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12)
  • <71화>

    우리가 라이미트를 해치우고 돌아온 후.

    세레나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먼저 유목민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어요. 그들은 아빠가 있을 때 제대로 우리와 교류하지 못해서 답답하게 느끼고 있었을 테니.”

    그리고 세레나는 생각보다 더 능력 있는 통치자였다.

    라이미트가 반은 고기에 미치고 반은 리리스 때문에 미쳐서 말아먹은 유목민들과의 관계를 빠르게 회복시킨 것은 물론이고, 엘프들의 소원대로 인간들과의 교류를 위해 신중하게 엘프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잘생각해보셈 세레나도 금수저임]

    [그래서 수선비용도 안 받을 때도 있잖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냥 수장수저라서 돈이 필요가 없는거임]

    [솔직히 세레나가 엘프 중에 제일 수선 잘 하는 건 그냥 밥먹을 걱정 없어서임 다른 엘프들 봐라 맨날 열매따고 풀따고 나무타느라 하루다가는데]

    [ㅁㅈ 다른애들은 수선스킬 올릴 시간이 없다고]

    세레나가 금수저든 수장수저든 남의 숟가락에 관심 많은 놈들은 세레나를 엄청나게 까댔다.

    그들은 세레나를 딸바보인 아빠 덕을 보는 금수저일 뿐이라고 깎아내렸다.

    게다가 원래 메인 퀘스트에서 세레나는 아빠인 라이미트의 정치적 결단에 반대한 적도 있어서 더욱 그랬다.

    ‘엘프들의 전통을 지키려면 숲에 머물러야 한다’는 라이미트의 말을 무조건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 주장에 명확한 근거를 대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 파트를 엘프아빠 팀장 놈이 오지게 길게 잡아 놓는 바람에 욕을 더 먹은 것도 있었다.

    근데 이렇게 메인 퀘스트가 패치되면 욕먹을 일도 없겠다.

    음, 훈훈엔딩.

    “두 분 덕에 숲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어요.”

    세레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을 빠르게 처리해냈다.

    아무리 봐도 이전 메인 퀘스트에서 세레나를 너무 바보로 그려 놓았던 듯했다.

    그녀는 라이미트 이상으로 수완 있는 엘프인 것 같았다.

    수장이 되자마자 인간들과의 교류를 시작하는 걸 보면.

    아니, 잘 생각해 보면 원래 메인 퀘스트에서도 그녀는 외부와의 소통을 주장했으니 연락할 경로를 일찌감치 생각해뒀을지도 모른다.

    “엘프들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려요.”

    세레나는 이전과는 다른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라이미트와는 다른 옷이었지만 그녀의 연하늘빛 머리칼과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아무리 봐도 세레나를 위해서 만든 옷인데, 레이스처럼 늘어진 천이 몇 개고 화려한 장식이 저렇게 복잡하게 수놓아져 있는데 벌써 나온 걸 보면 남부 엘프들이 겉옷 만드는 데에는 기가 막힌 솜씨를 가진 건 분명했다.

    “저희는 파티를 할 예정이랍니다. 이번엔 진짜 파티예요.”

    세레나는 곤란한 듯 웃으면서 말했다.

    라이미트가 발광하는 바람에 흥이 깨져 버렸던 고기 파티를 다시 할 예정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파티를 즐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때 네드 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게?

    어쨌든 라이미트는 전대 수장이었고, 그는 불명예스럽게 죽은 셈이었다.

    그것도 외부에서 들어온 인간들에 의해서.

    사정을 모르는 엘프들은 당연히 그에 반감을 가질 거고, 세레나가 수장이 된 과정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것이다.

    하지만 세레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네, 괜찮아요. 아빠…… 전대 수장에 관한 건이 조금 시끄럽긴 하겠지만, 나쁜 일은 파티로 잊는 것이라고 배웠거든요.”

    그거 라이미트가 원래 메인 퀘스트에서 했던 말인데.

    씁쓸한 미소를 짓는 걸 보니 달라진 설정에서도 그 말을 라이미트가 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각계각층의 엘프들 중에서, 입이 가벼운 자들을 섞어 아빠가 관리하던 깊은 숲을 조사하게 했거든요. 아마 그곳에서 발견되겠죠. 죽었던 모험가들이나…… 엘프들의 흔적이요.”

    그녀는 과연 똑똑했다.

    라이미트의 수장 자리를 꿰찬 셈인 그녀가 아무리 ‘전대 수장은 나쁜 짓을 했다’라고 주장해 봐야 안 듣는 엘프들이 있을 테니, 직접 그 흔적을 발견하게 하겠다는 뜻이리라.

    “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요.”

    내가 그녀의 말을 받자, 앞에 알림창이 떴다.

    [메인 퀘스트 ‘대륙 남부 : 마법의 숲’ 클리어!]

    [‘세레나의 선택 : 숲의 보호’ 퀘스트를 숲 보존도 85% 이상으로 클리어하여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히든 칭호 ‘자연 지킴이’를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자연 지킴이’ 도시 밖 자연환경에서의 추가 데미지 +10%]

    “어?”

