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연지곤지]
그 기묘한 분위기가 깨진 건 우리가 있던 위치로 용 한 마리가 올라온 뒤였다.
―두 분을 모셔 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원래 용이 인간을 이렇게 존중하는 종족이었던가?
용도 떨떠름한 표정인 걸 보니 엘데가 특별히 명령이라도 내린 모양이었다.
“……일단 갈까요?”
내가 슬쩍 손짓하자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가 구름문 1층으로 내려갔을 땐 관은 어디론가 치워지고 없었다.
용들의 방식으로 잘 보내준 모양이었다.
―너희 덕분에 외롭지 않게 갔을 거다.
엘데는 우리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펄럭! 날개를 활짝 폈다가 접은 그가 고갯짓했다.
―이제 너희가 가야 할 곳으로 데려다주지. 호수라고 했던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륙 한가운데의 그 호수 위에서 다섯 개의 크리스탈만 박살 내면 끝이 난다.
물론 누군가 틀림없이 우리를 방해하러 오겠지만.
“응. 거기로 가자.”
답하는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좋아해요.’
다시 그 묘한 고백이 생각나서, 난 순간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고백.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오래전부터 닿아 왔던 감정이었다. 내가 이 사람과 어색해질까 두려워 애써 외면했던 감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더 묘했다.
정말 괜찮을까?
내가 아무 답도 안 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그는 잊으라고 말했지만, 자꾸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펄럭!
난 구름 맵이 뚫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니, 물론 구름이 딱딱한 건 아니니까 통과하려면 통과할 수는 있겠지만…….
PC 버전 유네리아에서는 해 본 적 없는 짓이었다.
맵 구석에 열심히 부비적거려서 정상적인 방법으론 못 들어가는 여러 지역에 가 봤지만, 구름문만은 시도해 보지 않았다.
잘못했다가 오류존에서 낙사라도 하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이게 되네.”
하지만 오류존이고 뭐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엘데는, 우리를 태우고……
―꽉 잡아라.
그렇게 쿨하게 한마디 하더니 그대로 구름 맵을 뚫고 지상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 후로는 호수로 직진이었다.
대륙 중앙의 호수 스칼라.
저기서 다섯 개의 크리스탈을 박살 냈던 건 벌써 몇 년 전이었다.
그 뒤로 뉴비들이 크리스탈 박살 내는 걸 도와준 적이야 많지만 내가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박살 내러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스칼라 호수’ 지역에 진입합니다.]
알림창이 떴다.
그리고 그때까지 방해꾼은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 외로 반응이 없군요.”
네드 님도 그게 의아한 듯했다.
이 사람은 제가 했던 말 그대로, 그 밤하늘 아래에서의 일이 꿈이었다는 것처럼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었다.
‘유니 님께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싶어서요…… 늦었겠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으면 내가 고백받은 게 착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게요.”
내가 멍하니 답했을 때였다.
우리의 발아래로 거대한 호수의 물이 펼쳐지는 순간.
―팟!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면서 영상이 떴다.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을 줄 알았다니까?
* * *
―또각, 또각.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얼음의 왕좌 맵의 전경이었다.
그 넓은 맵 한가운데에는 인간 한 명만이 서 있었다.
그건 영상이라 그런지 다행히 항아리로 처리되지 않은 리리스였다.
[리리스]
네크로맨서라는 이름은 사라진 채 리리스라고만 뜨는 게 보였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리리스가 왕좌 한가운데에서 손을 펼쳤다.
「이제 대륙의 버러지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의 존재들이 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식상한 대사를 해대기 시작했다.
―파앗!
하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흩어지는 연하늘빛의 빛무리 CG는 나름 신경 쓴 티가 났다.
역시 마지막 보스몹이란 말인가?
그녀의 손끝이 만들어낸 연하늘빛 빛무리는 곧 다섯 개의 거울로 변했다.
일단 네 개의 거울에는 각각 초보마을과 남쪽 엘프들의 숲, 북해의 섬, 시어드 성이 비춰졌다.
모두 크리스탈이 있었던 곳이었다.
마지막 한 개의 거울은 리리스 자신의 모습을 비추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에 들린 물속성 크리스탈을.
……저 가짜 크리스탈 아직도 들고 있었어?
「자아, 대륙이여! 새로운 힘을 받아들일 시간이다!」
리리스가 펼쳤던 손을 꽉 쥐는 순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리리스가 멈칫했다.
「뭐지?」
거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어야 하는 모양인데, 거울 안의 공간들은 잠잠하기만 했다.
게다가.
―파삭!
켄이 막판에 꿀꺽하는 바람에 물속성 크리스탈이 우리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리리스는 아직도 몰랐던 듯했다.
덕분에 그녀가 들고 있던 가짜 물속성 크리스탈이 깨지면서, 그녀의 주변을 감싼 마법진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리리스는 제 손안에서 바스러진 가짜 물 속성 크리스탈의 잔해를 내던지며 분노했다.
「다른 크리스탈도 제 위치에 없잖아!」
그녀가 깨진 거울 속의 평온한 모습들을 보면서 버럭 소리 질렀다.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이!」
그녀의 회상인 듯, 회색 화면에 빠르게 우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쌔볐습니다!
