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12)
  • <98화>

    엘데로 갈아탄 우리가 빠르게 시어드 상공을 벗어나는 사이.

    [다섯 크리스탈을 모두 획득했습니다.]

    알림창이 떴다. 난 기쁜 얼굴로 외쳤다.

    “이제 나갈 수 있어요!”

    이거만 호수 중앙에서 박살 내면 된다!

    이 게임 특성상 방해꾼이 없을 리는 없었지만, 귀찮은 일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나가면 꼭 유네리아 팀에 깽판 치러 간다!

    난 그럴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

    덕분에 네드 님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어딘가, 무언가 갈등하는 표정을.

    * * *

    원래 스토리상 이 다섯 크리스탈을 대륙 중앙 호수에서 박살 내면 메인 퀘스트는 클리어된다.

    다섯 크리스탈의 힘을 통해 대륙을 가라앉히려던 누군가의 계획이 무산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흑막이 누군데]

    [???:아ㅋㅋ 그건 다음시즌에 나온다고ㅋㅋ]

    그리고 퀘스트를 클리어한 그 누구도 흑막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원래는 그랬지만 이 세계에서 바뀐 시나리오 퀘스트는 달랐다.

    분명히 마지막 보스는 리리스다.

    크리스탈로 대륙을 가라앉히려던 흑막도 분명히 그녀였다.

    왜 가라앉히려고 했는지는 별로 안 궁금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크리스탈을 박살 내기 전에 방해하러 올 것이란 점이었다.

    “그럼 습격당하는 것보단 선수를 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네드 님이 불쑥 물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한데요…….”

    난 저번에 봤던 얼음의 왕좌 맵을 떠올렸다.

    누가 봐도 리리스 전용 맵이었다.

    “저번에 봤던 리리스 보스룸 꼴을 봐서는 거기서 굳이 싸워 봐야 좋을 일이 없거든요.”

    “아…….”

    네드 님은 곧바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해가 빠른 분이라 좋다니까.

    “어차피 호수 가서 크리스탈 부수기 전엔 반드시 나타날 거예요. 얼음의 왕좌 맵에서 상대하는 것보단 호수 위에서 상대하는 게 나을 테니까, 이대로 호수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난 네드 님을 슬쩍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바람에 네드 님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급히 날 필요가 없는 엘데는 천천히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전투 준비를 마치고 호수로 가죠.”

    네드 님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엘데가 불쑥 물었다.

    ―이곳에서 떠난다는 건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속도가 느려진다 싶더니, 우리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

    뒤를 돌아보는 엘데의 표정에는 묘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아쉬움 같기도 했고, 배신감 같기도 했고, 안타까움 같기도 했다.

    자자잠깐 오해다!

    난 재빨리 두 손을 내밀어 보였다.

    “접는다는 건 아니고.”

    아니,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NPC에 준하는 엘데에게 PC 버전과 게임 세계의 차이에 대해 말해 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니까, 다른 모험가들하고 지금 우리 상태는 다르잖아.”

    내 말에 엘데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못 알아듣는 건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지?

    유네리아 서버 오픈? 인터넷의 탄생? 컴퓨터의 보급화? 계산기가 컴퓨터로 진화하는 과정?

    고뇌에 빠진 내가 말했다.

    “원래 이렇게 대화할 수 없거든.”

    원래 용과 인간의 대화는 몇 개의 선택지로 이루어지는 게 전부였다.

    그 이야기를 보통 유저에게 조련되어본 적이 없는 엘데에게 해 봐야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

    아니나 다를까 엘데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의외의 지원군이 네드 님의 주머니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뀨!

    그건 다름 아닌 비상식량이었다.

    ―뀨! 뀨뀨~ 뀨뀨!

    그리고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뀨밖에 없으니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근데 저게 뀨 다섯 글자로 설명될 일이 아닌데…….

    난 복잡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설명하려 애썼다.

    “우리가 크리스탈을 부수고 대륙을 구하면 이 상태에서 풀리거든?”

    이게 대체 뭔 소리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

    “?”

    이걸 알아듣네?

    하지만 엘데는 내 설명이 아니라 비상식량의 설명에 더 큰 도움을 받은 것 같았다.

    아니, 뀨 다섯 번으로 얼마나 가성비 있게 설명한 거야?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외부세계에 관한 것은 금기이니.

    엘데의 말에 나와 네드 님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가 말한 ‘외부세계’라는 건 우리가 사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걸 알아?”

    NPC가 알면 곤란한 거 아니냐?

    하지만 엘데는 고개를 쳐들며 답했다.

    ―긴 시간 살아온 용을 무시하는군.

    대체 993년 동안 유네리아에서 뭘 하고 산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뀨, 뀨뀨? 뀨?

    그때 악세서리 크기로 엘데의 얼굴까지 뽀르르 날아간 비상식량이 그에게 뭐라고 물었다.

    아무래도 용의 언어는 가성비가 뛰어난 게 맞는지, 비상식량의 뀨 몇 번에 엘데의 안색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크르릉.

    저쪽은 ‘뀨’고 이쪽은 ‘크르릉’인데 어떻게 알아듣는지는 몰라도, 엘데의 크르릉에 비상식량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대체 뭐라고 한 건지는 몰라도 비상식량은 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우리에게 날아왔다.

    누, 누가 봐도 이별 준비 중이잖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비상식량의 눈가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아아아니 그렇게 슬퍼하지 말라고!

    “앞으론 진짜 잘해 줄게, 내가.”

