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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96/112)
  • <96화>

    네드 님의 본보기에도 불구하고 시어드 성주가 선택한 건 바람 크리스탈 장벽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웅!

    한눈에 보기에도 두꺼워진 새하얀 장벽을 보며 난 혀를 찼다.

    [바람 크리스탈 장벽 / Lv. 499]

    레벨은 예상대로 499로 처리되었다.

    500짜리 크리스탈로 만들 수 있는 최대 출력을 낸 것이다.

    보통 모험가들이었다면 못 부쉈겠지만 아쉽게도 시어드 성주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우린 부술 수 있으니까.

    “일단 주택가 피해는 없게 방어막으로 감싸는 게 좋겠죠?”

    보호막을 강화하느라 하늘로 향해 오는 공격은 오히려 줄어 있었다.

    덕분에 엘데 위에 탄 나와 네드 님은 편하게 시어드 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가리킨 쪽을 본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흐음.”

    난 네드 님의 말에 시어드 성의 구조를 다시 살폈다.

    내가 PC 버전으로 할 때랑 달라진 건 별로 없었지만 내 능력치를 가지고, 네드 님의 아이템 보너스를 받은 스킬이 얼마나 큰 피해를 줄지는 미지수였다.

    일단 최대한 넓은 범위를 감싸는 게 좋다.

    보호막 근처가 진동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주택가 근처를 보호막으로 간신히 감쌌다간 주택가에서 피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면?

    [제목 : 할짓없는겜 즐기는방법.jpg

    글쓴이 : 파개한다

    (학살자칭호사진.jpg)

    이 칭호 달면 성 들어갈 때마다 경비병들 쫓아옴ㅋㅋ 경험치개꿀]

    [(댓글)경손실못참음 : 얼마주는데]

    └[파개한다 : 100]

    └[경손실못참음 : 100만??]

    └[파개한다 : 아니 100 백 백이요]

    경손실못참음은 그 후로 답댓이 없었다.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면 신묘하게도 1분 내로 나타나 정보를 캐가는 그놈은, 경험치가 안 된다는 판단이 서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도 특징이었다.

    아무튼 파개한다처럼 그렇게 다이나믹 익사이팅 하드 플레이를 하고 싶지 않으면 학살자 칭호만은 피하는 게 좋다.

    “정확한 전개 범위는 제가 짚어 드릴게요.”

    그리고 그 범위 계산을 하는 건? 당연히 공략에 익숙한 나였다.

    하드 컨텐츠 하다 보면 방어막 어디에 쳐야 할지 계산할 일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제가 스킬 쏘아 보낸 곳 위주로 방어막 쓰시면 돼요.”

    [‘주시의 빛’ 스킬을 사용합니다.]

    주시의 빛이라는 있어 보이는 이름보다 ‘레이저포인터’로 더 많이 불리는 이 스킬은 멀리 있는 걸 가리키기에 제격이었다.

    물론 오래 쓰면 곤란했다.

    [갑작스럽게 벽에 생긴 붉은 빛에 주민들이 당황합니다!]

    어어 당황하지 마, 핵 아니야!

    Nuclear Launch Detected 아니야!

    난 당황한 주민들이 도망칠까 말까 각을 재는 걸 보면서 재빨리 레이저포인터를 거두었다.

    [네드가 ‘견고한 방어막’ 스킬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중심으로 네드 님의 견고한 방어막이 설치되었다.

    방어막 스킬은 공격 스킬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람 장벽을 무난히 뛰어넘어 저택 안쪽에 설치되었다.

    그렇게 주택가 사람을 감싸는 사이, 일부 주택가 사람들은 짐을 싸서 집에서 슬그머니 나오기 시작했다.

    불안한 건 알겠는데 저희가 집안에서 종이 한 장 안 날아가게 해 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쇼!

    아, 시어드 저택 때려 부수면 진동은 전해지려나?

    하지만 부수진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열 시입니다.]

    그때 네드 님이 광고용 판넬을 들고 말했다.

    그러자 시어드 성 쪽에서 쩌렁쩌렁한 답변이 돌아왔다.

