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12)

<75화>

이렇게 믿어 주신다니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네!”

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멈칫했다.

잠깐, 이 사람…….

게임 처음 한다고 했지?

내 얼굴이 별안간 심각해졌다.

“그…… ‘미니 소환’이라는 스킬이 있거든요?”

네드 님은 내 말에 눈을 깜빡였다.

“유니 님이 배우지 않은 스킬 중 하나입니까?”

그런 게 있었느냐는 얼굴이다.

사람을 너무 잘 알고 계시네요.

하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놀랍게도 배우지 않은 스킬입니다!

왜냐면.

“그게 전제조건이 있거든요.”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순수하게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보자니 참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게…… 이게 일반인한테 말하면 무척 이상해져!

게임을 많이 한 사람이면 그렇구나, 할 텐데 네드 님은 아닐 것 같아!

갓반인한테 이 소리 하면 완전 분위기 이상해진다고!

난 머리를 싸맸지만 네드 님의 순수한 호기심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게…….”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말했다.

“좋아요. 우리에겐 두 가지 방법이 있거든요?”

내 말에 네드 님은 필기할 듯한 진지한 표정으로 노트를 꺼내 들었다.

난 펜까지 꺼내드는 네드 님을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게 그렇게 필기할 만큼 복잡한 문제는 아니거든요?

그렇게 진지한 문제도 아니거든요?

아닌가? 진지한가?

아니, 내가 게임에서 이 얘길 꺼내면서 이렇게 고민한 적이 있던가?

“하나는 우리가 스킬을 배우러 유람을 떠나는 건데, 좀 시간이 많이 걸려요.”

난 일단 일반론을 제시했다.

PC 버전도 아니고 실제로 돌아다니는 꼴인 데다 또 뭐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니 시간은 배로 들지도 모른다.

네드 님은 내 표정을 보다가 말했다.

“유니 님이 원하는 방법은 아닌 것 같군요.”

난 그 말에 멈칫했다.

“혹시 독심술 하십니까?”

어떻게 알았지? 내 말에 네드 님이 옅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아쉬운 표정이셔서 그렇게 짐작했을 뿐입니다.”

내내내가그렇게아쉬워보였어요?

“그그그렇군요.”

난 진정하려고 애썼다.

아니, 이 얘기 꺼낸다고 이렇게 긴장할 이유가 없다니까?

그냥 게임일 뿐이라니까?

하지만 상대는 일반인이다!

으악!

머릿속이 혼란의 도가니탕으로 끓기 시작했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뭡니까? 유니 님이 원하는.”

네드 님이 옅게 웃으며 물어 왔다.

사람 홀릴 듯이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리고 그 얼굴에 홀린 덕에 내 말은 툭 자연스럽게 튀어나와 버렸다.

“우리 결혼할래요?”

내 말에 우리 사이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끔.

뻑.

천천히 눈을 깜빡인 네드 님이 뒤늦게 되물었다.

“예?”

아무래도 많이 놀라신 게 분명했다.

그야 당연하다.

사람이 갑자기 거인 잡는 방법 이야기하다가 무드도 없이 프로포즈를 하니까 많이 놀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청혼이 아니라!

일단 들어 봐!

난 네드 님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근데 정말 이게 좋은 방법이거든요? 들어 보세요.”

네드 님은 안 듣겠다고 한 적이 없었지만 난 그를 간곡하게 붙들었다.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이 세상엔 사냥용 결혼이란 것도 있다고요!

비즈니스 모르십니까, 비즈니스?

실제로 랭커들 중에는 주말부부도 쇼윈도부부도 아닌, 그냥 부부가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밤에 게임을 끌 시간이 되면 약속한 장소에 캐릭터를 세워놓고 끈다.

캐릭터를 나란히 세워 놓고.

‘부부가 함께한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시간은 ‘부부 전용 스킬’에 사용할 수 있었다.

