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연지곤지]
리리스가 죽으면서 버그(?)도 사라진 건지, 그녀가 깨부순 맵은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이젠 급하게 날아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엘데의 등에 타고 천천히 스칼라 호수 위를 날고 있었다.
―뀨우.
난 액세서리 크기로 작아진 비상식량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미 엘데와 비상식량과는 인사를 끝낸 채였다.
두 용 다 우리가 나가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길게 슬퍼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뀨우우……!
결국 비상식량은 길게 울부짖었다.
용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었다. 비상식량은 슬퍼하고 있었다.
“나 안 죽어.”
내 말에 비상식량이 날개를 늘어뜨렸다.
―뀨웅…….
“…….”
난 새삼 비상식량을 돌아보았다.
안 죽는 거야 맞지만, 그래도 PC 버전에서 비상식량을 만나는 건 지금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일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인 소통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걸 알기에 비상식량이 슬퍼하는 것일 터다.
난 비상식량을 번쩍 들어 끌어안아 주었다.
―끔뻑끔뻑.
내 반응이 예상외였는지 울던 것도 그치고 비상식량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앞으론 잘 대해 줄게. 전엔…… 전엔 네가 미워서 그랬던 게 아니고, 음, 많은 오해가 있었어.”
네가 단순한 AI인 줄 알았거든……이라는 말을 풀어서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둥기둥기 안아 주기만 했다.
―뀨!
내 말에 그제야 비상식량이 좀 표정을 회복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라면 상상도 못했을 모습이었다.
[‘퀘스트 : 칼리스 호수 위’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아예 퀘스트 지역이 따로 나뉘어 있었는지, 알림창이 뜨는 게 보였다.
이제 여기서 다섯 개의 크리스탈을 박살 내기만 하면 정말 끝이다.
난 새삼 아이템창을 켜며 생각했다.
바깥 상황은 어떨까?
여기서 수십 일은 보낸 것 같은데 설마 수십 일 동안 기절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직업이 직업이라 사람이 수십 일 동안 아무것도 섭취하지 못하고, 케어받지도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진짜 방구석에 쓰러져 있을까?
수십 일을 그랬으면 난 이미 저세상에 있어야 하는데?
알고 보니 여기가 사후세계?
게임에 삶을 갈아 넣으면 올 수 있는 게이머생의 끝?
……그딴 거면 네드 님이 같이 있을 리 없지.
사망했으면 의식도 없을 테니 이곳에서 멀쩡하게 움직일 순 없을 것 같고…….
복잡한 마음과 긴장감이 함께 들었다.
무엇보다…… K-직장인에게 가장 두려운 건 상사의 연락이었다.
‘유 선생님?’
내가 인수인계 시간 5분 전에 도착하지 않으면 날카롭게 쳐다보던 수간호사 선생님.
분명 아침번일 때 출근은 6시 30분까지였지만 수간호사 선생님의 눈초리를 받지 않으려면 6시 20분까진 출근해야 했다.
그런데 무려 수십 일을 결근하면?
오…….
수간호사 선생님은 둘째치고 내 일은 설마 다른 선생님들이 나눠 하고 계신 거?
아아아니겠지?
난 끔찍한 상상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만일 내가 병동에 출근하는데 다른 간호사가 수십 일 동안 연락이 안 돼서 대신 일해야 한다면…….
……연락되는 순간 그 X끼를 죽여버리고 말 텐데.
내 얼굴이 새파래졌다.
[야 동기 중에 아직 임상에 있는 거 너밖에 없는데]
[유은채 몇 년 차지?]
[쟤도 튈 때 됐지 ㅋㅋ]
그렇게 말하던 대학 동기들도 드디어 네가 병동에서 튀었냐며 왁자지껄하게 떠들 게 분명했다.
……내가 현실에서 무사하다면 말이다.
“후우.”
난 인벤토리에서 다섯 개의 크리스탈이 든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네드 님도 복잡한 표정으로 크리스탈을 보고 있었다.
이분도 회사원이라고 했으니까 보나 마나…… 오…….
이쪽이나 저쪽이나 심상치 않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부디 바깥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길 바랄 뿐이었다.
“부수면 엔딩 크레딧 뜰 거고, 그럼 진짜 나가는 거예요.”
내가 입을 열었다.
퀘스트 내용은 세계가 재편되고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지만, 중요한 건 ‘로그아웃됩니다.’라는 문장이었다.
우리가 드디어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긴장한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서 만나요. 번호 잘 들고 있죠?”
내가 인벤토리를 가리켰다.
네드 님이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갑니다! 내가 크리스탈을 박살 내려던 때였다.
―탁.
네드 님이 내 손을 잡았다.
“?”
돌아보니 네드 님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유니 님.”
할 말이 있으신 듯했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네드 님이 조금 머뭇거렸다.
선선한 바람이 우리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온갖 고난을 함께한 네드 님의 얼굴이 보였다.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졌어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가 새삼 그의 고백을 떠올릴 때였다.
“긴 여행이었습니다.”
네드 님이 입을 열었다.
“생에 다시없을 여행이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여행은 제게 선물이었습니다. 유니 님만 주실 수 있는, 선물이요.”