    [드디어 대결할 순간이 왔군!]

    아니, 우린 대결한다고 한 적 없는데?

    [와라!]

    하지만 시어드 성주는 신나 보였다. 아무래도 바람 장벽에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너희가 허세 부리는 동안, 이쪽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 하하하하!]

    정정한다. 자신이 있어도 너무 있는 모양이었다.

    난 그 말에 크리스탈 장벽을 다시 살폈다.

    “제가 알기로 바람 크리스탈 방벽은 무조건 구 모양이거든요?”

    그러니까 저 일렁이는 크리스탈 장벽의 모양을 추적해 보면, 어디에 크리스탈이 숨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장벽을 짙게 하면서 구형이 더 잘 드러났기 때문에, 난 그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원래는 시계탑에 있었는데 지금은 지상으로 내린 것 같아요.”

    내 말에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어드 성을 박살 내는 건 부차적인 목적이고, 우리의 진짜 목적은 바람 크리스탈을 얻는 거니까.

    파워 조절을 잘못해서 바람 크리스탈까지 박살 냈다간 대재앙이 도래할 것이 분명했다.

    “힘 조절 아시죠?”

    하지만 난 이 뉴비님을 믿었다.

    사냥에 관해선 거의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분이 아닌가?

    내가 눈을 반짝이자 네드 님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크리스탈 장벽만 해제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하겠습니다.”

    이미 우리의 계획은 정해져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 제가 바람 크리스탈 얻어 오면 바로 다 박살 내는 거예요.”

    그럼 시어드 성주는 우리가 바람 크리스탈을 훔쳐 가는 줄도 모르고 탈탈 털릴 것이다.

    그 후에 찾아오는 황성 기사단에게 그가 어떤 심문을 당할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었다.

    ―쓔웅!

    아래에선 여전히 거대한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지만, 우리를 태운 엘데는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여유롭게 화살을 피해냈다.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다.

    “그럼 스킬 사용하겠습니다.”

    네드 님의 손이 번쩍였다.

    아무래도 한 방에 무너뜨릴 생각이신 듯했다.

    난 그 모습을 보다가 슬쩍 스킬 레시피를 알려드렸다.

    “그 조합도 좋은데, 일단 하늘 스킬 조합은 가장 나중에 하시는 게 좋거든요? 그게 최종으로 딜량 뻥튀기해주는 거라.”

    “아하…….”

    네드 님은 내 말에 곧바로 조합 순서를 바꾸었다.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 사람다웠다.

    제가 이래 봬도 유네리아 칵테일바 이벤트 1위 한 사람이었다고요! 내 조합을 믿어!

    [유네리아 칵테일바 이벤트!]

    이 뜬금없는 이벤트는 ‘스킬 조합’을 무슨 순서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딜량이 천차만별로 갈리는 유네리아에서, 유일하게 쓸모 있는 이벤트였다.

    [그래서 딜 어떻게하냐고]

    게임에 좀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유저들은 보통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는지’ 묻기 마련.

    그러면 유네리아의 유저들은 이렇게 답했다.

    [풍화 섞고 수속 섞고 디버프 넣고 풍화에 버프 수빙에 화속디버프 둘이 섞고 하늘 ㄱ]

    유네리아 유저라면 모두 이해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새로 유입된 유저라면?

    [그게 뭔데 X덕아]

    욕하지 않는 게 이상한 외계어였다.

    그 때문에 뉴비 유입이 힘들었던 이 게임에서, 뉴비들을 위해 개최한 이벤트!

    [유네리아의 고인들이 알려드립니다! 스킬 조합 레시피!]

    이벤트 개최 취지도 좋고 결론적으로 그때 고인물들이 공개했던 레시피는 아직까지도 많이 쓰이는 국민 레시피가 되었다.

    그 이벤트의 문제는 딱 하나였다.

    [유네리아의 고인들은 뭐냐]

    [우린 이미 유네리아 하다가 뒤진거임?]

    ……이벤트 배너 오타 검수를 안 했다는 것?

