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시어드 성 바로 근처에 있는 멘틸 성은, 시어드가 타고를 놓치면 바로 영지가 쑥대밭이 될 위기에 처한 곳이었다.
당연히 그 성의 성주가 가장 불안할 터.
주변 성의 성주들을 모집하고 여러 이름 있는 몬스터 헌터들을 그 자리에 초대한 것도 멘틸 성주였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요즘 화제인 ‘황금 로브의 기사들’…… 그니까 우리한테도 초대장을 보냈다.
“후…… 시어드 성주는 전혀 전언을 듣지 않고 있소.”
“지금까지의 몬스터와는 크기부터 차원이 다르다고 했거늘!”
사실 타고는 그렇게 강한 필드보스는 아니었지만, 워낙 몸집이 큰 놈이라 비주얼만 봐서는 메디카에 뜨는 필드보스 전체와 맞먹을 것처럼 생긴 놈이었다.
“시어드 성주의 능력이라면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오.”
그때 한 성주가 말했다.
“오오, 필시아 성주! 그대라면 시어드 성주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겠지.”
다른 성주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필시아 성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일하게 시어드 성주와 교류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기가 제일 강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시어드 성주가 ‘저놈은 강해질 가능성이 있으니 감시해야 한다.’라는 이유로 교류하는 것이었지만, 필시아 성주가 그 싸늘한 진실을 알 리가 없었다.
“내 유일하게 그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친분이 아닐 수도 있어요, 친구…….
안타까운 현실을 모르는 필시아 성주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시어드 성주의 능력은 확실히 출중하오. 시어드 성 근처에 근래부터 생긴 바람의 장벽도 그렇고…… 최근 성에 설치된 포탑의 파워도 크게 상승했거든.”
그가 손을 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시어드 성주도 전투에는 능숙한 인물이니 타고라는 몬스터가 강하더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다른 성의 성주들이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몬스터는 모두가 처음 보는 것이라더군! 얼마나 강할지 알 수가 없는데……!”
“우리 가문의 마법사는 몬스터의 마력 파동이 굉장하다고 했소!”
“그냥 몬스터가 아니란 말일세!”
나랑 네드 님은 흘끗 시선만 마주했을 뿐 그들의 회의를 듣고만 있었다.
얘들아, 필시아 성주 너무 패지 마라.
저 사람도 상황이 얼마나 급해 보였으면 회의까지 나왔겠니?
아니나 다를까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킨 필시아 성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만에 하나의 상황에는 대비해야 하는 법인데……. 나도 지원 병력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었소이다.”
그렇게 말하던 필시아 성주는 우리를 불쑥 돌아보았다.
“황금 로브의 용사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런 기괴한 이름 부르지 말아 줄래?
난 마시던 와인을 뿜어 버릴 뻔했지만 애써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우리가 기다리던 순간이었으니까.
근래 메디카에 나타나는 필드보스들을 물리치는 데에는 황금 로브의 용사(…)들의 활약이 컸다.
그들이 우리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미리 답할 말을 맞춰 온 나와 네드 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몬스터는 뭔가 다릅니다. 확실히 달라요.”
“이대로 시어드 성주를 가만히 뒀다간 시어드가 무너질 겁니다.”
“만일 시어드가 무너진다면 근처 성은 물론이고 황가까지 몬스터가 쳐들어올지도 모릅니다!”
사실 타고는 나타난 자리에서 잘 안 움직이는 특성이 있었지만 그런 고오급 정보를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뭐, 뭐라고? 그 정도인가?”
“예!”
우리는 멘틸 성주의 말에 입을 모아 답했다.
그러자 성주들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차라리 폐하께 직접 추가병력에 관한 건을 말씀드리는 게 어떻겠소이까?”
“시어드 성 근처에 병력을 대기할 수 없게 시어드 성주가 자꾸 방해하고 있으니, 그것만이라도 할 수 없게 말일세.”
“좋은 생각이네.”
그렇게 이야기를 쑥덕쑥덕 나누던 성주들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누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좋겠소?”
멘틸 성주의 말은 이런 뜻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황제 폐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깔 더러운 시어드 성주한테 찍힐래?
