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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73/112)
  • <73화>

    우리가 쉴 필요가 있을까요?

    고도가 낮아지는 걸 보면서도 난 의아했다.

    우리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 엘데가 움직이는 건데?

    엘데도 아직 지치진 않았는지 의아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들를 곳이 있어서요.”

    네드 님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대체 이분이 메디카 한복판에 내려서 뭘 하시나 했더니.

    [메디카 전통 베레모]

    상점에서 베레모를 사 오실 줄은 몰랐다.

    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그냥 까만 각진 베레모일 뿐이었다.

    그리고 유네리아에서 상점이 판매하는 겉옷 중에서 그나마 볼만한 아이템으로 평가받는 것이기도 했다.

    “이것만큼 예쁜 것이 없더군요.”

    네드 님은 난감한 듯 말했다. 하지만 난 그런 그에게 손사래를 쳐 보였다.

    “예쁜 거 엄청 잘 찾아오셨는데요?”

    역시 거지 같은 유네리아 외형 중에서도 잘 생긴 것만 뽑아 놓은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단 말인가?

    난 베레모를 슬쩍 써 보았다.

    “어때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잖아요?

    내 외형 정도면 베레모가 아니라 거지 탈을 써도 예뻐야 하는데?

    내 말에 네드 님이 날 쳐다보았다.

    “…….”

    그리고 침묵했다.

    저기?

    “네드 님?”

    렉 걸리거나 석화 걸리신 거라고 말해 주실래요? 예쁘냐고 물어봤더니 그렇게 침묵하는 게 어딨어요?

    내가 눈을 깜빡일 때 네드 님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예쁘십니다.”

    난 몇 박자는 늦게 나온 그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혹시 매너상 하신 말씀?”

    내 말에 네드 님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흐음. 의심스러운데. 난 베레모를 슥 벗었다가 다시 써 보았다.

    “거울이 없어서 진실을 알 수가 없네. 엘데?”

    난 엘데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자 날던 엘데가 날 돌아보더니 얼굴을 구겼다.

    ―인간 따위가 용에게 아름다움으로 칭송받길 원하다니.

    “너 내 템창에 토르의 검 있는 거 까먹었지?”

    ―…….

    엘데는 그 뒤로 말이 없었다.

    * * *

    우리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메디카에 입장했다. 물론 난 내려오자마자 거울 먼저 봤다.

    “음, 흠잡을 데 없이 예쁘군.”

    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생각을 뱉었다가 재빨리 다물어 버렸다.

    ―푸흥.

    엘데는 웃었지만 네드 님은 안 웃는 걸 봐선 저기까지 안 들린 듯했다.

    난 엘데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이거 커스터마이징하는 데에 몇 시간을 썼는데!

    난 다시 한번 거울을 확인하고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일단 여기선 주의점이 있어요.”

    “예.”

    네드 님이 노트를 꺼내려고 했다.

    “아아아니 필기하실 정도는 아니고.”

    난 그가 펜까지 꺼내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국적 물어보기 전엔 답하지 말기. 이거 하나면 돼요.”

    네드 님은 내 말에 눈을 깜빡였다.

    “물론 네드 님은 메디카인이라 상관없는데, 제 국적이 문제라서요. 먼저 말씀하실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고 말씀드려 봤어요.”

    내 국적을 여기서 알라반인이다! 하고 까 버리면 일이 귀찮아진다.

    알라반이야 평민들이 워낙 많고 그들은 정치가 어떻게 굴러가고 메디카랑 알라반이 죽을 쒀먹든 콩으로 메주를 해 먹든 상관하지 않았다.

    먹고살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메디카는 철저히 귀족 중심으로 굴러가는 동네였다.

    알라반인인 걸 들키면 알라반에서 보다 훨씬 귀찮아진다.

    “알겠습니다.”

    네드 님은 노트를 집어넣으며 답했다.

    ―감히 인간들 때문에 내가 날개를 접어야 한다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데는 다시 튀어나와 내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엘데를 타고 목적지까지 그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그게 불가능한 탓이었다.

    메디카의 많은 성 중에서도 우리가 갈 성은 하필이면 영주의 성질이 X랄맞은 곳이다.

    무려 제게 허락받지 않은 모험가의 용이 떠다니면 무차별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을 정도로.

    물론 엘데가 그 공격에 쓰러질 것 같진 않지만, 일이 번거롭게 되는 것보단 평화롭게 진행하는 게 낫잖아?

    “참아, 참아.”

    착하지?

    난 네드 님이 하는 대로 예누스 정제육을 그에게 먹이면서 말했다.

    물론 눈을 반짝이는 비상식량에게도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아, 이거 점점 밥값만 더해지는 기분이…….

    [‘시어드 성’에 진입합니다.]

    후우, 왔다.

    유네리아의 400레벨 이상 고레벨 유저들이 싫어하는 필드 1위!

    호감도 쌓기 가장 X랄맞은 NPC 1위!

    NPC 킬이 가능했던 버그 당시 가장 많이 죽은 NPC 1위!

    무려 3관왕에 준하는 영주 카이지가 있는 시어드 성이었다.

    [메디카와 알라반은 적대 국가입니다. 행동에 유의하세요.]

    [곧 ‘시어드 성’의 경계 범위에 들어섭니다……]

    난 알림창을 대충 무시하면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아, 국적 말고 주의할 점 또 있어요.”

