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또라이1, 또라이2 그리고 백한결(1권) (1/11)

01. 또라이1, 또라이2 그리고 백한결

“방울아 잔 비었네.”

“어어…….”

은한이 한결의 손에 들려 다가오는 초록색 병에 소주잔을 들었다. 곧 투명한 알코올이 쪼르륵, 잔에 채워졌다. 찰랑찰랑한 잔을 내려놓은 은한이 건조한 눈두덩을 비볐다.

피곤했다. 배도 고프고.

은한은 내일모레까지 완성해야 할 작품이 있다. 고작 스무 살짜리의 그림을 작품이라 칭하긴 뭐하고, 그냥 과제. 덕분에 점심도 먹지 못하고 종일 회화실에 들어앉아 있었다. 딱 새벽 2시에 집에 간다는 신념으로 미친 듯이 붓을 놀리고 있는데. 오늘은 조용하다 싶던 핸드폰이 온몸으로 은한을 불러냈다. 물론 발신자는 한결이었다.

[국밥집. 얼른 튀어 와라, 방울아.]

못 가. 과제 존나 밀림. 좆 됨. 그리 답장을 보내려 했는데 위장이 꼬르륵, 경련했다. 뽀얀 국물에 한가득 들어차 있는 고기를 생각하니 손가락은 이미 이응을 연달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여기 앉아 있더라. 테이블에 빈 녹색 병이 9개나 있는 이곳에. 한결이 제 몫으로 새로이 시켜 준 국밥에 막 숟가락을 꽂았을 때였다.

“방울아아!”

“왜.”

“우리 방울이 어쩜 이렇게 귀엽지이?”

태준이었다. 금빛 머리칼을 찰랑인 그가 꽃받침을 한 채 은한을 바라보았다. 은한이 뚝배기 그릇을 자기 앞으로 바짝 당겨 태준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고자 노력했다. 광대가 시뻘건 게 제정신이 아닐 확률이 118퍼센트다. 무려 백, 씨팔! 퍼센트! 완전히 또라이로 각성한 상태란 말이다.

“어 내가 좀 귀엽지.”

은한이 무미건조하게 답하며 후룹,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뜨끈하고 진한 국물에 하루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사르르, 풀어지는 은한의 얼굴에 한결이 큭큭, 웃었다. 그가 은한의 앞으로 슥슥, 새우젓이며 깍두기며 후추까지 밀어 줬다. 음식을 짜게 먹는 은한을 위해서였다.

“솔직히 한결이 이 새끼가 너한테 방울이라고 했을 때 존나 이상했거든.”

“나는 지금도 존나, 이상한데.”

은한이 새우젓을 뚝배기에 통째로 부었다. 방울이. 방울이. 그놈의 방울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듣는 호칭 탓에 이제는 제 이름이 강은한인지, 방울인지, 바둑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태준의 검지가 은한의 앞을 삭, 칼로 베듯 갈랐다.

“아니얍. 이상하지 않압. 완조니 찰떡이얍!”

“야. 지금 네 말투 개 이상해. 그런 건 방울이가 할 때만 귀여운 거야.”

요상한 태준의 말투에 한결이 잔뜩 미간을 구겼다. 얇은 그의 쌍꺼풀이 외국인처럼 진해졌다.

“맞아. 너는 하나도 귀엽지 않아요. 징그럽다고.”

여태 꾹, 입을 다물고 있던 진우가 한결의 말에 동의했다. 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잔을 들었다. 태준과 진우의 잔이 다가갔다. 국밥에 집중하고 있던 은한이 가장 마지막에 들어가 챙, 잔을 부딪쳤다.

네 사람은 동시에 소주를 삼켰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알코올이 썼다. 은한이 허겁지겁 국물을 퍼 넣고 있으니 한결이 커다란 손으로 슥슥, 자그마한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은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는 완전히 적응해 버린 한결의 매만짐이다.

태준이 다 필요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진짜로! 존나 잘 어울려. 백한결이 아주, 별명을 잘 지었어. 방울이! 딸랑딸랑, 딸랑딸랑 으쓱, 으쓱.”

그가 유치찬란한 노래를 부르면서 어깨를 아래위로 들썩였다. 우렁찬 태준의 목소리에 은한이 휘휘, 국밥집을 둘러봤다.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 막차는 진즉 끊겼을 때라 학생 손님은 거의 다 빠지고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 두 분뿐이다.

이 정도 소란은 괜찮으리라, 판단한 은한이 다시 국밥에 집중했다.

“그 노래는 방울이랑 좆도 상관없어 멍청아.”

빈 잔에 소주를 채우던 진우가 태준을 타박했다. 태준이 흐트러진 금발을 아무렇게나 넘겼다. 그의 눈에 놀람이 가득했다.

“어 그래? 그럼 이거 뭔 노래냐?”

“나도 모르지. 초록창에 물어보자.”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핸드폰을 켰다. 자꾸만 오타를 내는 태준에 진우가 자판을 눌렀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으쓱으쓱 노래]

참으로 정직한 검색어였다. 진우의 손가락이 아래위로 두 번쯤 움직였을까. 무언가를 본 태준이 짝짝 손뼉을 쳤다. 은한은 여전히 국밥에 코를 파묻은 채였고, 한결은 그런 은한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은한의 매끄럽고 하얀 볼이 잔뜩 부풀어 우물우물 열심히도 움직였다.

와. 얘 볼에 솜털도 있어. 볼 때마다 신기한 점을 하나씩 발견한단 말이지. 한결이 생각했다.

네 사람의 술자리는 대개 이러했다. 은한은 열심히 안주를 축내고, 태준과 진우는 생산성 없는 장난을 이어 가며, 한결은 그들 모두를 방관하는.

핸드폰의 활자를 느리게 읽던 태준이 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소리를 질렀다.

“야, 이거 하나둘셋 유치원에 나왔던 거래! 존나 우리 반쯤 기어 다닐 때 봤던 거!”

“유치원생 안 기어 다녀. 걸어 다녀.”

“닥쳐. 나는 기어 다녔어.”

“그거 자랑 아닐걸.”

진우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태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긱.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은한이 불안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주잔을 한입에 털어 넣은 태준이 흐웁, 숨을 들이켰다. 두 팔을 가슴 앞에 고이 접었다. 곧 귀가 쩡쩡 울릴 만큼 커다란 동요가 국밥집을 가득 채웠다. 할매국밥집에서 하나둘셋 유치원의 동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으쓱, 으쓱! 딸랑딸랑 딸랑딸랑 쭈욱 쭈욱!”

진우가 배를 잡고 넘어갔다. 한결은 잘한다, 잘한다, 내 새끼!를 외치며 손뼉을 쳐 댔다. 은한이 스윽, 다시 한번 그리 넓지 않은 국밥집을 훑어봤다.

조용히 담소를 나누던 아저씨들은 낄낄거리며 태준을 구경했고, 홀 겸 주방까지 담당하고 있는 할머니는 저 새끼 또 저 지랄이라며 웃으셨다.

“쭈욱 쭈-욱 으쓱 으쓱 으! 쓱!”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에 신난 태준이 팔을 힘차게 휘저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에 웃고만 있던 진우가 그를 따라 벌떡 일어나 노래에 동참했다. 소음이 곱절이 됐다. 한결이 놓칠 수 없다고 핸드폰으로 두 사람을 촬영했다.

“…….”

은한은 침묵한 채 조용히, 국밥에 집중했다. 주위가 어떠한 꼬락서니든, 할머니의 국밥은 참으로 맛있었다. 은한은 야무지게 깍두기도 올려 먹고, 종종 홀로 소주를 홀짝이기도 했다.

그래도 참담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아. 나는 왜 새벽 1시에, 과제 할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어 이 미친놈들 사이에 끼어 있는가. 대체 왜.

울고만 싶었다.

* * *

은한이 세 사람과 만난 건 평범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은한을 제외한 세 사람은 원래부터 친한 친구였고, 은한만 사회봉사에서 세 사람을 처음 만난 거다.

이게 그냥 ‘만남’으로 시작해서 ‘헤어짐’으로 끝난 사이면 다행인데. 그럼 정말 다행이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위해서 말한 사회봉사가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는 건 아니고. 학교 졸업 필수 요건에 들어가 있는 봉사였다.

10시 땡, 하면 수강 신청하듯 신청을 하고, 2학점을 받는 기초 필수 중 하나. 사회봉사는 봉사를 직접 선택할 수 있었는데, 꿀 봉사는 학기 중 두어 번 나가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웠고, 헬(hell) 봉사는 일주일에 두 번, 세 시간씩 꼬박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요양원, 청소, 행사 스텝, 교육 등등 종류는 무수했다.

은한이 뭐 같은 OT자리에서 주워듣길, 벽화 봉사가 있는데 그게 학기 중 일주일만 바짝 하면 끝나는 꿀 봉사랬다. 시각디자인 학과와 얼추 맞기도 하고, 보통 신청하는 애들이 죄다 미대 소속이라 인맥 넓히기에도 딱이라 했다.

벽화 봉사는 열 개가 좀 넘었는데, 각각 5명에서 최대 12명. 그림도, 시간도, 장소도 조금씩 달랐다. 은한은 어울려 다니는 동기들과 마우스를 부서져라 눌렀다. 5명만 모집하는 봉사가 캠퍼스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 담장에서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됐다!”

기쁨의 소리를 지른 건 은한 홀로였다. 동기들은 죄다 뿔뿔이 흩어졌다. 운이 좋지 않은 친구는 지하철 여행만 왕복 세 시간을 해야 했다. 친구 따라 강남은 가도 지하철 여행은 못 하겠더라. 그래서 은한은 혼자 봉사를 하기로 했다.

1학년 2학기. 개강 3주 차. 이제 막 교수님들의 얼굴을 외워 갈 때쯤, 벽화 봉사의 일정이 떴다. 토요일 오전 10시. 뭐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부르나, 싶었는데 일찍 시작하고 일찍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미대는 여성의 비중이 훨씬 크다. 은한의 동기만 해도 40명의 정원 중 34명이 여자였다. 은한은 당연히 여자인 미대 친구들이 와 있을 거라 예상했다. 허나 약속된 장소에 갔을 때, 시커먼 남자 세 명과 마주해야 했다. 거기다 한 명은 잠수.

그래도 상관없었다.

와. 개이득.

은한은 그 시커먼 남성들이 당연히 미대일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우연히 남자(사람) 친구를 사귀게 되다니!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동아리 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열심히 친해져야지! 그렇게 다짐까지 했다.

“다른 학생 한 분은 자퇴했다네요? 뭐 그렇게 일이 많지 않으니 그냥 넷이서 하죠. 건장한 학생들이니 마음이 든든하네요. 일주일 동안 자주 볼 사인데, 통성명이나 할까요?”

담당 초등학교의 선생님께서 빙긋 웃으며 유하게 대화의 물꼬를 터 주셨다. 은한이 사르르, 눈을 휘었다. 여자(사람)친구들이 첫인상이 중요할 때, 꼭 그렇게 웃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었다. 일명 개죽이 웃음. 그녀들이 깔깔대며 볼을 잡아 뜯는 웃음이다.

은한은 웃을 때마다 눈이 사라졌다. 웃을 때 앞이 보여? 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는데. 희미하지만 보이긴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디과 1학년 강은한이에요.”

은한은 반가워요, 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허나 들려온 답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방울 같네요, 은방울.”

“네?”

“방울요.”

연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그리 말했다. 졸린 건지, 원래 그런 건지. 살짝 풀린 눈두덩 사이로 호기심이 번쩍인다. 덩치는 또 어찌나 큰지. 저런 걸 태평양 어깨라고 하는구나, 은한이 몰래 생각했을 정도였다.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틀어 올린 남자는 말과 다르게 인상이 좋았다. 서글서글하니 딱 훈남상. 캠퍼스에 당연히 있을 것 같지만, 실로 존재하지 않는 낭설과도 같은 존재.

은한이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니 남자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꾹 눌렀다. 웃는 모양을 유지한 입술이 닥치라 말하는 걸 은한은 똑똑히 들었다.

“저희는 기계과에요. 기계공학과.”

“……저희요?”

“네. 저희 전부 다.”

“…….”

“기계공학과.”

