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연지곤지]
여러 번 말했지만 유네리아는 패치할 때마다 버그가 판치는 게임이었다.
한 번 대규모 업데이트를 한다 하면 여지없이 4대 점검을 꺼내며 유저들을 빡치게 만드는 게임.
덕분에 게임에 익숙한 유저들은 업데이트를 하는 날엔 애초부터 접속도 안 했다.
어차피 점검 때문에 뭐 제대로 할 수도 없을 텐데 뭐 하러 해?
물론 나나 상위권 랭커들은 어떻게든 컨텐츠를 초기에 즐겨 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라, 오히려 임시점검이 뜨기 전에 신규 컨텐츠에 헤딩을 해댔다.
[이번 보스 하향당하기 전에 잡는다ㅋㅋㅋㅋㅋㅋ]
[진정한 조르아는 하향전도 하향후도 아니고 ‘패치직후’ 였다]
특히 저번 팀장부터 메인 퀘스트 난이도는 물론 신규 던전 난이도까지, 제대로 조절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권장레벨 200 신규던전 근황.jpg]
저런 제목과 함께 400레벨대 고스펙 유저가 죽어 있는 스크린샷이 심심찮게 유네리아 게시판을 달구곤 했던 것이다.
요컨대 처음 나오는 던전은 난이도 조절도 제대로 안 된 데다가…….
[제목 : 이번 던전 쉽게 깨는 법.jpg
글쓴이 : 날먹인생
내용 : 우리가 보물상자 못먹게 하려고 보스가 막는 내용임
따라서 보스를 무시하고 보물상자를 먹으면 쉽게 클리어할 수 있다
(보스가 살아있는 채 클리어한 스크린샷.jpg)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자
1. 던전 벽에 부비적거린다
2. 스크린샷 위치에서 부비적거리다보면 맵을 뚫을 수 있다
3. 뚫은 맵에서 보스의 눈을 피해서 잘 상자 맵까지 간다
4. 상자 맵 바로 옆에서 맵에 끼었을 때 쓰는 ‘비상탈출’ 기능을 사용한다
5. 꿀꺽 ㅅㄱ]
……이따위 공략이 판을 치곤 했으니.
분명 이번 리리스 보스전에도 버그가 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깨는 방법?
그런 걸 생각해 봐야 멍청한 짓이다.
이놈들은 난이도 조절이란 걸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에 마지막 보스를 사람이 깰 수 있는 난이도로 설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음의 왕좌 맵만 봐도 답 나오잖아?
누가 봐도 하늘 속성 리리스한테 데미지 보너스 받으라고 맵 잘 닦아놨잖아?
그런데 미쳤다고 북상해서 리리스를 막는단 말인가?
집 가까우면 보나 마나 리리스는 집으로 쏙 숨어서 맵 보너스 받으면서 우릴 뚜까 패려고 들 텐데?
그럼 답은 하나뿐이었다.
시스템적인 약점을 파고드는 것.
“어쨌든 우리는 크리스탈만 박살 내면 되거든요?”
모로 가도 호수 위에서 크리스탈만 박살 내면 된다.
그럼 대륙의 멸망은 막을 수 있다.
[대륙을 구하는 자
- 다섯 속성 크리스탈을 ‘스칼라 호수 위’에서 파괴(NEW!)
* 퀘스트 ‘대륙을 구하는 자’를 클리어할 시, 대륙 전체의 질서가 재편되며 잠시 게임에서 로그아웃됩니다.]
아까 떴던 퀘스트에서 내가 주목한 건 이 부분이었다.
[*퀘스트 ‘대륙을 구하는 자’를 클리어할 시, 대륙 전체의 질서가 재편되며 잠시 게임에서 로그아웃됩니다.]
로그아웃! 우리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퀘스트의 조건에는 ‘리리스 처치’ 따위의 조건은 없었다.
그냥 호수 위에서 크리스탈만 박살 내면 된다는 뜻이었다.
로그아웃만 할 수 있다면 대륙이 망하든 말든 알 게 뭐란 말인가?
난이도 조절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마지막 보스를 잡으면서 유네리아에 영영 묻힐 위기에 처하는 것보단 이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전에 보셨다시피 얼음의 왕좌 맵은 리리스를 위한 맵이거든요?”
난 지도를 펴 보이며 설명했다.
지도는 보란 듯이 윗부분부터 새하얗게 얼어붙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가면 리리스는 얼음의 왕좌로 돌아가면 그만이에요. 그럼 우린 거기서 리리스를 상대해야 하고요.”
내 말에 네드 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냥 퀘스트를 무시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거죠!”
유네리아 유저들은 늘 방법을 찾는다니까?
망겜 좀 오래 하다 보면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초연해지기 마련이다.
보통 다른 게임의 유저들이 ‘어 이게 왜 안 되지?’ 하며 당황할 때!