    메인 퀘스트를 다 끝냈다면 모를까, 지금은 심각하게 주의해야 할 문제였다.

    “네드 님, 여긴.”

    뭐라고 설명하지? 음…….

    “그래서 지금부터 한 대 맞으면 픽 쓰러져서 죽는 척해야 돼요.”

    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내 말에 네드 님이 눈을 깜빡였다.

    “여기 영주가 자기보다 센 사람을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고레벨 유저가 가장 싫어하는 필드 1위로 꼽힌 것이다.

    “아.”

    네드 님이 짧게 탄식했다. 그러더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요, 주체하기 힘든 힘이겠죠. 누구 스탯인데.

    하지만 지금은 잠시 넣어 둬!

    “지금부터 우리 컨셉은 힘숨찐이에요. 알았어요?”

    내 말에 네드 님의 얼굴이 굳었다.

    뭐지? 설마 안 돼요? 왜?

    하지만 네드 님의 답은 내 예상과는 좀 달랐다.

    “힘숨찐이 뭡니까?”

    아. 그거였어?

    * * *

    힘숨찐이 뭔지 대충 들은 네드 님은 뭔가 행동 양식을 정하신 듯했다.

    “알겠습니다.”

    정말 제대로 알아들으신 거 맞겠지?

    왜 이 사람이 이렇게 진지한 표정 지으면 불안하냐?

    [‘시어드 성’의 경계 범위에 들어섰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약한 척해야 한다! 센 놈 나타나면 영주 놈이 쫓아온다!

    난 긴장한 채 성으로 다가갔다.

    근데 내 옆으로 나란히 걸어야 할 네드 님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어드 성의 랜드마크인 시계탑이 보일 즈음이 되자 멈춰 버렸다.

    “?”

    왜 이러시지?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설마 뒤늦게 멀미? 그럴 리는 없었다.

    “혹시, 여기 영주가, 그…….”

    그? 내가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네드 님이 험악해 보이려고 애쓰는 표정을 지으면서 누군가를 따라 했다.

    “만나자마자 제 부하가 되라며 소리 지르는 자입니까?”

    “아니, 어떻게 아셨지?”

    유명한 대사기는 한데 그걸 네드 님이 알 리가…… 설…… 마?

    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살짝 입을 벌렸다.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으아악!

    “언……제요?”

    라고 하기에는 이 시어드 성은 메디카 초보 마을에서 너무 가까운 성이었다.

    요컨대 뉴비들은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가는 성이라는 의미.

    하지만 네드 님이 이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 이곳을 들렀다면, 당연히 내 스탯을 가지고 들어왔을 거고…….

    “이곳에 들어와 유니 님과 만나기 전입니다.”

    불길함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영주가 물어본 말에 뭐라고 답하셨어요?”

    내 부하가 돼라! 했을 때. 뭐라고 답하셨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고통스러워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긴장한 얼굴로 답을 기다릴 때였다.

    네드 님이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

    “모르는 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순 없으니,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알림창이 떴다.

    [파티에 시어드 영주와 ‘적대관계’인 유저가 있습니다.]

    [파티 전체의 성격이 ‘시어드 성’과의 ‘적대관계’로 바뀝니다.]

    “오.”

    까마득해지는 기분에 난 알림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유네리아에서 메인 퀘스트를 깨는 법은 크게 두 가지다.

    아예 처음부터 메인을 밀고 시작하기.

    그게 아니면 레벨에 비례해 주는 경험치 보너스를 노리고 아예 500레벨에 경험치 상자 채우기용으로 하기.

    그리고 우리처럼 레벨이 높은 사람들은 보통 후자를 선택하고,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이 이 시어드 성에 와서 하는 짓은 다 똑같았다.

    있는 힘껏 약한 척을 하다가 크리스탈을 발견한 다음에, 힘숨찐이고 뭐고 던져 버린 다음 애들을 싹 쓸어 버리고 크리스탈을 들고 튄다!

    어차피 여긴 주요 NPC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부숴도 크게 페널티는 없었다.

    파개한다가 아닌 다른 유저들도 이곳을 폐허로 만든 사람이 꽤 있을 정도였다.

    근데 일단 힘숨찐부터 불가능해졌네? 이러면 계획이 틀어지는데?

    그때 설상가상으로 알림창이 하나 더 떴다.

    [바람 크리스탈 영역에 진입합니다.]

    “아.”

    이건 뭐, 무시해도 된다.

    가라, 저항의 정령석!

    [저항의 정령석의 효과로 바람 크리스탈 영역의 디버프 효과를 무시합니다.]

    고로췌! 그나마 반가운 알림창에 내가 미소를 아주 조금 회복하려는 때였다.

    [크리스탈이 공명을 일으킵니다!]

    이이이건 뭐임?

    “어?”

    내가 당황했을 때였다. 갑자기 몸이 뒤로 훅 밀려났다.

    “!”

    네드 님이 단단한 팔로 나를 감쌌다. 그 순간이었다.

    [크리스탈 공명 데미지를 받습니다!]

    [-177,252]

    내가 네드 님의 품에 쏙 안겼다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난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17만?

    [이름 : 유니

    체력 : 142,241 / 319,493]

    반피 넘게 닳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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