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12)
  • <85화>

    “!”

    유니는 멈칫했다.

    손 안에서 간지럽게 스치던 속눈썹이 움직임을 멎었다.

    그리고.

    “……!”

    강이현은 그녀의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어때요?”

    그는 밀어붙일 때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살짝 입을 벌린 유니가 당황했을 때.

    그는 그것을 아주 잠깐 즐겼다가, 그녀의 눈을 가린 손을 풀어 주었다.

    “어…….”

    그러자 좀 당황한 것 같은 유니가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이 이상 당신에게 다가가면 당신은 너무나도 갑작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그녀의 표정을 짧은 순간 읽어낸 강이현이 웃었다.

    “음…….”

    그녀의 손부채질이 빨라졌다. 강이현은 그 모습을 보다가 웃었다.

    “좋아요.”

    그리고 답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네, 네?”

    유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어 주었다.

    “유니 님하고만 같이 할게요, 공대.”

    * * *

    “나랑만 같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네드 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뭔가 이상했다. 아니, 이상한 건 나뿐인지도 몰랐다.

    “어때요?”

    사람이…… 사람이 왜, 쓸데없는 오해를 하게 만들지?

    게임 하자는 소리로 왜 안 들리지?

    내가 순간 홧홧해진 볼을 식히려고 애쓸 때였다.

    순식간에 네드 님의 손이 거두어지고, 다시 그의 얼굴이 보였다.

    “!”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표정 관리를 못한 것 같았다.

    “어…….”

    뭐라고 하지?

    ‘나랑만 같이 있어요.’

    그 말을…… 저 말이 뭐 때문에 나온 말이었더라?

    앞뒤 맥락을 다 까먹어 버렸다.

    그 순간 네드 님이 웃었다.

    “좋아요.”

    내가 뭔가에 답이라도 한 것처럼…… 아.

    ‘제가 다음에 하는 말.’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지, 알려 주세요.’

    그런 말을 했었지.

    “음…….”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린 기분이었다. 뭐지?

    뭔가 머릿속을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울 뿐이지.

    내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을 때였다.

    네드 님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 남은 생각마저 날려 버렸다.

    “유니 님하고만 같이 할게요, 공대.”

    * * *

    그 후로 좀 오래 멍 때린 것 같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벤토리에는 네드 님이 주운 거인의 드랍템들이 들어 있었다.

    필드보스 최초 클리어 보너스를 받았으니 그걸로도 보상은 충분하지만, 원래 사람은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법.

    없는 정신에도 재빨리 인벤토리를 훑었지만 거인이 떨군 잡템을 제하면 별로 얻은 건 없는 듯했다.

    [거인의 갑옷 조각]

    [거인의 숨결]

    갑옷 조각은 그렇다 치고 숨결은 뭐냐?

    전혀 탐나지 않는 불결한 아이템을 외면하던 난 불쑥 아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나랑만 같이 있어요.’

    처음엔 네드 님이 눈을 왜 가리나 싶었다.

    그런데 눈을 가리고 그 말을 듣자니, 정말 마치 모르는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라…….

    뭔가, 너무, 묘했다.

    내가 다시 그때를 떠올릴 때였다.

    “……서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위험하지만 미리 탐사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게다가 저 뒤쪽에서는 인간이나 용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아무도 없다는 겁니까?”

    엘데와 네드 님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게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 탐사하기에는 지금이 적기라는 거지. 정말 네 말대로 그곳에 있는 게 리리스라면 말이다.

    그 말에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보였다.

    “그럼 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유니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끔뻑. 눈을 깜빡이던 난 뒤늦게 그 대화에서 내 닉네임을 캐치해 냈다.

    “네, 네?”

    네드 님은 날 보다가 옅게 웃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난 미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무슨 얘기 하고 계셨어요?”

    이렇게 지척에서 이야기를 못 들어?

    그렇게 묻는 듯이 엘데가 고개를 빼고 날 돌아보는 게 보였다.

    뭐! 팍씨!

    “얼음의 왕좌를 미리 탐사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네드 님의 온화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얼음의 왕좌를요?”

    거길? 갑자기? 아니, 하긴 가 보는 게 좋긴 할 것이다.

    메인 퀘스트 최종보스가 분명한 리리스를 언제 또 상대할지 알 수는 없지만, 얼음의 왕좌에 그녀가 머무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얼음의 왕좌에서 그녀를 대적할 가능성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맵인지 알아볼 필요는 있었다.

    “여긴 유니 님도 처음 와 보시는 곳인 것 같아서요.”

    네드 님이 말을 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데 여기서 리리스 마주칠 수도 있어요.”

    지금 상태로 만나면 털릴 텐데?

    문지기나 다름없는 헤르암의 거인이 저 정도 난이도였으니 자기 홈그라운드에 있는 최종보스 리리스는 훨씬 강력할 게 분명했다.

    저번에 항아리로 만들어 줬을 때에야, 애초에 개발팀에서 잡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었으니 정상적인 능력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방어력이 오지게 높아서 데미지가 잘 안 박혔고.

