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12)

<84화>

―쓔웅!

뭔가 빠르게 주변을 지나가면 들린다는 ‘파공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건 이 세계에 들어온 후였다.

그리고 그 파공음은 내 주변을 스쳐 지나갈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우리는 파공음을 울리며 거인에게로 빠르게 쏘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

우리 둘 다 죽으면 네리아GM이 와 줄까요? 안 와 줄 것 같은데 그럼 우리 거인 뱃속에서 죽어 있어야 하는 걸까요? 아니지 최소한의 유저 보호 장치는 만들어 두지 않았을까요?

‘유네리아는 게임 규정상 OTP 유저 분들께만 해킹 피해 복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답니다.’

갑자기 아련한 추억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최소한의 유저 보호 장치 따위 없을 것 같다!

[공기의 흐름이 매우 빨라집니다!]

[헤르암의 거인 ‘흡수’ 98%]

곧 흡수 터진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네드의 ‘전면방어’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전면에서 들어오는 데미지 –50%(1회)]

[네드의 ‘견고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네드의 ‘하늘장벽’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공중에서 받는 데미지 및 하늘 속성 데미지 –50%(3초간 적용)]

버프가 우르르 떴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쿠콰콰콰쾅!

굉음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

이게 거인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나는 소리인가? 이게 연동운동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몸이 가벼웠다.

무엇보다 남의 몸 속인 것처럼 습하지도(?)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눈을 뜬 순간.

[헤르암의 거인을 처치하였습니다!]

“?”

난 눈을 크게 떴다.

뒤돌아보니 헤르암 거인이 데미지와 함께 아련하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29,455,873!]

데미지의 잔상도 보였다.

500레벨대 필드보스에게 박히기에는 지나치게 살벌한 데미지였다.

―스르르…….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옆에 있던 네드 님의 손에서 연하늘색이 반짝였다.

뭔가 하고 돌아보니 하늘 속성을 머금은 마법창이 없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걸…….”

잡았다고? 어떻게?

하지만 머릿속에서 상황이 정리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분명 우리는 흡수 때문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흡수 공격에 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지만 네드 님은.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엘데에게 되레 앞으로 질주하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네드 님이 손에 들고 있는 창에다가, 엘데의 속도까지 더해지면?

“오…….”

난 짧게 감탄했다.

만약 내가 이걸 공략에다가 썼으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헤르암의 거인 : 전멸기 페이즈(HP 5% 이하)

- 흡수 공격을 사용한다. 차지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흡수하는 속도가 상당하기 때문에 미리 HP를 5% 이하로 떨어뜨리기 전에 거인의 입 근처에서 벗어나 있는 걸 추천.

- 데미지에 자신이 있을 경우 거인의 흡수 공격이 캐릭터를 빨아들이는 것을 이용, 속도 보너스를 받아서 흡수 데미지 판정이 나기 전에 거인을 처치한다.

- 당연히 원거리 공격으로는 속도 보너스를 못 받으니까 속성 조합으로 떡칠한 근접거리 무기를 들고 잘 박살 내 보자.

- 흡수 게이지가 100%가 되기 전에 속도 보너스를 최대로 받은 스킬을 박으면 놀라운 데미지를 볼 수 있다.

단, 한 방이 안 날 경우 뒤짐ㅋ]

근데 이 공략을 쓰려면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흡수 스킬 데미지 판정이 100% 때 들어온다는 걸 확신하고 계셨어요?”

만일 흡수 스킬 데미지를 거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받게 되었다면?

우린 그대로 사망이었을 것이다.

“판정……이라는 용어가 정확히 게임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라도.”

하지만 네드 님은 나름 침착하게 말했다.

“씹으면서 빨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야 그렇긴 하죠.”

씹으면서, 요컨대 흡수 스킬로 빨아들이는 동안 공격하는 것처럼은 안 보였다는 소리였다.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 게 아니라 그렇네?

이게 PC 버전이라면 모를까 이 세계에 들어와 있는 이상, 실제로 보이는 것과 데미지가 들어오는 게 차이가 있을 수가 없었다.

요컨대 흡수 공격을 당해서 입 안에 들어가더라도 입천장에 부딪히든지 아무튼 어디에 부딪히지 않으면 충격은 안 들어온다는 소리다.

“오…….”

난 거듭 감탄했다.

시스템적인 데미지 판정만 생각하다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네요. 하긴, 그렇네.”

