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일단 내 계획에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이 있었다.
먼저 저 시어드 성이 일반인이 사는 곳이라는 점.
이게 PC 버전이면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성의 일반인들은 마치 필드 몬스터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긴 안타깝게도 PC 버전이 아니라 게임 세계였다.
몬스터는 몰라도 NPC가 리젠이 될 거라는 확신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성의 일반인 NPC를 죽였다간 ‘학살자’나 ‘파괴자’ 같은 칭호가 붙을지도 몰랐다.
저런 칭호를 가지고 있으면 시어드 성뿐만이 아니라 다른 데에서도 입장을 거절당하게 된다.
[제목 : ‘파괴자’ 파개한다 입장.jpg
글쓴이 : 파개한다
내용 : (장비 내구도 0 스크린샷.jpg)
들여보내주는 성이 없어서 수리가 안된다 질문받는다]
[(댓글)코인떡락중 : 수리스킬 안배움?
└파개한다 : 그런 나약한 스킬은 배우지 않는다
└코인떡락중 : 이거 완전 컨셉에 잡아먹힌 새X네]
그럼 파개한다 꼴이 나는 것이다.
결국 저놈은 여러 가지 봉사와 기부와 갖은 노력 끝에 간신히 칭호를 벗어던지고 유네리아의 NPC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럼 뭐하냐, 접었는데?
“…….”
잠시 그놈을 생각하던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안 접고 과금했다가 이딴 세계에 들어올 거였으면, 저놈처럼 그냥 접고 갓생사는 것이 답이 아니었을까요?
아아아니야!
난 몰아치려는 현실 자각 타임을 애써 떨쳐냈다.
아무튼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잡는 건 곤란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시어드 성주가 머무는 곳이 일반인이 사는 구역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는 점이군요.”
그때 네드 님이 말했다.
네드 님의 손에는 네드 님이 어디에선가 구해 왔다는 시어드 성의 지도가 있었다.
[★시어드 성 관광지도★
♪파워업 수련은 시어드와 함께♬]
관광 지도는 왜 가져오셨냐고 물었더니 네드 님은 간단하게 답했다.
‘관광 지도도 결국 지도이니까요.’
그러면서 네드 님이 지도 위에서 짚은 건 시어드 저택과 민가의 위치였다.
시어드 성주는 약한 것들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기가 막히는 사고방식을 가진 덕에, 정말 평민들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어드 성을 공격하려고 지도를 본 건 처음이라, 자세히 보니 새로운 점이 보였다.
“이 정도 거리면 그냥 대규모 마법 날리고 성 안쪽으로만 여파 안 가게 하면 되겠는데요?”
내 말에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도…….”
네드 님은 아기자기하게 이것저것 그려져 있는 시어드 성의 관광지도 위에 펜으로 선을 그었다.
정확히 시어드 저택 주변만 감싸는 원 모양의 선이었다.
“파괴할 수 있는 범위는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성의 구조를 생각해 볼 때 이 이상으로 파괴범위가 넓어지면 민간인 피해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난 게임하면서 잠깐잠깐 봤던 시어드 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가끔 시어드 근처에서 몬스터를 잡아야 할 때가 있어서, 성벽 근처의 시설물 구조는 외우고 있는 편이었다.
“오…….”
그리고 지도에 따르면 시어드 성의 모습은 PC 버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 기억에도 이 이상으로 부수면 높이 솟은 첨탑에 파괴의 여파가 닿으면서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이걸 잠깐 보고 알았다고?
그것도 공격당하면서?
놀라운 눈썰미였다.
“그럼 파괴 범위도 정했고. 이제 실행하기만 하면 되겠네요.”
네드 님은 내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뭔가 좀 걸리는 게 있는 모습이었다.
“뭔가 신경 쓰이세요?”
내 말에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게요?”
내 말에 네드 님이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부술 범위를 최소화한다고 해도 분명히 영주의 저택을 공격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퀘스트를 진행하는 데에 문제는 없을지 염려됩니다.”
뭐든 주의 깊게 보시는 네드 님다웠다.
하지만 난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다른 덴 몰라도 시어드 성은 괜찮아요.”
부순 놈들이 애초에 한둘도 아니었다.
게다가.
“시어드 저택에는 특별한 퀘스트나 기능이 없거든요.”
난 눈을 찡긋했다. 안심하라구!
“만약에 생겼다고 해도 이벤트존 통해서 안 부서진 시어드 저택으로 따로 진입할 수도 있어요.”
이게 사람들이 파개한다도 아닌 주제에 시어드 성을 마음껏 박살 낸 이유였다.
내 말에 네드 님은 조금 안심한 듯했다.
“남부 숲처럼 중요한 곳도 아니라서 괜찮아요!”