    아마 진짜 능력치는 훨씬 공격력에 치중되어 있을 것이다. HP도 엄청 높을 거고.

    지금 잡는 건 무리일 터다.

    적어도 제가 480은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랑만 같이 있어요.’

    네드 님하고만 같이 사냥하면 금방 찍을…… 듯이 아니라! 아악!

    내가 머리를 싸맸을 때였다.

    ―아무도 없다니까.

    엘데가 끼어들었다.

    마치 한 번 한 이야기 또 하게 한다는 듯 지루한 표정이었다.

    아니, 잠깐.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아까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고?

    온통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게 보여?”

    난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어떻게든 치우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세상에 다시없이 멍청한 질문이었다는 듯, 엘데가 얼굴을 구겼다.

    ―내가 용의 피를 마신 자의 기운도 못 알아볼 줄 아느냐?

    무시하지 말라는 투였다.

    난 그 말을 들으면서 뒤늦게 생각 회로를 하나씩 재가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저번에 리리스 항아리 만들 땐 못 느끼지 않았어?”

    그때! 리리스 레벨 ‘???’으로 떴을 때!

    그땐 리리스가 용의 피 마신 거 왜 몰랐냐?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더 어이없네? 왜 몰랐지?

    ―그땐 켄이라는 인간의 냄새가 너무 짙었다.

    엘데는 멈칫하더니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성능이 왔다 갔다 하는 후각이로고. 내가 놀릴 거리를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엘데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하나도 아니고, 몇 마리나 되는 용이 그렇게 피를 빼앗기고 죽어 갔을 줄은, 몰랐으니까.

    ……여기서 갑자기 아련해지면 내가 뭐가 돼?

    건수 잡았다고 재빨리 안 놀린 나, 제법 자제력 있어요…….

    난 곱게 입을 다물었다.

    ―…….

    “…….”

    그리고 엘데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그.”

    엘데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리리스 족치고 나면 다시 구름문 들어가자.”

    ―?

    엘데가 고개를 기울였다. 난 그에게 말했다.

    “관은 오동나무가 좋다고 하셨어.”

    일반적으로 용은 몬스터로 취급된다.

    조련되어서 펫 취급을 받으면 회생의 물약으로 살릴 수 있었겠지만 죽은 용들은 안타깝게도 몬스터 상태였다.

    아마 살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 장례라도 잘 치러 줘야지.

    “그죠?”

    나와 시선이 마주친 네드 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엘데는 우리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군. 용의 몸을 담으려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커다란 관이 필요할 거다.

    “만들면 되지.”

    난 그 말에 바로 답했다.

    ―너희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가성비 없는 짓’이야.

    엘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싫은 건 아닌 듯했다.

    전보다 좀 더 힘차진 날갯짓을 보다가 내가 말했다.

    “그건 괜찮아. 내가 언제 가성비 따지고 살았나.”

    원래 상위 스펙을 가진 유저일수록 데미지 1과 능력치 1에 수백만 원을 들이부을 만큼 가성비를 새까맣게 잊고 살게 된다.

    게다가.

    나와 네드 님은 동시에 말했다.

    “남는 게 돈인데, 뭐.”

    “별로 부담되는 가격은 아닐 겁니다.”

    난 왜 저 말이 제일 무섭지?

    난 슬그머니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네드 님이 옅게 웃었다.

    * * *

    [‘얼음의 왕좌’ 지역에 진입합니다.]

    얼음의 왕좌 근처에서는 엘데도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였다.

    혹시나 정말로 리리스가 튀어나올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는 후각과 시각을 총동원해 조사하고 있는 듯했다.

    ―펄럭!

    우리 역시 엘데가 얼음의 왕좌가 있는 곳 근처에서 하강할 때까지 주변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진짜 없네요.”

    리리스고 항아리고 마실이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피 냄새가 옅군. 자리를 비운 지 시간이 꽤 된 듯해.

    엘데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됐다는 건 금방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뜻.

    얼른 탐사를 마쳐야 했다.

    “일단 둘러보죠.”

    우리 앞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이글루 같은 게 있었다.

    보통 최종보스 맵은 저렇게 격리된 공간에 만들어주는 게 보통이긴 한데…….

    [보스룸 ‘얼음의 왕좌’에 진입합니다.]

    [진입에 실패하였습니다.]

    [보스 ‘네크로맨서 리리스’가 자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스룸이 일반 맵으로 전환됩니다.]

    알림창까지 뜨는 걸 보니 확실했다.

    좀 안심한 우리는 거대 이글루의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는 탑승용으로 커진 엘데가 날개를 다 펼치고 들어가도 양옆으로 자리가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맵 자체가 그만큼 넓다는 소리였다.

    그럼 싸우긴 나쁘지 않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심코 올려다본 이글루 천장을 보면서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

    맵을 만들어도 저따위로 만든단 말이지?

    역시 마지막이 제일 X 같을 줄 알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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