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12)
  • <76화>

    난 그 사건을 보고 결심했다.

    이 고인물 X끼들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하겠다고.

    그날로 난 네리아의 증표를 따서 게시판에 인증했다.

    [제목 : 아아 네리아님 믿습니다

    작성자 : 유니

    내용 : (네리아의증표.png)

    둘이 들어가서 하나가 되는 기적이 있기를^^!]

    [(댓글)지저스 : 진짜 뒤진다

    └유니 : 뒤졌던건 나랑 전에 공대가서 음양잘못밟은 니가 아닐까요?]

    └아주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그날 이후로 결혼 시스템을 잊고 살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참한 뉴비가?

    전 진짜 인벤 안 부수거든요?

    그니까 이 상황에선 결혼이 나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앞으로 구르고 뒤로 구르고 봐도 결혼이 나았다.

    “혹시 그, 결혼에 깊은 의미를 갖고 계세요?”

    난 여전히 심각한 얼굴의 네드 님에게 물었다.

    그리고 뒤늦게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반적으로 결혼에 깊은 의미를 갖는 건 당연했다.

    “그니까 게임에서요.”

    재빨리 덧붙이자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저건? 그렇다는 뜻? 아니라는 뜻?

    우리 이거 빨리 깨려면 이게 최고거든요?

    난 네드 님을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메인 다 클리어하면 칼같이 이혼해 드릴 테니까 이거 깰 때까지만. 어때요?”

    * * *

    “우리 결혼할래요?”

    네드는 그 말에 순간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던 탓에.

    앞에서 종알거리는 유니는 엄청나게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

    물론 조심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지 못한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게 게임이라는 것만 빼면 정말…… 이상하게 보일 텐데.

    그 사실을 본인도 알고는 있는지 연신 난감한 표정이었다.

    네드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혹시 결혼에 깊은 의미를 갖고 계세요?”

    연신 조심스럽게 묻는 말이 귓가에 닿았다가 튕겨 나가는 듯했다.

    ‘우리, 결혼할래요?’

    그 한 마디에 흔들렸던 심장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탓일 터였다.

    근데 그런 그를, 유니는 연달아 흔들었다.

    “메인 다 클리어하면 칼같이 이혼해 드릴 테니까 이거 깰 때까지만. 어때요?”

    이혼, 굳이 해야 할까요?

    네드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제 속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기회가 온 것은 맞았다.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매끄러운 미소를 만들어냈다.

    절제된 미소.

    원하는 것을 얻은 포식자의 미소가 아닌, 절제된 미소.

    그녀와 저 사이에 있는, 그녀는 모르고 저만 아는 줄을 살짝 당겼다가 밀 때였다.

    “이전에 네리아의 증표에서도 결혼은 앞으로 안 하신다고…….”

    미소에 곤란함을 덧씌우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러자 유니는 곧바로 반응했다.

    “아, 그거 그냥 박살 내면 돼요! 하등 쓸모없어요! 신경 쓰지 마요!”

    다급하게 말하는 그녀는 정말 급해 보였다.

    조금 더 밀어내도, 그녀를 애타게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결혼은……, 아무래도 조금.”

    그는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상태잖아요. 그런데 결혼까지 한다는 건 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요.”

    그가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으으음!”

    그러자 유니는 머리를 싸매더니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를 설득할 방법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요컨대 그에게 유니 자신이 줄 수 있는 ‘대가’를 생각하는 것.

    네드는 그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가 옅은 미소를 유지한 채 유니를 내려다볼 때였다.

    유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게 진짜 현실 결혼하곤 전혀 하등 관계가 없거든요? 혼삿길 막힐 일도 없거든요? 진짜거든요?”

    물론 그거야 알고 있었다.

    KJ그룹 강이현이 게임을 하다못해 거기서 결혼까지 했다는 게 뉴스를 타서 시끄러워진다면 모를까.

    물론 그래도 혼삿길이 막힌다기보다는 그냥 이슈가 되거나, 누구랑 결혼했느냐며 의문의 열애설이 날 수는 있었다.

    그럼 번거로워지기는 하겠지만 그와 결혼 상대로 점찍어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헛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다고 KJ그룹이나 강이현의 가치가 떨어지진 않으니까.