아……. 은한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조금도 접히지 않은 웃음이었다. 훗날 알았지만 은한의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은 첫 웃음과 너무 다른 웃음에 아, 쟤가 우리를 존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구나, 생각했단다.

실로, 은한은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미대 학생들이었다면, 나중에 콜라보 작품을 한다거나, 타과 수업을 들을 때 팁을 얻는다거나, 무튼 그렇게 좋은 친목을 쌓았을 텐데. 공대, 그것도 공대 중의 공대인 기계공학과 남자 사람을 셋이나 알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제 이름은 손진우고, 방금 말한 애는 백한결 여기 금발 또라이는……”

“하태준입니당.”

“네. 하태준이고 다 1학년이에요. 현역.”

그나마 진우라 말한 남자가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다. 나중에는 그냥 또라이2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지만, 그땐 그랬다.

짝짝, 박수를 치는 선생님에 네 사람이 따라서 손뼉을 쳤다.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네 사람에게 한 장씩 나눠 줬다. 진한 4B 연필 몇 자루와 지우개도 함께.

“오늘은 도안만 그릴 거예요. 색칠은 내일부터. 은한군이 디자인과라고 하니, 믿어도 되겠죠?”

“네…… 뭐…….”

다른 공지사항은 없다고. 예정된 시간에 끝마치지 못하면 자동으로 봉사 시간이 늘어나니 유의해 달라고. 그리 말한 그녀는 할 일이 있다면서 바쁘게 자리를 떴다.

도안은 참, 평범했다. 무지개 위에 네 명의 아이들이 뛰어놀았다. 그들의 손에는 풍선이 들려 있었는데 그 풍선 안에 엄마와 아빠,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냥 건강한 아이들의 화목한 가정을 뜻하는 듯했다.

은한이 연필을 든 채 담벼락을 노려봤다. 5명이 하는 벽화라 그런지 담이 그리 크지 않았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삼사 일만으로도 끝낼 수 있을 듯했다.

“그림…… 그릴 줄 아세요?”

은한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세 사람은 1초도 고민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은한이 또 입만 웃었다. 아니 씨발 그럼 벽화 봉사 신청을 왜 했어?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그걸 듣기라도 한 것처럼 세 사람이 차례로 말을 이었다.

“그냥 그려진 데다 색칠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다 그려져 있는 줄 알았는데. 의도치 않게 방울 씨만 고생시키게 됐네요.”

“미안해용. 그래도 어렸을 때 티라노사우르스는 좀 그려 봤는데. 해 볼까요?”

진우, 한결, 태준 순이었다. 이번엔 은한이 고개를 저었다. 우둘투둘한 벽에 4B를 잘못 그으면 지우기도 쉽지 않다. 그냥 저 혼자 끝내는 게 마음도 편하고, 시간도 빠를 듯했다.

민폐야. 민폐. 아주 좆같은 팀플을 하는 기분이라고.

입을 삐죽인 은한이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무지개가 그려지고, 막 두 번째 아이의 얼굴을 그리고 있을 때 멀뚱히 서 있던 한결이 슥 다가왔다. 예고 없이 다가온 커다란 그림자에 은한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뭐지. 설마 어차피 도움 안 되니까 집에 가겠다고? 그러면 신고할 거야, 시발! 그런 눈으로 봤는데,

“방울 씨. 커피 드실래요?”

“네?”

“커피 사 드릴게요.”

들려온 말은 썩 괜찮은 말이었다. 어…… 저 캐러멜 마키아토……. 은한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자 한결은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사라졌다. 점심은 어디로 가지 못해 진우가 사 온 샌드위치로 대충 해결했다. 태준은 바닥 아래에 떨어진 지우개 가루와 같은 쓰레기를 부지런히 정리했다.

막 할머니 얼굴까지 그려 넣었을 때, 은한은 이 공대 남자들이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고 판단했다. 뭐랄까, 빠릿빠릿한 조수를 셋이나 거느린 저명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담당 선생님께 사진을 찍어 보내고, 집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땐 하이파이브까지 했다.

“술 한잔할래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막 뒤를 돌았을 때, 진우가 발걸음을 잡아 왔다.

“지금 오후 세 신데요?”

은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진우가 뭐 그런 게 대수냐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뭣도 모르고 봤을 땐 사회성 최고인 진우였다. 물론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또라이2에 지나지 않는 진우다.

“낮술 안 좋아하세요? 주말에 학교도 나왔는데 이럴 때 한잔 마셔 줘야죠. 저희가 술 사 드릴게요. 오늘 고생하셨으니까.”

“어…….”

“저희 국밥에 소주 마실 건데. 국밥 좋아해요? 저기 후문 쪽에 진짜 맛있는 데 있거든요.”

“고생한 방울 씨를 위해 수육도 시키자.”

“존나 콜.”

한결과 태준이 가세했다. 진우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은한은 그 행동을 ‘안 가면 한 대 처맞을 줄 알아라’로 알아들었다.

“같이 갈래요?”

그때. 은한은 절대로, 절대로 국밥과 수육에 넘어가선 안 됐다. 꼬르륵, 울리는 위장의 울음을 무시했어야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예지력이라곤 쥐똥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은한이라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고비가 많은 학교생활의 시작이었다.

* * *

소주를 한 병 조금 더 마신 은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말술인 공대남 셋과 달리 은한은 지극히 평범한 주량을 가지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술버릇도 있었고.

“야. 근데 니는 왜 내 첨 만나자마자 방울 같다 캤어?”

은한의 술버릇은 꾸역꾸역 억누르던 사투리가 나온다는 거였다. 은한의 원래 고향은 대구다. 근 일 년 동안 서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얼추 서울 사람 흉내를 낼 수 있게 됐는데, 술만 먹으면 말짱 도루묵이 됐다.

“어이구. 우리 방울이 술기운 올라왔네.”

한결이 두 손으로 은한의 볼을 감싸 쥐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서울 토박이인 공대남 셋은 은한이 사투리를 쓸 때마다 온갖 방법으로 놀려 댔다. 한결의 말로는 그게 귀여워서라는데. 은한에겐 그냥 괴롭힘이었다.

눈을 잔뜩 홉뜬 은한이 숟가락으로 탁, 테이블을 내리쳤다.

“대답 안 하나. 내 어디가 방울처럼 생겼다고…… 은방울이 뭐고, 은방울이. 꼭 개 된 기분이란 말이다.”

“정정하자. 개 말고, 강아지.”

“개나 강아지나! 이 새끼가 어디서 말장난이야? 내보다 국어 점수도 낮은 게.”

“나는 이과잖아. 그것도 존나 이과.”

우리 과는 들어올 때 국어 점수를 보지도 않아요. 한결이 솜씨 좋게 말을 돌렸다. 은한은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 헐, 진짜? 국어 점수 안 봐? 개꿀이네. 어쩐지 하태준 톡할 때마다 맞춤법 개거지 같더라, 따위를 중얼거렸다. 한결이 소리 없이 큭큭거렸다.

“왜! 뭐! 나 왜!”

진우와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 대화를 이어 가던 태준이 귓구멍을 파고드는 제 이름에 눈을 번뜩였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되, 돼 안, 않 구분 못 하는 태준아.”

“그거 어째 욕 같다?”

“욕 아인디.”

은한이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곤 쪼로록, 자신의 빈 잔에다 소주를 채웠다. 국밥집의 쨍한 형광등 빛을 한껏 머금은 소주가 참으로 영롱했다.

“아씨. 과제 해야 되는데. 술이 존나게 맛있어어.”

“내가 과제 도와줄까? 나 내일 수업 하나뿐인데.”

한결이 테이블 위의 빈 물 잔에다 차례로 물을 채웠다. 말술 중에서도 말술인 한결이라 은한은 아직 그가 취한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채운 물 잔을 집어 든 은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니가 도와주면 존나 입체파 같은 그림이 나오지 않겠냐.”

“입체파? 그거 좋은 거야?”

“뭐라카노. 그게 좋은 거겠나? 21세기에 입체파는 다른 말로 그냥 개발이라 칸다.”

“…….”

“피카소가 그리면 입체판데, 니가 그리면 그냥 개발 그림.”

왈왈. 은한의 말에 한결이 쩝, 입맛을 다시며 소주를 삼켰다. 은한이 헤실헤실 웃었다. 한결을 놀리는 건 드문 일이라 기쁘기까지 했다. 그런 의미로 한 잔 더어.

은한이 허공에 잔을 들자 요상한 대화를 이어 가던 진우와 태준이 귀신같이 잔을 들었다. 그를 보고 있던 한결은 진작 들었고.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네 잔이 동시에 비워졌다. 오늘 새벽의 마지막 잔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네 사람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 시월인데. 새벽 공기에 겨울 냄새가 담뿍 묻어 있다.

네 사람은 담배꽁초가 무수히 버려진 좁은 골목에서 식후땡 겸, 술에 취한 겸, 담배를 피웠다. 진우는 답지 않게 헤비스모커였고, 태준은 다른 의미로 답지 않게 비흡연자였다. 멀리 떨어져 있으래도 왕따당하는 기분이라며 굳이 굳이 옆에 서 있었지만.

한결은 이주에 한 갑을 다 필까, 싶을 정도로 종종 담배를 입에 물었고, 은한은 알딸딸하니 술에 취했을 때만 한결의 담배를 뺏어 폈다.

“또 택시 타고 가나?”

“엉.”

연기와 함께 흘러온 은한의 물음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삶이다, 손진우.”

진우는 잘 사는 집 아들이었다. 아빠가 국회의원이랬나. 집은 제일 멀었다. 그래서 자취를 하는 은한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이에 사는 한결, 태준 순으로 집에 내려주고 자기도 집으로 향했다. 택시를 탈 때만 되면 한결과 태준은 진우의 옆에 딱 붙어 애교를 부렸다.

“자취하는 네가 제일 좋은 삶이지, 방울아.”

엄마의 등짝 스매싱도 없고, 아빠의 근엄한 잔소리도 없고. 진우가 끔찍하다는 듯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끌끌 웃은 은한이 반밖에 태우지 않은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럼 가라. 나도 간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알싸하게 시린 새벽 공기를 가로지르려 했는데, 태준이 은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기다란 태준의 키에 은한의 발이 쑥 공중에 들렸다. 미친놈이 힘도 좋다. 은한이 대롱대롱 흔들리는 자신의 발을 보며 생각했다.

“혼자 가게?”

“그럼?”

“앙대. 우리 방울이 쪼꼬만해서 누가 가지고 가.”

“안 가지고 간다, 빙딱아. 그리고 내가 쪼끄마하다고 하지 말라 캤지. 안 떨어지나?”

“시롱. 방울이 굴러가면 어떡해.”

안 굴러간다고, 씹새야! 은한이 소리를 지르며 퍽퍽 태준의 등짝을 내리쳤다. 아플 만도 한데, 태준은 떨어질 줄 몰랐다.

태준의 말대로 은한은 쪼끄마했다. 실로 작은 키는 아닌데. 분명 170 중반인데. 180이 훌쩍 넘는 공대남 셋과 있으면 저절로 작아졌다. 그래서 은한은 남몰래 세 사람을 증오하기도 했다.

태준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하자 한결이 은한의 후드를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착, 붙였다. 가는 은한의 몸뚱이가 속절없이 끌려갔다.

“늦었잖아. 데려다줄게.”

“안 그래도 된다고! 야 여기서 우리 집 12분밖에 안 걸리거든?”

은한의 말에도 후드를 집은 한결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새 담배를 두 개비나 피운 진우가 가세했다.

“와. 12분이나! 여기서 백한결 집까지 택시 타도 8분인데! 무려 12분! 데려다줘야겠네. 방울이 굴러갈지도 모르니까.”

“디진다, 진짜.”

은한이 여전히 한결에게 잡혀있는 채로 발길질을 해 댔다. 그래 봐야 진우에겐 발끝도 닿지 않았다.

결국 네 사람은 나란히 은한의 집으로 향했다. 술을 열 번 먹으면 그중에 일곱은 이 꼴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쏘겠다는 한결의 말에 우르르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왔다. 분명 국밥집을 나왔을 때만 해도 추웠는데, 좀 걸었다고 아이스크림은 맛있기만 했다.

“왔어, 왔어. 우리의 작품 앞에 왔어.”