“크흠!”
“흠!”
당연히 귀족들은 저마다 헛기침하며 어딘가 아픈 척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성주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그런 걸 맡길 아주 좋은 호갱이 있었다.
“그래, 황금 로브의 영웅들이 하는 것이 어떻겠소?”
“옳소! 폐하께서 최근 두 분을 아끼신다고 들었소이다.”
바로 그 호갱 여기 있습니다!
다 알면서도 조별과제 조장 떠맡는 이 기분은 뭐지?
더러운 기분이었지만 이게 우리가 노리던 것이었다.
우리가 시어드로 병력 보내자고 한 게 아니라, 주변 성주들이 하자고 한 거야~.
그럼 병력을 움직여 달라고 하기엔 부족한 메디카 신뢰도로도 황제에게 이야기를 붙여 볼 수 있었다.
“그건…….”
물론 우린 곤란한 척 한 번 튕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성주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우리를 비행기를 태워 주기 시작했다.
“최근 메디카의 실세가 누군지 아는가? 바로 자네들이네!”
“어떻게 황제 폐하께 그리 총애받을 수 있는 건가?”
“자네들의 능력이라면 황제 폐하께서도 자네들의 말을 믿어 줄 걸세!”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하지만 우리는 곤란한 얼굴로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메디카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하겠습니까?”
우리의 말에 성주들이 반색했다.
물론 우리도 속으로 반색했다.
여러분 땡큐!
* * *
[메디카 황제 알현 요청]
메디카 신뢰도 60% 이상을 가지게 되면 뜨는 메뉴.
여기서 그냥 알현을 해 봐야 선택지가 몇 개 뜨지 않는다.
[①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② 사교계의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③ 폐하께서는 역시 위대하십니다!]
세 개의 기본적인 선택지만 뜬다.
물론 우린 PC 버전이 아니었으니 ‘시어드로 병력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물을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럼 선택지 밖, 한마디로 들을 줄 몰랐던 ‘뜻밖의 말’을 들은 황제는 당연히 우릴 의아하게 볼 것이다.
하지만 우린 지금 다른 성주들의 부탁을 받고 온 길이었다.
그래서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다.
[④ 시어드 성 근처 성주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나이스!
“폐하, 시어드 성 근처 성주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나와 네드 님은 동시에 4번 선택지를 택했다.
그러자 메디카 황제의 표정이 흐려졌다.
“나도 그 소식은 들었네. 얼마 전엔 모임도 가졌다지?”
“예. 그 모임에 초대받았습니다만 그곳에서도 걱정이 많은 듯했습니다.”
메디카 황제는 고민하듯 턱을 매만졌다.
시어드 성주가 어지간히 괴팍한 인간이 아니다 보니, 직접 병력을 파견하라 명령하기가 좀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는 시어드 성주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성주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자라네.”
그러면서 좀 피곤한 표정을 짓는 황제의 머릿속이 읽히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건드리면 무는 놈이라 이야기 꺼내기 귀찮다는 거 아니냐?
“자네들이 보기에 이번 시어드 성 근처의 몬스터는 어떻지?”
그 말에 난 몸서리를 쳐 주면서 말했다.
“끔찍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네드 님도 말을 얹자 메디카 황제가 끄응, 하며 인상을 썼다.
“정식으로 병사를 파견시키면 시어드 성주가 예민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있네.”
저도 모르게 시어드 성주의 눈치를 봤다는 걸 깨달았는지 곧 황제가 얼굴을 구겼다.
“물론 내가 그자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신하가 항상 최상의 컨디션으로 의무를 행하게 하는 것이 주군의 덕목 아니겠는가?”
따지자면 따질 게 많은 말이었지만, 우린 따지러 온 게 아니었으므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네 말이 다 옳다!
“그래서 말인데…….”
그러자 황제가 은근히 우리를 보면서 입을 뗐다.
“자네들이 시어드 성에 한 번 가 볼 수는 없겠나?”
네 말이 다 옳다! 하지만 이건 안 된다!
난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희도 가고 싶은 마음은 가득합니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지?”
문제가 있으면 다 없애줄 기세로 황제가 물었다.