내가 거듭 뇌까렸다.

하긴 나도 버블티 쭙 빨았다가 목젖에 버블 얻어맞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헤르암의 거인에게는 이쪽이 버블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물론 이쪽은 버블이 목젖을 치다 못해 목을 뚫고 나가 버린 것 같지만.

[‘헤르암의 영역’ 지역이 개방되었습니다!]

[필드보스 ‘헤르암의 거인’ 최초 클리어 보너스 : ‘헤르암의 영역’ 일대 몬스터 보너스 경험치+30%]

[‘얼음의 왕좌’ 지역이 개방되었습니다!]

알림창이 주르륵 떴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필드보스 최초 클리어 보너스였다.

“일대 경험치 30%래요!”

대박!

난 나도 모르게 네드 님 등을 호들갑스럽게 두드렸다가 정신을 차렸다.

앗, 죄송.

하지만 들어보세요! 이 일대가 500레벨대 몬스터가 나오는 유일한 곳이라고요!

그런데 여기서 경험치 보너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난 눈을 반짝였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진짜 대박이에요!”

네드 님 만세다!

어떻게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하지?

내가 이마를 탁탁 치면서 좋아하는 동안에도 네드 님은 시종일관 침착한 얼굴이었다.

“얼음의 왕좌가 바로 그…… 음유시인이 말한 곳이겠지요?”

네드 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지금 난 음유시인이고 뭐고 반쯤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저 네드 님한테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사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X 같아진 메인 퀘스트 난이도가 암울할 법도 한데, 이 사람 덕인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최초 공략할 때마다 ‘나만 한 유저 한 명만 더 있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을 얼마나 수도 없이 해 왔던가!

트롤 안 하고 약속 잘 지키고 템도 어느 정도 되고 임기응변도 되는 사람!

그건 거의 유네리아에서 유니콘에 가까웠으므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있잖아??

“꼭…….”

난 네드 님의 손을 덥석 잡았다.

“?”

네드 님의 당황한 표정이 나를 마주했다.

하지만 난 그걸 보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내가 독점하고 말 것이다!

“나랑만 뛰어요.”

“예?”

네드 님의 표정이 좀 더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저랑만! 공대! 저랑만! 제가 다 할게! 뭐 해 드리면 돼요?!”

점점 탐난다, 당신이란 사람……!

그렇게 생각하며 네드 님의 손을 양손으로 꼬오옥 잡았을 때였다.

네드 님이 일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뗄 수 없는 표정 변화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이었다.

“정말 그래도 된다면…….”

입을 연 네드 님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된다면?

네드 님은 마치 내게 허락을 받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드 님을 속박하고 싶은 건 나였다.

가둬놓고 삼시 세끼 화려한 만찬을 함께하면서 같이 공략만 뛰고 싶다!

그렇게 생각할 때, 네드 님이 말을 이었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 난 눈을 크게 떴다.

* * *

기다리는 자만이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다.

강이현은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저랑만!”

하지만 손을 잡아 오는 유니 앞에서 그 진리 따위는 휴짓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그의 평생 동안 머릿속을 조종해 오던 온갖 계산과 진리는 다 깨져 버렸다.

그는 본능에 이끌려 실수를 저지른다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극도로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주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멈출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정말 강이현답지 않게도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사실 내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해.

하지만 당신과 달리 내 머릿속에는 새까만 생각뿐이에요.

그런 나도 좋아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강이현의 마지막 이성이 그것을 거부했다.

대신 그의 입에서 튀어 나간 것은 조바심이었다.

나를 게이머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봐 줘요.

내게 당신이 대체 불가능한 구원의 빛이듯이, 당신에게도 내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를 원해.

“제가…….”

그가 입을 열었다. 입 안이 바싹 타는 것 같았다. 갈증이 났다.

“이 다음에 하는 말.”

그래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유니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그 순수한 표정을 보면서 제 새까만 속을 아주 조금만,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그 일부만으로도 당신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지, 알려 주세요.”

“무슨 말인데요?”

유니는 무슨 말이든 해 보라는 듯이 반짝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강이현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유니의 눈을 한 손으로 가려 주었다.

“?”

그녀가 눈을 깜빡이면서, 긴 속눈썹이 손 안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는 그렇게 손 안에 그녀의 시야를 담은 채 속삭였다.

“나랑만 같이 있어요.”

그녀의 귓가에만, 작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