“지랄하네. 우리는 개뿔. 솔직히 내가 다했지!”

은한의 집에 가는 길에는 벽화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과거에 네 사람이 완성했던 벽화였다. 할머니의 눈썹이 송충이긴 하지만 제법 봐줄 만한 벽화.

태준이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봐도봐도 경이로운 작품이라고 찬탄했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세 사람이 가만히 벽화를 바라봤다. 일주일에 네 번씩 이렇게 벽화를 보곤 한다.

“할머니 눈썹 너무 고치고 싶다.”

“왜. 괜찮은데.”

은한의 불만에 한결이 우걱우걱 아이스크림을 씹으며 말했다. 은한이 그를 흘겨보았다.

“야. 할머니가 백발인데 눈썹이 존나 아빠보다 더 진한 송충이잖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없다고!”

은한이 뒤꿈치로 콱콱 한결의 스니커즈를 밟았다. 송충이의 범인이 한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리니 또 화가 치솟았다. 분명 하얀색, 이라 적혀 있는데 시커먼 페인트를 들고 좋다고 칠하던 그다.

한결은 무감각하게 은한의 분노를 감당해 냈다. 쪼끄마한 게 때려 봐야 얼마나 아프다고……. 그런 얼굴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십 분이나 벽화를 감상하고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늘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른 하루의 마무리였다.

* * *

벽화용 페인트는 색이 좀 모자랐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검정색 그리고 흰색. 그게 다였다. 이걸로는 무지개도 칠할 수가 없다. 은한이 게슴츠레 눈을 뜬 채 담벼락을 쳐다봤다.

바닥에 깔린 무지개는 딱 빨, 노, 초, 파만 칠해져 있다. 주황색과 남색, 보라색 부분은 텅 빈 채였다. 없으면 만들어야지 뭐.

은한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일회용 접시에다 페인트를 부었다. 빨간색을 두 번쯤 붓고 파란색을 한 번 부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젓고 있으니 아빠의 옷을 칠하던 태준이 다가왔다.

“방울아 뭐 해?”

“보라색 만들어.”

벽화 스케치를 끝낸 날, 네 사람은 오후 세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 무려 12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국밥은 맛있었고, 소주는 적당히 썼다. 또라이 매력을 팍팍 풍겨 대는 태준이 재미있었고, 은근히 동조하는 한결의 목소리도 좋았다. 태준만큼 또라이면서도 끊을 때 끊을 줄 아는 진우도 좋았다.

은한은 아주 오랜만에 기분 좋은 술자리를 가졌다. 동갑이라 말을 놓는 건 물론, 어느새 모두 방울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에도 적응을 해 버렸다. 술이라는 게 이리 대단했다. 오늘로써 벽화 봉사 3일째. 진행되는 봉사도, 새로이 만난 인연들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걸쭉한 페인트는 섞이면 섞일수록 보라색을 띠었다. 조금 탁한 보라색에 은한이 빨간 페인트를 조금 더 섞어 넣었다.

“야! 와봐! 방울이가 보라색 만들었어! 존나 신기해!”

빽, 소리를 지르는 태준에 한결과 진우가 붓을 든 채 다가왔다. 삽시간에 쏠린 관심에 은한이 얼빠진 표정을 했다. 이게 ‘존나’까지 붙일 정도로 신기한 일인가, 싶어서.

“보라색을 만들었어? 그걸 어떻게 만들어?”

“방울이 마술사야?”

“…….”

아아. 이 모자란 공대남들을 어쩌면 좋지. 작게 한숨을 내쉰 은한이 보라색을 태준에게 넘겨줬다.

“빨간색이랑 파란색 섞으면 보라색 돼.”

“와씨. 대박!”

태준이 태어나 처음 보라색을 보는 사람처럼 페인트를 관찰했다. 은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 정도는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다 배우는 거란다. 수학 제외 하나같이 멍청한 놈들아……. 우리 학교 어떻게 들어왔지. 잔디 깔고 들어왔나. 아닌데 우리 학교에 잔디 구장 없는데…….

“노란색 페인트 좀 가져와 봐.”

은한이 한결에게 명령했다. 온전히 은한의 주도하에 흘러가는 벽화 봉사라 이런 부림은 익숙했다. 한결이 후다닥 노란색 페인트를 가져왔다. 그리고 반짝반짝한 눈으로 은한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진우도 별다르지 않은 눈으로 은한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주황색이었다. 노란색에 빨간색을 한 꼬집쯤 넣은 은한이 나무젓가락을 꽂아 한결에게 건네줬다.

“섞어.”

“섞어? 휘휘?”

“그래. 휘휘.”

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무젓가락을 휘저었다. 아주, 경건한 표정이었다. 저 잘생긴 얼굴이 집중하고 있는 게 주황색의 탄생이라니. 은한이 큭큭거리며 웃었는데, 한결이나 진우나 페인트에 들어갈 것처럼 집중했다.

꼭 유치원 미술 선생님이 된 기분이네. 내가 신청한 봉사는 교육 봉사가 아니라 벽화 봉산데.

태준은 이미 신나서 보라색을 색칠하는 중이었다. 그의 엉덩이가 발랄하게 씰룩였다.

“오씨, 주황색!”

“오오, 주황색!”

가장 처음으로 주황색을 발견한 인간도 저리 기뻐하진 않았으리라. 한결이 두 손으로 주황색을 받쳐 들고 벽화로 향했다. 태준에게 한 번 자랑 후, 그와 같이 엉덩이를 씰룩이며 색칠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무슨 색 만들어 줄 거야?”

“무슨 색 만들고 싶은데?”

진우의 물음에 은한이 되물었다. 살풋 눈살까지 구긴 진우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술을 뗐다.

“금색. 황금색. 존나 반짝이는 걸로.”

“……나는 평범한 시디과 새내기지 연금술사가 아니야.”

“못 만들어? 주황색이랑 보라색도 만들었는데?”

“하아…… 남색 만들어 줄게, 남색. 금색은 쓸 일도 없어.”

은한이 대충 대충 페인트를 덜었다. 빨간색도 넣고, 파란색도 넣고, 녹색도 좀 넣고. 자고로 남색이란 아무렇게나 섞다 보면 가장 예쁘게 나오는 법이다. 진우가 철퍽철퍽 페인트를 붓고 있는 은한을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자. 섞어.”

“어!”

나무젓가락까지 꽂아 주자 진우가 신나게 휘저어 댔다. 섞인 페인트는 곧 예쁜 남색이 됐다. 진우가 후다닥, 태준과 한결에게 뛰어가 남색을 자랑했다.

“야. 나는 방울이가 세 개나 섞어 줬다.”

“헐 대박. 세 개나?”

“쩐다. 근데 이게 무슨 색인데?”

“남색, 멍청아. 빨주노초파 남! 할 때 남색.”

“아, 남색!”

목적도 없고, 결론도 없고, 의미도 없고, 생산성도 없이 이어지는 세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한이 픽, 웃었다.

답답하고 멍청하긴 해도, 귀여운 공대남 셋이라 생각했다.

* * *

과제가 얼추 마무리되어 가자 은한은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았다. 씨발. 내가 왜 회화 수업을 신청했지. 선배님들이 말릴 때 들을걸. 그래도 나름 미대 소속이라고 폼 좀 잡아 보려 했더니 개고생도 이런 개고생이 없다.

은한이 검지에 미끌미끌하게 묻은 유화 기름을 앞치마에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유명 학원 프랜차이즈 이름이 적혀 있는 앞치마는 입시 때 쓰던 것이다. 대학 와서도 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현재시간 새벽 1시. 그래도 동트기 전에는 가겠네. 가서 씻고 쪽잠 자고, 열 시 강의에 들어가면 얼추 나쁘지 않은 컨디션으로 내일을 보낼 수 있을 듯했다.

우우웅, 울리는 진동에 검지와 엄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방울이 아직 학교냐. 이 새끼들 다 나 버리고 집에 갔어.]

한결이었다. 내일 정역학 강의 퀴즈가 있다더니 여즉 학교인가 보다. 더러운 손에 타이핑을 포기한 은한이 손가락뼈로 꾹,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곧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갔다. 연달아 스피커 버튼도 눌렀다.

-방울아아!

막차 시간이 지나 모두가 집에 가 버리고, 은한 홀로 남은 회화실에 한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내 입 다물고 공부만 한 모양인지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중도냐?”

-어어 중도 열람시이일……. 너는 학교지? 어? 너도 집 간 거 아니지?

“회화실에서 썩어 가는 중이지.”

은한이 자신의 그림을 노려봤다. 이제 잘 그리든, 못 그리든. 다 괜찮다. 어차피 토할 때까지 그림만 그려 와 인간의 손놀림이 아닌 회화과 애들을 이기지 못할 테니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거기 사람 많아?

“이 시간에 사람이 어딨냐, 나 혼자지. 시발 귀신 나올까 봐 무서워 뒤지겠어.”

은한이 황량할 정도로 넓은 회화실을 휘휘 둘러봤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묘하게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도 느껴질 정도였다. 한결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나 거기 가서 공부할까?

“엉?”

-여기 답답해. 거기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공부만 할게. 어?

“여기 기름 냄새 장난 아닌데…….”

-기름? 그림 그리는데 기름 냄새가 왜 나? 아무튼, 괜찮아. 가서 조용히 있을 테니까, 거기서 공부하게 해 주라.

은한이 한 번 더 회화실을 훑었다. 한결이 앉아서 공부할 만한 장소를 찾는 거였다. 혼자 있으면 무섭고, 한결이 과제를 방해할 인간도 아니고. 나쁘지 않았다. 마침 맞은편 책상이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과 건물 307호. 올 때 핫식스.”

-오케이.

분주히 열람실로 들어가는 바람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 * *

한결은 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회화실로 들어섰다. 양손에 핫식스를 하나씩 치켜들고. 은한은 붓을 들고 있는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거로 간단히 그를 반겼다.

“여기서 공부가 되겠냐?”

은한이 대충 치워 둔 책상에 자리를 펴는 한결에게 말했다. 한결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발등에 불 떨어진 상태라 전쟁 중이라도 잘 될걸.”

촤르르 펼쳐지는 두꺼운 전공책에 은한이 얼굴을 구겼다. 분명 수학 관련 책일 텐데, 어째 수식이 죄다 영어다. 저럴 때 보면 정상적인 대학생 같은데. 책만 덮으면 멍청하기 그지없단 말이지.

“애들은 왜 너 버리고 갔대?”

“하태준은 퀴즈를 버렸고, 손진우는 공부 다 했대. 개새끼.”

“그래?”

공부를 다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야? 은한이 미심쩍지만 그런 가보다, 하며 넘겼다. 기름이 가득한 손으로 핫식스 캔을 따지 못해 한결에게 내밀었다. 한결이 가뿐하게 캔을 따 은한에게 돌려줬다.

은한이 꿀꺽꿀꺽 에너지 드링크를 삼켰다. 아직 카페인이 몸을 돌지도 못했을 텐데 벌써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너는 언제 집 가게?”

“방울이 너 갈 때쯤 가지 뭐. 어차피 다 보는 건 무리야.”

그래, 그럼. 파이팅. 두 사람은 핫식스로 소박하게 짠, 을 하곤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넓은 회화실에는 은한이 붓을 씻는 소리와 한결이 사각사각 복잡한 수식을 써 가는 소리만 울렸다.

그렇게 한 시간, 또 두 시간. 시간은 잘 흘러갔다. 은한이 커다란 벽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3시 40분. 막아 두었던 잠이 해일처럼 밀려올 시간이다. 핫식스가 잠을 깨워 주긴 개뿔. 은한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흘끔, 한결을 훔쳐봤다. 여전히 책에 코를 박은 채 열심히 연필을 움직이고 있는 그는 시간의 흐름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저 새끼는 정수리도 잘생겼어. 짜증 나게. 모난 곳 하나 없는 한결의 머리에 입술을 삐죽였다.

“방울아, 졸려?”

“어? 어.”

한결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마치 진즉부터 은한을 보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가 널브러진 A4 용지와 연필을 대충 정리하기 시작했다.

“갈까?”

“너는 다 했어?”

은한은 과제를 끝냈다. 개발새발이긴 하지만, 목표 점수가 B라서 괜찮았다. 전공도 아니고 교양처럼 듣는 과목인데, 뭐.

