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난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럼 왜 오자고 하신 거예요?”
여기 오자고 한 거 네드 님이잖아?
지금 나갈까요?
너무 당당하게 아니라고 하니까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게임 체험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네드 님이 미소 지었다.
농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했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네드 님이 말을 이었다.
“전 그 ‘다른 이유’ 때문에 지금이 너무나도 즐겁거든요.”
확실히 즐기는 것 같긴 했다.
근데 앞서 한 말 때문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게임 체험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이 말을 달리 하면, 이곳에 온 이유가 어떤 이유든 지어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시선이 밤하늘로 향했다.
구름문 지역의 특성 때문인지, 여긴 천상계 고도로 구분되면서도 땅(이라고 쓰고 구름)을 딛고 있을 수 있었다.
숨 쉬는 것도 자유로웠다. 비록 구름 아래가 보이진 않았지만.
“이런 풍경은 정말…… 보기 쉽지 않죠.”
네드 님이 흘끗 밤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밤하늘을 찬양하는 말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줄곧 내게만 향해 있었다.
난 결국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로 오자고 한 거요.”
용들만의 장례식에 우리 인간이 낄 순 없으니 자리를 비킨 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네드 님이 이야기를 안 꺼냈으면 내가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으로 굳이 오자고 한 건 네드 님인데.
그리고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아주 흥미로운 얼굴 아니었던가?
“…….”
그리고 지금도 네드 님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억지웃음으로는 절대 보이진 않았다.
‘이런 곳 좋아하시나 봐요.’
‘안 좋아해요.’
그 문답만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안 좋아한다는 그의 말도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이쪽도 저쪽도 진실이라면.
결국 난 답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는 뭐예요?”
아까 말하지 않았던 다른 이유.
내 질문에 네드 님의 웃음이 짙어졌다.
“고민 중입니다.”
“?”
심지어 이유를 생각해 둔 것도 아니었어요?
때 아닌 선문답에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뭘 고민해요?”
어차피 깊이 혼자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플 문제면, 그냥 신경을 쓰지 말자는 게 내 신조였다.
하지만 이번엔 궁금했다. 묘하게도 궁금했다.
분명 골머리 아픈 문제일 것 같은데도.
……마치, 내가 무슨 답이라도 기대하는 것처럼.
내 말에 네드 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는 걸 유니 님이 좋아하실지, 아니면 이대로 입을 닫는 것을 더 편히 여기실지 몰라서요.”
그러면서 네드 님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든, 유니 님이 좋아하셨으면 좋겠거든요.”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이곳에 올라온 이유를 말하는 대신, 내가 원하는 답을 해 주겠다는 말로 들렸다.
“제가 달라져야 한다면 달라져야 할 테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정말이다. 다르게 해석하려고 해도 한계였다.
“그 말씀은…….”
난 볼을 긁적였다. 설마.
“저한테 뭐든 맞춰 주신다는 말로 들리거든요.”
이렇게 말해도 되나? 너무 뇌 안 거치고 나왔나?
하지만 네드 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순순히 시인하는 그를 난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곳에 올라온 이유 같은 사소한 것은 물론이고, 유니 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요.”
네드 님은 그렇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들리시겠지만…….”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옆모습이 묘하게 낯설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조바심이 생겼거든요.”
그가 말을 이었다. 그가 흘끗 구름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이곳을 나갈 때가 되니까, 더욱요.”
그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나가면 우리는 단둘이 아니게 되니까.”
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랑만 같이 있어요.’
문득 그 말이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던 네드 님의 태도가 떠올랐다.
착각이겠지, 하면서 고개를 저었던 건 나였다.
괜히 같이 게임할 사이에 감정으로 오해 생기면 어색해지기만 하잖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말하는데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난 불쑥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좋으세요?”
그렇게 묻고서야 난 멈칫했다.
문득 묻고 기이한 감정을 깨달은 탓이었다.
네드 님은 내게 지속적으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나랑만 같이 있어요.’
어쩌면 그렇게 말하기도 전부터.
철벽을 치고 있던 건 나였다.
거부감보다는, 저 말이 진심인지 장난 내지는 내 착각인지 헷갈려서.
그래서 난 자꾸 이 사람에게 거리를 두었다.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었다.
혹시나 내 착각이면 민망하잖아!
괜히 어색해질 거 아냐!
심지어 이 세계에는 이 사람과 나 단 둘뿐이니 어색해져서는 영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지속적으로 어필해왔다.
“…….”
난 네드 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지속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는데도, 난 긴가민가한 생각에 본의 아니게 철벽을 쳐 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좋아한다면?
싫어?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만일 내가 싫었다면 이 사람이 뭔가 말하고 내 옆에서 움직일 때마다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겠지. 왜 찝쩍거리나 싶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아니었다. 이 사람은 오히려…….
