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12)
  • <86화>

    보통 X 같다고 생각되는 보스몹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

    일단 기믹이 복잡하다.

    파훼하지 못하면 무지막지한 데미지를 다단 히트로 박아 버리는 놈들.

    그건 잡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그다음으로는 딜컷을 해야 하는 보스몹들.

    보통 HP를 빠르게 깎으면 기믹을 패스하기 마련이지만 이런 놈들은 특정 HP에서 딜을 멈추지 않으면 전멸기가 나온다.

    리리스가 둘 중 어느 쪽일지는 몰라도 메인 스토리 마지막 보스 몬스터인 만큼 팀장이 성심성의껏 엿같이 만들어 놨을 것이다.

    그러니 아마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X 같아지려면?

    바로 맵도 엿같이 만들어 놓으면 된다!

    여기처럼! 이렇게!

    “이야…….”

    난 감탄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그냥 한 대도 맞지 말고 깨라는 거지?

    내가 올려다본 천장은 온통 길고 거대한 고드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거까지야 피하면 된다고 치자.

    문제는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구멍이었다.

    거기선 마치 얼음의 왕좌에 스포트라이트라도 비추는 것처럼 환한 달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메인스토리 다 깨면 그냥 스크린샷 명소가 되겠지만 그 전에는 저것 자체가 기믹이 된다.

    “리리스 하늘 속성이던데.”

    거기다가 용의 피까지 먹었으니까 하늘 속성 보정이 장난 아니게 들어갈 거란 말이야?

    거기다가 저렇게 달빛이나 햇빛을 몰아 받을 수 있는 영역에 서면 하늘 속성 버프가 또 생겨난다.

    스치면 사망이라는 소리다.

    “어지간하면 여기서 안 싸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난 그렇게 결론 내렸다.

    하지만…… 보스몹이 내가 원하는 곳에 뜨면 그게 게임이겠습니까?

    내가 아련하게 웃을 때였다.

    “천장의 고드름 때문입니까?”

    네드 님이 그렇게 물으면서 다가왔다. 난 고개를 저었다.

    “고드름 떨어지는 것도 아프긴 할 텐데……. 그거보다 천장이 문제예요.”

    난 하늘의 공동을 가리켰다.

    “저기서 빛 내려오는 걸 받으면 리리스가 더 세질 것 같거든요.”

    “음…….”

    네드 님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막을 순 없습니까?”

    “아마 메인 스토리 진행상 막을 수 있는 경우도 있을 텐데.”

    난 볼을 긁적였다.

    잠깐만. 여긴 PC 버전이 아니잖아?

    “나중에 보스 잡기 전에 천장부터 막고 와야겠네요.”

    그럼 조명이 좀 구려지긴 하겠지만 하늘 속성 데미지 보너스가 없는 것만으로도 해피해지지 않을까요?

    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엘데와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요. 오래 있다가 집주인 마주치면 큰일이니까.”

    돌아볼 건 다 돌아보았으니 나가도 될 터였다.

    “그러죠.”

    네드 님이 빙그레 웃었다.

    난 그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멈칫해 버렸다.

    ……분명 전처럼 웃는 게 맞는데, 왜 이렇게 전과 다르게 보이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 * *

    크리스탈을 담을 주머니.

    비록 담을 물건이 좀 고오급 물건이긴 하지만 특별한 주머니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주머니 추가 재료]

    원래는 주머니를 꾸미는 데에 쓰는 이 추가 재료 란에 500레벨 이상의 재료만 넣으면 그만이니까.

    [주머니(Lv. 514)]

    그럼 이렇게 주머니가 재료의 레벨에 따라 바뀌게 되니까.

    유네리아는 음식에도 레벨 제한이 있는 갓겜답게 주머니도 레벨 제한이 있어서, 그 레벨보다 낮은 물건만 담을 수 있는 식이었다.

