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황가의 명예기사가 된 후로는 일이 쉽게 풀렸다.
우리는 빠르게 황제의 ‘가려운 곳’을 골라 긁어 주기 시작했다.
황제가 직접 손쓰기 어려운 곳에 가는 것은 물론,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는 귀족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까지.
“황제 폐하 만세!”
속마음에 없는 립서비스를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오…….”
그때마다 메디카 황제는 우리를 아주 기껍게 바라보았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난 그래서 조금 불안했다.
이 작업이 오래 걸리면 어떡하지?
물론 원래 메인 퀘스트에는 시간제한이 없다.
PC 버전 유네리아에서는 유저가 접속을 끊거나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으면, 사실상 세계의 시간은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륙이 가라앉고 있으니 마지막 보스를 잡으라는 퀘스트가 떠도, 진행하지 않으면 대륙은 가라앉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자유도가 높은 유네리아라지만, 유저들이 자유롭게 대륙을 멸망시키게 두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이 세계에서도 그럴까?
PC 버전과는 달리 현실처럼 구현하려 애쓴 이 세계에서는 안 그럴 것 같았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리리스가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가 들고 있는 크리스탈을 부수려고 한다거나, 다른 수작을 부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황제는, 생각보다…….
“자네들의 충정을 내 정말 높이 샀네. 십년지기 친구가 배신하고 함께한 세월은 다 부질없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충신들을 만난 것 같구만.”
……호구였다.
“자네들만 한 자들을 근래 본 적이 없어.”
정확히 말하자면, 황제는 마음이 급하고 제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네드 님은…… 굉장히,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제는 우리가 눈치 없이 우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메디카 제국 귀족과 황족 간에 은근히 존재하는 알력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모든 것을 황제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누가 뭔 짓을 했는지 이름도 빠짐없이 알려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오늘 전장에서는 이상하게도 웰티아 성주의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웰티아 성에 간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몇 번 선두에 선 듯하더니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에 그들을 찾아보니 이상하게도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하는 상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보고를 이었다.
“그들이 황제 폐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역시 황제 폐하께서 그 급한 전장에 저희를 파견한 것을 칭송한 듯싶었습니다.”
“호오.”
황제는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는 자신에게 제게 반기를 들려던 귀족들이 전장에서 슬금슬금 병사를 뒤로 빼면서, 황제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걸 순식간에 알아챘다.
자칫 떠먹여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황제의 신임을 우리가 독차지했다는 것이었다.
“이건 웰티아 성 근처에서 입수한 것입니다. 기이한 물건이 있으면 일단 가져오라 명하셔서 가져왔습니다만, 이것도 혹시 괜찮으실지…….”
그리고 물증도 확보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다른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편지지 같은 것들.
“출정이 피곤하진 않은가? 매일같이 성에 붙어 있는 일이 없군. 이 만찬이라도 즐기면서 조금 쉬었다 가길 바라네.”
그렇게 황제가 베풀어 주는 만찬에선 그에게 라비스를 슬쩍슬쩍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필사의 점수 얻기 스킬!
“역대 메디카의 황제 중 가장 많은 대형 몬스터를 처치한 것이 바로 폐하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딸랑딸랑! 너는 위대하다!
그러자 메디카의 황제는 결국 우리에게 넘어왔다.
[메디카 황제 현재 굳은 믿음 : 60]
[보상 : 메디카 황제의 신뢰도 +60%]
와, 메디카 신뢰도를 이렇게 날로 먹는다고?
메디카 신뢰도 시스템에서 마의 벽이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5%, 20%, 40%, 60%다.
우린 그 마의 벽 네 단계를 모두 뛰어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만찬이 끝났을 때쯤.
[메디카 황제의 신뢰도가 5 상승했습니다!]
[메디카 황제 현재 신뢰도 : 65%]
됐다!
60%가 마의 벽 중 가장 악독하게 설정된 것은 아마, 60%가 넘는 사람부터 황제가 ‘제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우리를 보는 황제의 표정부터가 풀려 있는 게 보였다.
만찬을 끝내고 정말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오늘은 푹 쉬게! 명령이네!’ 하며 우리를 보내준 황제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우린 여관으로 돌아왔다.
물론 푹 쉬려고 온 건 아니었다.
이제 황제의 마음을 얻었으니 뒷일을 정확히 계획해야 했다.
“바로 황제한테 말씀하실 건가요?”
신뢰도 60%부터는 황제에게 직접 알현 요청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메디카 신뢰도를 이렇게 신기한 방법으로 올리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신뢰도에 따른 변화는 달라지지 않았다.
난 시스템창에 ‘메디카 황제 알현 요청’이 떠 있는 걸 보면서 네드 님에게 물었다.
아마 지금 황제 상태이면 우리 말을 들어주긴 할 거다.
문제는 시어드 성을 갑자기 박살 내고 싶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는 거지.
역시 좀 더 신뢰도를 올려야 하나?
근데 70%부터는 진짜 올리기 힘들 텐데…….
내가 턱을 매만질 때였다.
네드 님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황제에게 직접 얻을 수 있는 신뢰는 충분히 얻은 것 같습니다. 조금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돌아간다면요?”
직접 들이대는 게 아니라?
내 말에 네드 님이 살짝 웃었다.
“예. 사람을 보내는 거죠. 시어드의 현 상태를 볼 수 있도록.”
