 우산으로 받치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은한이 억세게 우산 손잡이를 말아 쥐었다. 이대로 놓치면 온몸이 흠뻑 젖을 것이다.

은한은 한참이나 진우의 답을 기다렸다. 색색, 제가 내뱉은 숨소리와 빗소리가 마구잡이로 섞여 갔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담배가 떠올라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다 또 짜증이 났다. 담배가 있을 리 없지. 늘 한결의 것을 뺏어 폈었으니.

-은한아.

“…….”

은한이 오랜만에 듣는 제 이름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제는 방울이라 불리는 게 훨씬 익숙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진우와 태준 그리고 한결에게 이렇게나 흠뻑 젖어 있었을까.

-우리 얘기 좀 할까.

아아. 손진우, 너 다 알고 있구나.

은한이 참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 * *

하루가 멀다 하고 왔던 국밥집인데. 오늘따라 낯설었다. 들어오는 제 마음이 평소와 달라서 그런가 보다. 은한이 뚝뚝 빗물을 눈물처럼 흘리고 있는 우산을 곱게 접어 가게 한 귀퉁이에 세워 놨다.

시험이 끝난 국밥집. 이미 한차례 학생들이 몰고 지나갔는지 할머니가 부지런히 빈 그릇을 정리 중이었다. 그렇게 넓지도, 작지도 않은 실내에 진우만 덩그러니 앉아있다. 한눈에 셀 수 없이 많은 소주병만이 그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걸 알려 줬다.

“방울이 왔어?”

진우가 사르르, 눈을 휘면서 인사를 건네 왔다. 은한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인사에 답했다.

“혼자 있네.”

은한이 끼익 의자를 빼며 물었다. 진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한결 보내면서 태준이도 보냈어.”

“아, 그랬어…….”

이렇게 싱겁게 알려 줄 거였으면서, 전화로는 왜 그렇게 뜸을 들였어. 은한은 솟구치는 의문을 꾸역꾸역 눌러 삼켰다. 보통 때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냥…… 그래야 할 듯했다.

“밥은 먹었어?”

“어어. 동기들이랑 술 마셨거든.”

“우리 버리고?”

오늘 참, 버린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동기들에게도, 진우에게도. 은한이 조금 짜증 섞인 손짓으로 소맷자락에 묻은 빗물을 문질렀다. 우산을 접을 때 묻었나 보다.

“버리긴 뭘 버려. 요즘 내내 너네만 만났잖아. 친구들이 삐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

“그래. 내가 이런 걸 왜 설명하고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한탄과 신경질이 뒤섞인 은한의 씨근덕거림에, 진우가 푸스스 웃었다.

“요즘, 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정도로 근래에 방울이 너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섭섭해서 물어봤어.”

“…….”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게 술이 깨면서 지끈거리는 건지, 진우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에 있지도 않은 한결 때문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누군가가 송곳을 치켜세우고 관자놀이를 마구 후벼 파는 듯했다. 아마 그 누군가가 한결이 아닐까, 넘겨짚었다.

“사투리 안 쓰는 걸 보니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나 봐.”

“아. 집 가는 길에 다 깼어.”

다행이네. 진우가 친근하게 할머니를 불렀다. 늘 그래 왔듯, 국밥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소주가 먼저 테이블에 놓이고 은한이 그것을 흔들며 턱짓으로 즐비한 소주병을 가리켰다.

“너도 멀쩡해 보인다? 백한결이 취할 때까지 술 마셨다기에 왕창 마신 줄 알았는데?”

진우가 은한의 앞에 수저를 놔 주었다.

“백한결이 소주를 글라스로 먹더라고.”

“콜록.”

은한은 먹던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렸다. 글라스로 먹었다고? 소주를? 미친놈. 일찍 뒤지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구나.

“멍하게 보고 있다 보니까 백한결은 취해 있고, 테이블은 푸른 잔디밭이더라.”

