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눈을 뜬 후 가장 먼저 본 건 하얀 천장이었다.
그 옆에 연결된 수액과, 수액이 매달린 폴대.
맨날 서서 보던 걸 누워서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요컨대 여긴 병원, 그것도 내가 일하던 병원이었다.
“어?”
수액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던 간호사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간호사도 아는 얼굴이었다.
얘 우리 병동 신규 아니야?
“어?”
놀란 신규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일어나셨어요?”
“응.”
내 말에 뭐라 하기도 전에 신규가 자리를 뛰어나갔다.
환자한테 관심을 줘야지, 친구…….
하지만 그녀가 다짜고짜 뛰어나가 선임 간호사를 부른 이유가 있었다.
“유 선생님, 여기 어딘지 알겠어?”
“병원이요.”
“며칠인지는 알겠고?”
그 말에 난 빌어먹을 유네리아 붉은 구슬 이벤트 날짜를 댔다.
“1월 23일이요.”
그러자 신규와 선배 간호사 선생님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일주일 잤어, 일주일.”
“네?”
일주일??
아니, 게임에서 먹고 자고 한 것치고는 짧은 건 맞긴 한데…….
난 손발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힘이 좀 없을 뿐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주치의 선생님 콜했으니까 곧 오실 거야.”
“혹시 제 핸드폰도 같이 실려 왔나요?”
아니, 근데 날 누가 실어 온 거지?
설마 출근을 안 하니까 빡친 수선생님이 내 집까지 쫓아오셨나?
온갖 불길한 상상을 하는 사이, 신규가 내 침대 옆 서랍에서 핸드폰을 슬쩍 꺼내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핸드폰을 켜 보았지만, 전원은 나가 있었다.
신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내 자리에 휴대폰 충전기까지 연결하고 있었다.
“땡큐땡큐.”
휴대폰이 켜지는 사이, 난 두 간호사에게 물었다.
“근데 저 누가 데리고 왔어요?”
“아, 그분. 친구분이셨어요.”
친구……? 친구야 많지만 내가 연락이 안 된다고 들러 볼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신규가 말했다.
“아, 에이리라고 말하면 아실 거라고…….”
“아아.”
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신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본명은 아니신 것 같던데…….”
그그그런게 있어!
더 파고들지 마!
“알아요, 누군지 알아요.”
난 속으로 에이리 님의 닉네임이 정상적인 것에 감사했다.
만약 ‘파개한다’ 이딴 거였다고 생각해 봐!
그럼 신규한테 ‘파개한다라고 하시면 아실 겁니다.’ 하고 갔을 거라는 얘기잖아!
에이리 님 덕에 내 사회적 체면이 지켜지는 순간이었다.
―띠링!
그 사이 휴대폰 전원이 들어왔다.
크게 울린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내가 폰을 재빨리 진동모드로 바꿨다.
그리고 그건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부우웅! 우우우웅!
밀려 있던 부재중 전화와 메신저 알람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판이 따로 없구만?
렉까지 걸리는 휴대폰에서 간신히 숫자패드를 켠 난 네드 님의 휴대폰 번호를 먼저 저장했다.
[네드 님]
이름은 일단 이렇게만 해 두었다. 본명은 알지만, 이게 더 익숙하니까.
저장 후 메신저에서 친구 번호 동기화를 누르자, 새로운 친구가 떴다.
[네드 님]
그리고 사진은 웬 바닷가 사진이었다. 난 네드 님이 맞는지 그 사람을 눌러 확인해 보았다.
[친구가 저장한 이름 : 강이현]
맞네……. 난 고민하다가, 슬그머니 초콜릿톡을 보내 보았다.
[잘 나왔어요?]
보내고 나서 멈칫했다.
너무 뜬금없이 보냈나? 자기소개부터 해야 했나?
하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1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
[네, 유니 님.]
진짜 네드 님이다.
게임 친구들하고 번호 교환한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신기한 느낌이었다.
“유 선생님, 몸은 어때요?”
그때 의사들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일할 땐 서서 마주 봤던 사람들을 환자 입장이 되어 올려다보니 기분이 묘했다.
“괜찮아요. 좀 힘이 없는 정도?”
“어지럽진 않고?”
“네.”
빠르게 여러 문답이 오갔다.
이것도 원래 내가 실신 후 일어난 환자들에게 묻던 질문들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몸에 이상은 없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글쎄요, 그게.”