“다 못한다니까. 공부한 데서 나오길 바라야지. 집 가는 길에 달 보면서 빌어야겠다. 아니다, 해 보면서 빌어야 되려나.”

그래. 네 점수지 내 점수냐. 은한이 알아서 하라며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리곤 부지런히 뒷정리를 시작했다. 기름 뚜껑도 닫고, 종이 파레트도 뜯어 버리고, 앞치마도 개키고, 한 귀퉁이에 마련된 세면대에서 뽀득뽀득 손도 씻었다. 진한 유화 냄새가 잘 가시지 않아 두 번이나 씻었다.

그러는 동안 크로스백까지 멘 한결은 유심히 은한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유화가 두껍게 발린 그림은 한결의 선입견 속 ‘작품’과는 좀 달랐다. 분명 못 그린 그림은 아닌데, 흐음, 소리가 나게 만드는 그런 것. 그리스 신들의 나체도 아니고, 예수나 성모마리아도 아니고.

온갖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 그림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만했다.

“방울아.”

“엉?”

“네 그림 제목이 뭐냐.”

한결은 그의 그림을 이해해 보고자 했다. 원래 예술의 세계는 심오하고 깊은 것이니까. 어떠한 색이 섞여야 주황색이 나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문외한인 제가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걸레로 열심히 책상을 닦던 은한이 대답했다.

“욕망.”

“어?”

“교수님이 욕망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오라고 하더라고? 내 친구들은 케이크, 아이돌, 잘빠진 남자 몸, 여자 몸 그런 거 그리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릴 게 안 떠오르더라. 그러다 운명처럼 만났지. 쇼윈도에서 빛나고 있는 운동화들을.”

“아아…….”

“씨발 이번 조던 신상이 무려 82만원이야. 몇 달 바짝 굶어야 살 수 있는 거라고. 진짜 라면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굶어야 살 수 있어.”

봇물 터진 듯 이어지는 은한의 한탄에 한결은 비로소 그의 그림을 이해했다. 이해하고 나니 퍽 괜찮은 그림이었다. 역시, 예술이란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다.

한결은 뿌듯했다.

시월의 새벽은 추웠다. 미대 건물을 나온 은한이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후드 하나만 걸치고 나오자니 춥고, 과잠을 입자니 덥고. 낮에는 따뜻하기에 그냥 나왔는데 사무치게 후회 중이었다. 한결 역시 후드 한 장을 덜렁 걸치고 있는데 그닥 춥지 않은 듯했다.

두 사람은 정문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고요한 캠퍼스는 영 적응이 안 됐다. 꼭 다른 세계의 낯선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가로등에 비치는 두 개의 그림자를 보고 있던 한결이 입술을 뗐다.

“방울아.”

“웅?”

한껏 몸을 움츠린 탓에 소리가 눌려 나갔다. 능글맞게 웃은 한결이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두툼하고 묵직한 한결의 팔이 따뜻해서 은한은 굳이 그의 손을 치워 내지 않았다. 또, 이렇게 팔 받침대로 쓰이는 건 꽤나 적응을 한 상태였다. 한결뿐만 아니라 공대남 셋 전부가 은한을 팔 받침대로 자주 애용했다.

“너는 여자친구 안 사귀냐?”

“여자친구?”

“어. 너네 시디 과에 예쁜 학생들 많다고 우리 과 애들이 난리던데.”

“므야, 므야. 백한결 너도 관심 있냐? 미팅 함 주선해 줘? 내가 또 시디과에 모르는 여자가 없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은한이 한결을 올려다봤다. 코가 어찌나 높은지 가로등 빛에 그림자가 질 정도인 한결은 참, 잘생겼다. 소개만 해 주면 여자친구들이 서로 밥을 사겠다고 난리일 테다. 은한이 머릿속으로 분주히 주소록을 훑고 있는데, 한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 말고 너 안 사귀냐고.”

“나? 야. 내가 사귈 시간이 어디 있어. 아침 빼고 점심, 저녁, 새벽. 너희들이 안 가리고 불러내잖아! 동기들이랑 밥 먹은 지도 까마득하다.”

“그래? 다행이네.”

한결이 샐쭉 웃었다. 은한이 그런 한결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흘겼다.

“뭐가?”

“너 없으면 누가 이렇게 내 팔 받침대 해 주냐.”

“또 뒤지고 싶어서 발악한다.”

“방울이가 딱이야. 진짜 딱. 너 정도가 딱 좋아.”

“팔 받침대는 딱! 좋지 않습니다만.”

은한이 어깨를 튕기며 한결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한결은 조금 더 찰싹 몸을 붙여 왔다. 이제는 아예 두 팔로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었다. 잠시 몸뚱이를 뒤틀던 은한이 축 사지를 늘어트렸다.

거머리보다 더한 공대남 셋을 절대 이기지 못함을 지금까지의 많은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팔 받침대에겐 팔만 얹어 주겠니? 네 무게 때문에 땅에 박힐 것 같구나, 한결아.”

턱까지 정수리에 올려놓은 한결에 은한이 부루퉁히 말했다. 한결이 고개를 저었다. 코끝에 은한의 샴푸향이 맴돌았다. 얘는 사내새끼가 이렇게 달달한 샴푸를 쓰냐. 그리 생각하면서도 열심히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런 한결을 전혀 모를 은한이 마지막 반항으로 어깨를 뒤틀었다. 역시나 벗어나는 데에 실패했다. 한결이 은한의 머리칼에 턱을 비비적거리며 웃었다.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은한이 귀여웠다. 뭐 언제는 안 귀여웠느냐마는.

“우리 방울이. 평생 솔로로 살아 주라.”

“이야.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네. 네 결혼식에 팔 받침대로 같이 걸어가면 존나 재미있긴 하겠다.”

번지르르한 수트를 입은 한결의 팔 아래에 어깨를 대 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은한이 미간을 잔뜩 좁혔다.

“뭐 굳이 팔 받침대로 걸어갈 필요 있나. 그냥 옆에 서면 되지.”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한결의 장난에 결국 은한이 퍽. 그의 옆구리를 갈겼다. 한결이 으윽, 하는 과장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은한은 발로도 한 대 차 줄까, 생각하다 말았다.

금세 다가온 한결이 다시금 어깨에 팔을 둘러 왔다. 은한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백한결은 백한결이요. 그런 생각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걷기만 했다.

“택시 타고 가게?”

“어. 그래야지.”

“내일 퀴즈 몇 신데?”

“열 시.”

“어, 그래? 그럼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은한이 별생각 않고 말했다. 4시가 훌쩍 넘은 시간인데 언제 집에 가서 또 언제 나온단 말인가. 어차피 저도 10시에 수업이 시작하니 같이 나오면 딱 좋겠다, 싶었다.

솔직히 자취방 맞은편에 있는 백반집이 2인분부터 돼서 그걸 같이 먹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

잘 걷던 한결이 뚝, 발걸음을 멈췄다. 그에게 잡혀 있던 은한도 함께 발을 멈추게 됐다.

“자고 가라고. 우리 집 엄청 크진 않은데, 너 누울 자리는 있어. 바닥도 따뜻하고.”

“…….”

“왜? 바닥에서 못 자냐? 뭐…… 침대에 두 명이 누울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은한이 제 방의 침대를 떠올리며 턱 아래를 긁었다. 아닌가. 못 자려나. 백한결 덩치가 좀 커야지. 자다가 저 어깨에 치이면 뺑소니 당한 것처럼 죽을 수도 있겠네.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한결이 두 손으로 은한의 볼을 한가득 쥐었다.

“진짜 자고 가?”

“어어 자고 가.”

“진짜?”

“왜 이래? 지금 네 눈 존나 음흉해. 아서라. 우리 집에 훔쳐갈 거 없다.”

한결의 손을 쳐낸 은한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한결의 표정이 묘했다. 그러다 조용히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에 비치는 그의 얼굴이 살짝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크지? 여기 근방에서 제일 큰 방이야. 내가 또 사랑받는 막내둥이잖냐.”

가방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은한이 보일러를 틀었다. 아직 가을이라 안 틀고 자지만, 오늘은 손님이 있으니 적당히 트는 게 좋을 듯했다. 온도를 맞춘 은한이 뽈뽈뽈 방을 가로질러 옷장을 뒤졌다. 한결에게 편한 바지를 찾아 주기 위해서였다. 뭘 입든 짤뚱한 옷이 될 테니 그냥 편한 걸 찾자.

“…….”

한결은 멀뚱히 현관에 서 있었다. 은한의 방은 깔끔했다. 하늘색 침구가 약간 흐트러져 있긴 하지만, 밀린 설거지도 없었고 바닥에 옷이 나뒹굴고 있지도 않았다. 거기다 나름 디자인과라고 인테리어에 신경을 쓴 건지 무드등에 진한 색을 가진 소파와 자그마한 러그도 깔려 있었다.

“거기서 자게?”

“어?”

“신발장에서 잘 거 아니면 얼른 씻어라. 나 존나 잠 와.”

“어어. 알았어.”

은한의 가방 옆에 제 가방을 벗어 둔 한결이 그가 주는 추리닝을 받아 화장실로 엉거주춤 이동했다. 욕실 역시 깨끗했다. 같은 브랜드 라인으로 쭈욱 맞춰진 바디용품들도, 가지런히 개켜진 수건도. 왠지 모르게 작아 보이는 칫솔에 한결이 픽, 하고 웃었다. 칫솔도 딱 방울이 거 같네.

“칫솔 찬장에 새것 많으니까 아무거나 꺼내 써!”

“어어!”

한결이 씻는 동안, 은한은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베개도 두고, 제가 늘 끌어안고 자는 푸우 인형 두 개 중 하나도 양보했다. 형광등을 끄고 무드등을 켜니 안락한 잠자리 하나가 탄생했다. 은한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사이 후다닥 샤워까지 마친 한결이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나왔다.

발목이 덜렁 드러난 추리닝에 끅끅거리며 웃던 은한이 곧 욕실로 들어갔다. 한결은 반쯤 넋이 나간 행색으로 멀뚱히 이불 한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 흔한 시계 하나 없는 집이라 은한이 씻는 소리를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세세히 들려줬다.

물소리. 욕실화가 끌리는 소리. 흥얼흥얼 정체 모를 은한의 노래를 듣던 한결이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께를 쓰다듬었으나 그런다고 가라앉을 심장이 아니었다.

“아 씨…… 돌겠네…….”

한결은 결국 이불 위에서 팔굽혀 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훅훅, 금세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심장도 거칠어졌다. 이제 거세게 뛰는 심장박동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운동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제야 숨 쉴 틈이 생겼다.

“뭐하냐?”

기척 없이 들려온 은한의 목소리에 한결이 철푸덕 넘어졌다. 목에 수건을 걸치고 나온 은한이 외계인을 보듯 한결을 보고 있었다.

“어? 잠이 안 와서.”

“새벽 4시 반인데 잠이 안 온다고?”

“어…… 좀 그렇네…….”

한결이 어색하게 웃었다. 꿈뻑꿈뻑 그를 바라보던 은한이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자취방에 꼭 한두 캔씩 있는 맥주였다. 은한은 혼자 있을 땐 소주보다 맥주를 즐기는 편이라 냉장고에는 늘 맥주가 있었다. 물론, 근래는 공대남 셋과 어울려 다니느라 맥주에는 손도 못 댔다.

“마실래?”

“어, 그래!”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맥주는 차가웠다. 한결이 맥주에 볼을 대고 슥슥 문질렀다. 은한은 야밤에 팔굽혀펴기 하고 오른 열을 맥주 캔으로 식히는 그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태준도, 진우도 또라인데 한결이라고 다를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은한이 꼴깍꼴깍 맥주를 삼켰다. 목구멍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온도가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한 캔을 다 마시고 나면 정말 기분 좋게 잠이 들 수 있을 듯했다.

“그래도 너 오니까 좋다. 자기 전에 같이 맥주 마시니까 좋네.”

“그래? 다음에 올 땐 맥주 많이 사 올게.”

“존나 좋지!”

