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12)
  • <89화>

    “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드 님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원래 이런 쪽으로 머리 굴리는 건 안 좋아했지만, 네드 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알아서 생각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난 네드 님이 한쪽에 쌓아 놓은 평민들의 신문을 가리켰다.

    “평민들을 실제로 구하는 일은 적고, 신문 기사만 내고 있으니까 평민들만 보는 신문에는 원색적인 비난이 많아지는 거겠죠?”

    “네.”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 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메디카가 역사가 오래된 국가이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러한 대립 구도가 오래되었다면, 귀족가에 인맥이 없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눈에 띄기 힘들 겁니다.”

    네드 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이런 특수상황을 제외하면요.”

    몬스터가 나타나고 있고 지배층이 그 몬스터들을 제대로 잡지 못해 ‘평민을 구해 주는 진정한 기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지금.

    지금이 적기라는 이야기였다.

    “그럼 가볼까요?”

    네드 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바로 잡았다.

    메인 퀘스트만 맨날 졸졸 따라가다가 이렇게 알아서 퀘스트를 만들어서(?) 진행하는 건 또 새로운 기분이었다.

    * * *

    메디카에서 가장 어려운 몬스터라고 해봐야 레벨 397의 필드보스가 전부였다.

    그래서 우리는 300대의 필드보스 따위는 한 방에 잡을 수 있다는 걸 숨기기 위해 애써야 했다.

    처음부터 너무 말도 안 되게 강한 사람이 나타나서 필드보스를 툭툭 쳐서 쓰러뜨리면, 화제가 되기 힘드니까.

    원래 사람들은 역경 속에서 태어난 영웅을 좋아하는 법 아니겠는가?

    “으아아아!”

    “이상한 몬스터가 나타났어!”

    “얼마 전부터 들판에 이상한 징조가 있었다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도망치는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모두 진군!”

    귀족가에 소속된 기사들도 열을 맞추어 뛰어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냐고?

    [메디카 귀족가 기사 / Lv. 220]

    필드보스를 상대하기에는 레벨이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포악한 몬스터에게 쓸려나가는’ 역할인 셈이었다.

    괜찮아, 애들아! 우리가 구해 줄게!

    “…….”

    “…….”

    나와 네드 님은 짧게 시선을 교환한 뒤,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들과 진군하는 기사들이 뒤섞인 아비규환의 대로에서 빠져나와, 빠르게 보스 필드로 향했다.

    [필드 보스 ‘디칸트(Lv. 395)’의 영역에 진입합니다.]

    알림창이 뜨자마자 들리는 건 우렁찬 기사의 목소리였다.

    “쳐라!”

    [메디카 귀족가 기사단장 / Lv. 300]

    그렇게 외치는 건 그나마 레벨 300대인 귀족가의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질린 얼굴로 진격만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따라 레벨 220의 불쌍한 기사들은 사지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고, 메디카 망하겠네!

    망하려면 우리 나가고 망해!

    메인퀘스트에 변수 생긴다고!

    [네드 ‘물 속성 스킬 조합’ 75%]

    그때 파티창에 게이지바가 차오르는 게 보였다.

    애들아, 좀만 버텨!

    어차피 레벨 390대 필드보스에게 풀파워로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힘 조절을 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신 네드 님이 물 속성 스킬 조합으로 감싼 마법 창을 집어던졌다.

    ―쓔웅!

    너너너무 세게 던지신 것 같은데?

    네드 님도 달려오던 힘 그대로 던지신 거라, 좀 세게 날아간 걸 뒤늦게 알아차리신 듯했다.

    그리고.

    ―쿠콰콰쾅!

    레벨 500의 화려한 데미지가 필드보스의 머리 위를 수놓았다.

    [-□!]

    오류뎀 떴잖아!

    다행인 건 NPC들은 데미지를 숫자로 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크오오오오옷!

    그리고 오류뎀을 맞은 필드보스는 당연히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필드보스 ‘디칸트(Lv.395)’를 처치했습니다!]

    [필드보스존이 해제됩니다.]

    [‘메디카 : 서쪽 평야’에 진입합니다.]

    알림창이 우르르 떴다.

    “어, 또 그 모험가들이다!”

    “금빛 로브의 구원자들이야!”

    “오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딱 발견할 시간 정도만 두고, 재빨리 자리에서 도망쳤다.