    [‘유네리아에 완벽한 이벤트는 없다’ ㅋㅋㅋㅋㅋㅋㅋ]

    [명제를 손수 참으로 만들어주는 클라스 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것 말고는 좋은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 이벤트에서 당당하게 1위 입상을 한 게 나, 유니였다.

    내 스킬 조합은 유네리아 콜라보 카페에서 무알콜 칵테일로도 만들어졌었다.

    원래 다섯 속성과 다른 보조 속성의 스킬은 다 합성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여덟 시간 동안 삽질을 해댄 끝에 다섯 속성을 모두 합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건 여러 속성을 한 번에 섞은 것 답게 파워는 확실했다.

    문제는 너무 스킬 작용 범위가 넓어서 어지간한 곳에선 쓸 수가 없다는 것?

    [제목 : 고맙다

    글쓴이 : 파개한다

    (박살난 맵 풍경.jpg)

    유니레시피로 메디카 귀족놈 성 하나 깔끔하게 밀어버림ㅋㅋㅋㅋㅋㅋㅋ]

    [(댓글)유니 : 이따위로 쓰라고 만든게 아닌디]

    “…….”

    새삼 과거가 생각나 내가 얼굴을 구기는 사이.

    [5속성 스킬 조합 진행 중]

    네드 님의 머리 위에 내가 알려드린 스킬 조합의 차지 게이지바가 올라왔다.

    와, 설마 설마 했지만 설명 듣고 한 번에 해내실 줄이야.

    이벤트 1위 했을 때도 이해를 못 해서 몇 번이고 질문하는 놈들이 넘쳐났던 레시피가 저건데.

    “그 조합을 쓰면 5발이 생성되거든요? 첫발이 가장 세고 점점 파워가 줄어드는데…….”

    문제는 이게 발사를 하지 않으면 머리 위에서 폭발한다는 점이었다.

    내 설명에 네드 님의 표정이 잠시 심각해졌다.

    “바람 크리스탈 방벽이 단단하니까 버틸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난 그를 안심시켰다.

    내 능력치와 바람 크리스탈 방벽의 기본 HP를 생각해보면 대충 견적이 나왔으니까.

    “알겠습니다.”

    네드 님은 그제야 표정을 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5속성 스킬 조합 완료]

    난 그 사실을 네드 님이 첫 공격을 날리고 나서야 알았다.

    ―쿠콰콰쾅!

    [―□!]

    오류뎀이 뜨고 나서야.

    마마맞다! 네드 님 장비! 장비 뎀뻥! 으아악!

    오류뎀을 맞은 바람 속성 장벽은 당연히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세 번째 공격까지 연달아 바람 크리스탈에 부딪혔다.

    ―콰콰콰쾅!

    [바람 크리스탈 장벽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창을 날리려던 네드 님이 멈칫했다.

    이대로 창을 집어 던졌다간 바람 크리스탈까지 박살 날 테니까.

    “이걸 던지지 않으면…….”

    아까 내 설명을 기억했는지 네드 님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고 맨땅에 던졌다간 옆 성이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구오오오옷……!

    [필드보스 ‘타고’의 영역에 진입합니다!]

    때마침 좋은 샌드백이 나타났다.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기다가 던져요!”

    네드 님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고 쪽으로 5속성 스킬 조합 마법창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

    날아오는 마법창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당황했는지 타고가 주춤거렸을 때였다.

    ―콰콰콰쾅!

    [―□!]

    레벨 300대에 맞기에는 심각하게 황송한 데미지와 함께 타고가 등장 2초만에 사라졌다.

    [필드보스 ‘타고’를 물리쳤습니다!]

    아래에선 튀어 나가려고 했던 시어드 성주의 병사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네드 님의 손에는 창 하나가 아직 남아 있었다.

    [‘5속성 조합’ 마법창 지속 시간 : 00:00:17……]

    네드 님 앞에 시스템창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으으으악!

    저대로 손안에서 터지면 사망 각이었다.

    네드 님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난 그의 시스템창을 보다가 말했다.

    “딱 10초만 버티고 있어요.”

    그 안에 처리할게요! 처리해야만 해!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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