한결이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어깨 옆으로 은한의 맨다리가 팔랑였다. 이제 막 여름을 보낸 터라 아직 반바지를 입고 자는 모양이다. 주홍빛 무드등에 비치는 은한의 다리가 매끈했다. 동그란 무릎은 흉터 하나 없다. 작은 발 위에 자리 잡은 복사뼈가 참, 탐스러웠다. 한결이 꿀꺽꿀꺽 맥주를 한 번에 반이나 마셨다.

“방울이 너는 털도 안 나냐…….”

“아아 엄마 닮아서 그래.”

그래서 여름에 반바지 입으면 좀 예쁨. 동기 여자애들이 다리 떼어 달라 그러는데 가끔 진짜 떼어 갈 생각인 것 같아서 좀 두렵다. 은한이 조물조물 자신의 종아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한결이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손가락을 허벅지 아래로 가져가 벌주듯 꾹, 눌러 내렸다.

“학교는…… 다닐 만하고?”

“엉?”

오랜만에 만나는 할머니가 할 만한 한결의 질문에 은한이 되물었다. 오늘의 한결은 묘하게 이상했다. 아마 공부하느라 머리를 너무 과하게 써서 그런 것이려니. 은한은 이번에도 대충 넘기기로 했다.

“뭐…… 다닐 만하고 아니고가 어딨냐. 아직 일학년인데. 그냥 다니는 거지. 쏟아지는 과제에 하루살이처럼 살다 보면 졸업이랬다.”

“그래? 나는 요즘 학교 다니는 거 엄청 재미있는데.”

“그게 다 이 강은한이 시커먼 공대남 셋 사이에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

“그러게. 그런 것 같네.”

“……너 좀 이상해, 오늘.”

결국 은한은 몇 번이나 넘기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한결이 흡. 숨을 멈췄다.

“뭐가 이상한데?”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그냥…… 좀 이상해 너.”

답을 듣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네 상태가 정상이 아닌 듯하니 얼른 자는 게 좋겠어. 뭐 그런 말이었다. 근데 한결은 버석하게 바위처럼 굳어 버렸다. 이쯤 되니 정말 이상했다. 한결과 안 지 일 년이 된 것도 아니고, 이제 고작 한 달이 꼬박 흘렀지만, 평소와 다른 건 확실했다.

“그러게. 나도 내가 이상하다.”

“…….”

한결이 꿀꺽꿀꺽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두툼한 그의 목젖이 아래위로 일렁였다. 그런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은한이 코를 찡긋거렸다.

오늘 공부가 영 시원찮았나.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 달래줘야 하나. 뭐라고 달래 주지. 그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결이 빠각, 맥주 캔을 구겼다.

“자자. 내일 아침 먹고 싶다며. 먹고 학교 가려면 네 시간밖에 못 자겠다.”

“어어.”

벌떡 일어난 한결이 은한의 손에 들린 맥주 캔을 가져갔다. 은한이 구석에 놓인 재활용 박스를 가리키자 그는 남은 맥주를 싱크대에 쏟아 내고, 빈 캔을 박스에 넣었다.

불을 끄고 이불까지 덮으니 묵직한 정적이 자리를 잡았다. 색색, 두 사람의 숨소리만 섞여 갔다. 잘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멍하니 보고 있던 은한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백한결. 자?”

“……아니.”

은한이 꼬물꼬물 옆으로 몸을 돌렸다. 침대 아래로 어렴풋이 한결의 옆모습이 보였다. 높은 코가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도 또렷했다.

“나도 너 때문에 요즘 학교 재미있어.”

“…….”

“그냥 그렇다고. 잘 자라.”

은한이 얼굴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뭐 그리 대단한 말이라고 조금 부끄러웠다. 한결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피식, 하고 웃을 뿐. 그 웃음소리로도 충분한 대답이 됐다.

그렇게 이른 새벽, 두 사람은 피곤하고 묘했던 하루를 끝냈다.

* * *

눈독만 들이고 시도는 못 하던 아침 백반집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맛있다고 찬양과 함께 훌쩍이기까지 하는 은한에 한결이 큭큭거리며 웃어댔다. 제 몫의 스팸을 은한의 숟가락에 올려 주기도 했다.

“아침 먹고 싶으면 불러.”

“웅?”

입안 가득 밥을 채워 넣은 은한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한결이 그의 앞으로 물 잔을 밀었다. 체할라. 천천히 좀 먹어라. 아직 시간 많아. 걱정 묻은 잔소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 먹고 싶으면 부르라고. 내가 일찍 오든가 할게. 주변에 자취하는 애가 없어서 아침을 못 먹는 줄은 몰랐네.”

“너 진짜…….”

“이상하다고?”

한결이 씁쓸한 표정으로 찬물을 들이켰다. 그 말에 은한이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존나 너무…… 천사 같다. 뒤돌아봐. 등에 날개 달린 거 아니냐?”

은한의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어쩜. 그냥 잘생긴 멍청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속 깊은 놈이었다니. 은한은 한결과 조금 더 친해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식사에 집중하느라 그런 생각도 잠시였지만.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닌데 숟가락을 옴팡지게 움켜쥔 은한의 작은 손에 한결이 픽, 하고 웃었다. 쪼그마한 게 많이 먹는단 말이지. 그가 불고기 뚝배기를 조금 더 은한의 앞으로 밀어 줬다.

“나도 너랑 아침 먹으면 좋지.”

“왜? 집에서 아침 안 먹어?”

“그건 아닌데. 그냥…… 다른 의미로 좋아.”

한결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은한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흘려보냈다. 어머님 음식보다 여기 음식이 맛있나 보다. 그리 넘겨짚었다. 어찌 됐든 가끔이나마 이렇게 호화로운 아침을 먹을 수 있다면 뭐든 오케이였다.

두 사람은 따뜻한 모닝커피까지 사서 헤어졌다. 고작 4시간밖에 자지 않았는데, 8시간쯤 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은하니. 오늘 얼굴 좋네.”

“그래?”

“야작한다더니. 걍 집 가서 잤어?”

“아니. 다했어.”

여자 동기의 말에 은한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 은한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회화실에 들어서면 늘 유화 냄새가 싫다며 툴툴대던 은한이었는데, 오늘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웃어대?”

“그냥. 기분이 좋아서.”

은한이 커피 뚜껑을 열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 코끝을 스치는 커피향이 좋았다. 호록,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을 때, 그녀가 은한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물었다.

“연애하냐?”

“푸흡!”

은한은 커피를 놓칠 뻔한 걸 간신히 잡았다. 연애? 누구랑? 설마 백한결이랑? 은한의 표정이 요상하게 뒤틀렸다. 상상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기 때문이다. 잘 먹은 아침이 솟구치는 듯했다.

“연애는 상대방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냐. 언제부터 혼자도 할 수 있는 게 연애가 됐냐.”

“아님 말고.”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다시 멀어졌다. 은한이 쩝, 입맛을 다셨다.

연애. 진짜 하긴 해야 하는데.

교수님이 들어오면서 은한의 연애 고민은 금세 공중으로 휘발했다.

* * *

자고로 작품 발표는 그림 반, 말빨 반이다. 은한은 고심해서 준비한 발표로 썩 나쁘지 않은 교수님의 반응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막 발표를 끝내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였다. 앞치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린 것은. 진동의 주인은 공대남 셋과 함께 있는 톡방이었다.

[진우: 방울아 점심 뭐 먹을래?]

[태준: 까르보나라 먹자.]

[태준: 까]

[태준: 르]

[태준: 보]

[태준: 나]

[태준: 라]

[진우: 뭔 까르보나라야. 퀴즈 좆 돼서 속 안 좋아. 그거 먹으면 토할지도 몰라.]

[태준: 토하면 그게 더 좆같으니까 퀴즈의 좆같음을 잊지 않을까?]

[진우: 니새끼가 제일 좆같다.]

오늘도 역시 생산성이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대화다. 은한이 작게 웃으며 핸드폰을 두드렸다.

[퀴즈 망했냐?]

[진우: 백한결만 존나 잘침. 네 문제 중에 네 개 다 썼대. 존나 배신자.]

[태준: 죽이자.]

[진우: 그래 죽이자.]

한결은 어제 새벽까지 열심히 보더니 성공한 듯했다. 잘됐네. 나도 발표 잘 끝났는데. 오늘 백한결이랑 축배 들어야 되겠어. 은한이 비실비실 웃다 옆에 앉은 동기의 눈초리에 합,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소곤소곤 물었다.

“진짜 연애하는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

“은하니 너 우리 몰래 여친 만들면 뒤져.”

우리 아직 다 솔로인 거 알지? 가뜩이나 요즘 밥도 같이 안 먹어서 수상한데. 걸리기만 해라. 그녀의 경고에 은한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누구든 먼저 연애를 하면 거나하게 밥을 사기로 내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패밀리 레스토랑.

뭐 어때. 어차피 연애는 이미 글렀다. 공대남 셋의 개미지옥에 들어가 있는지라. 우우웅, 다시 진동이 울렸다.

[한결: 씹새들아. 너희가 어제 나 중도에 버리고 갔잖아.]

[진우: 버린 거 아닌데. 집에 같이 가자니까 네가 안 간 거거든.]

[태준: 그런 거거든. 거거든. 거거든.]

분명 셋이 같이 있을 텐데, 굳이 톡으로 대화하는 이유는 뭘까.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은한이 자판을 두드렸다.

[까르보나라 먹자. 양식 안 먹은 지 오래됐다.]

[진우: 방울아. 양식의 종류는 많단다. 돈가스로 딜 보자.]

[나는 좋음.]

[태준: 그럼 나는 까르보나라 돈가스 먹을 거얌.]

[한결: ㅇㅇ]

한결의 대답까지 읽은 은한이 핸드폰을 다시 앞치마에 쑤셔 넣었다. 그의 검지가 톡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나는 무슨 돈가스 먹지. 그 고민만으로 남은 강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퀴즈를 망친 진우와 태준은 식사하는 내내 한결을 비난했다. 욕설이 난무하는 대화를 구경하는 게 제법 재미있었다. 저급한 인터넷 방송을 틀어 놓고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끝낸 네 사람은 오후 강의가 삼십 분쯤 남아 멍하니 중앙 운동장 벤치에 앉았다. 취향에 맞는 탄산음료를 하나씩 들고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살랑살랑, 머리칼을 흩트리고 가는 가을바람이 좋았다. 살짝 눈을 감은 은한이 후읍, 깊게 숨을 마셨다. 한참 눈을 감고 있다 슥슥 볼을 문질러 오는 한결의 엄지에 눈을 떴다. 한결이 씩, 웃었다. 뭘 쪼개. 그리 말하려다 말았다. 제 볼을 만지는 지분은 30%가 여자 동기들, 10%가 공대남 둘, 나머지 60%가 한결이라. 조물조물 볼을 만지는 손이 커다랗고 투박한 생김새와 달리 부드러웠다.

벤치 앞에 쪼그려 앉아 꽃받침을 하고 있던 태준이 은한에게 물었다.

“방울아. 어제 백한결 저 새끼가 너희 집에서 잤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니?”

“엉.”

은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에 태준이 벌떡 일어나 은한에게 다가갔다. 태준 역시 180이 훌쩍 넘는 키라 퍽 위협적이었다. 은한이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며 한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가 겁에 질렸든 말든, 눈을 동그랗게 뜬 태준이 그의 무릎에 엉덩이를 붙였다. 묵직한 무게감에 은한이 윽, 단말마의 신음을 흘렸다.

“나는, 나는!”

“너 뭐?”

“나도 방울이 집 갈래!”

“싫어.”

은한이 진심으로 싫다는 듯 가감 없이 얼굴을 구겼다. 온 집을 헤집으며 이건 뭐야? 이거는? 이거 먹어도 돼? 이거 입어 봐도 돼? 이건 뭐 할 때 쓰는 거야? 등등 온갖 질문을 해댈 태준의 모습이 뻔했기 때문이다.

단호한 거절에 태준이 동동 발을 굴렀다. 그의 반짝이는 금발이 마구 팔랑거렸다. 그에게 깔리다시피 한 은한은 딱 죽을 맛이었다.

“왜!”

“솔직하게 말해도 상처받지 않을 자신 있냐…….”

태준이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은한의 말을 되뇌었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내가 너 좀 싫어해서 집에 초대하기 싫은 거로 결론 내자.”

“뭐야! 그것도 존나 상처야!”

