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12)

<81화>

“거의 다 그렸어요.”

네드 님이 말했다. 난 왠지 이 정적이 깨지는 게 아쉬웠다.

생각 없이 바닷가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난 문득 바다를 다시 돌아보았다.

―쏴아아……!

어느새 물은 내 발목을 위협하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잘 구현해 놨다.

이 정성의 1%만 리리스에게 쏟았다면 그녀가 항아리로 변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안타까운 보스의 말로를 생각하면서, 난 다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네드 님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노트는 퀘스트 필기용 노트였다.

유네리아 유저라면 모두 갖고 있는 거.

그리는 걸 보니 아예 공책을 쫙 펴서 양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채우실 생각이신 듯했다.

……근데 저게 고퀄리티 그림으로 그린다고 제대로 남나?

“너무 공들이지 마요.”

아쉬우면 그려서 느낌만 간직하라는 거였지, 이렇게 공들여서 그리실 줄은 몰랐는데.

내 말에 네드 님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노트 나중에 PC 버전에선 화질 안 좋게 나올 수도 있거든요.”

내 말에 네드 님이 멈칫했다. 난 그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가도 되나?

네드 님은 내 마음속 질문을 들은 것처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걸터앉아 있던 작은 바위 옆을 두드렸다.

“이쪽으로 오시면 보여 드릴게요.”

난 그 말에 사양 않고 쪼르르 그의 옆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마주친 그림은.

“오…….”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바다.

그 앞에 포니테일로 높이 묶은 머리를 날리고 있는 건 분명히 나였다.

그림 속의 나는 바람에 살짝 흔들린 베레모를 다시 고쳐 쓰면서, 이쪽을…… 그니까, 네드 님을 돌아보고 있었다.

“와.”

그림 전체가 조화로웠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선명하게 순간이 각인된 그림.

감동스러운 그림이었지만 감동을 받고 보니 걱정은 더해졌다.

난 네드 님을 난감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게 지금은 잘 보이는데, 나중에 PC로 볼 때 완전 이상하게 깨질 수도 있어요.”

“……저장되는 그림에 제한이 있는 겁니까?”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림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니고, 그 노트 용도가 원래 마우스로 뭐 찍찍 그리라고 있는 거라…….”

가끔 거기에 타블렛으로 신기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원되는 화질이 낮다 보니 그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이게 유네리아 초창기에 나온 책이거든요. 그때쯤 나온 NPC가 사진 찍어 준 게 어디 있을 텐데.”

[공유 인벤토리]

맞다, 나랑 네드 님 결혼했지?

인벤을 열자 네드 님이 나와 같은 인벤토리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난 네드 님 쪽 인벤토리, 즉 원래 내 인벤토리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그건 유네리아 1주년 기념으로 추가된 기념사진 NPC가 찍어준 사진이었다.

[이 순간을 남기겠어요.]

라는 감동스러운 선택지를 누르면, 유네리아답지 않은 반짝반짝 보정이 된 사진과 함께 찰칵- 하는 효과음이 울렸었다.

[인벤토리에 사진이 저장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템창에 들어온 사진을 보면?

“?”

네드 님처럼 기이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보여준 사진은 다 깨져서 네모네모 픽셀이 보이는 사진 절망편이었다.

물론 그때도 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을 거지같이 하고 다니진 않았기 때문에 나름 정갈한 제복 치마를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제복 치마인지 노보노보가 들고 있는 조개껍질인지 헷갈릴 정도로 뭉개진 사진밖에 남지 않았다.

[1주년 이벤트라며]

[이 순간을 거지같이 남겨주는 이벤트]

[아니 내가 그림판으로 그려도 이거보다 잘 그림]

당연히 당시 유네리아 게시판은 난리가 났지만 당시 신생 게임이었던 유네리아 측은 이렇게 답했다.

[서버에 저장할 수 있는 용량에 한계가 있어서요 ㅠㅠ 양해 부탁드립니다.]

양해고 뭐고 스크린샷 기능도 있는 게임에서 굳이 이딴 사진을 남기는 이벤트를 하는 바람에 날먹 이벤트라며 욕을 신나게 먹은 유네리아는,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 사진가 NPC를 삭제하지 않았다.

덕분에 본인 캐릭터의 열화판을 보고 싶은 사람만이 찾아가는 숨은 명소가 되어 버렸다.

“그게 이렇게 될 수도 있어요.”

이 게임은 어떻게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지?

난 난감한 얼굴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네드 님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뭉개지기엔 너무 아까운 그림인데??

왜 스크린샷 기능 없어??

내가 눈을 부릅뜨고 그림을 볼 때였다.

“그럼 그때 이곳에 다시 와서, 한 번 더 그리죠.”

네드 님의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나중에 다시 와요, 그럼?”

내 말에 네드 님이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차피 같이 게임 하기로 약속했으니까요.”

네드 님의 말에 내 머릿속으로 빠르게 레벨업 루트가 스쳐 지나갔다.

