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12)

<77화>

“네?”

그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KJ의 강이현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알면 놀랄 것이다.

물론 그 자신도 몰랐다.

내가 이렇게 무방비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나?

하지만 그 멍한 기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평생 해온 표정 관리도 지금은 싹 풀려 버렸다.

“실제로 저랑 사귄다고 하면 선도 안 보고 좋지 않을까요?”

유니가 눈을 반짝였다. 강이현은 간신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요컨대, 계약 연애를 하자고요?”

“그거죠!”

유니가 눈을 찡긋하며 그를 가리켜 보였다.

깔끔하다 못해 시릴 정도로 쿨한 반응에 네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지?

이렇게 쉽게?

그는 이렇게 쉽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얻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는 김에 연애하는 척 연습도 해 보는 거죠. 어차피 여기엔 저희 둘밖에 없잖아요?”

유니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부모님이 극성이라면서요. 가라로 사귀는 거 들키면 안 되잖아.”

“예?”

가라…… 뭐요?

네드가 돌아보자 유니는 뒤늦게 말을 정정했다.

“사귀는 게 거짓말이란 걸 들키면 안 되잖아요. 들키면 네드 님 또 선봐야 하고, 그럼 공대 못 가고, 그럼 난 또 고인물 파티에 던져져서…… 아아니, 여튼!”

유니가 고개를 홱홱 흔들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때요, 제 제안?”

어떻기는요.

네드는 순간 웃을 뻔했다.

제가 원하는 대로 총총 제게로 뛰어오는 다람쥐 같은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제 딴에는 보람차게도 도토리를 모아 동굴에 몰래 숨겨놓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동굴이 음험한 놈의 아가리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다람쥐 같은 사람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좋아요.”

강이현은 생각 끝에 결론 내린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호!”

유니가 신나 하는 걸 보면, 이건 네드 자신만 이득을 보는 거래는 아닌 듯했다.

* * *

유네리아의 결혼 시스템은 복잡하지 않았다.

뭐 어느 게임에서는 일주일 동안 둘이 조각상도 깎아야 하고, 어느 게임에서는 게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절차도 있다던데.

유네리아는 그런 건 깔끔하게 무시했다.

과연 솔로의 신 네리아 교황청이 있는 게임답게 유네리아는 결혼에 그렇게 공을 들이지 않았다.

정말 다 솔로로 살길 바라는 건가?

역대 디렉터가 놀랍게도 모두 모태솔로에 솔로ING인 걸 생각하면 왠지 설득력 있는 생각이었다.

[메디카 결혼식장]

심지어 결혼식장도 지역마다 하나씩밖에 없다.

다행인 점은 국적이 달라도 결혼은 된다는 것?

사랑의 힘은 국경을 넘기 때문일까?

개뿔 그럴 리는 없고 만들다가 구분해 놓기 귀찮아서 그랬다에 내가 나가서 유네리아 운영팀에 던질 깽값을 건다.

“이 NPC한테 신고하기만 하면 돼요.”

심지어 결혼 NPC는 이름도 없었다.

길 가는 거지 NPC도 이름이 있는데 얘는 그냥 ‘결혼 도우미’가 이름이었다.

유네리아가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습니다, 여러분!

“결혼하러 오셨나요?”

결혼을 무슨 편의점 가서 콜라 한 캔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듯한 도우미와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우미는 사무적인 모습으로 책상 서랍 안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주었다.

“여기에 각자 정보 적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건 잊지 않았다.

“결혼 비용은 1,000골드입니다.”

돈 받아먹는 걸 까먹으면 유네리아가 아니지, 음음.

[결혼신고서]

서식 이름이 결혼식 신청서도 아니고 결혼신고서였다.

정말 기가 막힌 행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신랑 : _______]

[신부 : _______]

여기 이름만 쓰면 정말 부부가 될 수 있다!?

정말 로맨틱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었다.

[신부 : 유니]

난 가볍게 닉네임을 썼다. 그런데.

[닉네임을 바르게 입력해주세요.]

알림창이 떴다.

“응?”

[신부 : 유니]

난 지워진 칸을 다시 채워 보았다.

내 이름 유니 맞는데?

이거 아니야?

[닉네임을 바르게 입력해주세요.]

“?”

날 보던 네드 님도 신랑 칸에 이름을 써 보았다.

[신랑 : 네드]

그리고 똑같은 알림창을 받고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이거 닉네임 쓰는 거 맞을 텐데?

우리가 열심히 닉네임을 정자로 쓰고 있을 때였다.