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리고 간신히 뒷말을 삼켰다.
이 맛에 게임하죠!
괜히 옛날에 바탕화면 부수기 같은 플래시게임이 유행했던 게 아니라니까?
아, 요즘 친구들은 이런 거 모르나?
아무튼 사람에겐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이 있다고!
그리고 그 충동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난 놓칠 생각이 없었다.
* * *
물론 시어드는 메디카의 성이니, 박살 내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좀 더 있었다.
먼저 메디카 황성에 어떻게든 허가를 받는 것이었다.
“사실 이게 가장 어렵거든요.”
아무리 내가 NPC 구워삶는 데에 익숙한 유네리아 유저라고 해도, 그쪽 전문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난 대화보다는 검으로 다져 주는 쪽이 편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메디카 황성은 외부인에게 배타적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도 어떻게든 황제를 구워삶아서 시어드 저택을 박살 낼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보통 메인 퀘스트를 시어드 성까지 끌고 온 사람들은 메디카 황성의 신뢰도가 높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 나서 ‘폭발물 사고’ 내지는 아무튼 몬스터 사고 같은 것으로 시어드 저택의 일을 처리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뢰도가 높으면 황성에서 NPC들이 조사를 나와서 추궁하더라도, 유저의 말을 믿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메디카와 적대 국가인 알라반인이 함께 있는 파티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나나 네드 님이나 메디카 황실 신뢰도 같은 건 올린 적도 없었다.
시어드 성을 잘못 건드리면 의심받기 딱 좋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황실 신뢰도를 올려야 하는데…….”
알라반 왕실 신뢰도 시스템이 그냥 커피라면 이쪽은 TXP라고 할 수 있겠다.
외지인에게 더욱 배타적인 메디카 황실 NPC들은 좀처럼 마음을 여는 법이 없었다.
“음……, 유니 님.”
내가 고민할 때 네드 님이 나를 불렀다.
우리는 엘데의 등에 탄 채 일단 메디카 황성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네?”
네드 님은 스탯이 높아서 그런지 흔들리는 엘데의 등 위에서도 노트에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달리는 지하철에서 화장은 해 봤지만 저건 또 새로운 스킬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일단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확실히 정리해 보자면.”
네드 님이 손을 펴 보였다.
난 그 손을 보면서 생각했다.
필요한 거?
음, 힘과 피와 용기요?
일단 부수는 데에는 그게 필요했다.
그리고 메디카 황성 신뢰도를 올리려면…….
난 유네리아를 오래한 탓에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는 황성 신뢰도 올리기용 재료들을 생각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먼저 시어드 성을 부수고도 메디카에서 안 좋은 인식이 박히지 않는 방법이군요.”
하지만 네드 님은 생각보다 더 진지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죠.”
어떻게 성을 박살 내고도 파괴자 소리를 안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답은 당연히 메디카 황성에 있다.
내가 입을 열려는 때 네드 님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시어드 성주가 황가에 안 좋은 목적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황가에 들어가면, 더욱 좋겠지요?”
그 말에 난 멈칫했다.
“그……렇죠?”
그야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네드 님의 눈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 있다는 듯이.
게다가 원래 이런 사람이긴 했지만, 이 주제에는 유독 정리가 깔끔한 느낌이었다.
네드 님은 노트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혹시 이번 일.”
그의 입술이 짧게 열렸다가 닫혔다.
그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게 맡겨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그렇게 말하는 네드 님의 눈은 유네리아의 낯선 시스템을 볼 때와는 달리 묘한 빛까지 감돌고 있었다.
“이런 일에는 다소 익숙해서요.”
네드 님이 빙그레 웃었다.
익……숙?
난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일단 다 때려 부수는 것보단 나을 거다.
“좋아요.”
네드 님이 이렇게 자신 있어 보이는 건 또 처음이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황성 시스템이 이상하게 바뀌어 있거나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릴 것 같으면, 그냥 때려 부술 생각이었다.
물론 그건 최후의 수단이었으니, 지금은 네드 님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네드 님의 표정이 조금 가벼워졌다.
물론 그것도 잠깐, 금세 진중한 표정이 된 네드 님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황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엘데의 등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천천히 날고 있던 엘데가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메디카 황성 근처에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정중한 부탁에 엘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일단 황제에 대해 소문을 들어 보려면 메디카 황성 주변이 좋긴 하……지……?
“?”
잠깐만.
난 이상함을 느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엘데 내 용 아니냐?
왜 딴 사람 명령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듣지?
하지만 네드 님의 명령은 나조차도 뒤늦게 이상함을 알아차렸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묘한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다.
[‘메디카 : 수도 외곽’ 지역에 진입합니다.]
내가 기묘함을 느끼는 사이 우리는 메디카의 황성 주변으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