    개사기 타이틀이잖아! 난 눈을 크게 떴다.

    “두 분께서 전투를 잘 이끄신 덕에 숲의 피해가 최소화되었다고 들었어요.”

    타이틀을 보고 놀란 걸 봤는지 세레나가 말했다.

    그게 다…… 이분 덕이거든요?

    난 세레나를 향해 살짝 묵례해 보이는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일세.

    그때 세레나가 말했다.

    “그럼 약속대로, 크리스탈을 찾아드려야겠지요?”

    “아, 네.”

    자연 지킴이 타이틀 때문에 잊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나가 눈을 감았다.

    ―챠륵!

    그녀의 소매 끝에 달린 보석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우우웅!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을 닮은 연하늘색의 빛이 숲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사락, 사르륵.

    NPC 스킬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연출은 끝내줬다.

    처음에 반응한 건 근처의 나무들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나뭇잎을 인사하듯 살짝 흔드는 것을 시작으로, 그 근처의 나무들이 조금씩 나뭇가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옅은 바람이라도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그건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보다는 나무들이 서로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PC 버전이었다면 볼 수 없었을 모습이었다.

    따로 화면이 바뀌면서 동영상을 재생해 주지 않는 걸 보면.

    “와…….”

    내가 멍하니 입을 벌린 사이, 네드 님도 가만히 숲을 바라보았다.

    그도 숲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르륵, 사륵.

    나무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좀 더 이어진 후.

    “아.”

    세레나가 눈을 떴다.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찾았어요. 정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뭘? 설마?

    “불의 크리스탈은 숲 중앙, 전대 수장이 자주 있었던 곳에 묻혀 있어요.”

    벌써 찾았다고? 땅이라도 파 봐야 하는 줄 알았는데?

    멈칫했던 난 곧 깨달았다.

    아, 나무뿌리는 땅속에 있지.

    나무들과 직접 교감한다면 나나 네드 님이 굴삭기를 들고 설친다고 해도 나무들보다 빨리 땅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라이미트가 자주 있었던 곳이면 그, ‘숲의 깊은 곳’ 말씀하시는 거죠?”

    내 말에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네드 님의 손을 각각 잡더니, 눈을 감았다.

    ―우우웅!

    연하늘빛이 우리의 손등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패시브 스킬 : 남쪽 숲의 주인의 인장’을 획득하였습니다.]

    [남쪽 숲 모든 지역의 출입 제한이 해제됩니다.]

    “이게 있으면 들어가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네드 님이 가볍게 웃었다. 나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세레나가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는……, 아니, 전대 수장은 크리스탈을 지키려고 그곳에 있었던 모양이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녀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크리스탈을 발견하시면 어떻게 처리하든 숲에서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되도록 숲에서 먼 곳으로 가져가 주세요.”

    * * *

    [불 속성 크리스탈]

    나와 네드 님이 크리스탈을 찾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벌써 누군가가 파서 크리스탈을 반쯤 바깥으로 노출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스르륵.

    그 근처에서 나무뿌리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 아마 세레나와 교감한 나무들이 크리스탈을 파낸 듯했다.

    ―치이익…….

    물론 불 속성 크리스탈인 만큼, 나무뿌리들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기엔 위험한 듯했다.

    뿌리가 조금 타들어 간 나무들이 있는 걸 보면.

    “그만. 우리가 꺼낼게.”

    뿌리 타면 어쩌려고 그래? 난 재빨리 다가가서 크리스탈을 뽑았다.

    [‘불 속성 크리스탈’을 획득했습니다!]

    “으음.”

    근데 이 위치 익숙하다?

    크리스탈을 파내고 보니 익숙해서,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도 여기서, 아니 여기 바로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파삭!’

    그래, 네드 님이 통찰로 결계 발견했을 때.

    딱 이 자리에 라이미트가 있었다.

    고기를……구우면서…….

    “…….”

    저항의 정령석 때문에 불 속성 크리스탈의 영향을 받진 않지만, 주변이 이글이글하게 보이는 걸 보면 아마 이 근처는 크리스탈의 영향으로 열기가 강한 듯했다.

    어쩐지, 그 전투 난리 통에도 불붙은 장작 하나 안 날아다니고 고기는 지글지글 잘 구워지고 있더라니.

    설마 불 속성 크리스탈의 힘으로 고기를 구운 거였어?

    ‘아버지는 크리스탈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지만…….’

    세레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니, 그놈은 그냥 기가 막힌 불맛의 고기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난 그녀에게 진실은 감추기로 했다.

    그래, 크리스탈 얻었으면 됐지! 불맛 나는 진실은 넣어두자!

    “이제 네 개네요.”

    내가 인벤토리에 불 속성 크리스탈을 던져 넣을 때, 네드 님이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네 개의 크리스탈을 가지게 된 셈이다.

    남은 건 하나.

    “바람 속성만 남았네요.”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팟!

    눈앞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0