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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112)
  • <72화>

    난 손에 저렇게 곱게 크리스탈을 모아 든 적이 없지만, 아무튼 영상은 내가 네 개의 크리스탈을 양손에 곱게 모은 것으로 시작되었다.

    ―파앗!

    그리고 그 네 개의 크리스탈은 한데 뭉쳐 새하얀 빛기둥을 하늘로 뿜어냈다.

    [……!]

    난 저렇게 놀란 적도 없었지만, 아무튼 놀란 표정의 나와 네드 님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파아앗!

    아주 먼 곳에서 연둣빛 기둥이 솟아올랐다.

    저건 바람 크리스탈 이펙트인데?

    원래 이런 연출이 있었던가?

    내가 알기로는 크리스탈을 하나 얻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음 메인 퀘스트 지역으로 연결되는 퀘스트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앗!

    영상 재생이 끝나면서 다시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 * *

    “…….”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 시선이 지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지도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난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방금 그게 크리스탈 위치를 알려준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네드 님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내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아니, 아무리 반 쪼가리밖에 쓸모가 없는 쓰레기 UI 지도라지만 그래도 XY 좌표는 제대로 표시됐다고!

    이 근방에 뭐가 있습니다 같은 건 알려 줬다고!

    근데 이제 아예 지도에 표시도 안 해 줘?

    그냥 빛기둥 한 번 뿜어 주면 다야?

    ―탁, 탁탁.

    심지어 인벤토리에서 크리스탈을 다시 건드려 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빛이 났던 위치를 찾아가라는 것 같습니다.”

    네드 님이 싸늘한 현실을 말했다. 난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저쪽이…….”

    난 빛이 났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북쪽입니다.”

    그러자 네드 님은 고오급 정보를 말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아주 큰 힌트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럼 우린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있는 동네 없는 동네 다 뒤지면 되는 건가요?

    아니지.

    이 넓은 대륙, 눈깔 빠지게 천리안으로 쭉 훑어야 하는 건가?

    “아니, 어딘지는 알려 줘야지!”

    내가 극대노할 때였다. 놀리듯 알림창이 떴다.

    [메인 퀘스트 ‘마지막 크리스탈’을 입수하였습니다.]

    그래, 그럼 위치는?

    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지도를 올려다보았다.

    [……]

    그리고 지도는 싸가지도 없고 미동도 없었다.

    [임무를 진행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세요.]

    그리고 알림창엔 어이없는 알림만 올라왔다.

    그 위치를 알려 주는 게 지도 아니었어?

    지도 이거 그냥 폼이었어?

    어째 일이 술술 풀린다 했다!

    이러면 꼭 마지막에 X 같은 걸 박아놓는 게 유네리아 전통이라 설마 설마 했더니, 대륙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동네를 다 뒤지는 퀘스트를 내줄 줄이야!

    “용진아!!”

    난 새로 취임한 디렉터 이름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왠지 엘프 아빠랑 성만 다르고 이름은 똑같더라!

    게임 이렇게 만들지 말랬지!

    플레이타임 길다고 컨텐츠 많은 거 아니랬지!

    풍부한 컨텐츠 만든다며! 지루한 유네리아를 끝내겠다며!

    ―퍼드득.

    그때 내 머리 위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

    뭐야, 이건 또? 어느 게임처럼 부엉이로 지도 던져 주는 시스템이야?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부엉이가 아니라 엘데였다.

    아니, 잠깐만.

    슬픈 게 아닌가?

    “엘데?”

    너 설마…….

    ―……그런 부담스러운 눈으로 보지 않아 줬으면 하는데.

    하지만 나는 엘데를 반짝이는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건?

    게다가 엘데는 용이기 전에 영상 재생 중에도 움직임이 자유로운 NPC가 아닌가?

    난 기대를 담아 물었다.

    “위치, 봤어?”

    반짝반짝반짝반짝.

    블링블링한 내 시선을 받은 엘데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하늘다리 위의 종족을 무시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엘데가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거만함, 나쁘지 않아요.

    아주 반가워요^^!

    “그럼 본 거지?”

    봤다는 거지? 응? 내 말에 엘데는 흠칫 몸을 뒤로 물리더니, 결국 내 어깨에 얌전히 앉았다.

    ―물론이다.

    “나이스!”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네드 님도 안도한 얼굴이었다.

    “어딘데? 어디?”

    난 지도를 눌러 대륙지도로 바꾸었다.

    근데 이거 엘데도 보이나? 너도 UI 볼 수 있니?

    내 기대에 부응하듯 엘데는 지도 위 한곳을 푸른 앞발로 짚었다.