“일단 결혼을 하면 아이템창이 공유되고요.”

난 결혼의 이점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 그런…….”

네드 님은 감탄하면서 자기가 쓰고 있는 베레모를 올려다보았다.

네에, 그것도 제가 쓸 수 있게 된답니다! 인벤토리 공유니까요!

물론 그게 나만 이득은 아니고!

난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제가 가지고 있는 네드 님 아이템들도 네드 님이 쓸 수 있고요.”

물론 지금 상황에선 내가 쓰는 게 데미지 기여도 맞추기가 맞겠지만, 아무튼.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자 미니 소환’이라는 스킬이 생겨요.”

이게 아까 말한 미니 소환이었다.

“배우자의 능력 일부를 가진 인형 같은 걸 소환하는 거예요.”

내 말에 네드 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네. 지금 네드 님 스펙을 가진 미니 도우미를 제가 소환할 수 있게 돼요.”

부부가 함께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문제가 없었다.

부부로서의 정은 한순간에 생기는 게 아니네 어쩌네 하는 문의가 쇄도하는 바람에 ‘부부 시간’은 두 캐릭터가 처음 만난 시간부터 계산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랑 네드 님이 이 세계에 갇혀서 쭉 같이 있었으니, 미니 소환 시간 제한을 받을 일은 없을 거란 소리다.

“미니가 뭐냐면, 음, 일종의 NPC인데 도우미라고도 부르거든요? 걔가 요만하게 나오는데.”

난 대충 손을 한 뼘 펴 보였다.

“네드 님이 유니 미니를 소환하면 제가 이만한 버전으로 나오는 거고요.”

2.5등신의 귀여운 가분수 도우미 미니는 유네리아에서 사냥을 안 하는 유저들에게도 각광받는 시스템이었다.

어쨌든 귀엽잖아?

“오…….”

네드 님은 내 설명의 무언가에 흥미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이때다!

“물론! 지금 만약 결혼하시면 이혼은 당연히 원하실 때 할 수 있고요. 우린 필요에 의해서 하는 거니까.”

그죠? 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래서야 CF에서 랩 하듯 보험약관 읊는 거랑 다를 바가 없잖아!

사기 치는 기분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지금으로선 최선이라니까?

“부부 스킬만 썼다가 나중에 이혼하는 거죠. 제가 이런 걸로 진짜 거짓말 안 하거든요?”

네드 님은 중간중간 짧게 감탄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주저하는 얼굴이었다.

그래요, 누가 이 뜬금없는 상황에서 프로포즈를 받을 거라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좀 고민하는 것 같던 네드 님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결혼은 조금…….”

“조금 뭔가 좀 마음에 걸리시는 게 있으시겠죠!”

그래요, 일반인은 그럴 수 있어!

난 최대한 네드 님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래, 이 사람은 게임 처음 하는 사람이야!

PK 켠 채로 결혼하는 도중에 죽으면 신랑 신부가 죽은 채로 이동하는지 궁금해서 실험 삼아 결혼해보는 그런 잉여 고인물이 아니라고!

퓨어 뉴비야!

난 최대한 뇌를 깨끗하게 청소하면서 말했다.

“여기서 결혼하는 건 기록도 안 남아요.”

우리끼리 결혼하고 우리끼리 파혼하면 쥐도 모르고 새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니까?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난 간곡하게 말했다.

“이게 정말 별 의미가 없는 거거든요? 미니 소환이랑 인벤 공유만 의미 있는 거거든요? 아무튼 결혼해서 소환물만 꺼낼 수 있으면 헤르암 거인 잡는 건 문제가 안 될 거예요.”

물론 레벨업을 좀 해야겠지만.

그니까 우리 한 번만, 결혼합시다. 예?

난 반짝이는 눈으로 네드 님을 올려다보았다.

얼른 이 X 같은 데서 나가서 유네리아 운영팀에 깽판 치러 가고 싶지 않으세요?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 * *

결혼 시스템.