“어우…….”

어쩌란 말이냐, 이 또라이 새끼야. 은한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자 눈치 좋은 진우가 태준의 목덜미를 잡아다 아래로 끌어내렸다. 태준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통 울상인 낯이 좀 안쓰럽기도 하고.

태준은 행동이나 덩치와 달리 순하게 생긴 상에 속했다. 눈도 또렷하고, 코도 높은데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다음에 와, 다음에. 은한이 툭툭 그의 볼을 건드렸다. 태준의 목소리가 확연히 밝아졌다.

“다음에 언제?”

“그냥 다음에.”

은한이 답을 회피하며 옆에 앉아 있는 한결의 팔뚝에다 볼을 비볐다. 분명 오전 강의를 들을 때만 해도 피곤한 줄 몰랐는데. 배부르게 밥도 먹고, 공대남 셋에게 푹 시달리다 보니 잠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못해도 7시간, 보통은 8시간씩 꼬박꼬박 자던 잠이 반절로 뚝 줄었으니 당연했다.

은한이 한결의 팔뚝에 턱을 댄 채 그에게 물었다. 저와 달리 멀쩡한 모습인 그가 신기했기 때문이다.

“너는 잠 안 오냐?”

“어? 어. 나는 별로. 원래 다섯 시간 정도밖에 안 자.”

“그러다 뒤져. 인간이 일곱 시간씩은 자야 돼요.”

쯧쯧, 혀를 찬 은한이 다시 한결의 팔뚝에 기댔다. 운동이라도 하는 건지 단단한 팔뚝이 썩 괜찮은 베개였다.

“너네 같이 잤냐?”

반쯤 눈을 감은 은한과, 그에게 팔뚝을 내어 주고 뻣뻣하게 굳은 한결을 번갈아 보던 진우가 물었다.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의 두 사람이라. 은한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엉. 우리 집에서 잤다니까?”

“아니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잤냐고.”

“미쳤냐? 우리 집 그렇게 안 작아. 백한결은 바닥, 나는 침대서 잤지.”

“근데 좀…… 둘이서만 되게 친해진 느낌인데?”

진우가 살풋 미간을 구겼다. 저렇게까지 스킨십에 너그럽던 은한이 아니었는데. 게슴츠레 눈을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진우에 한결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분명 아무런 일도 없었던 밤이었거늘. 태준과 진우가 이렇게 난리니 별일 없었던 게 억울해질 지경이었다.

“백한결이 나랑 아침 먹어 준대서 그래.”

“아침?”

“어어. 그런 게 있어.”

은한이 더 캐묻지 말라는 듯 휘휘 손을 저었다. 오늘따라 질문이 많은 태준과 진우가 영 귀찮았다. 그냥 수업 째고 어디 가서 퍼질러 잤으면 좋겠네.

핸드폰 화면에 쓰인 시계를 본 은한이 끙, 앓았다. 이제 다음 강의가 십 분이 채 남지 않았다. 거기다 과목은 미술사. 무려 현대 미술사. 포토샵을 만지는 실기 수업이면 그나마 나은데, 미술사 수업을 두 눈 멀쩡히 뜨고 버티기는 술을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수업 가기 싫다.”

은한이 흘리듯 중얼거렸다. 그냥 혼잣말이었다. 반쯤 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내뱉은 실언. 제 옆에 있는 인간들이 공대남 셋인줄 알았다면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진우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쨀까? 그러잖아도 나 퀴즈 때문에 기분이 너무 더러웠어.”

“나도. 역시 방울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알고.”

태준이 두 손으로 은한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은한이 맹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뭔가 흐름이 영, 이상한데. 아직은 상황 파악 중이다. 신난 태준과 진우가 본격적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뭐 할까?”

“술 마시자. 할매국밥집에서.”

“그건 수업 안 째도 할 수 있는 거잖아.”

“어…… 그럼…….”

태준이 만지작만지작 은한의 볼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은한은 여전히 눈만 꿈벅이고 있었다. 내내 바닥만 주시하고 있던 한결이 말했다.

“놀이공원 갈까?”

“어?”

“와 존나 싱크빅해. 창의적이야. 놀이공원이라니.”

화들짝 놀란 은한과 달리 태준은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진우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놀이공원은 고등학교 소풍 때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너희 미쳤니?”

은한이 진심으로 물었다. 그러는 동안 머리를 맞댄 세 사람은 분주히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멤버십이 뭐야? 통신사 할인된대. 자유이용권이 이렇게 비쌌냐? 저녁에 가는 건 싸다. 그때 되면 사람 많지 않냐. 오늘 평일인데도 많냐? 치이는 거 개싫어. 그냥 지금 가자.

그 누구도 은한의 질문에 답해 주지 않았다. 은한이 한결의 팔뚝에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벤치에서 엉덩이를 뗐다. 도망가자. 이렇게 있다간 분명 꼼짝없이 바이킹까지 직진이다. 수업 들어가기가 싫었던 이유는 졸려서였지, 놀이동산에서 깔깔거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방울아. 여기 머리띠도 판대. 내가 하나 사 줄게.”

“아니. 나는 정말 괜찮단다.”

벤치에서 두 발자국쯤 멀어졌을 때, 들려오는 진우의 말에 은한이 거절을 뱉었다. 다시 도망치려 했더니 이번엔 턱, 손목이 붙잡혔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한결이었다.

“우리 하룻밤도 같이 보낸 사인데. 이렇게 매정하게 가려고?”

“이 새끼 돌았네…….”

완전히 돌았어. 은한이 열심히 손목을 뒤틀었다. 하지만 솥뚜껑만큼 커다란 한결의 손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은한은 자의라곤 하나도 없이 놀이공원에 끌려가야 했다.

* * *

벌써 지각 두 번이나 한 수업이야. 이번에 빠지면 투 아웃이라고. 나 F 받으면 책임질 거냐, 이 또라이 새끼들아! 사람 살려! 이 미친놈들이 저 납치하는 거예요! 저기요! 이게 장난으로 보여?! 쨀 거면 그냥 어디 가서 잠이나 자! 무슨 놀이공원이야! 야! 씹냐! 어?

은한이 악을 내지르는 동안 공대남 셋은 느긋하게 택시를 잡고 은한을 가장 먼저 태웠다. 은한은 두툼한 한결의 덩치에 눌려 찌부러진 채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지금은,

“토끼가 잘 어울려.”

“아니야. 여우지.”

“나는 고양이가 맞다고 본다.”

기념품샵에서 온갖 머리띠를 써보는 중이었다. 은한이 흘깃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강의 시간의 반이 흘렀다. 지금 들어가 봐야 결석 처리라는 거다. 한탄과 함께 미술사를 포기했다. 그러니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게 된 거 모든 놀이기구를 타고 간다. 은한이 해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아무거나 해.”

“안 돼.”

공대남 셋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후로도 은한의 머리띠 싸움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참다못한 은한이 퍽, 세 사람을 쳐 내고 아무 머리띠나 집어 썼다. 무려 하얀색 강아지 머리띠였다. 은한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귀가 움직였다.

“이걸로 해. 이게 좋아.”

“아…… 존나 어쩜…….”

“찰떡이다, 방울아. 그거 그냥 붙이고 살아도 될 것 같아.”

태준과 진우가 한 마디씩 거들었고, 한결은 입술을 말아 문 채 손뼉을 쳤다. 공대남 셋은 오리와 하트 모양의 핀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전혀 살 생각이 없었으나 하나씩 머리에 꽂지 않으면 집에 갈 거라는 은한의 엄포에 고개를 숙여 준 거였다.

그렇게 네 사람은 사무칠 정도로 귀여운 머리 장식을 쓰고 기념품샵을 나왔다.

실내 놀이공원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딱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내내 부루퉁했던 은한도 막상 꺅꺅거리는 비명과 휘황찬란한 놀이기구들을 보자 들뜨기 시작했다. 물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시커먼 남자 넷의 머리 위에서 달랑이는 장식을 보고 수군거리는 건 애써 모른 척해야 했다.

“야. 나 좀 설렌다.”

강아지 귀를 고쳐 쓰던 은한이 답했다.

“나도.”

“사람 없는 놀이공원이라니. 대학생 되고 제일 행복한 것 같다.”

“구라치지 마. 술 마실 때가 제일 행복하면서.”

태준의 말에 진우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한결과 은한이 함께 태준을 비웃었다.

“뭐부터 타?”

“무조건 무서운 거.”

“일단 시작은 정석대로 바이킹이지.”

진우가 저 멀리 힘차게 움직이고 있는 바이킹을 가리켰다. 오오, 세 사람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이십 분 정도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금세 네 사람의 차례가 왔다.

“둘씩 앉자.”

막 놀이기구에 발을 들였을 때였다. 음흉하게 웃던 태준이 따로 떨어져 앉자는 제안을 해 왔다. 은한이 갸우뚱, 고개를 꺾으며 물었다.

“왜?”

“반대편에서 사진 찍게.”

“……미친놈.”

결국 태준의 고집대로 그와 진우는 왼쪽 끝에, 한결과 은한은 반대편 끝에 앉게 됐다. 태준과 진우는 시작도 전부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쭈욱, 줌인해 한결과 은한을 담았다. 은한이 지지 않겠다는 듯 카메라를 켰다.

“백한결. 무조건 연사야.”

“엉.”

이미 카메라를 들고 있던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바이킹이 출발하고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바이킹이 네 번쯤 왕복했을 때, 은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뱃속이 간질거리고 심장이 아려서. 그냥 짜릿하고 스릴 있는 게 아니라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했다.

바이킹이라는 게 이리도 무서웠던가.

휘휘, 귓가를 소란스레 만드는 바람 소리도 싫었고, 사람들의 비명도 싫었다. 질끈 눈을 감아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포심을 억누르지 못한 은한이 한결의 팔뚝을 쥐었다. 팔뚝이 어찌나 두꺼운지, 한 번에 잡히지 않는 게 짜증나 그냥 손을 잡았다. 잠시 굳어 있던 한결이 곧 손가락을 얽어 왔다.

“방울아 무서워?”

“어……. 무섭다, 이거.”

바이킹은 끝날 듯하면서도 끝나지 않았다. 하얗게 질려 가는 은한을 지켜보던 한결이 조금 더 바짝 그의 옆으로 붙어 앉았다. 태준과 진우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은한은 바이킹이 난폭한 항해를 끝낼 때까지 꼬옥 한결의 손만 붙잡고 있었다. 고작 해 봐야 2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일 텐데, 억 겁의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동안 한결은 은한의 귓가에 곧 끝날 거다, 괜찮다는 말을 반복해 줬다. 은한은 간절히 그의 말이 사실이길 바랐다.

놀이기구에서 내리고, 온전한 바닥을 디뎠을 때 은한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잔뜩 힘을 줘야 했다. 세상에 고작 바이킹에 다리가 풀리다니. 저 자신인데도 이해가 안 됐다. 분명 수학여행으로 와서 탔던 바이킹은 조금 과격한 그네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은한의 상태를 알 리 없는 태준이 쿵쿵 발을 구르며 다가왔다.

“야!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사진을 어떻게 찍어! 사진첩에 정수리밖에 없잖아.”

그가 휙휙, 사진첩을 아래로 내려 보였다. 그의 말마따나 화면에는 두 개의 정수리뿐이었다. 은한이 미안하다며 툭, 태준의 어깨를 쳤다. 태준이 그제야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달덩이처럼 떠오르고 있는 은한의 얼굴을 발견했다.

“방울이 너 왜 이래?”

“으…… 멀미나. 토할 것 같아.”

한결이 은한의 어깨를 추슬러 안았다. 은한이 힘없이 그의 품으로 딸려 갔다. 핑핑 도는 시야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얘 놀이기구랑 안 맞나 봐. 더 태우면 안 될 것 같아.”

심각한 표정의 한결이 말했다. 태준은 물이라도 사 오겠다며 후다닥, 자판기를 향해 뛰어갔다. 진우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은한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방울아. 집에 갈래? 데려다줄게.”

“아니야. 멀미랑 비슷해.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은한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허나 창백한 낯빛은 여전했다. 한결과 진우의 얼굴에 온통 걱정이 차올랐다. 그에 은한이 애써 웃어 보였다.