그렇게 말하는 네드 님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떨 만큼 긴장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이러니까 기묘했다.
“감사했습니다.”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난 그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신 안 볼 것처럼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그러자 네드 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 순간이 다시 오진 않으니까요.”
아무래도 나가서 못 볼까 봐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었다.
“꼭, 나가서 뵈어요.”
네드 님이 말했다. 난 그 말에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약속이니까. 그가 내게…… 그 사이에 무슨 말을 했든.
근데 네드 님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제가 누구라도, 어떤 모습이라도, 한 번만큼은 만나 준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네드 님이 거듭 말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네드 님은 현실의 자신을 내가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늘,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저렇게 주저했으니까.
실제로도 능력 있는 사람일 것 같은데, 왜 그럴까.
“좋아요.”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전 같았으면 공대 뛸 거니까 당연히 만나죠! 했을 텐데, 그의 고백을 들은 후로는 그의 마음이 다가오는 듯해 가볍게 답할 수가 없었다.
네드 님은 정말 긴장하고 있었으므로.
“그럼 갈게요.”
난 크리스탈을 쥐면서 말했다.
“……예.”
네드 님이 손을 뻗어 나와 함께 크리스탈 주머니를 잡았다.
그리고.
―파삭!
크리스탈을 부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이며 영상이 떴다.
* * *
리리스가 죽는 것부터 영상이 시작되었다.
「안 돼―!」
저딴 대사를 할 틈도 없이 버그로 죽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연출은 그랬다.
그러자 대륙을 뒤덮던 혹한은 멈추었고,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먼 북쪽, 얼음의 왕좌도 무너져내렸다.
그러면서 그 지하에 감추어져 있던 커다란 마법진 역시 붕괴되어 버렸다.
저게 아마 리리스가 말했던 마계와 연결되는 어쩌고였던 듯했다.
그 후 화면이 어두워지는 사이, 기후가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을 대륙 사람들이 누비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밝아졌을 때.
뜬금없이 웬 주름진 손이 책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자막이 떴다.
[옛날에…….]
할아버지와 모여 있는 손자 여럿인 듯했다.
어디서 본 듯한 할아버진데?
난 뒤늦게 그의 눈매를 보다가 알아챘다.
음유시인이잖아!
[위대한 용사가 있었단다. 그 이름은.]
아무래도 주점에서는 은퇴(?)한 게 분명한 음유시인이 말을 이었다.
내 닉네임 나오겠지, 뭐.
연출 뻔하죠?
[[email protected]]
……방심했다.
아무리 캐릭터 정보가 꼬였기로서니 메일주소로 박제하는 게 어디 있어!
야!
[그래서 지금의 대륙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 북쪽의 폐허는 그때의 흔적이란다.]
내가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아련한 자막은 계속 이어졌다.
[무서워요!]
아이의 말에 음유시인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세상이 또 무서워지면 다시 용사님이 나타날 테니까.]
그러면서 음유시인의 시선이 화면을 지켜보고 있는 내 쪽을 향했다.
……접지 말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기분 탓이냐?
아무튼 아련하게 책을 밀어 놓은 음유시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열린 창밖으로 밤낮이 수도 없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책의 위치는 조금씩 바뀌기도 했고, 누군가의 손에 펼쳐졌다가 덮이기도 했다.
책은 그렇게 서서히 낡아 갔고, 그렇게 검붉은색의 표지가 떨어져 나갈 무렵.
빠르게 시간이 흐르던 것이 멈추었다.
―탁.
그리고 그 앞에 새로운 원고지 무더기가 놓였다.
제목 자리는 비어 있었다.
[UNERIA]
[CREDIT]
그 위로 천천히 데스노트……가 아니라 엔딩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X같은 게임이 클리어됐다는 뜻이었다.
[Director Lee yongjin]
좋아, 디렉터는 용진이 놈인 거 알고 있었고.
난 눈에 불을 켜고 디렉터 다음으로 잡아야 할 놈을 찾아냈다.
이렇게 간절하게 엔딩크레딧을 본 적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리고 난 이내 찾던 걸 찾아냈다.
[Scenario Writer]
그래, 이 시나리오 쓴 놈이 누구냐! 실존은 하는 거냐!
[Yourmoneygames Scenario team]
?
이름은 안 나오고 유얼머니게임즈 시나리오팀? 아주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저 팀이 실존하는 걸까요? 가상의 팀은 아닐까요?
혼란만 준 데스노트가 끝나고, 화면이 아련하게 흐려졌다.
그러면서 원고지 옆에 놓여 있던 펜을 누군가가 들었다.
그와 동시에 끝난 줄 알았던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다.
[Special Thanks]
여러 단체와 이름이 떴다. 그리고 그 끝에 올라오는 단어.
[……and,]
처음엔 감동이었지만 지금은 오글거리는 이 연출은……!
엔딩 크레딧이 끝난 부분에 딱 걸쳐 펜이 움직였다.
and…… YOU, 내지는 닉네임이 쓰이는 아련한 연출이겠지 뭐.
예상대로 종이 위에 이름이 쓰였다.
근데.
[[email protected]]
이름도 YOU도 아니네?
이 X끼들이 막판까지 진짜!
그렇게 몸이 둥실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