축구해도 되겠어, 또라이 새끼. 진우가 끅끅대며 웃었다. 분명 채팅방에서 한결의 취한 모습을 처음 봤다고 했는데, 별다른 충격이 없는 듯했다. 놀란 건 은한뿐인가 보다.

굳어있는 은한에 진우가 그의 손에서 소주병을 낚아채 갔다. 그리고 쪼로록, 쪼로록. 술을 따랐다. 작은 잔에 그득이 채워지는 알코올이 오늘따라 신기할 정도로 맑았다.

은한이 먼저 잔을 들었다. 곧 진우의 잔이 다가와 쨍, 하고 부딪쳤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이 썼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는데.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나 보다.

진우와는 이상할 정도로 잔잔한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시험은 잘 쳤냐. 과제는 어땠냐. 잠을 한숨도 못 잤다. 피곤하다. 비가 왜 이렇게 오냐. 하늘에 구멍 뚫린 줄 알았다.

그따위 대화가 무수한 빈병 위로 나돌았다. 은한은 어떻게든 한결의 이야기를 피하고 싶었고, 그것을 안 진우는 굳이 주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른 채 해 주는 건 그리 길지 않았다. 둘이서 딱 두 병을 비웠을 때였다. 미적지근해진 국물을 떠먹는 은한을 응시하던 진우가 상투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방울이랑 둘이서 오붓하게 술 먹는 건 처음이네.”

“그렇네.”

“태준이가 알면 질투할 거야.”

“질투는 무슨.”

“한결이가 더 질투하려나.”

“…….”

은한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받아 낸 한결의 이름이 심장께에 쿡 눌러 박혔다.

역시나. 다 알고 부른 거다. 은한이 쇳덩이보다 무거운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고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분명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리 죄지은 기분인지 모르겠다.

“백한결 편 들어 주려고 부른 거냐?”

은한이 애써 비아냥을 흉내 냈다. 허나 생각은 진심이었다. 진우가 절 부른 이유가 그것이리라 생각했다. 어찌 됐든 저는 나중에야 세 사람 앞에 등장한 사람이니까. 자신의 친구를 힘들게 하는 제가 아니꼬울 것이리라, 넘겨짚었다.

“아니. 내가 걔 편을 왜 들어.”

“…….”

“나는 백한결보다 방울이 네가 좋아.”

편을 든다면 네 편을 들겠지. 진우가 히히,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정상인지, 병원 진료가 필요한 또라인지 알 수가 없다.

은한이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꼿꼿이 펴고 있던 허리를 구부정하게 내렸다. 무튼, 절 채근하기 위해 부른 게 아니라니까.

“언제부터 알았냐?”

“응?”

“백한결이 나 좋아…… 어…… 그러니까, 그런 마음 가지고 있는 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은한의 질문에 진우가 데구르르 눈을 굴렸다. 그 잠시를 참지 못한 은한이 다시금 입을 뗐다. 잠잠히 추스르던 마음에 콰광,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했다.

“설마, 너희들은 다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 나랑 그렇게 붙어 다닌 거야? 백한결이 뭐라고 하든? 내가 좋으니까 이어 달라고 하든?”

“방울아.”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랬어!”

“강은한.”

“아니면 씨발, 눈치라도 좀 주지! 내가 얼마나…… 얼마나 놀랐는데!”

술이 올라 발갛던 은한의 광대가 확 붉어졌다. 화와 억울함 때문이었다. 전시회에 다녀온 날,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 대신 너야, 두 음절을 읊조리던 한결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심장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발가락까지 꼬옥 접었었다. 집으로 가는 길목 내내 고민하고 고민했다.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러다 내놓은 말이 담배 피울래, 따위였다.

진우가 은한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씩씩, 거칠게 가슴을 들썩이던 은한이 눈을 잔뜩 홉뜨고 진우를 노려봤다.

“몰랐어.”