‘사실 게임 세상에 들어갔다 왔답니다^^!’ 하면 보나 마나 정신과를 콜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난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알겠어요. 일단 안정 취하고. 일 생각은 하지 말고 쉬어요.”
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정은 못 취하겠습니다, 선생님!
지금 내 머릿속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된 건지는 유네리아 놈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쪽에 따져볼 생각이었다.
물론, 이놈들은 고객센터 번호를 없애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전화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1:1 문의를 넣는다?
곱게 넣으면 매크로 답변만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답은 하나였다.
퇴원만 해 봐라, 깽판 놓는다!
* * *
강이현은 눈을 뜨자마자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와 아버지께는 그가 일어나자마자 연락이 갔다고 했다.
그가 업무용 휴대폰을 내려놓고 개인용 휴대폰을 집어 들 때였다.
어머니와 아버지 소식을 전했던 비서가 병실에 다시 들어왔다.
“곧 오실 겁니다.”
아버지 이야기일 것이다.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미 그가 있는 VIP 병실은 한바탕 의료진이 쓸고 지나간 후였다.
‘몸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긴 시간 잠들었다 일어나신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료진은 다행히 그렇게 말했다.
―달칵.
비서가 나가고 나서 강이현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일주일.”
일주일이라고 했던가.
유네리아 세계 안에서는 더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현실에서는 일주일이 흘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몸을 움직이기가 다소 어색했다.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잘 나왔어요?]
그때 개인 폰에 유니의 초콜릿톡이 울렸다.
그가 옅게 웃었다.
[네, 유니 님.]
바로 답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답이 느린 게 보였다.
그때였다.
“강이현.”
병실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들어왔다.
뒤에 달려 있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던 그는, 문이 닫히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된 게냐? 게임을 하다가 쓰러져?”
그리고 강이현의 예상대로 화를 냈다.
이전 같았다면 심장이 조여들 듯 불안했을 것이다.
그가 게임을 하다가 쓰러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보나 마나 수많은 뉴스가 뜨면서 화제가 될 테니까.
완벽해 보이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제 이미지에 흠집이 나는 걸, 저 이상으로 싫어하는 게 아버지였다.
하지만 강이현은 묘하게도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해야 할 머릿속은 차갑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네 이야기가 안 나오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냐?”
아버지가 말했다.
보나 마나 ‘게임 하다 실신한 재벌 3세’ 같은 뉴스를 안 뜨게 하려고 기를 쓰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강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뭐?”
그의 아버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게임 하다가 실신했다고 보도되게 내버려 두라고? 게임에 미친 것이라고 소문이 쫙 퍼질 텐데?”
“어차피 감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미 기자들도 오고 있을 것 같고요.”
아버지가 달려오신 데다 의사들도 그가 일어난 걸 알았으니, 병원 내부에 죽치고 있던 기자들도 냄새를 맡았을 것이 분명했다.
“억지로 숨기려 해 봐야 사람들은 더 궁금해할 뿐입니다.”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어차피 다른 이슈 몇 개면 묻히게 되어 있어.”
강이현은 원래 제 아버지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이전 같았으면 하늘을 거역하는 것처럼 무거운 마음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확신을 가진 단호한 눈동자로 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물론 제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예전엔 그것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따르려고 했다.
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니까. 실패할 가능성이 작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그는 조금 달랐다.
‘실패할 수도 있죠.’
……사람은, 실패할 수도 있는 거니까.
“시대가 많이 달라졌어요, 아버지.”
아버지 시대에야 몇 개의 이슈가 더 생기면 다른 이슈는 묻히고는 했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의 아버지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디 한번 해 봐라, 그런 뜻으로 하신 말일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말에 강이현은 놀랍게도 가벼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깽판 칩시다!’
유니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 떠올라서.
그녀가 말한 ‘깽판’은 아마 유네리아 사무실을 어지럽히는 화풀이였겠지만, 그는 더한 ‘깽판’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유얼머니게임즈와 관련된 콘텐츠사업 투자 건 말입니다만.”
“네 동생이 맡은 것 말이냐?”
강이현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동생은 경영 일선에 뛰어들기 전에 주변의 조언을 받으며 콘텐츠사업 투자 건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동생과 조금 더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원래 그가 손대던 건은 아니었지만, 손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유얼머니게임즈의 투자 건을 재고하는 방향으로요.”
진정한 ‘깽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