이 사람에게 자칫 실수해서 멀어질까 봐 겁이 나.
그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고 살짝 입을 벌렸을 때였다.
네드 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내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순간 잊을 정도로 담백한 답이었다.
내가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조바심도 들고, 이상한 생각도 듭니다.”
네드 님이 말을 이었다.
“이 세계 밖에서도 만나기로 한 유니 님이, 정말 밖에서도 저와 가까이 있어 주실 수 있을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쏟아냈다.
그답지 않게 정리되지 않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나가면 멀어지진 않을지. 제 실제 모습에 실망하시진 않을지. 거리감을 느끼시지는 않을지. 무엇보다,”
그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렇게 멀어져서, 지금보다 가까워질 기회가 없어지진 않을지.”
당신도 당신의 생활에 치이고 나도 나의 생활에 치어서 점점 멀어지지는 않을지.
그의 말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가 공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벤토리의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명확히 보였다.
크리스탈을 각각 담은 다섯 개의 주머니였다.
“……안 나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난 멈칫했다.
안 나가는 방법은 하나였다.
크리스탈을 호수가 아닌 곳에서 박살 내는 것.
심지어 그에게는 기회도 있었다.
불과 얼마 전 바람 크리스탈을 얻을 때.
모른 척 내가 내려가기 전에 바람 크리스탈 위로 마법 창을 떨어뜨렸으면 그대로 게임 오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인벤토리를 닫으면서 말했다.
“저는 얻어낼 수 없다면 뺏으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가 제 손을 펼쳐 보였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살았고요. 그런데.”
네드 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걸 유니 님께만은 감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난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는 당신이 제게 묶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저를 속박해 주었으면 좋겠거든요.”
그가 낮게 웃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크리스탈이 담긴 주머니를 모두 꺼내 내 품에 안겨 주었다.
호수가 아닌 곳에서 크리스탈을 부술 계획은 이제 없다는 걸, 완전히 알려 주려는 것처럼.
“당신이 내가 필요해서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을 억지로 내 옆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크리스탈을 가리켰다.
“그런 욕심이 들어서, 크리스탈을 차마 부술 수가 없었습니다.”
난 나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 표정이 때때로 복잡했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음…….”
난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안 그래 봐서.
그런데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사람들의 감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첫눈에 반했다는 사람치고 정말 초면에 들이대서 고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첫눈에 호감 가지고 같이 있다가 감정 싹트면 고백하고 그러는 거지 뭐.
하지만 나랑 네드 님은 경우가 좀 다르……지 않은가?
게임에서 만났는데? 심지어 실제론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네드 님이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이 사람은 극히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왜?
“제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도요?”
네드 님은 내 말에 웃기만 했다. 난 고개를 기울였다.
“제 어디가 좋으세요?”
실제로 만난 것도 아닌데.
원래 사람이 게임에선 잘 맞는다 싶어도 만나 보면 영 아닌 사람도 있는 법이라…….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네드 님이 불쑥 말했다.
“모든 게 좋습니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긴 것도요?”
“네.”
그러자 네드 님은 즉답했다. 난 다시 웃었다.
“이건 게임 외형이잖아요. 실제로는 완전히 취향하고 안 맞게 생겼으면 어떡하려고요?”
그럼 그때 차게요?
하지만 네드 님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유니 님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습니다.”
단호하기까지 했다.
“유니 님 자체가 좋은 거니까요.”
사람이 생각보다 시각에 지배받는 동물이라는 걸 이 사람이 모를 것 같진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네드 님이 웃었다.
“실수해도 된다는 말.”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해 준 사람이 유니 님밖에 없었거든요.”
그가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는 평소의 절제된 표정이 아니라 어떤 해방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서 좋아해요.”
너무 직접적이고 담백해서 오히려 놀라웠다.
메디카에서의 네드 님은 사람들을 다루고 생각을 떠보는 데에 익숙해 보였는데.
나도 사람이니 그가 원했다면 내 마음을 얼마든지 떠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건 그만큼.
‘조바심이 생겼거든요.’
그의 말대로 조바심이 났기…… 때문이겠지.
뭐가 그렇게 급해서?
“지금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했던 네드 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결국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이렇게 조바심 때문에 마음을 고백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가 난감한 듯 웃었다.
“유니 님이 당황스러운 마음에 밀려나듯 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답지 않게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내 눈을 슬쩍 한 손으로 가려 주었다.
“구름 위에 앉아 쏟아질 듯한 별을 보는 것도 꿈 같은 모습이니, 꿈에서 들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잊고 싶은 기억이거든 잊으시고, 기억에 남기고 싶으시거든…… 기억해 주세요.
묘한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