“안 죽어, 새끼들아. 가서 놀아. 나 잠깐 앉아 있다가 괜찮아지면 따라갈게.”

은한이 가까이에 있는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바이킹을 탈 때보다는 훨씬 편한 상태다. 하늘과 땅을 헤집는 롤러코스터 같은 건 타지 못할 테지만, 적어도 민폐는 되지 말아야 했다.

“어떻게 널 두고 놀아.”

진우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놨다. 그 덕에 은한은 더더욱 미안해졌다. 놀이공원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저 때문에 모든 게 어그러진 듯했다.

금세 나타난 태준이 생수를 건넸다. 은한이 고맙다는 감사 인사와 함께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잠시 정적이었다. 공대남 셋의 눈동자가 오롯이 은한에게만 향해 있었다. 평온해지던 속이 다시 더부룩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진짜 괜찮다니까. 가서 놀아. 너희들이 이러니까 내가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래두…….”

태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당연히 놀고야 싶었지만, 이 넓은 곳에 은한 홀로 두고 가자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소중한 방울이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해. 그럴 바에는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 수업을 듣는 게 백 번 나았다.

“내가 방울이랑 있을게. 괜찮아지면 데리고 갈 테니까, 가서 줄 서 있어.”

한결이 진우와 태준을 설득했다. 세 번쯤 그냥 집에 가자며 거절하던 두 사람이 께름칙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멀어지는 두 사람에게 열심히 인사하던 은한이 한결에게 말했다.

“너도 같이 가지.”

“나도 속이 별로 안 좋아서.”

미간을 찌푸린 한결이 슥슥, 자신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흘기던 은한이 됐다는 듯 벤치로 향했다. 한결이 샐쭉 웃으며 그를 뒤따랐다.

가만히 앉아 있는 둘과 달리 사람들은 참 바쁘게도 움직였다. 은한은 간간이 물을 홀짝이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연인, 가족, 친구. 웃음을 만개한 그들을 보고 있으니 조금 씁쓸했다. 나도 잘 놀 수 있는데. 요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이제 스물인데 벌써 몸뚱이에 문제가 생겼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안.”

한결이 뜬금없이 사과를 해 왔다. 은한이 고개를 돌려 한결을 바라보았다. 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는 한결이다.

“뭐가.”

“괜히 놀이공원 오자고 해서.”

“아냐. 재미있어.”

“벤치에 앉아 있는 게 재미있냐?”

“강아지 귀 달고 있는 게 재미있다.”

은한이 머리를 흔들자 귀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내내 굳어 있던 한결이 조금 유하게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자 메슥거리던 속이 완전히 평온해졌다.

그쯤 되자 시간이 아까워졌다. 자유 이용권 가격이 얼만데. 수업까지 째고 온 놀이동산인데.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태준과 진우에게서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재미있게 놀고 있는 듯했다. 은한이 한결을 불렀다.

“백한결.”

“응?”

“우리도 놀이기구 타자.”

한결이 은한의 낯을 살폈다. 아까보다 혈색도 좋고, 땀도 나지 않는다. 괜찮다고 판단한 한결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눈매가 반짝이니 마음이 놓였다.

은한이 티켓을 구매하면서 집어 왔던 놀이공원 지도를 뚫어져라 살폈다. 아래위로 격하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적당히 재미있는 것. 그런 것만 타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터였다.

선택된 놀이기구는 정글탐험보트였다. 물 위에 둥둥 떠서 정글을 탐험한다는데 바이킹처럼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놀이기구 앞에는 성인이 반, 아이들이 반이다. 한결과 은한은 줄을 기다리며 오전에 있었던 퀴즈와 발표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결과가 나쁘지 않았던 터라 대화는 산뜻했다.

“신비로운 정글로 고고! 호랑이에게 잡혀갈 수 있으니 안전바를 꼬옥- 잡아 주세요!”

아르바이트생의 발랄한 인사에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둥둥 떠 있는 동그란 보트에 애 둘과 함께 탔다. 정글 탐험이라더니 온통 시커먼 공간에 은한이 미간을 좁혔다.

“너무 어둡지 않냐?”

“무서워?”

“야 내가 바이킹 타고 멀미를 한 거지 무서웠던 건 아니야.”

높아지는 은한의 언성에 한결이 그래그래, 동조해 줬다. 꼭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듯했다.

보트는 생각보다 크게 일렁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은한은 이따금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한결은 그럴 때마다 안전바를 움켜쥔 은한의 손등을 슥슥 매만졌다.

커다란 코끼리와 보물 상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놀이기구의 중반쯤 지나니 은한도 적응을 한 듯 주변을 구경했다. 한결은 그런 은한을 구경했다.

그는 보물 상자가 나타났을 땐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호오, 하는 감탄사를 내놓았다. 찰팍, 물이 튈 땐 질끈 눈을 감았다. 좁아진 미간이 사랑스러웠다. 함께 탄 아이들과 장난을 칠 땐 입이 가로로 길게 벌어졌다. 사르르, 가늘어지는 눈웃음은 볼 때마다 신기한 것이다.

“야 바이킹보다 훨씬 재밌다.”

“그래?”

탐험 보트는 은한에게도, 한결에게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바이킹을 떨쳐 낸 은한이 지도를 펼치며 다음 놀이기구를 골랐다. 그가 뭘 고르든 한결은 좋다는 소리만 했다.

은한은 지도에 들어갈 듯 코를 박았다. 앞에 계단이 있던, 점포가 있던 조심하지 않았다. 계단을 잘못 디뎌 훅 가라앉는 은한의 허리를 한결이 감싸 안았다. 얇은 허리가 한결의 힘에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렸다. 허나 은한은 여전히 지도만 살피고 있었다.

“조심 좀 해.”

“너 있잖아.”

“…….”

참 당연하게 흘러나오는 말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 한결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놀이기구를 하나씩 클리어해 갈 때마다 은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는 그저 길을 걷고 있을 뿐인데도 눈이 사라질 만큼 웃고 있는 은한이다. 한결은 놀이공원에 오길 참 잘한 것 같다고 자신을 칭찬했다.

“츄러스.”

“응?”

“츄러스 먹자.”

파라오의 축복이던가 저주던가. 그런 놀이기구를 향해 가던 은한이 길목마다 서 있는 매점을 보며 말했다. 주홍색 빛 아래에 길게 늘어진 츄러스는 놀이동산에서 먹을 때 유독 맛있곤 했다.

한결이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었다. 저 통통한 입술이 무언가를 먹고 싶다, 말하는데 사 주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런 한결을 밀어낸 은한이 직접 세 개를 주문했다. 하나는 한결을 주고 두 개를 양손에 쥐었다. 단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 한결을 알아서였다.

“와 츄러스 완전 오랜만에 먹어.”

“나도.”

“맛있다. 놀이기구 하나 타고 핫도그도 먹자.”

은한의 입가에 묻은 설탕을 털어 낸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제 입가에 묻은 설탕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우걱우걱 츄러스를 씹었다. 콜라까지 쭙쭙 마시던 은한의 쭉 다리를 폈다. 한결에 비해 월등히 작은 운동화가 좌우로 까딱였다.

“놀이동산 진짜 재미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

한결이 두 번째 츄러스를 씹는 은한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맡아 봤던 샴푸향이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였다. 은한 몰래 그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참 이기적이게도 그가 멀미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 덕에 이렇게 둘이 있게 되었으니까.

그때, 눈치 없이 핸드폰이 울렸다. 진우였다.

[방울이 괜찮냐.]

먼저 톡을 본 한결이 답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안 괜찮아. 집에 데려다주고 2박 3일 간호까지 할까 봐. 너넨 계속 그렇게 놀아 주련? 그리 답하고 싶었다.

진동을 느낀 은한이 핸드폰을 들었다. 한결이 불안하게 그의 핸드폰을 훔쳐봤다. 이대로 그와의 데이트 같지 않은 데이트를 끝내고 싶지 않아서.

[나 이제 괜찮아. 백한결이랑 애기들 타는 거 타고 있음. 저녁 먹을 때 만나자.]

한결은 만세를 부를 뻔했다. 저녁때 만나재. 최소 두 시간은 은한과 둘만 있을 수 있단 말이다. 한결은 씰룩씰룩 치솟는 광대를 숨기기가 어려웠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은한의 입에 탄산음료를 물려 줬다.

마지막 츄러스를 한입에 털어 넣은 은한이 일어났다.

“갈까?”

“그래.”

한결이 은한을 따라 일어섰다. 평생 왔던 놀이동산 중 가장 즐거웠다.

* * *

한결은 이른 아침에 등교하는 날이 많아졌다. 은한과의 아침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제 제법 겨울 티를 내는 날씨가 시리다. 연한 입김을 뿜어낸 한결이 툭툭 핸드폰을 두드렸다.

방울아. 춥다. 두꺼운 거 입고 나와라.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면 오냐, 하는 짧은 답이 온다. 그마저도 좋아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약속이다. 절친한 친구지만 은한과 있을 땐 귀찮은 짐 정도에 불과한 진우와 태준이 없으니 이리 좋았다.

저 멀리 식당 앞에 선 은한이 보인다. 도톰하고 커다란 후드에 가을 점퍼까지 걸친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자를 뒤집어쓴 얼굴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롤업한 바지 아래에 동그란 복사뼈가 발갛게 얼어 있었지만, 그 정도는 넘길 수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동동 발을 구르던 은한이 한결을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곧 목구멍으로 들어올 뜨끈한 아침밥이 너무나, 기대됐기 때문이다.

“안녕, 모닝엔젤.”

요상한 호칭에 한결이 살풋 미간을 구겼다.

“그건 또 뭐냐.”

“내 마음을 담아서 지어 봤어. 모닝엔젤.”

독거하는 친구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귀한 발걸음 해 주는 네가 천사와 뭐가 다르겠니. 은한이 발끝을 들고 한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한결이 슬쩍 무릎을 굽혀 그의 칭찬을 받아 냈다.

조금 더 칭찬이 이어지길 바랐던 한결의 마음을 모르고 굶주린 은한은 금세 뒤를 돌아 포르르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쩝, 입맛을 다신 한결이 그를 따라 식당에 들어섰다.

“너 중간고사 언제 시작이냐.”

은한이 쪼로록, 물을 따르며 물었다.

“나 다음 주 목요일.”

한결이 수저를 놓으며 답했다. 입술을 삐죽인 은한의 어깨가 아래로 축 가라앉았다. 벌써 중간고사다. 뭐 했다고. 기억에 남는 건 공대남 셋과 술 먹으러 다닌 것뿐인데. 중간대체과제와 중간고사에 치일 이 주를 생각하니 밥맛이 떨어질 듯했다.

물론 김이 폴폴 오르는 김치찌개가 테이블에 놓이는 순간 사라진 생각이다.

둘은 한동안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갔다.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 은한이 살갑게 이모를 불렀다. 그리고 한 공기 더 달라며 귀엽게 눈을 휜다. 한결은 그가 쪼끄마하고 마른 몸뚱이로 두 공기씩 먹을 때마다 참, 신기했다.

“야.”

“응.”

은한은 늘 불러 놓고 부지런히 음식을 씹었다. 성격이 급해 얼른 말하고 싶은데, 입에 음식물이 있으면 말을 하지 않았다. 한결은 그런 은한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통통한 입술이 오물오물. 참 열심히도 움직인다.

찬물로 대충 입안까지 헹군 은한이 말했다.

“너 미현이 알지?”

낯선 이름에 한결이 눈동자를 굴렸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생각나는 얼굴이 없다. 그러다 종종 미대 건물에 가면 은한의 옆에 있던 한 여학우의 잔상을 떠올렸다. 단발머리였던가. 긴 머리였던가.

“네 친구?”

한결의 되물음에 은한이 계란말이를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엉. 걔 어때?”

은한은 말을 할 때 돌려 말하지 않는 편이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는 말이기도 했고. 그 덕에 받아들이는 건 오롯이 한결의 몫이었다. 한결이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놨다.

“어떠냐니?”

알면서 되물은 말이다.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 한결을 눈치채지 못한 은한이 두부조림을 조각내며 종알종알 입술을 움직였다. 금방까지 귀엽던 입술이 조금 미웠다.

“미현이 성격 좋아. 내가 태어나서 만났던 여자 중에 우리 엄마 제외 제일 좋아. 서글서글하고.”