    이번엔 너무 세게 친 것 같지만, 처음 물리친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뭐!

    이 짓을 아홉 번째 하고 있었지만 저 ‘금빛 로브의 구원자’라는 낯간지러운 칭호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얼굴은 까면 여관 NPC나 신문을 파는 NPC들이 알아볼 테니까 가려야 하고, 눈에 띄기는 해야 해서 선택한 게 바로 내 아이템창에 처박혀 있던 금색 로브였다.

    근데 금색 로브의 구원자는 너무하잖아! 으아악!

    그렇게 우리가 이런 짓을 열두 번쯤 했을 때.

    [메디카의 ‘구원자’들?]

    신문에 하나둘씩 보이던 기사가 점점 많아지더니, 이내는 메디카 수도의 신문 대부분의 1면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골칫거리’ 해결하는 영웅들의 정체는?!]

    그건 평민 신문이나 지배층의 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수도 근처의 거대 몬스터들을 해결하는 ‘해결사’들이 나타나 화제다.

    이들은 금빛 로브를 쓴 남녀 한 쌍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몬스터를 해치우자마자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에 있던 모 백작가의 기사는 “저런 종류의 투척기를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라며 “저들은 대륙 남부에서 올라온 유목민 출신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다들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우리는 며칠 사이에 대륙 남부 유목민부터 황가의 잃어버린 아이나 귀족가의 사생아 같은 신분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심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맞는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메디카의 신흥 영웅’…… 모험가일 가능성 농후]

    저건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니냐?

    하지만 정말 맞는 말이 저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상착의도 신문에 슬금슬금 실리기 시작했다.

    [기존 남녀 한 쌍으로 알려져 있던 영웅들은 한 명은 창, 한 명은 한손검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한손검을 쓰는 여자의 로브 끝에서 붉은 머리칼을 봤다는 목격자가 여럿 있어 ‘붉은 머리의 기사’들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머리카락이 보였나 보네요.”

    더 단단히 묶을 걸 그랬나?

    물론 천천히 밝힐 생각이었으니 굳이 감추진 않았던 것이었다.

    네드 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감출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정체가 밝혀지는, 그런 상황을 원한 것이니까요.”

    네드 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이번 일을 하면서 안 사실인데, 네드 님은 의외로 음험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일에 익숙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네드 님은 신문에서 정보를 읽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문이며 대중이 어떻게 반응하고 무엇에 환호하는지, 무엇에 주로 반응하는지를 꿰고 있는 듯했다.

    “혹시 무슨 대기업 전략대응팀 뭐 이런 데서 일하세요?”

    내 말에 네드 님은 낮게 웃었다.

    “관련이 없지는 않습니다.”

    진짜요?? 난 눈이 튀어 나갈 뻔했다.

    그거 영화에서 나오는 거 아니었어?

    그러는 사이 우리가 잡은 필드 보스의 수는 20마리를 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나는 슬슬 걱정이 들었다.

    “근데 이거 필드보스만 골라서 잡으면 대규모 필드보스전이 열릴 거예요.”

    내 말에 네드 님은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건 못 잡을까 두려워하는 뉴비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마침 잘 됐다’라는 표정에 가까웠다.

    그 얼굴에 문득 장난기가 생긴 난 이렇게 말했다.

    “어려울 수도 있어요.”

    내 말에 네드 님이 웃었다.

    “북쪽 군도도 아니고 메디카인데, 유니 님이 못 잡는 몬스터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 말에는 굳은 믿음이 서려 있었다.

    오…….

    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시면 저는……!

    “20마리 이상 잡아서 모인 기운으로 만들어진 보스가 397짜리 보스 카디악인데 얘는 공격은 전부 다 회피하고 공격은 1초당 3만이 다는 데다가 독뎀까지 추가로 붙어 있거든요? 하지만 이러면 절대 깰 수 없으니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지친다는―”

    아아아니! 흥분하자 머릿속에 있던 TMI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난 재빨리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한두 번 잡아본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난 네드 님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네드 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 가지지 마세요!

    비록 안 나온 보스 빼고 패턴 다 알고 있지만 이렇게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시면 다시 한번 암기하게 된다고요!

    “그럼 그 보스 몬스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네드 님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 전에 했던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영웅은 난세에 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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