    내가 이 게임 접는다 접는다 해도 못 접는다니까? 옆에 기가 막힌 공대 파트너가 생겼는데 내가 접겠어?

    ―뀨우우…….

    하지만 비상식량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지만, 눈앞에서 슬퍼하는 지성체(?)를 보니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랑 이렇게 대화도 하고 눈도 마주쳐 봤는데 어떻게 외면하겠어, 응?”

    대화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했던 건 확실했다.

    ―뀨……?

    내 말에 비상식량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니까 왜 얘네는 인간 말을 알아듣는데 우리는 용가리 말을 못 알아듣……는지 따지기 시작하면 이 게임에 남아나는 게 없겠군.

    “그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 응?”

    ―뀨!

    내 말에 비상식량이 즐거운 얼굴로 내 어깨 위에 앉았다.

    “많이 친해지신 것 같습니다.”

    우리 모습을 보던 네드 님이 말했다.

    “그러게요.”

    난 새삼 볼을 긁적였다.

    내가 원래 용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면 네드 님이 나를 사람으로도 안 볼 것 같았다.

    하지만 들어보세요! 내게 얘는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었다고요!

    그렇게 속으로 변명하던 난 결국 인정해야 했다.

    지금은 데이터 쪼가리 이상으로 보인다는 것을.

    ……생각보다 의사소통이 되고 스킨십이 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이리 와.”

    난 비상식량을 끌어안아 주었다.

    “앞으론 오류 난다고 안 팰게. 밥도 비싼 것만 줄게.”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액세서리 크기라 품속에 쏙 들어온 비상식량은 들뜬 얼굴이었다.

    내 품에 볼을 부비적거리는 모습이 심지어…… 귀여웠다.

    “흠흠.”

    새삼 목을 가다듬던 난 문득 얼마 전이 떠올랐다.

    이놈, 처음엔 주인 못 알아보는 척하더니, 얼씨구?

    그냥 아는 척하기 싫은 거였냐?

    살짝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봐 주기로 했다.

    그래, 나도 과거(?)가 있으니 깔끔하게 묻자.

    ―그럼 호수로 가는 건가?

    그때 엘데가 물었다. 난 네드 님과 시선을 마주했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유네리아 팀장 중에는 엘프 설정에 목숨을 걸어서 ‘엘프 아빠’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용 아빠’는 없었다.

    요컨대 용 설정에 목숨 건 놈은 없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유저들 사이에서는 용 설정은 자세히 정해진 게 없을 거라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난 엘데를 타고 구름문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 생각을 철회해야 했다.

    ―우우우……!

    불과 수십 분 전.

    구름문에 도착한 엘데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낸다 싶었다.

    시신만 딱딱하게 굳어 남은 네 마리의 용 한가운데에서였다.

    그냥 슬퍼서 우는 줄 알았더니 그게 신호였던 모양이다.

    ‘다른 용들?’

    나와 네드 님은 멀리서 다가오는 수많은 몬스터 떼를 봐야 했다.

    그것들은 당연히 용이었다.

    ‘!’

    하지만 엘데 앞에서 용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멈칫했을 때였다.

    ―우우우우……!

    엘데가 다시 구슬프게 울부짖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오…….’

    엘데의 울음소리를 들은 용들이 일제히 NPC로 바뀌었던 것이다.

    더 이상 몬스터로 타겟팅이 되지 않도록.

    신기한 일이었다.

    그 뒤로는 우리가 언젠가 약속한 대로, 네 마리 용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런 행사는 우리도 처음이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추모하고 있다.

    엘데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모여든 수십 마리의 용을 흐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용들이 투박한 앞발로 오동나무 관을 제작할 순 없었기 때문에, 그 관을 만들어 준 건 우리였다.

    인간에 비해 좀 많이 클 뿐이지 못 만들 물건은 아니라, 우리는 금세 관을 만들어냈다.

    ―용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

    엘데는 관 네 개에 들어가는 용들을 보면서 말했다.

    [용 종족 친화도가 10% 올랐습니다.]

    은혜를 이렇게 시스템적으로 갚을 줄은 몰라서 잠시 멈칫했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방식이 아닌가?

    엘데는 그렇게 말했다. 거참, 알다가도 모를 용이었다.

    NPC가 이렇게 세상의 비밀(?)을 많이 알아도 되는 거야?

    그걸 물어볼 틈은 없었다.

    관에 네 마리 용이 들어가자 분위기가 더욱 엄숙해졌던 것이다.

    크릉, 크르릉. 용들 사이로 그들만의 언어가 오갔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좋겠습니다.’

    네드 님이 그들을 보다가 제안했다. 난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까요?’

    스샷 명소이긴 한데 남들 장례식 하는데 스크린샷 찍을 수도 없고.

    그때 네드 님이 제안했다.

    ‘이 위로 올라가면 별이 잘 보일 것 같습니다.’

    그는 다소 들뜬 얼굴이었다. 별 보는 거 좋아하시나?

    난 그를 따라, 장례식이 치러지는 구름문 1층을 지나 2층으로 들어섰다.

    유네리아 식으로 표현하면 ‘오라고 만든 곳’이 아닌지, 아무런 시스템창도 뜨지 않았다.

    “공기가 좋네요.”

    네드 님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과연 그랬다. 탁 트인 시야처럼 맑고 깨끗한 공기가 느껴졌다.

    네드 님의 표정도 밝아 보였다. 지금까지는 내내 엄숙하다 못해 어두웠는데.

    “이런 데 좋아하시나 봐요.”

    내가 가볍게 건넨 말에 네드 님이 날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안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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