“그게 무슨,”

“백한결도 몰라. 내가 자기 마음 알고 있다는 거.”

“뭐?”

“그냥…… 내가 눈치가 좀 좋아서. 그래서 안 거야. 요즘 너희 둘 꼬락서니를 보니까 뭔 일 있었구나, 싶었고. 오늘 술 먹고 발작하듯 네 이름 부르는 백한결 보고 확신한 거고.”

허……. 은한이 헛숨을 탄식처럼 내쉬었다. 그가 의자 깊이 등을 묻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진우가 난감하다는 듯 자신의 턱 아래를 긁었다.

“백한결은 남 이야기 잘 안 해.”

“…….”

“가족 이야기도 안 하고, 친구 이야기도 안 해.”

“알아.”

그에게서 누군가에 대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그의 주변인 중 아는 사람이라곤 진우와 태준이 다였다.

진우가 과거를 되짚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언제부터더라. 네 이야기를 자주 했어.”

“…….”

“주제 자체가 너인 대화가 아니라, 뭐랄까…… 정말 뜬금없이 사이사이에 네 이름을 뱉더라고.”

밥 먹다가 어, 계란말이 이거 방울이가 좋아하는 건데. 여기 국은 되게 싱겁네. 방울이가 안 좋아하겠다. 길 가다가도 어, 방울이가 여기 아메리카노 맛있어하는데. 저 노란색 후드 방울이가 입으면 되게 귀엽겠다. 그런 거.

은한이 팔랑팔랑 손부채 질을 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부끄러워져서. 낯이 뜨거웠다. 술 때문도, 화 때문도 아니었다. 걔는 뭐 밖에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냐. 그런 은한에 진우가 낮게 웃었다.

“원래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새끼 아닌 거 알지?”

“어…… 뭐…….”

“그리고 말이야, 백한결 아침잠 되게 많아.”

“어……?”

분주하게 움직이던 은한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 떨어졌다. 아침잠이 많다고? 그건 몰랐던 사실이다. 한결은 새벽 늦게까지 공부를 해도,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저와 아침을 먹으러 일찍 등교했었다.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한 저 때문에 밖에서 삼십 분을 서 있었던 적도 있다.

“걔 1학기 때 오전 강의는 죄다 A+못 받았어. 시험은 존나 잘 쳤는데 지각이 너무 잦아서.”

“…….”

“근데 이 새끼가 요즘 제일 먼저 강의실에 들어앉아 있더란 말이지. 왜 이렇게 일찍 왔냐, 물어도 실실 쪼개기나 하고.”

“…….”

“네가 요즘 백한결이랑 같이 아침 먹는다는 소리 안 했으면 나도 걔가 널 좋아한다는 걸 의심만 했지 확신하진 못했을 거야.”

모닝엔젤도 이런 모닝엔젤이 없네. 다음에 만나면 등짝을 까 봐야겠어. 진짜 날개가 있지 않은지. 그렇게 일어나기 힘든 아침잠을 이기고 저와 밥을 먹겠다며 오다니.

은한이 검지로 소주잔을 괴롭혀 댔다. 일렁이는 알코올이 꼭 파도 같았다. 그 파도가 제 마음에도 울렁거렸다. 뭘 어찌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리저리 뒤섞이는 감정의 파도가 천천히 은한을 잠식시켜갔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래도 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은한이 출렁이던 소주를 단숨에 삼켰다. 알코올이 목구멍을 씻어 내는 듯했다.

그를 따라 소주를 삼킨 진우가 바짝 테이블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소곤소곤, 비밀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들을 사람이라곤 귀가 어두운 할머니뿐인 국밥집에서 대단한 일을 도모하기라도 하는 양.

“내가 도와줄까?”

“뭘.”

“한결이가 마음 정리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까?”

“……그래 줄 수 있어?”

“그래 줄 수야 있지. 근데, 내가 그러길 바라?”

“뭐?”