「시간이 없는데……!」
리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뭔 시간?
여기서부터는 내 메인 퀘스트를 깨고도 뉴비들의 퀘스트를 수도 없이 깨준 나조차도 모르는 스토리였다.
원래 대륙 가라앉히려는 흑막이 누군지도 나오지 않았던 게임인데, 흑막이 심지어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떡밥까지 던지고 있으니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가.
내가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는 사이 리리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할 수 없지. 직접 움직여야겠군.」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었던 척하는 게 가관이었다.
리리스가 물속성 크리스탈을 직접 우리에게서 회수해 가려고 했다는 사실을 까먹은 게 리리스 본인인지, 시나리오 라이터인지 슬슬 헷갈리려고 했다.
「제물이 부족해질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그런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는 사이, 리리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직접 대륙을 파괴하고, 게이트를 열어 마족을 소환하겠다!」
예? 뭔 족이요?
유니의 얼탱이가 탈출했습니다!
아니, 이 세계관에 마족도 있었어?
그 전에 게이트 너머에 다른 종족이 산다는 그런 넓은 세계관이었어?
10년 동안 유네리아를 했지만 난생처음 듣는―
[이세계의 존재를 맞이하라!]
잠깐, 아니지.
몇 년 전에 했던 망한 이벤트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어떤 애니메이션과 콜라보 이벤트를 한다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때렸던 이벤트였다.
문제는 콜라보 이벤트를 사전예약까지 받으면서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그 애니메이션에 문제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만화 ‘M’ 작가, 우익 논란]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인 ‘M’ 만화의 작가가 SNS에서 논란이 될 발언을 해 불매 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M’의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판매하는 모 기업은 티셔츠를 인터넷몰 메인페이지에서 내리는 등 관련 여파가 이어질 전망이다.
특히 최근 ‘M’과 콜라보레이션 이벤트를 할 것이라고 예상되던 ‘유얼머니게임즈’의 ‘유네리아’ 역시 논란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맞아, 그랬다!
콜라보하려던 만화가 갑자기 논란이 터지는 바람에 이벤트가 얼렁뚱땅 넘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분명 ‘M’의 세계관에 따라 마족이 나온다며 틀어막으라고 난리였던 게이트에서 마족이 나오기는 했다.
콜라보 이벤트가 취소되면서 유네리아 팀에서 급조한 허접한 마족들이었지만.
[이거 알라반 왕성 병사들 색깔놀이 한 거 아니냐]
[메디카 기사도 있음 ㅋㅋ]
[아ㅋㅋ 외계 앞에서 대륙 대통합하는중이라고]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허접했던 이벤트는 그렇게 묻혔다.
몇 번의 이벤트에 걸쳐 대대적으로 콜라보 이벤트를 할 거라고 광고를 했던 유네리아는, 그 망한 이벤트를 한 번에 쫑내 버렸다.
그래서 아직도 마족이 게이트 너머에서 넘어온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설마 그게 떡밥이었다고 말할 셈은 아니지? 응?
「직접 처단해 주지!」
내가 황당해하는 사이 극대노한 게 분명한 리리스가 얼음의 왕좌에서 휙 돌아섰다.
―쩌저저적!
그러자 그녀의 걸음이 닿은 곳을 근처로 한기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한랭(寒冷)의 마족들이여, 이곳으로 오라!」
쩌저적!
얼음의 왕좌를 벗어난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대륙 구석부터 한기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난 그 꼴을 보면서 확신했다.
음, 역시 이 게임엔 시나리오 라이터가 없을 것이다!
딱 봐도 유네리아는 서비스 종료를 하지 않는데, 게임 시나리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영화 2부 홍보하는 쿠키 영상처럼 급하게 집어넣은 티가 났던 것이다.
쿠키 영상은 여운이라도 남지, 이건 억지잖아, 이 인간들아!
나도 분노하고 리리스도 분노하는 가운데 알림창이 떴다.
[메인 퀘스트 ‘대륙 멸망의 주범’을 입수하였습니다!]
[대륙 멸망의 주범
- 리리스의 근황 확인
- 리리스의 남하 막기(NEW!)]
[메인 퀘스트 ‘대륙을 구하는 자’를 입수했습니다!
- 다섯 속성 크리스탈을 ‘스칼라 호수 위’에서 파괴(NEW!)
* 퀘스트 ‘대륙을 구하는 자’를 클리어할 시, 대륙 전체의 질서가 재편되며 잠시 게임에서 로그아웃됩니다.]
북쪽 끝에 있는 그녀가 걸어 내려올 때마다 세상이 얼어붙고 있으니, 그녀의 남하를 막고 대륙을 구하라는 퀘스트.
그리고, 우리가 기다리던 크리스탈 박살 내는 마지막 퀘스트였다.
* * *
“결국 왕좌로 갈 수밖에 없겠군요.”
영상이 끝나자마자 네드 님이 말했다.
남하하는 리리스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음…….”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제 생각에는.”
이 게임이 10년간 돌아간 꼬라지를 봤을 때…….
“그냥 호수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말에 네드 님이 눈을 깜빡였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