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12)
  • <102화>

    급히 나타난 리리스의 꼬라지는 어딘가 수상했다.

    일단 기본적인 모델링은 되어 있었지만, 그 위에 입혀져야 할 최종보스다운 화려한 이펙트나 복장이 갖춰지다 말았던 것이다.

    난 저게 무슨 현상인지 안다.

    우리집 인터넷이 구려서 알게 된 거지만 아무튼 안다.

    저 커다란 픽셀, 흐려진 효과는……!

    아직 로딩 덜 된 거다!

    설마 모델링되다가(?) 급히 나온 거니? 이거 실시간 개발이니?

    무슨 드라마 실시간 마감도 아니고 게임 시나리오를 실시간으로 개발해?

    “이 벽을 어떻게……!”

    내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리리스는 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뭐 이런 무식한 놈들이 다 있어?”

    저기, 다 들리거든? 그 대사도 개발팀이 넣었냐?

    내가 얼굴을 구기든 말든 리리스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우리 둘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아무리 봐도 리리스가 등장하면서 떠야 했던 것 같은 영상이 재생되었다.

    * * *

    ―쩌저적!

    대륙이 얼어붙고 있었다.

    얼음의 왕좌가 있는 북쪽 끝부터, 이미 군도를 넘어 대륙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 얼어붙기 시작했다.

    급격한 한랭기후가 대륙을 뒤덮으면서 대륙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빠르게 화면이 대륙을 훑고 지나와 리리스의 모습을 비추었다.

    하지만 CG처리가 덜 됐는지, 분명 얼어붙어 있어야 할 리리스의 뒤쪽 산은 푸릇푸릇한 녹색이었다.

    야…… 저건 제대로 처리했어야지…….

    * * *

    그렇게 영상이 꺼지자마자 리리스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너희들이 올 줄이야.”

    우리가 올 줄 몰랐을 리가?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얼마 전에 우리 영상 보면서 빡쳐하지 않았어?

    내가 네드 님을 흘끗 보니 네드 님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끝까지 방해하려 하는군…….”

    화난 것치고는 어쩐지 느릿느릿하게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는 리리스의 손끝 모델링이 서서히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거슬리는 인간들 같으니.”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쳐드는 리리스 위로 이름이 떠올랐다.

    [보스 ‘차원연결자(가제) 리리스’]

    네크로맨서 아니었어? 100세 시대라더니 두 번째 직업을 가진 거야? 벌써?

    그건 그렇다 치고 저 가제는 뭐냐?

    난 무심코 이름 밑의 설명을 클릭했다가 유저가 봐서는 안 될 어두운 유네리아의 뒷면을 보고 말았다.

    [이래도검수안하나보자팀장새X]

    “?”

    같은 파티라 내 시스템창이 흐릿하게 보였는지, 네드 님의 눈썹도 치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역시 망겜은 하나만 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게 몬스터 설명으로 나온 걸 보면 정말 팀장 놈이 검수를 안 했나 본데?

    니네 진짜 쪽대본으로 시나리오 쓰는 거지?

    아무리 봐도 시나리오 라이터가 없는 것 같았다.

    “너희만 없었어도…… 없었어도!”

    그 사이 리리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아니 마족들이 건너와서 이곳을 지배하고……!”

    그러면서 하나도 안 궁금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녀가 말하는 사이 그녀의 모델링이 실시간으로 로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없던 창도 잡혀 있었다.

    “흐음.”

    난 그 꼴을 보다가 팔짱을 끼었다.

    자고로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 미디어를 통틀어 불문율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누구든 간에 설명충이 설명하고 있으면 가만히 있어 주는 것.

    다른 하나는 변신할 땐 안 때리고 기다려 주는 것이다.

    그건 나쁜 놈이고 착한 놈이고 왠지 모르게 지키는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상도덕 없이 사람 게임에 밀어 넣어 놓고 나몰라라 하는 유네리아에서 그딴 불문율을 지켜 줄 필요가 있을까요?

    계산을 3초 만에 끝낸 내가 인벤토리에서 토르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일단 마비 먹이고 보자!

    ―파지지직!

    “이놈이!”

    그러자 놀랍게도 리리스의 모델링 로딩이 멈추었다.

    니가 모델링 가져오는 거야?

    어이없는 상황에 당황하기도 전에, 허접한 모습의 리리스가 손을 휘둘렀다.

    [리리스가 ‘lilith_attack.une’를 가합니다!]

    성의없는 작명과는 달리 박혀 오는 데미지는 살벌했다.

    [-1,002,814]

    크리도 안 떴는데 100만 박히는 게 어디 있어!

    [네드가 ‘힐링’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네드 님이 힐 해 주는 사이 난 리리스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로딩과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신통한 몬스터였지만 어쨌든 리리스가 최종보스는 최종보스인 모양이었다.

    ―쿠콰콰쾅!

    그녀가 손을 휘두른 곳으로 둥근 에너지탄 같은 게 쏘아져 나갔다.

