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가 꺼낸 건 웬 물병이었다.
저런 절차가 있었던가?
사실 남의 결혼식 가면 유네리아의 깊은 전통대로 유저끼리 PK를 하면서 깽판을 치느라 결혼을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었다.
결혼 도우미는 내가 당황하는 사이, 물을 제 손에 부어서…… 우리한테 챱챱 뿌리기 시작했다.
“그럼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네리아의 축복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왔다 전설의 대사!
딴짓했어도 이 대사는 안다!
내가 이 대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네드’와 결혼했습니다!]
아니 여기서는 또 이름 제대로 뜨네?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게임이었다.
[네리아의 눈이 결혼을 감지했습니다!]
그리고 소름 돋는 알림도 떴다.
[‘네리아의 증표’가 파괴됩니다!]
이건 듣던 중 반가운 알람이었다.
“그럼 신랑 신부, 버진로드 따라서 퇴장하시면 됩니다.”
결혼도우미 NPC는 우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표정으로 손짓했다.
아무리 봐도 저쪽은 네리아의 신자가 분명했다.
―또각, 또각.
단돈 1,000골드에 스타일링 드레스 메이크업까지 풀세트로 해 주는 시스템은 좋았지만 난 굳이 스타일링과 메이크업까진 받지 않았다.
그거 지우려면 돈 또 받는다.
심지어 유네리아 초창기 이목구비에 맞춰져 있는 화장이라 괴기한 화장이 된다. 코에 눈화장 받고 싶은 사람만 하는 기이한 화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갈까요?”
네드 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엉터리 결혼식에서 딱 하나 제대로 된 건 네드 님밖에 없었다.
특히 에스코트하는 건 정말 익숙해 보였다.
이거까지 시스템에서 알아서 해 주진 않았을 텐데?
“사람 에스코트해 본 적 있으세요?”
결국 난 버진로드 중간까지 갔을 때 물었다.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많습니다.”
심지어 많아?? 난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많아요?”
그러자 네드 님이 멈칫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더니 별안간 변명을 시작했다.
누가 보면 진짜 결혼한 줄 알겠다.
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그렇게 찔린 것처럼 반응해요?”
[결혼식이 끝났습니다!]
이 알림창을 시작으로 우르르 알림창이 뜨기 시작했다.
[‘네드’와 ‘유니’의 인벤토리가 공유됩니다!]
[부부 스킬 ‘미니 소환’을 습득합니다!]
[미니 소환 : 부부가 함께 있었던 시간만큼 상대를 소환해, 상대의 스킬을 흉내 내는 ‘미니’를 소환한다(본체 능력치의 70%).]
좋아쓰!
미니 나왔다!
“이거랑 제 레벨이 한 420만 넘겨도 거인하고 비벼 볼 만할 것 같거든요?”
결혼식장에서 나오자 네드 님과 내 복장은 원래 입고 있던 옷으로 돌아왔다.
스킬만 없었으면 결혼한 줄도 몰랐을 것이다. 참 깔끔한 뒤처리가 아닐 수 없었다.
“싸워볼 만하다고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네드 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네? 아. 네.”
지지지나친 게임 용어는 지양하자! 너무 흥분했다! 음음.
난 스킬창을 펼쳐 보았다.
[미니 소환]
보통 많은 부부들이 이 스킬을 얻으면 미니를 소환해서, 미니의 상태창과 스킬창을 확인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기 결혼(?)이 탄로 나기도 한다.
[현 랭킹5위 박스개수 대공개.jpg]
랭킹에서는 상대방의 능력치나 인벤토리에 쌓인 상자 개수 등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상대와 자신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알아내려고 사기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결혼하면 어김없이 게시판에 그 사람의 스펙과 인벤토리가 까발려졌다.
[오 랭킹5위 박스 545개? 나랑 nn개 차이나네 오늘부터 밤샌다 ㅋㅋ]
이제 저런 글 뜨면 까발려진 사람은 울면서 밤샘 사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안 따라잡히려고.
음, 역시 결혼은 조심해야 해요^^!
물론 나랑 네드 님은 그럴 일도 없었다.
애초에 내 스킬창이 네드 님 스킬창이고, 네드 님 스킬창이 내 스킬창이었는데, 뭐.
인벤토리도 공유된다 뿐이지 바뀌어 있던 건 그대로였으니 달라질 건 하나뿐이었다.
[‘미니 소환’을 사용합니다.]
[‘네드 미니’가 소환되었습니다!]
[네드 미니 : 본체 ‘네드’ 능력치의 70%를 기본으로 가집니다.]
네드 미니를 소환하자 네드 님과 똑같이 생긴 게 내 손바닥 위에 생겨났다.
물론 손 한 뼘 크기에 2.5등신의 귀여운 비율로 변한 채였다.
“이게…… 미니군요.”
네드 님은 신기한 듯 네드 미니를 살폈다.
[네드가 ‘유니 미니’를 사용합니다.]
네드 님도 신기한지 내 미니를 소환했다. 그러자 네드 미니와 같은 크기의 유니 미니가 네드 님의 손 위에 뿅 나타났다.
「……!」
「……!」
우리 둘의 손바닥 위에 있던 미니들은 눈이 마주치더니, 별안간 서로 윙크를 하기 시작했다.
“아아아니.”
아니 이렇게 연애질한다는 얘긴 못 들어봤는데?
난 재빨리 손을 네드 님에게서 멀리 떨어뜨렸다.