난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차피 시어드 성에 누가 가든 바람 장벽 때문에 공격당할 텐데?
우리가 급히 시어드 성에서 벗어날 때까지도 바람 장벽은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바람 크리스탈로 만든 것은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바람 속성이 워낙 자유로운 속성이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만들어진 것을 해제하는 것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건 바람 장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마디로 누가 가든 우리처럼 공격당할 거란 소리인데…… 아.
“차라리 공격당하는 게 낫겠네요?”
난 눈을 크게 떴다. 네드 님이 날 돌아보았다.
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확신했다.
네드 님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이왕이면 황제가 보낸 사람이 공격당하면 딱이겠죠?”
문제는 괴팍한 아싸 시어드 성주에게 누가 가려고 하냐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황제에게 ‘시어드 성주가 수상합니다.’라고 대놓고 언급하기에도, 아직 신뢰도가 조금은 부족했다.
대놓고 친해지자마자 한 놈을 음해(?)하려고 하면 의심받지 않겠는가?
“그럼 사람을 보낼 수 있게 준비해 보죠.”
네드 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근데.”
난 문득 그를 보다가 생각이 났다.
“엊그제 저희가 잡은 보스가 물 속성이었잖아요?”
내 말에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였다.
“그 다음 순서로 나오는 번개 속성 보스가 시어드 성 옆에서 나오는데, 이걸 이용하는 건 어떠세요?”
내 말에 네드 님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더욱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이 사람하고 있으면 왜 유네리아가 전략 게임 같지?
* * *
네드 님은 시어드 성 근처에 곧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소문을 흘렸다.
“이번엔 시어드 성이라는군!”
“근데 이런 소식은 누가 알게 된 거지?”
“낸들 아나? 이버 신문이 먼저 냈다던데?”
“내가 이버 소속 기자인데 우린 노엔 신문사에서 먼저 들었어!”
모두가 출처를 모르지만 똑같은 소문을 알게 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출처를 특정해내기 전에, 시어드 성에는 번개 속성 보스가 뜰 테니 이쪽이 소문을 퍼뜨렸다는 걸 들킬 걱정은 없었다.
“일단 가자고!”
무엇보다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은 이미 시어드 근처로 몰려가고 있었다.
“누가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소문이 쫙 퍼졌을 땐 정확하지 않았나?”
“맞네, 맞아!”
그러면서 우르르 몰려가는 기자들은 이미 특종을 잡을 생각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로 당연히 다른 소문도 생겨났다.
“근데 시어드 성은 지금까지 황가의 연락에 여러 번 불응하지 않았소?”
“그게 설마, 시어드에서 몬스터를 막기 위해 대비하느라 그랬던 거라면…….”
덕분에 시어드 성은 잠시 재평가될 뻔했지만, 곧 시어드 근처에 도착한 기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뭐, 몬스터의 흔적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사람들이 수상하다는 듯 웅성거릴 즈음.
―쿠오오……!
시어드 성 근처에 뜨는 번개 속성 보스 타고(Lv.392)가 모습을 드러냈다.
“떴, 떴다!”
“기사님들이 가게 비켜 드려!”
기자들은 안전한 곳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두뇌를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가와 주변 병력들이 타고를 상대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들 내 성 근처에서 뭘 하는 게냐!]
그때 시어드 성주의 극대노한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시어드의 병력으로 저런 것 하나 못 처치할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그런 것 하나 처치하지 못해서 쑥대밭이 된 영지가 한둘이 아니었다.
몰려왔던 마법사 중 하나가 마법을 써서 외쳤다.
[시어드의 병력은 물론 뛰어나오! 하지만 이번에 제국 전역에 나타나기 시작한 거대 몬스터는 지금까지의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르오!]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께서 몬스터 방비를 위해 움직이는 병력은, 몬스터 처치 후 근처 성주에게 보고해도 상관없다 하셨소!]
한 마디로 몬스터에 한해서는 병사를 어떻게 움직이든 선처리 후보고라는 이야기였다.
네 땅 내 땅에 예민한 성주들은 처음엔 날뛰었지만, 몬스터의 파워를 보고 입을 다문 사항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초절정 아싸 시어드 성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막을 테니 방해하지 말고 비키시오! 그러지 않으면 성의 포탑이 쏜 공격이 그대들을 해칠지도 모르겠으니!]
시어드 성주는 그렇게 으름장을 놓으며 사람들을 쫓아냈다.
“저럴 줄 알았다니까.”
우린 먼 곳의 천상계 고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네드 님도 천천히 물러가는 병사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귀족가의 사병이니 분명 제 주인에게 이번 상황을 보고할 겁니다.”
“그럼 당연히 시어드 성주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는 자가 나오겠고요.”
그리고 그 기류는 당연히 귀족들의 신문에 실릴 터다.
* * *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우리는 귀족가의 신문에서 원하던 기사를 찾았다.
[시어드 성주,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
[시어드 성 근처에 나타난 괴수…… “크기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라”]
[근처 성주들 “불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로]
시어드 성 근처에 나타난 타고를 시어드가 막지 못하면, 피해를 보는 건 근처 성이다.
당연히 그들이 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이 연회에 참석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드 님이 마지막 신문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슬슬 시어드 성을 박살 낼 기회가 우리 손안으로 굴러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