    “이 근처였다.”

    얼마나 높이 올라가서 봤길래 알 수 있는 거야?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 감사한 상황이었다.

    “여기면…….”

    메디카령인데? 난 위치를 열심히 꼬나보다가 알아챘다.

    “아, 설마?”

    그 크리스탈에 미친 영주는 그대로야? 왜? 어째서?

    딴 건 다 바꾸고 걔는 X 같다고 욕먹는 애라서 안 바꾼 거야?

    “혹시 여기?”

    내가 정확히 성을 짚자 엘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이었던 것 같군.

    진짜잖아! 난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시나리오 위치가 같은 이상 퀘스트 하는 방법은 알고 있으니 보다 쉽게 풀릴 터였다.

    “여기 깨는 법은 알거든요. 고생 끝! 우리 곧 집 갑니다!”

    내가 밝게 말하자 네드 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톡톡.

    그사이 난 엘데를 톡톡 두드렸다. 커져라, 얍.

    “얼른 가자.”

    날아가자! 내 말에 엘데가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아주 간편하게 부려먹는군. 이 몸은 이래 봬도 900여 년 넘게 하늘 위에……

    또 엘데가 거들먹거리려는 때였다.

    네드 님이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해 보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 엘데에게 물렸다.

    저저저거 구름사탕이잖아!

    아니, 애를 그렇게 길들이면 애가 버릇이!

    ―편하게 앉도록.

    그때 탈 수 있을 만큼 커진 엘데가 네드 님에게 날개를 늘어뜨려 주었다.

    ……버릇이 좋아지네?

    난 황당한 얼굴로 엘데를 보았다. 엘데는 날 보고 혀를 찼다.

    너도 이 인간 반만이라도 해 봐라.

    왜……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지?

    난 얼굴을 구겼다.

    * * *

    내가 전에 엘데를 조련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단 엘데는 다른 용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동 속도를 자랑했다.

    그뿐만 아니라 30분만 날면 지친다는 알림이 뜨는 다른 용들과는 달리, 엘데는 기분만 맞춰 주면(?) 얼마든지 날 수 있었다.

    ―흥.

    물론 그게 제일 힘든 것 같았지만 네드 님은 까탈스러운 993살짜리 용을 귀신같이 잘 달랬다.

    나 혼자였으면 못 왔을 거다.

    덕분에 우린 대륙 남쪽에서 북쪽으로 순식간에 날아갔다.

    [‘메디카’에 진입합니다.]

    메디카다!

    난 기지개를 쫙 켰다.

    “여긴 알라반하고는 적대 국가니까…….”

    난 습관적으로 옷을 점검했다.

    생긴 거야 뭐, 모험가들은 워낙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적발이 남부에 많다느니 하는 설정은 무시해도 좋았다.

    옷도 알라반 전용 아니니까 됐고.

    “아.”

    난 장비창에서 모자를 바로 벗어 던졌다.

    [알라반 서쪽 전통 복식으로……]

    설명이 이렇게 붙어 있는 아이템을 들고 메디카에 가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

    “아, 기가 막히게 예쁜 베레모 하나 있었는데!”

    머리 위가 허전해서 템창을 살피다가 알았다.

    이거 내 템창 아니었지, 참.

    그때 네드 님이 인벤토리에서 까만 베레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바로 그거! 하얀색이랑 파란 라인으로 심플하게 장식된 그것!

    겉옷 따위에 내가 보너스 능력치도 붙여 놓은 현금 200만 원짜리 사기 베레모!

    “아이템이 제게 귀속되어 있다고 나오는군요.”

    네드 님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게 캐시 아이템을 써서 귀속을 해제해야 하는 물건이라…….”

    레살라토르의 검처럼 귀속 해제 제한이 없는 사기 아이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좋은 아이템들이 가지고 있는 제한이었다.

    “으음.”

    네드 님은 난감한 얼굴로 베레모를 다시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의 손을 탁 붙들었다.

    “그냥 쓰고 있어 주세요.”

    어차피 내가 쓰면 보이지도 않는 거, 네드 님이 쓰면 이쁘고 좋지!

    “그럴까요?”

    옅게 웃은 네드 님이 베레모를 고쳐 썼다.

    누가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는가? 내가 보기엔 역시 사람이 옷을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네드 님 커스터마이징 최고―!

    “……윽.”

    하지만 머리 위가 허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가죠.”

    네드 님은 그런 나를 보다가 말했다.

    “여기서요? 지금요?”

    이렇게 날다 말고?

    “엘데가 짜증 낼 것 같은…….”

    ―슈웅.

    엘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얘 내가 조련한 용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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