요지를 파악하기 힘든 진우의 말에 은한이 미간을 좁혔다. 그새 잔을 채운 진우가 건배를 해 왔다. 잔을 부딪친 은한이 께름칙하게 소주를 삼켰다.

‘백한결이 마음을 접을 수 있게 도와준다’라. 어떻게? 그게 가능하긴 하고? 아무튼, 그리할 수 있으면 당연히 해 줘야지. 묻긴 왜 물어. 은한의 의아한 시선을 받아내던 진우가 씨익, 입술을 가로로 길게 찢었다.

조커의 미소와 꼭 닮은 웃음이었다. 은한이 흠칫 등허리를 떨었다.

“내가 주제넘게 생각해 봤거든.”

“뭐를.”

“방울이 네 마음 말이야.”

“…….”

은한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마음이라. 그게 여기서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알던 강은한이라면…… 친구로 잘 지내던 애가 고백했을 때, 그 애가 정말 친구로만 느껴지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결론이 어떻게 났는데?”

은한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생각해볼 게 아니다. 지금의 저와 같은 행동을 했겠지. 백한결을 피하고, 끊어내자니 아쉽고, 저 때문에 글라스로 술을 먹고 취한다니 걱정은 되고, 시험은 잘 쳤는지 궁금하고. 뭐 그런 거.

“어떻게 났냐고? 결론을 내릴 것도 없지. 너는 그냥 평소랑 똑같았을 거야.”

“…….”

“우리랑 점심 먹고, 술 마시고, 시시덕거리고. 종종 신경을 쓰기야 하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종종’이겠지. 아마 우리 방울이, 일주일도 안 돼서 까먹었을걸. 몇 달 뒤에야 아! 저 친구가 날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하면서 상기했을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칼같이 백한결을 떠났겠지. 그 옆에 있는 우리는 덩달아 너와 연을 끊게 됐을 거고.”

“…….”

“근데 넌 두 가지 다 하지 않았잖아.”

은한이 곰곰이 진우의 말을 되짚었다. 정말로, 저는 그랬을까. 한결이 절 좋아한다는 걸 까먹었을까. 아니면, 그를 완전히 끊어 냈을까.

모르겠다. 은한은 이리 깊이 무언갈 고민할 성격이 못 됐다.

“아…….”

그리 생각하면서, 은한은 진우의 말이 맞음을 인정하게 됐다. 맞다. 저는 고민을 귀찮아한다. 친구가 고백했기로서니, 그걸 이주 가까이 질질 끌어가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리 없었다. 좋든 싫든, 긍정이든 부정이든, 진즉 어떻게든 결론을 내렸을 거란 말이다.

“그렇네…….”

은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때로는 타인의 입에서 듣는 제 이야기가 옳을 때가 있다. 은한은 야금야금 저를 씹어 먹고 있는 술기운을 고개를 저어 털어 냈다. 그리고 올곧이 진우와 눈을 맞췄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너는?”

진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도 모르지.”

“하?”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말은?”

“일단 백한결을 만나 보라는 것 정도.”

“…….”

그게 뭐야. 은한이 입술을 불만스레 내밀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까지 쏴아아 거칠게 창을 두드리던 비가 한풀 꺾여 있었다.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길거리엔 사람이 없다. 그 공백을 채우겠다는 듯 세차게 내리던 비가 사그라드니 더 거대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은한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너는 게이…… 동성애자…… 뭐 그런 거 아무렇지도 않나 보네?”

“뭐. 하태준 친구다 보니 웬만한 거에 놀라거나 거리끼지 않는다.”

“동의한다.”

소주잔을 든 은한이 픽, 웃었다. 짠! 부딪치는 유리잔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주가, 오늘 먹었던 그 어떠한 한 잔보다 청량하게 느껴졌다.

다시 바라본 창밖엔 가물가물하던 비가 그쳐 있다. 쏟아지던 빗줄기 사이로 시린 한기가 자리를 잡았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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