    연하늘색인 걸 보니 하늘 속성 공격인 것 같았는데, 손짓 한 번에 100만이었으니 저기엔 스쳐도 사망일 터였다.

    게다가.

    ―콰직!

    난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리리스가 날린 하늘 속성의 에너지탄이 터진 허공이었다.

    거긴 거울 깨지듯 맵이 깨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타고 있는 엘데의 날개 끝이 그곳에 우연히 스친 순간.

    [WARNING! INACCESSIBLE]

    [inaccessible.une가 를 가합니다.]

    뭘 가하는지 이제 이름도 안 써 있었다.

    중요한 건 엘데의 HP가 순식간에 새까매졌다는 점이었다.

    [네드 미니가 ‘힐링’ 효과를 부여합니다.]

    놀란 네드 미니가 힐링하지 않았다면 엘데는 그대로 추락했을 것이다.

    ―세상의 균열이군.

    그때 엘데가 말했다.

    “세상의 균열?”

    그냥 오류나 버그 아니고?

    엘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막을 수 있는 마법은 없다. 무조건 피해야 해.

    엘데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컨대 버그 만드는 버그 덩어리라는 거네?

    ―콰직! 콰지직!

    “꺄하하하!”

    그사이 높은 소리로 웃은 리리스가 사방팔방으로 에너지탄을 날려 댔다.

    그때마다 허공이 부서지면서 심상찮은 소리를 냈다.

    “네드 님! 이거 스치면 사망이래요!”

    네드 님도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리리스에게서 거리를 떨어뜨렸다.

    최종보스가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게임 외적인 이유로(?) 어려울 줄은 몰랐지!

    우린 뜻밖의 고전을 시작했다.

    * * *

    [네드의 ‘견고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네드 미니의 ‘견고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네드 님과 네드 미니의 견고한 보호막이 연달아 터졌다.

    [네드가 ‘충격 극대화(Lv.4)’를 사용합니다!]

    [네드가 ‘시야 혼란(Lv.2)’을 사용합니다!]

    ……

    그와 동시에 네드 님의 디버프가 리리스의 머리 위에 박혀 들어갔다.

    ―디리링!

    하지만 그건 몇 초 있지 않아 리리스의 손짓에 흩어져 버렸다.

    처음엔 리리스가 손짓할 때마다 리리스 머리 위에서 웬 하얀 가루가 쏟아지길래 밀가루는 왜 뿌리나 했는데, 저 성의 없는 이펙트는 무려 디버프 전체 무력화 스킬이었다.

    요컨대 디버프가 풀리는 3초 이내에 유효타를 먹여야 한다는 건데.

    [네드 ‘전기+바람 속성 중첩’ 100%]

    ―쿠콰콰쾅!

    버프로 휘감긴 네드 님의 마법 창이 리리스의 얼굴에 그대로 갖다 박혔다.

    네드 님이 그걸 해냅니다!

    유네리아에 3초 내로 딜을 욱여넣어야 하는 기믹이야 많았지만,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이라도 쉽게 타이밍을 잡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걸 해냅니다! 역시 될성부른 뉴비야!

    [―□!]

    심지어 오류뎀이 터졌다.

    디버프와 버프가 제대로 조화롭게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리리스 99%]

    리리스의 HP는 1%밖에 달지 않았다.

    아니, 오류뎀인데 1%밖에 안 단다고?

    이놈들 그냥 깨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거 아니야?

    “하하하하! 간지럽구나!”

    오류뎀을 간지럽게 만들어 놓은 걸 보면, 그냥 여기서 뒈지라고 유네리아 개발진이 고사를 지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들의 꿈을 이뤄 줄 생각은 없었으므로, 나와 네드 님은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리리스 ‘lilith_chargeattack.une’ 66%]

    그 사이 리리스가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버그가 걸려서 스킬 이름 대신 날것(?)이 보이는 바람에 좋은 점이 있었다.

    저놈이 기를 모아서 힐을 하려는지 공격을 하려는지 그대로 보인다는 점이다.

    나와 네드 님이 용 위로 동시에 몸을 낮추었다.

    ―쌔애액!

    엘데와 비상식량이 그와 동시에 하늘을 빠르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리리스가 기를 모아서 무슨 공격을 날릴지 몰라도, 쉽게 적중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휘오오오오!

    하지만 최종보스는 최종보스라는 걸까.

    바람 장벽이 생기면서 이동 범위가 제한되었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튼 엘데의 날개 끝이 리리스의 볼을 스친 순간이었다.

    [lilith_chargeattack_target에게 조준되었습니다!]

    이름 때문에 조준되었다고 안 알려줘도 알 것 같아!

    그와 동시에 엘데의 날개가 머물렀던 곳이 새빨간 조준경 이펙트로 빛났다.

    물론 엘데는 그곳을 이미 지난 터라, 우리에게 타격은 없었다.

    그런데.

    ―쿠콰콰쾅!

    차지어택답게 엄청난 굉음을 낸 리리스의 공격은 뜻밖의 효과를 냈다.

    [리리스 94%]

    “?”

    지 공격에 지가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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