    [불 속성 크리스탈]

    그리고 우리의 아이템창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이 크리스탈은 메인 퀘스트 아이템이라 레벨이 뜨진 않았지만, 500레벨로 취급되는 물건이었다.

    “이걸 여기 담으면……!”

    난 네드 님이 간단하게 만들어낸 주머니에 불 속성 크리스탈을 쏙 집어넣었다.

    뱉는 거 아니겠지? 뱉지 마라! 뱉으면 안 돼!

    주머니에 물건 넣는 게 이렇게 두근거릴 일인가?

    어이가 없는 것도 잠깐, 곧 주머니가 반짝거렸다.

    [주머니에 불 속성 크리스탈을 담았습니다.]

    “나이스!”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정상적으로 담긴 건가요?”

    네드 님이 주머니를 살폈다. 겉보기에는 그냥 주머니가 담겨서 반짝반짝 빛나는 주머니에 불과해서 제대로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신 듯했다.

    “네. 정확히는 바람 속성 크리스탈 영역에 가 봐야 알겠지만,”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이 주머니 별명이 이래 봬도 만능 주머니거든요.”

    유네리아에는 ‘뭔가 잘못된 것 같으면 일단 주머니에 넣어 봐라’라는 조언이 심심찮게 돌아다녔다.

    만들기도 쉬운 아이템을 왜 이렇게 만능으로 만들어 놨는지는 몰라도, 어지간한 효과는 다 주머니가 차단시켜 줬던 것이다.

    그게 가능한 건 주머니에 레벨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주머니’ 아이템이 레벨을 가지게 된 건 유저분들이 더 다양한 방법으로 주머니를 사용해 주시길 바라서였습니다.]

    주머니 제작을 만들었던 팀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이놈들은 처음 주머니를 만들 수 있는 ‘손재주’ 스킬을 패치할 때 분명 이렇게 공지를 올렸다.

    [레벨 5에 만들 수 있는 주머니에 ‘꾸미기 재료’의 아이템 레벨이 그대로 적용되는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차주 정기점검으로 패치될 예정입니다.]

    오류라며??? 오류랬잖아???

    요컨대 주머니 레벨이 꾸미기 재료를 따라가는 건 기획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 공지가 올라오기 전부터 이미 주머니는 장안의 화제였다.

    [주머니에 귀속템 담으면 귀속풀림]

    [주머니째 거래 가능ㅋㅋㅋㅋㅋㅋㅋ주머니 레벨만 높으면 됨]

    [레벨주머니 패치후엔 희귀템되는거지? 만렙주머니 만들어서 존버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주머니코인 어서오고]

    당시에는 만렙이 400이었고, 400레벨 보스가 드랍하는 아이템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가 된 지 오래였다.

    덕분에 시중에는 400레벨 만렙 주머니가 돌아다니면서 온갖 아이템의 귀속을 풀기 시작했다.

    [5분 후 긴급 점검이 시작됩니다.]

    결국 귀속템이 거래되는 꼴은 볼 수 없었는지 긴급점검으로 금세 막혀 버렸지만, 이미 주머니코인(?)을 탄 유저들이 헤비 과금 유저임을 인식했는지 결국 유네리아는 공지를 슬쩍 수정했다.

    원래 주머니에 레벨이 달리는 게 기획 의도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 결과 주머니는 이런 메인 퀘스트 아이템부터 온갖 아이템들을 다 넣었다 빼 보는 만능 주머니가 되어 버렸다.

    물론 전에는 500레벨 이상의 몬스터가 없어서 크리스탈을 넣어 볼 순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외쳐, 헤르암의 거인!

    [주머니(Lv.514)]

    네드 님은 주머니 네 개를 더 만들어냈다. 그리고 난 그 옆에서 크리스탈을 하나씩 담았다.

    우리 크리스탈 친구들 자가격리 타임이에요.

    “이제 공명 안 할 거예요.”

    난 깔끔하게 주머니 입구를 묶어 인벤토리 구석에 잘 박아 두었다.

    “과연 이 주머니로 막을 수 있을지…….”