이걸 네드 님과 처음 이 삭막한 유네리아에 떨어졌을 때부터 생각해 봤어야 했다.

물론 그땐 네드 님한테 차갑게 거절당했을 것 같지만.

난 결혼을 안 하는 유저였다.

일단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미니 소환이 사기라고 해도 일단 쓸 만한 미니를 소환하려면 배우자 스펙이 좋아야 했다.

그리고 인벤토리가 나와 필적할 정도의 값어치를 가진 놈이어야 했다.

다시 말해 유네리아의 그 썩은물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소리다.

그럼 그 고인물 파티의 뫼비우스의 띠 같은 지옥의 인맥 파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유네리아 랭커들이 결혼하고 나서 지들 템만 쓱싹 깨끗하게 쓰는 것도 아니었다.

[안티아스의 갑옷+22 마음대로 쓰다가 박살낸 ‘지저스’님 공론화합니다]

유네리아 게시판에 일주일 걸러 한 번씩 뜨는 게 저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저스 님이라고 부르고 있자면 이놈이 예수님인지 스님인지 헷갈리는 그놈을 포함해서, 저기 나오는 닉네임은 다 한 번쯤 봤던 닉들이었다.

음, 다 아는 얼굴들이구먼~

당연히 반갑지 않았다.

물론 저런 일의 엔딩은 매우 더럽고 하찮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댓글)지저스 : 아니 갑옷 내가 박살냈냐 내구도 1 까인거 가지고 오지게 쪼잔하게 구네

└아주머 : 넌 X발 안티갑 22강이 개X으로 보이냐?

└지저스 : 그거 살 돈도 없으신데 왜 유네리아 하세요ㅠㅠㅠㅠ

└아주머 : 넌 살돈 있어서 남의거 박살냈냐

└지저스 : 5959 우리 아주머님 화나셨어요ㅠㅠ 그럴거면 그거 그냥 팔아서 올겨울 장작이나 장만하시지ㅠㅠ

└아주머 : 야 전화받아라

└아주머 : 씹지말고 전화받으라고]

음, 그놈들이 어떻게 됐더라?

이런 수많은 멍청이들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보통 엔딩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제목 : 아주머님 잘못했어요 X발 진짜로

작성자 : 지저스

내용 : 야 안티갑 22강 내구 1 박살냈다고 남의 무기를 들고 튀시면 어떡해요 전화받아라]

[(댓글)아직안접었냐 : 진짜 유네리아답다

(댓글)유니 : 유네리아 품격 어디 안가네

└아직안접었냐 : ㅡ유ㅡ

(댓글)아주머 : 응 아주머님은 니네집가서 찾으세용

└지저스 : 아 제발 템낀채로 이혼하는게어딨냐고 아

└아주머 : 랭킹3위 가오가있으시지 제발이라뇨^^]

음, 맞아. 아주머가 버그를 사용해서 지저스의 주력 무기를 든 채로 일방이혼을 해 버렸다.

인벤토리를 깨 버렸다고도 하는데, 저런 경우 지저스의 아이템은 ‘귀속 : 지저스’로 계속 뜨면서도 아주머의 템창과 장비에서만 굴러다니게 된다.

그럼 무기를 잃은 지저스는 어떻게 됐는가?

지문보안으로 로그인하는 게임에서 OTP 안 걸었다고 해킹 복구도 안 해 주는 유네리아가 지저스의 아이템을 복구해 줄 리가 없었다.

결국 지저스는 아주머의 집 앞까지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는데 참 구질구질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현금 6천만원짜리 무릎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저스 무릎꿇은짤.jpgif]

게시판이 뜨거운 가운데 하필이면 아주머가 사는 곳이 영종도라서 지식나무의 유네리아 사건사고 칸에 이름도 붙어 실렸다.

[유네리아 사건 영종도의 굴욕]

……삼전도 아니고 영종도의 굴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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