「……!!」
그러자 무슨 생이별당하는 부부처럼 간절하게 손을 뻗는 게 아주 걸작이었다.
아아아니, 이런 거 디테일하게 만들 시간에 다른 거 패치나 하라고!
근데 울먹울먹하는 얼굴이 귀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유니 미니와 생이별(?)당한 네드 미니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내 손을 폭 끌어안듯 팔을 펼치고 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부비적부비적.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헉…….”
숨 막히게 귀엽다……. 내가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을 때였다.
―화르륵!
별안간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엘데가 불을 뿜었다.
[-1,621]
네드 미니의 머리 위로 귀여운 데미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네드 님이 갖고 있는 내 능력치를 생각해 보면 저건 반쯤 진심으로 불을 뿜은 것이 분명했다.
“야!”
이놈이 갑자기 주인 미니, 아니 주인 남편 미니를 패네!
이거 팀킬이야, 팀킬! 알아?
내가 엘데를 째려보자 엘데가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막장 드라마 신나게 즐길 땐 언제고 정상적인 로맨스(?)는 별로세요?
“왜 그래, 993살 동안 솔로였던 용처럼.”
내가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어깨의 엘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응? 왜 그……”
……래……?
설마? 난 그때까지도 침묵하는 엘데를 내려다보았다.
엘데는 눈을 감고 있었다.
―크르릉……!
분노의 열기로 가득 찬 콧김을 뿜으면서.
서서설마?
“야.”
설마? 난 엘데를 쿡 찔러 보았다.
―푸릉!
[‘엘데’를 액세서리에서 해제했습니다.]
아니 저 알아서 빠지는 액세서리가 어딨어!
아니 그 전에 정말 솔로였냐!
“미안하다!”
돌아와! 난 주머니를 두드려 보았지만 엘데는 주머니에서 날개만 파닥거려 댔다.
“내가 미안해!”
야, 나도 솔로라고! 993년은커녕 30년도 안 됐지만!
하지만 엘데는 듣고 싶지 않은지 주머니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우리가 8점짜리 예누스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일 때까지.
* * *
나와 네드 님, 아니 나는 본격적인 레벨업에 돌입했다.
일단 스킬 배우는 거야 미니 소환으로 해결됐다고 치고, 이제 거인한테 유효한 데미지를 박아 넣기 위해서 내 레벨을 올릴 차례였다.
그리고 현재 내 레벨은.
[유니 / Lv. 360]
적어도 420이 되어야 하는데, 보통은 빡세게 레벨업 루트만 돌려도 꽤 시일이 걸리는 구간이다.
“하필 마의 구간이네.”
내가 중얼거렸다.
유네리아 레벨업 마의 구간.
490부터 500이 일단 당연히 1위고 그다음으로 마의 구간으로 꼽히는 게 바로 360~370이다.
유저들이 가장 많이 정체되어 있어 사냥터 경쟁도 심한 데다, 무엇보다 최대 경험치를 받을 수 있는 380레벨대의 몬스터가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선 물량으로 밀어야 하는데.
“으음.”
우린 다행스럽게도 이 세계에 단둘만 있는 상태였다.
일단 사냥터 경쟁은 없을 거라는 소리.
근데 그러면 뭐 해?
우린 두 명이고, 심지어 유네리아 시스템상 네드 님이 다 때려잡으면 경험치도 못 받는데?
나 혼자 넓은 사냥터를 쏘다녀 봐야 경험치 얻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무울론 그 한계에서도 경험치 손실이 없도록 하는 것이 진정 숙달된 유네리아 유저라고 볼 수 있겠다.
“자, 보세요. 제가 생각해 봤는데 저희가 최단 루트로 레벨업을 하려면 이 루트가 가장 빠르거든요?”
난 네드 님 앞에 지도를 펼쳐 놓았다.
[‘네드’와 지도를 공유합니다.]
아니 이게 시스템창으로도 뜨네?
지도 공유 기능은 PC 버전에도 만들어주면 안 될까?
파티원에게 위치설명을 하느라 개고생했던 숱한 과거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는 사이 네드 님은 내 지도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지도 크기를 확 줄여서 알라반 쪽으로 옮긴 다음, 알라반 전체가 보이게 만들었다.
“우린 알라반 경험치 보너스 50%가 있잖아요? 제 계산상으로는 50%라면 알라반 몬스터 레벨이 좀 낮더라도 이 경험치 보너스 때문에 지금 갈 수 있는 타지역 사냥터보다 경험치 효율이 좋아요.”
원래 계산이라면 치를 떨고 싫어하지만 이런 계산은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네드 님은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제가 짚은 사냥터들은 다 맵 크기가 좁은 대신 젠 속도가 엄청 느린 곳들이에요.”
요컨대 몬스터 잡고 20분 기다려야 다시 젠 되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아주 X 같은 사냥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유네리아 유저들은 그것도 방법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젠 타임에 맞춰서 사냥을 다닐 거예요.”
이른바 ‘컨베이어벨트’라고 불리는 이 사냥 방식은 같은 던전의 1~10맵까지를 혼자 독식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평소 같으면 비매너였지만 여긴 우리 둘밖에 없는데 따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여기 리안 해저 동굴 1맵부터 10맵까지, 맵당 1분씩 걸린다고 하면 바퀴당 10분이거든요? 근데 여기 리젠타임이 23분이에요.”
자고로 고효율의 뺑이를 위해선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법.
내가 눈을 반짝일 때였다.
네드 님이 불쑥 물었다.
“이런 걸…… 외우고 다니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