420 구간 넘기면 바닷가 갈 일 없는데?

“올 일 없……을 걸요?”

“?”

내 말에 네드 님이 멈칫했다.

그림 뭉개진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심각한 얼굴이었다.

아니, 바다를 다시 못 오는 게 그렇게 아쉬웠어요?

난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요, 나중에 다시 와요!”

사냥 안 해도 올 수 있지!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공략이랑 사냥에 미쳐 있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프로방랑러 에이리 님에게 풍경이 좋은 곳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헐 뭐야 유니님 남친생겼어요? 드디어연애함?비밀스러운유니의템창이드러나는건가요?’

“…….”

반응이 불 보듯 뻔하게 그려졌다. 그냥 내가 누글링 해서 찾아야겠다…….

[Level Up!]

[유니 / Lv. 413]

그사이 레벨이 하나 더 올랐다. 난 감탄했다.

“나가서는 이걸 못한다니.”

여러 지역에 설치형 스킬을 박아 놓고 한 번에 경험치를 빨아먹을 생각을 하시다니, 이건 정말 천재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쉬움에 탄식할 때였다.

네드 님이 불쑥 말했다.

“나가서도 그림은 그려드릴 수 있습니다.”

앗, 그게 아닌데.

하지만 난 슬쩍 웃었다.

“진짜요?”

그래도 사람 무안하게 할 수는 없지!

물론 그림도 좋지만!

경험치…… 경험치가 끝내줘……!

난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경험치를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 * *

“진짜요?”

강이현은 사람의 표정을 읽는 데에 익숙한 자였다.

그랬기에 유니의 그 표정이, ‘매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짓는 미소였다.

요컨대 그를 무안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

그녀는 아마 이 그림보다는 옆에 뜨는…… 경험치가 더 아쉬우셨나 보다.

그럴 수 있지.

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림보다는 그녀와 같이 있는 이 시간이 더 가치있었으니까.

“…….”

하지만 그는 속이 묘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

뒤틀리는 듯도 했다.

그녀와의 시간이 좋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함께 있을수록 극명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도 좋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조바심내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이 현실의 그녀를 기억한다고 해도 유니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감정일 것이기에.

그는 최대한 제 마음에 제동을 걸려고 했다.

하지만 자꾸만 불쑥 마음이 솟았다.

이대로, 그저 ‘친구’로 굳어지면 어떡하지?

이대로 유니 님이 원하는 ‘좋은 공대 파트너’로 끝나 버리면 어떡하지?

그는 시간이 갈수록, 그걸로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 * *

[유니 / Lv. 420]

예상대로 레벨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언컨대 이건 내 유네리아 10년 인생에 최고로…….

“날로 먹는 레벨업이었어요.”

난 감동받은 얼굴로 네드 님에게 말했다.

네드 님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즐거우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에이리 님이 들었으면 기절했겠지만 한번 불로소득 맛을 보니 끊지 못할 것 같았다.

유네리아 PC 버전에서도 이런 사냥이 가능할 방법이 없을까?

로딩 안 타는 경로에 있는 사냥터 중에 필드에 있는 사냥터로…….

내가 머리를 신나게 굴리는 사이.

―쓔우우욱!

우리 옆으로는 빠르게 구름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충분히 포만도를 채운 엘데가 빠르게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헤르암 거인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포션도 준비하고, 혹시 모르니까 비상식량도 든든하게 포만감을 채워 두고 어깨에 잘 올려 놓았다.

“바다 위니까 자연지킴이 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난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아, PC버전 아니라서 머리 위에 칭호가 안 뜨나?

[칭호를 ‘자연지킴이’로 변경합니다.]

[자연 환경에서의 데미지 10% 증가]

내 말에 네드 님 역시 상태창을 보는 것이 보였다.

그사이 난 장비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네드 님과 결혼하게 되면서 인벤토리가 공유된 덕에, 우린 익숙한(?) 서로의 아이템을 되찾을 수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아이템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네드 님은 그래도 내게 아이템을 써도 상관없다고 하셨다.

덕분에 난 아까 익숙한 내 아이템들을 꺼내려다가 말고 멈칫했었다.

‘으음.’

원래 공략할 땐 익숙한 장비를 입는 게 좋다.

장비에 따라 특수효과나 스킬 쿨타임 감소 같은 효과가 붙여서 손이 꼬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압도적인 능력치 앞에선 소용없는 소리다.

‘잠시만 제대로 살펴 볼게요.’

유네리아의 장비 중에는 본인의 능력치에 비례하여 장비 보너스 능력치를 더 주는 장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장비들은 당연히 비쌌다.

비싸다는 건?

[카렌의 갑옷+23]

……네드 님이 샀다는 소리였다.

헤르암 거인에게 향하기 전, 메디카의 은행을 털어 장비템을 빼 온 네드 님 덕에 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드 님의 템창에 들어 있던 아이템들은……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난 입을 떠억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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