“그래서?”

점점 굳어 가는 한결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한의 입술은 쉼이 없었다.

은한은 진심으로 두 사람이 만났으면, 했다. 친구로서 미현이 좋았고, 한결도 좋았다. 남자들끼리 밥을 먹을 때도 수저를 먼저 놔 준다거나, 좋아하는 반찬을 앞으로 밀어 준다거나, 평소 걸음이 빠르면서 함께 걸을 땐 발을 맞춰 준다거나. 그런 세세한 것에서 한결이 참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았다.

“뭘 그래서야. 보면 모르냐. 소개팅하라는 거지.”

“…….”

“우리 미현이가 요즘 외롭댄다.”

“…….”

한결은 침묵했다. 두부에 집중하고 있던 은한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달리 굳어 있는 한결에 아, 실수했구나. 싶었다. 그새 여자친구라도 생겼나.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터라 당연히 솔로로 여겼다.

“왜? 별로야? 그러고 보니 네 이상형을 모르네.”

은한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머리를 돌렸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건 딱 질색이다. 한결이라면 더더욱. 오랫동안 연을 이어 가고 싶은 사람이라서.

속으로 깊디깊은 한숨을 내쉰 한결이 애써 수저를 들었다.

“이상형?”

“엉.”

한결의 수저가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반찬 위를 나돌아 다녔다. 이상형이라. 대충 말하면 그에 맞는 여자의 이름이 나오려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한결의 수저는 다시 맨둥맨둥한 테이블에 놓였다. 그가 벌컥벌컥 찬물을 마셨다.

“좀 하야면 좋겠어. 내가 하얀 편이 아니니까.”

“오. 그래?”

은한이 분주히 눈동자를 굴리며 하얀 여자친구를 찾아 갔다. 누가 있더라. 대체로 다 하얀 것 같은데.

“키도 작았으면 좋겠고. 얼굴도 작아. 눈동자는 엄청 까맣고, 웃는 게 예뻐. 코는 많이 안 높은데 끝이 동그래. 그래서 귀여워.”

“…….”

잠잠히 듣고 있던 은한의 입술이 묘하게 뒤틀렸다. 보통 이상형이 이렇게나 세세하던가. 그리고 말하는 게 꼭 바라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상상하며 말하는 것 같잖아.

한결은 은한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은한은 그걸 그저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리라, 넘겨짚었다.

살짝 상체를 숙인 한결이 속삭이듯 말했다.

“입술은 통통한 게…….”

“통통한 게?”

“씹어 먹고 싶다.”

“어……?”

은한이 툭, 쥐고 있던 숟가락을 놓쳤다. 경악에 내몰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결은 무표정하게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혼란에 물든 눈동자로 한결을 쳐다보던 은한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뭐…… 씹어 먹…… 그런 게 취향이라면 존중해 주겠지만, 제삼자로서 존중해 주는 거고, 제 친구를 소개해 줬다간 함께 경찰서로 끌려갈지도 몰랐다.

“너 변태냐? 존나 세세하고 이상해.”

넌지시, 하지만 결코 장난으로 묻지 않은 질문에 한결이 끅끅대며 웃었다.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웃음이라 은한은 남몰래 긴장했던 심장을 조금 내려놨다. 그러나 그가 웃으면서 내놓은 말은 다시 바짝 어깨를 조이게 했다.

“몰랐어? 나 변태야.”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되게 진짜 같다, 야.”

“진짠데.”

“…….”

은한이 꿈뻑 꿈뻑 눈꺼풀을 움직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다. 밥맛은 진즉에 떨어졌다. 고작 두 숟가락 남은 밥공기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연예인이면 이름을 말했을 것 같고……. 설마 야동 배우 얼굴이냐?”

그냥 농담이었다. 질 낮고 실없는 농담. 한결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곧 입술을 뗐다.

“야동 배우는 아닌데. 생각하면서 딸치는 건 맞아.”

“미친놈.”

남자들 간의 음담패설은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다. 은한은 그러한 대화 주제를 썩 즐기지 않았지만 익숙한 편이었다. 헌데 한결과 나누는 대화는 왜 이리 께름칙한지 모르겠다.

은한이 비죽, 입꼬리를 뒤틀었다. 백한결은 그렇게 아니리라 믿었는데 또라이3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은한이 복잡한 머리통을 정리해 갈 동안, 한결은 가죽 재킷을 입었다. 오전 수업시간이 딱 40분 남았다. 슬렁슬렁 올라가면 얼추 맞으리라.

금세 계산까지 완료한 그가 여즉 멍하니 있는 은한에게 물었다.

“커피 마실래? 모닝엔젤이 모닝커피 사 줄게.”

“……그래.”

흐릿한 초점으로 한결을 올려다보던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라이3으로 이름을 바꾸기엔 아직은,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았다.

* * *

기초 시각디자인 수업은 적당히 흥미롭고 적당히 지루했다. 은한은 한쪽 턱을 괸 채 딸각딸각 톱니바퀴의 선을 따고 있었다. 실기 수업은 죄다 3시간씩이다. 엉덩이가 아릿하게 배길 때쯤에야 끝난다.

수업 마치기 오 분 전인데 애석한 교수님은 아직도 열심히 강의 중이시다. 결국 세 시간 하고도 십 분이나 지나서야 교수는 포토샵을 종료했다.

이제 집에 간다. 오늘 집에 가서 맥주 마실 거야. 맥주 마시면서 게임 할 거야.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가방을 싸고 있는데, 교수가 아! 하며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모든 학생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번 주말에 코엑스에서 디자인 페어가 있어요. 관람하시고, 각자 시각디자인의 트렌드를 분석해 본 후, 리포트 5장 제출하세요.”

“아아…….”

“가서 찍은 사진과 티켓도 마지막 장에 첨부하세요. 사진과 티켓 미포함해서 5장 분량입니다. A4, 10포인트, 줄 간격은 160. 기한은 중간과제 제출일과 동일합니다.”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한은 주르륵, 의자에서 녹아내렸다. 리포트라니. 다음 주부터 지옥 같은 시험 기간 시작이란 말이다, 이 나쁜 교수야. 중간과제로 모자라 리포트라니. 은한은 울고만 싶었다.

커다란 폭탄을 던진 교수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강의실을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널따란 컴퓨터실 가득 욕설이 나돌아 다녔다.

은한은 핸드폰을 켜 당연하게 공대남 셋과 함께 있는 톡방을 눌렀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미현이 같이 가자며 말을 걸어 왔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동기들보다 공대남 셋이 편했다.

[나 과제 때문에 전시회 가야 되는데 같이 갈,]

분주히 핸드폰을 두드리던 은한의 손가락이 멈췄다. 네 명이 가면 복잡할 것 같은데. 방방 뛰는 태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흐음, 고민하던 은한이 한결의 프로필 사진을 꾹 눌렀다.

춥다. 두꺼운 거 입고 나와라. 오냐. 로 끝나 있는 카톡방을 잠시 바라보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백한결. 주말에 뭐하냐?]

그리 보내 놓곤 짐을 쌌다. 저녁 먹자는 동기들에게 내일 보자며 인사를 하고, 막 강의실을 나서니 우우웅, 답장이 왔다.

[한결: 도서관 붙박이 예정.]

은한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도서관 붙박이라. 바쁘려나. 하긴 당장 다음 주가 중간고사인데. 퀴즈 하나에도 밤새 공부하던 한결이니 당연히 바쁠 터였다. 같이 가는 건 무리인가. 은한이 복도에 멈춰서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우우웅, 핸드폰이 한 번 더 진동했다.

[한결: 왜?]

한결의 재촉 같지 않은 재촉에 고민하던 은한이 분주하게 엄지를 놀렸다.

[나 과제 때문에 주말에 전시회 가야 되는데 같이 갈래?]

별생각 않고 전송했는데, 전송하고 보니 왜 이리 이상한지. 꼭 애매하게 썸타던 여자애한테 보내는 메시지 같았다. 은한이 와다다, 조급하게 활자를 덧붙였다.

[바쁘면 안 가도 돼. 친구들이랑 가면 됨.]

보내기를 누르자마자 답이 왔다.

[한결: 가자.]

참 단조로운 두 글자다. 근데 그게 뭐라고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은한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같이 가 주면 점심은 내가 쏨. 그런 메시지 따위를 보내며.

* * *

전시회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디자인 페어라 전시회와는 거리가 멀지만, 신기하고 예쁜 게 많았다. 디자인에 문외한인 한결도 호오, 호오, 감탄사와 함께 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미묘한 동상의 포즈를 따라 하기도 하고, 예쁜 소파에 앉았다가 억 소리 나는 가격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기도 했다. 리포트에 첨부할 증명사진까지 열댓 장이나 찍고 두 사람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진한 노을이 두 사람을 반겼다. 벌써 겨울이라고 해가 짧다.

“저녁 뭐 먹을래?”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시간을 보니 저녁 시간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뺏으려 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뭘 먹고 싶다 한들 다 사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한결의 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국밥집 가서 술 한잔하자.”

“술? 너 안 바빠?”

은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내가 술 먹는 시간에 공부해 봐야 얼마나 하겠냐.”

씨익 웃은 한결이 익숙한 폼으로 은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흘끔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 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만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인데. 취할 때까지 마실 것 같진 않으니 괜찮을 듯했다.

물론 그건 은한의 착각이었다. 공대남들과 술을 마실 때 단 한 번이라도 안 취한 적이 없거늘. 바닥을 드러낸 국밥 뚝배기 옆에 빈 녹색 병이 무려 다섯 개다. 술을 적당히 먹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오른다, 싶으면 그때부터 정신 놓고 마셨다.

은한이 알콜에 절어 저릿저릿한 손을 쥐었다 폈다. 작은 손이 잼잼. 그걸 보고 있던 한결이 몰래 웃었다. 취한 은한은 백 번을 봐도 백 번 다 귀엽다. 하다못해 토를 한다 해도 귀여울 듯했다. 중증이다.

“집에 갈래?”

“아니…… 뭐 벌써 가노. 이제 열 신데.”

흐리멍덩한 동공이면서 잘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은한이 꽉 입술을 씹었다. 그저 눌린다는 느낌만 들 뿐, 이렇다 할 통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은한이 자신이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를 판단하는 방법이었다.

“방울아.”

한결의 부름에 젓가락으로 깍두기를 쿡쿡 찌르던 은한이 응, 소리로만 답했다.

“찾아봤냐?”

“뭘?”

“내 이상형.”

뜬금없는 그의 말에 은한이 하! 코웃음을 쳤다.

“야. 그거 이상형 아이잖아.”

“맞는데 이상형.”

“구라친다. 이상형 아니고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

“맞재?”

한결이 대답하지 않고 은한을 바라봤다. 묵직하게 파고드는 정적에 은한이 헤실헤실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한결의 말이라 몇 번이나 되뇌어 보고 내린 결론인데. 맞나 보다. 이게 뭐라고 괜히 뿌듯했다.

잠시 숨만 들이키던 한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아하는 사람.”

“……찍었는데 진짜네.”

“누군지는 안 궁금해?”

“궁금해하면 알려 줄라고?”

은한이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별로 궁금하지 않다. 한결 주위의 여자는 단 한 명도 알지 못한다.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그래서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 모태 솔로라 들어 봐야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게 다일 터였다.

“못 알려 줄 건 뭐야.”

됐다는 은한에도 한결은 굳이 입을 열었다. 은한이 흐응, 콧김을 뿜었다. 진한 알코올 향이 치솟았다. 가뜩이나 흔들리던 정신이 흐물흐물하게 흘러내렸다.

나른하게 턱을 괸 은한이 고개를 까닥였다. 한번 말해 봐. 들어 줄 순 있어. 그런 뜻이었다.

그에 기다란 다리를 꼬고 멀찌감치 앉아 있던 한결이 바짝 붙어 앉았다. 끼익, 의자가 바닥에 끌렸다. 확 가까워진 거리에 서로의 숨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술 냄새가 소주병 위로 질척하게 섞여 갔다.

한결이 혀를 내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은한이 살짝 말려 올라간 그의 입술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윽고 한결의 입술이 열렸다.

“너야.”

단조로운 두 음절에 은한의 동공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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