하지만 이건 안 될걸?
“지금 시어드 성주는 외부인에게 예민한 상태입니다. 아는 얼굴도 아닌 저희가 접근했다간 공격당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황제가 팔짱을 끼었다.
“흐음. 그건 맞는 말이지.”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불같은 성격을 가진 자야. 그럴 만해.”
불같기만 하겠습니까?
물론 그놈은 우리가 초면이라 때리는 게 아니라 적대관계라 때리겠지만 그런 진실도 묻어 두기로 했다.
많은 진실을 뒤로하고 우리가 곤란한 표정으로 황제를 보자, 황제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눈을 번쩍 떴다.
“아, 그럼 이렇게 하지.”
누가 봐도 자기 자신을 뿌듯해하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럼 그자를 보내지.”
그러면서 우리를 가리켰다.
“자네들을 불렀다는 그자 말일세. 필시아 성주라고 했던가? 평소 시어드 성주와 친분도 있으니 시어드에서도 일단 대화해 보려고 하겠지.”
어떻게든 자기가 직접 사람을 보내긴 싫은 것 같은 메디카의 황제는 아무리 봐도 시어드 성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과연 폐하이십니다!”
나와 네드 님은 열심히 황제를 비행기에 태워 주었다.
황제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하여 필시아 성주는 시어드 성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내, 내가 말인가?”
명령을 전달받은 필시아 성주는 좀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이내 정의로운 얼굴로 답했다.
“그래, 하나뿐인 친우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는가? 일찌감치 내가 먼저 가서 살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친우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군.”
그는 반성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어드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난 바람 장벽에 뚜까 맞고 올 그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사실 안 가고 싶었던 건 성주님이 시어드 성주한테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살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럼, 다녀오겠소이다!”
필시아 성주는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며 가벼운 갑옷 차림과 몇 명의 기사들만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저자는 바람 장벽에 맞설 자신이 있는 건가? 대체 뭘 믿고 저런 차림으로 바람 장벽으로 다가가는 거지?
그 꼴을 지켜보던 엘데가 물었다.
뭘 믿냐 하면…….
“……아마 우정?”
―?
종족을 뛰어넘어 용마저 어이없게 만드는 데 성공한 필시아 성주는 힘차게 시어드 성으로 출발했다.
“죽진 않겠지?”
죄라고는 저런 놈하고 친구인 죄밖에 없는 필시아 성주가 측은하게까지 보이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헉, 허억…….”
필시아 성주가 보내 온 기사가 딱 숨넘어가기 직전의 모습으로 성주들에게 보고했다.
“시, 시어드 성주가 미쳤습니다! 저희 성주님을 마구잡이로 공격했습니다!”
“뭐라고!”
당연히 모여 있던 성주들은 난리가 났다.
“어찌 필시아 성주를!”
필시아 성주가 평소에 인망이 좋았는지 화내는 성주들이 많았다.
그런데 기사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몬스터와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으니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명령이야!”
결국, 어떤 성주가 분노했다.
그때였다.
―콰지지직! 푸슝!
살벌한 소리와 함께 먼 하늘이 번쩍였다.
“뭐, 뭐야?”
뭐긴 뭐야. 딱 보니까 타고 원거리 공격이구만.
노란빛 전기가 번쩍이는 걸 보니 안 봐도 비디오였다.
문제가 있다면 딱 하나.
“오…….”
이건 나도 네드 님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저게 뭐야!”
“시, 시어드 성의 방벽 때문에 온갖 곳으로 몬스터의 공격이 튀고 있습니다!”
기겁한 기사의 말대로였다.
시어드 성의 바람 방벽이 너무 완벽한 나머지, 시어드 성에는 티끌만큼의 데미지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전기 속성 보스 타고의 원거리 공격은 애꿎은 주변의 다른 성과 건물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당, 당, 당장 폐하께 보고 올리게!”
“저놈이 미쳤나! 우리더러는 오지도 말라고 하더니 주변 성으로 공격을 튕겨내다니!”
성주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
“…….”
그 꼴을 보고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거, 시어드 성 박살 내자고 청할 사람이 우리뿐만은 아니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