    “이게 선보는 것보다도 더 혼삿길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거든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유니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거 말곤 방법이 없는데!

    안 그럼 클리어까지 한세월 걸릴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는, 정말 애가 타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곤란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운 한편으로, 네드는 그녀에게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느라.

    그 모습은, 제 상상 이상으로…… 귀여웠다.

    “그 선 보는 문제 말입니다만.”

    그래서 그는 입을 열었다.

    유니가 그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네드는 유니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비록 게임이라지만, 아무래도 결혼한…… 다시 말해 관심 있는 이성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할 것 같아서요.”

    잘 생각해 보면 알려질 일부터 없을 터였다.

    유니 님이 그걸 못 알아차릴 만큼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유니 님이 보는 나는 지나치게 ‘결혼’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니.

    아니나 다를까 유니가 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으으으음.”

    그거 심각한 문제죠, 그래요, 심각한 문제야.

    그렇게 뇌까리던 그녀는 이내 머리까지 싸매기 시작했다.

    과연 당신은 내게 뭘 주려고 할까?

    당신이 무엇을 주든 난 좋을 것 같아.

    네드는 그녀와 함께 열었던 수천 개의 상자를 떠올렸다.

    도박이나 다름없는 그 ‘키트’를 열면서도 그는 별로 설레거나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쾌감의 순위 중에 도박이 높은 순위에 랭크되어 있다던데, 그 상자는 그에게 도박보다는 유흥이나 업무거리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상자를 언제까지 열어야 아이템이 나오지?

    딱 그 정도의 감흥?

    하지만 눈앞의 유니는 달랐다.

    그녀야말로 상자였다.

    그 무엇보다도 설레는 상자. 그에게 쾌감을 안겨 줄 상자.

    그리고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선 말인데요.”

    유니는 조심스러워 보였다.

    “예.”

    “선보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할 생각 있으신 거죠?”

    네드는 그 말에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왜 갑자기 물으시지?

    처음에는 물론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그가 속한 사회에서 결혼은 거래이자 신뢰를 주는 약속이었다.

    어떤 기업과 기업 간의 전략적 제휴에 가까운 것.

    문서로만 연결된 것보다 훨씬 파급력이 크고 끈끈해 보이는 것.

    그러니 결혼할 마음이 있었다. 좋은 거래 상대가 정해지면.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다.

    유니 옆에 있으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그에게 결혼은, 연애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적어도 행복할 수 있는 시간. 사람답게 숨 쉬고 살 수 있는 시간.

    꾸민 내가 아니라 진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시간.

    그러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결혼할 생각 없었습니다.”

    그게 당신이 아니면요.

    그 뒷말은 당연히 삼켰다.

    그러자 유니의 표정이 활짝 폈다.

    “그럼 잘됐네요!”

    잘 돼? 뭐가?

    네드가 유니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애쓸 때, 유니가 불쑥 말했다.

    “어차피 선보셔야 한다고 했잖아요. 근데 게임에서 결혼한 거 소문나면 선 자리 주선하는 사람들도 소개받을 사람들도 의심스러워할 거라는 거죠? 혹시나 마음 있는 사람이 따로 있나, 하고.”

    유니의 말에 네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아니지만, 그렇게 오해하길 바란 건 맞다.

    유니는 네드의 말에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기에?

    그는 이 통통 튀는 사람의 생각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예상치 못하는 것은 그에게 늘 불쾌감을 안겨 주었지만, 이 사람만큼은 달랐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실수와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그는 당연히 예상외의 것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딱 한 명, 이 사람 앞에서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그가 실수를 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이 사람 앞에서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당신이 또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즐겁게 해 줄까?

    네드가 눈을 고요하게 반짝일 때였다.

    “그럼 어차피 선보기로 한 거, 일단 저랑 결혼하시고.”

    그 결혼은 게임의 결혼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네드는 순간 그렇게 물을 뻔했다. 묘하게 마음이 붕 떴다가 가라앉았다.

    “게임에서 연이 돼서 저랑 만나서 사귀게 된 걸로 하죠.”

    그리고 다음 말에는 그냥 하늘로 붕 떠서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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