    네드 님은 좀 고민하는 얼굴이었지만 난 주머니의 위대함을 알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시어드 성’ 지역에 진입합니다.]

    다시 우리는 시어드 성 영역을 밟았다.

    [현재 ‘시어드 성’과 적대 관계 유지 중입니다.]

    그리고 익숙한 알림 메시지가 떴다.

    “일단 적대 관계니까 정문으론 못 들어갈 것 같고, 하늘 통해서 들어가든지 담을 넘든지 해야겠네요.”

    내가 그렇게 고민할 때였다.

    [바람 크리스탈의 영향권에 진입했습니다.]

    문제의 알림 메시지가 떴다. 전에는 크리스탈이 공명한다면서 시간초가 떴지만.

    [……]

    이번엔 조용했다. 나이스!

    네드 님의 표정도 밝아졌다. 내심 걱정을 많이 하신 듯했다.

    “바람 크리스탈 담을 주머니도 미리 만들어 뒀으니까.”

    난 인벤토리에서 빈 주머니를 하나 꺼내 네드 님에게 흔들어 보였다.

    “이제 크리스탈만 얻으면 돼요!”

    얻고 중앙 호수 가서 박살 낸 다음 유네리아 운영팀도 박살 내러 가면 된다!

    물론 얼음의 왕좌가 있는 걸 보면 그 중간 어디에서 리리스가 틀림없이 방해하겠지만.

    리리스 따위가 유네리아 운영팀에 깽판을 치고 싶은 내 마음을 막을 순 없었다.

    ―그럼 하늘길을 통할 건가?

    엘데가 물었다.

    “음…….”

    난 그 말에 점차 가까워지는 시어드 성을 내려다보았다.

    엘데가 크고 눈에 띄니까 시어드 성 한가운데에 착지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럼 주변 건물이 죄다 박살이 날 테니까.

    그럼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올 거고, 크리스탈 찾기는 더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다.

    “높이 날면서 최대한 경계가 얕은 곳을 찾아보자.”

    내 말에 엘데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조금 고도를 낮춘 순간.

    [시어드의 경비체계가 ‘엘데’를 인식합니다!]

    “?”

    뭐가 뭘 인식해? 당황할 틈도 없이 우리 옆으로 뭐가 쌩 지나갔다.

    ―쌔액!

    그건 눈으로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창……이 아니라 화살이었다!

    “아니 뭔 화살이 저렇게 커?”

    경악하는 틈에 화살 두어 개가 더 파공음을 내며 엘데를 스쳐 지나갔다.

    ―인간들이 거대한 석궁을 쏘고 있군.

    “아니, 이렇게 높이 나는데 보인다고?”

    우리 눈에는 성이 거의 손바닥만 해 보였다.

    그럼 성보다 훨씬 작은 엘데는 더 작게 보일 텐데, 이걸 발견해서 화살을 쏜다고?

    “일단 물러나는 게 좋겠습니다.”

    네드 님도 화살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시어드의 경비체계(Lv.2)가 발동합니다!]

    지금까진 레벨 1이었냐!

    알림창에 경악할 틈도 없이 아까보다 배는 많은 화살이 쏘아져 올라왔다.

    “일단 돌아가자!”

    이러다가 엘데꼬치 되겠어!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엘데가 바로 방향을 틀었다.

    [네드가 ‘견고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네드가 ‘역풍’ 스킬을 사용합니다.]

    ―태앵!

    무형의 보호막과 화살이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그 화살은 엘데의 날개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살벌하네,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이렇게 하늘 경계가 까다로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러면 차라리 지하를 찾아봐야 하나?

    “시어드 근처에 지하 통로가 있던가……?”

    에이리 님이 또 비밀통로 찾는 데에 맛 들인 적이 있어서 여러 군데 쑤시고 다녀 봤지만, 내가 알기로 시어드에는 비밀통로가 없었다.

    아니, 딱 하나 있긴 했다.