숙련된 유네리아의 유저라면?
[야 이번패치 버그발견함.jpg]
유네리아 게시판에 버그를 공유해서 다 같이 버그 축제를 즐기는 것이 국룰 아니겠는가?
버그가 없을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게 바로 진정한 유네리아 모험가의 자세다!
“확실히…… 그렇군요.”
네드 님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리스는 분명히 저희를 적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탈을 저희가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호수에서 부수려고 한다면 호수로 막으러 올지도 모릅니다.”
그럼 다시 싸워야 할 걸 걱정하시는 듯했다.
“그럼 그거대로 이득이죠.”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얼음의 왕좌 보너스를 못 받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득이거든요.”
“그렇군요. 과연…….”
네드 님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러더니 옅게 웃었다.
“역시 유니 님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를 보는데 왜 엉뚱한 게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던 밤하늘 아래에서의 네드 님의 표정도 지금과 같았다.
“…….”
으아아악! 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돌발 레이드가 나올지도 모르는 이 급박한 상황에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람!
난 얼굴로 피가 몰리는 걸 숨기려 애써 고개를 돌렸다.
집중! 집중!
고백이고 꽃밭이고 밤하늘이고 간에 여기서 죽으면 아무 소용 없다!
“이, 일단 가죠.”
재차 긴장한 난 엘데를 재촉했다.
“이대로 호수 위로 날아가 줘.”
엘데는 내 말에 말없이 다시 날갯짓하며 호수 상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호수 위를 막고 있는 방어막 같은 게 보이는데.
엘데의 말대로였다. 호수 위를 감싼 거대한 반투명한 붉은 빛의 막이 보였다.
[MAINPROTECT_600.une]
그리고 그 방어막의 이름은 걸작이었다.
누가 봐도 이름 안 지어 놔서 이상하게 노출되는 것 같지 않냐?
“이름이 이상하군요.”
네드 님도 느낀 듯했다. 난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이 방어막을 깰 거라곤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럼 그렇지, 망겜.
하지만 오늘만큼은 망겜이 고마웠다.
정공법으로 목숨 걸고 클리어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 / Lv.600]
심지어 가까이 다가가자 방어막은 몬스터로 타겟팅되었지만, 이름이 아예 뜨질 않았다.
레벨이 600이라고만 설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긴, 신경 안 쓸 법도 했다. 600레벨대 방어막을 누가 깰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내 스펙과 네드 님의 장비가 합쳐지면?
못 부술 것도 없었다.
“저번에 바람 장벽 깠을 때 조합으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네드 님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스킬 준비 중이었다.
[5속성 스킬 조합 11%]
나도 하는 데 이십 초는 걸렸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무슨 기계처럼 뚝딱 만드네.
감탄하는 사이 네드 님의 머리 위로 빠르게 스킬 조합 게이지가 차올랐다.
―우우웅!
그리고 살벌한 비주얼의 마법 창이 다섯 개 네드 님의 옆으로 떠올랐다.
“발사할까요?”
네드 님이 확인차 물었다.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쏘~세요~!
―쓩!
네드 님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창을 힘차게 집어던졌다.
힘 조절(?)이 필요했던 바람 장벽 때와는 달리, 600레벨의 장벽에는 디버프까지 걸렸다.
그리고 그 위로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네드 님의 마법 창이 내리꽂혔다.
[-□!]
오류뎀이 떴지만 방어막은 굳건했다.
[73%]
이름은 안 떠도 잔여 HP는 뜨는군.
네드 님도 같은 걸 확인했는지 창을 재차 집어던졌다.
―쿠콰콰쾅!
[49%]
[30%]
[12%]
창 하나를 던질 때마다 HP가 훅훅 깎였다. 보는 사람이 시원할 정도로 팍팍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네드 님이 마지막 창을 집어던지자.
―와장창!
무슨 유리 깨지는 효과음과 함께 600레벨의 배리어가 박살 나 버렸다.
[‘스칼라 호수’가 개방되었습니다.]
원래 개방 안 되는 곳이었나 보다. 하늘로 날아와서 몰랐네.
“나이스!”
네드 님과 내 손이 하이파이브하며 경쾌한 짝 소리를 냈다.
“엘데, 안으로!”
리리스는 기어 오라고 해!
우리는 저 안에서 크리스탈 박살 내고 나갈게!
―쓔웅!
엘데는 내 말에 따라 스칼라 호수 안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인벤토리에서 다섯 크리스탈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스칼라 호수가 ‘lilith_defence.une’의 영향을 받습니다.]
제대로 된 스킬 이름이 아닌 걸 보니 또 돌발상황임이 분명했다.
근데 이름이 뭐요?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 리리스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항아리 됐던 날처럼 당황하는 목소리였다.
음, 역시 쪽대본 게임다워!
난 나타난 리리스의 꼴을 보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