결혼 도우미 NPC가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서로의 이름이 아니라 본인 이름을 써 주시면 됩니다.”

“?”

제대로 쓰고 있잖…… 아?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우리 정보 바뀐 것 때문에?

이거 설마 결혼 시스템에서는 바뀐 정보로 인식되는 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교감신경이 전율하는 것 같은 네리아GM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

육두문자를 삼킨 난 빠르게 두뇌를 굴렸다.

캐릭터 정보가 바뀐 상태라 이름이 다르게 인식된다면?

[신부 : 네드]

네드 님이 멈칫하는 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잠깐만 성별 바꿉시다!

[본인과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네드로 보이니?

[신랑 : 네드]

[닉네임을 정확히 입력해주세요.]

아니, 뭐 어쩌라고!

네드도 유니도 아니면 뭐 쓰라고? 유드? 네니?

난 펜을 부러뜨릴 뻔했다.

아냐, 방법이 있을 것이다.

유네리아의 수많은 버그 홍수 중에서도 유저들은 늘 방법을 찾아 왔다.

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늘 그랬듯이.

결혼 버그난 놈들이 한두 놈이 아니었단 말이지.

그놈들이 어떻게 처리했더라…….

“아!”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네드 님, 로그인할 때 쓰셨던 메일 계정 생각나세요?”

네드 님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행히 주로 쓰시던 계정을 쓰신 모양이다.

유네리아의 계정 시스템상 나와 네드 님은 캐릭터만 바뀐 상태이다.

만약에 계정 단위로 통째로 바뀌었으면 내 계정에 귀속되어 있는 용 비상식량이 내게 안 옮겨왔을 리가 없었다.

“그럼 이름에 계정을 쓰시면 돼요.”

[신부 : [email protected]]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결혼에 참 로맨틱한 이름 쓰고 있다.

내가 감탄하는 사이 네드 님이 내 메일을 읽어 보았다.

“……유은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이름이에요.”

이렇게 본명을 밝히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뭐 파개한다도 아는 내 본명을 네드 님이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신랑 : [email protected]]

이현…… 강? 난 눈을 깜빡였다.

“강이현?”

네드 님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데? 왠지 뉴스에서 많이 본 것 같은……

아!

“그 KJ그룹 부사장인가랑 이름이 똑같네요?”

내 말에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답은 반 박자쯤 느렸다.

대한민국에 강이현이 한두 명도 아니고 반응이 수상한 걸 보니.

설마?

난 네드 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름으로 놀림 많이 받았어요?”

“네?”

네드 님은 내 말에 황당한 듯 되물었다.

이게 아닌가?

“여튼 사인합시다.”

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흠흠.

얼른 사인하고 결혼해야 우리 미니 소환하고 거인 패러 가죠!

아, 패려면 내 레벨업부터 해야 하나?

[유니 / Lv. 360]

거인 레벨이 500을 넘으니까 레벨업은 확실히 필요해 보였다.

이맘때 레벨업 루트가 어디더라?

내가 두뇌 풀 가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

갑자기 네드 님이 소리 없이 웃었다.

“왜요?”

갑자기 이 타이밍에? 사냥할 생각에 신나신 건 아닐 테고?

내 물음에 네드 님은 재빨리 표정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은 처음이라서요.”

“그으거는.”

난 황당한 얼굴을 숨기려고 힘써야 했다.

“저도 처음이에요.”

그러자 네드 님이 작게 웃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참 웃음 많은 사람이었다.

* * *

그렇게 결혼이 진행되었다. 결혼식 절차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딱 하나 안타까운 점이라면 결혼 도우미 NPC가 우리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야 했다는 것 정도?

“신랑 아이에이치와이유엔닷케이에이엔지앳케이엠에이아이엘닷씨오엠은 신부 와이유이유엔씨에이치에이이앳케이엠에이아이엘닷씨오엠을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혀도 안 꼬이고 말하는 것이 정말 대단했다.

“네.”

네드 님도 좀 당황했는지 답이 늦었다.

“그럼 신부 와이유이유엔씨에이치에이이앳케이엠에이아이엘닷씨오엠은 신랑 아이에이치와이유엔닷케이에이엔지앳케이엠에이아이엘닷씨오엠을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결혼 도우미 NPC는 이번에도 단 한 번의 더듬거림 없이 대사를 쳐냈다.

정말 프로 중의 프로가 아닐 수 없었다.

“네.”

내가 말하자 결혼 도우미의 표정이 더욱 엄숙해졌다.

그러더니 불쑥 서랍 안으로 손을 또 집어넣었다.

이번엔 뭐 꺼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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