    ‘시어드 성주 성깔이 더러워서 없나 봐요. 하나 있긴 한데 성벽보다 거기에 경비병이 더 많더라고요.’

    ……에이리 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냥 거긴 시어드 성주의 덫에 불과했지만.

    [‘엔티카 평야’ 지역에 진입합니다.]

    엔티카 평야면 날아온 방향이랑 좀 다른데?

    아무래도 막 도망쳐 나오느라 방향을 잡을 틈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음…….”

    난 고민에 빠졌다.

    분명 처음 시어드 성 공략 계획은 성주한테 약한 척 보호받는 척 알랑거리다가 크리스탈 위치를 알아내면 뽑아내고 튀는 거였다.

    그런데 적대 관계라고 하늘도 못 날게 하네?

    ―아까 화살에 바람의 힘이 묻어 있더군.

    그때 엘데가 말했다.

    “바람 속성 마법이라도 쓰나?”

    시어드 성 인간 마법사들이면 쓸 수도 있……지가 아니라!

    ―팍!

    난 나도 모르게 엘데 등짝을 두 손으로 내리쳤다.

    “아!”

    알았다! 화살이 말도 안 되게 살벌한 파워로 쏘아 올려진 이유를!

    “바람 크리스탈을 공격 용도로 쓰고 있는 거예요!”

    실화냐! 난 머리를 싸맸다.

    “분명 하늘로 날아 들어가려고 했으면 바람 장벽 같은 것도 있었을 거예요.”

    원래 스토리에선 시어드 성주가 소중하답시고 크리스탈을 땅 밑에 묻어두는 바람에, 나중에나 발견하는 바람 장벽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병사들이 사용하는 거대한 석궁에까지 바람 속성을 묻힐 정도라면?

    바뀐 메인 스토리에선 아무래도 시어드 성주가 좀 더 미쳐 있는 모양이었다.

    “대놓고 크리스탈 쓰나 본데…….”

    이러면 날아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한 것은 물론 지하 통로가 있어도 사용하기 곤란해진다.

    내가 이전 메인 스토리에서 본 바람 장벽을 생각해 보면, 장벽은 땅이고 하늘이고 가리지 않고 둥글게 시어드 성을 감싸고 있을 테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결론 내렸을 때였다.

    “으음, 제가…….”

    네드 님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것 같군요.”

    그 말에 난 그를 돌아보았다.

    “시어드 성주랑 적대 관계 된 거요?”

    “예.”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뭐 누가 갑자기 자기 부하 되라고 하는데 냅다 오케이하겠어요.”

    난 손을 내저었다.

    실수라기보단 게임을 X같이 만들어 놓은 놈들이 잘못인 거지.

    “그리고 우리한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요.”

    난 시원하게 말했다.

    시어드 퀘스트를 깨는 데에는 원래 전통적인 방법이 있지, 음음.

    “?”

    내 자신 있는 미소에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자, 생각해 보세요.”

    난 시어드 성 쪽을 가리켰다.

    “우린 최대한 평화롭게 진입하려고 했죠. 성주를 때려잡은 것도 아닌데 적대 관계 설정되는 바람에 정식 절차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늘로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그렇지만 우린 들어가서 바람 크리스탈을 얻어야 한다.

    “다 안 되면 어떡하겠어요.”

    난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이렇게 그놈 같은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전에 시어드 메인 퀘스트 깰 때는, 남들이 다 시어드 박살 내는 사이 ‘난 문명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어드 성벽 한쪽도 안 부수고 깼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못 참는다!

    “어차피 여긴 주요 NPC가 없거든요?”

    남쪽 숲처럼 우리가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인즉슨.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박살 냅시다.”

    “예?”

    내가 이렇게 파개한다 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네드 님이 멈칫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최후통첩 날리고 덤비면 삭제하죠. 지도에서.”

    내가 아래를 가리켰다.

    때려 부수기 전에 들여보내 줘!

    모험가 깡패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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